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회색빛이다. 늘상 이런 날에는 막걸리를 곁에 두고 흡족하게 마셔 보는 게 제격이다. 나이를 알아가면서 조금씩 위축되어가던 세상살이가 이제는 만신창이가 되어 허허벌판에 매달려 있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혹독한 추위는 가슴을 금가게 하고는 훌쩍 사라졌다. 그렇게 살아보지 않은 인생이지만 주름살만은 출중하였고, 인생의 쓴맛을 죽을 정도로 느낀 탓인지 피부색은 검다 못해 붉었다.
세상은 불공평한 것일까? 누구는 가진 게 없어서 고생이고, 어떤 축들은 소비할 시간이 없다고 아우성이고, 모리배들은 돈놀이에 정신이 없다. 세상은 잣대로 잴 수는 없지만 저울로 눈금을 매길 수는 있다. 비록 나의 처절한 몸부림일지라도 타인에게는 메아리만도 못하는 세상, 그 중심에서 위태위태한 외줄타기 곡예처럼 조금씩 내리닫는 인생, 어디선가 처절한 인생이 끝을 내리고 있다.
대학 졸업하고도 뚜렷한 기술이 없는 나에게는 취업의 벽이 너무 높았다. 남들보다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나는 어찌 보면 취업 재수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5년 넘게 학원 강사로 생활비를 마련하며 근근히 이어가는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꿈은 있었다. 이 좁은 땅 위에다 가장 큰 음식점을 지어서 운영하고 싶은 것이다. 평생토록 많은 돈을 모아서 나이 예순에 환갑 기념으로 내 보물단지를 만들고 싶었다.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저축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끔 돈이 더럽다고 욕을 하다보면 늘 그 친구는 웃음만 흘린 채 묵묵부답이었다. 내 투정이 성가시기도 할 터이였지만 묵묵히 들어 주었다. 이렇게 모아 언제 살림 내냐고 하면 자기가 도와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던 다정한 친구가 생각난다.
그 친구는 사귄 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의외로 과묵하고 성실했다. 의대생이면 잘 뻐기고 그럴 줄 알았는데 그 친구는 달랐다. 늘 남에게 친절하고 자신보다는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참된 인간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살아졌다. 안양이라는 중간도시에서 그렇게 살다가 가버렸다. 유서 한자 남기지 않고 시꺼먼 그을음으로 화해서 영원히 떠나버렸다. 보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누구 엿먹일 속셈인지 가볍게 떠나 버렸다. 장례식장에 모인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믿지 못했다. 헤헤거리던 그의 얼굴 속에서 누구도 그의 아픔을 찾을 수 없었다. 국과수에 부검 의뢰를 하였지만 특별한 사인을 찾을 수 없었다. 왜 죽어야 했을까? 한 맺힌 죽음을 뒤로 하고 과거로 떠나 본다.
김동수라고 하는 그저 눈에 띠지 않을 보통 사람, 한 마디로 촌놈. 공부도 보통이고 운동도 보통, 얼굴도 보통 정도, 집안 형편도 그럭 저럭 먹고 살아가는 일반 가정의 맏이었다. 전기 검침원이던 아버지와 집안이 꽤 부유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다. 밑으로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들 또한 보통의 학생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젊은 날 사랑에 상처 받아 가끔 술을 드시면 대로에서 노랠 하실 정도로 대담한(?) 여장부였다. 아버지는 동수와 마찬가지로 내성적이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보통의 가장이었다.
중학교 시절, 가슴 아프도록 찐한 격정의 메아리가 동수에게도 다가왔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이야기지만 동수에게는 남달랐다. 내성적인 그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아 끙끙대며 방황할 때에 그 누구도 짐작조차 못했었다. 겉으로는 담백했지만 내심 마음이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키가 장대같이 컸던 같은 동급생 여자 아이를 남모르게 좋아하고 있었다. 얼굴도 꽤나 반반하다고 소문난 아이였다.
진수라는 여자애는 남자처럼 활달한 아이였다. 키도 컸고, 공부도 잘하였고, 역시 운동에도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난 아이였다. 여러모로 자신과는 많은 차이를 보여 주는 리더십까지 갖춘 소녀였다. 이웃 여중에 다니는 진수를 만난 것은 우연이라 할 정도로는 기회가 좋았다. 아침 등교길에 책을 읽고 가던 진수가 차를 피하다가 그만 동수의 발을 조금 밟은 것이 그녀에게 눈을 맞춘 첫 사건이었다.
