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원 동국여지지 제3권 / 충청도(忠淸道) 좌도(左道)○청주진(淸州鎭)
천안군〔天安郡〕
동쪽으로 목천현(木川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남쪽으로 공주(公州) 경계까지 48리, 전의현(全義縣) 경계까지 33리이고, 서쪽으로 온양군(溫陽郡) 경계까지 11리, 아산현(牙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북쪽으로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20리,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6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219리이다.
한전(旱田)
수전(水田)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 백제의 위례성(慰禮城) 및 탕정(湯井), 대목악(大木嶽) 두 군(郡) 지역이다. 신라가 사산현(蛇山縣) 및 탕정군(湯井郡), 대록군(大麓郡) 지역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太祖) 13년(930)에 처음 여기에 천안도독부(天安都督府)를 설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를 “본래 동도솔(東兜率), 서도솔(西兜率) 지역이었는데 고려 태조가 합쳐서 천안부(天安府)라 하였다.” 하였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니 동도솔, 서도솔이라는 곳은 없다. 만약 향리의 칭호라면 마땅히 모읍(某邑), 모향(某鄕)이라 하였을 것이고, 또 관계된 고을도 전혀 없다. 이는 대개 ①정인지(鄭麟趾)가 기록을 잘못한 데서 비롯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도 그대로 오류를 따른 것이다. ②이첨(李詹)의 문집을 살펴보니 “왕씨(王氏)의 시조가 예방(倪方)의 말을 듣고 사산, 탕정, 대목악 지역을 나누어서 천안부를 설치하였다.”라고 했는데 이 말이 ③군승(郡乘)의 옛 기록과 서로 부합한다. 성종(成宗) 때에 환주(歡州)로 개칭하였고, 현종(顯宗) 때에 다시 천안부로 바꾸고, 충선왕(忠宣王) 때에 영주(寧州)로 고쳤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다시 천안부로 삼았다. 본조 태종(太宗) 13년(1413)에 영산군(寧山郡)으로 개칭하였고 16년에 천안군으로 바꾸었다. 관장하는 면은 16개이고, 관원은 군수와 훈도이다. 각 1인이다.
군명(郡名) 환주(歡州), 영주(寧州)
형승(形勝)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띠고 동쪽으로 고악(高嶽)을 의지하며 남쪽으로 옥택(沃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대해(大海)에 닿아 있다. ④《삼국사(三國史)》에 “하남(河南)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를 띠고 동쪽으로 고악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 옥택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대해에 닿아 있다.” 하였다.
삼국(三國)의 중심이다. 《고려사》에 “세간에 전하기를 ‘술사(術師) 예방(倪方)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삼국의 중심으로서 다섯 마리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이니, 만일 3000호 되는 고을을 설치하고 그 땅에서 군사를 훈련한다면 백제가 스스로 와서 항복할 것입니다.」 하므로 태조가 산에 올라 두루 살펴보고 비로소 천안부를 설치하였다.’라고 한다.” 하였다.
⑤한 방면의 요충지이다. 고려 강호문(康好文)의 〈대소원기(大召院記)〉
위례(慰禮)가 그 왼쪽을 누르고 차현(車峴)이 그 남쪽을 가로지르며 바다 포구가 그 서쪽으로 통하고 있다.
지형이 의지할 만하다. ⑥본조 유성룡(柳成龍)이 천안에 중영(中營)을 설치함으로써 안으로 경기(京畿)를 호위하고 밖으로 4진(鎭)을 통제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고려 태조가 천안이 한 도의 중앙에 있다는 이유로 도독부를 설치하고 병사를 훈련하였으니, 그 계려가 원대한 것이며, 지형이 의지할 만하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풍속(風俗) :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쓴다.
산천(山川)
왕자산(王字山) 군 동북쪽 12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고려 태조가 이곳에 군사를 주둔하고 있을 때에 윤계방(尹繼芳)이 이곳을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라고 아뢰어, 이로 인해 보루를 쌓고 군사를 사열하였으며, 왕자성(王字城)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왕자라는 것은 바로 그 산의 모양을 말한 것이다.
광덕산(廣德山) 풍세현(豐歲縣)에 있다. 군과의 거리는 서남쪽으로 35리이다. 온양군(溫陽郡)에도 보인다.
화산(華山) 풍세현에 있다. 군과의 거리는 40리이다. 광덕산과 서로 연이어 있다. 온양군에도 보인다.
유여왕산(留麗王山) 군 동쪽 11리 목천현(木川縣) 경계에 있다.
쌍령현(雙嶺峴) 군 남쪽 40리 공주(公州) 경계에 있다.
