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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딸에게 거는 기대
양재규 변호사(당시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나는 대학시절 정치·사회상황에 대한 고민과 존재론적 번민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기대하는 정상적인 궤도를 이탈한 후, 특이한 삶을 살다가 다시 제 궤도로 돌아오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사법시험 합격을 기준으로 한다면 대학동기들보다 20여년 늦게 원래의 궤도로 돌아온 셈이다. 그래서 2010년 1월 대학동기들의 신년하례회에서 나 자신을 ‘돌아온 탕자’에 비유하기도 했다.
나는 1980년대 초·중반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저항감 때문에 대학졸업과 동시에 법학과는 담을 쌓았고, 좀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어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지만,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경제활동에 종사하다가 1997년 말부터 충녕(세종대왕)의 삶의 자세를 본받기로 하고서 권력이 있는 사회로 진입하기로 삶의 방향을 잡았고 마침내 법학의 길로 돌아왔다. 기존질서로 편입한 후 사법연수원 자치회장을 거쳐서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까지 맡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부족하지만 그간의 경험을 살려서 내년 1월에 있을 서울지방변호사회장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다.
대학졸업 30주년 기념문집에 실을 글을 새로 쓰자니 여의치 않아서, 많은 부분을 5년 전에 쓴 사법시험 합격수기 중에서 발췌하려고 한다.
1. 사법시험 합격까지의 인생역정
나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 덕암리에서 태어나서 무안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부산에서 사상초등학교‧구포중학교‧동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0년 3월에 서울법대에 입학하여 1987년 2월에 졸업하였고, 중간에 군대생활을 하여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복학후 4학년에 재학중이던 1986년에 행정고시 재경직 제1차시험에 합격했으나 제2차시험은 하루만 응시하고 포기하였다. 육사출신과 법대출신이 야합하여 서민대중을 억압‧수탈한다는 생각이 대학시절 내내 나의 사고를 지배했기 때문에 대학졸업과 동시에 법학과는 담을 쌓았다.
군사정권이 싫어서 해외 영업점으로 나가기 위해 1987년에 대기업에 취직했으나, 영업분야를 지망한 내 의사와는 다르게 법무실로 배치되는 바람에 사직했다. 민주화될 정보화사회에 미리 대비한답시고 안기부 공채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나 면접에 불참하였다. 1986년 여름방학 때 시작한 소설 창작을 1987년 여름 이후 1991년까지 계속했고, 1990년부터는 도스‧아래아한글‧이야기‧하이텔 등 컴퓨터 활용법에 관한 교재와 영문법 교재도 저술하였다(미발간). 詩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 말까지 약 150편을 창작하였다. 위 기간중 과외지도가 허용된 후에는 과외지도로 생계를 유지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는, 문학으로 내 삶의 족적을 남기고 일류법대를 허투루 졸업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40대 후반쯤에 변호사 자격증이나 따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2천여 쪽을 목표로 쓰고 있던 대하소설을 60% 정도 완성한 상태에서 중단하고 말았다.
1992년 봄에 출판사에서 몇달간 일했고, 그 후 1997년까지 모 여대 앞에서 소규모 인쇄기획사 겸 출판사를 운영했다. 당시에 교제하던 법학과 여학생의 권유로 대학졸업 후 11년만인 1998년부터 법학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런데 사법시험 공부를 하던 중 헌법‧민법‧형법 등 교재의 집필과 출판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 나 자신의 언어로 정리하는 습관과 완벽주의 때문에 나 자신의 책을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되었고, 책 내용이 완성되다 보니까 출판까지 하게 되었는데, 1년 반 동안 약 5천 쪽에 이르는 수험교재를 저술하여 출판하였다. 1998~1999년은 내 인생에서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한 시기였다.
2000년 봄에 컴퓨터가게 직원이 실수로 내 하드디스크를 포맷하는 바람에 한동안 상심하여 법학과 무관한 분야로 빠지게 되었다. 2001년에 제43회 제1차시험에 합격했으나, 제2차시험에는 낙방하였다.
2001년 12월부터 형소법 교재 초안을 저술했고, 2002년에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 채 제2차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갑작스런 건강악화로 인해 나의 진로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힘에 막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2002년 8월경에 모 시민단체를 도와서 불공정약관을 조사하는 일을 잠시 했고, 10월에는 부산에서 동생이 경영하던 생활용품 도매사업을 위해 엑셀을 이용하여 원가‧매출액‧순이익‧재고‧외상잔액 등을 산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2월부터 민법 개정작업에 들어갔는데, 2000년 봄부터 2001년 말까지의 시간낭비 과정이 없었더라면 민법 제2판의 독창적 생각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독창적 생각은 큰 번민을 거치는 과정이나 그 후의 사색과정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독서의 산물이 아니라 번민과 사색의 산물이었다.
