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시 산정동 천주교 입구 담밑에 높이 2척정도의 작은 雙碑가 있는데 이름하여 節婦碑이다.
新增東國與地勝覽 제35권 羅州牧편에 보면 烈女本朝란에 「羅氏형제로서 戶長 羅宗之女로 언니는 翰林 趙琢의 아내요 동생은 牽龍 林允德의 아내이다. 모두 일찍 과부되어 남편의 묘소에서 3년간 시묘생활을 했다. 집은 가난했고 제사에는 오직 삼가 지냈다. 永樂중에 牧使 權踐이 조정에 알리어 北莊里에 한쌍의 碑를 세웠다. 그러므로 이동리를 節婦里라하고 그 자손들을 復戶 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永樂이라하면 조선조 太宗 世宗때의 年號이고 나주목사 權踐은 邑誌에 의하면 1423(세종5년)년 癸卯 7월19일 부임하여 1424년 甲辰 10월초에 이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절부비는 1423년과 1424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筆者가 1990년 나주시 문화공보실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에 살고 있는 醴泉林氏宗中 대표이신 林德培(75세)씨가 찾아와 절부비가 예천임씨 12세 祖母의것이요 林노인으로부터는 17대 할머니라 하였다.
林노인의 나주 방문시에는 지참자료가 없었고 다만 예천임씨세보에 나타난 절부비의 현장답사 정도였다.
世譜의 杜門齊林公神道碑銘에 의하면 號는 杜門齊, 관직은 고려때 正順大夫行判典客寺事이고 조선때 贈正憲大夫吏曹判書였다.
부인이 둘이었으니 配가 貞敬夫人懷德任氏(父郞將吉成)와 繼配正敬夫人 羅州羅氏(父判書宗)으로 기록되었다.
절부비에는 號가 牽龍인데 世譜에 號가 杜門齊로 되어 있어 號가 여러개이거나 아마도 후손들이 고려말때의 杜門洞 72賢과 같은 충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두문제로 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允德은 고려말 때 사람으로 1391년 고려가 망하자 많은 엘리트 그룹들은 관직을 떠나 낙향하거나 소위 杜門洞에(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기슭에 있던 옛지명) 들어가 은둔생활을하여 두문동72현 또는 高麗守節臣이라는 충신으로 표방되듯이 允德은 낙향하였다고 林노인은 말한다.
世譜에 의하면 祖受命隱居扶餘白馬江天政臺下라하여 백마강 천정대 아래에서 은거하였고 조선정부로부터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을 하지 않았고 1415년 태종15년 乙未 9월10일 享壽 64세로 죽자 吏曹判書에 증직되고 동시에 禮葬하도록 命을 받았다.
그러나 配懷德任氏 묘는 부여군 窺岩面 虎岩洞에 있으나 允德의 묘는 선영에도 없어 林노인은 절부비의 기록으로 보아 允德은 고려말에 나주로 낙향하여 처가살이를 하다가 돌아가셨지 않았는가 추측하고 나주에 온 것이란다.
世譜에는 繼配正敬夫人 羅州羅氏判書宗之女以烈行命旌閭立碑于羅州節婦里墓亦在節婦里라 하였고 그烈行이 시묘3년이었음을 볼 때 允德은 나주에서 말년을 살다가 죽자 부인의 시묘살이로 그 열행이 세상에 알리어졌을 것이다.
允德의 죽의 해가 1415년이고 3년 시묘하였다면 1418년이 될것이며 그후 나주목사 權踐의 열행 천거가 1423년경이었으니 시묘후 6년이라, 상식적으로 열녀비를 세움에 있어 생전보다는 사후에 세움이 원칙이라 나씨부인은 아마도 1423년 이전에 남편을 따라죽자 그열행이 목사에게 까지 알려져 절부의 비를 세운듯하다.
옛문헌 기록이 오늘날 같지 않아 允德의 號가 杜門齊와 牽龍으로 따로따로 나타나고, 족보가 정립된것도 조선조 중반기때이니 그 이전의 미흡한 家系譜를 기초한 나주나씨 대동보에는 시집간 나씨형제도 발견할 수 없으니 더욱 아쉬운 일이다.
충청도 林노인은 살아생전에 允德할아버지의 묘를 찾아야겠다는 것이 희망이나 노인의 말대로라면 절부리 인근 산(현재 나주시 산정동의 장원봉 산록으로 추정)에 뭍힌 나씨 할머니의 옆에는 분명 允德 할아버지도 있을것인데 오늘날 금성산의 지봉인 莊元峰 산기슭 어느곳에는 允德할아버지와 나씨할머니의 離散靈魂들의 슬픈 사연을 위로할길이 없어 恨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