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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그 자신이 <제 2의 장 훈> 으로 불리웠듯이, 언제부턴가 <제 2의 장효조> 란 닉네임은 타자들에겐 더 없는 영광스런 "훈장" 과도 같았습니다. 여기... <오른손 장효조>라 불리우며 그라운드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잊혀져 가는 <야구천재>가 있습니다. 혹자는 그를 일컬어 "게으른 천재" 라고도 하지만...적어도 제게 있어서 그는, 그렇게 그라운드를 떠나선 안될 <비운의 스타> 였습니다. - 아마 최고의 타자로 우뚝 서다 - 강기웅 ~! 모두들 기억하시죠? 대구고, 영남대를 거치며 국가대표 강타자로 맹활약. 실업 한.화 시절엔 <5연타석 홈런>이란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우기도 하는 등, 아마야구 최고의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던 야구 엘리트 였습니다. 장타력 뿐 아니라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 거기에 현란한 수비력까지 겸비한 이른 바 "만능 선수" 였죠. 저의 뇌리에 "강기웅"이란 이름 석자가 강하게 각인 되기 시작한 건, 그의 대학시절 어느 경기를 통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T.V 중계를 통해 <오른 손 장효조> 란 평가를 첨 들을 수 있었고 갸냘퍼 보이는 체구에도 장외 홈런을 때리는걸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었죠. 그가 실력에 비해 고교 시절 전국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건, 아마도 소속팀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긴...그땐 동향의 경북고가 전국 무대를 주름잡고 있었고, 따라서 류중일, 문병권 등의 명성에 당연히 가릴 수밖에 없었겠네요. ) 워낙 출중한 기량을 지녔던 그는, 이내 <전국구>로 부상. 대학무대를 평정하고 국가대표로 LA올림픽에 출전하는 등 승승장구하며 류중일, 장태수(투수) 등과 함께 삼성에 지명되지만, 88 서울 올림픽 출전을 위해 아마 잔류를 선언합니다. (많은 삼성팬들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87 시즌 당시 프로에는 아마 야수 빅4 (강기웅, 노찬엽, 류중일, 백인호)가 입단 예정이었으나 88올림픽 관계로 야구협은 이들의 아마 잔류를 권유했었습니다. (82 세계야구 선수권 대회때와 마찬가지로 훈련 보조비 명목으로 아마 잔류에 대한 대가는 주어졌습니다) 이들 중, 류중일과 백인호는 프로를 선택하고 강기웅과 노찬엽은 아마에 잔류...이들 보다 2년 늦은 89시즌에 데뷔하게 됩니다. *88올림픽 대표* ▲투수=조계현(농협) 김기범(한국화장품) 이광우(원광대) 이강철(동국대) 박동희(고려대) 송진우▲포수=김태형(단국대) 김동수(한양대) 장호익(농협)▲내야수=권택재(상무) 김경기 황대연(이상 고려대) 강영수 강기웅(이상 한국화장품) 송구홍(건국대) 최해명▲외야수=노찬엽(농협) 이석재(제일은) 백재우(상무) 윤혁(고려대) 성적 : 미,일,푸에르등에 패하며 4위에 그침 당시 88올림픽 대표 명단인데...82세계야구 선수권대회 멤버들이 프로야구 1세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면, 이 멤버들은 프로야구 2세대의 주역이라 칭할 만 합니다. 실로 화려하기 그지 없군요. 한국화장품에 입단한 강기웅은 한층 절정의 기량을 뽐냅니다. 개인적으로도 이때 그의 야구를 가장 좋아했는데 (프로출범 이후 실업야구에 그렇게 관심을 갖는다는게 신기할 정도로...^^) 그때 바로 프로에 진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그의 활약은 <야구천재>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죠. 87년 아마야구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천재> 강기웅은, 이듬해 드디어 "대형사고"(?)를 치고 맙니다. 대통령배 전국실업야구춘계리그 상업은행과의 경기에서 1, 2회 연속 홈런 포를 작렬시켜 앞선 경기에서 수립한 3연 타석 홈런을 포함, 전무후무한 5연 타석 홈런을 기록함으로써 한국야구사에 새로운 금자탑을 이룩한 것이죠. (당시 프로에서도 롯데 김용희가 83년 수립한 4연 타석 홈런이 최고기록.) 당시 언론에선 <강기웅...제 2의 장효조인가 제 2의 이만수인가>뭐...이런 요지의 카피로 그의 가공할 타력에 대해 놀라워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 <천재>의 화려한 비상 - 아마야구를 무릎 꿇린 그는, 계약금 3200만원 (연봉 1200)에 삼성 유니폼을 입습니다. 투수인 이강철(4200)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노찬엽(3500)에게 밀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지만 데뷔 첫 해 0.322 (2위)의 고 타율을 기록하며 구단에 대한 서운함을 날려버립니다. 