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고급 예술로 정의하려 했는데 오페라, 미술, 건축이 혼합된 네오 바로크는 여기에 제격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샤를 가르니에(Charles Garnier, 1825~98)의 파리 오페라 하우스(Paris Opera, 1861~75)였다. 이 건물은 오스망의 파리 재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지어졌다. 부르주아의 본거지를 확보하게 위해 구 시가지를 헐고 신시가지를 개발했는데 그 가운데 핵심 공공건물로 들어선 것이다. 부르주아는 개발비를 대는 대신 나폴레옹 3세에게 세 가지를 요구했다. 부동산을 바탕으로 한 자산증식을 보장할 것, 산업 자본주의의 근간인 생산증대를 돕는 도시구조를 만들 것, 자신들의 계급 정체성을 대표할 문화적 중심지를 만들 것 등이었는데 마지막 요구가 파리 오페라 하우스로 결실을 본 것이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는. 오스망 재개발의 중심 가운데 하나로 세워졌다.
파리 부르주아는 오페라 하우스를 자신들의 집결지로 애용했는데 이를 대표할 건축양식으로 네오 바로크를 선택했다.
네오 바로크의 절정으로, 극장 전체를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눈 뒤 각각에 루이 14세, 15세, 16세의 프랑스 국가 양식 선례와 기타 역사주의 양식을 배당했다. 후면의 행정동은 차분한 루이 13세 양식으로, 황제를 위한 로톤다에는 로마 고전주의에서 자주 사용하던 반원형 벽기둥을, 정면에는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화려한 장식과 루이 14세의 장엄 양식을, 축제성이 요구되는 실내 계단에는 루이 15세 양식의 곡선윤곽을 각각 사용했다. 화려한 장식과 달리 건물 골격을 철물 구조로 잡고 무대 장치에 19세기에 새로 발명된 기계 설비를 도입하는 등 극장 건축사에서 새로운 발전도 있었다.
가르니에는 황제를 염두에 둔 제국 양식을 창출했지만 더 궁극적 목적은 부르주아들을 위한 모임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객석과 무대 이외에 로비에 많은 면적을 할당한 뒤 장경주의 개념으로 처리했다. 객석 전면에 ‘로비-테라스-계단’이 어우러진 사교의 장을 마련해서 부르주아들이 서로를 보고 서로에게 보이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 공간의 골격을 이런 목적에 맞게 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바로크의 화려한 장식과 유려한 곡선으로 치장함으로써 부르주아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정의해줌으로써 최종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는 로비와 계단이 넓은데 이는 부르주아들의 미팅 장소로 활용되었다.
아케이드와 소비 공간
19세기 산업자본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이것을 지탱하는 두 축이었던 생산과 소비를 위한 새로운 공간이 탄생했다. 만국박람회 전시관이 생산을 중심으로 일부 소비를 함께 담당한 공간이었다면 아케이드(arcade)는 전적으로 소비를 전담한 공간이었다. 두 공간은 부르주아 양식이 탄생하는 데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아케이드가 특히 그랬다. 만국박람회는 국가적 차원에서 치르던 제국경쟁의 장이었기 때문에 부르주아 양식 이외에 제국양식과 신건축운동 등이 섞여 복잡하게 진행된 반면 아케이드는 부르주아들의 고급 소비 공간으로 온전히 부르주아양식만으로 구성되었다.
아케이드는 대도시의 상업지역 가운데 일정 거리의 가로에 전문상가를 세운 뒤 천장을 유리로 덮은 건축형식, 혹은 판매형식을 지칭했다. 새 건물을 지을 수도 있었고 도심 내 블록 단위 등 기존의 건물을 개조해 활용하기도 했다. 아케이드란 말은 줄지어 늘어선 상가의 출입구가 대부분 아케이드로 처리되었고 천장도 볼트 형태를 기본 구조로 가졌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이외에도 통로라는 뜻의 ‘passage’나 갤러리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19세기 파리에 나타난 새로운 변화의 모습에 경탄과 비판의 양날의 칼을 들이대며 써댄 미완성 유작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아케이드가 이 아케이드였다.
트레일 젤의 런던 피카딜리 아케이드. 부르주아의 고급 소비공간인 아케이드는 그에 걸맞은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했다.
주세페 멘고니의 밀라노.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갈레리아. 가로를 막아 형성됭 아케이드는 보통 유리로 천장을 덮었는데 이는 밝고 활기찬 공간을 만들어 자본주의를 건강한 경제체제로 보이게 하는 작용을 했다.
