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요 연속듣기 모음곡
김영임 민요
모음곡 1: 강원도 아리랑 2: 관서천리 3: 군밤 타령 4: 꽃 타령 5: 노들 강변 11: 송학사 12: 신고산 타령 13: 양산도 14: 어부의 노래 15: 임 타령 16: 정선 아리랑 17: 진도 아리랑 18: 창부 타령 19: 칠갑산 20: 까투리 사냥 21: 태평가 22: 한 오백년
장민 민요 12곡모음곡 1.태평가 2.궁초댕기 3.한오백년 4.뱃노래 5.맹꽁이 타령 6.몽금포 타령
12곡모음곡 한 오백년/ 아리랑/ 군밤타령/ 능수버들/ 뱃노래/ 청춘가/ 창부타령 / 노들강변/ 밀양아리랑/ 태평가/ 양산도/ 닐리리아
민요
김세레나모음곡 / 새타령 / 꽃타령 / 성주풀이 / 잘했군 잘했어 / 갑돌이와 갑순이
● 출처 : KDBS-TV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 정조때 문신으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다.
그는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저서로는 그의 유배생활 중에 저술한 <목민심서>,<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이 포함된 <여유당전서> 등이 있다.
정약용 선생은 현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났으며, 정조때에 벼슬길에 올라 많은 업적을 남겨 놓고 있는데 당시 정조의 수원화성 행차시 사용한 한강 부교를 만든 것을 비롯하여 거중기를 개발하여 수원화성을 축성하는데 사용하는 등 과학적 지식과 식견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사후 노론의 표적이 되어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그의 형 정약전과 함께 유배되어 18년간 전남 강진 등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가 유배생활을 주로 했던 곳으로는 그의 외가인 고산 윤선도 고택이 있는 해남의 녹우당과 가까운 강진만 기슭의 다산초당이다.
다산초당은 강진만을 내려보고 있는 곳으로 생전에 그가 살았던 남양주의 집인 여유당 뒷동산과 비슷한 분위기를 주는 곳으로 고향 생각을 하면서 그 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 선생의 묘역또한 한강을 내려다 보는 남양주 다산유적지 뒷동산에 자리잡고 있다. 1. 남양주 여유당,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살던 집
'ㄱ'자 형 안채와 대문과 행랑채와 붙어 있는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는 이 저택은 중부 지방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랑채는 앞면 5칸의 '-'자형으로 생긴 크지 않으면서 앞,뒤로 문이 있어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안채는 'ㄱ'형으로 되어 5칸규모이다. 건물 자체는 화려하지 않으면서 단정한 느낌을 주고 있다. 현재의 여유당 건물은 당시의 건물은 아니고 1986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다산 선생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지은 집이라고 하는데 생가가 맞는지는 설명이 잘 되어 있지 않아 헷갈리는 부분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높은 벼슬을 했던 사람이지만 이 건물은 그런 느낌은 주지 않는 평범하면서 잘 만들어진 집으로 보인다. 'ㄱ'자형의 된 남양주 여유당의 안채는 앞면 5칸으로 되어 있으며, 그 중 3칸은 마루, 2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안채 마루가 상당히 넓은 구조로 되어 있다. 앞면 5칸으로 이루진 다산 정약용 선생이 주로 머물렀던 공간인 사랑채는 손님을 맞을 수 있도록 개방된 구조로 되어 있다. 1개의 큰 방과 2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내부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손님 맞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2. 창덕궁 궐내각사(규장각) 정조대왕 재위 시절 다산 정약용 선생과 관련이 많은 창덕궁 궐내각사에 있는 규장각 3. 수원화성,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개발한 거중기를 사용해서 쌓은 대표적인 성곽
기존에 화강암으로만 쌓던 축성양식에서 벗어나 석축으로 쌓은 석성과 구운벽돌로 쌓은 전성의 형태를 지형과 용도에 맞게 적절하게 섞어서 축성하였다. 축성 공사에는 다산 정약용이 서양의 것을 응용한 거중기가 사용하였으며,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는 성곽으로 그 축성과정이 의궤 등 다양한 자료에 상세히 남아 있고, 조선의 성곽 축성 기술이 집약된 것으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인정되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산유적지 앞 도로에 전시된 거중기(복제품) 4. 강진 다산 초당, 유배생활을 하면서 저서 <여유당전서>를 완성한 곳
이 곳 강진의 다산초당은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가장 오랜기간 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다산의 외가에서 마련해 준 거처라 한다. 다산은 녹우당의 주인이자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증손자로서 녹우당이 있는 해남은 이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에서 다산의 실학사상을 정리하고 많은 책을 집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곳 다산초당에서 내려다 보는 강진만으로 풍경은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다산 생가가 있는 양수리 부근 한강의 풍경과 조금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다산이 고향과 비슷한 곳에 터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산 정약용선생이 직접 글씨를 새겼다고 하는 정석. 다산초당 앞 뜰에 있는 직접 차를 달였다는 '청석' 다산초당 왼쪽에 있는 자그마한 연못. 다산 선생이 직접 조성했다고 한다. 다산초당 아래에 있는 귤동마을 5. 강진 다산초당 천일각, 고향생각이 날 때 강진만을 내려다 보던 곳
이 곳에서 보는 강진만은 넓은 바다는 아니고, 다산의 고향이자 생가인 양수리 부근 한강변의 다산생가 뒷동산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아마도 다산은 이 곳 정자에서 고향생각을 많이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산초당의 사랑채격인 동암에서는 다산이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건물은 다산초당과 같은 시기에 복원한 건물이다.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내려다 본 강진만 6. 강진 백련사, 다산초당과 함께 있는 고려말 백련결사 운동의 중심지 다산초당에서 강진 백련사로 걸어가는 길에 조성된 동백나무 숲. 아마도 다산선생이 이 곳에 있을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백련사는 백련결사운동을 이끌었던 고려시대의 사찰이 계속 이어져 온 것은 아니고, 고려말에서 조선초의 왜구의 침입으로 폐사되었다가 세종때 재건되었다고 한다. 백련결사운동이란 고려시대 문벌과 결탁한 보수적인 교종세력에 맞서서 민중에 기반한 실천적인 불교를 표방했다고 한다. 당시 지눌이 주도한 선종 중심의 조계종과 함께 대표적인 불교개혁운동이었다한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시절에 다산초당에서 가까운 이 곳 백련사를 자주 들러 차를 마시고 백련사 주지와 대화를 나누곤 했다고 하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많은 사찰이다. 이 곳 백련사 경내에 올라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면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강진 백련사에서 내려다 본 강진만 7. 녹우당, 다산 선생의 외가인 해남 윤씨 고택 (고산 윤선도 선생 유적지)
녹우당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솟을대문이 정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고, 고산 사당이 있는 동문쪽으로 들어서면 'ㄷ'자형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 지역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많은 외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8. 남양주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
다산 유적지 뒷동산에 마련된 선생의 묘소. 지금은 팔당댐으로 막힌 호수같은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다산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 9. 남양주 다산유적지 주변 팔당호
정약용(丁若鏞, 1762년 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 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翁)·태수(苔?)·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가 있다.
