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국권 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슬픔 속에서 희망을 말하기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나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음으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아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얐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어 나올 때에 쏟어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야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民籍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하고 능욕하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왼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었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의 첫 폐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서릴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출처 《원본 한용운 시집》 (2009) 첫 발표 《님의 침묵》(1926)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시인이자 승려, 사상가로서 1926년에 89편의 작품을 담은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였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나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에게는 경작할 땅이 없다. 땅이 없기에 양식(糧食)이 없고, 양식이 없기에 살 방도가 막연하다. 급한 마음에 이웃에게 도움을 청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모욕뿐이다. 대단한 것을 바란 것도 아니다. 그가 입에 올린 ‘조’나 ‘감자’는 기근이나 가난 등으로 주식(主食)을 구할 길이 없을 때 이를 대체하기 위해 주로 소비되던 작물이다. 그저 저녁 한 끼 정도를 때우고자 했을 뿐인데, 이조차 선뜻 내어 주지 않았던 ‘주인’은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주인이라는 말을 단서로 삼아 이 둘의 관계를 종주인 또는 소작인지주 등의 수직적 관계로 파악해 볼 수 있겠으나, 단순히 ‘이웃집의 주인’으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어 실상이 어떠한지는 분명치 않다. 작품에서 확인 가능한 것은 이 주인이 도움을 거절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나’를 인격도 생명도 없는 존재라 모욕하였으며, 그런 ‘나’를 도와주는 것은 곧 ‘죄악’이라고 단언하였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또한 민적이 없다. 민적이란 호적의 옛 이름으로 호주(戶), 즉 집주인을 중심으로 하여 그 집에 속하는 사람의 신분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공문서이다. 그는 집이 없으므로 호주가 아니고, 호주가 있는 집에 속한 사람도 아니므로 민적(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이 때문에 그는 ‘공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사회의 보호를 받을 수 없고, 오직 고립된 개인으로서 잠재적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심지어 상대는 ‘장군’이다. 폭력에 기반하여 성립된 막대한 권력을 지닌 장군은 급기야 그의 가장 내밀하고도 사적인 영역을 빼앗고자 한다. 이를 어떻게 막을 수 있었을까. ‘항거’라는 두 글자에 응축되어 있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슷해 보이는 두 개의 사건이 연을 달리하여 병렬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화자에게 ‘슬픔’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 공통점이 있다. 각각 “쏟어지는 눈물 속에”,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라는 구절에서 화자 내면의 슬픔이 분명하게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작품의 도처에 자리한 이 슬픔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화자의 슬픔은 타인의 모욕에서 비롯되었다. 인격에 대한 모욕은 인간의 영혼을 부순다. 개인적인 모욕감, 심리적인 상처와 관련하여 “마음을 다친다는 것은 마음에 따귀를 맞는 것과 같” (Wardetzki, 2000/2020: 7)다는 비유는 그 의미를 굳이 곱씹지 않고 일상의 경험에 비추어 보기만 해도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모욕감은 즉각적으로 분노, 경멸, 실망, 고집, 무력감 등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다시 좌절감, 우울감, 불안감, 수치심, 소외감 등의 정서와도 연결된다(Wardetzki, 2000/2020: 23-24). 다른 기준을 들어 감정들을 나누어 볼 수도 있다. 예컨대 상처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이들은 이 가운데 분노, 경멸 등에 가까운 반응을 보일 것이며, 상처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이들은 우울감, 수치심, 좌절감 등의 정서에 매몰될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이 중 어느 하나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반응이나 정서가 동시에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신을 보았습니다>의 화자에게서는 ‘슬픔’이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슬픔은 모욕감과 관련하여 나열된 반응과 정서 중 좌절감, 우울감, 불안감, 수치심, 소외감 등과 긴밀하게 연결되며, 경멸, 실망, 고집 등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이 시의 화자는 상처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화자의 논리 구조를 따라 행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나’는 땅이 없기 때문에 집이 없고, 민적이 없기 때문에 모욕을 받은 것이다. 이렇듯 모욕의 원인이 ‘나’에게서 비롯되었기에, ‘나’ 그 자체로는 희망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희망은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바로 ‘당신’이다.
