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창경궁을 가 보면서 궁에 얽혀 있는 궁중사를 봤지요. 정조가 태어나고 숨을 거둔 곳
어린 단종이 여기서 강원도로 끌려 간곳이고 잘아시는 장희빈에 숙종이 약사발을
입에 퍼 넣은곳도 이곳이구요 더군다나 영조가 아들을 뒤주속에 넣고 죽게 만든 곳도 바로 이 곳입니다
창경궁이 지금은 과거에 전각들만 있지만 얼머나 많은 사연이 담겨 있겠어요 둘러
보면서 사도세자 죽음을 생각해 봤지요. 한중록. 사도세자의 처이며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여기에
당시에 사정이 담겨 있습니다 심심 풀이로 한가 하실 때 보시라고 올려 놓습니다
지금 창경궁을 가 보시면 정문에서 종로 쪽으로
약 70 여미터 지점에 선인문이란 문이 있습니다. 이 선인문 앞이 사도 세자가 죽을 당시 뒤주가
놓여 있던 자리인데 다들 아시겠지만 7일간이나 뒤주 속에 있었으나 숨이 끊어 지지 않자
영조는 잔디 뗏장을 뒤주위에 덮으라고 하고 당시 1762년 5월 13(음력)일이니 지금의 양력
6월말경쯤 됐을 테니 얼마나 더웠겠어요. 사도세자가 7일간이나 목슴을 이어 간것은 간간히 비가
내려서 뒤주속에서 빗물을 먹은게 아닌가 합니다. 뗏장을 덮은지 2일만인 5월 21일에 죽었는데
5월 20일 큰비가 내려서 그 비 때문에 죽은게 아닌가 헤경궁 홍씨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남편을 앞서 보내고 이 여인이 목숨을 버리지 못한 것은 당시 11세의 아들이(정조)
있었기 때문입니다. 1744년 9살의 나이로 간택되어 18세의 正祖를 낳았지요.
홍씨와 사도세자는 동갑이었습니다. 28세의 사도세자가 이렇게 죽은후 온갖 멸시와 괄세를
받고 살았지만 다행이 영조가 이 손자를 특히 귀여워 해서 영조의 비인 영빈의 구박도
이겨 낼 수있었고 아들이 이로부터 12년후에 왕위에 오르니 이번에는 당시 세도가
홍국영이 사도세자의 뒤주를 만들어 바쳤다 모함하여
친정이 멸문지 화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또 울고.
다 잊고 살만하다 했더니 1800년 6월 28일 48세의 정조가 급격히 죽으니 남편과 아들을 다함께 앞서
보내게 됐습니다. 그래서 또 가슴을 치고 울어 본들 운명이니 어째요. 두 사람의 명을 이어 받음인지
81세의 타계 하면서 남편의 참상을 기록한게 71세때의 나이입니다. 마음 속속
담아 두었던 한이 71세의 나이에 가서 이제 털어 놓고 가자 한 것인지.
밑에 한중록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세자의 참상을 어찌 잊고 살았겠어요.
사도세자가 죽고 40년이나 지난 기억. 한번 읽어 보시는 것도 의의가 있을 듯해서.
밑에 한중록의 지금의 한글 본으로 고쳐 쓴 것인데 검색란에서 찾어서 다소 편집한 것입니다.
그럼 일단 200여년 전에 여인의 한이지만 지금 어머니들과 다를게 없을테니 자세히 보시고
'한중록'은 모두 네 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혜경궁 홍씨의 어린 시절과 세자빈이 된 이후 50년 간 궁궐에서 지낸 이야기를 하는데, 사도 세자의 비극은 말하지 않고 넘어간다. 제2편과 제3편은 천정 쪽의 누명이 억울함을 말하는 내용이다. 제4편에서 비로소 사도 세자 참변의 진상이 기록되었다. 영조는 그가 사랑하던 화평 옹주의 죽음으로 세자에 무관심해지고, 그 사이 세자는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 놀이를 즐기는가 하면,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하였으나 성격 차이로 부자 사이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된다. 마침내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여기에 영조 38년(1762)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유폐시켜 9일 만에 절명하게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만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친정 아버지인 홍봉한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한다. 여기 실은 것은 사도 세자가 뒤주에 들어 절명하는 처분이 내리는 과정과, 그 이후 자신의 처지를 기록한 부분이다. 이 글을 쓴 혜경궁 홍씨의
당시 나이는 71세였다.