"미안!"
대뜸 반말이었다. '키 크다고, 아님 지가 3학년이라서......'
깔끔한 교복을 입고 있었고, 개목걸이를 걸고 있었는데 보라색이었다. 분명 3학년이었다. 얼굴로 시선을 옮겨 갔다. 너무 예쁘다.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열기가 느껴졌다.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진수는 그렇게 애통해하는 동수를 멀리한 채 멀어져갔다.
사랑은 이상하리만치 기습적이었다. 중 3, 수험생인 그에게 진수는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였다. 반팔을 드러낸 그의 살갗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진수의 통통한 얼굴만이 전부였다. 그녀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술 수업을 남달리 좋아하던 그의 손에서 진수의 모습은 다시 태어났다. 수업 시간에도 무언가를 쫌쫌이 쓰던 동수는 선생님께 들키지 않으려고 그러는지 몸을 잔뜩 움추리고 그려내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도 수업 시간에 만화를 즐겨 그리던 그였기에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진수의 얼굴 모습을 부지런히, 정성스럽게 그려내고 있었다.
등교길이면 아침을 먹지도 않고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학교 앞 다리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명목은 친구들을 기다리는 거라고 하였지만 책을 읽고 지나가는 진수의 모습을 눈에 담아두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수업 시간에 그리고 해서 진수에 대한 추억들이 쌓여 갔다. 열쇠로 채울 수 있는 일기장에는 진수의 옷차림이, 진지한 표정이 수북히 담아들고 있었다.
소문은 이상하게 흘러 나왔다. 친구들 모두 당황했다. 아니 긴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수가 대안 여중의 류진수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일은 시작되었다.
"야! 너 누군데 매일 내 모습을 관찰하는 거야?"
드디어 팔딱팔딱한 진수가 먼저 말을 텄다. 그렇지만 얼굴만 붉히고 앉아 있던 동수는 모른척 고개를 숙였다, 물론 저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야! 너 누구냐고?"
잔뜩 언성이 묻어 났다. 모른 척 동수는 가방을 폼새나게 끼고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학교 둔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남자 시끼가 비겁하게 도망을 가! 야! 가다가 자빠져서 코나 깨져 버려라!"
심한 말이었다. 자존심을 건드릴 법도 하였지만 동수는 뒤통수가 가려운지 머리만 극적거리며 잰걸음을 놓았다.
'어떻게 알았지?'. '누구도 모르게 행동했는데......'.
뒤통수에 모든 시선이 모이는 것 같아 저절로 빨라졌다. 뛰다시피해서 교실로 들어왔는데 뒤따라오던 같은반 놈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것인가'. 하루 종일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시간은 지나갔다.
그날 저녁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무리지어 다니던 예닐곱 명이 동수의 집에 모였다. 쬐끄만 것들이 의리를 내세워 조언을 할 모양이었다. 상대가 상대 나름이지만 쉽지만은 않을 듯 싶었다. 어디선가 주어들은 사랑학 논쟁을 열렬히 뽑아냈다.
"백짓장도 맞들면 어쩐다고, 각자 좋은 생각 있으면 말해 봐봐. 열병에 폭 빠져버린 동수가 불쌍해서 눈물이 사정없이 나올려고 하니까 진지하게 얘기좀 해 보자고."
용호가 운을 뗐다.
"내가 듣기로 잘난 여자들은 강한 남자를 좋아한데. 그니까 적극적으로 먼저 애프터 신청을 해 보는게 어떨까?"
평소 틈틈히 여자학 공부를 하고 있는 철훈이가 하나의 방도를 제시하였다.
"맞아. 잘났다고 꼬리 흔들고 다니는 계집들에게는 더 강하게 보이는 것이 좋은 방법일꺼야."
대부분의 아이들이 적극적 구애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심한 동수에게는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친구들이 도와주기로 하였다.
편지쓰기, 선물 보내기, 집 앞에서 기다리기 등 그 당시의 또래들이 아는 것과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여자꼬시기 정책 대부분을 동원하였지만 동수는 진수에게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한 채 시들어갔다. 어찌어찌해서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좋아하였지만 가슴에 큰 상처만 남기고 뒤로 멀리 물러났다.