1776년에 승지 흥화보(興和輔)의 딸 풍산 홍씨와 혼인하여 6남 3녀를 낳았으나 4남 2녀를 잃었다. 누님의 남편으로 여섯 살 위인 이승훈, 큰형의 처남이며 여덟 살 위인 이벽과 친하게 지내면서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다. 이승훈은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李瀷, 1629~1690)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에게서 성호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결혼하던 해에 부친이 벼슬길에 다시 나가게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 살게 되었다. 16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19세 때는 예천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같은해 음력 9월 장남 학연이 태어났다. 22세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학문이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3세 때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25세 때 차남 학유가 태어났다. 1789년(정조 13)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를 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승정원의 가주서, 예문관 검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시 해미면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31세이던 1792년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고 이듬해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천주교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교우 강완숙등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전교를 하다가 적발된 주문모 사건에 휘말려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지, 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는데,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던 것이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신유박해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으로,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鐵身)·이승훈(李承薰)·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 등이 연루되었으며, 이 박해에 정약용과 그의 두 형인 정약전(둘째 형), 정약종(셋째 형)도 연루되었다.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무관심한 비신자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장형을 받던 중 죽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말년
이와 같은 문견(聞見)과 경력은 그의 사상에 현실적인 인식과 자료로 제공되었다. 다른 실학자들처럼 성리학·천문·지리·역상(曆象)·산학(算學)·의복(醫卜)에 관련된 저서는 물론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은 모두 다산학(茶山學)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사상의 총괄 편으로 정박명절(精博明切)하며 탁견(卓見)이 아님이 없다.
양경 자른것을 슬퍼하며..."다산 정약용의 애절양 (한시) 감상문 정약용의 애절양은 조선후기 백성이 양경을 자른것을 보고 슬퍼하며 지은 시라 합니다.
양경을 자른 기막히고 엽기적인 백성의 사연을 슬퍼하며 지은 한시 정약용의 애절양.
200년전 부정부패가 판을 치던 조선후기 와 현재. 애절양이 많은걸 느끼게 해줍니다.
애절양 哀絶陽 (양경을 자른 것을 슬퍼하며)
다산 정약용 (丁若鏞 ) 애절양 哀絶陽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길게 우는 소리. 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 출정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해도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네 舅喪已縞兒未澡(구상이호아미조)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갓난아인 배냇물 도안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薄言往愬虎守閽(박언왕소호수혼) 억울한 하소연 하려해도 관가 문지기는호랑이같고, 里正咆哮牛去早(이정포효우거조)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蠶室淫刑豈有辜 (잠실음형기유고)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민건去勢良亦慽 (민건거세양역척) 민나라 자식의 거세도 진실로 또한 슬픈 것이거늘 生生之理天所予 (생생지리천소여)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乾道成男坤道女 (건도성남곤도여)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선馬분豕猶云悲 (선마분시유운비)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다 할만한데 況乃生民思繼序 (황내생민사계서)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랴! 豪家終世奏管弦(호가종세주관현) 부자집들 일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粒米寸帛無所損(립미촌백무소손) 이네들 한톨 쌀 한치 베 내다바치는 일 없네.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客窓重誦鳲鳩篇(객창중송시구편)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읇노라.
정약용의 애절양을 읽고,,, (정약용 애절양 감상문)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시 였다. 남자의 양경를 잘라서 슬퍼한다는 제목이 요즘세태 언어로 표현 하자면 엽기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엽기적인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약용이 정치가로써 학자로써 당대 지식인으로써 백성의 슬픔을 시로 지어냈다. 이시는 계해년(1803)에 지은 것 이라 나와 있는데 그 당시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를 살고 있었다. 자신이 유배지에 있음으로 힘도 없고 권력도 없어 어찌할 수 없다는 쓰라린 심정이 엿보인다.
이런 참혹한 현실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후기, 나라의 기강과 정책이 흐트러질 때로 흐트러져 부정부패가 판을 치던 세상이라 볼 수 있다. 남자가 스스로 자신의 남근을 자른다는 것은 미치지 않고 는 할 수 없다고 생각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남근을 잘랐다는 것은 백성들이 미쳐버릴 정도로 당시의 탐관오리들의 폭거가 얼마나 잔혹했었는지 상상되어진다.
남편이 스스로 자른 남근에서 피가 뚝뚝떨어지는 모습, 그 모습을 보고 그의 아내는 얼마나 기막히고 슬퍼했을까? 그러나 그런 남편을 탓하지도 못하는 현실, 이제 그의 아내는 자신의 참담함에 악에 바쳐 피에 엉킨 남편의 남근을 손에 쥐고 군청으로가서 군수에게 끌려간 소를 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군수를 만나기는 커녕 군청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포졸들에게 얻어맞고 한손에는 피범벅이 된 남편의 남근을 꼭쥐며 쫒겨나는 모습이 상상되어진다.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대립, 백성과 관청의 갈등, 썩어가는 세상이 느껴진다. 예전에 내시(환관)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들이 환관을 시키려고 남근을 잘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있다. 그것또한, 인간으로써 하기 힘든 일이라 할 수 있다. 말이나 돼지의 생식기를 까서 성장을 촉진 시키는 것도 슬픈데 하물며 사람의 생식기를 자르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모두가 똑같은 백성인데 부자들은 쌀 한톨, 비단 한치 바치지 않고 풍악을 울리며 즐기고 못난 백성들은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 현실에서 봐도 상당한 호소력을 띠고 있는 것 같다.
당시 다산 정약용은 애절양 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억울함, 애환, 고난 등을 대변하는 여러편의 시가 쓰여진 것으로 알고 있는 데 누구는 그리 귀해서 편하게 살고 누구는 그리 하찮아서 그리 힘들게 사는 가 하는 당시 억울한 모든 백성들의 함성을 대변했으리라.
당시 정약용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정조때는 사람을 알아본 정조가 정약용을 크게 썼으나 정조가 죽고난 후, 탄핵을 받아 귀양살이를 전전하여 자신이 힘도 없고 권력도 없고 귀양살이하기에도 힘든 형편에 백성들의 억울함을 해결해줄 수 없는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客窓重誦鳲鳩篇(객창중송시구편)'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읇노라' 라고 표현한거 같다. 자신의 어쩔수 없음을 시구편을 통해 거듭거듭 읇으며 괴로워 하는 모습이 상상된다.
한시를 접할수 있는 기회가 별로없고 지루하고 어렵다고 생각해서 내용을 봐도 이해하기가 힘들거라 생각했던거와는 달리 그 어떤시 보다도 이해가 빨리되고 연상되는 상상까지 하게 만들었던 시였다.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그 어떤 구체적인 설명보다도 정약용의 애절양 한편의 시로 더 가깝게 알게 된 느낌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백성들의 현실, 지은이의 괴로움 심정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정약용을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200년 후, 200년이 지난 지금, 지금도 애절양 에서 나오는 있는자의 횡포는 계속 되고 있다. 얼마후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뽑는 선거들이 있을것이다. 개인적인 바램으로 우리가 뽑은 사람중에 정약용을 닮을 사람이 나와주길 바란다. 그러나 그에게 애절양같은 시를 쓰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산 정약용 (丁若鏞 )은 1803년 哀絶陽(애절양)-男根을 자른 것을 슬퍼함-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목민심서에 실었다.
