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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스크랩 흥양현감 배흥립
수석사랑배지식 추천 0 조회 51 10.02.21 12: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호는 백기, 이순신이 관할하는 5관(비상시)5포의 휘하장수이다.

 

이순신이 아끼는 장수5명을 꼽으라면 그중에 한명을 꼽고싶다.

 

성산 배씨 라는 알아주는 가문출신으로 배설도 성산배씨이다.

 

엄청난 재력가로, 개전초 전라좌수영 함대(5관5포)가 판옥선이 25척 내외이고

 

우수영관활지역이 15관 12포(30척미만)였음을 감안할때  흥양조선소를 관할하는 

 

배흥립장군의 물질적 성원이 컸음을 알수있다.

 

실록에보면 장흥부사로 있다가 탐관오리로 지목되어 잠시 파직된기록도 나온다.

(후에 충무공이 조방장으로 기용)

 

여기서 눈여거 봐야할점은

 

이순신장군의 관할지역 5관5포중, 5포는 직속으로 관할하지만 5관소속은

 

필요시 전라관찰사가 임의로 자기소속으로 배속시켰다는 점이다.

 

충무공의 고뇌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첫전투인 옥포해전에서는 중위장인 순천부사 권준을 빼가 방답첨사 이순신으로 대체했다.

 

이런이유로 배흥립장군은 임진왜란 3대대첩(한산도,행주,진주성)중 2개대첩(한산도,행주)에 직접

 

적으로 참전한 유일한 장수였다.

 

난중일기에 "배흥립이 와서 행주에서 크게 이겼다고 떠들어 댔다"는 구절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충무공은 권율을 좋지않게 평가했던거 같다.)

 

덧부쳐 배흥립장군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조선수군이 치룬 거의 모든 해전(한산도해전,명량해전,

 

칠천량해전,노량해전-대표적 해전만 기록함) 에 참전한 몇안되는 장수였다

 

 

아래글은

 

임진왜란 역사연구소(http://blog.naver.com/hangiree/30006820055)에서 펀글임니다,

 

  

 배흥립(裵興立)의 신도비명

 

 

생원(生員) 배상유(裵尙瑜)가 영남으로부터 그의 증조부[曾皇考]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

 

게 비명(碑銘)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기에 내가 배 생원과는 평소에 친분이 두터운데다 공(公)은 신

 

도비명을 짓는 것이 합당하니 감히 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지 못하겠다.

 

 삼가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휘(諱)는 흥립(興立), 자(字)는 백기(伯起)이다. 배씨는 성산(星山)의

 

이름난 가문인데, 비조(鼻祖)는 휘가 실(實)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되었으며, 그 후로

 

연속하여 10대가 모두 큰 벼슬을 지냈다.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휘가 규(規)인 분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장남은 윤(閏)으로 좌사간(左司諫)을 지냈고, 차남인 한(閑)도 역시 정언(正言)을 지내니

 

부자·형제가 계속하여 사간원(司諫院)에 들었으니 한 시대의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좌사간

 

공은 공의 5대조가 되신다. → 족보상으로 보면 윤(閏)과 한(閑)을 착각하여 잘못 쓴 것으로 보인

 

다. 장남이 한(閑)으로 좌사간, 차남 윤(閏)이 정언을 지냈다.

 

 고조(高祖)는 휘가 순(詢 → 족보에는 允詢)으로 성균관 진사였으며, 증조는 휘가 석보(碩輔)로 형

 

조참의에 추증(追贈)되었고, 조부는 휘가 국현(國賢)으로 은덕(隱德)이 있어 형조참판에 추증되었

 

다. 부친은 휘가 인범(仁範)으로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냈는데, 향리에서 그의 효행과 우애를 칭

 

송하여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모부인은 경주 김씨로 목사 김익(金瀷)의 딸이다. 정부인(貞

 

夫人)에 추증되었으며, 지행(至行)이 있어서 찬성공이 상을 당하게 되자 몹시 여위어 돌아가신 일

 

이 알려져 정려(旌閭)를 받았다.