우연을 가장한 접근도 허사가 되고, 모든 방법이 통하질 않았다. 물론 동수가 어렵게 말을 건네 보았지만 닫힌 문을 열 수는 없었다. "공부나 하라고......" 비웃듯이 쏘아붙이는 진수의 말에 한 동안 넋을 빼놓고 살았다. 그래도 동수에게는 오직 진수뿐이었다.
야자를 하던 고등학교 탓이었는지 동수는 우리 나라 최고의 대학, 의대에 합격하였다. 자신감을 가지고 진수의 집을 찾아갔다. 그녀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그 사이 음식점이 되어 있었고 어디서도 동수는 진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탐문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그것은 대단한 집착이었다. 심지어 동사무소에까지 가서 진수의 소식을 들으려 하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의대를 다니면 다 그렇겠지만 개인적인 시간이 거의 없다. 수업, 실습으로 집에 얼굴 보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성적에 의해 좋은 과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 해야만 했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전문 서적을 동여 안고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완전히 진수라는 여자를 잊은 듯 했다. 내가 그를 만난 건 대학 3학년 때였다.
어느 여름날 저녁을 먹고 큰 나무 아래 벤치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자 친구와 잡담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진수야! 너 어디 가니?"
느닷없이 나타난 그녀는 큰 키에 그야말로 잘빠진 몸매를 거의 망사에 의존하다시피 하고서는 대학 도서관을 물들이는 그야말로 골빈 여자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능력 있는 놈 하나 건져서 평생을 대신하고자 하는 속물 덩어리들이 화장끼로 남자들을 유혹하는 그런 부류의 여자로 보였다.
"대학로에서 약속이 있어 지금 가고 있는 중이야! 누구니? 꽤 생겼는데." 하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기분이 엿같았다.
"태영씨. 인사해. 음대에 다니는 동아리 친구 진수야."
"안녕하세요? 경제학과에 재학중인 김태영입니다."
"안녕! 하진수예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늘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뵈니 진희가 푹 빠질만 하네요."
"무슨 말씀을, 진수씨 미모에는 비길 건덕지도 못되는데요."
"감사의 말씀, 다음에 술 한 잔 하시죠! 오늘은 시간 약속이 있어서 먼저 실례합니다."
막 진수가 계단을 내려갈려고 하는 순간
"야! 하진수! 오래간만이다."
"누구세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그가 당황하며 얼더듬었다.
"나야! 나, 김동수, 기억 안나니?"
제법 용기를 내어 말을 하였지만 묵살을 당하자 목소리가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대안중학교 3학년 김동수, 너를 쫓아다녔던......"
"아∼, 이제 생각이 난다. 그 쑥맥!"
나는 둘의 말소리에서 대충 짐작을 하였다. 아마 그 때에도 진수는 인기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진희야. 나 간다. 태영씨, 다음 주에 술 한 잔 해요. 알았죠?"
눈을 찡그리고는 상큼상큼 내려가는 진수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거둬 들였다. 대부분의 여자들도 시기하는 눈빛으로 쳐다 보았다. 진수가 그렇게 사라지고 난 뒤 그 사람은 우리 곁을 벗어나지 않고 조용히 땅만 내리깔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존재를 잊고 진희하고 소양강 여행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다시 없는 이 기회를 잃기는 싫었다. 워낙 완고한 진희의 부모님 탓에 우리 둘은 아직까지 저녁 10시 이후에 만나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진희의 부모님께서 부부 동반 유럽 여행을 다녀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2박 3일간의 강원도 순례 코스를 계획하게 되었고 그 중심지로 춘천을 잡았다.
동수는 느릿느릿 다가왔다.
"저어기, 말씀 좀 물어 봐도 될까요?"
"왜 그러시죠?"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진희가 되물었다.
"아까 만났던 진수를 잘 아십니까? 궁금한 것이 있어서 그런데요. 대답 좀 해 주시겠어요?"
"묻지도 않고 뭘 대답하라는 소리지요?"
"진수가 어느 학과에 다니고, 어디에 사는 지 매우 궁금합니다."
"제가 대답해도 좋을지 모르겠는데요. 직접 물어 보시는 게 좋을 듯 한데요."
"아까 보신 것처럼 저를 개 닭 보듯이 하거든요. 한 번 도와주는 셈 치고 학과하고 집 전화 번호 좀 알려 주십시오."
"만약 이런 일로 진수가 저를 미워하게 되면 어쩌죠?"
"야! 그러지 말고 알려 드려라.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아니야! 진수 걔 성깔이 보통 아니야. 잘못하면 뼈도 못 추려."