2003년에 민법 제2판, 헌법 제3판, 형법총론 제2판을 출간했고, 2004년 5월에 헌법 제4판을 출간했다. 기출문제의 분석과 출제경향의 파악을 위해 카페회원들에게 제공해 오던 기출문제 해설을 묶어서 2004년 여름에 책으로 발간했는데, 헌법과 민법을 발간하고 나니 자금이 부족하여 그 후로는 종이책을 발간하지 못했다. 그 때까지 주식투자로 날린 수억 원이 못내 아쉬웠으나,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늦은 김에 사법시험에 최고령으로 합격하자는 생각에서 2003년부터 2005년까지는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최고령으로 합격하면 언론에 보도될 뿐만 아니라 사법연수원에서 자치회장을 맡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2003년 8월부터 2004년 5월까지 간헐적으로 학원강의를 했고, 그 후 과외지도를 석달 가량 한 다음 1년여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법학과는 무관하게 보냈다. 2004년 9월부터 용인시 양지면에 사는 어느 장애인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그의 소송사건을 도와 주느라 양지와 수원에 60여 차례 왕래했고, 여성에 관한 책을 비롯하여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었으며, 2004년 가을과 2005년 봄부터 가을까지는 산에서 기수련과 사색을 많이 했다. 2004년 후반의 몇몇 국가적 현안에 분개하여 허튼짓으로 허송세월한 시기였다.
2004년 가을부터 2007년까지는 여동생과 함께 사업을 영위하던 사기꾼한테 집안이 휘둘린 상황이었고, 여동생 주변인물과 관련된 사건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2006년 9월부터 2007년 6월까지는 고교동기의 기업분쟁 해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2005년 8월부터 한달간 영어공부를 하여 사법시험에 필요한 텝스점수를 확보했고, 2005년 12월부터 2006년 1월까지 회사법 초안을 저술했다.
2006년에 1개월 남짓 공부한 후 제1차시험에 합격했고, 2006년 3월부터 5월까지 회사법 집필을 완료했다. 6월에 제2차시험에 응시했고, 2006년 7월부터 11월까지 민소법 집필을 완료했다. 2006년 12월부터 2007월 1까지 어음‧수표법과 보험‧해상법 초안을 저술했고, 2007월 2월부터 5월까지 행정법 초안을 저술했다.
2007년 1개월 공부후 제2차시험에 응시하였다. 2007년 여름에는 모 대통령예비후보자의 정책실장으로 일했는데, 정당가입은 하지 않았다. 이 기간 중에 메가스터디의 고등고시‧성인교육부문 사업계획서를 작성‧제공하였다. 2007년 11월 중순에 사법시험에 필요한 텝스점수를 확보했고, 2007월 12월에 형소법 집필을 계속하였다.
2008년 초에 한달 반 정도 공부한 후 제1차시험에 응시했고, 2008월 4월에 형소법 집필을 계속했으며, 2개월 공부한 후 제2차시험에 응시했고, 8월부터 3개월간 형소법 집필을 계속하여 이를 완성하였다.
과목별로 나 자신의 사고체계에 따라 정리를 해놓고 나니, 그것을 몇번 읽어서 기억을 되살리기만 하면 합격에 필요한 점수를 획득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잘 정리된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효과적인 학습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세번의 제1차시험 합격은 한달 남짓의 공부만으로도 쉽게 달성되었지만, 제2차시험 합격은 두달 남짓의 공부만으로는 쉽게 달성되지 않았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예전에 초안을 잡아두었던 형법각론을 2008년 12월부터 2009년 3월까지 집중적으로 저술하여 완성하였다. 이후 두달 남짓 시험공부를 하여 제51회 제2차시험에 합격했고, 제3차시험에 최고령으로 합격했다.
제2차시험 합격자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 순간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동안 나 자신보다는 가족들의 맘고생이 심해서 마음이 아팠는데,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떠오르면서 더 이상 가족들이 맘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나는 신이 내게 정해둔 때가 있다고 믿으며 내게 주어지는 모든 시련을 신의 담금질로 여기기 때문에 어떠한 고통도 감내할 수 있었지만, 가족들을 고생시키는 것은 정말 가슴아픈 일이었다. 법무부가 공고한 제2차시험 합격자 통계에서 45세 이상이 1명뿐임을 발견했을 때에는 목표달성의 성취감을 느꼈다.