蘆田少婦哭聲長
노전소부곡성장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길게 우는 소리. 哭向縣門號穹蒼
곡향현문호궁창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夫征不復尙可有
부정불복상가) 출정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해도 自古未聞男絶陽
자고미문남절)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네 舅喪已縞兒未澡
구상이호아미조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갓난아인 배냇물도 안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
삼대명첨재군보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薄言往愬虎守閽
박언왕소호수혼 억울한 하소연 하려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같고, 里正咆哮牛去早
이정포효우거조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磨刀入房血滿席
마도입방혈만석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自恨生兒遭窘厄
자한생아조군액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蠶室淫刑豈有辜
잠실음형기유고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閩囝去勢良亦慽
민건거세양역척 민나라 자식의 거세도 진실로 또한 슬픈 것이거늘 生生之理天所予
생생지리천소여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乾道成男坤道女
건도성남곤도여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騸馬豶豕猶云悲
선마분시유운비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다 할만한데 況乃生民思繼序
황내생민사계서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랴! 豪家終世奏管弦
호가종세주관현 부자집들 일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粒米寸帛無所損
립미촌백무소손 이네들 한톨 쌀 한치 베 내다바치는 일 없네. 均吾赤子何厚薄
균오적자하후박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客窓重誦鳲鳩篇
객창중송시구편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읇노라 (손경자 번역)
정다산은 목민심서에 이 시를 짓게 된 연유까지 써 놓았다. ‘이 시는 가경(嘉慶) 계해(癸亥·1803년) 가을에 강진에서 지었다. 노전(갈대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3일 만에 군보(軍保)에 올랐다. 그러자 이정(里正)-세금 징수 관리-이 군포(軍布) 대신 그 집의 소를 빼앗아 갔다. 남편은 칼을 뽑아 자신의 남근을 잘라버리면서 “나는 이 물건 때문에 이런 곤욕을 받는구나” 하였다.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을 가지고 관가에 가 울면서 호소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았다. 내가 이를 듣고 이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다산 선생이 살았던 시대에는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아에서 기록이나 문서, 전곡(錢穀)을 관장하는 말단행정에 종사하는 이속(吏屬)들이 조세를 가혹하게 거두어들여, 백성을 못살게 들볶는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극에 달해 있었다고 한다. 갓난아이나 죽은 자에까지 군포(군 복무 대신에 내는 세금)를 물리는 실태-백골징포(白骨徵布), 황구첨정(黃口簽丁)- 가 허다했다고 한다. 물론 이 때 양반들은 세금이 면제되거나 담세 능력에 비해 매우 적은 세금을 부과 받았다. (법에는 16살부터 60살까지 평민 남자에게만 군역을 부과하여 역을 담당하거나 군포를 내도록 했고, 한 집에 두 사람을 한꺼번에 군역을 부과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법이 지켜지지 않았다)
양반이 되면 병역의무도 군포 납부의무도 없어지는 등 각종 특권이 생기니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양반이 되려고 하였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조사에 따르면 족보가 비교적 잘 남아있는 대구 지역의 경우 1690년(숙종)에는 양반이 9.2%, 양민이 53.7%, 노비가 37.1%였다. 약 100년 뒤인 1783년(정조)에는 양반이 37.5%, 양민은 57.5%, 노비는 5.0%로 되었다. 그 70년 뒤인 1858년(철종)에는 양반이 70.3%, 양민이 28.2%, 노비는 1.5%로 줄었다. (이덕일,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마리서사,2005) 조선 말기에는 양반이 80~90%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양반과 일본의 영주, 사무라이, 유럽의 귀족들의 두드러진 차이는 조선의 양반계급은 병역, 납세 의무도 없고 특권만 있었는데 반해, 일본과 유럽은 최소한 공동체를 지키는 의무는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조선은 재산권(소유권)이 뚜렷하지 않아 양민이 힘써 얻은 재화를 지방 관리와 유력 양반 집안이 약탈해 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이러니 문전옥답을 팔든, 딸자식을 팔든 기를 쓰고 양반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안 되면 자신과 처와 자식 등 한 가족을 양반가에 통째로 팔아서-기록에 따르면 18세기 말 4~6인 가족의 몸값이 소 한 마리 값이었다고 한다- 병역, 납세의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한다.
우리 시대의 불편한 진실, 공정과 공평 조선의 지배층은 양반이 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구조를 혁파하지 않고, 다시 말해 양반의 특권과 특혜를 폐지하지도, 권리와 혜택에 상응하는 의무와 부담도 지우지도 않고 양반을 변칙적으로 보편화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그것이 양반 증명서를 갖고 있거나 발급하는 기존 양반들과 왕실에 일시적 이익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남아있는 양인(평민)들의 부담은 점점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 악순환의 끝에서 터져 나온 단말마가 바로 哀絶陽(애절양)이며, 그 최종적인 귀결은 조선왕조의 멸망이다. 왕조가 망한지 10년이 안되어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입헌군주국도 아닌 ‘민주공화국’을 헌법 제1조에 명시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독립운동 시기에 근왕주의 세력이 거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조선이 양반 문제를 해결한 방식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데 있다. 대기업. 공기업, 전문직(자격증), 공무원(고시, 공시합격자), 좋은 대학, 해외 학위 등의 과도한 특권, 특혜를 조정하지 않으니, 아니 그런 것을 확보하지 않으면 사람대접 받으며 살기가 힘드니, 소득의 증가, 대학 입학 정원의 확충, 해외 유학(송금) 자율화 등에 따라 양반되기 경쟁(地代=rent 추구 경쟁)이 널리 확산되어 버린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진학률과 고시, 공시, 유학열풍, 정규직화 투쟁 등은 본질적으로 문전옥답 팔고, 딸자식 팔아서 양반이 되려는 시도의 재판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는 한국의 자칭 자유주의자, 시장주의자들이 반미. 친북. 좌파를 욕하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재벌. 대기업, 조중동의 불공정거래를 욕하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MB정부의 반시장적 반자유주의적 행보를 욕하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뉴라이트는 뉴반공주의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의 자칭 진보주의자, 좌파들이 부동산 투기와 고용 불안을 탓하고, 국가의 무책임성과 공동체의 붕괴를 한탄하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좌우 이익집단에 의해, 또 이들에게 포섭된 무능한 국가에 의해 황폐화된 가치생산 생태계를 한탄하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과잉시장(경쟁)을 성토하는 소리는 귀가 아프게 들었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과소시장(경쟁)을 성토하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보수와 진보를 초월하여, 정부 발주 용역 사업 수주 조건에 들어있는 정교수, 부교수, 조교수 몇 명이라는 철지난 규정으로 인해, 실력은 있지만 곤궁한 시간강사, 박사들이 소작인처럼 착취당하는 현실을 시정하려는 움직임도 보지 못하였다. 지식인 사회의 계급 사회적 요소 내지 철지난 경제적 지대를 혁파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지식인들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대(X) 끊는 사회를 만든 책임은 약간 적을 지라도, 대(X) 끊는 사회의 마지막 수혜자이자, 대(X) 끊는 사회를 혁파할 역사적 책임이 있는 386세대의 자기반성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대선, 총선, 보궐선거 같은 장이 서면, 어디서 뭐하다 나왔는지, 공천이 곧 당선인 지역에 공천을 받겠다고 길게 늘어선 참신한(?) 애국(?) 지사들은 넘치지만, 정치적 독과점 체제를 뚫고 제대로 된 정치를 하려고 정도를 걷는 정치인은 거의 보지 못하였다. 자유, 시장, 민주, 진보, 공화, 공동체, 복지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넘치지만 모든 것의 기초인 공정과 공평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얘기하는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출처] 애절양(哀絶陽)|작성자 이즈래
자살하는 사람들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불행과 고통 속에서도 삶을 영위한다. 남편을 암으로 떠나 보내고 난 후 유일하게 기댄 자식마저 교통사고로 잃고 몸마저 동네 폭력배에게 유린당한 여인마저 살아간다. 산다는 것이 죽음보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눈덩이처럼 빚만 쌓여가는 살림 속에서도, 곧 과로사로 죽을 정도로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수모와 멸시와 조롱과 천대 속에서도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늘 고통인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은 물론 가족과도 거의 매일 싸우면서도 사람들은 “다들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난 때는 알아도 언제 죽을지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부조리하다. 누구나 이상과 꿈을 바라면서도 누구도 그에 이르지 못한 채 그 괴리를 실감하는 것이 삶이라니 부조리하다. 무엇보다도 악한 이들이 부유하고 선한 이들이 가난한 것이 부조리하다.