차현(車峴) 군 남쪽 45리에 있다. 공주목에 자세히 보인다.
수조산(水潮山) 군 동남쪽 2리에 있다.
대천(大川) 군 남쪽 9리에 있다. 발원지는 두 곳이니, 하나는 차현에서 나오고 하나는 쌍령현에서 나오는데,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 온양군 경계에 이르러 포천(布川)이 된다.
토산(土産)
자기(磁器), 도기(陶器), 지황(地黃), 산무애뱀[白花蛇], 준치[眞魚], 숭어[秀魚], 게[蟹]
학교(學校) : 향교(鄕校) 군 동쪽 6리에 있다.
궁실(宮室)
객관(客館) 연정(蓮亭)이 있다. 본조 ⑦홍적(洪迪)의 시에 “난간 아래 흐르는 물에 새벽안개 일고, 남원 마을 등잔 빛이 숲 사이로 비치네.[曲欄低水曉煙生 南院村燈隔樹明]” 하였다.
향사당(鄕射堂) 객관 동쪽에 있다.
선화루(宣化樓) 객관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⑧본조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돌아오는 길에 잠깐 옛 영주서 쉬노라니 / 歸來暫憩古寧州
객관 동쪽 모퉁이에 작은 누각 서 있네 / 客館東隅有小樓
구름 밖 푸른 산이 맨상투 드러낸 듯하고 / 雲外碧岑如露䯻
숲속에 서늘한 바람 부니 가을 온 줄 알겠네 / 樹間涼吹解生秋
하였다.
봉수(烽燧)
대학산 봉수(大鶴山烽燧) 군 남쪽 18리에 있다. 남쪽으로 공주 쌍령(雙嶺)에 응하고, 북쪽으로 아산현(牙山縣) 연암산(燕巖山)에 응한다.
우역(郵驛)
신은역(新恩驛) 군 북쪽 10리에 있다.
금제역(金蹄驛) 군 남쪽 22리에 있다.
영풍원(寧豐院) 군 남쪽 45리에 있다.
대평원(大平院) 군 남쪽 35리에 있다.
삼기원(三岐院) 군 남쪽 6리에 있다.
안정원(安定院) 풍세현(豐歲縣)에 있다.
가을원(加乙院) 군 북쪽 15리에 있다.
남원(南院) 군 남쪽 1리에 있다. 고려 ⑨강호문(康好文)이 지은, 원루(院樓)를 중수한 데 대한 기문이 남아 있다.
대소원(大召院) 군 서쪽 8리에 있다.
관량(關梁)
차현보(車峴堡) 차현에 있다. 공주목에 자세히 보인다.
사묘(祠廟)
사직단(社稷壇)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군 동쪽에 있다.
여단(厲壇) 군 북쪽에 있다.
사찰(寺刹)
광덕사(廣德寺), 개천사(開天寺), 만복사(萬福寺), 대학사(大鶴寺) 모두 화산(華山)에 있다.
유여왕사(留麗王寺) 고려 태조가 유숙하였으므로 그로 인해 명명된 것이다.
성불사(成佛寺), 마점사(馬占寺) 모두 왕자산(王字山)에 있다. 고려 태조가 말을 멈추었으므로 그로 인해 마점이라고 명명된 것이다.
고적(古蹟)
풍세 폐현(豐歲廢縣) 군 남쪽 27리에 있다. 일명 자천(秭川)이라고 한다. 본래 백제 감매현(甘買縣)이다. 신라 때에 순치(馴雉)로 이름을 바꾸고 ⑩대록군(大麓郡)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풍세(豐歲)로 고치고, 현종 때에 본군에 편입시켰으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왕자성(王字城) 고정(鼓庭) 고려 태조 사당 모두 왕자산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옛터만 남아 있다. ○ ⑪고려 강호문(康好文)의 기문에 “옛날 우리 성조(聖祖)께서 견씨(甄氏 견훤(甄萱))를 칠 적에 군사 10만을 주둔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위엄을 드날렸다. 그 군영을 설치한 곳을 고정이라 하고, 그 성을 왕자성이라 하였으니, 이 고을의 설치는 여기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다. 사당의 모습이 온 고을을 비추어 고을 백성들을 은혜롭고 복되게 한 것이 이제 거의 500년이 되었다.” 하였다.
회고정(懷古亭) 군 서쪽에 있다. 고려 ⑫이곡(李穀)의 기문에 “예전에 관도(官道)를 굽어보는 정자가 고정에 있었는데, 이른바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 실로 정자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정자가 없어지면서 이름도 유실되었다가, 지정(至正) 기축년(1349, 충정왕1)에 주 수령 성원규(成元揆)가 새로 보수하였고 내가 회고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였다.
