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다양한 책을 읽는다. 베스트 셀러가 되어 끊임없는 인기를 받는 책도 있고, 조용이 서점 한 구석에 물러나 있다가 사람들과 만나는 책도 있다. 흔들리는 인생의 나침반이 돼줄 보석 같은 지혜로 가득한 책! 그런 책이 있다. 수없이 경쟁에 내몰리고, 성과에 시달리고,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시간이 어깨를 짓누르는 벽돌처럼 무 겁게 느껴질 때 나도 모르게 읽게 되는 책, 좌표를 잃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그리고 고통으로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가슴에 꼭 안게 되는 책 말이다. 책은 지루한 잔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언제든 찾아볼 수 있도록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서 있는 친구 같은 존재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때 책은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우리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다독이고 치유해준다. 인생을 살면서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책, 잊을 수 없는 책을 갖는 것보다 영혼을 행복하게 하는 선물은 없다. 하지만 수많은 책들 속에서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삶의 스승으로 여길 만한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책을 찾는 이들에게 아래의 책들은 기분 좋은 만족감을 준다. 운명처럼 만난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변화시키는 데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가를 벅찬 깨달음과 감동으로 깨닫게 한다. 그리고 알고는 있었지만 잠시 잊고 있었던 훌륭한 명저를 다시 떠올리고, 수많은 책의 홍수 속에 묻혀 있었던 숨은 보석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한다. 문학에서부터 인문, 사회, 과학, 교양에 이르는 보물 창고를 만나 깊은 깨달음과 감동을 통해 마음을 움직이는 책과 벗하라 삶이 정체되고 있을 때, 일상에서 늘 무엇인가 빠져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을 때 우리의 영혼은 불안으로 가득해지고, 영혼을 구원해줄 무언가를 원하고 찾게 된다. 책은 가장 쉽고도 명쾌하게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최고의 멘토로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지혜와 지식이 응축되어 있는 삶과 깨달음의 산물이다. 이런 이유로 책은 우리에게 어디로 갈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삶의 나침반이며 열정의 에너지원으로 다가온다. -09.06.04 이 세상의 어떤 책도 그대에게 직접 행운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은근하게 그대 자신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놓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대가 필요로 하는 모든게 있다. 태양도 별도 달도. 왜냐 하면 그대가 거기서 찾은 빛은 이제 그대 자신 속에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줄곧 찾아서 헤멘 지혜는 갖가지 책 속에서 , 어느 페이지에서나 빛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대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 미국의 시사주간지 ‘The Times'는 1900년 이후 출간된 책 중 엄선하여 '세상을 움직인 책‘ 100권을 선정해서 발표했다. 분야는 인문, 사회, 과학, 문학, 예술 및 기타 등 5개 영역으로 나누었다. 신빙성은 없지만 책 목록을 보아하니 대충 만들어진 리스트는 아닌 듯 하다. 무엇을 읽어야 할 지 갑갑할 때 한번씩 참고하면 도움이될 것이다. (이미 책방에서 소개한 것도 있지만 아래 각 분야별 리스트 중에서 추천했다.) I. 문학 1. D.H.로렌스/ 아들과 연인/ 1913 2. 루쉰/ 아큐정전/ 1921 3. 엘리엇/ 황무지/ 1922 4.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1922 5. 토마스 만/ 마의 산/ 1924 6. 카프카/ 심판/ 1925(?) 7.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927 8.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1927 9. 헤밍웨이/ 무기여 잘있거라/ 1929 10. 레마르크/ 서부전선 이상없다/ 1929 11.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1932 12. 앙드레 말로/ 인간조건/ 1933 13.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1939 14. 리처드 라이트/ 토박이/ 1940 15.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1941 16. 카뮈/ 이방인/ 1942 17. 조지 오웰/ 1984/ 1948 18. 사뮈엘 베게트/ 고도를 기다리며/ 1952 19.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1955 20.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1956 21. 잭 케루악/ 길 위에서/ 1957 22.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1957 23. 치누아 아체베/ 무너져내린다/ 1958 24. 귄터 그라스/ 양철북/ 1959 25. 조지프 헬러/ 캐치 22/ 1961 26.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1962 27.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 1967 28.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1980 29.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984 30. 살만 루슈디/ 악마의 시/ 1989 「알레프」와 『백년 동안의 고독』 : 두 개의 현미경적인 우주 1940년대 이전에 대다수의 라틴아메리카 소설가들은 전통적인 리얼리즘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토착적인 대지를 묘사하면서, 자기들 세계의 여러 비참한 사회· 경제적 조건에 대항하여 사회 저항적 성향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1940년대와 1970년대 사이에 이런 지역주의 소설은 일련의 변화를 겪었고, 마침내는 오늘날의 역동적인 아방가르드 예술 형식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현대 라틴아메리카의 이런 문학적 ‘혁명’의 아버지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이다. 그의 형이상학적 주제와 문체 혁명은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리얼리즘에 집착했던 선조들과는 달리, 발전하는 사회의 현실을 세계 보편적인 가치와 미학적 가치에 의거하여 탐구하는데 더욱 큰 관심을 보였다. 이런 이유로 보르헤스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기록 문학의 차원에서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소설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상상력을 복구시켰다고 종종 일컬어지는 것이다. 비록 그가 존경받는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이지만, 그는 특히 독창적인 단편들 ―1940년도에 쓰여진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수록된 『픽션들』과 『알레프』―로 인해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존경받는 작가로 추앙 받는다. 아마도 보르헤스의 『픽션들』과 『알레프』의 영향을 받은 세대 중에서 가장 탁월한 작가는 1982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일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보르헤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 콜롬비아 작가는 1967년에 『백년 동안의 고독』을 출판하는데, 이 작품은 문학적· 상업적으로 중남미 전체를 강타한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현대의 대작으로 인정했으며, 독자들은 이런 의견을 확인시키듯이 새로이 찍어낸 책이 나올 때마다 모두 품절 시켰던 것이다. 가령 초판본은 나온 지 1주일만에 바닥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이 덕택으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진 축구 선수나 우상화된 유행가 가수처럼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 소설의 성공은 수많은 상을 받으면서 확인되었고, 서구 비평계는 이 소설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 책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지 불과 몇 달 후에 2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는 진기록을 달성했던 것이다. 비록 『백년 동안의 고독』이 보르헤스 작품을 회상케 하는 문학적 메타포와 모티브가 넘쳐흐르지만, 이 글의 목적은 아르헨티나 작가의 가장 중요한 작품인 「알레프」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비교하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강박 관념 중의 하나는 인간이 혼돈의 현실을 보다 다루기 쉬운 규모로 축소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런 강박 관념은 보르헤스의 「알레프」에 반영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언어라는 직선적이고 연속적인 매체를 통해 세상의 모든 관점을 동시적으로 종합하는 미학적 문제를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는 보르헤스이자 작가로 지칭되는 1인칭 화자가 그가 사랑했던 베아트리스 비테베르보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비극적인 날 이후, 매년 보르헤스는 그녀의 사촌인 카를로스 아르헨티노 다네리를 방문하여 그녀의 생일을 기념한다. 보르헤스가 마음속으로 혐오하는 카를로스 아르헨티노를 방문한 어느 날, 그는 보르헤스에게 자기가 「대지」라는 장시를 쓰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그 시가 끝나면 아마도 지구의 모든 구석을 묘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몇 주 후에 카를로스는 보르헤스에게 전화를 걸어 격앙된 목소리로 집주인들이 술집을 확장하기 위해 자기 집을 헐어 버리려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것이 커다란 재앙이 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자기 집 지하실에는 자기가 쓰던 장시를 완성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알레프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당황해 있는 보르헤스에게 알레프란 모든 점을 포함한 공간 속의 점이며, 세상의 모든 장소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장소이고, 따라서 동시에 모든 각도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알려 준다 (또한 알레프는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이며, 신비주의자인 카발리스트들에게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신적인 것이다). 그러자 호기심에 찬 보르헤스는 당장 카를로스의 집으로 달려간다. 보르헤스가 도착하자 카를로스는 지하실로 기어 내려가 아홉 번째 계단에서 누운 채로 위를 쳐다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지하실 문을 닫는다. 보르헤스는 카를로스가 완전히 미친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실제로 알레프를 보게 된다. 게다가 카를로스가 말한 대로 직경이 2센티미터나 3센티미터 정도 되는 조그마한 구체는 “상상 불가능한 우주”를 담고 있었다. 보르헤스는 빛나는 이 구체를 어느 정도 자세히 묘사하지만, 그는 알레프 속에서 두 개의 비밀을 보고 상심한다. 이 두 개의 비밀은 다름 아닌 베아트리스가 카를로스에게 보낸 몇 통의 음탕한 편지와 베아트리스의 시체의 “썩은 먼지와 뼈”(28면)였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카를로스 아르헨티노의 집과 알레프는 파괴된다. 보르헤스는 알레프를 잊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베아트리스의 사랑스런 얼굴에 대한 그의 기억이 지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알레프는 허구적 보르헤스(작품 속의 등장 인물로서의 보르헤스)나 카를로스 아르헨티노가 언어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마술적인 비전이다. 카를로스의 시는 현학으로 점철된 터무니없는 작품이다. 또한 조그만 구체를 묘사하려는 허구적 보르헤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며, 그는 그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내 이야기의 핵심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작가로서의 내 절망이 시작된다. 모든 언어는 상징들의 알파벳이며, 그 알파벳의 사용은 나와 대화를 하는 상대편들이 공유하는 과거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겁에 질린 내 기억이 겨우 간직하고 있는 무한한 알레프를 어떤 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내 눈은 모두 동시에 그런 행위들을 보았다. 나는 차례로 그것을 옮겨 적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란 것은 차례차례 적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26면) 차례차례 순서대로 적는 알레프에 대한 묘사는 카를로스 아르헨티노의 시처럼 완전히 쓸데없는 것이다. 그것은 굉장한 대상에 훨씬 못 미치는 가시적인 현실을 닥치는 대로 조각조각 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카를로스 아르헨티노와는 달리, 허구적 보르헤스는 예술의 매체로서 언어의 한계를 깨닫고 알레프에 대한 설명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 복잡한 이야기는 아마도 알레프와 베아트리스를 비교하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레프처럼 죽기 전의 베아트리스는 예리한 일련의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알레프는 보르헤스가 그 안에서 죽은 베아트리스의 뼈를 보고 난 후 얼마 안되어 파괴된다. 또한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베아트리스의 얼굴 생김새는 알레프처럼 보르헤스의 기억으로부터 희미해진다. 비록 화자(허구적 보르헤스)는 시간이 흐르면서 베아트리스를 잊지만, 그가 그녀를 묘사한 초상화는 실제 보르헤스(작품 바깥에 있는 작가)와 독자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제공한다. 알레프(세계)의 동시적인 이미지를 연속적인 언어로 결코 포착할 수 없었던 허구적 보르헤스가 행했던 방법대로, 실제의 보르헤스도 알레프의 메타포로써 베아트리스의 개성을 포함한 다양한 면을 창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독자가 작품을 끝마쳤을 때, 각 부분들 모두가 전체적인 동시적 이미지와 결합함으로서 직관적으로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이 전달하는 베아트리스의 총체적인 인상은 카를로스 아르헨티노의 지하실에서 알레프가 전달한 완전한 세계에 대한 메타포가 되는 것이다. 이런 메타포적인 알레프(베아트리스의 이야기)는 카를로스 아르헨티노가 자기 지하실에서 알레프를 보면서 영감을 받은 끝없는 현학적인 시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알레프(이야기)는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논리의 장애를 뛰어넘는 동시적이고 영원한 시각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알레프의 이야기는 문학의 메타포로 등장한다. 보르헤스에 의하면 문학의 목적은 객관적 현실을 뒤엎고 자체의 상상적이고 말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레프」는 『신곡』에 대한 패러디로 읽힐 수도 있다. 카를로스의 두 번째 성(姓)인 다네리는 단테 알레기에리(Dante Aleghieri)라는 이름의 첫 번째와 마지막 글자를 결합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 과장되고 형편없는 아르헨티노를 이탈리아의 문학 거장과 아이러니컬하게 연결짓고 있다. 카를로스가 자기의 식당 지하에 있는 알레프를 보도록 보르헤스를 인도하기 때문에, 그는 또한 지옥을 통해 단테를 인도하는 베르길리우스와 동일시될 수도 있다. 베아트리스 비테베르보는 단테의 이상적인 여인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그녀의 이름뿐만 아니라,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천국에서 경멸적으로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생전에 베아트리스가 보르헤스를 경멸적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묘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미학을 대표하는 알레프의 메타포 역할을 하는 그녀는 신비적인 절대자를 향해 영혼의 여행을 떠나는 단테의 알레고리를 회상케 한다. 이런 상호텍스트적인 비교는 보르헤스의 단편 작품의 구조를 풍요롭게 하며, 이런 관점에서 읽을 때 알레프가 완벽한 세계를 축소판으로 재현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거대한 예술 작품의 축소판이 된다. 비록 수많은 문학 작품이 총체적인 허구적 우주를 창조하려고 노력했다고 혹자는 주장할지 모르지만, 나는 『백년 동안의 고독』만큼 이런 면에서 성공한 작품은 매우 드물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에덴부터 요한 묵시록까지의 복잡한 역사를 서술하며, 또한 소우주의 형식으로 세계의 역사를 그린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날아다니는 카펫을 타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기적들이 주관적인 영역과 객관적인 영역의 경계선을 지워 버린다. 총체성이라는 전반적인 인상은 지금까지 언급된 이 작품의 순진해 보이는 문체와 문학 기법 및 구조적인 장치뿐만 아니라, 참담한 비극과 재미있고 엉뚱한 유머로 더욱 강화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독창적인 시간의 사용도 그의 소설이 전달하는 총체성의 인상을 주는데 한 몫을 한다. 마콘도의 설립과 발전과 경제적인 부흥 및 쇠퇴와 파괴에 대한 직선적인 역사는 주기적인 순환과 원형적인 패턴에 대한 신화적이자 시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것은 선적인 시간 진행을 수정하고, 보다 통합된 내적 구조를 확립하며, 보다 위대하고 풍부한 주제와 문체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신화의 비이성적 요소들은 일상 생활의 현실이 차지하는 좁은 차원을 확장시키고 이야기가 보편적 의미를 갖도록 이끌고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모두 12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은 크게 3부로 나뉜다. 1부의 1장과 2장은 부엔디아 가계(家系)의 시작을 서술한다. 다시 말하면, 근친 상간을 저지른 선조들의 죄 (이것은 아마도 원죄를 나타내는 것 같다)와 그것이 돼지 꼬리가 달린 아기를 탄생시킨다는 것, 에덴과 같은 마콘도의 설립, 늙은 집시인 멜키아데스의 도움으로 과학의 경이에 눈을 뜨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현대 문명의 기초를 외치며 마콘도에 도착하는 장사치들과 곡예사들에 관해 언급한다. 1장과 2장의 전환점인 3장에서 서술되는 불면증이란 전염병에 대한 에피소드는 이 소설에서 가장 황당한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레베카가 도착한 후 얼마 안되어 사람들은 이상한 병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병은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기억 상실증까지도 초래하는 것이었다. 사물들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는 모든 물건에다 이름을 써서 붙여 놓는 방법을 생각하고,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전에 알았던 지식을 보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회전식 사전의 형태로 순진한 기억의 기계를 만드는 일에 착수한다. 그가 그 기계에 입력할 14,000개의 기재 사항을 완성했을 때, 늙은 집시인 멜키아데스가 그 병을 치료할 기적적인 물약을 갖고 마콘도로 돌아온다.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기억의 파괴와 쓰여진 말을 통해 인간의 지식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선사 시대의 원시 부족이 역사적 과거를 자각하는 사회로 변모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의미한다. 선사 시대 사회의 특징은 모든 것이 반복되고, 모든 사건이 신화 속에 가려져 있거나, 아니면 신화 의식을 통해 정기적으로 재현되는 순환적 시간이다. 반면에 그런 사회가 뒤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없는 직선적인 시간에 진입하면, 그 과거는 역사가 되고, 이것은 기억이란 것을 허용치 않으므로 글로써 보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2부를 구성하는 4장부터 15장은 콜롬비아의 역사적 현실을 아주 분명히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즉,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일어난 시민 전쟁과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직후에 발생한 바나나 붐을 다룬다. 여기에서는 과학적 발전,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인간적 이상의 타락의 결과로 마콘도에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 과정을 서술한다. 2부와 3부의 전환점이 되는 16장에서는 4년 11개월 2일간 내리는 비가 거의 모든 마콘도를 파괴하며, 모든 바나나 농장들을 쑥밭으로 만들고, 마콘도에 살았던 원래의 주민들 중에 몇 명만의 생존자를 뺀 나머지 사람들을 마콘도에서 내쫓는다. 성경의 대홍수를 회상케하는 이 비바람은 미국 제국주의자들을 내쫓으며, 타락한 물질 숭상주의를 근절하고, 순수성을 회복하며, 사랑과 상호 이해를 복구하면서 일시적으로 영혼을 정화한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3부에 있는 마지막 네 장들은 과거의 생명력에 다시 불을 붙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몰락해 가고 마침내는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마콘도를 묘사하고 있다. 이런 비극적인 종말은 전쟁의 참화와 경제 침체와 부엔디아 가계의 특성인 비이성적 행동의 결과로 보여진다. 위에서 언급했던 순환적인 시간은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역사를 보완하고, 소설의 시간적 차원을 확장시키며, 새로이 생명력 있게 펼쳐지는 확장된 현재의 꿈을 묘사한다. 이런 점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부엔디아 가족 내에서 이름과 특성이 반복되는 현상이다. 가령 호세 아르카디오들은 충동적이며 모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아우렐리아노들은 명민하며 은둔적인 성질을 띤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아내인 우르술라는 그녀의 자손들이 각 세대에 재출현하는 이런 행동 패턴을 지켜보면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원모양으로 도는 것이라고 말한다. 텍스트의 순환적 리듬은 수많은 사건들이 근친상간과 연결되어 일어나면서 더욱 심화된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극적인 순간을 유지하고, 원죄의 신화를 고이 간직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예시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필라르 테르네라는 부엔디아 가계의 역사 ―소설의 시간적 메커니즘―를 “끝없이 반복되는 톱니바퀴, 다시 말하면 축이 손을 댈 수 없이 점차로 마모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계속해서 돌아갔을 수레바퀴”(364면)라고 설명한다. 계속해서 돌아가는 시간의 톱니바퀴는 순환적 주기를 상징하고, 축은 직선적인 역사를 상징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역사의 위압적인 무게는 신화적 부활의 리듬을 손상시키며, 점차로 허구적 세상을 엔트로피의 상태로 이끌어 간다. 시간의 톱니바퀴는 일련의 순환적 단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구조에 의해 은유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가령 1장의 첫 문장은 그 예를 보여준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총살 집행 부대 앞에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그 아득한 오후를 회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오후에 아버지는 얼음을 가르쳐 주려고 그를 데려 갔었다.”(11면) 여기에서 미래의 사건(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총살 집행 부대와 직면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얼음을 알게 되는 것)으로 갑작스럽게 옮겨가며, 이것은 이 장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제시된다. 