망자-젖먹이까지 징세
노전(蘆田)마을 젊은 아낙 통곡소리 끝이 없네/현문 앞 달려가선 하늘 보며 울부짖네./쌈터 나간 지아비가 못 돌아올 순 있어도/사내가 제 양물 자른 소리 듣도 보도 못하였네.//시아비 상복 벗고 아이 배냇물 채 안 말랐는데/삼대 이름이 모두 군보(軍保)에 실렸구나./가서 아무리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이정(里正)은 으르렁대며 소마저 끌어갔네.//칼 갈아 방에 들자 바닥엔 피가 흥건하고,/이 모두 자식 낳은 죄라 스스로 부르짖네./무슨 죄 있어 잠실궁형(蠶室宮刑) 당했던가/민() 땅 자식들 거세하던 풍속만도 참으로 가엾거든//자식 낳는 건 하늘이 정한 이치,/하늘 닮아 아들 되고 땅 닮아 딸이 되지./말과 돼지를 거세해도 가엾다 이르는데/대를 이어야할 사람 삶에 있어서랴.//부잣집들 일년 내내 풍류나 즐기면서/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으니/다 같은 백성인데 어찌 이리 차별인가/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 편을 읊노라.
다산 정약용의 ‘양물의 자름을 슬퍼하며(哀絶陽)’이란 시이다. 백성들 편에 선 사람들, 올바름을 추구하는 선비치고 이 시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있을까?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적은 시라고 언급하고 있다. 조선조 봉건체제의 모순이 점점 첨예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던 가경(嘉慶) 계해년, 곧 1803년 강진 땅 노전(蘆田)에서 있었던 일이다.
봉건 해체기의 조선조 사회, 나라는 기울고 이를 새로 대체해야 할 제도와 체제는 아직 오지 않았다. 뜻 있는 자들은 권력을 잃고 자신의 이익에 골몰한 자들이 그 자리를 독차지했다. 가렴주구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당시 관료와 토호들은 서민들을 처참하게 짓밟았고 처절하게 약탈하였다. 관리 가운데 직접적인 수탈자인 지방 관료, 특히 아전들의 탐학은 극에 달하였다. 그때 강진 땅 노전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다산이 시로 형상화한 것이다. 노전은 마을 이름이다. 글자로 보아 강진 인근서 갈대밭이 있는 해안가 마을이겠다. 이곳의 지방관들은 죽은 시아버지는 물론 낳은 지 사흘밖에 되지 않은 아기를 군보에 편입시켜 버렸다. 죽은 시아버지나 아직 핏덩이에 불과한 아기가 군대에 가거나 정병을 보조하는 보인(保人)으로 나설 수 없으니, 이를 공식적으로 면제받으려면 대신 쌀이나 군포를 내야 한다. 이미 착취당할 대로 착취를 당한 지라 낼 군포가 없다. 그러니 지방 마을의 공공 사무 및 연락을 맡아보는 자인 이정은 군포 값으로 농민에게 생명과 다름없는 소를 토색질해 갔다. 그러자 방으로 들어가 칼을 뽑아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러한 곤액을 받는구나.”라며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렸다. 이를 모두 지켜본 아내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 억울함과 분통함을 어찌 필설로 표현이나 할 수 있으리. 그 아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성기를 가지고 관청으로 나아가 따졌지만, 그러다 안 되어 울기도 하고 하소연도 하였지만 문지기는 막아선 채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다산의 말대로 아들 낳아 기르는 것은 하늘이 정한 이치이다. 배냇물도 안 마른 아이를 떡 하니 군보에 올려놓고 그 대가로 가난한 백성의 유일한 재산이자 호구지책인 소를 토색질했으니 그 농민이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원통하였으면 자신의 성기를 잘랐을까? 다산은 중국 복건성 민()족이 어린애를 낳자마자 거세하여 이웃나라의 내시로 바치며 생을 연명하던 풍속도 가혹하고 살벌한 일이지만, 이 일, 곧 잠실에서 자신의 성기를 자른 일이 그것을 넘어서는 부조리이자 비극이라고 애통한 소리로 고발하고 있다. 『시경(詩經)』 ‘조풍(曹風)’ 중 뻐꾸기와 그 새끼 7마리를 빌어 군주의 도리를 노래한 「시구(鳩)」 篇을 읊으며, 이 부조리한 세상에 서야 할 올바른 군주의 도리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 부패한 조선 관료사회 비판 이어서 그리 백성이 목숨을 바쳐 억울함을 호소해도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품지 않는 조선조 관료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생식기를 자르는 세상, 말 그대로 불임의 세상, 주검의 나라인 것이다. 그렇게 토색질하는 이들은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풍악을 울리며 떵떵거리며 살고 착한 백성들은 자식마저 낳지 못한 채 그리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야 하는가? 부패와 부조리, 수탈이 극에 달하였던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도 그리 달라진 것이 없다. 독립투사와 그 가족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감옥과 사글세방을 전전하고 친일분자와 후손들은 권력의 정점에 서서 온갖 영화를 누린다. IMF 위기 때도 잘렸다며 술 먹자고 전화하는 녀석들은 모두 뇌물도 아부도 모르고 묵묵히 자기 일만 한 착하디 착하고 성실한 ‘범생이’들이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농약중독과 알코르중독으로 하나 둘 스러지고 이를 관장하는 관료들은 웰빙 음식만 찾아다닌다. 청렴한 공무원은 말단을 못 면한 채 생계비에도 모자라는 월급으로 하루를 허덕이고 ‘아부를 예절로, 뇌물을 관례로’ 아는 공무원들은 승승장구 출세하고 돈을 주체하지 못하여 계집질에, 수백 만 원짜리 위스키에, 해외 여행과 골프에 정말 공무가 다망하시다. 얼마나 이런 괴리가 뿌리가 깊었으면 “착한 일을 하면 손해본다.”라는 말이 속담처럼 되었을까? 과연 부조리한 것이 세상의 본질인가? 왜 선한 자가 복을 받지 못하는가? 처음 이 질문을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재수할 때인가 ‘임국희의 여성살롱’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접하였다. 대학 때 1.5평의 방에서 서너 식구가 기거하면서 구걸로 연명하는 일세방 주민들과 생활한 적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면서도 가장 선하게 사는 그들을 보면서 이 질문은 내 인생의 최대 화두가 되었다.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 나의 젊은 나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렵게 구한 책을 읽고 고민을 하였고 다시 고민을 하였다. 수많은 나날을 토론하였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지하신문을 만들기도 하고 거리로 뛰쳐나가기도 하였다.
선하면 가난한게 세상이치? 어르신들께 여쭈어도 보았으나 가슴이 확 뚫리는 답을 말씀하시는 분은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유태인들에게 지혜의 스승 역할을 하는 랍비들에게도 이 질문은 오랜 동안 수수께끼였으니. 물론 일상 삶의 차원에서는 체제와 제도의 잘못이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이라는 말대로 법이 바로 서고 제도가 선한 자를 복 받도록 하고 악한 자가 망하게 하면 어찌 “착하면 손해 본다.” 라는 말이 유행할까. 그러니 제도와 체제를 그런 방향으로 개혁하는 문제는 아직도 유효하다. 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티끌만한 악조차 행하지 않은 아이가 병으로, 교통사고로 죽는 일도 그 모순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것은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니 초월적 존재나 우주의 원리에 물어볼 일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애절양(哀絶陽) - 남근 자름을 슬퍼함. - 다산 정약용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 길게 우는 소리, 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관청 향해 울더니, 하늘 보며 울부짖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출정한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예로부터 남근을 잘랐다말 듣지 못했소.
舅喪已縞兒未澡,(구상이호아미조)-시아버지 상중에 아이는 아직 핏덩인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올랐음이라오..
薄言往소虎守흔,(박언왕소호수혼)-서툰 말의 호소에 호랑이 같은 문지기와
里正咆哮牛去澡.(이정포효우거조)-고을관리 호통치며 외양간 소몰고 갔네.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칼 갈아서 방에 가니 방안에 피가 가득,
自恨生兒遭窘厄.( 자한생아조군액)- 아이 낳아 봉변당함, 스스로 한스럽네.