신종부곡(新宗部曲) 군 서쪽 80리에 있다. 군 경계를 넘어 예산현(禮山縣) 북쪽 마을로 들어간다.
덕흥부곡(德興部曲) 군 서쪽 68리에 있다. 군 경계를 넘어 신창현(新昌縣) 서쪽 마을로 들어간다.
돈의향(頓義鄕) 군 서쪽 62리에 있다. 군 경계를 넘어 아산현(牙山縣) 서쪽 마을로 들어간다.
모산부곡(毛山部曲) 군 북쪽 36리에 있다. 군 경계를 넘어 아산현 북쪽 마을로 들어간다.
명환(名宦)
고려
제궁(弟弓), 엄식(嚴式) 태조 13년(930)에 대승(大承) 제궁을 천안 도독부사(天安都督府使)로 삼고 원보(元甫) 엄식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손변(孫抃) 천안 판관(天安判官)에 조용되었는데, 정사에서 최고 평점을 받아 공역서 승(供驛署丞)에 특별 제수되었다. 고종조(高宗朝)에 누차 옮겨 예부 시랑이 되었다.
성원규(成元揆) 충목왕(忠穆王) 때 영주 군수가 되었는데, 백성들의 실정을 순문(詢問)하여 이로운 것은 일으키고 해로운 것은 제거하였고, 농사와 학문을 권면하였으며, 허물어진 관우(館宇)도 모두 개수하여 복구하였다.
강호문(康好文) 고려 말에 천안 부사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를 폈다.
인물(人物)
고려
전신(全信) 과거에 등제하여 관직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공무 수행에 엄중하여 청탁이 행해지지 못하였다. 누차 외직에 보임되었으니, 백성들의 거사비(去思碑)가 남아 있다. 평생토록 재산을 불리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았다.
본조
서충필(徐忠弼) 아버지 서곤(徐混)이 효행이 있었는데, 서충필도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뜻을 받들어 따르고 예를 극진히 하였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변을 맛보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여막에 거처하면서 죽을 먹으며 상을 마쳤다. 아우 서충좌(徐忠佐)도 효행이 있었으니, 어머니가 병이 나매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서 약에 타 드시게 하여 효험을 보았다. 형제가 모두 정려(旌閭)되었다.
① 정인지(鄭麟趾)가 …… 비롯되었고 : 《고려사절요》 권1 〈태조 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 경인 13년〉 8월 기사에 “왕이 대목군(大木郡)에 행차하여 동도솔(東兜率)과 서도솔(西兜率)을 합쳐서 천안부(天安府)로 삼았으며 도독(都督)을 두었다.”라고 되어 있다.
② 이첨(李詹)의 …… 했는데 : 이 내용은 《쌍매당협장집(雙梅堂箧藏集)》 권22 〈유지리숙관(諭地理倏欵)〉에 있다.
③ 군승(郡乘) : 각 고을의 읍지(邑誌)를 말한다.
④ 삼국사(三國史)에 …… 하였다 : 비류(沸流)가 남쪽으로 내려와 도읍을 정할 때에 10명의 신하가 간한 말이다. 《三國史記 卷23 百濟本紀 始祖溫祚王 1年》
⑤ 한 …… 대소원기(大召院記) : 이 내용은 《동문선(東文選)》 권80 〈영주 남원루기(寧州南院樓記)〉에도 있다.
⑥ 본조 …… 하였다 : 이 내용은 《서애집(西厓集)》 권5 〈방수사의를 조치할 것을 진술하고 겸하여 사직을 청하는 차자[陳措置防守事宜兼辭職箚子]〉에 있는 것으로 1597(선조30) 3월에 올린 글이다. 여기서 4진은 충주, 청주, 공주, 홍주에 설치한 진영을 가리킨다.
⑦ 홍적(洪迪)의 시 : 〈천안의 연정에 쓰다[題天安蓮亭]〉이다. 《荷衣遺稿》
⑧ 이승소(李承召)의 시 : 〈천안에 있는 선화루의 시에 차운하다[次天安宣化樓韻]〉이다. 《三灘集 卷4》
⑨ 강호문(康好文)이 …… 기문 : 〈영주 남원루기(寧州南院樓記)〉이다. 《東文選 卷80》
⑩ 대록군(大麓郡) : 목천(木川)의 신라 때 이름이다.
⑪ 강호문(康好文)의 기문 : 〈영주 남원루기〉이다. 《東文選 卷80》
⑫ 이곡(李穀)의 기문 : 〈영주 회고정기(寧州懷古亭記)〉이다. 《稼亭集 卷6》
ⓒ 한국고전번역원 | 오세옥 (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