"집 전화 번호좀 알려 줬다고 무슨 일이 생기기나 하겠니?
"예!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의대 본과 1년에 재학중인 김동수입니다."
"아, 예! 저는 경제학과에 다니는 김태영이라고 합니다."
"저는 진희라고 합니다."
인사 소개가 끝나자마자 내 옆 벤치에 앉아서 사설을 풀어 놓았다. 자신이 하진수를 알게 된 경위부터 그간의 사정들을 10여분에 걸쳐 간략히 소개했다. 성격에 걸맞지 않게 흥분된 표정이었다. 어찌 보면 불쌍하게 보이는, 대단한 집념의 소유자로 느껴졌다.
"아! 그랬군요."
단순히 지나가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손이 떨리고 목청이 가라앉은 것을 보면 진실의 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남자이지만 나는 아직까지 여자에게는 기를 죽여가며 쫓아 다닌 적이 없어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심정만은 그득했다.
"진희야, 이 분에게, 아, 죄송합니다. 성함이?"
"김동수라고 합니다."
"동수씨에게 진수씨 전화 번호 알려줘! 나머지 문제는 내가 다 책임지도록 할 테니까."
"그래도......"
그렇게 해서 시작된 동수의 집착은 마른 장작에 불타듯 강력한 힘을 얻기 시작했다. 물론 진수가 항의 비슷한 투정을 해 오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동수는 그렇게 열심히 하던 공부도 뒤로 하고 진수의 흔적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별다른 적의 없이 잘 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태영씨, 오랜만이네요."
춘천 여행을 다녀온 후 교문을 통과할 때 진수의 톡톡 튀는 목소리를 접할 수 있었다.
"수업에 들어가세요? 시간 있으시면 저 술 한 잔 사 주시겠어요?"
너무나 황당한 일이었다. 오후 1시에 어디 가서 술을 먹자고 하는 소리며, 왜 나를 붙잡고 그러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수업도 있고, 지금 시간에 술집 문 열어 둔 곳이 없을 텐데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시고 어째 사 주실래요?"
직접적이고 당돌했다.
"그러시죠."
"그런데 이런 대낮에 술을 드시고자하는 이유는 뭡니까?"
"꼭 이유가 있어야 술을 먹나요! 기분이 꿀꿀하니까 한 잔 빠는 거예요."
"언제나 말을 그렇게 시원스럽게 하십니까?"
"제 말투가 이상하나요? 남들이 많이 그러더라고요.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
"아니 괜찮아요. 워낙 많이 들어서 이상할 것도 없어요."
그렇게 만남은 시작되었다. 진희에게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걱정이 되었지만 별 이상한 관계가 아니므로 스스로 위로했다. 골목길로 사정 없이 들어가서 보니 조용한 경양식집이 있었다. 바로 맥주를 주문했다. 아늑하고 깨끗했다. 까라 앉는 음악과 몇몇 손님들이 조용히 그들만의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김동수 그 자식한테 제 전화번호를 알려주셔서 덕분에 이렇게 고생이 심합니다.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떨어지질 않으니 태영씨가 해결하세요. 싫어하는 사람이 매일 따라다녀서 귀찮아 죽겠습니다."
"아니 왜 그 사람을 싫어하시죠? 제가 봐서는 남자답고 괜찮아 보이던데요."
"감정상의 일을 제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어요. 그냥 싫어요."
"그러지 말고 싫은 감정을 버리고 봐 보세요. 그러면 달라질 겁니다."
"그냥 싫어요. 태영씨가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는 그렇게 인기 있는 사람이 못돼서......"
"놀리시지 말고, 어떻게 하면 그 찐득이를 떨칠 수 있을까요?"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의사 고시에 합격하면 만나주겠다고 그러시죠. 시간도 많이 남아 있고 그러다 보면 감정이 정리되겠죠."
"그것도 좋은데요. 오늘 당장 말을 해 줘야지. 참 그리고 진희하고는 잘 되어갑니까?"
"뭐 잘될 거라도 있습니까?"
"저랑 사귀어 볼 생각은 없으세요? 저는 태영씨가 무척 좋은데."
너무 당돌한 말이었다. 성격처럼 꾸밈 없는 태도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너무 충격적인 말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할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왜 싫으세요? 아님 진희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죄송하지만 뭐라고 말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당황스럽군요."
