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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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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활과 화살 스크랩 동아시아의 활과 화살
알로하 추천 0 조회 116 15.12.10 09: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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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활과 화살

 

 

Ⅰ. 한민족과 활

 

한국인에게 활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 민족과 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단어가 바로 중국인이 우리 민족을 부르는 명칭 중 하나인 동이족(東夷族)이다. ‘이(夷)’라는 글자는 큰 대(大)자와 활 궁(弓)자가 결합되어 있다. 동이라는 글자를 곧이곧대로 풀어보면 ‘중국의 동쪽에서 살며 큰[大] 활[弓]을 잘 만들고 쏘는 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라는 뜻이 된다. 이로 미루어 이미 오랜 옛날부터 중국인들은 우리 한민족이 그들 한족보다 활을 잘 다룬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일반인뿐 아니라 왕도 활을 잘 쏜 것으로 유명하다. 역사적 인물로서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활 잘 쏘는 이’의 대명사로 기록되어 있다. 시대가 내려와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활을 잘 쏘았으며, 사도세자의 아들로 유명한 정조 또한 활을 잘 쏜 국왕으로 기억된다.

 

조선에서 활쏘기를 잘했던 이유는 유교를 국시로 삼으면서 심신을 단련하는 육례(禮, 樂, 射, 脚, 書, 數) 중 하나로 활쏘기가 장려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조선에서는 국가 의례로 활쏘기 행사를 거행하였다. 왕과 신하가 활 쏘는 대사례(大射禮)는 1477년(성종 8), 1534년(중종 29) 및 1743년(영조 19), 1764년(영조 45)에 군신 상하 간의 질서를 확립하고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였다. 한편 지방의 양반 사족들은 향약과 비슷한 향사례(?射禮)를 거행하여 사족 간의 친목을 도모하였다.

 

이렇듯 우리 한민족은 활을 좋아하고 잘 다룬다. 그것은 수천 년의 역사 동안 면면이 이어져 내려와 우리의 전통이 되었다. 지금도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다른 종목보다 유달리 활(양궁)을 잘 쏘아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한민족의 피 속에는 활을 잘 쏘는 조상들의 유전인자, DNA가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도판1 활 쏘며 수렵하는 장면, 고구려, 무용총

 

도판2 중국 고대 활과 화살 및 활쏘기 장면, 전국시대, 초(楚) 동호(銅壺)

 

 

 

 도판3 헤이안 시대의 활쏘기, 일본 平安時代

 

 

Ⅱ. 유물 속 동아시아의 활

 

인류는 이른 시기부터 멀리 있는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자 무기로 활과 화살을 개발하였다. 이후 인간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궁시를 제작하는 기술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궁시는 대개 나무나 대나무와 같은 유기물질로 만들어져 썩어 오래전의 유물을 확인하기 어렵고, 단지 흑요석(黑曜石)처럼 단단한 석제로 만든 화살촉에 의해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정복 전쟁이 빈번해지던 고대부터 무기가 발달하였다. 당시에 사용된 활과 화살의 형태는 유물 위에 새겨지거나 그려진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중국 전국시대(BC 475~221) 동호(銅壺) 유물을 보면 과녁을 향해 활을 쏘는 여러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한편 5세기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그려진 <수렵도>에서 말 위에서 짐승들을 향해 활을 쏘는 모습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고대 양국의 활은 기본 형태가 거의 유사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청나라 시대의 그림을 보면 조선 말기 19세기에 활을 쏘는 그림과 비교가 된다. 두 나라의 사수(射手)는 각각 청나라와 조선의 전통 복식을 차려입고 있어 전체적인 분위기는 다른 편이다. 더욱이 양자가 활을 쏘는 모습은 공통되면서 부분적으로 다르다.