아케이드는 자본주의에서 소비를 담당하는 첨병이었다. 공간적 성격으로는 실내와 실외를 겸한 중간상태를 유지했다. 가로를 포함한 일정 단위의 불록 전체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실외공간이었지만 가로에 천장을 덮어서 비바람을 막아주는 점에서는 실내다운 성격도 일정부분 가졌다. 이런 공간성격은 일정한 축제성격을 띠며 소비를 부추겼다. 도시 외부공간의 흥겨움과 가로의 활기를 유지하면서도 실내 같은 아늑함과 차분함을 함께 가졌다. 전자는 쇼핑을 축제 같은 나들이로 만들면서 소비욕망을 자극했다. 후자는 비바람을 막아 쇼핑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줄 뿐 아니라 부르주아들만의 영역을 한정짓는 기능도 추가로 가졌다.
폼므레이 파사주
가게는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건축양식은 만국박람회 전시장과 유사하게 역사주의, 장식경향, 신 재료의 세 가지를 혼용했다. 이오니아식 오더, 코린트식 오더, 아치, 볼트, 돔 등 장식성 높은 고전 어휘를 중심으로 역사양식으로 기본 골격을 짰다. 여기에 그림, 공예, 모자이크, 치장벽토, 조각, 돋을새김 등 장식을 더했다. 천장은 유리로 덮었으며 이것을 받치는 구조 골격은 가늘고 날씬한 철물로 짰다. 이 때문에 천장을 덮었음에도 통로는 어둡거나 습하지 않고 밝고 위생적인 분위기를 유지했다. 이런 분위기는 곧 부르주아의 이미지와 직결되었으며 나아가 자본주의가 밝고 건강한 경제 체제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뷔롱 & 뒤랑-고슬렝의 낭트 폼므레이 파사주. 밀라노의 비토리아 엠마누엘레 갈레리아와 함께 19세기 아케으디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칼 프리드리히 싱켈. 베를린 구 박물관. 싱켈은 요절한 길리의 뒤를 이어 독일 신고전주의를 정착시킨 장본인이었다.
프리드리히베르더 교회는 당시 독일 사회가 겪던 종교 갈등을 통합해낸 중요성을 갖는다. 국민주의의 일환으로 중세 가톨릭을 독일의 낭만적 국민 정서와 동일시하는 바람이 불었고 신교 진영에서는 이에 반발하던 상황이었다. 루터 교 집안 출신인 싱켈도 그 갈등의 한 가운데 있던 때 이 교회를 설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교를 상징하는 고전주의 안을 제시했는데 가톨릭 진영에서 공격을 받았고 왕실에서도 고딕 양식으로 지으라고 했다. 싱켈은 고딕 양식을 고전정신과 근대정신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종교개혁 정신을 표현했다.
칼 프리드리히 싱켈. 프리드리히베르더 교회. 싱켈은 당시 시대 유행에 따라 고딕 리바이벌도 구사할 줄 알았지만 고전주의와 근대정신으로 재해석해내 단순 복사의 수준을 넘어섰다.
칼 프리드리히 싱켈. 프리드리히베르더 교회. 다발기둥을 표피구조로 번안해서 내력기능을 근대적으로 해석했다.
펠릭스 뒤방. 에콜 데 보쟈르 교육관. 나폴레옹의 제1 제정이 지나간 뒤 프랑스 왕국의 차분한 분위기에 따라 이탈리아 팔라초 양식이 유행했다.
19세기 프랑스의 역사주의는 전반부의 신고전주의와 후반부의 네오 바로크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중반을 전후해 고딕 리바이벌과 로마네스크 리바이벌 등의 중세주의가 가세하는 형국이었다. 시작은 나폴레옹의 등장에 따른 제1 제정 건축(1804~14)이었다. 나폴레옹의 명성에 비해 건축은 크게 활성화되지 못해서 개선아치 두 개, 방돔 광장 기둥, 몇 건의 왕궁 개축 등이 대표적 건축 활동의 전부였다.
프랑스 왕국의 고전주의 건축
나폴레옹이 물러가고 들어선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 왕국은 건축 활동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민간분야의 자발적 활동에 맡겨 놓는 편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대표적인 건축 경향 두 가지가 등장했다. 하나는 르네상스 팔라초를 리바이벌시킨 경향으로 펠릭스 뒤방(Felix Duban, 1797~1870)의 에콜데보쟈르 교육관(Palais des Etudes, Ecole des Beaux-Arts, 파리, 1832~9)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나폴레옹 때의 과시경향에 대한 반발적 대안으로 섬세하고 우아한 경향이 주를 이루었다. 복고 정권 아래에서 차분하게 가라앉은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팔라초 모델의 단정한 윤곽, 명확한 몰딩, 선형장식 등은 이런 분위기에 잘 맞았다.