"생각할 시간을 드릴까요?"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저와 진희는 3년을 사귀어 왔고 별다른 사항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진수씨 성격도 확실하고 미모도 뛰어난데 저 같은 놈에게 신경 끊으시고 더 멋진 사내를 알아보시죠."
"기분 댑따 꿀꿀한데요. 제가 지금 딱지 맞은 건가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친구처럼 지냅시다. 나는 누구에게 구속당하는 것은 싫으니까요! 진희도 친구로 지내는 것이지 결혼을 전제로 하는 그런 만남은 아닙니다. 저는 능력이 부족해서 누구 간사할 줄을 모릅니다."
"위로하실 생각은 하지 마세요. 진희에게서 듣기로는 그보다 더 깊은 사이 같은데요."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저는 아직까지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믿든 안 믿든 그건 자유입니다."
"그럼 저에게도 기회는 있다는 말씀이네요?"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진수가 꽤 취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계속 단번에 비워대는 바람에 술을 채워주기 바빴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진희가 알아서 좋을 일이 못되었다. 잠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학교 앞 서점에 갔다. 특별한 약속은 메모하는 시대라 진희에게 몇 자 남겨야만 했다. 항시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먹는 상태여서 도서관 지정석이 빈 자리로 있는 경우 마음을 잡지 못 할 것이 뻔했다.
<진희야! 난데 지금 경양식 집에서 진수랑 술 먹고 있다. 연락처는 812-3638이다. 전화하고 와라. -太- >
막 메모를 하고 돌아서는 순간 동수의 축 쳐진 어깨가 들떠 왔다. 너무 반가웠다. 해결하지 못한 고통을 한 번에 날릴 수 있었다. 우선 잔머리를 굴렸다. 진수가 곡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아주 지나친 우연을 만들어 내어야 했다.
"어이, 동수씨! 저 좀 봅시다."
동수는 밥을 막 먹어 졸리운 표정으로 도로를 건너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좋은 일거리를 만들어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시간이 없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아니 괜찮습니다. 수업이 3시부터니까 2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요! 그럼 지금 저랑 같이 갑시다. 점심 드셨습니까?"
"예. 지금 후배랑 먹고 나오는 길입니다."
"맥주 한 잔 정도는 하실 수 있겠죠?"
골목길을 찾아 넘어 가보니 테이블에 거의 엎드려서 흐느끼고 있었다. 술을 먹어 주사를 부리는 건지, 속상한 일이 많아서 그런지 보기가 딱했다.
"동수씨, 저는 갑니다. 잘 해보세요."
"아니, 같이 있지 않으시고요? 저 혼자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
"아니, 혼자서 하셔야 해요. 저는 먼저 갑니다. 건투를 빕니다."
속삭이고는 꽁지 빠지게 튀어 나왔다. 불안하기도 하고 웃음도 나왔다. 서점 앞에서 조금 기다리다 보니 진희가 내려 왔다. 그간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물론 진수의 고백은 삭제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진수와 동수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런 일도 있나!
너무 궁금했다. 그렇게 싫어하던 남자와 다정하게 교정을 걸어가는 당당한 진수의 모습에서 이제는 다소곳한 숙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이때부터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일요일에는 일찍 만나서 수목원을 가기도 하고 극장에 가서 떼로 영화도 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진수는 술도 적게 마시고 동수의 분위기를 잘 맞춰 주는 진짜로 어울리는 한 쌍의 원앙이었다.
동수가 졸업을 하고 군의관으로 입대하자 아예 결혼식을 올리자고 진수를 졸라댔다. 결국 양가 부모님의 동의 속에 제법 성대하게 치뤄졌다. 동기들 중에 처음이어서 그런 지 많은 친구들이 참석하였고, 나도 부러움의 흘림으로 시간을 마무리 하였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후 졸업을 연기한 나는 세계 배낭여행으로 2년을 소모했다. 나이가 많아 취직 제한 나이에 걸리게 되었다. 여기 저기 이력서를 넣다 보니 초라한 중소 기업에서는 어서 오라고 하고 번듯한 대기업에서는 늘상 외면하다시피 했다. 원서를 들고 다니는 것조차 귀찮을 지경이 되자 저절로 학원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과외를 해본 경험이 많아서 학원에서의 수업을 그런 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너무 늦게 시작해서 늦게 끝나는 시간 때문에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고 친구들이 한창 결혼을 할 때쯤에는 중간 고사 대비로 주말도 학원에 헌납하고 아이들과 씨름을 해야 했다.
