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칭 일류대학들은 뒤바뀌어져 있다. 일제시대때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서울대학교가 어찌하여 현재까지도 일류로 버티고 있는가. 고려대학교 역시 친일파였고 연세대학도 제국주의 선교사의 대학아니였던가.
이 나라가 8.15이후 정상적인 정치노선을 걸어 왔다면 지금 이들 대학들은 없어져 있어야 하며 있더라도 현재 최 하위의 수준으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들이 어찌하며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운 사학보다 위에 군림해 있어야 하는가.
1920년 백여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전개하여 종합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자 일제는 이에 한국인의 고등교육기관을 봉쇄하고 회유할 목적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한다. 그리하여 이 학교는 조선사람의 독립의식을 고양시킬수 있는 정치.경제.이공등의 학부는 설치되지 않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수 있는 법문학부. 의학부만 설치하였고 1941년에 이공학부를 설치한다. 그러나 철도 등이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것이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조선에서 악탈한 자원을 운송하는 수단이 된것 처럼 경성제국대학도 일본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기관이 된다. 우선 일본 학생들에 비해 조선 학생들은 턱없이 적게 뽑았고 그나마 대체로 항일 의식이 있는 학생들은 경성제대라 하면 가까이 하지 않았다.
1946년 미군정하에서 경성제대는 국립 서울대학교로 바뀌고 초대 총장은 미국 해군대위 해리 엔스테드(Harry B. Ansted)였는데, 8.15후 민족주의 감정이 거센 상황이라 외국인 총장에 대한 반대여론이 컸다. 그리하여 2대 총장엔 한국인이되 이승만대통령의 입맛에 맞는 친일파 출신의 미국 유학파 이춘호(李春昊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이학박사, 6.25때 납북됨)가 되었다. 그 후 현재까지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계속 대두되고 있는 '학벌주의'의 정점에 서 있다.
서울대 정옥자(鄭玉子 사학과) 명예교수는 "머리만 좋고 의식이 트이지 못한 도구적 지식인을 확대 재생산하는 서울대 메커니즘"을 강하게 비판한바 있다. 사실상 우리나라 곳곳의 주요자리에 포진하고 있는 서울대 출신들만 의식이 트여 있었다 해도 현재 우리나라가 이토록 답답한 지경에 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려대학교는 1905년 항일투사인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이 사립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으나 1932년 중앙학원을 경영하고 있던 김성수(金性洙 1891~1955)가 인수해 경영하기 시작하여 1934년 현재의 안암동에 새 교사를 준공하여 이전하였고, 1946년에 종합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으면서 교명을 고려대학교로 바꾸었다.
이승만은 국민들의 친일파 처단 요구를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친일파들을 자신의 전위세력으로 활용하였는데 그 친일세력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성수였다.
김성수는 1891년 전북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仁村里)에서 아버지 김경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세살 때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간다. 16세때 일본유학을 가서 24세에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친부와 양부의 도움으로 중앙학원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뛰어든다.
김성수는 1920년 첫 발간되는 동아일보사에 사장으로 취임한다. 동아일보는 우리 민족의 독립추구라는 당면과제와는 거리가 먼 탄생 구조였다. 그는 독립투쟁보다는 3.1운동이 일어나던 전 해인 1918년 10월에 경성방직을 시작하는 데 그의 경성방직, 동아일보, 중앙고등보통학교등의 사업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은 주로 친부(親父) 김경중과 양부(養父) 김기중이 제공한 것이었다. 김성수일가의 재산은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군포항에서 일본으로 나가는 쌀 판매와 소작농 착취와 관련이 있었다. 그러므로 김성수의 경성방직과 동아일보 창설 중앙학교 인수에 들어간 자금의 성격은 순수하다고 볼수 없다.
김성수는 1935년에 소도회(昭道會)라는 단체의 이사를 맡는다. 소도회란 경기도청의 주도하는 경기도 내의 '사상범(항일독립운동가)의 선도와 전향지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로 이로서 김성수는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에 박차를 가 한다.