루이 피에르 발타르. 리옹 대법원. 19세기에 불바르라는 대 가로가 등장하면서 이를 면하는 대형공공건물 입면에 열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러스티케이션의 1층과 열주 분할의 2층으로 구성되는 브라만테의 라파엘 하우스 모티브를 사용했다. 1층은 줄눈을 두껍게 해서 기단의 튼튼한 축조다움을 표현했다. 2층은 열주와 넓은 창으로 처리해서 가벼운 율동감과 경쾌한 열린 분위기를 주었다. 애틱 층인 3층은 낮은 높이에 맞게 얕게 돌출한 벽기둥으로 처리했다. 장식은 가능한 한 절제했으나 꼭 필요한 곳에는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디테일은 고전 표준문법을 잘 지켜서 안정적 분위기를 주었다.
다른 하나는 열주 파사드를 사용하는 경향으로 알렉상드르 피에르 비뇽(Alexandre Pierre Vignon, 1763-1828)의 마들렌 사원(L‘Eglise de Madeleine, 파리, 1807~42)과 루이 피에르 발타르(Louis Pierre Baltard, 1764~1846)의 리옹 대법원(Palais de Justice, Lyon, 1835~)을 들 수 있다. 이 경향은 나폴레옹 때 부르봉 궁전 파사드에 나타났던 기법을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8세기 국제적 신고전주의가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는 바로크의 벽체구조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하던 데 반해 19세기에는 가로에 대한 건축적 대응의 역할로 바뀌었다. 19세기에는 불바르 같은 대로가 생겨나면서 이것을 면하는 새로운 건물 파사드 개념으로 도입했다.
알렉상드르 피에르 비뇽. 마들렌 교회. 불바르를 면하는 교회에도 열주 파사드가 등장했다.
마들렌 사원은 'T'자형 도로의 결절 점에 8개의 대형 기둥이 신전 파사드 전면을 형성하며 서 있어서 전면 도로 뿐 아니라 주변 지역 전체와 소통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가로가 확장되면서 건물의 존재가 묻힐 염려가 생기자 이를 막기 위해 건물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가로와 건물 사이에 연속성을 주려는 목적을 가졌다. 리옹 대법원은 강을 따라 난 도로에 길게 면해서 앞의 도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강 건너 시내 전체에 자신의 위치를 알리며 공공건물에 합당한 권위를 표현하고 있다.
자크 이그나스 히토르프. 색채주의를 이끈 히토르프의 대표작인데 외관은 역사 절충주의를 보여준다.
역사주의 대 신건축 운동
장-밥티스트 라쉬. 생니콜라스. 낭트, 프랑스. 1840-50. 과거 양식을 직접적으로 리바이벌시켜 사용하는 역사주의는 19세기 건축을 이끈 가장 큰 흐름이었다.
보혁 대립이라는 단순 구도 이면에는 산업혁명, 자본주의, 사회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등 다원적 요소가 상호 작용하며 19세기 역사를 이끌어갔다. 이런 배경 아래 19세기 유럽의 정치문화사는 1789-1848년 사이의 혁명의 시기, 1814-30년 사이의 보수주의 시기, 1848-1870년 사이의 자본과 산업의 시기, 1860-1917년 사이의 사회주의 시기, 1870-1914년 사이의 제국의 시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혁명의 시기에는 18세기 혁명 정신의 확산과 계승이 있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중간에 보수주의가 일정기간 득세했지만 다시 혁명운동이 발발하는 등 교차현상이 있었다. 자본과 산업의 시기에는 산업혁명이 구체적 결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부를 운용하는 산업 자본주의, 금융 자본주의, 상업 자본주의의 세 가지 대표 자본주의 유형이 기틀을 닦았다.
이에 대한 반발로 1864년 제1 인터내셔널과 1867년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Das Kapital(자본론)]등을 거치며 사회주의가 탄생했다. 제국의 시기에는 이렇게 형성된 자본주의와 강력한 중앙정부가 연합하면서 산업 제국주의가 탄생했다. 제국주의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식민지를 갖는 군국주의와 식민 제국주의 등으로 분화되었다.
19세기는 이분법의 극단적 대립이 대표적 문명 현상으로 나타난 시기였다. 18세기 신구논쟁이 민간 차원의 문화적, 예술적, 학문적 성격을 띠었던 반면 보혁 대립은 법제 차원의 정치적, 권력적, 국가적 성격이 강한 개념이었다. 다양성을 생명으로 삼아 발전을 지향하던 논쟁이 소모적 충돌인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보혁 대립은 19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사회주의가 가세한 이념과 계층 투쟁으로 확장되었고 후반부에는 보수주의 내에서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물리적 경쟁으로 변질, 악화되었다.