삶의 낙은 오직 학생들과 공부로 씨름하는 것 뿐이었다. 친구들과 차츰 연락이 끊기고 진희하고도 멀어졌다. 혼기가 꽉 차버린 처녀를 집에서 가만 둘 리 없었다. 진희도 소개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한 후라 더더욱 쓰라린 가슴을 부여 잡고 독수공방을 메꾸어 나갔다.
돈도 못 벌고, 몸은 몸대로 상하고, 시간은 제 갈 길로 흘러가고, 늘 혼자였다. 매일 학원 선생들과 밤 늦게까지 당구에 술로 세상을 잊고자 하였다. 새벽이 아닌 아침에 연락되는 친구들과는 주말에 가끔 끌려가다시피 해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외박을 하고, 일요일 오전을 술 깨느라 소비하면 어느 새 월요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진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자는 것이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주중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주말에 만나자고 하였지만 낮이 좋으니까 당장 만나자는 것이었다. 안양에 같이 살면서도 되도록 만남을 피했다. 취직을 못했을 때는 용돈이라도 구걸하고자 찾아갔지만 지금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다는 것을 못 느껴 되도록 연락하는 것을 자제하던 차였다.
2층 커피숍에는 말끔하게 차려 입은 진수가 먼저 나와 있었다. 아들을 둘이나 나았는데도 처녀티가 물씬 풍겼다. 의자에 앉자마자 모른 척 창 밖을 보던 진수가 고개를 돌려 인사를 해 왔다.
"뭐 좀 마실래?"
"그래, 차나 시키자. 나는 유자차."
"나는 커피 주세요."
"어쩐 일이냐? 깨가 쏟아진다고 하더니 볶을 깨가 없어서 거덜난 나에게 빌리러 온 것도 아니고. 말이나 들어 보자."
"다름이 아니라 요즘 우리 남편하고 통화하거나 만난 적 있니?"
"아니, 아마 2년 정도는 연락도 없었던 것 같은데......"
"요즘 이상해졌어. 집에 와서는 한 마디도 안 하고, 물어도 대답하는 것조차 귀찮아 해. 그래서 몇 몇 친구들에게 물어 봤는데 웬 과부를 만나고 있데. 속도 상하고 그 여자가 뭐 하는 여자냐고 물었더니 잘 안 가르쳐줘서 너하고 같이 그 여자를 만나고자 하는데, 나 좀 도와주겠니?"
"아닐꺼야, 동수가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는데......, 확실하니?"
"물론! 내가 여기 저기서 들은 소식을 종합해보면 분명해. 중학교에 다니는 자식하고 초등학생해서 둘이나 있다고 하던데......"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고 하는 소릴 지도 모르잖아. 동수는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잖아"
"나도 물론 아니라고 믿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이 옷에서 다른 여자의 체취까지 느껴지는 걸"
"어디서 사는 지는 알아?"
"산본 신도시 주공 2단지라고 하던데"
"그 곳은 소형 평수라서 부유층이 사는 곳도 아닌데......"
"여자가 술집에 나가서 번 돈으로 아이들을 키운데. 내가 그 여자보다 뭣이 부족해서 그런지 이해가 안 돼"
"모르지......"
찝찝한 기분으로 그 곳을 서둘러 빠져 나왔다. 내가 가야하나 고민이 되었지만 부탁하는 것을 매몰차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택시로 가는 길에 창밖이 뿌했다. 스모그 때문인지 멀리 하늘이 잿빛을 띠고 있었다.
산본역을 앞에 두고 신호에 걸린 창 밖에는 분주한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땅을 쳐다보고 걷는 사람,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 가는 사람, 귀에 이어폰을 끼고 고개를 흔들며 가는 사람, 사람들이 달랐다.
아파트 진입로를 들어 가니 조그마한 상가가 초라하게 비닐을 펄럭이며 손님을 맞았다. 조그마한 미용실에는 손님이 꽉 차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의외로 수퍼는 한가하였고, 떡볶이 집에는 초등학생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군것질꺼리가 조용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벨을 누르자 시큼한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어느 아줌마가 음식 찌꺼기를 방금 전에 내다 버린 모양이었다. 17층에 멈췄다. 양쪽으로 4집씩 옹기종기 모여 있고 방안에서 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여과 없이 들려 왔다. 그래도 이런 집이라도 있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 잡고 싸우면 어떻게 하지?' 괜히 가슴이 조아리고 쿵쾅거렸다.