1936년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말소 사건이 있었으나 그는 사주로서 그 사건은 잘못되었다는 사과문을 발표한다. 그 다음해 1937년에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하고 심지어 주택의 철문 등 약 2백관의 철을 싣고 일본해군무과부로 찾아가 '적 격멸'의 탄환에 써 달라고 헌납하는 등 친일행위에 앞장선다. 그 외에도 그는 신문과 방송국을 통한 학병지원 강요, 학무국 주최의 전국 시국 강연회, 언론활동으로 친일행위에 앞장서는데 친일파 중에서도 학병 강요로 조선의 학생들을 대동아 성전(聖戰)이라는 죽음으로 내 몬 가장 열심 친일파이다.
그러나 1948년에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김성수를 조사하지 못하였다. 이는 친일 청산에 소극적이었던 이승만정권의 한계에 따른 결과이다. 이런 문제들은 2009년이 되어서야 극복되었다 하나 김성수에 대한 미화작업은 여전히 진행중이니 아직도 친일세력들이 건재해 있음이다. 그들은 김성수가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실체는 이렇게 악질 친일파였던 것을 끊임없이 은폐하려 노력하고 있다.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와 성북구 주민들은 김성수를 '조선청년을 학병으로 끌고 간 김성수' '성북구청은 인촌로(路)를 당장 폐기하라'고 주장하며 고려대 사거리에서 보문역 1.2km 구간 길인 인촌로 도로명을 바꿔주기를 건의했고 행안부는 법제처 심사결과를 기다리고 있다한다. 작년 2011년 8월에 개정안을 의결했다는데 2012년 8월 현재까지도 아직 인촌로(仁寸路)라는 도로명이 그대로 있는것을 보면 그 문제는 생각만큼 단순하지가 않은 모양이다.
박노자(朴露子 고대대학원수학 놀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교수)는 말한다. "이건희를 철학박사로 명명한 고려대보다 철학과 교수와 학생의 반발로 정몽준에게 끝내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주지 못한 전남대가 앞으로 비판적 지성의 고향이 될 확률이 더 높다."
1884년 궁정어의(宮廷御醫)였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H.N. Allen)박사가 서울 재동에 제중원(濟衆院: 초기 이름은 廣惠院)이란 병원을 설립한것이 바로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효시이다. 그 후 제중원은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의대교수였던 에비슨(O. R. Avison)박사가 인계 받아 1899년 미국 클리블랜드시의 세브란스(L. H. Severance)씨로부터 기증받았던 기금으로 1904년 병원을 신축하고 의학 교육기관을 확정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세브란스병원이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이다.
1909년에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명을 사립 세브란스의학교로, 1913년에는 사립 세브란스 연합의학교라고 칭하였고 1917년에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발전하였다. 해방과 함께 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회복하고 1946년에는 연희대학교로 승격되어 종합대학교로 인가된다. 현재의 교지(敎地)는 1917년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의 기부금으로 구입하였고 찰스 스팀슨(Charles S. M. Stimson)씨의 기부금으로 스팀슨홀을 건립하여 1920년에 이전한 것이다.
이렇게 연세대학교는 창립초기 미국 선교사가 설립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 민족의 정신과는 관계없이 서양의학과 서양식 교육기관으로 시작하여 발전되어 온 대학이다. 많은 대학들 중 그런 대학도 있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어찌하여 그 대학이 다른 많은 우리 민족 사학들보다 위에 군림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화여자대학교의 시작은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서울 정동의 자택에서 한 명의 한국 여학생으로 수업을 개시한것을 시초로 하여 1887년 고종황제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을 하사 받고 1910년 대학과를 신설한다.