그림 속 중국의 활은 150cm 정도여서 1m 안팎의 한국 활보다 길이가 긴 점이 다르다. 막상 양자에서 동시에 화살을 쏘면 날아가는 비거리는 후자가 훨씬 긴데, 이렇게 그림에서 알 수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몇 년 전에 인기리에 상영되었던 <최종 병기 활>이다. 시대 배경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무사와 조선의 사수가 활 대결을 펼치는 장면을 영화화한 것이다. 비록 영화적인 상상력으로 다소 활의 효능이 과장되긴 했지만, 두 나라 활의 특징과 조선 활의 장점을 극명하게 잘 그려내어 흥미롭게 본 기억이 새롭다.

 

한편 양국과 비교되는 것이 일본의 활이다. 주지하다시피 일본 활은 전체 길이가 220cm가 넘는 세계 최대 길이의 활이다. 16세기 조선의 『난중잡록』에 의하면 일본의 화살은 ‘장편전(長編箭)’이라 하여 여러 나라의 화살과 비교해서 일본의 화살이 매우 크다는 기록으로 이미 조선에서도 그러한 점을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큰 활을 사용하는 일본에서는 활을 잡는 위치도 특이하다.

일본의 활은 장대하기 때문에 위쪽이 길고 아래는 짧아서 헤이안 시대의 활쏘기 그림을 보면 매우 긴 활의 아래쪽을 잡고 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의 활은 “화살은 길지만, 먼 곳까지는 날지 않는다”라고 13세기의 몽고인이 기록하고 있어 비거리가 상대적으로 길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가면 그 중량이 더욱 늘어나 70g에 이르면 길고 무거운 화살을 폭이 긴 활로 쏘아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도판4 국가급 비물질문화재 취원호궁전제작기예(聚元號弓箭製作技藝), 양푸시(楊福喜),

 

도판5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궁장) 권영학 보유자, 2015.8.21. 필자 촬영

 

도판6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궁장) 故 김박영 보유자, 서헌강 촬영

 

 

Ⅲ.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

 

활과 화살은 조총이나 대포 등과 같은 화기(火器)를 발명하기 이전까지 가장 강력한 무기로서 중요했다. 이에 각국은 국력을 모아 활과 화살을 제작하였다.

 

이미 고려 때에 중앙 관청인 군기시(軍器寺)에 각궁장(角弓匠), 전장(箭匠), 전두장(箭頭匠) 등의 장인을 소속시켜 각궁을 만들었다. 또 궁중의 궁시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내궁방(內宮房)에도 각궁장(角弓匠)을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군기감(軍器監)을 설치 운영하였고 장인들을 소속시켜 활과 화살을 제작하게 하였다. 이들 장인은 다른 기술을 가진 장인과 달리 궁인(弓人)이나 시인(矢人)으로 불렀다.

궁인과 시인이라는 명칭은 『논어』에서 나오며, 그들 장인은 다른 물건이 아닌 무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우대하여 부른 것이다. 이에 조선은 국가 법전인 『경국대전』을 편찬하면서 궁인 90명, 시인 150명을 배정하였다. 아울러 이들 장인들은 각 지방마다 상당수를 배정하였고, 이 또한 여타의 다른 장인들에 비하여 많은 숫자에 해당되었다.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의 장색과 규모는 영조대 『속대전』이나 정조대『대전통편』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아울러 조선 후기에 국가적 행사를 위해 임시로 설치하여 운영하였던 각종 300여 도감마다 수많은 궁인이나 시인을 징발하여 의례용이나 선물용으로 사용할 궁시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19세기에 사적인 공방에서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의 모습은 김준근의 <기산풍속화>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궁장은 궁창을 앞에 두고 줄과 환으로 일정하게 다듬은 쇠뿔과 뽕나무 등을 옆에 두고, 완성된 각궁에 시위를 걸어 눈대중으로 확인하고 있다.

 

청나라 말에 전통 활을 만드는 장인의 모습은 <시궁정력(試弓定力)>에서 찾을 수 있다. 궁장은 입식 건물 안에 탁자를 놓고 그 위에 너댓 개의 활을 만들어 올려놓고, 다 만든 활을 과학적으로 무게를 재고 있다.