'1704호' 운명의 번호였다. 벨을 누르자 안에서 응답이 왔다.
"누구세요?"
"잠시 여쭤 볼 말이 있는데요."
"잠시만요"
"저기 혹시 김동수씨라고 아세요?"
그 여자는 고개를 수그리더니 방 안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음료수를 따라 와서는 다소 곳이 진수 앞에 앉았다. 누가 말을 먼저 꺼낼 지 모르지만 상당한 인내심과 시간이 필요한 분위기였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 여자였다.
"죄송합니다. 그 말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진수도 의외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가게에 단골로 오시던 분인데 몇 번 술을 먹다 보니 가깝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오늘과 같은 일이 생긴 것 같군요. 저도 피하고자 하였지만 잘 안 되더라고요."
"누굴 탓하겠습니까? 제 잘못도 큰 걸요."
그냥 나오려고 하는 걸 말렸다. 막무가내로 진수는 나가고 나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아줌마, 솔직하게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왜 동수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는 지 모르겠네요."
"그건 직접 들어보시는 게 좋을 듯 싶은데요. 저도 잘 몰라요."
그렇게 힘 없이 그 집을 나왔다. 3시까지 출근인데 일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진수를 보내고 시간이 남아서 동수에게 찾아가볼까 하다가 그만 두기로 하였다. 아직 내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참기로 했다. 학원으로 출근을 하였다.
동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마 진수하고 대판 부부싸움을 한 것 같았다. 진수 성질에 가만 참고 있지는 못했나 보다. 새벽 1시에 충혈된 눈으로 '그 여자네 집'에서 연신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낯설어 보였고 초라해 보였다. 돈 잘 버는 개인 병원의사의 모습은 어데 가고 시름에 묶인 힘겨운 중년의 사내가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오냐? 수업은 다 끝나고 나오는 거니?"
"웬 술을 그렇게 먹냐. 몸 상하니까 자중해라."
"태영아! 나 삶의 낙을 잃은 지 오래다."
"뭔 소리니? 네가 좋아해서 한 결혼생활이니까 잘 살아야지. 문제는 누구에게나 있는 거잖아. 안 그래?"
"결혼도 하지 않은 네가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나. 나도 문제가 뭔지 모르겠다. 진수가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하고는 안 맞아. 뭐가 뭔지 모르겠어."
술자리는 깊어만 갔다. 해답은 보이질 않고 횡설수설하는 동수의 모습에서 안타까운 감정을 놓칠 수 없었다. 대화도 통하질 않았다. 완전히 취해버린 채 엎드려 자는 동수가 무슨 고민인지는 몰라도 나에게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술집 주인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문제는 아니었다. 모른 척 넘어 갈 수 있었으면 싶었다.
주인은 낯설게 다가와서 동수를 깨워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선 진수에게 전화를 하고 데려다 주기로 했다. 업고서 지하 계단을 올라오는데 약간은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콜 택시를 불러준 덕택에 쉽게 아파트로 왔다. 진수가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수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잠이 들지 않아 고생을 했지만 뒤척이다 얼결에 잠들어버렸다. 꿈 속에서 많이 혼이 났는지 식은 땀까지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이었는데 기억이 아스라하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먹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학원 생활을 하다보니 동수의 일을 잊고 있었다. 전화를 해서 잘 해결되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부부싸움에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왈가닥이던 진수가 성질 죽여가며 동수하고 사는 게 신기하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부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여자들에게는 가정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소리를 들었었지만 자기 성질까지 참아가며 다소곳이 순종하는 진수가 대견하게 보였고 동수의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바쁘게 조카 생일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기집애가 전화만 하면 선물 타령을 늘어 놓는다. 조카에게 정이 쏠리던 터라 꽤 많은 선물 공세로 형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5층 완구 코너에서 이것 저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다. 무시하고 큼직한 엽기토끼 인형을 골라서 막 귀퉁이를 돌아 서는데 진수가 앞을 막고 있었다.
"참 무디다. 내가 10분 넘게 보고 있었는데도 모른 척 하다니......"
"어쩐 일이야?"
"꾸리꾸리한 기분좀 달래 보려고 나왔어."
"얘들은?"
"애기 봐주는 사람이 잘 보고 있겠지, 뭐. 근데 넌 어쩐일이야. 숨겨둔 딸이라도 생긴거야?"
"조카 생일이라 선물이라도 할려고."