蠶室淫刑豈有罪,(잠실음형기유죄)-잠실에서의 궁형이 어찌 죄가 있어서며
閩囝去勢良亦慽.(민건거세양역척)-민땅의 아이 거세한 것 역시 슬픈 일.
生生之理天所予,(생생지리천소여)-자손 낳고 사는 것 하늘이 내려준 바요,
乾道成男坤道女.(건도성남곤도여)-하늘 道 아들이오, 땅의 道는 딸이라네.
騸馬獖豕猶云悲,(선마분시유운비)-말 돼지 거세함도 슬픈 일이라 할진대 況乃生民思繼序.(황내생민사계서)-하물며 백성들의 대를있는 일임에서랴.
豪家終歲奏管弦,(호가종세주관현)-대궐같은 집에선 일년 내내 풍악소린데, 粒米寸帛無所捐.(입미촌백무소연)-쌀 한톨, 천 한 조각 세금낸일 없다오.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평등한 우리인데 왜 이리 불공평 할가,. 客窓重誦鳲鳩篇.(객창중송시구편)-유배당한 이 몸, <시구편>만 거듭 외우네.
註-시구(鳲鳩) - 뻐꾸기, 시鳩篇- 시경에 나오는 시의 한편으로 뻐꾸기와 그 새끼들에 비유하여, 통치자가 백성을 사랑해야 함을 노래한 것이다.
시의 내용 음미- 조선 후기 사회는 부정과 부패의 시기였다. 이 무렵은 나라의 기강이 흐트러져 조세 등에서 부정이 많았다. 한 백성의 아낙네가 아이를 낳았는데, 남편은 아직 군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시아버지는 죽어 상복을 입은 상중인데, 출산한 아이가 자라지도 않았는데, 군대 가는 대신에 내는 세금이 부과되어 나왔다.
아직 기지도 못하는 갓난아이에게 이런 세금이 나왔으니 이 백성의 아낙네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더구나 이 백성에게는 이미 돌아가시고 없는 시아버지 몫의 세금도 내고 있던 터였다. 세금을 낼 형편이 되지 못하자 관청의 관리는 찾아와 외양간에 있는 소를 끌고 가 버리고, 말로 소리처 보았자 호랑이같은 문지기가 가로막는다. 절망한 이 아낙은 자기가 아이를 낳음으로 인해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은 칼을갈아 방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자신이 양물(陽物)을 잘라버리니, 피가 뚝 뚝 떨어지는 남편의 그것을 들고 기 막혀 하면서 아낙네는 관청으로 달려가 이를 하소연하며 통곡하다가 하늘을 우러러 울부짓는다.
평등하게 같은 백성으로 일년 내내 쌀 한 톨조차 세금으로 내지 않고도 사시사철 풍악을 울리며 대궐 같은 집에 사는 이들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자신은 유배되어 있는 몸, 가슴만 아플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저 시경의 <시鳩篇>을 읽을 뿐이다.
다산은 후일에 이 시를 지은 연유를 말하는데 내용은 이렇다. <갈밭 마을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군보(軍保)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가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자르면서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困厄)을 당한다'라고 말했다. 그 아내가 생식기를 관가에 가지고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며 하소연했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 고 술회하였다. 다산 정약용 생애와 창작활동 ■ 제 1기 - 유년 과정 정약용은 1762년 8월 5일에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5살 되던 해 벼슬길에 나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가게 되면서, 실학과 접촉하고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매부인 이승훈과 이가환을 사귀게 되면서 성호 이익의 유고를 읽게 되었으며, 실학 연구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이익의 제자들인 이중환, 안정복의 저서들은 물론, 연암의 제자인 박제가와 사귀면서 실학 연구에 힘썼다. 이리하여 그는 당대의 현실을 보다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으며, 낡은 봉건 사회의 모든 추악한 것을 불사르고 새 사회를 이룩하려는 개혁사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21살 때에 지은 시 <뜻을 말한다>와 23살에 지은 시 <손무자를 읽고> 등에 잘 나타난다.
인생은 먼 길 떠난 나그네/ 언제나 가름 길에서만 헤맨단다/ 륙경도 좋거니와/ 구류인들 아니보랴/ 치솟는 분결에 병서를 읽고 온 누리에 한번 달려보련다. 시 <손무자를 읽고> 중에서
■ 제2기 - 벼슬 시기 정약용은 1783년 22살에 생원 진사과에 응시하고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다년간 연구한 실학을 바탕으로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지리책>을 써서 천원지방설을 반대하고 땅이 둥글다는 지원설을 주장하였고, 1792년에는 거중기 등을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수축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이것은 그의 실학사상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약용의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는데 당쟁을 일삼던 무리들이 그를 질시하고 모해하였다. 하지만, 봉건 왕권을 강화하고 학문을 좋아한 정조는 정약용과 같은 선진 학자들을 등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약용은 정조의 우호를 받으며 인재 등용과 조세제도, 과학기술과 관련하여 <전폐의>, <농정소>, <마과회통> 등을 집필하였다. 이러한 글들의 주요한 특징은 강한 비판 정신과 개혁의 지향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글들은 누구나 작품의 사상을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인 사실로 예증하고 형상적 언어로써 쓰고 있다는 것도 특징적이다
■ 제3기 - 유배 시기 당대 사회정치의 부정적인 면을 비판한 다산의 글들은 당시 집권 통치 관료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한 과정에서 반대파들은 진보적인 학자들에 대해 박해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반대파들은 순조의 섭정인 대비의 ‘사학엄금교서’ 선포를 계기로 진보적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신유사옥’이다.1) 이러한 결과로 다산의 셋째 형 약종은 사형되었고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강진에서의 18년간의 유배생활은 그의 생애에 중요한 계기가 된다. 유배지에서서의 생활은 백성들의 생활과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하고 봉건말기 사회 현실의 부정적인 면들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유배 기간 동안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으며, 학문 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 는 대조적인 두 현상을 체험하게 되는데 양반 관료들은 그를 냉대하고 박해하였으나 가난한 농부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여 주었다. 이러한 심정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 나타난다.
조해루 용마루에 해 져 가는데/ 고을 고나리 성 밖으로 날 몰아내네/ 시내가 돌밭머리 초막집에서 가난한 농부 만나 주인 삼노라 <기성잡시 27수>중
다산은 유배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당진으로 내려간 첫 해에 <탐진촌요>, <진능가> 등을 창작하였고, 그 후 <애절양>, <송충이>, <여름날에 술을 마시며> 등을 창작하였다. 다산이 이 시기에 쓴 주요 저술에는 <아방강역고>, <대동수경> 등이 있다. <원목>, <전론>, <악론> 등은 연보가 전해지지 않지만 이 시기의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원목-통치자론>, <탕론-민권옹호론>, <전론-토지개혁론>에서 민주주의적인 사회 정치적 개혁사상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러한 서술에서 왕과 인민과의 관계에 대해 인민이 통치자에게 복종할 것이 아니라, 통치자가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사상을 주장하였다. 통치자가 인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인민이 통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인민이 미곡과 포백을 바쳐서 통치자를 섬기며 인민이 거마와 종복을 내여서 통치자를 맞고 보내며 인민이 자기의 고혈을 짜내어 통치자를 살찌게 하니 이런 것으로 보아서는 인민이 통치자를 위해 생긴 것이 아닌가? 아니다. 통치자가 인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 지금 세상에서는 인민이 통치자들을 위하여 생겼다고 하나 이것이 어찌 이치에 합당하겠는가? 통치자가 인민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원목-통치자론> 중에서
다산은 또한 <탕론-민권옹호론>에서 천자는 밑으로부터 인민의 추대를 받아서 된 것이기 때문에 그가 인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못할 때에는 폭력으로 쳐 쫒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할 것은 다산의 전제 개혁이었다. 그는 <전론>을 통해 토지제도에서 여전법을 실시한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여전법을 통해 토지제, 조세제도, 병력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토지의 공동경작, 노동량에 의한 분배 기생계급의 철폐 등에서 당시 피착취 근로 농민의 염원과 지향이 반영되어 있다. ■ 제4기-노년 시기 57세의 나이에 유배에서 풀려난 정약용은 고향으로 돌아와 정계와 인연을 끊고 저술활동에 힘썼다. 이 시기 <흠흠신서>를 완성하였고 같은 해 <아언각비>를 탈고하였으며, 1820년에는 <사례고례찬보>를 끝냈다. 그 밖에도 무수한 저서들을 서술하였으며 그 동안의 자신의 저서들을 정리하였다. 다산은 많은 저술과 문학예술유산을 남기고 1836년 75세를 일기로 자기의 생애를 마친다. 다산은 다방면적인 지식을 소유한 대학자였고 뚜렷한 지향을 가진 노력가였다. 그는 사회과학과 예술, 자연과학 및 기술 과학에 대해서도 선행 실학자들의 업적을 계승하고, 각각 당시 해당 과학의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과학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정약용을 가리켜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하는 것이다.