김활란(金活蘭 일본식 이름은 天城活蘭 1899~1970 미 컬럼비아대 철학 한국최초의 여성박사)은 그 초기에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1918년부터 8.15 때까지 이화학당의 교수와 교장으로 재직한다. 그 동안 김활란은 일제 초기에는 여성운동가, 계몽운동가, 언론인, 교육인으로 각종 사회운동과 계몽운동에 힘써왔으나 1936년 전후로 완전한 친일파로 변절하여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친다. 일제는 세계 유례없는 '위안부'라는 군인들을 위한 성 노예제도를 만들었는데 당시 조선 총독부와 결탁한 김활란은 같은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해 조선인 처녀들의 위안부 모집에 열성적으로 앞장서고 또한 탁월한 효과를 내어 총독부의 인정을 받는다. 1943년 8월 7일자 매일신보 논문에서 김활란은 <거룩한 대화혼을 명심-적 결멸에 일로매진>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는 뱃속으로부터 대화혼(大和魂)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존엄하옵신 황실(黃室)을 받들어 모시고 생사를 초월하여 대군을 위하여 순국 봉사하는
그 마음 오직 우리 황국신민 만이 특히 제국 군인만이 경험할 수 있는 바이다." 라 주장한다.
또한 그해 12월 조광(朝光)이란 잡지에 보면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의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 등등 수많은 잡지에 일제를 위해 열성적인 글들을 올린다.
그녀는 후에 이화학당을 지키기 위해 어쩔수 없는 잠깐의 친일을 했다 변명하지만 그 당시 그녀는 입만 열었다 하면 천황폐하를 외치며 순진한 여성들을 꼬드겨 위안부로 동원한 열성 친일여성이었던 것이다. 8.15후 그녀는 친일파들이 그렇듯이 승승장구하여 이화여자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대한민국의 공보처장,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 등 정치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이렇듯 민족의 반역자 김활란은 역설적이게도 여성인권을 위한다는 한국여성단체들에게 추앙받는 존재로 여성해방운동의 대모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는 매년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이란것을 여성운동가들에게 수여하고 있고 현재에도 이화대학교에는 김활란 동상이 세워져있다.
김활란은 이화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금란(金蘭, 金活蘭이름의 첫자와 마지막자를 딴것)전도단이란것을 만들어 전국을 돌며 전도를 했는데 그것이 발전되어 지금 중랑구 망우본동에 있는 그 유명한 감리교회인 금란교회가 된다. 현재 신자수 13만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그 교회 김홍도목사는 작년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사탄에 속하는 사람(비 기독교인)이 시장이 되면 안된다'하며 박원순 후보자를 겨냥하여 말썽이 있었고, '올해 등록금 자살자가 16명인건 적은 거다' '북한의 노동당 2중대가 민주노동당이다' 등의 발언으로 물의를 빚더니 2005년 동남아시아 쓰나미때는 '쓰나미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는 자들'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에 비해 숙명여자대학교는 1906년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가 출자하여 명신여학교를 설립한것을 시초하여 초대 교장으로 정경부인 이정숙(李貞淑)이 취임하였다. 1912년에는 경선궁과 영친왕이 하사한 토지의 수익금으로 숙명여자보통학교를 운영하는 재단법인 숙명학원이 설립된다. 1945년 숙명여자전문학교로 개교하고 1948년 당당하게 대학으로 승격하였으니, 이 우리의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학교가 어찌하여 신사참배의 개신교 대학 이화대학보다 아래에 있어야 하는가.
우리나라가 정상적인 나라였다면 우리에게 최 일류로 남아야 할 두 대학이 있으니, 성균관대학과 동국대학이다.
성균관대학은 1398년 조선 태조 7년 현 위치에 성균관을 설립한 그 당시 국가 최고(最高)의 국립대학으로, 1953년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교로 승격 인가가 나서 초대총장에 김창숙(金昌淑) 노 혁명투사가 취임하였으니 올해 2012년 현재 장장 614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나라와 세계의 최고(最古) 유서깊은 대학이다.
동국(東國)대학교는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는 구한말 불교계의 선각자들이 민족 자본에 의한 민족교육을 해야 한다는 구국(求國)의 기치아래 1906년 개교한 명진학교가 모태이다.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민족과 인류사회 및 자연에 이르기까지 지혜와 자비를 충만케 하는 이상세계와 불교를 비롯한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노력한다는 것을 건학이념으로 한다.
이 두 학교야말로 우리가 세계에 내 세울만한,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할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갖춘 대학들이다.