서울법대 출신이 최고령으로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자치회장이 된 전례는 보기 드문데, 내가 대학동기들이 하지 않은 일을 한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내가 2003년부터 최고령 합격을 목표로 삼은 점도 유별나지만, 나는 졸업후 대학동기들과는 다른 독특한 인생길을 걸어 왔다. 그런 만큼 삶의 우여곡절도 많았다.
비록 늦게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나는 여든 살 이후에도 사회생활을 왕성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50대에 새로운 인생설계를 하는 것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0년 이내에 달성할 목표와 20년 이내에 달성할 목표를 세워두었다.
2. 대학생활과 30대까지
서울법대에 입학한 후 나는 우리 사회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지도해 나가야 한다는 강한 중압감을 느끼며 학교생활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럴 만한 능력이 내게 없음을 자각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책하고 갈등하며 방황했다. 고민의 늪에 빠지다 보니 체중이 50킬로그램으로 줄어들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때는 전두환이 무력을 앞세워 정권을 잡으려던 시기였다. ‘먼저 총을 뽑는 자가 임자’, ‘힘세면 최고’, ‘돈 많은 놈이 장땡’, ‘배경이 든든해야 출세할 수 있다’ 등의 세태묘사가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게 싫었다. 부조리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해도 내가 그 중심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전공공부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대학 1, 2학년 때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 때문에 법학공부를 등한시하여 평점 2.7 정도에 머물렀으나, 대학 4학년 때에는 전공과목의 평점이 3.64에 이르렀다. 학점을 짜게 주던 당시로서는 꽤 높은 점수였다. 4학년 1, 2학기 동안 수강한 11개의 전공과목 중 A+ 1과목을 비롯하여 A가 7과목, B+가 3과목, B0가 1과목이었다.
졸업후 30대 초반까지 나는 권세와 부를 배격하며 자유롭고 창의적인 활동을 하며 살고 싶었기에 문학 창작활동을 하였지만, 사회적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나 자신의 여망과 가족‧친지의 기대 사이에서 심적 갈등을 겪으며 어정쩡한 상태로 살았다. 친지와 고향사람들은 내가 서울법대에 입학할 때에 크게 기뻐하고 장래에 대해 큰 기대를 걸었으나 10여 년이 지나도 사회적으로 변변치 못한 지위에 있자 실망을 넘어 원망을 하였다.
우리 사회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지혜롭고 근면하고 강인해야 하며 그런 사람이 국가요직을 차지하여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분발하여 세상의 중심에 서서 선정을 펼치고 세상을 밝히며 악한 사람들을 제압하고 교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당위의 현실화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과외교사 등으로 혼자만의 생계를 꾸려가다가, 가족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32세부터 자영업을 영위하였고 생활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소득을 올렸다. 사법시험 합격시까지 48년의 인생 중에서 여대 앞에서 자영업을 하던 5년 남짓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48년 중에서는 그 때에 가장 많은 돈을 벌어서 제법 여유있게 생활할 수 있었고, 여름과 겨울에는 한가하여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재산의 대부분을 날리고 문학으로의 회귀를 고려했으나, 결국 법학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종전에는 정치권력이든 사회권력이든 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겠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으나, 권력은 인간사회에서 필수적임을 여러 차례 경험하고는 인간이 속세를 떠나지 않는 한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음을 느끼고 정당한 권력을 공동선을 위해 행사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일수록 평화로운 사회가 된다는 생각을 굳혀서 1997년 말부터는 권력이 있는 사회로 진입하기로 삶의 방향을 잡았다. 태종의 네 아들 양녕‧효령‧충녕‧성녕 중에서 충녕의 삶의 자세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종전에는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양녕과 같은 삶의 태도를 가졌고, 경제적 뒷받침만 있었다면 자유롭게 삶을 즐기며 살았겠지만, 1997년 말에 국가경제의 혼란과 더불어 나 자신의 경제적 토대가 무너지면서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기존질서로의 편입을 결심하게 되었다.
3. 거듭된 실패와 목표 달성
법학공부를 하던 중 교재의 집필과 출판에 눈을 돌리게 되었는데, 1998년 12월부터 사법시험용 교재를 출판하여 판매하였으나 판매실적이 예상에 미치지 못했다.