(전략)
그날 아침에 대조께서 무슨 전좌(殿坐) 나오려 하시고, 경현당(景賢堂) 관광청(觀光廳)에 계셨다. 선희궁께서 가서 울면서 아뢰되,
"큰 병이 점점 깊어서 바랄 것이 없사오니 소인이 차마 이 말씀을 자모지정에 아뢰올 말씀이 아니오나, 옥체를 보호하옵고 세손을 건져서 종사를 평안히 하옵는 일이 옳사오니 대처분을 하옵소서.
하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부자지정(父子之情)으로 이리하시나, 병으로 이리된 일, 병을 어찌 책망하오리까. 처분은 하오나 은혜는 끼치셔서 세손 모자(母子)를 평안케 하옵소서. "
하시니, 내 차마 아내 된 도리로 이것을 옳게 하신다고 못하나, 일인즉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내가 따라 죽어서 모르는 것이 옳되, 세손으로 차마 결단치 못하였다. 만난 바의 기궁(奇窮) 혹독함을 서러워할 뿐이었다.
대조께서 들으시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창덕궁으로 거둥령을 급히 내리셨다. 선희궁께서 사정(私情)을 끊고 대의로 말씀을 아뢰시고 가슴을 치고 기절할 듯이 당신 계신 양덕당(養德堂)으로 가서 음식을 끊고 누워 계시니 만고에 이런 정리가 어디 있으리요. 대조께서 선원전(璿源段)으로 거둥하시는 길이 두 길 있으니, 그 중 하나는 만안문(萬安門)으로 그 곳은 탈이 없으나, 경화문(景華門) 거둥은 탈이 났었다. 그 날 거둥령이 경화문으로 나오시니, 동궁께서 11일 밤은 수구(水구)로 다녀오셔서 몸이 물에 빠지시고, 12일은
통명전에 계셨는데, 그 날 들보에서 부러지는 듯이 굉장한 소리가 났다. 동궁께서 들으시고,
내가 죽으려나 보다, 이게 무슨 일인고.
하고 놀라셨다. 그 때 부친이 재상으로서 첫 5월(영조 38) 엄중한 교지(敎旨)를 받자와 파직되고 동교(東郊)에 달포 동안이나 나가 계셨다. 동궁께서 스스로 위기를 느끼셨는지 조재호(趙載浩)가 원임대신(原任大臣, 前任大臣)으로 춘천(春川)에 있었는데, 계방(桂房) 조유진(趙維進)으로 하여금 말을 전하여 상경하라고 하셨다. 이런 일을 보면 그 누가 당신보고 병이 계시다 하겠는가 참으로 이상한 하늘의 조화였다.
동궁은 부왕의 거둥령을 듣고 두려워서 아무 소리 없이 기계와 말을 다 감추어 두라 하시고, 교자를 타고 경춘전(景春殿) 뒤로 가시며 나를 오라 하셨다. 근래에 동궁의 눈에 사람이 보이면 곧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가마뚜껑을 하고 사면에 휘장을 치고 다니셨는데 그 날 나를 덕성합(德成闇)으로 오라 하셨다. 그때가 오정(午正)쯤 되었는데 갑자기 무수한 까치떼가 경춘전을 에워싸고 울었으니, 이 또한 무슨 징조인지 괴이하였다. 세손이 환경전(歡景驗) 에 계셨으므로 내 마음이 황망중 세손의 몸이 염려되어 환경전에 내려가서,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
하며, 천만당부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거둥이 무슨 일인지 늦으셔서 미시(未時) 후에나 휘녕전(徽寧殿)으로 오신다는 말이 있었다. 덕성합으로 오라시는 동궁의 말씀에 내가 가보니 그 장하신 기운과 언짢은 말씀도 안 하시고 고개를 숙여 깊이 생각하시는 양 벽에 기대어 앉으셨는데, 안색이 놀라서 핏기가 없이 나를 보셨다. 응당 화증을 내고 오죽하랴, 내 목숨이 그 날 마칠 것도 각오하여 세손에게 부탁 경계하였건만 말씀이 뜻밖에도,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들이 무서워.