프란츠 폰 젱엔슈미트. 빈-쉔부른 야자수실. 역사주의 옆에는 산업혁명 이후 새로 등장한 신건축 운동이 맞서며 19세기 보혁갈등을 형성했다.
19세기 건축은 문명 차원의 보혁 대립을 좇아 ‘역사주의 대 신건축 운동’의 이분법 구도로 진행되었다. 역사주의는 제국주의가 이끈 보수주의에, 신건축 운동은 문명의 주체를 미래를 향한 기술 발전에 두는 진보주의에 각각 대응될 수 있다. 실제 지어진 건물 수는 역사주의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신건축 운동은 20세기를 준비한 첨단 양식이란 점에서 이를 능가하는 시대적 중요성을 가졌다. 역사주의는 역사 양식을 직설적으로 복사하며 여전히 석재를 주 재료로 사용한 반면 신건축 운동은 산업혁명의 결과 새롭게 등장한 철물과 철골 구조, 철근 콘크리트 등에 맞는 건축 양식을 창출하려던 운동이었다. 대부분 각종 철물을 그대로 노출시키며 유리와 함께 사용했다.
토머스 콜. 건축가의 꿈, 1840. 19세기 역사주의는 이전 시대의 거의 모든 양식을 사용하는 절충주의로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둘은 대립적 경향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두 건축을 이끈 진영은 여러 경로로 서로를 비판하며 대립, 경쟁했다. 에펠탑이 상징하듯 만국박람회의 대표 양식을 둘러싼 충돌이 좋은 예이며 이외에도 수 없이 많았다. 20세기 이후로 시간의 끈을 늘려서 봐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역사주의는 아무런 시대적 의미를 갖지 못하고 따라서 건축사 책에 기록될 가치가 없는 단순 모방 양식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반면 신건축 운동은 20세기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며 현대 건축을 잉태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이분법 시각은 상당부분 옳은 것이긴 하지만 19세기 건축이 실제 진행된 내막을 보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모든 역사주의가 무기력한 복사 양식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새롭게 성장한 시민 계층을 위한 다양한 근대적 사회 인프라 시설을 담당하는 포괄성도 가졌다. 신건축 운동으로는 다양하게 분출되는 사회적 욕구를 포괄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며 이것을 담당할 건축 양식은 당시로서는 역사주의밖에 없었다. 또한 표면적 대립 이면에 상호 교류도 많았다. 신건축 운동은 세부 디테일과 양식 어휘에 역사 모티브를 많이 빌려 썼으며 역사주의 건물도 구조 골격은 철골이나 철근 콘크리트로 짜는 경우가 많았다.
절충주의의 사회 통합 기능
19세기 역사주의의 대표적 특징은 차용하는 선례 양식이 대폭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18세기 역사주의가 고전과 고딕만을 선례 소재로 삼아 해석 시각을 다양하게 시도한 반면 19세기에는 반대로 선례 소재가 크게 늘어나면서 해석 시각은 비교적 단순해졌다. 19세기에는 차용할 수 있는 역사 선례에 대한 제한이 사실상 없어졌다. 앞 시대 양식이면 최소한의 근거만 있으면 아무 것이나 빌려 써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리스에서 바로크에 이르는 크고 작은 양식이 모두 리바이벌 되는 양식의 홍수 시대가 도래 했다. 동방 양식도 마찬가지여서 이집트, 힌두, 인도, 중국, 일본 등 많은 동양건축도 리바이벌 대상이 되었다.
이런 현상을 ‘절충주의(eclecticism)'라 부른다. 역사주의의 내용과 대상이 확장되면서 다양한 선례를 선별적으로 절충해서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기본적으로 부정적 의미가 담겨 있다. 각 시대마다 고유의 상황 아래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창출한 역사 양식을 식당의 메뉴처럼 레퍼토리 대상으로 만든 다음 그대로 모방해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이다. 18세기 역사주의에는 없던 현상이며, 19세기 역사주의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이런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19세기 역사주의 전체를 무의미한 절충주의로 단정 짓기에는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새로운 기능 유형의 등장이다. 19세기에 근대국가의 기틀이 닦이면서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기차역, 법원, 시청사, 국회의사당 등과 같은 시민 사회를 위한 다양한 공공건물들이 새로 등장하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증권 거래소, 은행, 대형 시장 등의 상업 시설도 새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전에 없던 기능들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새로운 건축 양식을 찾아야 하는 숙제가 생겼다. 여기에 교회, 왕궁, 극장, 대학교 같은 전통적 기능들도 계속 지어졌다. 신건축 운동이 아직 자신들만의 새로운 건축 양식을 창출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것을 해결할 소재는 선례 양식밖에 없었다.