아래에서 자세히 보여지겠지만, 소설의 내용을 시사하는 이런 순환적 단위들은 소설 마지막에서 보르헤스의 알레프를 떠올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단일 이미지로 집약된다. 현실과 환상을 교묘히 융합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방법은 총체적 허구의 세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인상적인 기법이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며, 모든 것이 현실적이다. 그의 숙모 중의 한 사람에 관해 말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일화는 이런 서사 기법의 핵심을 보여준다. 이 숙모는 모든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 경우에, 그것에 대해 설명해 주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사람들에게 그녀의 대답이 진리라고 믿게 하는 능력이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어느 날 어떤 여자아이가 이상하게 생긴 알을 갖고 그녀에게 다가와서는 왜 혹이 있느냐고 물었던 장면을 회상한다. 그러자 그 숙모는 주의 깊게 그것을 살펴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얘야, 이 알에 왜 혹이 있는지 알고 싶어? 그건 전설에 나오는 도마뱀 알이라 그런 거야. 그러니 마당에 불을 지펴서 태워 버려.” 그래서 그들은 불을 지펴서 아주 자연스럽게 그 알을 태워 버렸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일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이 내게 『백년 동안의 고독』의 핵심을 제공했습니다. 이 소설 안에는 가장 놀랍고, 가장 특이한 것들이 도마뱀 알을 정원에서 태워 버리라고 말한 이 숙모의 무표정한 얼굴과 똑 같은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하지만 나는 실상 그 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소설 속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일상적인 것은 환상적으로, 또한 환상적인 것은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필체와 서사적 관점을 교묘하게 사용한다. 그리하여 허구적 세계의 실제적 요소들을 환상적 요소들과 융합한다. 이것을 보여주는 가장 멋진 예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의 장남인 호세 아르카디오가 불가사의하게 죽는 장면이다. 어느 날 호세 아르카디오는 사냥을 한 후, 아내인 레베카와 함께 살고 있던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안뜰에 사냥개를 매어 놓고, 부엌에 죽은 토끼들을 걸어 놓고서, 나중에 소금에 절이기로 마음먹고 나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침실로 간다. 얼마 후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그것은 그가 죽었다는 신호였다. 그리고는 그 죽음이 미친 이상한 여파를 이렇게 묘사한다. 한 줄기 피가 문 밑으로 흘러 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거리로 나왔고, 울퉁불퉁한 테라스를 향해 곧장 가더니 다시 난간을 타고 내려와 층계로 올라가 터키인의 거리를 따라 갔고, 길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다른 길모퉁이에서는 왼쪽으로 돌았고, 부엔디아 가족의 집 앞에서 직각으로 돌아 닫힌 문 아래로 통과하여 카펫을 적시지 않기 위해 벽 쪽으로 달라붙어 응접실을 가로지르고는 다른 거실로 향했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식탁을 피했으며, 베고니아 화분들이 놓인 복도로 나아가서 아우렐리아노 호세에게 산수를 가르쳐 주던 아마란타의 의자 아래로 눈에 띄지 않게 지났고, 그런 상태로 곡간으로 들어가더니 우르술라가 빵을 만들려고 36개의 계란을 깨려고 하던 부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느님 맙소사!” 우르술라가 소리쳤다. (129-130면) 이 대목과 마찬가지로 언급될 수 있는 것은 그의 피가 오른쪽 귀에서 흘러나왔으며, 아무런 무기도 없었으며, 그의 신체에서는 어떤 상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호세 아르카디오의 죽음은 완전히 환상적이지만, 아주 정교하고 정확한 문체와 현실적인 언어, 그리고 이 사건을 둘러싼 수많은 일상 생활의 세부적인 묘사로 인해 거의 믿을 수밖에 없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와 반대적인 효과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두 아들을 서커스에 데려가서 얼음을 처음 본 장면에서 발견된다. 그는 우선 집시들에게 멜키아데스에 관해 물어 보며, 그의 오랜 친구가 열병으로 싱가포르에서 숨을 거두었고 자바 해의 가장 깊은 곳에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상심한다. 이런 소식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아이들은 멤피스의 현인의 신제품이라는 것을 보기 위해 솔로몬 왕의 소유였다고 추측되는 근처의 텐트로 데려가 달라고 조른다. 세 장의 입장권을 산 후, 그들은 텐트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 안에는 구리 코걸이를 하고 발목에는 무거운 쇠사슬을 찬 거대한 몸집의 집시가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들어 있는 해적선의 보물 상자를 연다. 이 현상은 석양의 햇빛처럼 여러 색깔의 별로 부서진 무수한 바늘을 가진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자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이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야”라고 외친다. 마치 성경에 손을 얹고 증거 하듯이 그 얼음덩이를 만지면서 그는 “이것은 우리 시대 최고의 발명품이야”(26면)라고 단언한다. 이 대목에서 일상적인 사물인 얼음은 상상적이고 감정적인 언어와 이국적인 풍부한 세부적인 설명을 통해 마술적인 기운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것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에게 ‘미스터리’에 대한 강한 반응을 야기한다. 호세 아르카디오의 죽음과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얼음을 발견하는 장면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어떻게 환상적인 것을 현실적으로 보이게 하고, 또한 현실적인 것을 환상적으로 보이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방법을 통해 그는 객관적이고 상상적인 현실 사이의 경계를 없애고 총체적인 허구적 우주를 창출한다. 특히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실용적인 정신의 소유자인 우르술라는 자기 아들의 믿을 수 없는 죽음을 현실적인 리얼리즘으로 해석한다. 반면에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엉뚱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남편은 얼음을 경이의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이런 것을 통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현실이란 상대적이며, 그것의 신빙성은 현실이 우월하게 제시되느냐, 아니면 열등하게 제시되어 있느냐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마콘도의 족장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생애는 여러 면에서 서양 문명의 전개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마콘도를 설립하기 전날 밤에 거울 벽으로 둘러싸인 집들의 현란한 도시를 꿈꾼다. 이런 꿈은 물질적인 번영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보여준다. 멜키아데스가 가져온 과학의 미스터리와의 접촉은 지식과 부를 얻기 위해 메피스토텔레스와 계약을 맺은 파우스트의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술을 이용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노력은 현대의 회의주의를 암시하며, 그의 관심을 끄는 태엽 감는 춤추는 인형은 18세기의 이신론(理神論)적 모델인 이성적이고 완벽히 정돈된 세계를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치게 되고, 후에 오랫동안 밤나무에 묶여 있게 되는데, 이런 그의 운명은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케 한다. 죽기 직전에 그는 거울의 미로를 방황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젊은 시절의 유토피아적인 꿈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시사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인간의 비이성적 세계관에 대한 메타포이다. 세상의 미스터리를 해결하려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싸움은 그를 신화적 존재로 부각시킨다. 이런 그의 신화성은 프로메테우스적인 운명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후 이슬비 내리듯이 떨어지는 노란 꽃송이와 죽기 직전에 마콘도의 설립자로서 그의 기억을 보존하고자 귀환하는 프루덴시오 아길라르의 유령에 의해 획득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서사적 관점도 총체성의 인상을 주는데 기여하는 또 다른 요소이다. 소설 전체를 통해 독자는 행위와 분리된 비인칭 전지자적 화자가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고 믿게끔 유도된다. 그러나 소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우리는 주요 작중인물인 멜키아데스가 화자이며, 그의 양피지와 소설은 동일한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런 순진한 장치를 통해 허구적 세계는 소설 바깥에 있는 실제 세계의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가정된 전지자적 화자 혹은 실제 작가를 소설 내에 포함시키면서 소설 내에서 또 다른 허구적 세계를 창출한다. 이 이외에도 멜키아데스의 방은 시간성이 없는 신화적인 영역으로 등장하며, 이것은 집의 나머지 부분을 파괴하는 힘과 맞선 불굴의 창조력을 보여주는 성역의 중심이 된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가장 멋진 부분인 마지막 세 페이지는 보르헤스가 사용한 문학적 모티브로 가득 차 있다. 부엔디아 가족의 최후의 생존자인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개미떼에 의해 끌려가는 갓 태어난 자기 아들의 몸을 보는 순간,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 적힌 “이 가족의 첫 번째 사람은 나무에 묶여 있고, 마지막 사람은 개미에 먹히고 있다”(381면)라는 제사(題詞)를 갑자기 떠올린다. 자신의 운명이 양피지에 적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멜키아데스의 방을 나무 판자로 모두 막아 버린다. 그리고 그 방에 처박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멜키아데스의 모국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백년 전에 쓰여진 부엔디아 가족의 역사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보르헤스를 어느 정도 회상케 하는 그 늙은 집시는 “짝수 행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적인 암호로, 홀수 행은 스파르타의 군대식 암호로”(382면) 쓰고 있었다. 또한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멜키아데스가 사건들을 인간들의 전통적인 시간 순서대로 차례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1세기 동안의 일상사를 압축시켜 그것들이 마술적인 순간에 공존할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 역시 「알레프」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계속 양피지를 번역하면서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멜키아데스가 아르카디오에게 들려준 노래로 된 교황의 회람들(이것은 보르헤스가 좋아하는 단어이다)을 커다란 소리로 읽는다. 그리고는 뒤로 건너 뛰어 자기의 잉태 상황을 발견한다. 이 순간에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보르헤스적인 혈통의 미로 속에서 자기의 이모인 아마란타 우르술라와 조우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문에 종지부를 찍도록 운명지어진 돼지 꼬리 달린 아이임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양피지(혹은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마치 그가 말하는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자기가 살고 있는 순간을 목격하는데, 이것은 보르헤스가 종종 사용하는 모티브이다. 바로 이 순간 그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마음속에 그렸던 ‘거울의 도시’ (혹은 신기루)가 바람에 휩쓸려 갈 것이며, 영원히 인간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임을 알게 된다. 멜키아데스는 수많은 언어의 근원인 인도· 유럽어 계통의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보편적인 인간 경험을 기록하기 위한 이상적인 매체로 작용한다. 과거의 목소리로 가득 찬 허리케인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번역하는 말의 홍수로 이루어진 역사를 파괴하는 힘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양피지를 해석하는 순간에 응시하는 말하는 거울은 이상적 독자를 대표하는 박식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와 허구의 창조자인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시상(詩想)에 해당하는 멜키아데스와의 완벽한 의사 소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작가보다 마술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마술사에 대한 그의 사랑은 『백년 동안의 고독』 에서 탐지되는데, 이 허구적 세계는 마치 창조주가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요술에 의해, 요술 속에서, 요술로부터 생성되고 파괴된다. 또한 이와 동일하게 이런 모든 것을 포함하는 세계는 심지어 자체의 독자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를 발아시키는 모체라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독자가 사라지는 현상은 그가 소설을 마쳤을 때 상상의 왕국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제거되는 독자의 외부적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인다. 위에서 보여준 것처럼 「알레프」와 『백년 동안의 고독』은 총체적인 허구적 우주를 묘사하려고 애쓴다. 현실을 전달하는 언어의 힘에 항상 회의를 느꼈던 보르헤스는 15페이지 분량의 단편 속에서 마술적인 알레프를 묘사하려는 헛된 노력을 포기한다. 그 대신에 그는 베아트리스 비테베르보의 얼굴을 통해 알레프의 메타포를 창조한다. 이것은 독자들이 이 작품이 완료될 때 직관적으로 포착해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이야기는 문학에 대한 메타포로써 등장하지만, 알레프가 우주의 축소판인 것처럼 단테의 『신곡』에 대한 축소판 패러디로 읽힐 수도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훨씬 방대한 규모이기 때문에 인간의 현실에 대한 많은 층위를 요약하는데 성공한다. 즉, 역사와 신화, 논리와 환상, 비극과 유머,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소설의 구조는 가족, 도시, 국가, 대륙과 사실상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나선형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져 형상화되고 있다. 소설의 주춧돌로 사용되는 신화는 이런 형식적 구상을 재확인시키며, 예술적 통일성을 고양하고, 일상의 경험에 대한 보편적인 의미를 인정한다. 보르헤스의 알레프는 욕심 많은 두 사업자가 자기들 술집을 확장하기 위해 옆집인 카를로스 아르헨티노의 집을 소유하면서 파괴된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세계는 여러 이미지를 동시에 몽타쥬하는 것으로 축소되며, 이것은 보르헤스의 알레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나서 이 세계는 역사의 거대한 힘에 의해 무너진다. 돼지 꼬리 달린 아이와 거울의 도시의 파괴는 인간이 꿈꾼 유토피아가 인간들이 자체 내에 지닌 악의 씨로 말미암아 성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러나 ‘거울의 도시(혹은 신기루)’는 알레프처럼 보르헤스의 허구적 상징, 즉 독자가 작품을 끝마쳤을 때 자취를 감추는 환각적인 세계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보르헤스의 동그란 구체(球體) 모양의 환상적인 알레프와 마찬가지로, 부엔디아 가족의 연대기는 궁극적으로 망각의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독자의 마음속에는 직관적으로 포착된 것이 남아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베아트리스의 총체적 이미지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문명의 시적인 요약인 것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는 문학이란 사람들을 재미있게 하기 위해 고안된 최고의 장난감임을 알게 된다. 나는 보르헤스가 아마도 이런 정의를 찬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보르헤스가 그의 작품들을 출판하지 않았더라면, 『백년 동안의 고독』은 지금과는 다르게 되었을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걸작처럼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었다면, 토마스 만의 '요셉이야기'도 읽어보세요, 라고 권해봅니다만 양이 꽤 되는 관계로 (국내 출판본은 450페이지 내외로 총 여섯권) 읽으려면 작정을 하셔야 될지도.. 한 주에 한 권씩 읽는다, 라는 계획을 세워보면 어떨까요. "백년.."과의 유사성 - 이름과 개성, 반복, 대물림 - 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습니다만, 백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리면서 읽으면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게다가 무척 재미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 / 심판 『심판』은 『성』, 『변신』과 함께 카프카의 3대 작품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구성을 가진 작품이다. 엔간히 인내심 있는 독자라도 눈살을 찌푸리게 되고, 웬만큼 소설적 교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읽고 난 후에 놀라운 얼굴을 짓게 하는 프란츠 카프카의 문학적 본령은 어떤 것이며, 우리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령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그런 대답을 기다린다. 초기의 주요작품 중편 『변신』에서 주인공인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침상에서 자신이 흉물스런 한 마리 벌레로 변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모멸을 받고 사회와 등진 채 내적 고투를 겪으며 숨져 간다. 작가가 이를 발표했던 20세기초의 독 문단은 표현주의가 기세를 올린 때였으므로 그 사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설이 있다. 카프카 문학에 심취되었던 김정진 교수는 이렇게 적은 바 있다. ‘표현주의는 종래의 소위 외계의 감각적 인상을 수동적으로 받아 들여서 묘사하려는 태도를 배척하고, 외계에 대하여 자아를 굳세게 대립시키고 자아의 내면생활의 표출을 예술의 사명으로 함으로써 능동적으로 주관에 의하여 개조된 세계를 형성하려고 시도한다.’ - 『변신』은 이 방법론에 어느 정도 부합하고 있다. 후기의 주요작인 『성』에서는 마을에 도착한 측량사 K가 성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를 들을 수는 있으나 천신만고의 노력을 해도 끝내 이르지 못하고 만다. 성은 신의 은총을 상징하며, 들어가고자 해도 좌절하고 마는 주인공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현대인의 초상이라 함직하다. 재론할 여지가 없이 카프카는 후대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위의 장편을 비롯한 여타 작품은 이 사조의 효시가 되었을 것이다. 사회의 모든 기성 가치는 믿을 수 없고, 절대자 앞에서 얻는 고독과 절망만이 실존이라는 것, 그리하여 인간 삶은 부조리할 수밖에 없다는 명제는 그의 소설 등장인물이 온몸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바다 이런 이색적이고 비현실적 극한 상황을 그린 소설 사이에 장편 『심판』이 위치해 있다. 주인공 요제프 K(이름으로 보아서도 유대인일게 틀림없는)는 작가 카프카 외의 다른 사람일 수 없다. 그가 겪는 공포, 부란, 위기의식은 세계 제1차 대전을 유랑민 유대인으로 겪으면서, 경제적 공항과 뒤범벅이 되어 통째 사회 지반이 흔들리는 절망적 상황을 살았던 작가 자신의 정신적 풍향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 야기의 사건은 K의 30번째 생일날에 시작하여 31번째 생일날로 끝을 맺는다. 생일이라는 코드에서 '탄생과 죽음'을 읽을 수 있다. 탄생과 죽음은 '인간의 존재'를 의미하므로 이 재판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재판이라 할 수 있다. 누가 K를 고발했는지, 왜 고발했는지, K를 심판하는 상급재판관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이 재판은 '자신'에 대한 자신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K는 외면상으로는 은행의 관리자적 위치이며, 입고 있는 속옷이 고가품이라는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사회적·경제적 위치가 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회적 경제적 위치가 어느 정도 안정권에 속하게 되는 과정까지 타인에 의해 그가 쌓은 부와 권력을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와 의심을 받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는 보편화되어 있는 현상인데, 이를테면 가난했던 정치지망생이 정치가가 되어 부와 권력을 쌓아 가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그 정치가를 순수하게 바라보지만은 않는다. 권력남용, 공금횡령, 비자금, ....결국에는 부패라는 단어까지 들썩거리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 실정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자신은 스스로 행한 행동들을 깨닫지 못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인생의 한 과정 속으로 자연스럽게 은닉해 놓은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과 자신의 거리가 너무나 가깝기 때문에 미처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가운데 인간은 죄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야기 중에서 신부가 한 말 "처음부터 거리를 두고 말하지 않으면, 그만 마음이 약해져서 임무를 등한히 하게 된단 말이야." 라는 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자신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도 모르며 자신은 착하게 살아간다고 착각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모습인데, 작품에서 K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계기가 마련이 되어야지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게 되는데, K 역시 생일날 아침 낯선 사람에 의해 '체포'가 되면서부터 자신의 삶에 대해 반추를 하고 뭔가 잘못한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라 마련이 된다. 이렇게 어떤 무엇인가가 (그것이 사람이든, 제도이든)자신의 삶에 개입을 시작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분리하여 먼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이때, 보통사람들은 '자신을 반성함으로써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주인공 K는 자신의 기소문제에 대해 '내가 어떤 죄를 저질렀을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나 반성이 아니고, 형식적·표상적인 것에 의문을 품고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기 때문에 범죄의 유무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누구의 손에 의하여 공소되었는지, 그 절차를 어느 관청에서 다루고 있는지, 당신들은 정당한 수사관인지..'같은 문제로 일을 해결하려고 한다. K가 찾아 나서는 것은 자신을 재판하는 장소, 재판하는 사람을 찾는 일에 몰두하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도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결국 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여인들이나 (뷔르스토나, 서기장의 부인, 레나 등)화가, 변호사는 도움에서 멀어지고 오히려 순간 순간의 감정에 사로잡혀서 또 다른 곁가지들의 문제들을 만들게 될 뿐이다. 