주위사정도 내게 등을 돌리는 것 같았다. 1999년에 오피스텔에 거주할 때에는 인근 식당에서 나는 연기(실외에서 통닭을 굽느라고 장작을 태워서 나는 연기)가 머리와 눈을 아프게 하고 학습과 집필작업을 방해했다. 2000년 5월에는 두어 달간의 집필작업을 무위로 만드는 하드디스크 포맷사건이 발생했다.
2003년 말까지 주식투자를 간헐적으로 했는데, 수익을 적게 보고 손실을 많이 보는 식으로 돈을 날렸다. 시간도 잃었고 맘도 상했다.
2001년경에 시작한 여동생의 사업이 사기꾼에 의해 농락당한 것임을 2006년 봄에야 알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여동생과 나의 금전적‧시간적‧정신적 손실이 컸다.
서울법대 입학 후부터 40대 중반까지 성공한 것이라곤 10여년에 걸쳐서 완성한 체력단련뿐이었고, 저술은 성공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을 뿐 아직 성공하진 못했다. 젊은 시절에는 판사‧검사를 우습게 보았으나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변호사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1998년부터 하이텔 게시판 등을 통해서 사법시험 출제‧관리권의 이관, 시험문제와 정답의 공개, 답안지의 열람, 선택과목의 난이도 편차의 조정 등을 주장하였는데, 이것들은 당시의 행정자치부와 법무부에 의해 실행되었다.
사법시험 제2차시험에 여섯번 응시한 끝에 합격했는데, 그 과정은 힘들었다. 나는 일련의 힘든 과정들이 나를 담금질하기 위한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운동을 하여 땀을 뺌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했지만, 특히 2007년 9월부터 2년 동안은 신체단련과 극기훈련을 위해서 해발 629미터인 관악산 정상에 50여 차례 오르내렸다. 숲속을 빨리 걷는 것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타인을 추월하되 타인은 나를 추월할 수 없도록 빨리 걸은 결과, 서울대 공학관부터 연주대까지는 왕복 1시간 20분에, 낙성대 공원부터 연주대까지는 왕복 2시간 25분에 주파할 수 있었다.
수험기간 동안 가족들의 맘고생 때문에 가슴이 아팠고 예기치 않은 돌발사태의 발생으로 인한 비정형적인 상황의 전개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과 힘을 많이 허비하였으며 주위사정도 내게 호의적이지 않아서 나의 진로가 보이지 않는 힘에 막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신의 섭리에 따라 전념·정진하자’는 글을 벽에 붙여 놓고 힘들 때마다 되뇌면서 견뎌내고 극복해냈다. 실패를 겪을 때에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대학입학 이후 병약‧심약을 극복하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했고 마침내 그 목표를 달성했으며, 1998년 초부터 12년간 거듭된 실패 끝에 사법시험 최고령 합격이라는 목표도 달성했다. 어떤 상황에 있건 목표를 갖고 성실하게 정진함으로써 역경을 극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실패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미래를 향해,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게 중요하다. 나이가 들었더라도 결코 늦지 않으니 꿈을 갖고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사법시험 최고령 합격이라는 목표의 달성은 내가 장차 하려는 일을 위한 관문을 통과한 것에 불과하였다.
4. 사법시험 합격후의 활동
나를 비롯한 사법시험 준비생 다수가 로스쿨제도의 도입에 적극 반대했지만, 그런 반대의사와는 무관하게 로스쿨제도가 도입되었고, 사법연수원 41기는 로스쿨 1기와 비슷한 시기에 법조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런 탓에 사법연수원 41기는 로스쿨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더욱 더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법연수원 제41기 자치회장으로 예정되어 있던 나는 연수원 입소 전인 2010. 2.에 다른 자치회 임원 예정자와 함께 ‘로스쿨제도 및 법관임용방안에 대한 분석과 대책’이라는 문건을 통해 로스쿨 선발과정과 교육과정의 문제점, 변호사시험의 문제점, 법관임용방안의 문제점 등을 지적하고 로스쿨제도와 병행하는 사법시험제도의 존속, 로스쿨 출신들에게 변호사가 아닌 가령 “법률사”와 같은 명칭 부여, 변호사시험의 출제와 그 채점의 엄격, 법관임용방안에 대한 경과규정 철저히 마련 등을 개선방안으로 제시하였다.