내가 아니면서 절대적으로
나의 편이 되어야 할 존재
화자에게 ‘당신’이 의미화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나에게 “잊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눈앞에 있거나 바로 내 옆에 있는 누군가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되려면 ‘당신’은 우선 어딘가로 가고 없어야 한다. 이처럼 당신은 지금의 나와 함께하지 않기에 희망이 될 수 있는 존재이다. 바꾸어 말해 당신은 내가 아닌 어떤 존재, 나의 세계에 부재하는 존재로서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말하는 ‘잊을 수 없음’이란 곧 ‘부재’와 ‘결핍’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첫 행에서 이미 ‘당신’은 가신 뒤라 하였으니, 각각의 순간에 화자가 보았다는 ‘당신’의 모습은 분명 환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 환상이 슬픔으로 가득 찬 현실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가능성이자 희망이라면, 환상은 그 자체로도 충분한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부재’와 ‘결핍’으로 정의되는 존재가 희망이 될 수 있는가? 화자에게 있어서 ‘나’와 ‘나’를 구성하는 다양한 조건들이 곧 슬픔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로 촘촘히 싸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개입해야만 한다. 이처럼 화자가 희망을 상정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 부정을 전제한다. 그러나 단지 나와 다르다고 해서 희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주인’도 ‘장군’도 나와는 다른 존재이다. 그러나 이들은 나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슬픔을 줄 뿐 나의 희망이 될 수는 없다. ‘당신’은 이들과는 달리, 나의 편에 서야 할 것이다.
‘주인’과 ‘장군’은 땅이 없다는 이유로 나의 인격을 말살하고, 민적이 없다는 이유로 나의 정조를 유린하려 하였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양식을 구걸하는 너는 거지와 같다.)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 ‘너는 민적이 없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는 논리이다. 각각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보면 이들이 드러내 놓고 말하는, 혹은 감추어 두고 말하지 않은 이 논리들에 기대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정당화의 근거로 삼은 논리가 곧 그들의 ‘윤리, 도덕, 법률’이다. 윤리, 도덕, 법률이 화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온전히 기능하고 있었다면 화자는 양식을 얻었을 것이고, 인격을 존중받았을 것이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결사적으로 항거해야 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윤리, 도덕, 법률이 이와 같이 기능하지 못하고 주인의 ‘황금’과 장군의 ‘칼’의 뒷배가 되어 이들을 떠받들고 있었기에 화자는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수 없었다. 화자는 마침내 3연 4행에 와서야 짧은 감탄사와 함께 현실 사회의 ‘윤리, 도덕, 법률’이 사실상 가진 자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들의 카르텔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가 가장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현실 중 하나일 것이다.
|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한편으로 불의에 대한 분노를, 다른 한편으로 무력감에 의한 슬픔을 가져온다. 부정적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는 쪽은 분노에, 그럴 수 없다고 보는 쪽은 슬픔에 보다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전자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과, 후자는 현실에 대한 소극적인 부정과 긴밀하게 깨달음 이후에 화자는 세 가지 선택지를 두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첫째,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는 주로 종교, 특히 불교에 귀의하는 길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영원’과 ‘종교’를 연결시키고 한용운의 전기적 사실에 근거하여 ‘불교’를 덧씌우는 식인데,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종교에 귀의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이를 긍정적인 의미에서 현실 초극, 또는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승화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단순히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현실 도피와 연결 지을 경우에는 ‘종교’ 외에 ‘죽음’도 가능한 해석이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현실 도피적인 성향을 일정 부분 공유하며 ‘영원’과도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이 해석은 고려해 볼 만하다. 특히 이 작품의 화자에게는 어느 수준 이상의 ‘자기 부정’이 전제되어 있는데, 자기 부정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죽음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둘째, “인간역사의 첫 폐지에 잉크칠을 할까”에 대해서는 상반된 해석이 공존한다. 이 부분을 긍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이들은 “빈 여백에 잉크로 무언가를 써 넣음으로써 의미 있는 창조 작업을 벌이는 것 (…) 현실에 참여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것”(이승원, 2008: 56-57)이라 풀어 쓴다. 반면 이 부분을 부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이들은 “인류의 문명이니 역사니 하는 것들은 침 뱉어 마땅한 거짓 (...) 그것이 허위와 기만에 불과한 것이라고 부정하는 일”(김흥규, 2005:281) 이라 이해한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인가, 기존의 세계를 부정하는 행위인가. 이 비유적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부분과의 맥락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술을 마실까”는 다른 구절과는 달리, 이견 없이 현실 부정의 표현으로 읽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이들을 두고 망설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야 할 차례이다. 앞선 논의들을 종합해 보면, 현실에 대한 화자의 대응은 크게 보아 화자가 적극적인 현실 변화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소극적인 현실 부정의 상태에 놓여 있는지로 나누어진다. 전자의 경우 세 가지 선택지의 의미는 각각 현실 초극, 새로운 세계의 창조, 현실 부정으로 읽히고, 후자의 경우는 현실 도피, (분노에 가까운) 현실 부정, (체념에 가까운) 현실 부정으로 읽힌다.