"어디 가서 커피나 한 잔 하자."
백화점 7층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갔다. 점심 때라 그런지 사람이 한산했다. 유난히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다리가 얘 둘 낳은 아줌마로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동수하고는 화해했니?"
"그런 게 뭔 필요가 있어. 지금 우리 별거 중이야. 말도 안 해."
"부부 사이에 말도 안하고 지내면 답답할 텐데,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니?"
"나도 이제 지쳤어. 이제부터는 내 성질대로 살아갈꺼야. 남편같지도 않아."
"문제가 뭔지 모르지만 화해하고 오순도순 살아라. 결혼 안 한 내가 부러워서 빨리 장가 갈 수 있게"
"참, 장가 안 갈꺼야. 만나는 여자 아직도 없어?"
"아직 생각이 없어. 이제 익숙해져서 살기 괜찮아."
"나도 홀로서기 연습을 해야 할 듯 싶다. 뭐 해서 밥 먹고 살지? 걱정도 되고 한편으론 자신감도 생기고, 혼란한 상태야. 빨리 이혼 수속을 끝내야 할까봐."
"그 지경까지 간거야? 내가 나서서 이혼은 막아야 하는 거 아니니?"
"그럴 필요 없어."
한참을 그렇게 보냈다. 예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무거운 분위기였었다. 학원에 가야할 시간이 넘어가고 있지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나간다면 진수가 너무 가엾어서 수업을 못할 것 같았다. 전화를 했다. 집에 중요한 일이 생겨서 오늘 하루 수업을 빼야겠다고 했다. 알았다고 했다. 진수는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었다. 자리를 옮겼다.
친구의 부인과 단 둘이서 호프집에 갔다. 부부처럼 보일 리 만무했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별 말 없이 술만 비워댔다. 2차, 3차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진수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리고 둘이서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 없었다. 얼핏 껴안고 키스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닐 수도 잇었다.
그날 오전에 이상한 전화가 왔다. 잠결에, 술기운에 들었을 소리로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대학교때 몇 번 보았던 동수 고등학교 친구였다. 내 전화번호를 어찌 알았는지......,
"동수가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안양 시립 장례식장에 시신이 안치되어 있으니까 그 쪽으로 오십시오."
용건만 남기고 끊어버린 전화기 뒷맛이 씁쓸했다. 세상이 엉거주춤한 모양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 어찌하라 하는 건지, 세상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중심에서 밀치고 있었다. 나 혼자서 멀어져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노인네가 되어 버린 부모님 두 분이 영정 앞에 앉아 울고 있었다. 진수는 하얀 소복을 입고 우두커니 벽에 등을 기댄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분향을 하고 한 마디 말도 없이 그 곳을 빠져 나왔다. 아는 친구가 있었지만 자리를 지키고 싶지 않았다. 너무 뒤끝이 좋지 않았다.
주차장까지 나오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뒤죽박죽이었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 지 난감했다. '왜?', 의문은 가시질 않았다. 사람들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마력이 장례식장에는 있나 보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야 했다.
"태영아"
돌아보니 진희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안고 왔다는 군더더기를 듣고 고개만 끄덕였다. 마주 보면 뭔가 설레이는 그 무엇도 없었다.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여자, 아기까지 안고 있는 그 여자'. 아루런 감흥이 일지 안았다. 그녀를 잊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동수, 왜 죽은지 아니?"
"아니!"
"나는 알아. 그런데 너에게 알려줄 수가 없어."
"무슨 뜻이지? 나에게 알려 줄 수가 없다고?"
"나중에 식이 끝나면 진수에게 물어봐. 진수는 아마 알고 있을 거야."
모호한 의문점만 남기고 진희와 헤어졌다. 학원으로 출근하는 길에 여러 가게에 들렸다. 꽃도 사고, 과자, 사탕도 듬뿍 사서 차안을 가득 채웠다.
수업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다보면 다 잊혀지겠지.
진수에게 연락하지는 않았다. 물론 진수에게서도 연락이 오질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서서히 기억에서 사라지고 동수에게는 미안한 마음만이 들었다. 내가 그를 죽게 한 원인이 되었다는 생각에 처연해지곤 했다. 가끔은 세상을 살면서 더 잘 살아야 한다는 헛된 생각도 해 보았다.
삶의 길은 열려 있다. 이제는 서서히 사라져갈 내 그리운 친구에게 조그만 넋두리로 밤을 선사한다. 벌써 밤이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