유명환 당시 외교통상부장관의 자녀특채 파문으로 2010. 9. 고시생들의 고시폐지반대운동이 있은 후, 사법연수원에서 자치회장·부회장·반장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에서 로스쿨제도와 사시존치 등에 관해 수차례 논의한 결과, 사시존치에는 대체로 찬성하였지만 집단적 의견표명에 관해서는 견해가 갈리어서 이를 유보하기로 하였고, 41기 자치회장인 내가 개인 명의로 법무부장관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사법시험 존치를 위한 입법의견서’를 제출하기로 하여 2학기 시험 직후인 2010. 12. 말에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 의견서에서 나는 “서민층에 매우 불리한 입학전형방식과 고액의 등록금 등으로 인해 로스쿨제도는 서민들의 법조계 진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며, 2016년 사법시험 제1차시험을 마지막으로 하여 사법시험을 폐지하는 것은 서민들이 법조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공정사회의 취지에도 반하므로, 변호사시험법 부칙 제2조와 제4조 제1항을 삭제하고 사법시험법을 계속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사법시험을 존치시킬 것”을 촉구했다.
2011. 2.에 법무부의 로스쿨생 검사사전선발 방안(로스쿨 재학생을 시험 없이 로스쿨원장의 추천과 면접을 통해 검사로 임용하는 방안)이 언론에 보도되자, 우리 41기는 로스쿨대책위원회를 만든 후 981명의 연명으로 ‘법무부의 로스쿨출신 검사임용방안에 대한 철회를 요구한다’는 성명서를 2011. 3. 3. 발표하였고, 이튿날 이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과 14명의 위원에게 전달하였다. 나는 평화방송과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법무부의 방안은 권력세습을 위한 검사특별채용제로서 현대판 음서제라고 비판하였다. 그 후 법무부장관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그런 사전선발제는 추진할 수 없다고 밝히는 등으로 일단락되었다.
사법연수원 수료를 앞둔 2012. 1.에는 ‘사법시험 존치를 위한 입법의견서’를 41기 845명의 사법시험 존치입법 찬성서명지와 함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등에 보냈고, 일간지와 주간지에 사법시험 존치에 관한 의견광고도 게재했다. 사법연수생들이 일간지에 의견광고를 낸 것은 이것이 사법연수원 사상 최초로 보인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나는 고시촌과 연대하여 사법시험 존치운동을 벌이기 위해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변호사사무실을 개설했고, SBS, KBS 등과 사시존치에 관한 인터뷰를 했으며, 전국법과대학협의회 주최의 토론회에 참가하여 로스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법시험의 존치를 주장하였다.
2012. 11. 사법시험 존치를 공약으로 내세울 것을 조건으로 위철환 협회장후보를 돕기로 하였고, 위철환 후보가 협회장에 당선되자 2013. 2. 25. 나는 부협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여러 심포지엄·토론회와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가 주최한 공청회 등에서 나는 사법시험 존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다방면에 걸친 노력의 결과, 올해 들어 사법시험 존치 등을 내용으로 하는 ‘변호사시험법 일부개정법률안’ 3건이 국회에 발의되었다.
지난 4월에는 나와 나승철 서울지방변호사회장, 이관희 대한법학교수회장, 이석근 당시 관발협 회장을 공동대표로 하는 ‘사법시험존치 국민연대’를 결성하였고, 이 단체를 통해 사시존치 범국민서명운동을 벌이고 서울역광장에서 사법시험존치 범국민집회를 개최하였다.
이상이 내가 살아온 대략적인 인생역정이다. 글을 쓰다 보니 두서없게 되었다.
내게는 돌을 갓 지난 어린 딸(潤惠)이 있다. 뒤늦게 결혼하여 처음 본 자식이다.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으면 아예 낳지 말아야 한다’, ‘아이를 낳았다면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최대한 잘 키워야 한다’가 자녀의 출산·양육에 관한 나의 소신이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고 있다.
내 딸이 사회활동을 왕성하게 할 30~50대가 되면 내 나이는 80~100세가 될 터인데, 그 때까지 나도 건강하게 살아 활동하면서 딸의 활동을 지켜보고 싶다. 특히 내 딸이 잘 자라서 내가 못 다한 일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나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는 위대한 문학가 겸 사상가를 꿈꿨고, 30대 후반에는 세종대왕과 같은 삶을 꿈꿨다. 그러나 50대 중반으로 접어든 지금까지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남은 인생 동안 내가 무엇을 얼마나 성취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나는 성장과정에서 부모님의 정서적 보살핌과 정신적·물질적 뒷받침을 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성인이 된 후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딸은 큰 어려움 없이 위대한 일을 많이 해내기를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딸을 위해 정서적 보살핌과 정신적·물질적 뒷받침을 많이 해주어야 할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노력을 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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