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율법은 처음에 시작할 때는 선명하지만
뒤쪽으로 갈수록 복잡해지다가 나중에는 어수선하게도 보이는
성서를 읽으면서 흔히 ‘질리는’ 여러 부분들 중에서도
그 분량이 가장 큰 독특한 성격의 문서입니다.
흔히 교회에서는 ‘폐기된 율법’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율법 전체가 폐기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일부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들은
예수가 오면서 강조한 ‘율법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율법을 알거나 지킬 필요는 없다고 하는데
이는 아주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알고 보면 전체 율법은 아주 탄탄한 짜임새를 갖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고 있는
대단히 합리적인 논리체계를 보입니다.
따라서 율법이 비록 지루하게 보이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더라도
큰 틀에서 그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살핀다면
사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문서이고
그것이야말로 성서 전체가 하나의 몸통이라고 할 때
율법이 그 몸통의 균형을 유지하는 뼈대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십계명은 율법의 핵심’이라고 말하지만
전체 구약성서를 꿰뚫는 하나의 중심점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면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이 아니라
‘힘 없어 짓밟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라고 보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것은 율법서 곳곳에 자주 나타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라는 말이 갖고 있는 상징성입니다.
여기서 ‘나그네’라는 말은 ‘떠돌이’, 즉 ‘오갈데 없어서 이리저리 떠도는’ 사람이고
‘고아와 과부’는 자신이 기댈 곳이 없는
현실적으로 ‘삶의 뿌리가 그 근거에 닿아 있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말이니
구약성서의 시작과 함께 나타나는 ‘하비루’라는 말을 풀어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이 말은 ‘가난한 사람’들로 대표됩니다.
하비루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늘 예수의 관심 한 복판에 있었던 가난한 사람들로 이어지는
도도한 흐름을
오늘의 상황에서 말한다면
‘사회적 약자’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율법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것은 이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
자신이 빼앗기거나 짓밟히는데도
왜 짓밟히고 누구에게 빼앗기는지도 모르면서
그 빼앗거나 짓밟는 것들에게 동조하고
이웃이거나 동지여야 할 사람들과 대립하는 어리석음은 또 무엇인지
그들에게 전해 줄 말이 무엇인지도
비로소 율법이 따뜻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키작은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