아우구스트 스튈러.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19세기 역사 절충주의는 박물관 같은 새로 등장한 대형 공공건물 유형에 적합했다.
오랜 역사를 지나오면서 각 양식마다 특징적 이미지가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새로운 기능 유형에 잘 대응되면서 역사 선례는 유용한 창작 소재가 되었다. 예를 들어 공공성이 강한 건물에는 고전주의가, 은행이나 상업 건물에는 르네상스가, 교회에는 중세 양식이나 고전주의가 잘 맞는 식이었다.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경쟁 속에서 국가 양식을 창출하는 역할을 했다. 열강 제국은 자국의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을 역사 속에서 찾으려 했고 국가 양식은 이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물리적 증거였다. 국가 양식을 역서 선례에서 찾아 정의할 경우 그 시대 때 형성되었던 자국의 자랑스러운 역사까지 함께 가지고 올 수 있기 때문에 19세기 제국 경쟁 체제에서 국민을 통합시키고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바인브레너. 칼스루헤 시청사. 19세기 역사 절충주의는 무기력한 과거 복사일 수 있으나 마땅한 새 양식이 없던 당시 대중성을 바탕으로 사회통합기능도 일정부분 가졌다.
르두의 혁명기 건축
클로드 니콜라스 르두(Claude Nicolas Ledoux, 1736~1806)는 불레와 함께 혁명기 건축을 이끈 건축가로 흔히 불레와 짝으로 거론된다. 불레와 달리 실제 지어진 건물을 다수 남기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르두의 이력은 양면적이어서 건축 경향에서는 혁명기 건축가로 불릴 만큼 개혁적이고 창조적 내용을 보였지만 정치적 측면에서는 왕실을 건축주로 둔 왕당파로 반혁명적 건축가의 대표 격이었다. 실제로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파리 성문 징수소를 무려 40여 채나 설계한 장본인이었으며 이 때문에 혁명 뒤에 옥고를 치른 뒤 건축 활동을 거의 접은 채 말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만을 기준으로 그는 혁명기 건축의 대표적 건축가로 분류된다.
르두. 온천 감독관 주택. 르두는 기하단위에 집주인의 직접적 상징을 실어내는 방식으로 농촌개혁 정신을 표현했다.
르두. 아케스낭 왕립 소금공장. 오더에 블록을 끼워 고전규범의 붕괴를 알렸다.
작품에 나타난 르두의 혁명성은 두 방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중농주의와 루소의 자연사상에 기초한 농촌 개혁 운동을 건축적으로 구현하려던 시도였다. 실제 실현되지 못했고 주로 드로잉을 통해 표현했다. 르두도 불레와 마찬가지로 많은 드로잉을 남겼는데 불레만큼 웅변적이거나 초월적이지 않은 대신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자신만의 특징을 확보했다. 개별 건물에서는 미니어처 풍의 간결한 기본 기하 형태를 즐겨 사용하면서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혁명 사상을 농촌 개혁에 적용했다.
다른 하나는 실제 지어진 건물에 나타난 고전 규범의 붕괴 경향이다. 그 정도가 급진적 신고전주의보다 더 진행되었기 때문에 혁명기 건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르케스낭 왕립 소금공장(Saline Royale, Arc-et-Senans, 1775~79)이 출발점이었다. 농촌 마을의 농가를 기본 골격으로 삼아 부분적으로 고전 어휘를 더하는 방향으로 전체 분위기를 잡은 점에서 고급예술과 하위예술 사이의 위계를 뒤집었다. 감독관 건물에서는 신전 파사드를 구성하는 오더 주신에 블록을 끼웠다. 바로크 때 도판으로 종종 등장했지만 실제 건물에는 많이 사용하지 않던 어휘인데 과감하게 건물 정면을 담당하는 여섯 개의 오더에 적용했다. 이는 돌을 통해 자연의 원시적 힘을 표현한 것이다. 부감독관 건물은 옆으로 넓적한 신전 파시드를 세 개의 아치로 나누었다. 비례와 구조 처리 모두에서 고전 규범을 벗어났다. 아치 홍예돌과 벽체를 쌓은 조적에서 줄눈을 두껍게 해서 이번에도 원시적 힘을 표현했다.