제2절 다산의 세계관과 미학적 견해 ■ 다산의 유물론적 문학관과 세계관 그는 현실과 예술과의 호상 관계에 관한 미학의 기본 문제에서 기본적으로 유물론적 입장에 서 있다. 그의 문학은 자연 및 사회생활과 인간들의 사상 감정의 반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유물론적 미학 사상은 다산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으며, 선행 실학자들의 유물론적 견해를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다산의 철학에는 변증법의 요소도 풍부하다. 그는 세계의 모든 사물 현상에 주역의 법칙, 즉 음양의 투쟁에 의하여 사물이 변화 발전한다고 보았으며, 변화 발전의 힘은 그 자체 내에 있다고 하였다. 특히 선악의 판단 능력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사에 달려 있다고 한 것은 철학 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었다.
이러한 유물론적 세계관은 문학예술을 현실의 반영으로 보고 그 창작 과정에서의 작가의 세계관의 적극적 의의를 옳게 인식하게 한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정약용에게 있어 문학은 객관적인 사물 현상의 반영이었으며, 문장에 대해 사물현상의 시비를 가릴 수 있는 견해가 바로 기초 위에 외계의 사물 현상과 접촉하여 느끼고 인식한 것으로 표현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다산은 문학예술이 사회생활과 분리되는 풍월시나 기계적인 답습시, 형식주의 문학을 반대하였다.
또한 시에서 기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기 시의 창작과정을 세 시기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벼슬에 있을 때는 그 이상과 현실간의 모순으로 하여 시 창작에서 슬퍼하고 울분스러운 기상이 있었고, 장기에서의 창작에는 더욱 조용히 흐느끼는 듯 서러운 기상이 주로 되었으며, 강진 이후의 창작에서 비로소 모든 것을 각오하고 새 결의를 다지어 활달하고 광대한 기상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의 기상 시 정신을 강조하는 미학적 견해는 형식주의 미학을 반대하고 문학예술의 실천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선행의 진보적 미학사상을 집대성하고 반봉건 투쟁과 실학사상이 발전하던 시대의 지향을 옳게 반영한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다.
■ 애국주의 교양의 수단으로서의 시작(詩作) 다산의 중요한 공적 중 하나는 문학의 창작 실천에서 작가의 세계관의 역할을 중요시하였고 특히 애국주의 사상을 깊이 간직한 필요성을 천명한 점이다. 이는 시를 애국주의 교양의 수단으로 이해한 결과이며 사물 현상의 인식에 있어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진보적인 철학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다산은 시는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수양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우선 사상을 풍부히 하고 고상하게 해야 하며, 그것을 거짓 없이 진실하게 표현해야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의지가 확립되지 못하고 학식이 순정하지 못하며 큰 도를 알지 못하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으며 백성을 롭게 하려는 마음이 없는 자는 시를 지을 수 없다. …… 자기 마음이 언제나 만민에게 혜택을 끼치며 만물을 보호 발육하려는 사상을 가져야만……혹은 꽃 피는 아침 달밝 저녁과 무르녹은 그늘이나 보슬비 내리는 때를 당하며 그 서려있던 감흥이 격동하며 표현한 사상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노래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음률이 맑을 것이다. 이처럼 애국주주의 사상으로 백성을 교양할 수 있는 시를 창작하기 위해 작가는 꾸준히 학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 학습의 내용과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특히 우리나라 역사와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학습을 강조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시에 반영하여야만 한다고 하였다. ■ 사실주의 문학예술관과 묘사의 진실성 다산은 사실주의 문학예술에 있어서 그 사상성과 함께 대상의 생동한 묘사에 대해서도 큰 의의를 부여하였고, 묘사의 진실성, 생동한 사실적 필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다산은 그림을 편한 시들과 춤과 무예를 보고 찬양한 시들에서 세밀한 묘사와 형상의 생동성을 강조하고 있다. <변상벽의 그림 ‘어미닭과 병아리’>, 그림 <동시의 시늉> 등은 이와 같은 견해를 표현한 대표 작품들이다. 형형색색이 섬세도 하여/ 참 닭 참 병아리 틀림이 없고/ 굼실굼실 필치가 살아 있어서 기운이 바야흐로 생동하는 듯/ 뛰어난 예술은 과연 이러하거니 보고 또 보아도 놓을 생각 없도다/ 서투른 화공들은 산수화를 그린다면서/ 되는대로 이리저리 붓만 휘두르는누나 - 정약용
이와 같이 다산은 사실주의 예술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세부 묘사의 진실성과 향상의 생동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다산은 문장에서도 언어의 정확한 사용을 요구하였다. 언어는 문학의 제일 요소이며 그의 유일한 표현 수단이다. 때문에 언어가 부정확하다는 것은 결국 사물 현상의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다산의 미학적 견해의 한계 그가 시대의 발전과 함께 문체가 필연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에 반해 소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는 이인영에게 소설의 창작 수업은 젊은 사람이 할 일이 못 된다고 권고하였다. 하지만 소설의 미학적 성격과 당시 왕성하게 창작 보급된 것으로 볼 때, 그의 미학적 사상에 있어 제한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라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높이 평가하고 이로쿠터 출발할 것을 주장하며 창조 사업에서의 작가의 세계관의 역할을 강조한 다산의 미학적 견해는 우리나라 선진 미학사상의 귀중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조선문학사에서는 그의 창작 작품들에 대한 평가에만 그치지 않고 그의 생애나 세계관을 제시하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는 문학사에 대한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한 작가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이고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으로 보인다. 조선문학사에서 정약용의 생애와 세계관에 대해 이렇듯 많은 관심을 보이는 데는 두 가지 맥락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그가 실학자의 한명으로써 진보적인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가 강진에서의 유배시기에 일반 대중과의 많은 접촉이 있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대중 입장에서 많은 작품 창작을 했다는 점이다. 다산이 실학을 바탕으로 실사구시의 진보적이고 사실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은 북한 문학사에서 주장하는 사실주의적 문학관에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작품 활동을 유미적인 창작 과정보다는 사회와의 관계에서 찾고자 했다는 점은 북한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통해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다. 이러한 점에서 정약용의 문학활동은 북한의 문학관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또한 다산은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주류 세력인 서인들의 탄압을 받았으며 백성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에 대해 기술했다는 점은 북한 문학사에서 주장하는 반봉건문학과 인민문학의 접점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산 정약용관련 _ 이성하 옮김 |
첫댓글 2012년은 제가 52년 임진년 9월생이니 , 양과 스피드에서 올해 상반기가 지나면 , 질과 숙성의 시기로 모드를 바꿔야할 듯 합니다. 댓글은 병주성님이 책임을 지실것이고, 조선의 천재 , 우리역사에서 최고의 인물로 자타가 공인하는 다산 정약용선생의 강진유배시절의 그 유명한 저서 목민심서에 나오는 시를 통해 , 우리역사의 명암을 옮겨 봤습니다. 영국의 세계적 세기의 석학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고 갈파(喝破) 했다고 . . . (아시여문).