근본적인 문제가 배제된 상태에서 형상적인 문제를 열심히 쫒기 때문에 K가 사건을 향해 나아갈수록 점진적으로 혼란한 상태가 심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먼지가 자욱한 법정 안의 모습, 좌우익으로 갈라진 청중들의 모습, 미로와 같은 법원사무실 등등, 점점 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신부를 만나서 뭔가 실마리를 찾는 듯 하지만, 결국 주인공은 자신의 이러한 원죄 앞에 무기력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판정에 굴복하고 만다. 개 같은 죽음, 굴복만을 남긴 채... 이야기 속의 이야기 '법률 입문서'에 『심판』을 읽을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안고 태어나며, 살아가면서도 본인도 알 수 없는 사이에 사회적 계율이나 제도 등에 묶여서 살아 간다. 이 계율이나 제도의 실체는 이미 정해놓은 하나의 법칙이며 이론(지식)에 불과 한 것인데, 정작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은 그것에 매여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 및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가치인 존재의 의미마저 희미해 진다. 또한 그 계율의 속성마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입구에서부터 차단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므로서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안개와 미궁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한 채, 혹은 너무 많은 길로 인해 오히려 길을 잃어버린 채 책을 덮게 되는 데, 곧 『심판』은 자신의 실존문제, 즉 무의식적인 삶에 대한 스스로의 재판이기 때문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여러 입장에서 해석되어질만큼 그 가닥을 잡기 어려운 작품이다. 꿈꾼 내용을 이야기 하는 듯한 분위기, 디테일은 오히려 현실보다 더 자세하다. 수많은 알레고리적 요소들이 정신분석적 구조를 형상화한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소설의 묘미는 결코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적 접근이나 심리적 접근으로는 풀 수 없는 카프카만의 세계에 있다. 그는 기억의 창조를 통해 무언가 자기가 싫은 것을 지우려 하고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적으로 인간의 문화사가 만들어온 외면적 억압일수도 있고, 자본주의적 비인간화일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그의 관심은 이런 특정 운동의 하수인으로 종결되지 않는 내적 자유를 지닌다. 책 한권이 하나의 각인을 넘어 각성을 향하도록 한 작품이었다. 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읽는 사람을 하나의 충격이라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끔찍한 현실을 느끼게 하며 역설적인 미를 느끼며 각성이란 것을 인식히켜주는 작품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대충 줄거리는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파리 출생으로, 아버지는 여러 나라의 피가 섞인 유한 계급이고 어머니는 세 살 때 세상을 떠나 엄격한 이모 밑에서 자랐다. 열세 살 때 애너벨이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이 어른들에 의해 좌절되고 소녀가 병으로 죽자, 그 이후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어린 소녀를 탐하게 되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가 된다. 순진한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천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님펫이라 불리는 이 소녀들은 30년쯤 연상인 남자에게 마술적 힘을 가진 악마로서 작용한다. 험버트는 내밀한 욕망을 억제하려 애쓰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서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기쁨을 맛본다. 영문학과 불문학을 공부한 그는 어린애 같은 발레리아라는 여자와 결혼한다. 친척으로부터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려는 날,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로 떠난다. 분노와 외로움으로 험버트는 정신요양원에서 1년을 보내게 되는데, 자신의 비정상적인 성욕을 교묘히 감춘다. 서른일곱 살이 된 험버트는 뉴저지의 램즈데일에 방을 얻게 된다. 여주인 샬로트의 열두 살 난 딸 롤리타에게 광적이고 치명적인 사랑을 느끼게 된 험버트는 롤리타의 곁에 있기 위해 샬로트와 결혼한다. 어느 날 롤리타에 대한 사랑을 기록한 험버트의 일기를 보고 충격을 받은 샬로트는 흥분하여 밖으로 나가다가 교통사고로 죽는다. 롤리타의 보호자가 된 험버트는 캠핑중인 롤리타를 거짓 핑계로 불러내어 <도취된 사냥꾼>이라는 호텔에 함께 묵는다. 그의 자제된 성욕은 롤리타의 유혹에 무너지고 미국 전역의 호텔들을 함께 전전하다가 롤리타는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험버트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가 붙잡으려 할수록 롤리타는 점점 포악해지며 비정상이 되어간다. 고립된 생활에 싫증난 롤리타는 연극에 출연하게 되고, 결국 두번째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이 여행에서 둘은 계속 어느 중년 남자의 추적을 받다가, 어느 병원에서 롤리타가 사라진다. 3년 간이나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다니던 험버트는 리타란 여자와 결혼하여 롤리타를 단념하고 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롤리타가 돈이 필요하다는 편지를 보내오고 험버트는 그녀에게 돈을 주면서 다시 돌아와 달라고 간청하지만 거절당한다. 롤리타를 납치해 이용하고 버린 자가 극작가 퀼티임을 알아내고는 그를 찾아가 죽이고 경찰에게 붙잡힘으로써 이야기가 끝난다. 인간이 가지는 정염(情炎)의 대상에 대한 도덕적 기준이란 무엇인가? 1955년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에서 출간되자 미국을 비롯한 영국 등 유럽각국의 비난과 성적기준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이 오늘날 현대문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명작의 대열에 서게 된 것은 사회적 가치 기준이란 변화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실증 예(例)라 할 수 있겠다. 12년 7개월의 세상을 산 사랑스런 소녀‘돌로레스 헤이즈’에 대한 37세의 남자‘험버트’의 격정적이고 치명적인 사랑이야기다. 그가 사랑의 열정에 휩싸여 부르는 이름은 ‘롤-리-타’, 그는 어여쁘지만 섹시하고 천박함이 어울린 사랑스런 소녀들을 ‘님펫’(요정의 별칭)이라 통칭한다. 어린 시절 겪었던 달콤한 사랑의 연인 ‘에너벨’의 죽음이 가져다 준 상처를 ‘프로이트 식’정신적 외상(外傷)이 가져다준 병적 성향으로 그 변질된 性的대상에 대한 취향을 정당화 하지만, 내심 험버트는 그런것만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상상력의 자극을 극대화하는 감각적인 문장들은 압권이다. 작가의 후기에서 이 작품이 미국의 출판사에서 거절된 이유 중의 하나가 포르노그라피로 읽히기에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듯이 외설이 난무하는 작품으로 접근하면 그 독서는 실패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체로서의 롤리타를 향한 험버트의 떨리는 욕정과 순간순간의 그 관능적 묘사의 미학은 감정적 공감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푹신한 세포 속에 있는 아주 작은 미친 남자”,“그 뜨겁고 귀여운 고양이의 앞발을 잡고 어루만지고 꼭 쥐었다”, 독자들 모두 상상이 가리라, 누군들 그가 말하는 앞발을 놓고 싶겠는가! 오, 그리고 “상아 같이 매끄럽던 감촉”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서문을 작성한 자가 작가 본인이 아닌 ‘존 레이 주니어 박사’로, 감옥에서‘험버트’가 작성한 유고의 출간편집자로 노출된다. 그러나 이는 서문이라기보다는 진실과 실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품 해석의 중요한 단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작품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후기는 작가 자신 바로 ‘나보코프’의 서술로서 작품‘롤리타’가 가지는 소설적 위치와 그의 지속적인 고민의 하나였던 소설의‘실재’성에 대한 고뇌가 설명되고 있다. 작가는 어찌보면 실재성을 표현하려는 현대소설의 허구성만을 입증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작가의 후기는 독자를 당혹스럽게 할 수도 있다. 어린소녀 롤리타를 향한 주인공 험버트의 광적인 탐닉은 분명 오늘에도 윤리적, 그리고 법적으로도 용인될 성질의 사랑이라고 순순히 수용하기에는 버겁다. 그러나 험버트의 롤리타에 대한 육체적 갈망에는 보호적 요인이 끝없이 등장되어 지고지순함과 희생적 열정으로 표현되고 있다. 오히려 롤리타의 게임에 놀아난 인상을 갖기에 이른다. 성적 대상의 선정에 있어 비정상적이고 모멸감을 갖기에 충분하지만 주인공의 운명적이자 마법적이라기 까지 할 수 있는 롤리타에 대한 격정은 인간에 내재된 어찌할 수없는 통제 불가능한 그런 것이라고 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스러운 공감인가? 단순화해서 관능을 표현한 최고의 문학성을 지닌 최음성 강한 성도착자의 회고록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작가 ‘나보코프’ 소설의 실재성에 대한 실험을 볼 수도 있으며, 우리 인간 본성에 대한 모순과 분열된 이중성을 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성적 대상의 기준과 같은 성적 취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위선, 즉 도덕적 가치기준에 대한 회의라는 측면에서 접근 할 수 도 있다. 독서 내내 내밀한 관능의 향기가 쉬이 유실되지 않는다.... 이 책의 내용 상당 부분은 주인공 험버트의 상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어의 유사 단어 혹은 영문학의 작품들을 이용한 언어 유희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영문학이나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물론이고 영어권 독자라고 하더라도 그냥 주욱 읽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구석이 많다. 게다가 대다수 소설의 고전이 취하고 있는 고전적 문체라든가 사회 사조의 반영 같은 것도 그냥 이 소설을 읽어서는 얼른 와닿지 않는 데가 있다. 독자의 참여가 강하게 요구되는 구조 해체적 소설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포스트모던 문학의 시조로 불리기도 한다. 따라서 롤리타의 1부를 읽어갈 즈음(롤리타는 전체 2부로 구성되어 있다.), 도서관에서 이 소설에 대한 짧은 분석문을 구해서 읽어보았다. 또한 이 책 말미에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소설에 대한 또다른 해석이 실려 있었다. 이 중 하나의 글은 롤리타를 문학가가 추구하는 실체로 규정하고, 험버트를 이를 잡을 듯 잡을 수 없는 문학가로 설정한다. 극작가인 퀼티는 고전적 문학가, 즉 포스트모던적인 자유분방한 소설에 반항하는 자들로 그려진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은 상당히 전문적인 상징 문학이 되어버린다. 내가 수긍한 다른 글은 이 소설을 지은이인 나보코프의 자전적 소설로 본다. 즉 롤리타는 그가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돌아갈 수 없게된 러시아를 상징하며, 그가 젊어 쫓겨난 러시아에 그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갖고 있다. 여러 민족의 피가 섞이고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험버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글을 쓰는 나보코프를 나타낸다. 마지막에 이미 나이가 들어버린, 남의 아이를 임신한 롤리타에게 끝까지 사랑을 맹세하는 험버트 역시 변함없는 그의 러시아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II. 인문 1.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1900 2.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일반언어학강의/ 1916 3.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1920 4. 라다크리슈난/ 인도철학사/ 1923~27 5. 지외르지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1923 6.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1927 7. 펑유란/ 중국철학사/ 1930 8. 아놀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1931~64 9. 마오쩌둥/ 모순론/ 1937 10.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이성과 혁명/ 1941 11. 장 폴 사릍르/ 존재와 무/ 1943 12. 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945 13.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1947 14. 시몬 드 보봐르/ 제2의 성/ 1949 15.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951 1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1953 17. 미르치아 엘리아데/ 성과 속/ 1957 18. 에드워드 헬렛 카/ 역사란 무엇인가/ 1961 19.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1962 20.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 1962 21. 에드문트 후설/ 현상학의 이념/ 1964 22. 미셸 푸코/ 마과 사물/ 1966 23. 노엄 촘스키/ 언어와 정신/ 1968 24. 베르터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1969 25.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앙티오이디푸스/ 1972 26.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 1976 27.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1978 28.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979 29.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1979 30. 위르겐 하버마스/ 소통행위이론/ 1981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독일 실존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기존 전통서양철학의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며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서론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의 설명>에 이어 <현존재에 대한 준비적인 기초분석>과 <현존재와 시간성>이라는 2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존재와 시간』은 그리스시대부터 철학의 핵심과제였던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궁극목표로 삼고 있다. 그 수단으로서 하이데거는, 인간존재를 실존에 근거하여 분석하는 일을 이 저작의 주제로 삼았다. 그 사색의 근본적인 힘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리고 목표의 전통적인 낡은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점 및 인간분석의 신선함은, 새로운 철학을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게다가 이 저작은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 하이데거는, 주위에 마음을 뺏겨 자기도 모르는 새 타인의 지배하에 들어가, 자신을 잃어버리고 획일적으로 변하는 인간상을 그려냈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삶을 과학의 족쇄로부터 해방시켜, 삶이 가진 다양한 차원과 풍부한 논리를 되살리고자 했던 하이데거의 노력과 그가 주목한 ‘존재’와 ‘시간’의 관계에 대한 대답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의 혁명『존재와 시간』! 독일 실존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그는 『존재와 시간』을 통해, 기존 전통서양철학의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며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이 거작은 서론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의 설명〉에 이어 〈현존재에 대한 준비적인 기초분석〉과 〈현존재와 시간성〉이라는 2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과연 그것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어떨까·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자들은 ‘존재’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오직 그것이 무엇인가를 논의해 왔다. ‘존재’란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논의할 이유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때까지의 서양 철학사를 ‘존재망각의 역사’라 정의하며, 독단적 철학이라 비판하였다. 인간마저 사물로 여기게 되어 인간소외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대신 ‘현존재’를 내세우는 새로운 개념으로 전통철학을 바로잡고 재구성하였다. 특히 언어는 인간의 현존재를 대표하며, 존재이해의 원천이 된다고 하였다. 『존재와 시간』은 서양철학사 혁명적 업적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그의 사상은 O. 베커·T. 발라우프·W. 슐츠 등의 철학자와 특히 새로운 수정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존재와 시간』은 그리스시대부터 철학의 핵심과제였던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궁극목표로 삼고 있다. 그 수단으로서 하이데거는, 인간존재를 실존에 근거하여 분석하는 일을 이 저작의 주제로 삼았다. 그 사색의 근본적인 힘은 사람들을 매료한다. 그리고 목표의 전통적인 낡은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점 및 인간분석의 신선함은, 새로운 철학을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게다가 이 저작은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주위에 마음을 뺏겨 자기도 모르는 새 타인의 지배하에 들어가, 자신을 잃어버리고 획일적으로 변하는 인간상을 그려냈다. 그 안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직면하게 된다. 그러한 우리가 자기 자신을 되찾는 것은, 홀로 죽어가야 하는 고독하고 유한한 자신의 존재를 불안 속에서 자각했을 때이다. 하이데거는 주창한다. “타인의 지배에 놓여 있는 일상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유한하고 고독하며 불안으로 가득 찬 세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디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미를 밝힐 수 있다.” 이 주장에서 문명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진하게 배어나온다. 이런 점이, 세계대전 이후 불안과 동요가 흘러넘치는 상황에서 유럽문명에 절망하던 사람들을 매료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하이데거의 통찰력은 시대가 변할수록 그 위대함이 더욱 빛난다. 그는 앞으로 인류역사는 기술과 과학에 크게 의지하게 될 것으로 보았고, 그 눈부신 발전의 이면에 웅크린 어두운 그림자를 꿰뚫어보았다. 그래서 그는 기술과 과학의 발전으로 이루어지는 인류역사의 ‘논리’를 밝히는 데 진력했다. 더 나아가 앞으로 인류가 누릴 삶의 문법과 문화의 논리는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심했다. 그 결과 하이데거는 서구 형이상학이 기술과 과학의 토대임을 간파하고, 그 형이상학이 품고 있는 일면적, 일방적인 이성중심의 논리를 비판하며 그 근원의 구명을 시도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의 삶을 과학의 족쇄로부터 해방시켜, 삶이 가진 다양한 차원과 풍부한 논리를 되살리고자 했다. 하이데거가 주목한 것은 ‘존재’와 ‘시간’의 관계다. 하이데거는 시간 속에서 형성하는 존재의 기운과 사건에 주목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두었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므로, 유일하고 변하지 않으며 모든 시대와 문화에 통용되는 존재는 없다. 단지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부름에 나름의 방법으로 대답하는 것일 뿐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번개처럼 빠르게 퍼져, 당시 사상계의 형성을 순식간에 바꾸어버렸다. 그 뒤의 독일철학 동향을 논하자면 『존재와 시간』의 감화를 빼놓을 수 없다. 독일 사상계뿐만 아니라 유럽 전반, 나아가 미국과 아시아 등 전 세계에 널리 전해져 깊은 감명을 주었다. 『존재와 시간』은 사실 서론에서 예고된 전체의 전반부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미 발표되어 현존하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아직 보여주지 않은 사상을 약속하는 책으로서 존재해 왔다. 초판 이후 사반세기가 지났을 무렵, 하이데거는 이 미완성된 책에서 ‘미완’이라는 표시를 지울 결심을 표명했다. 이리하여 『존재와 시간』은 하나의 커다란 단편(斷片)으로 고정되었다. 단편으로서의 『존재와 시간』은 하이데거가 40년 동안 걸어간 사색의 길의 출발점으로서 기념비적인 책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이 『존재와 시간』을 이런 기념으로 여겼다. 그는 『존재와 시간』의 후반부를 쓰지는 않았지만, 더욱 깊어진 자신의 세계에서 얻은 사색의 경험을 바탕으로, 발표되지 않은 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해 왔다. 이리하여 『존재와 시간』은 기념비적인 의미에서 다시 읽혀야 할 역사로서 오늘날에도 그 모습을 빛내고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존재와 시간』이라는 논문에서, 철학 역사상 처음으로 분명한 물음으로서 설정되고 전개되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존재와 시간』이란, 한 권의 책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사색에 부과된 임무를 일컫는 명칭이다.”라고도 말했다. 그렇다면 『존재와 시간』은 책으로서는 고정되었지만, 임무로서는 여전히 완료되지 않은 사태로 남아 있는 셈이다. 이 사태를 임무로 받아들이고 전 세계 사상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하나하나의 작품에 영혼을 바치며 독자적인 환경을 개척해 나간 이 강인한 사상가는, 지금도 여전히 ‘길 위에 서’ 있다. 세상에 알려진 그 사색의 발걸음은, 확실히 현대철학의 장엄한 경관이라 불릴 만하다. 세계는 지금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세계화’라는 명목 아래 모든 민족과 역사·문화를 서양문명의 끈으로 하나로 묶고 있다. 이와 같은 획일화는 인류의 미래를 생각할 때 달가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전쟁과 환경재난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다양한문화와 역사의 ‘존재의 논리’에 관심을 돌려 앞으로의 인류역사를 이끌어갈 대안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은 그 첫걸음으로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준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담고 있는 그의 언어철학의 대표작.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며 언어의 궁극적인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논리-철학 논고》의 목적이라면, 이 책에서는 이러한 언어관을 수정하고 언어의 일상적 사용과 실천에 의해서 언어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를 제안했다. 따라서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다양한 컨텍스트 안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이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언어놀이는 곧 삶의 형식이다. 언어를 기존의 형이상학적, 이데올로기적 의미로부터 그 일상적인 사용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철학과 삶, 실천을 고민한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관심을 불러 모으는 철학자로 부각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의 삶이 지닌 실존적 태도와 신비로움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독창적이고 고독한 천재가 보여줄 수 있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19세기 말 세기 전환기의 문화가 활발하게 꽃피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귀족적이고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형 파울Paul이 1차 대전에서 오른팔을 잃게 되자 라벨Maurice Ravel이 그를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훗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 중 상당액을 릴케Rainer Maria Rilke, 트라클Georg Trakl 등 여러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데 썼다. 철강 부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실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공학도의 삶을 계획하다가 당시 저명한 철학자였던 프레게Gottlob Frege와 러셀Bertrand Russell의 인정을 받아 철학자로 방향을 전환했다. 