파리 성문 징수소
파리 성문 징수소(Paris Barriere, 1784~89)는 60여 개를 계획해서 르두가 40여 개를 설계했는데 프랑스 대혁명 때 대부분 파괴되었고 19세기 중반 오스망 재개발 때 다시 여러 개가 철거되어 현재는 트론, 몽소, 라빌레트, 앙페 네 곳의 징수소만 남아있다. 동일한 기능을 갖는 유사 건물을 40개나 설계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르두는 이 문제를 유형학으로 해결했다. 그리스 신전, 프로스틸(prostyle), 페리스틸 (peristyle), 개선 아치, 그릭 크로스, 로톤다 등은 양식 단위를 기준으로 한 유형이었다. 볼트, 기둥(column), 오더, 아치, 세를리안 모티프 등은 개별 어휘를 기준으로 한 유형의 주제였다. 정육면체, 직육면체, 원통형, 테트라퀸치, 사엽형 등은 기하 형태를 기준으로 한 유형이었다.
르두. 트론 징수소. 루이 15세는 부실한 왕실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파리 성문 징수소를 세웠는데 이는 프랑스 대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다.
농가는 고전주의 중심의 고급 건축에는 없는 원시성과 때 묻지 않은 순수함, 그리고 농촌의 자연 풍경과 어울리는 픽처레스크한 분위기 등에서 낭만주의의 좋은 소재였다. 이런 특징을 낭만주의 예술로 발전시키려는 농가 운동이 나타났다. 농촌과 농업문명의 산실이자 뿌리로서 농가가 갖는 심미성과 가치를 예술성으로 정의하는 운동이었다. 회화와 문학이 적극적이었다. 건축에서도 이를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큰 방향은 건물을 자연요소의 하나로 보고 인공적 가공을 최소화해서 손대지 않은 자연 속에 두는 것이었다. 고전주의와 아카데미 중심으로 진행되어 오던 유럽 건축에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번에도 영국이 중심지였다. 햄프셔의 웨스트 메온(West Meon, Hampshire)이나 워릭셔의 웰포드 온 에이번(Welford-on-Avon, Warwickshire) 등을 필두로 전역에 아름다운 농가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리샤 미크. 트리아농 시골마을. 베르사유 궁전. 1783-85. 낭만주의 건축이 핵심 경향인 농가운동을 실제 건물에 반영핸 예이다.
구체적 내용에서는 독립적 양식 사조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농가 운동의 본고장 영국에서는 회화, 문학, 여행 등과 관련된 문화현상에 머물렀다. 농가 운동을 실제 건축에 적극 적용한 것은 프랑스였다. 루소의 ‘고결한 원시인(noble savage)’ 개념이 대표하듯 프랑스는 낭만주의 사상과 이론에서 앞섰는데 그 영향이 건축에 미친 것이다. 혁명기 건축이 대표적인 예로 르두와 르퀴에의 새로운 실험에는 농가 모티브가 주요 항목으로 들어 있었다. 실제 지어진 건물이 등장한 것도 프랑스였는데, 리샤르 미크(Richard Mique, 1728~94) 트리아농 시골마을(Hameau du Trianon = 여왕의 농촌 시골마을, 베르사유 궁전(1783~85)이었다.
미크는 이 마을과 함께 벨베데레(The Belvedere, 1777)와 사랑의 신전(Temple de l'Amour, 1778) 등 정원 속 신전 작품도 함께 남겼다. 두 건물 모두 영국보다 더 자유로운 낭만성을 보였는데 벨베데레는 팔각형 파빌리온이었고 사랑의 신전은 코린트식 원형 신전이었다. 트리아농 시골마을은 모두 12채의 농가로 구성되었는데 현재는 10채가 남아있다. 여왕의 오두막, 방앗간, 출입 초소, 비둘기 집 등이 주요 건물들이었고 나머지는 농부들의 집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여왕의 농장을 지원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여왕은 “나무를 심고 밭을 일구고 가지를 다듬고 과일을 따며” 농장생활을 즐겼다. 건물들의 외관은 농가의 특징을 완벽하게 모방해서 지었지만 실내는 여왕 및 왕족의 생활을 위해 화려하게 꾸몄다. 낭만주의가 건축에 실제 적용되는 한계를 보여주는 현상이지만 왕실 건축을 농가 단지로 지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파격적인 의미를 갖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호러스 월폴. 스트로베리 힐. 튀크넘. 1747-63. 18세기 영국 고딕 리바이벌의 총본산으로 중세 성채를 이용한 건축양식뿐 아니라 사호적 의미도 큰 건물이다.
수플로와 파리 판테온
자크-제르멩 수플로. 파리 판테온. 로마의 성 베드로와 런던의 성 바오로에 이어 파리를 대표하는 성당으로 18세기 구조 합리주의에 따라 지어졌다.