그러문요.감사합니다.사족을 붙이자면요 어떠하든 丁若鏞 그훌륭한 분이 호남지역 강진에 18년이상 사시면서 무지목매한 백성들을 깨우침을 주셨고 그곳에서 목민심서등 훌륭한 행정지침서를 크게파급함은 국보급입니다.더구나 해남윤씨 멍문가가 외가이다는점은 전라도지역의 자부심이기도...
문뜩~행정은사랑하지만 정치는싫어한다는 현뉴욕시장 재력가 마이클 블름버그 그분이 생각난다.그인 정치가싫은이유를 정치란 불가사이한분야라고 겸손을강력히 피력했다. 정치는아무나 못한단 얘기죠. 하나님이 각자주신 재능과 품격의 달란트를 인정하며 어디까지나 열공하고 기막힌도전도하며 자유경쟁의 기회균등이라면 더이상 바라서 뭐하리요.말하자면 각자의세계관이 문제일것이다.시크릿에서는 부정적마인드는 부정으로,긍정적마인드는 잘되는쪽이라니 그걸읽혀야..하지만 결국 세상사란 천태만상...암튼 정약용 실학사상등을 工夫좀..모쪼록 정치지망자등은 SNS시대이기 쭈울로 나는꼼수다등 언론회자에 처신등을 명심하시겠지오들..
정약용의 어머니가 해남 윤씨. 그리고 윤선도는 정약용의 6대 외조부. 강진 다산초당도 윤단의 산정이었고, 다산초당에 책을 가져다 준 이들도 해남윤씨 문중. 그리고 다산의 18명의 제자중에도 윤종기 종벽,종삼등 6명이 윤단의 손자들로서 해남윤씨. 다산이 18년간 강진에서 유배 살이를 하는 동안에 다산은 여러가지로 해남 윤씨로 부터 도움을 받았고. 다산은 외동딸을 해남 윤씨에게 시집을 보낸다고. 초라한 초가집 한 칸 다산초당에서 18년을 사는 동안 정약용은 500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명가 명택] 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고택 ,남한의 100여군데 명택 중에서 가장 호방한 터에 자리잡은 집을 꼽아보라면 단연 윤선도 고택, 호방함에서 , 이 집은 호남을 대표하는 고택일 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고택이라고 생각한다 영남은 호남에 비해 산들이 많고 들판이 좁아서 집터가 오밀조밀하여 , 근세에 회자되었던 “경상도 부자는 3000석을 넘기 어렵지만, 전라도 부자는 1만석이 넘는다”는 말도 영?호남의 지리적 관련을 잘 보여준다 .
고려와 조선의 풍수 지리학의 원조 도선 국사가, 조선천지를 손금 보듯이 두루 살펴, 모든 고을의 천년의 앞날을 내다보며, 각 고을의 이름을 다 지으면서, 이곳에서 여생을 마무리 했을 만큼, 우리 전라 광양이 첫째요. 왜군 대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령하기를 경상도는 백색(=협조)으로 표기하여서 절대 죽이지 말라 하였고 전라도는 붉은 적색(=결사저항)으로 표기하여서 모두 죽여서 코를 베어 오라고 하였다 한다. 발해고(渤海考) 의 저자로 유명한 유득공 이 1795년 (정조19년) 에 정조왕의 명에 따라 이충무공 전서를 편찬 하였는데 그 서간문 모음집에 실려 있는 이순신 장군이 사헌부 지평 현덕승. 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
기록된 말이, 절상호남 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 이말은 竊想湖南 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竊(절)은 ‘자기의 의견을 확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곧 자신의 의견을 낮추어 겸양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매우 조심스런 주관적인 의견 개진’이라는 뜻이다 ,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라.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호남인은 불의에 비굴하지 않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맨먼저 목숨을 바쳐 국가를 수호하여 싸워 이긴 외세항쟁 정신이 동학농민 운동과 광주학생독립 운동으로 계승 발전하여 5.18 민주항쟁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을 민주화 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朝鮮之 全羅道, 全羅道之 光陽, 光陽之 骨若, 骨若之 成隍이라 , 저는 그래서 경북 김천에서 포항 10년을 준비해서, 광양으로 온 것은 아닙니다만 , 그렇게 되었고 , 완전 띵호와 , 참고 : 띵호아란 말의 유래 여러분들은 혹시 왕서방의 연서를 아세염? 1938년에 발표되어 단번에 만요가수 김정구의 이미지를 굳힌 이 '왕서방 연서'는 중국과 관련된 유행가 가운데 대중적인 인기를 가장 많이 누린 곡으로서 가사인데염 .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퉁퉁 털어서 다 줬어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도 띵호와 명월이 하고 살아서 돈이가 무유데 띵호와 워디가 반해서 하하하 비단이 팔아서 띵호와
비단이 팔아도 명월이 잠이가 들어도 명월이 명월이 생각이 다다유 왕서방 병들어 누웠어 띵호와 띵호와 병들어 누워도 띵호와 명월이하고 살아서 왕서방 죽어도 괜찮아 워디가 반해서 하하하 비단이 팔아서 띵호와 명월이 얼굴이 띵호와 명월이 마음이 띵호와 비단이 팔아 다 줘도 명월이 돈이 안 받어 띵호와 띵호와 명월이 없어도 띵호와 명월이하고 안 살어 돈이가 많이 벌어 띵호와 돈이가 많이 벌어 하하하 비단이 팔아서 띵호와 위의 대중가요 가사에 나온 띵호와를 유래로 한국인들의 입주위에 띵호와라는 말이 오고가게 되었는데요. 그렇다면 왕서방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아는것이 의문을 푸는 핵심 포인트라고 할수가 있겠습죠? ^^;
조선족 출신 지룽이(池龍一) 닝보(寧波) 시과학기술원구 서울사무소 대표는 예전에 옛부터 전세계에 차와 비단을 내다 판 게 닝보상인인 만큼 '비단장수 왕서방'은 닝보이외의 다른 곳이 고향일리 없다는 주장을 했었습니다. 닝보는 상하이 밑쪽의 면적 9365제곱km(서울15배)의 도시(상해에서 차타고 반나절을 가야함)로, 인구는 5백40만명이상이며, GDP는 1191억위안(약19조원)입니다. 따라서 왕서방이 띵호와의 유래이며, 왕서방의 고향이 닝보이므로 북경표준어를 쓰지 않았음을 추측할수있습니다.
따라서 方言이 심한 중국의 특성상 해당지역 억양으로 발음된 Ting Hao A~ 는 한국인에게 띵호아로 들린겁니다. 挺 好 阿~ ing Hao A 挺 Ting -> 1.형용사 꼿꼿하다,곧다 2.동사 곧게 펴다,지탱하다 3.부사 매우,대단히,매우 好 Hao -> 1.형용사 좋다,훌륭하다,건강하다,~하기쉽다 2.부사 오래됐다. 阿 a -> 1.문장의 어미에 뭍어 감탄,찬탄을 뜻합니다. 위와같은 단어의 구성으로 매우좋다 라는 감탄문이며, HaoJiLe,HenHao,HaoBang 등의 표현을 써도 같은 의미이지만, 노래의 은율상 Ting Hao A가 쓰여진것으로 보여집니다.