하시기에 내가 눈물을 드리워 말없이 허황해서 손을 비비고 앉았다. 이 때, 대조께서 휘녕전으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하자'는 말도 '도망가자'는 말씀도 안 하시고 좌우를 치지도 않으시며 조금도 화증내신 기색 없이 용모를 달라 하셔서 썩 입으시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학질을 앓는다 하려 하니 세손의 휘항(揮項)을 가져오라.
하고 동궁이 말씀하시기에,
그 취항은 작으니 이 취항을 쓰소서.
하며 내가 당신 취항을 권했더니 뜻밖에 하시는 말씀이,
자네는 참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서 세손 휘항을 내게 안 씌우려 하니 내가 그 심술을 알겠네,
하시지 않는가, 내 마음은 당신이 그 날 그 지경에 이르실 줄은 모르고 이 일이 어찌 될까. 사람이 설마 죽을 일이요, 또 우리 모자가 어떠하랴 하였는데 천만 뜻밖의 말씀을 하시니 내가 더욱 서러워서 세자의 취항을 갖다 드리니, 그 말씀이 마음에 없는 말이시니 이 취항을 쓰소서.
싫다! 꺼려하는 것을 써 무엇할까.
하시니, 이런 말씀이 어찌 병드신 이 같으시며 어이 공순히 나가려 하시던가. 모두 하늘이 시키는 일이니 원통하고 원통하다. 그러할 제 날이 늦고 재촉이 심하여 나가시니, 대조께서 휘녕전에 앉으시고 칼을 안으시고 두드리시며, 그 처분을 하시게 되니, 차마 망극하여 이 경상을 내가 어찌 기록하리요. 슬프고 슬프도다. 동궁이 나가시며 대조께서 엄노하시는 음성이 들려왔다. 휘녕전과 덕성합 사이가 멀지않아 담 밑으로 사람을 보내서 보니 벌써 용포를 덮고 엎드려 계시더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대처분인 줄 알아 천지가 망극하여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였다. 거기 있는 것이 부질없게 생각되어 세손계신 데로 와서 서로 붙잡고 어찌할 줄 몰랐더니 신시(申時, 4시 전후)쯤 내관이 들어와서 밖 소주방(燒廚房: 대궐 안의 음식 만드는 곳) 에 있는 쌀 담는 궤를 내라 한다. 이것이 어찌된 말인지 황황하여 내지 못하고 세손궁이 망극한 일이 있는 줄 알고 문정(門庭) 앞에 들어가서,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하니 대조께서,
나가라!
하고 엄하게 호령하셨다.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온 세손이 왕자재실(王子齋室)에 앉아 있었는데, 그 때 정경이야 고금 천지간에 없으니 세손을 내어 보내고 천지가 개벽하고 일원이 어두웠으니 내 어찌 일시나 세상에 머무를 마음이 있으리요. 칼을 들어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옆의 사람이 빼앗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죽으려 하되 촌철(寸鐵)이 없어서 못하였다.
숭문당(崇文堂)에서 휘녕전 나가는 건복문 밑으로 가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다만 대조께서 칼 두드리는 소리와 공궁께서,
아버님, 아버님 잘못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라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마소서.