자신의 삶을 극한적 상황에 던지기 위해 1차 대전에 참전해 참호와 포로수용소에서《논리-철학 논고》를 썼으며, 이 책으로 제도적, 체계적인 철학 교육을 받지 않은 그는 일약 유망한 철학자로 주목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철학을 그만두고 시골 초등학교 교사, 수도원 정원사, 건축가 등등을 전전하다가 철학계에 복귀하여 자신의 후기 철학을 전개해나갔다. 그는 매우 간결하고 명료한 어휘와 문장으로, ‘소견들’이라 부른 짤막한 고찰을 통해 여러 철학적 문제들을 자신의 독창적 관점에서 중첩적으로 담아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그것을 읽는 독자 역시 구성적으로 사유하기를, 즉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하기'를 요구한다. 그는 언어와 논리의 가능성과 한계를 다루면서도 그 작업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신의 철학적 과제를 궁극적으로는 ‘윤리적’이라고 규정한다. 철학적 문제는 철학 자체의 논증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나아가 실천의 문제를 고민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언어적’ 전환을 시도함으로써 20세기의 강력한 철학사조인 분석철학의 전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언어의 지시적, 재현적 기능만을 중시하는 기존의 도구적 언어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철학 영역으로서의 언어를 추구한 현대 언어철학(의 여러 갈래들)의 선구자다. 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논리-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 철학에서 그는 언어와 세계의 구조적 동일성에 근거하여 언어를 구성하는 명제가 세계의 구성 요소인 대상과 사태에 대응되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은 슐리크Moritz Schlick, 카르나프Rudolf Carnap 등이 주도한 빈 학파Wiener Kreis가 전개한 논리실증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의 후기 철학은 언어가 세계를 반영한다는 언어의 본질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언어의 사용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는 언어놀이 개념을 도입한다. 이 관점은 오스틴John Austin, 그라이스Paul Grice 등 일상언어 분석에 집중한 옥스퍼드 학파를 비롯한 화용론적 언어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의 제자들인 맬컴Norman Malcolm, 앤스콤G. E. M. Anscombe, 폰 리히트Georg von Wright 등은 그의 사후에 미국과 영국, 북유럽 등 각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파급시켰다. 그는 비단 언어철학적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 언어와 세계/실천의 관계 등에 주목함으로써 언어철학의 경계를 넘어선 철학자다. 그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언어의 존재와 그 의미에 회의의 시선을 보내고 언어의 자율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현대 문학과의 관련성 속에서 연구되기도 한다. 또한 그의 철학은 해석학, 현상학, 정신 분석, 과학 이론, 인류학, 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학문영역과 사조와의 관련성 속에서 연구되기도 한다. 더욱이 각기 고립적으로 전개되어온 이들 각 영역과 사조를 포괄하는 보다 넓은 맥락에서 그의 철학이 연구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여러 학문적 흐름의 진지한 상호 이해와 비판적 교류의 물꼬를 튼 선구자로 볼 수 있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 소유냐 삶이냐는 인간의 근본적인 행동 양식에 대한 회의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서양에 68혁명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후, ‘신좌파’의 이론적 지표 역할을 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 에리히 프롬이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를 역설한 것이다. 신좌파는 ‘국가권력 획득’에 매몰된 구좌파의 낡은 투쟁방식을 비판하며 등장했다. 이들은 ‘국가’라는 실체가 있는 권력이 어떻게 개인을 억압하느냐 하는 문제보다 ‘문화’라는 일상 생활의 권력구조가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고정시켜두느냐 하는 문제를 해명하는데 매달렸다. 그 결정적인 동기부여는 중국의 ‘문화혁명’이었다. (문화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논외로 하고...) 이 책에서는 ‘일상 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라는 챕터를 통해 학습, 기억, 대화, 독서, 권위의 행사, 지식의 소유와 앎, 믿음, 사랑에서 어떻게 소유양식이 존재양식을 밀어내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소유의 양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와 배경은 어떤가? 이 책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달 이후(약 5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는 소유 양식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한다. 경제적 행동이 윤리에 예속되어 있던 과거와 달리 18세기 들어서는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된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에 따라 “경제적 행동이 윤리 및 인간적 가치관과 분리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대인들이 추구한 ‘존재양식’은 어떠했나? 저자는 고대, 특히 초기 기독교와 불교의 가르침에서 당시 사람들이 삶에 대해 ‘존재 양식’의 태도를 가졌음을 분석해낸다. ‘구약, 신약성서, 그리고 에크하르트의 저술’에 관한 챕터를 보면, 예를 들어 ‘안식일’ 제도에 대한 분석을 하는데, 안식일에는 경제활동이 제한되어 있으며, ‘아무것도 파괴되어서도, 아무것도 건설되어서도 안되는’날의 의미를 실현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에는 개인은 그가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생활하며 존재 이외의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다. 즉, 기도하고 공부하고 먹고 마시고 노래부르고 사랑을 하는 등 그의 본질적인 힘만을 표현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벌거벗은’ 인간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한다(정신적, 물질적인 것 모두)’고 주장했던 중세 신비주의 철학자 에크하르트의 ‘내적 능동성’의 개념을 들어 ‘존재양식’을 설명하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끊임없이 달리는, 그래서 그 자체를 넘어서 자꾸 흐르는 과정을 존재의 양식으로 표현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확인해가는 ‘내적 능동성’이라는 것이다.(대충 요약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음의 에크하르트의 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래서 나는 신께 기도한다. 신이 나로부터 신을 거둬가시기를’ 소유 양식 그리고 존재 양식의 본질은? 에리히 프롬은 소유양식의 토대를 ‘취득사회’라고 이름한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고치면 ‘취득 권하는 사회’ 쯤 되겠다. 이렇게 취득해서 사유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사유하고 있음으로해서 ‘언젠가 잃을 것(피할 수 없는 예는 바로 죽음)’이라는 부담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소유양식에 매달리게 한다. 그러면서 현대사회의 몇 가지 현상으로 드러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동차 소비의 예’를 들어 이런 소유양식이 사회를 지배한 데 대한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다. 1. 자동차는 단순한 물건 이상으로 ‘지위의 상징’을 나타낸다. 2. 지배감을 높여준다. 3. 이익추구에 집착 4. 수동적 자극의 조장 5. 사회의 축적적 성격이 시장적 성격으로 바뀐 것... 이러한 것들이 ‘소유 양식’을 이루는 특징이다. 정리하면 소유양식의 본질은 “주체의식이 소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쯤 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체는 ‘소유한다는 사실’에 의존해 간신히 연명한다. 이는 인간을 대상화하고 인간본성을 소외시키는 행위다. 이에 반대하는 ‘존재 양식’은 무엇인가? 소유가 ‘물건’과 관계된다면 존재는 ‘경험’과 관계된다. 그것은 대상화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관계’하는 것이고, 타인과의 격리의 장벽을 극복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인생이라는 무도회에 모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존재양식은 그 선행조건으로 ‘독립,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을 갖는다. 존재양식의 본질은 능동적이고 생산적인(물리적 의미를 넘어서 정신적 의미를 포괄하는 ‘생산적’)것이다. 정리하면 ‘주체가 능동적인 행위를 통해 이상을 실현하고 타자와 관계 맺는 것’ 쯤 되겠다. 존재양식의 획득은 소유양식을 감소시킴으로서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보너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음 네가지 조건을 만족시킨 후 인간 성격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1. 우리는 고통받고 있으며 그러한 사실을 우리가 인식할 것 2. 우리의 불행의 원인을 인식할 것 3. 우리는 우리 불행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 4. 우리가 우리의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어떠한 생활 규범을 따라야 하며 우리의 현재 생활스관을 변혁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것. 그리고 자유시장경제를 포기하지만 산업적 생산 양식은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 정신적 가치를 드높이고, 쾌락이 아닌 안녕을 추구하고, 개인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그런 공동체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 ‘부자되세요’라는 노골적인 단어가 ‘당당하게’ 티비에 등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이 떠오른다. 소유 양식을 추구하고 있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가... 위르겐 하버마스/ 소통행위이론 19세기 독일지성사 아니 세계지성사의 커다란 산맥이 맑스의《자본론》이었다면, 20세기 현대사회이론의 대표적인 저작은 단연 하버마스의《의사소통행위이론》이다. 그간 소문만 무성하고, 정작 올바른 완역본을 볼 수 없었던 한국에서 원저작이 출간된 지(1981년) 반세기 만에 한림대 철학과 장춘익 교수의 4년간에 걸친 노고로 완역되어, 생존하는 최고의 사회철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마스의 사상의 정수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이 출간된 지 25년이 지난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는 단지 이 책이 서구의 20세기 사상사를 총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책에는 서구화나 근대화 담론으로 점철된 우리의 현대사, 혹은 정신사를 탐조할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사상적 시금석들이 보석처럼 알알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구조주의자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를 탐험하면서 제기했던 ‘원시적 사고’와 ‘근대인의 과학적 사고’의 차이, 서구와 비서구의 경계선 설정에 매우 중요한 개념, 그래서 정치적인 개념이 되어버린 ‘합리성’(rationality)에 대한 문제, 우리 학계의 뜨거운 감자가 된 근대성과 사회근대화의 문제, 포스트모더니즘, 신보수주의 등에 대해 하버마스는 심도있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 사안들에 대한 하버마스의 생각을 엿보는 것 자체만으로 우리는 풍성한 정신적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체계적인 철학자’(리처드 로티), ‘정직한’ 철학자(자크 데리다)라는 평을 듣고 있는 하버마스의 대표저작에서 우리는 순수하고 치밀한 철학자의 면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숲속 길을 걷는 상쾌함으로, 때로는 태산준령을 넘어가야 하는 고단함으로, 때로는 사막의 길을 걷는 것 같은 지루함으로, 때로는 커다란 산봉우리에 올랐을 때의 장쾌함으로 이 책은 다가올 것이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은 하버마스 스스로도 ‘괴물’이라고 평하는 책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 말에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 책에서 맑스, 베버, 뒤르켐, 미드, 파슨스에 이르는 사회학의 이론사를 체계적으로 수용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지심리학으로부터 언어이론, 행위이론, 문화인류학, 체계이론에까지 이르는 그야말로 현대사회이론을 총망라하고 있다. 단지 현대사회이론의 총망라라면 그와 같은 말은 과장된 허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이 허언이 아닌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뉴욕의 빌딩숲과 같은 치밀하기 그지없는 현대사회이론들의 숲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걷고 탐사해 그 다양한 이론들을 하나로 꿰뚫는 실마리를 찾아낼 뿐만 아니라, 분명하고 명료한 사상적 길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 때문에 그 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 범위와 깊이에서 비견할 책이 없는 저작’[토마스 매카시(영문판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역자], 혹은 ‘사회이론과 철학 분야에서 다시는 그와 같은 저서가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Philosophy and Social Criticism)는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회)이론의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시선을 확장하는 것이다. 시선이 확장된 느낌, 그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 같은 느낌,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개안의 느낌이 바로 이론이 주는 감동이다. 우리의 시선을 확장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령 미시의 세계를 보게 하는 것, 거시의 세계를 보게 하는 것, 현재를 넘어 과거와 미래를 보게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성공한 이론은 지금, 여기, 나의 관점에 사로잡힌 시선을 다른 시점, 다른 장소, 다른 관점을 포괄해서 볼 수 있도록 한다.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로 생각해보자. 미시적 분석은 그 건축물이 어떤 재료로 이루어졌는지를 살핀다. 사회적 행위의 성격을 분석하고 행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거시적 분석은 건축공법에 주목한다. 사회의 구조, 사회적 기능들의 배치가 주요 관심사이다. 역사적 분석은 이 건축물이 서 있는 자리에 그전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건축과정에서 주역은 누구였고 어떤 사람들의 희생이 따랐는지, 지금의 소유주는 누구이며 용도는 무엇인지,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이 건축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식의 이론 스타일 분류에 따르자면, 하버마스의 이론은 세 가지 분석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려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하버마스의 이론을 비춰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거울은 맑스의 이론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사회라는 건축물이 추상적 노동을 재료로 해서, 상품생산과 교환이라는 건축술에 따라, 그리고 자본증식이라는 목표를 위해 세워진 것임을 밝혔다. 그는 한편으로 이런 재료와 건축술, 그리고 건축 목표가 형성된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고 다른 한편 이 건축물의 안전진단도 감행한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맑스는 우리를 건축물의 지하로 안내한다. 지상층만 보면 완벽한 구조역학에 따라 건축 재료들이 빈틈없이 매끈하게 맞물린 것처럼 보이지만, 지하층은 음습하고 여기저기 균열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맑스에 따르자면 자본주의사회가 결코 사회적 대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자본과 임금노동 관계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 균열이 모든 은폐 혹은 수리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균열은 커져서 자본주의사회가 붕괴할 것이라는 그의 진단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맑스에 이끌려 자본주의사회라는 건축물의 지하를 들여다 본 감동을 오랫동안 잊지 못한다. 맑스가 우리를 자본주의사회라는 건축물의 지하로 안내했다면, 하버마스는 우리를 비행선에 훌쩍 태우고 도시 위를 날면서 일종의 도시생태학적 관점을 펼쳐 보인다. 우리가 도시의 온갖 편의를 누리고 살고 있지만, 하늘에서 내려다 본 도시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보여준다. 상공업지역의 확장과 함께 녹지가 줄어들고 주거환경이 나빠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혹은, 하버마스도 맑스처럼 사회를 하나의 건축물로 본다면, 요즘의 예로 주상복합건물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상가가 편의시설로 기능하는 한에서 그 자체로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자칫 상가 수익을 위주로 건물이 관리될 경우 주거공간의 질이 하락할 위험이 있다. 하버마스 이론을 조금만 이야기하자. 미시적 분석의 차원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의사소통행위이다. 의사소통행위란 상황에 대한 공통의 해석과 합의를 통해 조정되는 상호작용의 유형을 말한다. 이 행위유형에서 언어적 상호이해는 행위조정의 필수불가결한 수단이고, 그래서 언어적 상호이해에 내재하는 논리가 행위조정에서 힘을 발휘한다. 맑스가 구체적인 노동으로부터 자본주의사회 비판의 규범적 근거를 도출하였듯이, 하버마스는 행위조정에서 실제로 힘을 발휘하는 사회비판의 구조로부터 비판적 사회이론의 규범적 기초를 얻는다. 의사소통행위에 대비되는 상호작용 유형은 전략적 행위이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상호작용 유형을 말한다. 전략적 행위에서도 언어가 사용될 수 있는데, 이때 언어는 특별한 지위를 갖지 않고 조작적으로 투입될 수 있는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하버마스는 두 사회적 행위유형이 일종의 원형과 파생형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설정한다. 우리는 언어의 논리에 따르는 상호작용을 먼저 배우고, 언어를 조작적으로 사용하는 상호작용방식을 나중에 배운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설정은 많은 하버마스 비판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사회이론은 오히려 전략적 행위를 원형으로 파악하는 쪽에 가까운 편이기 때문이다. 그 논쟁은 여기서 접어두기로 하자. 거시적 혹은 구조적 분석의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생활세계’와 ‘체계’의 개념이다. 사회화, 문화적 재생산, 사회통합처럼 반드시 언어적 의사소통을 통해서 행위조정이 이루어져야 하는 영역을 ‘생활세계’ 라고 하고, 권력과 화폐와 같은 비언어적 매체를 통해 행위조정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체계’라고 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근대사회의 구조적 특징은 바로 생활세계로부터 체계가 분리된다는 점에 있다.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그가 이 분리를 파악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한편에서 그는 체계가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생활세계 합리화의 결과로 파악한다. 사회의 복잡성이 증가함에 따라 언어적 의사소통을 통해서만 행위를 조정하기가 어렵게 되고, 언어적 의사소통의 과도한 부담을 덜기 위해 반드시 언어적 의사소통에 의지하지 않아도 좋은 영역들이 독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체계를 자립화시키면 체계는 더 큰 기능적 역량을 갖게 되고, 생활세계 역시 더욱 더 언어적 의사 소통의 고유한 논리에 따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다른 한편 체계와 생활세계가 분리되기는 하지만 생활세계는 여전히 사회 상태 전체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틀이기도 하다. 어떤 영역을 어느 정도까지 체계의 논리에 맡겨둘 것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생활세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체계는 생활세계로 부터 분리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생활세계 안에 닻을 내려야 한다. 체계와 생활세계가 분리되면서도 동시에 체계가 생활세계에 닻을 내릴 수 있으려면, 체계와도 연결될 수 있고 생활세계와도 연결될 수 있는 특수한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하버마스는 법에 그런 역할을 부여한다. 법은 한편으로 제재력에 기초하여 행위를 조정하는 형식적 규제들의 집합으로서 권력이나 화폐와 같이 비언어적 매체의 일종이다. 다른 한편 법 규범은 정당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제도의 일종이기도 하다. 도덕과 달리 근대적 법은 이렇게 양면이 다른 재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체계와 생활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근대적 법을 이렇게 보는 점에서 하버마스는 법을 지배도구로만 본 맑스와 결정적으로 다르고, 또 법실증주의적 시각을 취하는 베버와도 다르다. 생활세계에서 개방적 의사소통에 따라 합의된 규범이 법으로 구체화되고 체계가 이런 법에 따른다면, 체계의 독립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객관적 힘이 된 체계는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을 왜곡하고 오히려 생활세계를 체계의 기능적 부속물이 되도록 강제하는 경향을 갖는다. 금전화와 관료제화 경향이 생활세계에 깊숙이 침투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생활세계의 식민지화이다. 하버마스는 계급에 특수하지 않은 여러 병리현상들을 바로 이런 생활세계 식민지화의 결과로 파악한다. 이런 식민지화 경향은 역설적이다. 체계가 생활세계 합리화의 결과이면서, 또한 합리화된 생활세계를 위협하는 근본 원인이니 말이다. 하버마스는 자본주의경제를 사회합리화의 한 결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경제로부터만 아니라 행정으로부터 비롯되는 물화경향을 지적한다는 점에서도 맑스보다는 베버에 가까이 서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는 베버처럼 금전화와 관료제화를 사회합리화의 숙명적 결과로 수용하지 않는다. 생활세계가 체계의 논리에 흡수될 수 없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체계가 생활세계의 내부로 침투하는 것을 합리화가 아니라 합리성의 훼손으로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에서 그는 오히려 맑스에 가깝다고 하겠다.하버마스는 맑스처럼 자신의 이론의 시대관련성을 의식하고 있다. 맑스는 추상적 노동을 자본주의 분석의 핵심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상품생산경제인 자본주의사회에 이르러 이 개념이 실제로 사실에 부합하는 범주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추상적 노동은 한편에서 사실에 부합하는 범주이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한편 구체적 노동의 규범적 함축을 축출해 버리기 때문에 분석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하버마스는 자신의 이론을 우리가 일면화된 사회합리화가 가져 온 역설적 결과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 상황과 연결시킨다. “자립화된 하부체계들의 명령이 생활세계에 침투하여, 상호이해라는 행위조정메커니즘이 기능적으로 필수적인 곳에서조차, 금전화와 관료제화를 통해 의사소통적 행위를 형식적으로 조직되는 행위영역들에 동화”시키는 “도발적 위협”(2권, 618쪽) 아래서 우리가 생활세계의 고유한 논리를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 극복의 단서가 발견된다. * * * 하버마스의 저서들 가운데 하나의 주저를 들자면 단연 이 책 <의사소통행위이론>이고,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언어 및 행위능력이 있는 주체들이 어떤 것에 관해 서로 이해를 도모할 때 성립하는 합리성이다. 