작품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면 이 중 후자가 좀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그 근거는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작품의 전반적인 내용이 화자의 슬픔을 형상화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의 근거는 작품 안에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근거는 모호하게만 느껴진다. ‘당신’을 보게 된 것이 이후의 현실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에 대해 독자가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거의 없다. 끊임없이 위기로 내몰리며 슬픔으로가득 찬 삶을 이어 가던 이가 깨달음 이후 갑자기 새로운 역사의 창조 의지를 표명했다고 읽는 것은 지나친 비약으로 보인다.
둘째, 망설임 이전에 있었던 ‘깨달음’의 성격 때문이다. 화자는 이 사회의 윤리, 도덕, 법률 등이 지배층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들이 가진 권력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이 그 자체로 화자의 대응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화자가 어떠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대응 방식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화자는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세상에 적극적으로 맞서기보다는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는 쪽에 가까운 성향을 보인다. ‘항거’ 등의 시어에 주목해보아도 이는 자기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이지, 세상을 바꾸어 놓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인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셋째, 화자가 망설임의 순간에 당신을 보았다는 진술 역시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앞에서 화자가 당신을 보았던 순간은 모두 화자가 슬픔을 느끼고 있던 순간이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절대적인 무력감을 느끼게 된 그 순간이 바로 ‘나’에게 ‘당신’이 현현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이 망설임의 순간에 화자에게 충만하였던 감정 역시 ‘슬픔’이었을 것이라 추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 이상 내려갈 곳조차 없어 보이는 바닥에서의 슬픔을 말하면서도 이 작품의 분위기가 그렇게 절망스럽게 느껴지지만은 않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존재감 때문일 것이다. 뚜렷하고 명확한 전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은 제 나름의 역할을 하면서 ‘절망’으로 기울지 않도록 삶을 지탱한다. 이 작품은 ‘당신’이라는 비어 있는 표상을 활용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의 희망을 말하려 한다. 부재와 결핍으로 정의되는 ‘당신’의독특한 의미화 방식이 이러한 역설을 가능하게 한다. 작품에서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는 슬픔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그것의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는 ‘당신’의 의미와 가치 역시 크게 느껴진다.
이렇듯 ‘당신’에 비추어 간접적으로 희망의 존재를 말하는 경로를 택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슬픔을 견디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흔히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그 감정을 부정하며 ‘아무것도 아니다. 별 게 아니다. 금방 지나갈 것이다. 이겨 낼 수 있다.’ 등의 말들을 건네곤 한다. 이러한 말들이 당장의 슬픔이나 고통으로부터 눈을 돌려 망가진 삶을 추스르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슬픔과 고통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러한 방식의 위로가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그 말이 자칫 슬픔을 느끼고 있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당신을 보았습니다>의 화자는 자신의 슬픔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그 슬픔을 처음부터 끝까지 받아 줄 수 있는 ‘당신’을 떠올리고 그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신이건 연인이건 ‘당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슬픔의 밑바닥에서조차 바라보고 말을 건넬 대상이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사람은 절망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한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읽기를 통해 독자는 한 사람의 나약함이나 그 내면에 차오르는 슬픔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희망을 말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금언과도 같이, 이 작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간절히 희망을 갈구하게 되는 순간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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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용직 주해(2009), 《원본 한용운 시집》, 깊은샘.
김홍규(2005),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푸른나무,
이숭원(2008), 『교과서 시 정본 해설』, 휴먼앤북스,
Wardetzki, B. (2020), 『따귀 맞은 영혼: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방법』, 장현숙 역, 궁리(원서출판 2000).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4. 21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