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들으니 내 간장이 마디마디 끊어지고 앞이 안 보이니 가슴을 아무리 두드린들 어찌 하리요. 당신의 용력(勇力)과 장기(壯氣)로 궤에 들어가라 하신들 아무쪼록 들어가지 마실 일이지, 어찌하여 들어 가셨는가, 처음엔 뛰어나오려 하시다가 이기지 못하여 그 지경에 이르시니 하늘이 어찌 이토록 하였는가. 만고에 없는 설움이며 내가 문 밑에서 통곡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동궁이 이미 폐위(廢位)되어 계시니 그 처자 그냥 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니 세손을 밖에 그저 두어서는 어떠할까 차마 두렵고
조심스러워서, 그 문에 앉아서 대조께 상서(上書)하여,
처분이 이러하오니 죄인의 처자가 그대로 대귈에 있기 황송하옵고 세손을 오래 밖에 두옵기 죄가 더한 몸이 되어 두렵사오니 이제 친정으로 나가겠나이다. 천은으로 세손을 보존하여 주옵소서.
가까스로 내관을 찾아 들이라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오라버니[洪樂仁]가 들어오셔서,
"인제 서인이 되어 대절에 있지 못할 것이므로 본집으로 돌아가라 하시니 나가시오이다. 가마를 들여놓았고 세손이 타실 남여도 준비했나이다.
하고 남매가 붙들고 망극 통곡하고, 업혀서 청휘문(淸琿門)에서 저승전 차비문(差備門)에 가마를 놓고 윤 상궁이란 나인이 함께 타고, 별감이 가마를 메고 허다한 상하 나인이 모두 뒤를 따라 쫓으며 통곡하니, 천지간에 이런 정상이 어디 있으리요. 나는 가마에 들어갈 때 기절하여 인사를 모르니 윤 상궁이 주물러서 겨우 명이 붙었으니 오죽하리요. 친정에 도착한 나는 건넌방에 눕고, 세손은 내 중부(仲父)와 오라버니가 모셔 나오고, 세손 빈궁은 그 집에서 가마를 가져다가 청연(淸衍)과 함께 들려 나오니 그 정상이 어떠하리요.
나는 자결하려다가 못하고 돌이켜 생각하니 11세 세손에게 첩첩한 고통을 남긴 채 내가 없으면 세손이 어찌 성취하시리요. 할 수 없이 참아서 모진 목숨을 보전하고 하늘만 부르짖으니 만고에 나 같은 모진 목숨이 어디 있으리요. 집에 와서 세손을 만나니 내 망극함을 더욱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이토록 대변(大變)을 당하시니 놀라서 병이라도 날까 염려되어,
망극 망극하나 다 하늘이 하시는 노릇이니 네가 몸을 평안히 하고 착하여야 나라가 태평하고 성은을 갚사올 것이니 설움이 크겠지만 네 마음을 상하지 마라.
하고 위로하였다. 부친께서는 궐내를 떠나지 못하시고 오라버니도 벼슬에 매어 왕래하시니, 세손 모시고 있을 이가 중부와 두 외삼촌이니, 주야로 모셔 보호하고 내 끝 아우는 아이 때부터 들어와서 세손을 모시고 놀던지라, 그 아이가 작은 사랑에 모시고 있어 8, 9 일을 지내니 김 판서 시묵과 그 자제 김기대(金基大)도 와서 뵈옵는다 하며, 내 집이 좁은데 세손궁 상하 나인이 전부 나와 있기 때문에 남쪽 담 밖의 교리(校理) 이경옥(李敬玉)의 집을 빌어서 김 판서 댁이 그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빈궁을 모시고 있게 하니 담을
트고 왕래하였다.
그 때 부친이 파직되어서 등교에 계시다가 대조께서 대처분하셔서 아주 할 수 없게 된 후, 대조께서 다시 부친을 등용하셔서 영의정이 되셨다. 부친이 천만 뜻밖에 그 처분 소식을 들으시고 망극 경통(驚痛)중 달려들어가서 절하에 이르러 기절하셨다.
그 때, 왕자재실에 계시던 세손이 이 일을 들으시고 당신이 자시던 청심환을 내어 주셨다. 부친 또한 세상에 무슨 뜻으로 살리요마는 망극중 극진히 세손을 보호하려는 정성 때문에 죽지 못하시니 세손을 보호하여 종사를 보전하실 혈심단충(血心丹忠)만은 천지신명이 잘 아실 것이다. 모질고 흉악하여 목숨이 붙었으나 당하신 일을 어찌 견디시는고. 마음이 타는 듯하니 차마 어찌 견딜 정경이리요. 오유선, 박성원(朴性源)이 집 대문 밖에 와서 세손이 근신하라 하니 근신함이 당연하나 차마 어린아이를 어찌 하리요. 낮에는 집에
계셔 지냈었다.