번역하면서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정확히 인식되어 있지 않다”라는 헤겔의 말을 자주 떠올려야 했다. 철학의 근본 주제는 이성이다. 이에 반해 사회학은 정치학과 경제학이 전문학문이 되는 길을 걸으면서 밀어낸 문제를 담당하는 학문으로 등장하였다. 사회 공동체와 문화에 대한 탐구는 경제 혹은 정치와 같은 부분체계에 대한 탐구와는 달리 사회과학의 기본 문제들과 생활 체계 패러다임으로부터 쉽게 유리될 수 없다. 막스베버의 저작은 정확히 세 가지 합리성 주체들이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나는 이 상호 관련성이 체계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합리성은 인식의 소유보다는 언어 및 행위능력을 가진 주체가 어떻게 지식을 습득하고 사용하는가에 더 관계되기 때문이다. A는 자신의 주장을 통하여 객관적 세계에 실제로 있는 어떤 것과 관계하고, B는 자신의 합목적적 활동을 통하여 객관적 세계에 실제로 있어야 할 어떤 것과 관계한다. 의사소통행위 이론에서는ㄴ 타당성 주장을 토의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핵심적 사안이기 때문에 나는 논증이론에 대한 좀 긴 부연 고찰을 중간에 넣고자 한다. A와B는 동일한 지식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피아제는 사회적 행동이라는 결합모델을 선택한다. 이에 따르면 복수의 주체가 객관적 세계에 개입하는 자신들의 행동을 의사 소통적 행위를 통해 조정한다. 그리고 책임 능력이 있는 인격체만이 합리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높을 수록 의사소통 공동체 안에서 행위의 비강압적 조정과 합의를 통한 행위갈등 해소의 여지가 커진다. 의사소통적 실천의 관심사는 생활세계를 배경으로 하여 합의를 이루고 유지하며 새롭게 하는 것인데, 이때 합의는 비판 가능한 타당성 주장에 대한 상호주관적 인정에 근거하는 합의를 말한다. 이런 의사소통적 실천에는 서술적 화행에 더해 규범에 의해 규범에 의해 규제되는 행위, 표출적 자기표현 그리고 평가적 발언이 속한다. 합리성은 의사소통적으로 이룩된 합의가 최종적으로 근거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의사소통적 실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합리성은 그들이 자신들의 발언에 대해 적절한 상황에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근거 있는 미적 감상을 통해 훌륭한 것으로 인정받은 작품은 이번에는 그 자신이 근거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자신의 비합리성에 대해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은 판단력 있고 합목적적으로 행위하며, 도덕적으로 분별력 있고 실천적으로 신뢰할 만하고, 느리고 섬세하게 평가하며 미학적으로 개방된 주체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주관성에 대해 성찰적 태도를 취하고 자신의 인지적, 도덕적-실천적, 미학적-실천적 표현을 조직적으로 왜곡 시키는 비합리적 제약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을 가진것이다. 그러한 자기상철의 과정에서도 근거가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논증의 전제들을 충족시키는 의사소통이 요청된다. 타당성 주장이란 한 발언의 타당성을 위한 조건들이 충족되어 있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각 문화는 이런 범주적 구별을 각자의 고유한 언어체계 내에서 행한다. ... 같은 인물을 그린 여러 개의 초상화는 그 인물의 특징을 아주 상이한 측면에서 드러나게 하면서도 모두 마찬가지로 잘 들어 맞으며 신빙성 있고 적절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와 유사한방식으로 세계상은 우리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게 하는 기본개념틀을 규정한다. 세계상은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참 혹은 거짓일 수 없다. 세계상들은 “인간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근원적인 가능성들을 여는데, 어는 것이 다른 것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할 수 없다. 생활 형식들은 그 가치에서 서로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먹구름의 장막을 걷어내듯 시원스레 퍼붓는 소나기처럼 읽혔다. 책을 읽다가 눈물을 ‘흘려’ 본 기억은 거의 없다. 하지만 눈물이 날 뻔 했던 책들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다가 지금까지 난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가르쳤나하는 자괴감에 눈물이 날 듯 했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넘어 이 사회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표현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종점은 실천이다’는 J. 네루의 언설로도 설명될 수 없는 내면의 고백이었고 삶에 대한 개인적 목표로도 설명될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 칼마르크스(Karl Marx) <루이 보나파르트 브루메어 18일>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평생을 바쳐야 하는 사업이다. -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탱크레드> 라는 명제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시작된다. 사이드는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학문과 영국의 수상이었던 디즈레일리로 대표되는 정치를 통해 지식과 권력 - 앎과 힘의 관련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두 가지의 인용이 이 책에서 비판되는 오리엔탈리즘의 두 가지 속성 - 인식과 실천을 대변하고 있다.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자 지배방식’이다. 이것이 어떻게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와 식민 정책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실증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발생, 발전, 전개라는 논리에 따라 3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박홍규의 번역이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저자인 사이드는 문학평론가이다.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이주한 사이드는 카이로에 있는 빅토리아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과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는다. 그의 삶의 행로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을 아우른다. 사이드의 관심이 그의 생과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것처럼 이 책에서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7, 8세기부터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적 근원을 파헤치고 실증적 자료와 문헌들을 통해 그 허구적 성격을 사이드 특유의 해박한 지식과 번득이는 예지로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은 역사서도 아니고 사회비평과 관련된 개설서도 물론 아니다. 그저 사이드가 제시하는 비판적 관점을 따라가며 인간의 성향과 속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까지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누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러한 현상들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제대로 눈뜨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수많은 질문과 반성을 유도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취급되는 크로머의 <현대 이집트>라는 책은 일본에서 1911년에 번역되어 한국지배의 기본이 되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멀리 존재하는 그들만의 논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 속에 가시처럼 박혀, 치유되지 않은 생채기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현재에도 더욱 유효하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문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등 숱한 현실적 문제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은 관습화되어 생활과 사고방식 곳곳에 숨어 삶의 목표와 사유 방식 자체를 통제하고 변질시킨다. 유럽에게 이슬람은 치료될 수 없는 정신적 외상(trauma)이었다. 17세기말까지 ‘오토만 제국의 위협’이 유럽의 주위를 둘러싸서 모든 기독교 문명에 대한 끝없는 위험을 표상했다. 곧 유럽 문명은 그러한 위협이나 전설도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도 미덕이나 악덕도 모두 병합하여, 스스로의 삶의 옷감 속에 짜넣어 흡수했다. (본문 117페이지) 처음부터 논의의 초점이 명확하고 문학가로서 지성과 비판 정신으로 무장한 사이드의 이야기는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한 권의 책에서 모든 것을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슬람 국가 이외의 지역이 논의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이 편협하다고 볼 수도 없다. <오리엔탈리즘>은 지구상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종교인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대립과 갈등 측면에서 문헌학적 전개과정을 고찰하고 있으며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떤 식으로 동양인들에게 자리잡고 있는가하는 논의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책을 맺고 있다. 내가 독자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은, 오리엔탈리즘?대한 해답이 옥시덴탈리즘 곧 서양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동양인’은 자신이 이전에 동양인이었기 때문에 쉽게 - 너무나도 쉽게 -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동양인’ - 곧 ‘서양인’ - 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도, 아루런 거리낌도 없을 것이리라. 만일 오리엔탈리즘을 아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식이 유혹에 의해 타락한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점이다. 설령 그것이 어떤 지식이든지 간에또는.. 마오쩌둥/ 모순론 마오는 <모순론>에서 막스의 유물변증법의 핵심인 모순의 특성을 세밀하게 중국적 상황에 맞추어 해석한다. “변증법적 세계관은 주로 각종 사물의 모순 운동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또 이러한 분석에 근거하며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의 모순의 법칙을 구체적으로(중국적 상황에 적용하여) 이해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유물변증법의 모순은 하나의 추상적 이론으로 중국의 현실에 적용되기 보다 구체적 현실의 해석과 변혁의 무기로 마오에 의해 작용한다.. 따라서 보편적 이론으로서의 유물변증법은 실천에 의해 확장되고 다시 보다 풍부한 이론으로 마오에 의해 거듭나게 된다. 하나의 이론이 구체적 현실을 해석할 수 있는 그리고 변혁할 수 있는 살아있는 이론으로 기능하기 위해선 실천에 의해 검증될 뿐 아니라 다양하고 상이한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객관적 지식의 주관적 능력의 중요성을 보여준 마오의 행적은 그 어떤 정교하고 혁명적인 이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의 역량을 중시하는 하나의 모범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우리 당내의 교조주의 사상을 숙청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마오는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는 일부 교조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자본주의를 거쳐햐 한다는, 즉 자본의 착취를 받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교조주의자를 향해 마오는 중국이 어떻게 역사의 낡은 유산을 갖지 않고 발전된 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지를 <모순론>을 통해 설명한다. ‘모순이 없으면 세계가 없다’는 말과 같이 마오는 우선 중국의 사회 역사적 현실에서 모순을 찾고 그 단계성과 특이성에 주목한다. 모순의 보편성 -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 사물은 없으며 모순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 중국적 현실에도 당연히 모순이 있다. “낡은 과정이 끝나고 새로운 과정이 발생하면 새로운 과정은 또 새로운 모순을 포함하게 되기 때문에 그자체 모순의 발전사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단순한 현상에서 현대 사회의 일체 모순을 폭로하고 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이방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중국적 상황에서 현재의 모순을 파악하자. 그리고 거기에 따라 투쟁을 전개한다. 운동의 어느 단계에서도 모순은 있으며 이시기 가장 낮은 단계에서 나타나는 모순을 통해서도 앞으로의 중국사회의 발전형태를 설명할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모순의 해결은 상위 단계로의 진입을 의미하고 이러한 과정의 반복은 결국 모든 모순이 해결될 때 까지 (완전한 혁명의 쟁취) 지속된다. 지금 이순간에 나타난 모순에 대한 분석과 투쟁을 완전하게 수행할 때 혁명적 전망을 예상할 수 잇다. 사물발전의 근본 요인은 그 내부에 있는 모순성에 있다. 모순은 사물의 발전형태 어디에서나 나타난다. 따라서 사회변혁은 언제 어디서나 모순의 해결을 통해 필연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적 현실에서 모순을 찾아 이를 해결하는 과제는 유물변증법에 의해 인도되고 세계를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임무가 된다. 사회주의 10월 혁명은 중국 내부의 변화에 심각하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외적 원인 즉 변화의 조건일 뿐이고 중국혁명은 내적원인 즉 변화의 근거인 중국 내부 자체의 합법칙성(중국사회는 현재 어떤 모순을 갖고 있는가? 그 특이성은 무엇인가? )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순의 특수성이 거론된다. -모순의 특수성- 매개의 사회형태 및 사유형태는 각각 자기의 특수한 모순과 특수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사회단계에 따른 모순의 특수성을 인식하고 거기에 맞춰 모순의 해결방법을 제시하자. ‘구체적 상황에서 구체적 분석’을 통해 모순은 해결될 수있다. 이는 바로 모순의 특수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모순의 특수성 -우리의 교조주의 자들의 오류는 한편으로는 모순의 특수성을 연구하여 상이한 각 사물의 특수한 본질을 인식해야만 모순의 보편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고.....우리가 사물의 공통적인 본질을 인식한 뒤에는 또 아직 깊이 연구되지 않았거나 새로 나타난 구체적 사물을 계속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데 있다. 일체 운동 형태는 그 허구적이 아닌 실재적인 매개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모두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구사업은 이 점에 치중해야 하며 또 이 점으로부터 개시해야 한다-. 현재 특수한 중국적 상황의 단계적 변화를 인정하고 거기에 따른 각기 상이한 모순의 본질을 간파해야 하며 각 모순의 단계에 따라 그 해결 방법도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막스-레닌주의 이론의 기계적 적용은 이러한 모순의 특수성을 망각한 것이며 이는 현재 중국의 혁명상황을 어렵게 한다. 사회발전의 각 단계에 따른 모순의 특수성을 파악하고 거기에 따라 모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진정한 막스-레닌주의자인 것이다. 따라서 작금 중국의 발전 단계에 주목하여 그 모순점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의 사회발전 과정에 나타나는 근본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 아니며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변해왔다. 중요한 점은 각 시기에 따라 나타나는 근본 모순을 파악하여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마오가 보기에 당대 중국은 식민지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국가였다. 따라서 직면한 최대 과제는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는 것에 있었다. 마오는 이를 위해 무산계급을 영도로한 소자산, 자산, 애국적 지주, 지식인, 종교인을 총망라한 통일전선을 주장했다. 즉 이시기 중국사회의 모순의 특수성은 엄밀히 말한다면 독점적 자산계급과 무산계급의 모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와 이와 결탁한 봉건 지배계급 혹은 일부 매국적 자산계급과의 모순에 있었다. 마오는 이런 중국적 특수성에 대한 모순의 해결로 인해 중국은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 이행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으로 1단계 신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고 이어 2단계로서 무산계급 주도의 완전한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모순의 특수성으로부터 - 주요 모순과 모순의 주요 측면 각계의 다양한 모순들중 주요한 모순을 찾아 이를 해결해야 한다. 주요한 모순은 일체의 다른 모순의 지배적 위치에 있으며 주요 모순의 파악과 해결만이 전체적 상황을 호전 시킨다. 그러나 주요모순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화한다. 하부구조의 모순이 상부구조의 변화를 결정한다는 일방적 견해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주요 모순은 때론 하부구조에서 뿐만 아니라 상부구조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중국에서의 주요 모순은 단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모순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순이 존재할 수 있으며 우리는 이 다양한; 모순 중에서 주요 모순을 찾아야 하며 또한 주요모순이 각기 일정 단계에서 변화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각 단계에서 지배적 위치에 놓였던 것이 종속적 위치로 전락하기도 하고 미약한 것이 새로운 단계에서는 중심적인 위치로 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주요모순이 어느 단계에서는 부차적모순으로 또 어느 단계에서는 부차적 모순이 주요모순으로 바뀐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막스-레닌주의자라면 각기 상이한 상황에서 상이하게 나타나는 제 모순을 전체와의 연관속에서 총체적으로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을 파악하고 이의 해결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모순의 동일성과 투쟁성 일정한 조건이 없이는 모순이 될 수도, 같이 존재할 수도 그리고 전환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일정한 조건에 의해서만 모순의 동일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일성은 조건적이며 상대적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모순의 투쟁은 과정에서 시종 관철되어 있고 한 과정을 다른 과정으로 전환시키며 모순의 투쟁이 없는 데는 없다고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모순의 투쟁성은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것이다. . . 즉 중국적 상황에서 인민대중(농민)의 지도적 역량에 의해 전통적으로 사회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계급은 지도적 지위를 잃어 버릴것이고 인민대중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현단계 중국에서 일정한 조건의 형성으로 말미암아 두 집단의 상대적 위치를 변화시킬수 있으며 이는 결국 투쟁에 의해 가능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배적 집단의 교체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현재 중국에서 지배적 집단이 어떤 형태를 띄고 있든지간에 모순의 동일성과 투쟁성에 의해 인민대중이 그 집단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III. 사회 1. 브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1902 2.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 과학적 관리법/ 1911 3.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1926~37 4. 라인홀트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1932 5. 존 메이너드 케인스/ 고용.이자.화폐 일반이론/ 1936 6. 윌리엄 베버리지/ 사회보험과 관련 사업/ 1942 7. 앙리 조르주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 1947 8. 앨프리드 킨지/ 남성의 성행위/ 1948 9. 데이비드 리스먼/ 고독한 군중/ 1950 10. 조지프 슘페터/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1950 11. 존 갤브레이스/ 미국의 자본주의/ 1951 12. 대니얼 벨/ 이데올로기의 종언/ 1960 13. 에드워드 톰슨/ 영국노동계급의형성/ 1964 14.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1964 15. 마셜 맥루헌/ 미디어의 이해/ 1964 16. 케이트 밀레트/ 성의 정치학/ 1970 17. 존 롤스/ 정의론/ 1971 18. 이매뉴얼 위러스틴/ 세계체제론/ 1976 19. 앨빈 토플러/ 제3의 물결/ 1980 20. 폴 케네디/ 강대국의 흥망/ 1987 라인홀트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집단은 왜 이기적이 되는가” 파헤쳐 사회는 개인의 의무감과 도덕심을 교묘하게 집단이기주의로 바꿔 놓는다. 국가에서 조직으로 눈높이를 낮춰 보면 사회가 얼마나 비도덕적인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번 만들어진 조직은 어지간해서는 없애기 어렵다. 조직은 그 생리상 끊임없이 예산과 사람을 끌어들여 몸집을 키운다. 할 일이 없어지면 명칭과 역할을 바꿔서라도 가늘고 모질게 살아남는다. 예를 들어 보자. ‘작은 정부’는 언제나 있던 요구사항이지만 공무원의 수는 자꾸만 늘어간다. 부처간 이기주의로 예산이 낭비되기 일쑤고 이권을 놓고 중앙과 지방정부 간 다툼이 벌어지는 일도 예사다. 조직끼리 벌이는 한심한 다툼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지도자를 욕하곤 한다. 큰 틀에서 바라보고 무엇이 진정 정의인지를 아는 경영자라면 이 꼴로 일이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터다. 썩어빠진 조직윤리도 문제다. 제대로 사회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꾸준한 의식개혁으로 공정과 정의를 다잡아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지도자의 인품이 훌륭하고 조직원들이 정직ㆍ근면하다면 조직 사이의 다툼은 사라질까. 이 물음에 대해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최고로 좋은 사람이 모인 집단도 가장 영악하게 비뚤어질 수 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1932)’는 제목만으로도 니버의 입장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는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 왜 니버는 이런 결론을 내렸을까. 그는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예일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엘리트 목사였다. 성직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니버도 처음에는 ‘세상을 구원하는 힘은 반듯하고도 깨끗한 마음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노동자 편에 서서 포드(Ford) 공장과 싸운 후에, 나아가 1차 세계대전의 잔인함을 겪은 다음에 그는 도덕윤리만으로는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을 예로 든다. 전쟁터의 병사 대부분은 애국심에 불타는 젊은이였다. 그네들은 희생과 용기라는 면에서도 최고의 용사들이었다. 지휘관 역시 그랬다. 국가 지도자들 역시 자기네 나라가 ‘문명의 미래와 가치를 지키는 수호자’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애국심과 인류애(人類愛)가 뒤얽힌 이 전쟁은 강대국 사이의 잇속다툼이었을 따름이다. 