다소 엉뚱하긴합니다만, 뭐~삼천포지역 소식좀..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다가 장벽에 부딛히거나 혹은 곤란한 지경에 이르면 흔한 말로 잘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졌다라고 말하곤한다. 또는 길을 가다 목적지가 아닌 다른 장소에 도착해서도 똑같은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을 그냥 들으면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가 가지않는다 그렇지만 이 말에는 재미있는 그 말을 사용하게 된 유래가 있다 우선 이 말을 이해 하려면 실제 존재하는 사천에서 삼천포간의 도로를 주행해보면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진주에서 33번국도를이용해 사천을 거쳐 고성을 가려 하면사천을 조금지나 3번 국도와 겹쳐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무심코 가기 쉬운 직진코스를 선택하여 가다보면 3번 국도의 육지로는 끝자락인 삼천포에 도착하는 것이다. 삼천포에서는 다시 돌아나오지 않으면 안되는 육지의 끝이다 지금은 3번국도의 끝인 남해와 연결되어 있지만 이 말이 처음 유래될 때는 그렇지 못하여 되돌아 나와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되돌아 나오면서 한마디 하는 말 "잘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졌네" 하고 아쉬운 여운을 남겼다한다. 이 말에는 주의하지않고 경솔히 행동한 아쉬움과 괜히 헛고생을 한 자기잘못의 자조적인 시인도 함께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그래서 좀더 주의하고 잘 알아보고 결정해야 한다는 교훈도 담겨 있는 말이다.
일을 진행함에 있어 탈없이 잘진행 되다가 갑자기 또는 마지막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거나 어긋난다는 뜻임. 가장 유력한 유래입니다. 옛날에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진주를 갈려면 객차의 앞부분 열차칸에 타야 했습니다. 뒷부분 객차는 삼천포행 입니다. 쉽게 설명해서 열차가 총 4칸짜리라면 앞칸두개는 진주행 뒷칸 두개는 삼천포행 이였죠... 이 열차가 진주를 막 들어서기전의 기차역인 개양역에서 분리 됩니다. 당시 진주행 사람이 많다 보니 삼천포행 뒷객차에서 잠을 자거나 멋모르고 잘못 객차를 타게되면 원하는 진주가 아닌 삼천포에 도착 하게 되었습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약 1965년~1970년 입니다. 70년대 이후에는 진주~삼천포간 철도가 없어지고 군용선으로 진주~사천만 남아 있습니다. 버스가 발달하게 되므로 자연적으로 기차의 활용도가 작아지게 되죠. 마지막으로 이말의 표현은 삼천포 시민들에게 좋지 않은 지역적 표현이 되기 때문에 이전부터 이어져온 속담이라 할지라도 되도록 삼가 해야 함 (특히 자칭 공인이라고 하는 신분들) 삼천포에 가서 이런얘기를 함부로 하면 본인에게 득 보다 실이 많음.. 지금은 관광지역으로 돈 없으면 놀려갈수도 없는 도시가 되어버림 흔히들 '삼천포로 빠진다.' 하면 비웃는 말이 되지요, 이른바 사오정 이 된다는 말인데,
어원의 과정은 이렇답니다. 조선조 후기의 수군들이 은어로 쓰던 말이었습니다. 조선조 후기에는수군(지금의 해군) 이 두군데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우수영(수영 = 수군의 본영 = 수군본부) 과 좌수영이지요, 지금으로 말하면 동해사령부, 서해사령부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두군데의 좌, 우수영을 통합하여 지휘하는 곳이 총사령부격인 통영인데 이 통영이 있던곳이 지금의 통영시(예전엔 충무시) 인데 어느날 이 통영에 보고를 하러 왔던 몇 척의 수군들(좌수영이나 우수영의 수군이겠지요.) 이 보고를 마치고 본대로 귀환하는데서 발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른 배들은 모두 통영항을 빠져나와서 몇개의 섬을 통과하여 전부 남해로 다 나갔는데 그 중에 한척의 배가 길잡이(지금의 항해사)가 잘못지시하여 약간 우측으로 가는 바람에 통영의 옆 동네인 삼천포구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통영의 지겨운 점호를 받고 겨우 본대로 귀환하는데 길잡이의 잘못으로 결국은 통영의 옆으로 다시 되돌아 가는 꼴이 됐지요. 나중에 잘못된 것을 알고는 다시 항로를 변경하여 본대로 돌아왔는데. 당연히 늦게 도착했겠죠. 길잡이는 늦게 도착한 죄로 신나게 상관에게 욕을 먹고 그 배의 수군들은 다른 배의 수군들에게 놀림을 당했죠,
놀림을 당한 병사들이 상관인 길잡이를 보고 뒤에서 욕을 했지요. "에이 그거 잘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져 갔고 이 망신을 당해.... 에이 .... 쯧 쯧,,,,," 이 말이 널게 퍼져서 수군들 사이에선 엉뚱한 짓이나 실수를 하면 곧잘 "거 왜,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져...." 하면서 상대를 비웃었지요. 이것이 육지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 ..... 삼천포로 빠져....." 하는 말의 기원입니다. 먼저 삼천포로 빠지다의 유래 그 자체가 좋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최선임. 60년대 진삼선(진주-삼천포) 개통에 따른 열차편성에 따른 설도 있지만 이미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의 경남일보를 보면 1920년대 이미 이 말을 사용하지 말자는 기사가 있다. 심지어 외국사람인 1930년대말에도 남강범람때 남강댐 건설 관련 해서 일본기술자들도 사용할 정도로 흔한 말이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어원은 과거 평안도 모든물산의 반이 평양에 있고 경상도 모든물산의 반이 진주에 있다란 말이 있다. 물론 경상도에 수많은 곡창지대가 있는데 왜 첩첩산중 산으로 둘러싸인 옛 진주면에 그런말이 있는지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진주에 큰시장이 있었던 거 같다. 오늘날로 말하는 남대문시장이나 성남모란시장처럼 전통시장이 아닌 가락동농산물 노량진수산 시장 같은 일종의 옛날버전의 상품시장
같은 것이 있었던 거 같다. 물론 전라도의 전주 역시 내륙이지만 농산물은 물론 수산물도 집결하는 곳으로서 음식문화가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북평양 남진주 라고 해서 평양과 진주 역시도 음식문화 매우 발달한 곳이다. 개성거지탕에 밀리고, 전주비빔밥에 밀리고, 안동헛제사밥에 밀리고, 평양냉면에도 밀리지만 진주에도 진주거지탕 진주비빔밥 진주헛제사밥 진주냉면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그 옛날사람들이 진주시장에 왔다가 돌아갈 때 사천부근서 그렇게 통영(두룡포)과 삼천포를 많이 혼동 했다 한다. 또한 조선시대 진주에 경상우도 병영이 통영에는 수영이 있었는데
오늘날로 굳이 말하면 뭐 육군 해군이다. 역시나 그렇게 잘 가다가도 사천부근서 통영으로 못가고 삼천포로 빠졌다고 한다. 즉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 이렇게 그 자체가 매우 오래 된 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유례들에서 보듯이 하나같이 모두가 다 부정적인 뜻이다. 그래서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은 듯 하다. 학자들도 전라좌수영 충무공이순신이 한산대첩 노량대첩 등 삼도수군 통제영이 있던 통영(두룡포)과 삼천포를 혼동해서 어디서 무슨 승리했는지 가끔 혼동한다. 그만큼 아리송해서 진주서 두룡포와 삼천포 가는 길에 대한 여러 이야기 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 같다.
너무너무 잘 배웠습니다.그렇다 손 치드라도 아무튼 삼천포상식 긍정적 미소속에 잘소화 했답니다.그나제나 내일이 설 이니 헛제사음석좀 먹으러 가야것습니다.이성하선배님께서도 그 떡국 잘드시길 바랍니다.아참 떡본김에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4.11총선즈음해서 사천소식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