일제 때만해도 동국대학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는 고대 전신인 보성전문이나 연희전문에 결코 뒤지지 않았었는데 미국이 우리나라에 나타나면서 국민들의 주체의식이 약화되다보니 우리의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학교는 친일파나 서양인들의 자본으로 세워진 대학들에 뒤지게 된다. 6.25때 서울에 진주한 인민군이 성균관대학과 동국대학만을 인정하고 지원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홍익(弘益)대학교는 1946년 원효로의 흥국사를 교사(敎舍)로 하여 홍문대학관이 설립된다. 그 다음 해 1947년 대종교재단(大宗敎財團)이 이를 인수하여 교사를 저동으로 이전하였다가 1948년 재단법인 홍익학원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다음 해 1949년 홍익대학으로 개편하였다. 홍익대학의 건학 이념은 '홍익인간'이고 홍익인간은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홍익대학은 2010년 이래 지금까지 그 학교와 관련된 노동자 문제가 끊이질 않고 있어 과연 그 건교이념인 홍익정신이 살아 있는것인지 이름이 아까울 뿐이다. 학교 운영자는 물론이거니와 학생들 조차도 무관심하여 그 당시 학생들 백명을 상대로 홍익대학교 공공서비스 노조가 농성하는 것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무려 83명의 학생들이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당시 청소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간단한것이었다. '최저임금 보장, 폭언 금지, 식비 지금, 식사공간 제공, 휴가등 대부분의 직장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것들이었는데 홍익대학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학생회 역시 학습권 침해라는 문제만을 부각시킨 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 문제가 사회문제로 떠 오르자 학교 측은 이는 청소조동자측과 용역업체 간의 문제라며 발뺌을 하다가 2011년 청소 노동자와 경비 노동자들에게 집단적 해고 통보를 내리고, 노동자들의 농성투쟁에 대해 2억 8천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하였다. 그리하여 홍익대는 원청사용자로서 책임이 있고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판결이 결정되었음에도 이에 불복, 다시 항소하였고 총학생회마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홍익대학교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불쌍한 노동자들의 노조활동을 거부하였으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건학이념과는 반대로 노동자들에게 가혹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것 같다. 이제까지 그 대학은 노동 착취의 대명사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데, 홍익대학은 우리의 아름다운 건국이념의 뜻을 도용하지 말고 이제 사익(私益)대학교로 이름을 바꿔야 할것 같다.
이제 지구상 마지막 분단국 한국이 하나로 통일해야하는 함은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를 하나로 통합한다는 필연적인 원시반본의 당위성이 될것이다. 그 통일철학은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정신이 될것인즉, 홍익대학은 교학이념처럼 그 정신적 구심점에 서서 당당히 우리 민족을 이끌어 가야 할것이다.
첫댓글 현대사에 얽혀진 대학들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 깊이 감사드립니다.
도올 김용옥선생은 김성수와 중앙고등학교에 대해 좋게 강의를 하더군요.
당시 서세의 지식에 의해 서세동점된 한을 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서학을 열심히 수용하고 배워야 했고 그래서 김성수를 비롯된 몇몇 뜻있는
지식인들이 중앙고등학교 자리에서 모였고 중앙고등학교가 민족운동에 많은
역할을 한 학교라고 주장하더군요..
그런데 현거선생님 말씀을 듣고보니 제가 판단하건대
도올 선생의 말씀도 일리가 있으나 현재 고려대의 하는 행태를 보면
친일의 잔재를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으로 보아 현거선생님 말씀대로
김성수와 중앙학교와 고려대는
친일의 잘못된 행태가 훨씬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민족이니 그들도 우리민족편에서 많은 생각은 했으리라 생각하지만
다른 치열하게 투쟁하신 구국 항일지사님들에 비하면 너무 안일한 대처였지 싶습니다.
김활란 박사가 세운 영란학교를 제가 다녔고 영란학교 바로 옆의 금란교회를
다니지는 않았으나 자주 지나다니며 보고 잇습니다.
초기의 자그마한 교회가 지금은 어마어마한 성전으로 커져 있는데
그 모습이 성스럽기 보다는 너무 세속적이며 부조화스런 점령자의 모습이라
영 탐탁스럽지가 않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홍익대학도 민족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대학이라 들었습니다만
뭔가 미흡한 점이 있는가 봅니다.