당시 강기웅은 시즌 막판까지 선두 고원부를 추격하며 수위타자와 신인왕을 노렸으나, 고원부가 결장하며 타율관리에 들어가고 박정현이 해태 전에서 9-1로 크게 앞선 5회말 2사 후 최창호의 뒤를 이어 등판해 1승을 추가. 19승째를 올림으로써 아쉽게 무산되고 맙니다.(역시 김영덕, 김성근 감독의 제자사랑(?) 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죠? ) 하지만 골든글러브상과 각종 스포츠신문에서 시상하는 신인상을 휩쓸며 아쉬움을 달랩니다. 이후에도 그는 정교한 타격과 함께, 절친한 친구 류중일과 역대 최강의 키스톤 콤비를 이루며 삼성 공,수의 키플레이어로 자리를 굳히게 되고 팀 선배 김성래의 대를 이어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3차례 수상. 당대 최고의 2루수임을 확고히 합니다. ( 그럼에도 그의 재능에 비해 뭔가 아쉬운 성적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던 건 왜였을까요?) 당시 하일성 해설위원을 비롯한 많은 야구 전문가들이 야구 센스 만큼은 강기웅을 따라올 선수가 없다며 그를 "방망이를 거꾸로 잡고도 3할을 칠 수 있는 선수"로 평가했던 게 무리는 아니었죠. (최초 팀 통산 1만루타의 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 - 시련... 그리고 너무도 아쉬운 퇴장 - 하지만... 그에게도 단점은 있었습니다. 하늘은 그에게 천부적인 재능을 선물하는 대신, 뛰어난 신체 조건과 강인한 체력은 내리지 않았던 거죠. 약한 체력 탓에 늘 훈련 양이 부족했던 겁니다. 한마디로 노력 보단 타고난 재능으로 야구를 하는 스타일이었고 바로 이 점이 신임 백인천 감독의 신경을 거슬렀습니다. 백 감독의 부임으로, 거침없는 그의 질주에 "브레이크" 가 걸리기 시작한 거죠. 전임 감독들은 그에 대해 자율훈련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고 합니다. 약한 체력을 나름대로 페이스 조절 할 수 있도록 한 것이겠죠. 하지만 백 감독이 어떤 분입니까? 별다른 부상도 없이 체력이 부족하단 이유로 해외 전지 훈련까지 제외되면서 "미운털"이 박히기 시작했고 김재걸에 밀려 주전 자리마저 위태로운 신세가 되고 맙니다. (김재걸 역시 심재학과 더불어 당시 신인 최고액인 2억 2000에 들어온 유망주였죠) 여기에 발목 부상이 겹치면서 설상가상...2군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그의 화려하기만 했던 야구 인생에 최대 위기가 닥친 셈입니다. 주전선수의 노쇠화와 마운드 약화가 심각했던 삼성은 결국 대대적인 개혁(?)을 표방하며 그를 비롯해 이종두. 김성래. 류중일 (당시 부상이 잦았던 이들을 "부상 4인방" 이라 칭했었죠) 등 간판 선수들과 팀의 상징인 이만수까지 트레이드시장에 내 놓기에 이릅니다. (팬들은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죠) 때맞춰 한화가 "장종훈까지 내놓을 수 있다"며 트레이드 시장에 뛰어드는 바람에 한화와의 "빅딜설" 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결국, 백 감독은 강기웅을 트레이드 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그 상대가 놀랍게도 재계 라이벌 현대의 이희성과 최광훈 입니다. (그때 전, 제 눈과 귀를 의심했고 과거 장효조와 김시진이 떠나갈 때 참고 참았던 울분이 폭발하는걸 느꼈습니다) 감독 입장에서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선수를 트레이드 시키는 건 왈가왈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선수 입장에서도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상대 카드가 도저히 맞질 않습니다. 마해영이 김주찬, 이계성과 바뀌었을 때 롯데 팬들이 느꼈을 충격은, 이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 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희성은 2할을 오가는...도무지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백업 외야수 였고 좌완 최광훈은 1군 무대 기록이 전무한... 듣도 보도 못한 투수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에도 일화가 있습니다. 당초 삼성에선 가내영을 원했는데 현대 내부에 있던 소식통(한마디로 첩자)이 최광훈을 적극 추천했다는 겁니다. 가내영은 부상이 잦고 최광훈이란 선수가 140대의 빠른 볼을 던진다고...그러니까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말만 믿고 데려온 거죠. (가내영이었더라도 다를건 없지만 아마도 2중 첩자였나 봅니다.) 한마디로 트레이드(선수 퇴출)를 위한 트레이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셈입니다. 