 

양국의 활 제작방식은 약간 차이를 보인다. 청나라 활 제작 장인 집단은 북경 동사대가에 있는 궁전대원리(弓箭大院里)에 17가호의 궁전 점포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취원호(聚元號)’이다. 이곳에서 중국 전통 활을 제작했던 장인이 양뤼린(楊瑞林)이며, 아들인 양원통(楊文通), 손자인 양푸시(楊福喜)까지 3대가 잇고 있다. 양푸시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전통활을 제작하여 2006년 중국의 국가급 비물질문화재 취원호궁전제작기예(聚元號弓箭製作技藝) 장인으로 보호 받고 있다.

 

한국의 경우 중국보다 45년 앞선 1971년 9월 13일 전통 활 제작 장인을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궁장)으로 지정하였다. 서울 황학정의 장진섭(張鎭燮, 1916~1996)은 조부(장문환)와 부친(장기홍)에 이어 3대째 활을 만들던 장인으로서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예천의 권영록(權寧錄, 1916~1986)은 부친(권태전 權泰全)의 대를 이어 활을 만들었다. 부천의 김장환(金章換, 1909~1984)는 조부(김원재)와 부친(김동천)의 대를 잇고 한국 제일가는 명사수로서 활동하고 부천 성무정의 초대 사두(1967~1982)가 되었다. 그의 기술은 제자인 김박영(金博榮, 1929~2011)이 전승하였다. 그의 사후 2015년 권영학(1943년생)보유자가 새로 인정되어 조부(권선복)와 부친(권우갑)의 가업을 이어 그 또한 3대째 예천 활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한편 화살을 만드는 시장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시장)으로 지정하였다. 화살로 유명한 장단에서 나고 자란 유영기(1936년생)는 조부(유창원)와 부친(유복삼)에 이어 3대를 잇고, 그 아들 유세현과 유승현이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장단 근처 원당에서 나고 자란 박호준(1944년생)은 조부(박희원)와 부친(박상준)에 이어 3대째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한편 김종국(1940년생)은 스승인 조명제(趙命濟, 1915~1980)가 조부(조성관)와 부친(조면보)의 대를 이었던 것을 본받아 예천에서 화살을 제작하고 있다.

 

한국에는 2004년 12월 14일 부천활박물관을 세웠고, 파주에는 유영기 보유자가 만든 영집궁시박물관이 있다. 반면 중국에는 2012년 신강의 이리에 성급(省級) 비물질문화재로 등록된 이청강(李靑岡)이 중화활문화 박물관(中華弓文化博物館)을 세웠다. 일본의 경우 무형문화재로 활을 지정하지 않아, 일본 경제산업대신(經濟産業大臣)이 전통적(傳統的) 공예품(工藝品)으로 ‘도성대궁(都城大弓)’을 지정하였다. 미야기현(宮崎?)에 위치한 미야코노조(都城市)에 7대째 120년 전통의 활을 제작하는 활제작소[楠見藏吉 弓製作所]가 위치하고 있다.

 

 

 도판7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유영기(시장), 출처 서헌강 촬영

 

도판8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김종국(시장), 출처 서헌강 촬영

 

도판9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박호준(시장), 출처 서헌강 촬영

 

 

Ⅳ. 활과 화살의 재료

 

활을 만드는 재료는 중국의 『고공기』에 의하면 나무[干; ?, 橘, 桑, 木, 瓜, 竹, 荊 등], 심줄[筋], 풀[膠; 말, 소, 사슴, 물소], 뿔[쇠뿔], 옻[漆], 명주실[絲]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중국과 한국은 뿔을 주재료로 삼은 각궁(角弓)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강궁으로 이름난 우리나라의 활은 여기에 화피를 더하여 7재(材)로 만든 우수한 복합궁이다. 물소 뿔(牛角), 쇠심줄(牛芯), 민어 부레풀(魚膠), 대나무, 뽕나무(弓幹桑), 참나무, 화피(樺皮)가 그것이다. 동물성과 식물성의 7가지 재료가 어우러져 제조되는 각궁은 살아있는 활이면서 인체에 비유할 수 있다.