대궐을 나온 후 부친께도 못 뵈옵고 망극하더니 그 이튿날 선친이 상교를 받자와 나오셨다. 모자가 부친을 붙잡고 일장 통곡하였다. 부친께서 대조의 뜻을 전하시니 내가 보전하여 세손을 구호하라 하셨다. 이 때, 성교는 망극중이나 세손을 위하여 감읍함이 측량없었다. 세손을 어루만져 축수하고,
"나는 네 아버님 아내로 이 지경이 되고 너는 아들로 이 지경을 만났으니 다만 명을 서러워할 뿐이지 누구를 원망하며 탓하리요. 우리 모자가 이때에 보전함도 성은이요, 우러러 의지하여 명을 삶도 또한 성상이시니 너에게 바라는 것은 성의를 받자와 힘쓰고 가다듬어 착한 사람이 되면, 그것으로 성은을 갚고 네 아버님께 효자가 되니 이밖에 더 큰 일이 없다.
하고 타일렀다. 그리고 부친께 천은을 감축하여,
남은 날은 주시는 날이니, 하교대로 받자오려 하는 연을 위에 아뢰소서.
하고 통읍(痛泣)하였는데, 내 이 말에 일호도 틀림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리 되신 것이 서러웠지, 점점 그 지경에 이르신 바를 어찌 하리요. 조금도 마음에 먹사온 바 없이 감히 이렇다 원하옵지 못한다. 부친이 나와서 세손을 붙잡고 통곡하고 위로하시되,
이 뜻이 옳으시니 세손이 현(賢)하게 되시고, 성(聖)하게 되시면 성은을 갚으시고, 낳으신 아버님께 효자 되신 것입니다.
하고 들어가셨다. 시간이 흐를수록 차마 망극한 경지를 생각하되 어찌할 바를 몰라서, 마음이 혼동하여 누웠더니, 15일은 굳게 굳게 하고 깊이 깊이 하여 놓으시고, 윗대궐 오르신 다 하니 알수 없었다. 대궐 안의 비단필도 내어 올 길이 없으니 염습 제구를 다 부친이 차비하여 유감없이 하여 주셨다. 그전 여러 해 동안 큰 병환에 의복을 무수히 대어 주시고 이 수의를 다 차비하여 동궁 위한 마지막 정성으로 힘을 다하셨다.
20일 신시(申時)쯤 폭우가 내리고 뇌성도 하니 뇌성을 두려워하시던 일이나 어찌 되신고 하는 생각 차마 형용할 수 없었다. 음식을 끊고 굶어죽고 싶고, 깊은 물에라도 빠지고 싶고, 수건을 어루만지며 칼도 자주 들었으나 마음이 약하여 강한 결단을 못하였다. 그러나 먹을 수 없어서 냉수도, 미음도 먹은 일이 없으나 목숨 지탱한 것이 괴이하였다. 그 20일 밤에 비오던 때가 동궁께서 숨지신 때던가 싶으니 차마 어찌 견디어 이 지경이 되셨던가. 그저 온몸이 원통하니 내 몸 살아난 것이 모질고 흉악하다. 선희궁이 마지못하여
그렇게 아뢰어서 대처분은 하시려니와 대 환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신 일이라 애통하여 은혜를 더하시고 복제(服制)나 행하실까 바라 왔더니 성심(聖心)이 그 처분이오시되 성노(聖怒)는 내리지 아니하시고, 동궁께서 가깝게 하시던 기생과 내관 박필수(朴必壽) 등과 별감이며 장인이며 무녀들까지 모두 사형에 처하시니 이는 당연한 일이시오며 감히 무슨 말을 하리요 지극히 원통한 바는 오직 이것뿐이니, 동궁께서 의대병환(衣帶病患)으로 무수히 여러 가지를 갈아입으시다가, 어찌하여 생무명 한 벌이나 입으셨는데 그 날도 생무명
옷을 입고 계시었다.