설사 국가 지도자 중에 누군가는 전쟁이 수치스럽고 더러운 목적 때문에 일어났음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니버는 그 이유를 조지 워싱턴의 말을 빌려 담담하게 일러준다. “지금까지 그 어떤 나라도 자국의 이익과 상관없이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고지식한 도덕심 때문에 전쟁을 벌인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목매달아 죽여야 마땅한 매국노다.” 만약 어떤 정치인이 내전으로 처참한 상황에 놓인 ‘소블리에’(물론 이런 나라는 없다. 설명을 위해 만들어낸 이름일 뿐이다)에 우리 군인을 보내자고 호소하면 어떻게 될까. 파견한다 해도 우리나라에 떨어지는 이익은 하나도 없다면. 그 정치인이 여론에 어떤 대접을 받을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인물로 치자면 사회는 자기만 알고 교만할 뿐만 아니라 교활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사회는 개인의 의무감과 도덕심을 교묘하게 집단이기주의로 바꿔 놓는다. 국가에서 조직으로 눈높이를 낮춰 보면 사회가 얼마나 비도덕적인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른 부처와 파워 싸움을 벌이던 어느 부처의 우두머리는 위기에 몰리자 분연히 옷을 벗었다. 조직원들은 떠나는 뒷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눈물을 흘렸다. ‘조직의 수장(首長)’으로서 그는 분명 멋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 행동이 사회 전체로 볼 때 과연 올곧았을까. 헷갈리기 시작한다. 나아가 니버는 사회가 왜 이기적이 되는지를 냉철하게 파헤쳐 보여준다. 다른 사회와 싸워서 이익이 생길 때 가장 많은 몫은 누가 챙길까. 물론 권력자들이다. 모든 일에는 안티(anti)가 있는 법. 당연히 이들의 탐욕 때문에 쓸데없는 다툼이 생겼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반대를 손쉽게 억누르곤 한다. 변화에는 혼란이 따른다. 삐걱거리는 모양새를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다.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사회는 일단 안정되고 질서가 잡혀 있는 듯 보인다. 그러니 양심의 소리는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통합을 해치는 자’로 몰아 버리면 그만이다. 여론은 대개 권력자 편이니까.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은 어떨까. 이들이야말로 이기적인 사회 때문에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사람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들 역시 권력자의 편에 선다. 혁명은 누구에게나 위험하다. 부도덕한 사회를 뒤엎자고 맞섰다가는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이득이 있다면 이들 역시 분하더라도 집단의 논리를 따르는 편을 택한다. 더구나 사회는 그럴싸한 환상까지도 준다. 일상은 누구에게나 구질 구질하다. 반면 사회에 헌신하는 삶은 뭔가 고상하고 의미있지 않을까. 윈스턴 처칠(W. Churchill)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를 정치가로 이끈 힘은 “무역이나 이득이 아니라 제국에 대한 허영심”이었다. 지도자까지 이런 마당이고 보면 비참한 계층일수록 국가나 사회를 위해 목숨 거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설명 없이도 분명할 터다. 그렇다면 니버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집단의 문제는 윤리가 아닌 정치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갈등은 결국 힘으로 해결된다. 도덕과 윤리를 강조한다고 해도 냉정한 현실이 바뀔 리는 없다. 여기까지 따라온 독자들은 희망 없이 폭력만 남은 사회 모습에 맥이 빠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 니버는 목사답게 도덕윤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도덕군자들은 항상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웃음을 산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사회에 유용한 사람들이다. 이상주의자의 꿈을 이루기란 불가능하지만 그들 덕에 우리는 진정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인지 깨닫지 않는가. 도덕도 그렇다. 현실이 아무리 냉혹하다 해도 우리는 윤리를 최대한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니버는 책의 상당 분량을 간디(Mahatma Gandi)를 찬양하는 데 바쳤다. 이익을 뛰어넘어 양심에 따르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사회에 보석과 같은 존재다. 이러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는 이기심에서 깨어나 점점 올바른 길로 접어든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은 무모하고 비현실적인 주장이었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지 않았는가. 이기적인 사회를 단번에 사랑이 넘치는 모습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희망은 도덕과 윤리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니버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진단하고 처방해 보자. 도덕이 없어지고 이익만 남은 상황은 다름아닌 우리의 현실이다. 아파트 값 담합에서 ‘공익’의 수호자를 자부하는 정부 부처끼리의 다툼에 이르기까지, 집단 간 갈등이 신문 첫 면을 차지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다. 보상과 타협 말고는 다툼을 잠재울 방법이 없을까. 보상과 이익이 충분하면 양심과 도덕심쯤은 간단히 잠재울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니버의 이 두꺼운 책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앨빈 토플러/ 제3의 물결 석유파동 이후 제2물결문명의 에너지에 일대 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기술영역에서의 혁명을 가속화 시켰다. 따라서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에너지의 주요공급원이었던 화석연료(석유,가스.)가 이제 전혀 새로운 에너지 기반으로 전환 해야할 시기가 도래할 것이며 그러한 이유를 보면 크게 두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먼저, 석유위기가 낳은 여러가지 계획과 제안들을 살펴보면 보다 중요한 문제는 산업사회를 위해 계획되고 제2물결원리를 전제로 한 에너지 기반이 앞으로도 존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관측가들은 화석연료에 대한 이같은 의존이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석유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자원의 물리적 고갈 뿐 아니라 가격의 상승 면에서도 대기오염문제 에서도 재생불능의 화석연료는 그 바닥상태로 치닫고 있다. 두번째 이유는 에너지문제가 물량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에너지 기반이라는 것은 그 사회의 기술수준,생산의 본질,시장과 인구의 분포 등 여러가지 요인들에 적합해야만 한다. 오늘날 인류는 다시 한번 역사적인 기술도약의 문턱에 서 있다. 그리고 지금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생산체게는 전체 에너지산업의 근본적인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 현단계에서 어떠한 기술들의 결합이 어떠한 사업에 가장 유용한 것으로 입증될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도구와 연료의 종류가 석유값 상승에 따라 더욱 더 색다른 가능성을 갖고 상업적 채산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에너지 기반의 특징은 ① 고갈되지 않고 재생가능한 자원에서 생성되며, ② 넓은 지역에 산재한 다양한 자원이고, ③ 탈중앙집권화된 에너지 생산기술을 결합하게 될것이다 또한 ④ 소수의 방법과 자원에만 의존하는 대신에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이는 기존 제2물결의 에너지 기반에 기득권을 가진 세력과의 격력한 싸움이 예상되지만 결국 제3물결의 마지막 승리는 시간 문제인 것이다. 이제, 제3물결로의 기술변동을 이끌 내일의 도구 즉 제3물결 시대의 중추적 산업으로 예상되는 4가지 서로 관련된 산업군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번째 산업군은 전자공학과 컴퓨터산업이다. 컴퓨터의 급속한 보급속도 에서 알수 있듯이 컴퓨터의 생산비용이 감소하고 그 용량이 크게 증대했다. 현재 값싼 소형 컴퓨터들이 가정에 파고들고 있으며 영업, 노동 자체의 성격과 가족의 구조까지도 뒤바꾸어 놓게 될 것이다. 컴퓨터산업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전자공학산업도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전자공학을 응용한 수많은 제품들이 등장할 것이고, 우리는 이제 컴퓨터,전자공학,적은비용으로 엄청난 메시지를 전달하는 광섬유체제, 그리고 반도체 물리학에 이르기 까지 에너지 절약형의 전자폭발을 경험하게 될것이다. 두번째 산업군은 우주산업이다.우주공장의 설치로 인하여 고도기술 물질들을 취급하는 데 방해가 되는 중력을 제거 할수 있으며,더욱 중요한 것은 지상에서는 전혀 만들수 없는 새로운 제품을 생산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번째 산업군은 해저개발 이다. 해저에서의 수중농업은 생태계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세계 식량위기의 해결에 도움을 줄수 있으며,또한 해양은 석유나 각종 광물의 보고이며 심지어 의약품 제조에도 역할 할수도 있다. 네번째 산업군은 (인류의 장래에 가장 큰 충격을 줄 것으로 보이는) 유전자 산업이다. 우수인종,에너지 문제, 질병치료와 예방,식량공급증대 등 여러방면에서 도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산업군들의 영향은 새로운 에너지 기반과 결합한 컴퓨터, 전자공학,우주공간과 해양에서 만든 신소재,유전공학 등을 서로 연결하는 새로운 기술들을 결합하는 단계에 이를때 제3물결의 충격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다가오는 제3물결의 기술영역은 물질대사적인 생산체제와 기술혁신에의 인간화 즉 지구와 인간의 미래를 걱정하는 기술반역자에 의해 채워질 것이고, 엄격한 생태적 사회적 통제하에 운영되는 복잡하고 과학적인 ‘고속’산업들과 보다 인간적이고 소규모적으로 운영되는 ‘저속’ 산업들이 합해져서 내일의 사령탑을 이루게 될 것이다. 매체의 탈대중화 앞서 살펴본 기술영역에서의 변화에 이어 정보영역의 혁명 또한 추진되고 있다. 정보와의 급속한 접촉과 친숙도와 함께 그 흐름은 한층 가속화 되고 있으며 정보의 구조자체가 변혁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수 있다. 현재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점차 분산되고 약화하여 탈대중매체의 현상이 드러나고 있으며 나아가 인간정신의 탈대중화가 확산되고 있다. 대중매체의 경우 제1물결의 어린이는 변화가 느린 마을에서 성장하면서 공동체내에서의 컨센서스 그리고 강력한 복종의 압력이 출생시부터 어린이에게 작용하여 수락 가능한 이미지와 행동의 범위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이에 반해 제2물결은 개개인이 각자의 현실상을 도출해 내는 채널의 수를 크게 늘려서 신문,잡지,라디오,TV 등의 대중매체에 의해 집중적으로 생산되었고, 이 이미지들은 ‘대중의 마음’속에 심어져 산업사회의 생산체제가 요구하는 표준화된 행동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러나 제3물결이 밀어닥치면서 대중매체는 그 영향력을 분산시키게 되었다. 탈대중매체에 의해 그 집중력이 파괴당하고 있는 것이다. 급성장하는 일단의 소량부수 발행주간지,격간지,쇼핑안내지 그리고 탈대중화 미니잡지들로 인해 신문과 잡지들이 그 독자를 상실하고 있다. 방송의 경우도 전문화된 청취자 그룹을 대상으로 방송을 하게 되고 저렴한 소형 카셋 플레이어의 보급과 CB라디오의 확산으로 일반라디오의 청취율이 하락하고 있으며,TV에서도 각종 유선방송,비디오게임 등에 의해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은 제3물결의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제2물결의 거대매체들의 지배를 각 방면에서 전복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매체의 탈대중화는 동시에 인간정신의 탈대중화를 가져온다. 제2물결 시대에는 ‘대중정신’이란 것을 만들어 냈으나 오늘날에는 동일한 메시지를 수신하는 대중들 대신에 탈대중화한 소규모 집단들이 나타나 대량의 독자적 이미지를 서로 주고받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단편화된 일시적 이미지인 ‘순간영상 문화’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획일화되면 될수록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하기위해 서로를 알아야 할 필요성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보화사회에서 우리주변의 사람들이 보다 개성화 탈대중화하게 되면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지를 개략적이나마 예측하기 위해 보다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게 되며 이는 우리가 더불어 살아감에 있어 필수적인 전제가 되는 것이다. 지적 환경 오늘날 우리는 제3물결문명의 새로운 정보영역을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주위의 죽은 환경에 생명 대신에 지능을 부여하고 있다. 이의 주역은 단연 컴퓨터로서 초기 중앙집권적 거대 형태의 집중두뇌력에서 이제는 한곳에 집중화하지 않고 분산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컴퓨터의 용도는 세금계산이나 기록에서 각종 정보의 제공,개개인간의 통신교환을 통한 공동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전자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또한 정보를 응축시킨 칩들이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부품에 적용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컴퓨터에 의해 인간이 지배당하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있지만 대형 중앙통제컴퓨터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각자 분산된 정보망 으로서의 컴퓨터가 인간을 지배하기는 불가능 할 것이다. 이러한 정보영역의 변혁속에서 우리자신의 정신상태도 변혁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제2물결에서 기본능력 상실자로서 고용시장에서 제외되었던 문맹의 경우도 컴퓨터의 음성데이타 입력등으로 제3물결에서는 그 고용이 가능한 것과 같이 제2물결기술이 인간의 신체적 힘을 강화해 준 것처럼 컴퓨터는 인간의 정신적 힘을 강화해 주고 있다. 우선 컴퓨터는 다수의 인과관계를 기억하고 서로 관련시킬 수 있기 때문에 전체문화의 인과관계를 심오하게 만들고 우리주변의 단속적 자료들로부터 의미있는 ‘전체상’을 종합하도록 도와줄 수 있으므로 순간영상 문화의 해독제 역할을 할수 있다. 이러한 지적환경의 변화는 나아가 인간두뇌의 화학적 구성까지도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실험결과에 따르면 풍족한 환경에 노출된 동물이 통제된 집단의 동물들에 비해 대뇌피질이 크고 뇌신경 세포도 많고 뇌에 대한 혈액공급도 많다고 하므로 인간이 지금보다 더 지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정보영역이 가져올 변화의 보다 큰 중요성은 매체의 탈대중화와 이에 수반하는 컴퓨터의 등장이 우리의 사회적 기억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인간이 사회적 기억을 만들고 저장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변경하는 것은 인류 운명의 근원자체를 변경하는 데 해당한다. 최초에는 역사 신화 민담과 같은 것을 현인 연장자가 기억함에 그쳤고 산업사회의 문명은 인간의 두뇌에서 기억을 끌어내어 활자화 하여 도서관 박물관에 저장 하였다. 그러나 제3물결 문명은 그 기억의 방대함과 함께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우리는 컴퓨터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 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도록 만들 수가 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론,이데올로기,여러방면의 혁신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게 되었으며 컴퓨터는 이처럼 역사변화를 가속화시키고 제3물결사회의 다양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을 제공 해 주고 있다. 대량생산의 저편 일본,서독,미국 그리고 심지어 소련에서도 전기제품,항공,화학,전자,통신 등의 분야에서 탈대량화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이것은 현재 인류가 제품을 만드는 방법 그 자체를 변혁시켜가고 있기 때문이다. 제2물결 제조업의 본질은 수백만개의 동일하고 표준화된 제품의 장기적 생산에 있었다. 이에 반해 제3물결 제조업의 본질은 부분적 또는 전면적인 ‘주문제품의 단기적 생산’에 있다. 첫째. 대량생산에서 소량생산으로의 이행과 함께 연속생산방식에 의한 기계주문생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많은 대기업(H-P공장,IBM,GE...)과 군수품생산,자동차생산,화학공업 분야 등에서 이른바 ‘쥐젖생산-소량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T셔츠의 경우를 보면 물론 대량생산의 일종이나 근본적으로 값싼 속열인쇄기를 사용하여 여러디자인이 인쇄되기에 전혀 다른 T셔츠들이 생산되는 주문생산-1종1제품-이 형성될 수 있으며 레이저재단기에 의해 한번에 1장씩 재단한다해도 상업적 타당성을 맞출수 있다. 둘째. 고객을 직접 제조과정에 끌어들이게 되었다. 셋째. 제2물겨 제조업이 제품을 여러조각으로 분해한 다음 그것을 재차 조립한다면 제3물결 제조업은 전체적 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미분자 차원에 들어섬으로써 그리고 컴퓨터에 의한 디자인이나 그밖의 첨단 제조기계를 사용함으로써 더욱 더 많은 기능을 더욱 더 소수의 부품들 속에 통합하여 여러가지 다른 부품들을 전체적인 것 으로 대체하게 되는 프레스토 효과를 목격할 수가 있다. 이러한 모든 노력의 궁극적 목표는 더욱 더 소비자의 직접적 통제를 받고 있는 전체적인 연속흐름 공정에 의한 완전 주문생산제품의 생산을 추구하는 데 있다. 제조부문의 혁명 외 에도 다른 한편인 화이트칼라 부문인 사무실내에서도 제3물결이 밀어닥치고 있다. 기존 제2물결의 사무실구조는 급증하는 정보를 감당하기 힘들고 사무비용이 너무 크게 늘어나 효용성이 대폭 떨어지고 있다. 따라서 컴퓨터 워드프로세서에 의한 사무자동화와 원격통신시설과의 연결로 전자우편제도 등이 창설되어 전자사무실로의 이행이 가속화 될 것이다. 또한 사무실내에서의 역할의 개편이 예상된다. 우선 비서의 여러기능이 소멸될 것이며,사무실내의 제3물결제품이 낡은 제2물결체제와 충돌하면서 불안과 분쟁을 조정할 뿐 아니라 사무체제의 개편과 재편성을 가져오고 또 일부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직업과 기회를 제공해 주게 된다는 점이다. 새로운 체제는 과거의 모든 구식 간부들의 영역, 위계질서,남녀의 역할분담 그리고 부서간의 장벽에 도전할 것이다. 가내전자근무체제 새로운 생산체제는 작업단위의 소형화를 촉진하고 생산의 탈중앙지권화 및 탈도시화를 가능케 하며 노동의 실제적 성격을 변화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는 문자 그대로 수백만의 일자리를 제2물결 사회의 공장이나 사무실로부터 떼어내어 원래의 장소 즉 가정으로 되돌려 보낼 가능성이 있다. 이에따라 양성되는 가내전자근무체제의 필요성과 가능요인 그리고 그 결과 및 영향을 알아 보도록 한다. 첫째. 가내전자근무체제의 필요성 측면에서 보면, 대인접촉이 별반 필요치 않은 하급추상 사무직 근로자 그리고 연구원이나 정책입안자와 같은 초고급추상 사무직근로자 라고 해도 혼자서 일할 시간이 필요하므로 월스트리트 저널,맥도널드사,미국의 미래연구소 등 여러방면의 대기업과 연구소에서 컴퓨터 등의 통신시설을 전제로 가내근무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동기부여와 관리상의 문제,회사개편과 사회적개편의 문제때문에 작업장소의 전환은 지연되고 또 커뮤니케이션을 모두 간접적으로만 할 수도 없을 것이므로 작업장을 가정으로 전환하는 데에도 난관이 아주 없을수는 없다. 둘째. 가내전자근무 가능요인을 보도록 한다. 먼저 ① 운송과 원격통신 사이의 경제적 득실이다. 오늘날 심각한 교통난과 교통비용의 급등은 일반화된 사실이다. 통근비용의 급상승은 간접적으로 임금인상의 형태로 사용자측에 전가되며 또 제품가격인상의 형태로 소비자에게도 전가된다. 그러나 원격통신비용은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 운영비용과 에너지비용이 급격히 하락하는 컴퓨터 단말기의 보급으로 인한 통신통근은 현행 통근보다 에너지 면에서 많은 비율이 절약될 수 있다. ② 작업장의 이전과 통근의 감소는 부동산비용을 감축시키며 또한 환경오염을 완화할 수 있다. ③ 사회적 요인을 보면, 근무시간에 대한 통근시간의 비율이 높아질수록 직장으로 왕복하는 과정은 불합리한 헛수고가 되어 통근에 대한 근로자의 저항이 높아지면 사용자는 통근 근로자들에게 간접적으로 상여금을 증액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④ 가치관의 변화 측면에서도 오늘날의 가족단위를 지향하는 근본적인 태도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가내전자근무체제는 남편과 아내,심지어 자녀들까지도 작업단위로서 함께 일할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내전자근무체제로 인한 각부분에의 영향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공동체에 대한 영향: 이사하는 일도 줄고 개인의 스트레스와 잡다한 인간관계도 줄어드는 대신 공동체 생활에의 참여는 늘어날 것이다. 환경적 영향: 에너지 수요를 줄이고 에너지를 탈중앙집권화 시킬수 있음으로하여 (소규모 재생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하고 소수의 환경위험밀집지역이 해체되므로)오염문제를 줄일 수 있다. 경제적 영향: 제지업은 타격받을 것이고 대부분의 서비스업과 화이트칼라 산업은 혜택을 볼 것이다. 심리적 영향: 두가지 인간관계-실질적 인간관계와 간접적 인간관계-로 나뉘어 그 각각이 별도의 규칙과 역할을 갖는 그러한 세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미래의 가족 오늘날의 죄책감은 경제문제 때문이 아니라 가정의 파탄과 관련된 것이다. 오늘날의 가정파탄은 산업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일부로서 제2물결이 만들어 낸 온갖 제도의 붕괴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것은 각 개인의 생활 속에 반영되어 있는 충격적인 과정 즉 가족제도의 원형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변혁시키는 과정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이와같은 가족문화의 변질은 제2물결의 보편적 형태인 핵가족 이 종식되고 확대가족으로의 귀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핵가족과 확대가족을 포함한 여러종류의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선 핵가족이란 직장에 다니는 남편과 가사일을 맡고있는 주부 그리고 두명의 자녀들로 구성된 제2물결의 전반적 가족형태이며 이는 붕괴의 위기에 봉착하였고 또한 지금와서의 강제적 복귀는 역사 자체를 동결해야만 가능하다. 이제 다양한 가족형태를 일별하여 보면 먼저 가족과 동떨어져 혼자서 사는 단독생활자, 무자녀 어른중심의 생활방식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가족, 자녀가 있는 층으로 살펴보아도 편친가정의 급증에서 핵가족 붕괴현상을 볼수 있다. 편친가정은 다시 재혼으로 인하여 ‘집합가족’을 탄생시킨다. 집합가족은 이혼부부가 자녀를 데리고 재혼함으로써 양측의 자녀들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확대가족을 이루고 자녀의 입장에서는 다부모를 갖는 가족을 말한다. 따라서 보다 가능성 있는 전망은 제3물결 문명에서는 어떤 특정한 단일 가족형태가 오랫동안 지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그대신에 매우 여러가지의 가족구조가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이다. 가족형태의 다양함과 함께 가내근무가 대규모로 보급되면 가족구조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가정내의 인간관계도 변형시키게되어 부부공동의 체험이 많아져 부부간의 대화가 부활될 것이다. 사랑의 전제조건에 있어서도 집에서 배우자와 함께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성적 정신적 만족이나 또는 사회적 신분 같은 것만을 고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성적 정신적 만족감 두뇌 즉 사랑 성실성,책임감,수양 등 직업과 관련된 덕목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연소자 노동문제 측면에서도 가내전자근무에제는 청소년에게 또 다시 사회적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역할을 돌려줄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상의 가내근무 가정은 전자확대가족 즉 가족 외의 한 두명의 외부사람을 가정내에 편입시키는 새로운 형태를 이룰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형태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부여된 과잉선택권은 고통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차원에서 동시 변혁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가치관면에서는 기존의 가족형태가 붕괴되고 그것을 개조하는 데 따를는 용납되지 않는 죄의식에서 벗어나 관용의 윤리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경제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법률 세법 학교제도 주택 등의 여러 면에서 제3물결의 다양한 가족형태를 고려하여 설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밖에도 가사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남성위주의 고용관행을 타파하는 새로운 근로제도가 정립되어야 한다. 