이렇듯 헐값에 강기웅을 넘기니... 그가 대구, 경북 지역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인기를 볼 때 자존심은 얼마나 상했을 것이며 팬들의 분노는 또 얼마나 컸겠습니까? 물론 백인천 감독의 업적도 많습니다. 이승엽을 슬러거로 키우고 정경배, 신동주, 김한수, 최익성 등을 중용 해 세대교체를 이룬 점 ...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강기웅, 이종두, 동봉철 등을 트레이드 하고 (동봉철, 김태룡을 이병훈, 김훈과 맞바꾼 것 역시 밑지는 장사로, 동봉철이 백감독의 눈 밖에 났던 탓 이라는게 중론이었죠) 대구 경북 출신의 코칭 스태프를 대거 내 몬 점은 연고지를 기반으로 하는 프로구단으로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감독 혼자만의 결정은 아니었겠지만, 자기만의 스타일이 확고한 백 감독이 최근 롯데 사령탑으로서 행한 트레이드를 보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처 입은 "천재"는 결국 트레이드에 불응, 아직 한창 뛸 나이에 아쉽게도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 때 전 현대에서 멋지게 재기하길 진심으로 원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갈등 끝에 내린 결론이었겠습니까? 그동안 양준혁, 한대화, 손혁 등이 트레이드에 불응했지만 결국 선수생활을 포기한 케이스는 강기웅이 유일했을 겁니다. 팀은 자신을 버렸지만...강기웅은 그렇게...영원한 "삼성맨" 으로서 그라운드를 떠나갔습니다. - 에필로그 - 2000 시즌 개막전...류중일 선수의 은퇴식 장면을 보면서, "너무도 늦어버린" 삼성 선수 최초의 은퇴식 장면에 가슴 벅차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만수, 장효조, 김시진, 김성래, 이종두, 성준, 강기웅 선수 등. 역대 영웅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더군요. 류중일 선수가 옛 동료들이 보고 싶다며 코칭스태프로 다시 뭉쳐 꼭 우승을 이루고 싶다고 한 멘트에 가슴 뭉클했던 건...비단 저 뿐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화려한 아마추어 생활을 거쳐 프로에서도 스타로 군림하며 사상 최강의 키스톤 플레이를 연출했던 강기웅과 류중일~! 그 마지막의 희비는... 본인들의 뜻과는 달리 이렇게 갈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삼성의 화두는 < 라이온 2루수 구하기 > 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타력에서 최대 취약 포지션으로 꼽히고 있지만, 사실 지금의 박정환, 김재걸의 기량이 우려할 만큼 처지는 건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워낙 막강한 타선에 있다 보니 상대적 박탈감이 큰 것으로 봐야겠죠. 또 하나...역대 삼성은 내야...특히 <2루수 명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배대웅-김성래-강기웅-정경배 등으로 이어진 역대 라인업에서 아무래도 지금 후보군의 존재는 미약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2, 제3의 강기웅을 기다리는 마음은...그래서 더욱 절실해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퇴 후, 강기웅 선수가 경남의 한 병원에서 기획실장으로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원장으로 있다는 소리도 있고,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는 팬의 제보도 있었습니다. 모쪼록 건승을 바라며 언젠가 그라운드로 돌아올 날을 기대해봅니다. 스타플레이어를 추억하는 것 ~ 그 추억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류중일 선수의...아니, 우리 모두의 바램이 실현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인물열전- 강기웅 편-> 이만 줄입니다. 주책 없이 길어진 글...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덧붙이기 # < 89시즌의 루키 > 당시 7개 구단 중, 신인 스카우트에 대박을 터뜨린 팀은 투수 쪽에선 해태, 타자 쪽에선 삼성이었습니다. 이강철, 조계현, 이광우를 한꺼번에 받아들인 해태는 4연패를 향한 8부 능선을 넘었다는 평을 들을 만 했고...강기웅, 강영수, 최해명 등 국가대표 내야 트리오에 류명선과 김상엽이 입단한 삼성도 모처럼 기대에 찬 모습이었죠. < 역대 최고 2루수 > 지난해 팬들이 뽑은 (역대 올스타)에선 아쉽게도 요즘 팬들의 지지를 받은 현역 박정태에게 밀렸지만, 언젠가 전문가들(백인천, 김영덕, 하일성으로 기억함) 이 뽑은 (역대 베스트10) 에선 강기웅이 역대 최고의 2루수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