대조께서 항상 뵈와도 도포나 용포를 입고 계시다가 그날 처음으로 무명옷을 입은 것을 보시고, 그 병환은 모르시고,
네가 나를 없이 하고자 한들 어찌 생무명 거상옷을 입었느냐.
하시며 남은 것이 전부 없어진 것으로 아시고,
지금까지 쓰던 세간을 모두 가져오라.
하고 명하셨다. 그 중에는 군기(軍旗)인들, 무엇인들 없으리요, 아무리 국장(國葬)인들 상장(喪杖)이 하나밖에 없으리요마는, 의대 병환으로 상장을 여러 개 만드시되, 일생 사랑하여 좌우에서 떠나지 않은 것이 환도(環刀)와 보검(寶劍)들인데, 뜻밖에도 그것을 상장같이 만들고 그 속에 칼을 넣어서 뚜껑을 맞추어 상장같이 하여 가지고 다니셨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도 끔직해서 놀랐었는데, 그것을 없애지 않았다가 노하신 상감 앞에 그것이 있으므로 더욱 놀라고 분하셔서 복제(服制)를 어찌 거론하시리요. 동궁의 병환은 모르시고
모두 불효한 데로만 돌리시니 원통할 뿐이다. 처음에는 조신의 복제는 규칙대로 할 양으로 하더니 그것을 다 못하매, 이 지경을 당하여 세손이나 건지는 것이 천은이려니와 병환으로 처분하신 이상 14년 대리저군(代理儲君:섭정의 왕세자)이오시니, 복제나 상하에서 행하였더면 상덕(上德)이오신데 그것을 못 차렸으니 그저 서러우며 20일은 할 수 없는 지경이니, 복위하셔야 초종제구(初終諸具: 초상 치르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를 장만하리오되, 성의가 아니하려 하신 것이 아니지만 복위를 아끼시고, 범절을 예(例)대로 하시기를
주저하시다가 부득이 21일 밤이 복위하시고 대신들이 입시하여 초종절차(初終節次)를 정하고 처음은 빈소(殯所)를 용동궁(龍洞宮)에 하자 했다.
이 지경을 당하여 부친은, 추호라도 성심(聖心)에 어기면 성노를 불 같으실 테니 내 집의 멸망보다도 세손의 보전 못하실 것이 두려워 아무쪼록 성심을 잃지 않으려 하시던 중 돌아가신 이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세손에게 유한을 끼치지 않으시려고 갈충진성(竭忠盡誠:충성을 다하다)하셨다.
좌우로 주선하여 복위 후 시호(諡號)를 내리시고 빈궁(驚宮)은 시강원(侍講院)으로 하고, 삼도감(三都監)은 법대로 하시게 정하고 부친 스스로 도제조(都堤調, 都相)가 되어 몸소 보살펴서 묘소 범절까지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 이처럼 부친이 돕지 않으시면 어느 신하가 감히 말을 하며 성심이 어찌 돌아서리요. 그날 시강원으로 모시게 하고 새벽에 집으로 나오셔서 우리 모자를 들여 보내실 제, 부친이 내 손을 잡으시고 뜰에서 실성 통곡하시며,
세손 모시고 만년을 누려 노경(老境)에 복록(福祿)을 크게 누리소서,
하고 우셨다. 그 때 나의 슬픔이야 만고에 또 어디 있으리요.