로지에의 원시 오두막은 극단적인 이상주의이긴 했지만 그만큼 파급 효과가 커서 바로크를 대신할 구체적인 합리주의 교회 모델을 찾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것을 이끈 것은 자크-가브리엘 수플로(Jacques-Gabriel Soufflot, 1713~80)였다. 탄생 연도로 보았을 때 가브리엘과 페이르 & 드베일리 사이에 낀 세대였는데 이런 애매함을 구조 합리주의로 극복했다. 젊은 건축가, 엔지니어, 과학자 등과 교류하며 새로운 시대정신과 사조를 접했다. 개인적으로 기하학, 역학, 지리학, 물리학, 화학, 기술공학 등에서 일정한 수준에 오르면서 자신만의 특징을 구조 합리주의로 정의했다.
파리 판테온 실내. 두꺼운 벽과 화려한 장식의 바로크 양식을 거부하고 기둥만으로 돔을 받치려던 고민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를 바탕으로 그레코-고딕 아이디얼 논쟁에 뛰어들어 실제 건물로 지어 보이는 시도를 했는데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파리 판테온(=성 주느비에브, 1755~80/사후 완공)이었다. 이 건물은 수플로 개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18세기 구조 합리주의, 나아가 18세기 프랑스 건축 전체를 대표하는 주요 작품이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와 런던의 성 바오로에 견주어 파리를 대표하는 교회 건축이 된 것이다.
클라이맥스는 21미터 지름의 돔을 받치는 구조 방식이었다. 수플로는 세 개의 독립 원형기둥만으로 돔을 받칠 수 있다고 보고 그대로 설계와 시공을 감행했다. 그레코-고딕 아이디얼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었는데 당시 기술 수준에서는 파격적이다 못해 무모한 것이었다. 당장 엔지니어 그룹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면서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려 오랜 논쟁이 계속되었다. 보수적 엔지니어들은 수플로의 안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비판하며 건물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수플로 사후에 당시에 새롭게 발명된 미적분법을 동원해서 수플로의 안이 역학적으로 무리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시공 중에 발생한 균열은 여전히 문제가 되어서 세 개의 독립 원형기둥 사이를 막아서 삼각형 모양의 벽체로 만들고 기둥 구조에 철물 보강을 하는 선에서 논쟁은 마무리 되었다. 수플로의 부분 판정승이라 할 수 있었다.
벌링턴 경과 치스윅 하우스
벌링턴 경은 캠벨의 뒤를 이어 팔라디오 양식을 완성시켰다. 정식 건축가는 아니었고 귀족 정치가였는데 예술, 사상, 학문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건축에 관심이 많아 스스로 건축가를 겸직했다. 집안이 대대로 휘그당으로 자신의 정치 이상을 대외적으로 표현하는데 팔라디오 양식을 적극 활용했다. 2년 동안 머물면서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예술 이상주의의 위력을 경험한 뒤 런던으로 돌아와 건축을 통해 자신과 휘그당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기로 결심하여 건축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1720년경에는 영국에서 팔라디오 건축에 가장 정통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이상을 바탕으로 치즈윅 하우스(Chiswick House, 런던, 1730년경)와 어셈블리 룸스(Assembly Rooms, 요크, 1731년경~32)의 대표작을 남겼다.
벌링턴 경. 치스윅 하우스.. 런던. 1730년경. 캠벨에 이어 로톤다를 좀 더 완성도 높게 모방한 건물로 팔라디오 양식을 대표한다.
치즈윅 하우스는 팔라디오의 로톤다를 모방했다. 평면에서는 정사각형 전체 윤곽을 9등분한 점, 이 가운데 중심부를 다시 정사각형으로 처리한 점, 중심부의 속 공간을 정사각형보다 중심성이 더 강한 다각형으로 처리한 점, 기단 위에 몸통을 올리고 계단으로 접근한 점 등이 대표적인 모방 내용이었다. 차이도 있었다. 로톤다는 사면으로 동등하게 열리면서 십자 축 질서를 가졌다. 반면 치즈윅 하우스는 양 측면을 막고 정면만 강조하는 단일 축으로 이루어졌다. 로지아는 정면에만 두었으며 정면의 계단은 세 번 꺾이며 여러 방향으로 복잡한 구성을 갖는 반면 후면에서는 180도 꺾이는 한 종류만 사용했다.