기업의 자기동일성 위기 핵가족 학교 대중매체 그리고 그밖의 산업화시대의 주요 사회조직들과 마찬가지로 기업도 제3물결이 일으키는 변화에 흔들리고 있다. 이제 기존의 위압적인 대기업 위기의 원인을 4가지 측면에서 파악해 보고 나아가 제3물결의 기업형태를 살펴 보도록 한다. 첫째. 세계경제의 위기 즉 무국적 통화인 유러달러의 급증으로 인한 혼란이다. 기술과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은 세계시장의 구조를 바꾸어 초국가적 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필요하게 하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제트기 시대에 걸맞는 통화체제가 형성되고 있으며,거대한 은행망은 어느 한 나라 정부의 지배를 벗어나 있는 통화와 신용 즉 무국적 통화-유러달러- 를 만들어 냈다. 유러달러는 국경도 아랑곳하지 않고 넘나들면서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하고 국제수지 균형을 역전시키는가 하면 통화가치를 위태롭게 한다. 기업을 성장시킨 제2물결 경제체제는 국가를 단위로 하는 시장 통화 정부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나 한 나라 단위의 하부구조는 초국가적이고 전자적인 새로운 유러달러를 견제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제2물결 세계에 맞추어 설계된 경제구조는 이미 그 타당성을 잃었다. 둘째. 가속적인 빠른 경제속도로 인해 위기감은 더욱 고조된다. 이 변화의 속도가 기업경영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여 더욱 더 빠른 속도로 더욱 더 많은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대응조치를 생각할 시간의 여유는 거의 없다. 이러한 변화의 가속화는 기업의 존재를 희미하게 한다. 셋째. 탈대중화 사회를 들수 있다. 대량시장의 소시장화,전문점포의 등장,서비스 상품의 다양화,사람의 상호교환성 상실 등 지금까지 대중사회를 형성해 온 갖가지 힘들어 갑자기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족주의는 지역주의로 대체되고 새로운 인종주의가 생기고 매체도 문화를 탈대중화 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에너지 형태의 다양화의 출현과 대량생산의 다음단계를 지향하는 움직임과 병행하여 일어나고 있다. 넷째. 기업에의 신뢰도가 낮아지고 비판이 거세지면서 기업목적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기업은 극히 전문화된 경제적 기능에만 매달리는 존재가 아니라 비판과 법률 그리고 관련 중역들의 자극을 받아 다목적 제도로 되어가고 있다. 이제 기업의 목적을 필연적으로 재정의 해야하는 다섯가지 혁명적 변화를 보면 ① 생물영역의 변화이다. 생물영역은 각종환경오염의 극한 상황에 이르고 있으며 환경에 미치는 충격의 주된 생산자 역시 기업이므로 기업은 경제적 제도이면서 동시에 환경적 제도로 변모 해야 한다. ② 점차 새로운 조직화의 사회단계로 나아감에 따라 기업의 결정이 엄격한 감시를 받게 된다. 실업,지역사회붕괴와 강제이전 등의 형태로 기업이 저지르는 사회오염 은 즉가 적발되고 기업은 경제적 생산물뿐 아니라 사회적 생산물에 대해서도 전보다 더 큰 책임을 지도록 압력을 받는다. ③ 정보영역의 변화이다. 정보가 생산과정에서 중요해지고 기업의 정보담당 관리자가 산업계에서 부쩍 늘어남에 따라 기업은 정보환경에 대해서도 충격을 미치게 된다. ④ 정치와 권력의 영역변화이다. 사회의 분화는 정부의 분화도 가져오게 되고 기업은 이러한 정부의 전문부서를 상대하게 되므로 기업의 중요한 결정은 간접적으로 정치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⑤ 마지막으로 도덕적 압력이다. 기업의 윤리적 자세가 사회의 가치체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견해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으며 기업은 더욱 더 도덕적 영향의 생산자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제3물결의 기업은 위와같은 여러변화 압력에 대응한 다목적 기업의 형태이다. 경영자들은 오직 순수익 만을 생각하도록 훈련받아 왔지만 제3물결 시대의 기업은 서로 연관된 복수의 순이익-사회 환경 정보 정치 도덕 면에서의 순수익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업적지수,연차사회보고서,목표회계와 보고 등 제3물결시대 기업의 업적평가 척도가 새롭게 고안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규칙의 해석 우리는 제2물결이 그와 함께 인간의 일상행동을 지배하는 원리와 규칙 등을 담은 규범서 를 부여해 준 것을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동시화,표준화,극대화와 같은 원칙이 경제,정치,일상생활에 적용되어 시간엄수와 스케줄에 집착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반규범서가 출현하고 있다. 제3물결로 인한 기존의 규범이 붕괴함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시화의 붕괴를 들수 있다. 우선 9-5시 근무제의 종말 즉 자유근무시간제의 도입이다. 이는 생산성의 향상,결근율의 감소 등의 잇점이 따르고 야근노동자의 증가 및 파트타임 노동의 확대를 결과 하고있다. 소비자 패턴에 있어서도 철야영업 슈퍼가 성행하고 있으며 각종 fast food의 보급과 더불어 세끼 식사의 고정시간이 붕괴 되었고 TV프로와 은행영업시간도 24시간체제가 등장하는 등 야간활동의 증가를 반영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개인의 스케줄이 개별화되기에 개인스케줄 친구스케즐 이라 부르는 새로운 컴퓨터화된 서비스장치와 같은 제도가 필요하게 될것이며,러시아워의 개념이 희박하여 교통량의 흐름이 재편될것이다. 끝으로 탈대중적 시간의 새롭고 개체화된 제3물결 리듬을 들수 있다. 비디오 컴퓨터의 동시,비동시화가 가능하고 ‘실시간’ 등과 같은 시간에의 새로운 개념과 함께 결과적으러 시간을 지키라는 압력이 줄어들게 되고 시간엄수는 도덕성과 마찬가지로 상황적인 것이 되었다. 둘째. 표준화의 붕괴이다. 생산품 가격,정치,대중정신,종교관 등이 일률성과 표준화에서 벗어나고 그대신 다양한 생활양식과 보다 고도로 개성화된 퍼스낼리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대규모 조직들에서 기동대책반,부서간 위원회,프로젝트 팀 등과 같은 조직단위가 날로 증가 하고 있으며 이러한 일시적인 조직단위(애드호크러시)들을 ‘매트릭스 조직’ 이라 부르는 새로운 공식적인 조직으로 구체화시키게 되었고 이는 중앙집권화된 통제 대신에 ‘복수명령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셋째. 탈극대화,탈전문화,탈집중화 현상이다. 우리는 큰것과 작은것 양자의 장점을 결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시험하여 극대화는 사라지고 그 대신에 적절한 규모가 등장하고 있다. 전문화와 전문직업 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전문가는 자신의 사리만을 추구하고 편협한 시야 이외의 어떠한 것도 해낼 수 없다는 비판을 점차 받고 있다. 제2물결이 아직도 장려하는 집중화의 문제도 오늘날에는 오히려 인구,에너지 등 많은측면에서 분산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새로운 규칙에 의한 미래의 조직을 보면, 보다 단조로운 위계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수시로 배치될 수 있는 소규모 구성단위로 이루어져 있고 각단위는 독자적인 대외정책을 가지고 점차 24시간 가동되게 된다. 조건이 주어질때는 2개 또는 그 이상의 구조적 형태를 가질 수 있는 이원적 또는 다원적 조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필요로 하는 경영자는 위계적 방식만이 아니고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도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생산소비자의 출현 경제에는 두 가지 부문이 있다. A부문은 사람들이 직접 수행하는 모든 무보수 노동을 포함하며 B부문은 교환망이나 시장을 통한 판매 또는 교환을 위한 모든재화나 서비스의 생산을 포함한다. 제1물결 기간중에는 A부문이 크고 제2물결 기간에는 시장을 대상으로 한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제2물결 경제학자들은 사실상 A부문의 존재를 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제2물결 경제전문가들이 간과 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두 부문의 생산성은 서로 크게 의존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제3물결의 도래와 함께 생산자와 소비자를 구별짓는 선이 점차 애매해지고 생산소비자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를 증명하는 여러현상들을 이제 구체적으로 보면 대략 3가지를 들수 있다. 우선, 의사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각종 자가진단 의약품과기구가 판매되고 선호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임신테스트용품,혈압측정기 등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또한 사람들이 자신의 심리적,의학적, 사회적,성적인 문제들에 직접 대응하도록 돕기 위해 공포증협회,사별자모임 등 수천개의 집단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두번째로 손수만들기 산업(DIY)의 성행이라 할 수 있다. 교환원 없는 전화기의 직접통화,점원 없는 셀프서비스나 디스카운트 상점의 급증, 애프터서비스를 위한 정비요원 파견없이 전화로 고장난 제품의 수리방법을 일러주는 Cool line 등의 활용화에서 볼수 있다. 더 나아가 주목할 것은 각종 전문적 전기 공구 및 건축자재등의 판매가 급증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각분야에서 강좌와 책이 출판되고 유럽에서도 DIY혁명이 일고 있다. 이와같은 현상의 가장 큰원인은 ‘상대적 비효율성의 법칙’ 즉 재화의 생산을 자동화시켜 단위당 생산비가 떨어질수록 수공품과 비자동화 서비스의 상대가격이 상승한다는 원리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때문에 더욱 더 많은 활동이 B- A로 이행해 갈 것이다. 세번째로 소비자가 생산과정에 참여함이다. 제품설계에 협조할 고객 모집 뿐 아니라 앞으로는 고객이 생산공장의 컴퓨터에 직접 자신이 원하는 제품명세를 입력할 수 있게 될것이다. 이상의 생산소비자의 출현현상은 그자체로 그치지 않고 생활양식과 이제까지 기조를 이루던 경제를 변화시키게 된다. 먼저 생활양식 면에서 보면 생산소비가 적어도 일부 경제활동의 탈시장화를 수반하고 따라서 시장의 사회적 역할을 대폭 변화시키기 때문에 A부문이나 B부문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경제가 되리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임금노동시장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경제학자들의 말대로 노동참가율이 높아지면 이에따라 근로자 1인당 노동시간도 단축될 것이다. 여기서 여가문제 전반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제3물결적 관점에서는 반쯤은 교환을 위한 생산에 기반을 두고 나머지 반은 자가소비 생산에 기반을 두는 새로운 생활양식이 실제적인 것이된다. 다음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이제 더이상 제2물결의 B부문 중심의 경제이론과 용어로서는 지금의 경제현황을 제대로 파악 할 수 없다. 그러므로 A부문과 생산소비자 등을 감안한 새로운 이론과 척도 그리고 용어를 재정의 하고 개발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A부문에서도 실제로 생산이 이루어지고 그들의 활용이 B부문의 Cost를 좌우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효용성’이란 개념에 있어서도 B부문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A와의 연계를 감지해야 할 것이며 실업의 의미를 A부문까지 포함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이모든 경제 변화를 더욱 가속화 시키는 중대한 사실은 기존의 시장화(교환망)가 종식되었음이다. 제2물결의 시장화는 상인과 고용인들로 인한 전세계적 시장참여율 급증과 상품화 촉진 그리고 복잡한 유통체제의 정립으로 거의 그 완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모든 시장의 확대가 그 외적인 한계에 도달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3물결은 초시장 문명을 만들어 내게 될것이다. ‘초시장’이라는 것은 시장에 의존하면서도 이 구조물을 건설,확대,개수,통합하는 일에 정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는 그러한 문명이다. 시장이 이미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한 문명이 이제 새로운 과제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정신적 대혼란 많은 사람들이 모순되고 혼란되고 불협화음을 이루는 여러가지 관념의 대혼란에 빠져들고 정신적인 무력감을 드러냈으며 여러 세계관의 충돌로 인해 우리의 정신세계가 뒤흔들리고 있다. 이같은 혼란의 대부분은 실제로 격렬해지고 있는 문화전쟁-신흥 제3물결 문화와 산업사회의 기성 관념 및 가정들간의 충돌-의 산물이다. 이제 앞서 살펴본(9장) 제2물결의 산업현실상에서 변화된 모습을 위주로 보도록 하겠다. 세가지 신념: 먼저 자연관을 보면, 전세계적으로 환경보호운동이 퍼져가고 있으며 과학의 차원에서는 생태관계를 구명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영향을 완화하거나 그 영향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돌리고자 하고 이같은 관계가 갖는 복잡성과 그 역학관계을 평가하여 사회 그 자체를 자연계의 재순환,복원, 수용력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 하기 시작했다. 둘째로 제2물결 사상가들은 인류가 오랜 진화과정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인간이 진화의 설계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셋째로 낙관적인 진보에의 생각도 변하여 진보는 자동적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물질적 기준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또한 사회는 단일 路盤이 아니라 여러 개의 支線이 있으며 사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종합적인 발전을 이룩해 가고 있다고 본다. 시간,공간의 개념: 제2물결 문명은 시간이 과거로 부터 미래로 일직선으로 나가며,절대적이고,등속적이며, 물질과 공간으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무효화 되는 ‘블랙홀’과 시간은 압축과 연장이 가능하다는 아인슈타인의 시간개념 등으로 제2물결문명의 보편적 직선적 시간개념의 기반은 무너지고 말았다. 공간에 있어서도 달라지고 있다. 인구의 재분배와 탈집중화 추세로 인하여 개인적 사회적 공간,바람직한 통근거리,거주밀도 등이 변화될 것이며 극히 지방적이면서도 동시에 전세계적 그리고 은하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 가지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고 있다. 또한 보다 동적이고 상대론적인 공간상이 채택되게 될 것이며 여러가지 다른 목적에 따라 공간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인식이다. 현실을 보는 사고: 제2물결의 사물을 보는 눈 즉 사물을 서로 고립시켜 연구하는 원자론에 반해 제3물결에서는 단편적이 아닌 전체적인 문제 파악을 중요시 한다.생태학자(생태계의 전체적 성격 발견), 대학(학제적,다학문간 연구),문화,정신건강(전인 치료),의학(전체론적 건강운동)등 여러 분야에서 ‘전체론’을 호응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산업사회의 사물을 보는 사고방식인 기계론적 인과관은 단순한 기계처럼 작동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큰 힘이 될지라도 성장과 쇠퇴,새로운 복잡한 수준 으로의 갑작스러운 발전,갑자기 용두사미로 끝나는 대변화 그리고 역으로 가끔씩 거대한 폭발적 힘으로 확산되는 사소한 사건 등과 같은 여러가지 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제3물결 인과율은 서로 상호작용하는 여러가지 요소들로 구성된 하나의 복잡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이 세계는 변화 확대자와 변화 축소자 및 그밖의 여러가지 요소들로 구성된 세계이다. 우리는 시계처럼 기계적으로 기능하는 폐쇄된 우주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융통성있는 체제에 처하게 되는데 이 체제에는 새로운 메커니즘으로 귀결될 수 있는 어떤 불안정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산업현실상은 지금까지 아주 유용했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이제는 그 보편적 타당성이 붕괴되고 말았다. 국가의 붕괴 제2물결 문명을 대표하던 지역적,경제적,정치적,의식적 통합체이던 국민국가는 이제 그 붕괴의 규열을 보이고 있다. 이를 세계도처에서 일고있는 분리주의와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초국가적 기업,초국가적 비정부단체의 출현과 그리고 새롭게 부상된 지구(우주)의식 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우선,산업혁명이 낳은 국가들은 이제 내부적 긴장이 폭발할 가능성이 보였다. 에너지의 위기 등 산업기반이 제2물결에서 제3물결로 이행해 가는 과정을 둘러싼 분쟁에서, 그리고 내부적으로 분화된 지역 또는 지방경제가 성장하고 있음에서, 또한 국민정부들이 사회의 급속한 탈대중화에 융통성있게 대응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분리주의 운동이나 자치운동이 일게 되었다고 본다. 더구나 제3물결은 새로운 문제들,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구조,세계 무대에서의 새로운 주역들을 등장시키고 이들로 인한 각방향에서의 압력들로써 국민국가들의 힘을 크게 위축시키고 있다. 국민국가 자체도 이미 국가들간에 경제적 관계의 강화로 인해 오늘날 어떤 개별적인 국민정부도 자국의 경제를 독자적으로 운영하거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환경적 피해를 방어하기에도 무력한 상황이다. 두번째로 현 세력들 중에서 가정 널리 알려지고 강력한 존재는 다국적 기업이라고 불리는 초국가 기업이다. 초국가기업은 한 나라에서는 조사연구를 하고 다른나라에서는 부품을 만들고 제3의 나라에서는 이를 조립하며 제4의 나라에서는 생산품을 판매하고 제5의 나라에서는 그 이익금을 예금하는 등의 일을 하는 등 수십개국에서 계열회사을 운영할 수 있다. 실제로 초국가기업들은 이미 그 규모가 매우 커져 그 자체로서 몇가지 국민국가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국민정부들을 앞질러 행동할 때가 많다. 한편 이러한 사태발전에 병행하여 초국가적 비정부단체들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아직은 상대적으로 미발달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급성장하는 이 초국가적 조직망(transnational network), 즉 T-네트 는 제3물결 세계체제의 도래에 또 하나의 차원을 더해 주고 있다. 따라서 초국가기업과 초국가적 단체들의 증가에서 국가들은 점점 독립적 행동을 취하기가 어렵게 되어 통치권을 크게 상실해 가고 있으며 꾸준한 권력 이동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셋째. 제3물결은 국가 차원을 초월하는 이해관계를 지닌 집단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집단들이 ‘지구의식’ 이라고도 불리우는 세계주의 이데올로기 출현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리고 세계주의의 출현은 하나의 진화론적 필연으로서 전체 우주까지를 포용하는 ‘우주의식’에 한 걸음 더 다가선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이상을 바탕으로 볼 때 문제되는 것은 하나의 신화 즉 이세계가 일단의 초국가기업들에 의해 분할 운영되리라는 예상과 이 지구가 단일의 중앙집권적 세계정부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써 이러한 사고방식 역시 제2물결적 원칙의 단순한 연장선상에 서 있다. 앞으로 등장하는 것은 기업이 지배하는 미래도 아니고 세계정부도 아니며 현재 이미 몇몇 첨단산업에서 나타나고 있는 모체조직,즉 매트릭스 조직과 유사한 보다 복잡한 체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 두 가지의 피라미드형인 범세계적 관교체제가 아니라 공통 이익을 가진 여러 종류의 조직들을 묶는 망 또는 매트릭스들을 엮어 나가고 있다. 인공위성을 가진 간디 1940년대 말 이래로 세계의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대부분의 노력을 지배해 온 한 가지 주요 전략 즉 제2물결 전략은 산업사회가 진화과정의 정점에 있다는 전제 그리고 이사회의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모든 사회가 서방 등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산업혁명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진보라는 것은 수백만 인구를 농업에서 대량생산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도시화 표준화 등 모든 제2물결적 요소들을 필요로 한다. 개발이란 기존의 성공모델을 충실히 모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제2물결 국가들이 성공적인 상태에 있는 한 세계의 다른 나라들이 그들을 모델로 삼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1960년대 후반에 들면서 산업주의의 전반적 위기가 폭발하자 파업,정전,파괴,범죄,김리적 고통 등이 제2물결 세게 곳곳에 만연했다. 에너지 체계와 가족제도가 흔들리고 가치체계와 도시구조도 무너졌다. 금융체제의 전면적 붕괴가능성이 경고 되었으며 공해, 에너지,자원 등이 그 한계에 도달하는 등 제2물결 문면 자체가 격렬한 붕괴의 고통을 겪고 있는 마당에 왜 그문명을 모방해야 하는가 하고 의문들게 되었다. 따라서 제2물결전략이 실패에 직면하고 새로운 전략 즉 제1물결 전략은 제2물결 전략을 거꾸로 복사한 것이나 다름없다. 농촌주민을 인구과밀의 도시로 몰아내는 대신에 농촌개발을 다시금 강조하고 식량자급을 촉구하고 자원을 직접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위해 돌릴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또한 어떤 장점을 감안하더라도 제1물결 방식은 역시 최악의 제1물결적 상황을 경감시켜 줄 뿐 이를 변혁 시키지는 못하는 전략이며 그것은 치료가 아니라 응급처치이다. 제1물결 방식 그 자체는 궁극적으로 침체를 가져오는 처방으로서 가난한 모든 나라들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이기는 제2물결 전략이나 똑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제1물결적인 나라를 개발하기 위해 이런 나라에 어울리지도 않는 제2물결적 형식들을 강요하면서도 이런 것들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려면 전통을 모두 분쇄하여 전체 문화를 뒤엎어야 한다는 잘못된 현실을 보아왔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3물결 문명은 실제로 제1물결 사회와 매우 흡사한 여러가지 특징들 즉 탈집중화된 생산,적정규모,재생가능한 에너지,탈도시화,가내 노동 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일치성을 에너지(탈집중화된 에너지),농업(유기농법),기술(집중화된 대규모 사업이 아닌 마이크로 전자산업),통신(가내근무를 가능케하는 전자통시체제)분야에서 찾아 볼수 있으며 이것은 과거와 미래의 결합 제1물결과 제3물결의 결합에 기초한 전혀 새로운 사회들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 새로운 접근방식에 있어 또한 중요한 경제의 측면을 보면, 대부분의 경제활동을 A부문에서 B부문으로 이해시킨 산업혁명의 모방은 잘못된것임을 이미 주미한 바 있다. 이 두 가지 경제활동을 보다 현명하게 상호 연계시키는 일이야 말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우리가 찾아내야 할 잃어버린 열쇠이며 이것은 ‘생산소비용 자본장비’ 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제1물결 문명을 탈피하고 있는 사회들에게 적합한 노력은 생산소비자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정부는 생산소비 분야에 관한 과학적 기술적 연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제3물결은 비경제적 기술적 관심사들을 일차적인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리는 데 예를 들어 교육의 경우를 보면, 오늘날 우리는 학습을 노동,정치투쟁,지역사회봉사,심지어 놀이와도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 끝으로 제3물결은 동기부여에 관한 종전의 제2물결적 가설들도 재검토하오록 만들고 있다. 영양상태의 개선은 수백만 어린이들의 지적인 수준과 기능적 능력을 전체적으로 높여줄 것이며 동시에 추진력과 동기부여도 향상시켜 줄 것이다. 제2물결적 관점에서는 후진적인 것으로 보이는 옛문명의 특징들도 진보적인 제3물결의 척도로 측정하면 잠재적인 장점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종결부 : 대합류 노호하는 수많은 변화의 강물들이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대합류를 이루어 제3물결 이라는 변화의 바다로 흘러가면서 시시각각으로 그 세력을 더해가고 있다. 소위 내일의 기초라 불리울 수 있는 것은 이미 제11-23장에걸쳐 논의해 왔으며 그것은 에너지,기술, 정보,노동과 생산방식,조직체계의 혁명적 변화와 더불어 생산소비자의 등장 그리고 사회적 개인적 가치관과 신념체계의 변화 등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프랙토피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긍정적이고 심지어 혁명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범위내에 있는 대안을 제시해 준다. 우리는 이 속에서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억압하지 않고 포용하는 문명을 이룰수 있고 그 문명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더이상 최대의 에너지를 시장화에 투입 할 필요가 없으며 복잡한 문제를 다룰 새로운 윤리적 도덕적 기준을 만들어 내야 하는 문명이고 끝으로 그것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민주적 인간적 이며 또한 생물영역과 훌륭한 균형을 이루고 있어 세계의 다른 나라들이 제공하는 자원개발을 위한 보조금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문명니다. 그것은 힘들기는 하지만 달성이 불가능한 문명이 아니다. 