서울대이든 고려, 연대이든 우리나라 일류대학이라는 것이 미국 제국주의 대학의
하버드보다 훨씬 하위대학으로 평가받으며 그야말로 병신짓하며 소위 국내에서는
일류라고 뽐을 내고 다니니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울화가 치밉니다.
이런 문제가 현실적으로 단단하게 얽혀 있어서 저도 그동안 숱한 고난과
눈물을 뿌려야 했습니다.
그런 미제와 일제세력들이 인류사에 너무 심각한 미제사건을 수두룩하게
쌓아놓으며 점점 한국은 물론 인류전체를 씨가 마를 지경으로 엄청난
금융부도의 상황으로 몰고가고 있고 게다가 아무 죄없는 뭍생명들까지
몽땅 죽이고 있으니 조금의 상식만 가지고 잇어도 이에 당연히 대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미제와 일제에 철저히 세뇌당한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런 저를
미친 여자정도로 생각을 하고 현실에 부적응자로 치부해 버립니다.
저는 그런 잘못된 죄악이 넘쳐나며 배워봤자 소용이 거의 없는 그런 학문을
배우기 위해 내 아이들이 비싼 학비를 내가며 소위 일류대학이란 곳을
지향할 이유가 없다하여 남편과 엄청나게 격돌하는 바람에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이 아팠고 전교 최하위 성적으로 미제의 잘못된
지식을 배우지 않고 머리를 텅텅 비워놓았습니다. ㅎㅎ..
그런 과정이 지금은 현거선생님께 담담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잇었으나
그동안은 너무나 아프고 혹독한 시련이었고 큰 아이는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와야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데 현실은 미친듯이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있고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사는 모습에서
얼마나 깊은 절망을 했는지 모릅니다.
마치 난리가 저혼자 난거나 마찬가지였고 사람들은 아무일 없이
평화롭게 즐겼으며 그 가운데 내 아이들은 점점 아프고 병들어갔으니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답이 아니니 갈 수도 없고... 그 답답한 세월을 십여년 견디며
해결을 찾아 많이 방황하고 공부하면서 하루를 십년같은 세월로
견디어 왔는데 드디어는 제가 그토록 염려하던 금융공황사태의 불이
붙기 시작하더니 근래에 들어 불이 마구 붙어 크게 일어나니
사람들이 그때서야 놀라서 우왕좌왕하였고 저는 그런 때를 대비해서
십수년 준비해왔기에 부지런히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미국인들은 특히 그렇고 국내인들도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모르고 당장 내일 자신의 재산에 불이붙어 몽땅 탈지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대부분이니 참 답답한 심정입니다.
무엇이든지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시대의 변화를 너무 앞서가도 실패를 하기에
백성들과 함께 하면서 새로운 답을 그때그때 소화할 수 잇는 양만큼
선도해가며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는게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종률선생님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많은 민중들에게
소개하는 것도 그런 시대적 때에 맞추어 내놓아야 한다고
현거선생님께 조심스럽게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결국 병이되고 화근이 되는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극단적으로 치닫기를 즐겨하는 것 같습니다.
항상 중용의 도가 필요하고 균형감각이 필요하지만
지금처럼 더 절실하게 중용의 도가 필요한 때가 없지 싶습니다.
물론 과거사도 지나친 왕정으로 중용의 도가 어긋났기에 오늘의
극단적 사태를 부른거라 생각을 합니다.
과거의 반성없이 지금만 탓하면 또다른 실수를 범한다고 생각합니다.
은행에서도 지들 나름대로는 발란스를 열심히 맞춘다하지만
너무 지엽적인 발란스지 싶습니다.
안그래도 홍익대학에 대해서 언급할까 망설이던 것을 까페장님 말씀이 계시어 다시
본문 끝에 추가하였습니다. 다시 읽어봐 주십시오.
현거선생님의 말씀에 깊은 존경과 놀라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아마도 현거선생님께서 아버님 이선생님과 같은 정신과 불굴의 의지가
닮으셨을거라고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