예컨대 쇠뿔은 통뼈이며 대나무와 뽕나무 및 참나무가 세부 뼈대이고, 그 위에 바르는 쇠심줄은 근육이며, 그것을 연결하는 부레풀은 연골이고, 그것들을 예쁘게 다듬는 화피는 피부에 해당된다. 이중 물소 뿔과 대나무 및 쇠심줄이 활의 강도와 탄성을 이루어 가장 중요하고 이것을 견고하게 결합시켜주는 민어 부레풀의 역할이 중요하다.

활은 1년 중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 초순까지 제작하여 계절을 타는 공예품인데, 그 이유는 동식물성 재료들이 기온과 습도에 영향을 받아, 온도가 높고 습기가 많으면 심이 건조가 안되고 풀이 부패하기 쉽기 때문이다. 보통 활을 만드는 장인들은 여름에는 재료를 장만하고 찬바람이 나면 풀을 대와 뼈와 나무를 서로 붙여 정월 경에 건조시키고, 3월부터 한 달 이상 해궁 작업을 한다. 각궁은 제작이 까다롭고, 단계마다 원칙을 지키고 재료의 특성을 잘 파악해서 제작해야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각궁의 핵심 원료인 물소는 주로 아열대 지방인 중국 남부나 인도 및 인도차이나 등지에 서식하므로, 옛날부터 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했다.

 

무기를 제작하는 데 필수적인 재료여서 중국은 물소 뿔의 수출을 엄격하게 통제하였고, 조선 정부는 그것을 몰래 수입하려고 애썼다. 현재도 각궁을 위해 필수적인 재료의 수급은 어려움이 많다. 물소는 세계적인 보호동물이어서 물소 뿔을 수입할 때 세관의 통과가 어렵고, 쇠심줄은 근래 많은 소들이 일하면서 근육을 키우지 않고 육우용으로만 키워져 탄성이 없어 활의 탄성이 줄어든다고 한다. 게다가 접착제인 민어부레의 경우 예전에는 공급에 어려움이 없었는데 근래에는 민어부레가 정력에 좋다고 그것마저 식용으로 사용되어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강한 활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1488년에 조선에 왔던 명나라 사신 동월(同越)은 “조선에서 사용하는 화피궁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여 약간 짧으나 화살이 날아가는 힘은 심히 강하다”라고 평가하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의 활은 중국 것보다 작으나 탄성이 크고 강하다. 우리의 시장들은 대나무로 화살대[矢幹]를 만들고, 쇠로 활촉(雛)을 끼우며, 수리깃으로 화살깃(矢羽)을 만든다. 반면 중국의 장인은 죽시와 함께 유목(楡木)으로 목시(木矢)를 만들기도 한다.

 

한편 일본의 활은 대나무와 나무를 한데 결합한 복합궁이다. 일본의 활은 2m 이상으로 길고 무거워 탄성이 적어 근거리에는 위력이 높은 대신 멀리 날아가지 않았다.

 

이처럼 활과 화살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무형유산이면서, 한·중·일 삼국의 민족성이 반영되어 있다. 더욱이 각궁은 한국 장인들의 솜씨가 표출된 우수한 전통 공예기술로서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하다.

 

 

도판10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故 김박영 보유자 제작 각궁(角弓)

 

도판11 중국 양푸시(楊福喜)가 제작한 활 1m 60cm

 

도판12 중국 양푸시(楊福喜) 화살[箭], 위 2개 느릅나무[楡木], 3번째 목전(木矢), 아래 2개 죽시(竹矢), 2015.9.8. 필자 촬영

 

도판13 일본 미야기현(宮崎?) 미야코노조(都城市) 120년 전통, 楠見藏吉 弓製作所, http://jotaro-go.com/collect/2980

 

도판14 일본 경제산업대신(經濟産業大臣) 지정(指定) 전통적(傳統的) 공예품(工藝品) ‘도성대궁(都城大弓)’ http://jotaro-go.com/collect/2980 참고

 

 

 

- 글 : 장경희 (한서대학교 교수, 충남·서울시 문화재위원)

 

 

 

 

발행일 2015년 10월 1일(통권 제372호)

발행처 한국문화재재단 . 월간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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