시민당(時敏堂)에서 발상(發喪)하고 세손은 건복합에서 발상하며, 빈궁은 내 옆에서 청연(淸衍)과 함께 하니 천지간에 이런 정경이 어디 있으리요. 초종의대(初終衣帶)를 차려서 즉시 습(襲)을 하니, 그 극열(極熱)이로되 조금도 어떻지 아니하시더라 하니, 그 설움은 차마 생각지 못할 일이며, 습한 후에 염하옵기 전에 나가기 내 정경이 천고에 드물고 남에 없는 일이었다. 슬픔 가운데 하시던 말씀을 생각하니 호천극지(呼天極地)하여 목숨 산 것이 부끄럽고 유명을 달리하니 그 충천하신 장기(壯氣)를 뵈을 길이 없으니 산 사람이
죽지 못한 유한이 어떠하리요. 초종범사에 슬프기 이를 데 없고, 신하가 복제를 못하니, 대전관(大殿官)과 내관류(內官類)가 모두 천담복(淺淡服: 엷은 옥색의 제복)이요, 밖에는 재궁(梓宮:임금의 관) 제전이 있고, 안에서 조비(造備)함이 두려워서 기회를 보다가 다시 제를 감(鑑)하라 하시는 영이 안 계셨으므로 조석상식(朝夕上食:상가에서
아침저녁으로 영좌에 드리는 음식)과 삭망전(朔望奠:상중에 있는 집에서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지내던 제사)을 모두 예사로 지냈었다.
세손 양궁과 군주(郡主)를 입재실(入梓臺) 절에는 차마 뵈지 못하여 성복(成服)날 나와서 곡하게 하였다. 세손 애통하시는 곡성은 차마 듣지 못하니 뉘 아니 감동하리요. 7월이 인산(因山)이니, 선희궁이 나를 보시고, 재실(梓室)을 대하여 머리를 두드리시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시니, 그 정의에 다름없음이 또 어떠하리요. 인산에 대조께서 묘소에 친히 나오셔서 제자(題字)까지 친히 써 주시니 부자분이 유명지간(幽明之間:저승과 이승 사이) 사이에 서로 어떠하실지 차마 생각할 수 없었다. 7월에 춘방(春坊)을 부설(敷設)하시고
세손이 완전히 국본이 되셨다. 이는 비록 성은이시나 부친의 갈충(竭忠) 보호하신 공이 어찌 더욱 나타나지 않으리요.
8월(영조 38)에 대조께서 선원전다례(璿源殿茶禮)가 되매, 황송하나 가 뵙지 않을 수가 없어서, 진전(眞殿) 가까운 습취헌(拾翠軒)이라는 집으로 가 뵈오니, 나의 천만 슬픈 회포가 어떠하리요마는 만 분의 일도 감히 베풀지 못하고,
모자 보전하옴이 다 성은이로소이다.
하고 아뢰었다. 영조께서 내 손을 잡으시고,
네가 이럴 줄을 생각지 못하고, 내가 너 보기가 어렵더니, 내 마음을 펴게 하니 아름답다.
하시니, 이 말씀을 듣고 내 심정이 더욱 막혔다.
세손을 경희궁으로 데려가셔서 가르치면 하고 바라옵니다.
"세손을 떠나보내고 네가 견딜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눈물이 드리워 아뢰되,
떠나서 섭섭하기는 작은 일이요, 위로 모셔서 뵈옵기는 큰 일 이로소이다.
하고, 세손을 올려 보내기로 정하니 모자의 정리상 서로 떠나는 정상이 어찌 견딜 바 있으리요. 세손이 나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울고 가니, 내 마음은 칼로 에는 듯 아팠다. 그러나 성은이 지중하셔서 세손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선희궁께서도 아드님께 대한 정을 모두 세손께 옮기시니 좌와기거(坐臥超居)와 음식 범백에 마음을 다하여 지성으로 보호하셨다.
4, 5세부터 글을 좋아하시던 세손이신지라, 각각 다른 대절로 옮겨가시더라도 학문에 전념하지 않으실까 하는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못 잊어하는 정은 날로 심하고 세손이 자모(慈母) 그리시는 정이 간절하여 새벽에 깨어 나에게 편지하고 공부하기 전 내 회답을 보고야 안심하시니 3년을 한결같이 그러셨다. 내가 경력한 병이 자주 일어나 3년 동안 내 몸에서 병이 떠나지 않으니 멀리서 의관(醫官)과 상의하여 약을 지어 보내시기를 어른과 같이 하시니, 이것이 모두 천성지효(天性至孝)이시겠지만 10여 세의 나이로 어찌 그리
하시는가 싶었다.