이처럼 오늘날으 변화들은 한데 모여 거대한 합류점을 이루어 흘러가면서 시대에 점차 뒤떨어져 실행이 불가능해지고 있는 산업화 체제에 대한 대안인 실행 가능한 반문명을 지향하고 있다. 데이비드 리스먼/ 고독한 군중 책 제목과 내용이 엇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리스먼의 이 책이 대표적이지 않나 싶다. 군중 심리학이나 또는 군중 속의 개인의 소외를 다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사심에서 이 책을 펴든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의 유형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유형은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 및 운송수단의 발달로 점점 새로운 유형의 인간들이 태어나고 있으며 그들의 삶은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환경에 놓이게 됨으로써 그 영향으로 인해 새로운 성격과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한 마을에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자기 마을외엔 나가는 일도 거의 없고 직업도 가업을 이어받게 되는 사람들은 전통지향적 인간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교육이 일반화되고 개인에 있어서 가치관이 형성됨으로 인해 그것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결정해 나가는 인간형은 내부지향적 인간이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 타인과 끊임없는 외부교류로 인해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거기에 의해 자신의 사회적 활동이 영향받는 인간형을 타인지향적 인간으로 리스먼은 정의한다. 현대에 태어나는 대다수의 인간들은 이러한 타인지향적 인간인 것이다. 우리의 최고 관심은 "상대방이 날 어떻게 보느냐" 일것이다. 상대방의 눈에 들기 위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읽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전전긍긍한다. 서점에서 가장 불티나게 팔리는 책은 상대방으로 부터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어내기 위한 처세술 책이다. 끊임없이 상대를 의식해야하는 우리는 그 과정이 힘들게 느껴지거나 그다지 성과가 없다고 느낄때 의기소침해진다. 나 자신만이 거울에 비친 자아와 스스로 대화할 수 있을 뿐 나를 대면하는 그 많은 사람 중 누구도 나를 이해할 만큼 가까이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상대방 역시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나는 상대방에게 있어 1/n 이며 상대방 역시 나에게 있어 1/n 이다. 현대사회에서 이 n의 크기는 적어도 수십, 수백이상의 단위가 된다. 그리고 시간, 공간상의 제약으로 인해 상대방의 n은 나의 n과는 또 다른 세계를 구성하고 있게 되며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상대와, 상대과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대상이 내가 되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기회는 서로의 1/n보다 더욱 더 적어지게 된다.우리는 상대방과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지만 그 기회는 일생에 몇번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간을 n속에서 홀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리스먼은 이같은 상황을 가리켜 고독한 군중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IV. 과학 1. 알버트 아인슈타인/ 상대성원리/ 1918 2. 노버트 비너/ 사이버네틱스/ 1948 3. 조지프 니덤/ 중국의 과학과 문명/ 1954 4. 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1962 5. 제임스 워트슨/ 유전자의 분자생물학/ 1965 6. 제임스 러브록/ 가이아/ 1978 7. 에드워드 윌슨/ 사회생물학/ 1980 8. 칼 세이건/ 코스모스/ 1980 9. 이리야 프리고진/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10. 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 1988 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 이 책 ‘시간의 역사’(A Briefer History of Time)는 스티븐 호킹의 명저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이다. 1988년에 출간된 시간의 역사는 현대 물리학의 가장 어려운 주제들을 다룬 책으로서, 이렇게 어렵고 따분하다고 생각 되는 물리학 책을 런던 ‘선데이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237주간이나 올랐으며, 지구 위의 남성과 여성과 아동 750명 중 한 명이 구입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스티븐 호킹은 루게릭병에 걸려서 몸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훌륭한 이론물리학자들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는 사람이다. 이 책은 스티븐 호킹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까지 나온 물리학의 이론과 법칙을 정리 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수학공식을 사용하지 않았고, 자세한 그림설명이 들어가 있는 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시간의 역사’ 라는 책의 제목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간에 관련된 물리적인 상식이나, 우주에 관한 가설을 세워서 책을 구성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은 이론처럼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다니게 된다면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어떤 물체가 빛의 속도로 다가가면 갈수록 저항이 커져서 결국에는 물체가 빛의 속도로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스티븐 호킹은 빛의 속도보다 빨리 가서 시간여행을 할 가능성보다 공간과 공간사이를 구부려서 거리를 단축시키는 가능성이 더 높다고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스티븐 호킹은 이렇게 우리가 평소에 알고 싶어 한 블랙홀, 시간여행, 빅 크런치, 웜홀, 빅뱅 등을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서 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책은 빅뱅을 시작으로 탄생한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연속적으로 다룬다. 우주 탄생에 대한 비밀은 현대 과학자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된지 오래다. 인간이 편의상 현재를 기준으로 분류해 놓은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개념은 역사라는 말로 표현 되었고, 과거를 포함한 우주의 미래는, 그 비밀을 파해치려는 똑똑하고 집요한 과학자들의 최대 관심사로 남을 것이 확실하다. 이에 저자 스티븐 호킹은 [시간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우주관을 역사적인 흐름을 통해서 조망하려는 시도와 함께, 부분적으로는 각각의 이론이 가지는 특징을, 또 전체적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시도하려는 각각의 다양한 이론들을 분류하는 작업과, 그것들이 이루고자 하는 공통적인 목표를 설명하고자 했다.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주 전체를 기술하는 단일한 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흔히 통일장이론으로 알려진 이 이론은 우주를 두 가지 기본적인 부분 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 역학으로 기술하고 있는 현실을 통합하려는 힘겨운 시도다. 그가 말하는 양자중력이론은 과연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등을 통합하면서 대통일이론(grand unified theory, GUT) 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들어 초끈이론과 M- 이론 등이 과학계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중력이라는 이단아를 통합하지 못하는 난관에 부딪치고 있다. 또 완벽한 통일장이론이 수학적으로 11차원에서 증명 된다고 할지라도 실험적으로 재현하지 못한다는 맹점을 지니게 된다. 저자는 여기에 자신이 과학자로서 느낀 많은 고민들을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놨다. 우리는 아직 어떤 이론이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을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 우주 전체를 상세하게 기술하는 모든 모형은 수학적으로 너무나도 복잡해서 우리는 정확한 예측결과를 계산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정과 근사들을 단순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 그렇게 해도 예측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만만치 않은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p-175 다소 비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우주에서 관측하는 모든 복잡한 구조들은 우주의 무경계 조건과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우주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지금 팽창하고 있는 우주는 앞으로도 계속 팽창할 것인가? 아니면 팽창을 멈추고 다시 수축할 것인가? 블랙홀과 웜홀의 실체는 무엇일까? 과연 시간 여행은 가능할 것인가... 과연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알려줄 수 있는 물리학의 통일은 모든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일까? 이 모든 혼란스러운 물리학의 정글 이론은 다음과 같은 분류로 더욱 명쾌해진다. 1. 실제로 완전한 통일이론(또는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공식들의 집합)이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충분히 현명하다면, 언젠가 우리는 그 통일이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우주의 궁극적 이론 따위는 없으며, 단지 우주를 점점 더 정확하게 기술하는 이론들의 무한한 연속이 있을 따름이다. 3. 우주에 대한 어떠한 이론도 없다. 사건들은 일정한 한도를 넘어서서 예견될 수 없으며, 임의적이고 무작위적인 방식으로 일어날 뿐이다. 저자는 여기에 우주 속의 모든 것을 남김 없이 포괄하는 완전한 통일이론을 일시에 수립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제한된 범위의 사건들을 기술하는 부분 이론들을 찾아내고 다른 효과들은 무시하거나 특정한 숫자들로 근사하는 방법으로 진전을 이룰 것으로 내다 봤다. 특히 최근에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시간 여행에 관한 가능성은 지극히 호킹의 개인적인 견해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과학적 논리에 근거한 것이어서 이에 무지한 독자로서는 대단한 호기심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과연 무엇일까, 과학법칙은 시간의 앞방향과 뒷방향을 구분하지 않는다... 중략... 우리는 시공이 휠 수 있다는 실험적 증거와 시간여행을 허용하는 데에 요구되는 방식으로 시공이 휠 수 있다는 실험적 증거(캐시미어 효과를 통해서)를 모두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과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서 언젠가는 타임머신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p-206 허블 전쟁으로 시작된 우주의 역사를 일반인들이 책 한 권으로 이해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대단히 '시각적인 그림' 등과 이해하기 쉬운 문체를 통해서 호킹이 의도하고자 했던 우주의 비밀을 일부나마 이해했다면 독자로서 느끼는 만족감은 상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호킹은 현대 물리학에서 논란의 한가운데 있는 통일장이론에 대해서 대단히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을 시도했으며, 자신이 과거에 이루어 놓은 과학적인 업적과 실수를 비교적 차분히 설명하는 인간적인 면모까지 보였다. 또 비교적 온건하기는 하지만, 반 종교적인 색체까지 가미되어 그의 우주관에 확신을 더한다. 결국 호킹 박사는 물리학의 최종목표로 알려진 통일장이론은 단지 첫걸음에 불과하며, 우리의 목표는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우리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 이성의 최종적인 승리를 예상했다. 만약에 우리가 완전한 이론을 발견한다면, 멀지 않아서 소수의 과학자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폭넓은 원리로서 그 이론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철학자, 과학자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포함하여 우리들 모두가 우리 자신과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함께 토론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물음의 답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인간 이성의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다. p-233 제임스 러브록/ 가이아 지구는 생물들의 생존에 최적의 조건을 유지해주기 위해 언제나 자기조정을 하며, 지구를 구성하는 토양, 해양, 대기의 모든 물질적, 화학적 조건이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 다시 말해 지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다. 지구생물권도 단순히 주위 환경에 적응하기만 하는 소극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지구의 물리화학적 환경을 활발하게 변화시키면서 진화를 거듭하는 능동적인 존재이다. 이것이 이른바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이다. 가이아란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신을 일컫는 말로, 지구생물을 어머니처럼 보살펴주는 자비로운 신이다. 가이아의 특성은 첫째, 지상의 모든 생물에게 적합하도록 주변 환경조건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만약 우리 인간이 이러한 가이아의 역할에 대해 심각할 정도의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인류가 지상에 도래하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그 속성은 변화가 없을 것이다. 둘째, 가이아는 생물조직체처럼 인간의 오장육부에 해당하는 핵심기관과 사지와 같은, 반드시 필요 하지는 않지만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부수적 기관을 갖고 있다. 이러한 부수적 기관은 필요에 따라 역할이 달라질 수도 있고, 생성 및 소멸이 가능하다. 인간 역시 가이아의 부속적인 하나의 기관이다. 셋째, 주변환경이 바람직하지 않게 변화할 때 가이아가 취하는 반응은 반드시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자가규제시스템)의 원리를 따른다. 대신 여기에는 시간상수(time constant)와 루프 이득(loop gain)이 중요한 인자이다. 예로 산소의 조절에서 시간상수는 수천년으로 아주 느리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나타났을 때 가이아가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촉박하다. 특히 가이아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여기에 대처할 때는 이미 주변상태가 악화된 다음이며, 이에 대한 개선이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한동안은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 실제로 지난 30여억년 동안 대기권의 원소 조성과 해양의 염분 농도가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어 왔다는데 주목하면, 만약 생물의 존재가 지상에 출현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그리고 탄소, 질소, 인, 황, 규소 등의 주요 원소들이 대륙과 해양을 오가며 순환하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이의 매개자는 전적으로 생물이다. 생물들은 기후를 조절하고 때로는 해안선을 변화 시키고 대륙을 이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현대과학은 대기권의 온실가스 증가, 지구 성층권의 오존층 파괴, 해양오염의 심화 등 환경위기가 21세기를 인류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지만, 인류를 포함한 지구생물권은 앞으로 어떤 재난에도 불구하고 그 영속성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싶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나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인 인간 행위의 향방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데서 새삼 우리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V. 예술,기타 1. 헬렌 켈러/ 헬렌 케러 자서전/ 1903 2.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1926 3. 마하트마 간디/ 자서전/ 1927~29 4. 에드거 스노우/ 중국의 붉은 별/ 1937 5.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940~50 6. 안네 프랑크/ 안네의 일기/ 1947 7. 에른스트 한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48 8. 말콤 엑스/ 말콤 엑스의 자서전/ 1966 9. 에른스트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1975 10. 넬슨 만델라/ 자유를 향한 긴 여정/ 1994 에른스트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실천적 경제학자이자 환경운동가로 유명한 슈마허의 경제비평서.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근거를 제공하고, 나아가 혁명적인 사고로 대안을 제시한다. 경제성장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성장을 위한 성장' 으로 왜곡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 그렇다면 경제구조를 진정 인간을 위한 모습으로 탈바꿈시킬 수는 없는가?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답은 '작은 것'이다. 저자는, 경제 규모는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이어야 하며,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쾌적한 자연 환경과 인간의 행복이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 작은 소유, 더 작은 노동 단위에 기초를 둔 중간 기술 구조만이 세계 경제의 진정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인 것이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저자의 이런 주장을 시대에 뒤떨어진 퇴행성 이론이라 논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대량 학살, 몰락, 오염, 고갈, 기아 등을 생각한다면, 자본은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명제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혁명적인 방법으로 서구 세계의 경제 구조를 바라본다. 슈마허는 거대 조직화와 전문화를 진척시키는 개발 논리가 위험 수치를 넘어서는 경제적 비능률과 환경 오염, 자연의 불균형 상태 그리고 비인간적인 작업 조건을 낳았다며, 현재의 경제적·기술적·과학적 원칙에 도전한 최초의 사상가이다. 그는 지역 노동과 자원을 이용한 소규모 작업장을 만들자고 제안하며 더 작은 소유, 더 작은 노동 단위에 기초를 둔 중간 기술 구조만이 세계 경제의 진정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슈마허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책을 읽은 지금, 그를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 추천하고 싶다. - P. 반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놀라운 선언이다. 이는 가상의 인간 문제에 비추어 본 경제학이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상식의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시사한다. - 리버레이션 슈마허는 인간 사고의 방향을 바꾼 극소수의 창조적 인물 중 하나이다. - B. 워드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지식인들이 진리와 미의 절대성을 믿으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을 '더욱 높은' 현실의 대표자처럼 보이게 만들면서 사회적 무력을 보상해주기 때문이며, 브루즈와지가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위치에 서려하는 지식인의 이 요구를 눈감아주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보편적 인간의 가치가 존재하고 계급대립의 해소가 가능하다는 증명을 본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과 마찬가지로 학문을 위한 학문 혹은 진리를 위한 진리는 다만 실무로부터의 지식인의 소외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의 과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게 예술을 제약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시야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는 일이다. 참된 예술이해의 길은 교육을 통한 길이다. 소수에 의한 항구적 예술독점을 방지하는 방법은 예술의 폭력적인 단순화가 아니라 예술적 판단능력을 기르고 훈련하는 데 있다. <중략> 문화적 독점을 해소하는 전제조건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나를 세 번 놀라게 했다. 첫째로 자료의 방대함에 경악했고, 둘째로 자료의 정확한 조직과 배치라는 저자의 공간지각력에 경탄했으며, 세째로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지루함없이 전개한 문장력에 두 손을 들었다. 이 책만큼 많은 밑줄과 포스트잍을 붙인 책일 있을가 싶다. 번역 또한 놀라운 정도로 매끄럽다. 어렵겠지만 많이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추천한다. 기타 추천하고 싶은 책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나치 수용소, 유태인 학살 100쪽 넘어가도 솔직히 지루하고 단조롭지만 다 읽고 나면 가치있는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상, 하권 각 300쪽 이상)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학시절(즉 우리나라에서는 유신헌법체제 가 이루어지고 한창 민주화 열풍이 불던 때) 학생운동을 하며 느낀 것들을 쓴....젊은 날의 상실감을 쓴 것 미하엘 엔데의 <모모>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 비슷한 책으로 다소 유명세는 떨어지지만 <즐라타의 일기>도 읽어 보시길- 헨리 소로우의 <월든> 자연에서 생활하는 평화로움과 고요함, 사색 같은 것이 주제이고 이런 비슷한 주제의 책으로 칼 힐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고독에 대한 에세이들도 좋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 <불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전집,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이 책은 위에서 소개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노인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도 괜찮고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즈> <더블린 사람들> 미국 현대문학에서 존 업다이크의 '이즈트윅의 마녀들', '켄타우로스', '비둘기의 깃털' 'A&P' 조지프 헬러의 ’늙은 예술가의 초상’ 'Something happened' 'catch 22' 덧붙여 팃낙한 스님의 <화> 달라이라마의 <행복론>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 -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6가지 불변의 법칙 박완서 산문집 <두부>등..
첫댓글 "멈춰서서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 그것을 찾고 싶었습니다 ..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길에 서있을때 약도를 건네주는 듯한 느낌이랄까 ... 추천지침서 ... 감사합니다 ^^ *************
간간이 가벼이 읽을 수 있는 책도 있지만......이렇게 어려운 책들만 가득히~~~추천해주시면....어쩌라구여~~~ㅎ....영원한 베스트는 역시... 세계문학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듯 한 느낌의 추천도서들~~~~둔해지는 머리에 번개와 천둥이 칠 것 같은...책들로 이 여름을~~~한 권의 책을 읽는 시간이 제법 소요될 것 같은 느낌이 가득함을......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