로지아를 대폭 줄인 처리는 영국의 기후에 맞춘 것으로, 정면을 강조한 것은 정치적 집중을 표현한 것으로 각각 볼 수 있다. 이런 내용은 팔라디오의 건축을 영국 상황에 맞게 조절한 것으로 볼이다. 그러나 순수 건축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불일치를 유발했다. 몸통의 평면구성만 보면 로톤다보다 9등분의 분할 질서를 더 강조하며 강한 중심다움을 가졌지만 이런 특징은 계단과 로지아에 나타난 정면다움과 어긋났다. 이런 불일치는 외관 비례에도 나타났다. 로톤다의 외관이 정사각형에 근접했던 데 반해 이 건물은 1 : 2.5 정도의 옆으로 넓적한 직사각형 비례를 가졌는데 이것은 정사각형 평면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깁스와 18세기 영국 신고전주의의 탄생
1730년대에 팔라디오 양식에 변질과 쇠퇴가 나타나기 시작할 즈음 영국 건축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팔라디오 양식에 대한 비판이 먼저 시작되었다. 영국 사회에 맞지 않는 정치적 상황의 산물일 뿐이며 순수 예술적 차원에서도 가벼운 표피 양식이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비판은 자연스럽게 18세기에 맞는 영국의 새로운 양식을 찾는 시도로 이어졌다.
문을 연 것은 제임스 깁스(James Gibbs, 1682~1754)였다. 출생연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바로크, 팔라디오 양식, 신고전주의의 혼재를 보여주는 전환기적 건축가였다. 로마에 유학해서 폰타나에게 배우고 렌의 영향을 받는 등 초창기 경력은 바로크로 시작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1715년경부터는 팔라디오 양식으로 전환했지만 탐색기로 보내다 대륙에서 익힌 고전주의 원본을 바탕으로 신고전주의를 정착시켰다.
광야의 성 마르티노(St. Martin-in-the Fields, 런던, 1720~26)가 대표작이었다. 여섯 개의 오더를 사용한 유사 원형열주식 신전 파사드로 전면을 처리한 것으로 바로크와 팔라디오 양식 모두를 벗어난 것이며 열주 사용에서 생 쉴피스보다도 10여년 앞선 것이었다. 중요한 차이도 있었는데 생쉴피스에서는 박공 없는 열주만 사용해서 그리스 고전주의의 순도와 원형을 표현했다. 반면 이 건물에서는 박공을 둬서 열주효과 면에서는 생 쉴피스에 뒤졌다.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이런 특징 자체가 18세기 영국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제임스 깁스. 광야의 성 마르티노. 런던. 1720-26. 그리스 열주로 전면을 처리해서 18세기 영국 신고전주의의 시작을 알린 건물이다.
실내도 마찬가지였다. 실내의 기본 구성은 코린트식 독립 원형기둥 열주가 배럴 볼트 천장을 받치는 방식이었다. 벽체 구조에서 완전히 해방된 경쾌하고 합리적인 신고전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디테일을 보면 엔터블레처를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볼트 천장의 밑변을 반원 아치가 파고들어가 잘라내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그 결과 루넷 형의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는데 이것 역시 영국만의 신고전주의 특징이었다.
광야의 성 마르티노 실내 전경. 열주 구조에 바로크 잔재를 혼용한 점에서 프랑스 신고전주의와 다른 영국만의 특징을 보여준다.
애덤과 사이온 하우스
깁스 이후 영국 건축은 1760~70년까지 국제적 신고전주의가 주를 이루었는데 이것을 이끈 것은 로버트 애덤(Robert Adam, 1728~92)이었다. 대륙과 교류하며 국제적으로 통할 수 있는 신고전주의를 기본 경향으로 삼아 자신만의 다양한 장식주의를 첨가했다. 국제적 경향은 종합화의 전형적 산물이었다. 종합화를 추구한 건축가들은 많았지만 애덤은 종류와 폭이 다양하고 넓어서 단연 최고였다. 먼저 영국에서 유행하던 바로크, 로코코, 팔라디오 양식 등을 습득한 뒤 영국 여행을 통해 자연경치, 조경건축, 고딕건물 등의 낭만적 감성과 영국적 감성을 익혔다. 다시 대륙을 여행했는데 그 경로는 브뤼셀-파리-제노바-피렌체-로마로 이어지면서 다양했다. 피렌체에서 평생의 스승이 되는 클레리소를 만나 함께 로마로 가서 폐허 수채화운동과 신고전주의를 배웠다. 로마에서는 고전주의의 긴 역사를 직접 측량하고 그리는 훈련을 했으며 피라네시도 만나 고전주의에서 낭만적 가능성을 읽어내는 눈을 배웠다.
로버트 애덤. 사이온 하우스. 런던. 1760-69. 팔라디오의 로톤다를 기본 구성으로 삼아 다양하게 변형시킨 처리로 영국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건물이다.
로버트 애덤. 사이온 하우스. 런던. 1760-69. 팔라디오의 로톤다를 기본 구성으로 삼아 다양하게 변형시킨 처리로 영국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