 

 공은 가정(嘉靖) 병오년(丙午年, 1540) 11월 7일, 경신일(庚申日)에 태어났다. 공의 조모(祖母)이

 

신 한양 조씨 부인이 일찍이 집을 지을 때에 대장기(大將旗)를 정원 가운데에 세우는 꿈을 꾸었는

 

데, 과연 공이 태어나자 용모가 더한층 빼어났으며, 조금 자라서는 벌써 병가(兵家)의 일을 훤히 알

 

아 대장의 그릇이 있었다. 조씨 부인은 자식을 엄하게 훈육하였는데 다만 공에게는 항상 이르기를,

 

「이 아이에게는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약관이 갓 되어서 (문음으로) 사산감역(四山監役)

 

을 제수(除授)받았다가 돌연 파면되었으나 품은 뜻은 결단코 녹록하지 않았다.

 

 융경(隆慶) 임신년(壬申年, 1572)에 무과에 급제하여 초임으로 선전관(宣傳官)을 제수받았고, 태

 

복시주부(太僕寺主簿, 사복시)를 지낸 것이 두 번이었다. 고을의 수령을 지낸 곳은 다섯으로 결성

 

(結城)·흥양(興陽)·장흥(長興)·영흥(永興)은 모두 부임을 했으나 무장(茂長)은 병으로 인해 부임하

 

지 못하였다. 임진년 이후에는 계속하여 조방장·방어사의 임무를 띠고 전공(戰功)으로 누차 가자

 

(加資)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이르렀다. 기해·경자년에 연속으로 호남좌우도 수군절도사를 제

 

수받았고, 계묘년(癸卯年, 1603)에 중추부(中樞府)에 들어 도총관(都摠管)을 겸직하였다가 공조참

 

판(工曹參判)으로 옮겨 제수되었으며, 다음해에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제수받았다. 다음해에 본도

 

의 병마절도사로 옮겼다가 정미년(丁未年, 1607)에 도총관을 거쳐 영흥부사(永興府使)로 나갔다.

 

무신년(戊申年, 1608)에 병으로 귀경(歸京)하였다가 그 해 10월 17일에 63세로 졸하였다. 인조조에

 

선무원종공신으로 형조판서를 추증받았으며, 또 아들 시량(時亮)이 귀해짐으로써 좌찬성 판의금부

 

사에 추증되었으니, 이것이 공의 이력이다.

 

 평생동안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모부인께서 병으로 앓게 되어 머리카락을 빗지 못하여 (머리

 

에) 이가 많게 되었다. 공이 몸소 (자신의) 머리카락에 기름을 발라서 옆에 누워 이를 유인하였으니

 

(공의) 그 지극한 효성이 이와 같았다. 부모가 처음에 공에게 재산을 가장 많이 주었는데, 뒷날에

 

공이 동생과 더불어 나눌 것을 청하니 모부인께서 부친의 명이니 고칠 수 없노라고 하였다. 모친께

 

서 상을 당하자 그 분재(分財)에 대한 문서를 무덤 속에 같이 넣어 묻고는 재산 중에서 비옥한 땅을

 

골라 동생에게 주니 의사(義士)들이 현명하게 여겼다. 이것이 공의 지행(志行, 품은 뜻과 행실)이

 

다.

 

 흥양현감으로 있을 때에 변방에 급한 경보(警報)가 없음에도 녹봉을 덜어 전함(戰艦)을 많이 만들

 

어 난리를 당했을 때에 (이것에) 의뢰하게 되니 사람들이 공의 선경지명에 탄복하였다. 누차 여러

 

원수부(元帥府)를 보좌하였는데, 정승 정언신(鄭彦信), 순찰사 권율(權慄)에게 종사하였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같이 일한 것이 오래되었다. 처음에 적이 이르렀을 때에 열읍(列邑)이 다

 

투어 달아나 숨고 맡은 지역을 피했는데, 공이 홀로 병사들을 거느리고 움직이지 않았고, 전진(戰

 

陣)에 임해서도 의기(意氣)가 태연자약하니 유탄이 투구에 맞아 투구가 부서져도 또한 동요하지 않

 

았다. 칠천량의 해전에서 원균(元均)이 적진(敵陣)에 임하여 군기를 그르쳐서 달아나기에 공이 홀

 

로 전선을 앞세워 나아가 강한 적을 버텨냈으며, 한산의 전투에서는 9번 싸워 9번을 다 이겼는데

 

모두 앞장을 섰고, 진도에서 적과 만나서도 앞장섰고, 행주(幸州)에서 대첩을 거둘 때도 역시 앞장

 

을 섰으며, 승군(僧軍)을 이끌고 또 앞장섰으니 이것이 공의 충용(忠勇)이다.

