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 중에는 귀담아 들을 만한 좋은 지적도 많이 있지만,그렇지 않고 누구든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투적인 지적을 되풀이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즘에는 교회 개혁을 외치지 않으면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목회자인 양 보인다. 그러나 이 시대에 필요한 교회 개혁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과 누가 이 시대에 교회를 대표하는 목소리가 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를 비판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과연 몇 명이나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대형 교회를 맡고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교계를 대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신학교 교수라고 해서 교계를 대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자기가 스스로 원해서 선지자의 직분을 받은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그 일을 맡게 된 사람들이었다. 이사야든,예레미야든,에스겔이든,선지자의 소명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스라엘 종교계의 핵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변두리에 있었다.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서 약대 털로 만든 옷을 입고 메뚜기와 역청을 먹으면서 외친 사람들이었다. 교계의 중심부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교계를 객관적으로 바르게 볼 수 있었다.
참된 예언이라면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는 말만 있어서는 안 되고 용서와 회복에 대한 위로와 약속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구약 선지서들의 특징은 꾸짖음 뒤에는 반드시 더 좋은 미래를 약속하는 위로의 말이 있었다는 점이다. 사도 바울도 예언의 목적은 덕을 세우며,권면하며,위로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고전 14:3).
그렇다면 문제는 오늘날 교회를 비판하는 이들의 메시지 속에 이러한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부분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그런 부분이 없다면, 그것은 위로부터 비롯된 말씀이 아니고 그저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고 했는데, 성령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비판은 교회를 살릴 수 없고 오히려 위축시키고, 낙심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필자는 대형 교회를 목회하고 있지 않지만, 대형 교회를 무조건 싸잡아 비판하는 데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는 복음화율이 높은 지역에는 반드시 대형 교회가 있다. 반대로 복음화율이 낮은 곳에는 대형 교회가 없다. 서로의 상관관계를 놓고 판단할 때 대형 교회가 그 지역사회의 복음화에 기여하는 바가 있음을 분명히 암시한다. 이 사실은 외국을 예로 들어볼 때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는 복음화율이 상대적으로 낮고,댈러스나 오클라호마 같은 곳은 복음화율이 높다. 복음화율이 높은 도시에는 반드시 대형 교회와 명성 있는 설교자들이 있다. 반대로 복음화율이 낮은 도시에는 대형 교회도 없고 명성 있는 설교자를 찾기도 어렵다. 오늘날 교회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 중에는 대형 교회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요 반기독교적인 동기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대형 교회가 담당할 수 있는 일들이 있고, 중형, 소형 교회가 담당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는 소위 만인제사장설을 실천하기 위하여 목회 사역의 일부를 평신도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다. 평신도 사역이 원활하게 잘 되는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강력한 목회자와 강력한 강단이 있어야 한다. 이것 없이는 평신도 사역이 잘 되지 않는다. 최근 설문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교인들의 78.3%는 예배를 곧 설교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만큼 설교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남들이 한다고 모두가 덩달아 동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 사회를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를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다. 차라리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칭찬하는 말,격려하는 말,감사하는 말,용기를 북돋워 주는 말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교계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