 

  관직을 받들 때에는 깨끗한 몸가짐을 가졌고, 사람을 대할 때에는 정성을 다하니 난리가 끝난 후

 

에 남쪽에 떨어져 돌아가지 못한 인사(人士)들에게 녹봉을 나누어 구호하였고, 돌연히 죽은 이들은

 

시신을 염하여 말에 실려 돌아가게 하였다. 집에 머물 때는 벌이를 도모한 바가 없었으며, 공(功)이

 

있어도 또한 뽐내지 않았으니 이것이 공의 신의(信義)이다.

 

 금상 7년(효종 7년, 1656)에 정려(旌閭)를 내릴 것을 명하시어 공의 효성을 현창(顯彰)하게 하였

 

다. 공의 전 부인은 청송(靑松) 심씨로 호군(護軍) 횡(?)의 딸인데 고(故) 정승 통원(通源)의 손녀

 

로 서사(書史)에 통달하여 부덕(婦德)이 매우 많았다. 36세에 돌아가시어 정부인(貞夫人)을 추증받

 

았고,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시망(時望)인데 공보다 앞서 죽었으며, 장녀는 선비 구성윤(具誠

 

胤)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완산군(完山君) 이숙(李淑)에게 시집갔다. 두 번째 부인은 여산(礪山) 송

 

씨로 군수(郡守) 계조(繼祖)의 딸이며, 병마절도사 중기(重器)의 손녀로 향년 71세로 돌아가셨으며

 

정부인(貞夫人)을 추증받았다. 성품이 유순하고 아름다워 친족간에 화목하게 하고 제사를 공경하

 

게 받들었으며, 전 부인의 아들을 오히려 자신이 낳은 것처럼 보살폈으며,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은 시준(時俊), 차남은 시량(時亮)이고, 딸은 참판 목장흠(睦長欽)에게 시집을 갔다. 측실에게 아들

 

이 하나 있었는데 시용(時用)이다. 시망(時望)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명전(命全)은 현감(縣

 

監)을 지냈고, 차남 명순(命純)은 부사(府使)를 지냈는데 병자호란 때에 죽었다. 명전(命全)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곧 상유(尙瑜)이다. 명순(命純)은 2남 2녀를 두었고, 시준(時俊)은 1남을 두

 

었는데 이름이 명신(命新)이고, 명신은 3남 3녀를 두었다. 시량(時亮)은 관직이 경상병사(慶尙兵

 

使)에 이르렀고,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명호(命虎)로 2남을 두었다. 내외의 자손이 모두 수백

 

여 명이 되는데 이름이 드러난 이들도 또한 많지만 모두 기록하지는 못하고, 비석의 뒷면에 자손을

 

기록한 것이 상세하다. 전 부인의 묘는 포천(抱川) 직동(直洞)에 있고, 공은 처음에는 여주(驪州)

 

품곡(品谷)에 장사지냈으나 임자년(壬子年)에 금산(金山) 치남(治南)의 감좌(坎坐 방향을 나타내는

 

단어로 북동쪽) 언덕의 선영(先塋)에 이장하였고, 두 번째 부인을 함께 모셨다.

 

 내가 항상 절도사 시량(時亮) 공이 충성스럽고 근실함을 보았고, 생원 배상유(裵尙瑜)도 또한 예법

 

으로 몸을 닦아서 마음속으로 어여쁘게 여겼는데 지금 공의 행적(行迹)을 보니 가훈(家訓)이 그 유

 

래가 있음을 알겠다. 비명(碑銘)을 이렇게 짓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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