그 해(영조 38) 천추절(千秋節)을 맞으니, 내 자취 움직이고 싶지 않으나 분부로 말미암아 부득이 올라가니, 대조께서 나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심이 전보다 더하셔서, 내가 있던 집이 경춘전(景春殷) 남쪽의 낮은 집이었는데 그 집 이름을 가효당(壽孝堂)이라 하시고 친히 쓰신 현판을 달게 하셨다.
네 효심을 오늘 갚아서 이것을 써 준다.
내가 눈물을 드리워 받잡고 감히 당치 못하여 불안해 하였다. 부친을 들으시고, 감축하여 하시는 말씀이,
오늘날 이 가효(燾孝) 두 자를 현판으로 달게 하시니 자손의 보배가 될 것이매 효성을 흠탄(欽嘆)한다. 하시고 성은을 받잡는 도리로 집안 편지에 그 당호(堂號)를 써 달게 하시니 감격이 뼈에 사무쳤다. 선왕(先王)이 자경전(慈慶殿)을 지어서 나를 있게 하시니 그때 처지가 높고 빛나는 집에 있을 내가 아니건만 성효(聖孝)에 감동하여 그 집에 여년을 마치려고, 가효당 현판을 자경전 상방(上房) 남쪽 문 위에 걸어서 대조의 자은(慈恩)을 잊잡지 말고자 하였다.
그 해 섣달에 소칙(詔勅)이 나오니 자상(自上)께서 세손을 데리고 혼궁(魂官)에 오셔서 칙소(勅詔)를 받자오시고, 환궁할 때 세 손을 도로 데리고 가시려다가 세손이 어미 떠나기가 슬퍼서 우는 모양을 보시고,
세손이 너를 차마 떠나지 못하여 저리 슬퍼하니 두고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혹 당신은 사랑하시는데, 세손이 그 사랑은 생각지 않고 어미만 못 잊어하는가 서운히 여기실 듯하여,
내려오면 위가 그립삽고, 올라가면 어미가 그립다 하오니, 환궁 후에는 위가 그리워서 또 슬퍼할 것이오니 데려가옵소서.
하고 아뢰었더니 즉시 안색이 변하여 기뻐하시면서,
그리하랴
하고 데리고 환궁하셨다. 세손이 대조를 모시고 가면서 어미가 인정 없이 떼어 보내는 것이 섭섭하여 무수히 울고 가시니, 내 마음이 어떠하리요마는 내리는 것은 사정(私情)이요, 모시고 가서 아버님 못다하신 자도(子道)를 이으며 시봉(侍奉)하는 것이 옳기에 떠날 제 못 잊는 정을 베어 보냈다.
이것이 모두 이전 일을 경계하고 세손으로 하여금 일심으로 위에 효성을 다하여 자애하시는 성의를 조금도 어김이 없을까 하고 염려함이니, 이 어찌 세손을 위한 시층뿐이리요.
종국(宗國) 안위가 세손 한 몸에 있으니 나의 안타까운 마음은 하늘이 알 것이요, 이것은 홀로 내 마음뿐 아니라 모두 부친이 나를 인도하여 부녀의 사소한 사정을 돌아보지 않고 대의로 훈계하신 힘이었다. 우리 부친의 고심혈충(苦心血忠)이 모두 세손을 위하고 종국을 위하시던 일을 누가 다 자세히 알리요.
세손이 혼궁을 떠났다가 내려오시면 애통하던 울음소리야 누가 감동하지 않으리요. 혼궁의 목주(木主) 의지 없으신 듯이 계시다가, 그 아들이 와서 애통하면 신위(神位)가 반기시는 듯 외로운 혼궁에 빛이 있는 듯, 슬프게 울던 중 도리어 위로하니, 내가 세손을 낳지 않았다면 이 종국(宗國)을 어찌할 뻔하였는고. 엎드러진 나라가 보전하려고 경오생(庚午生) 산후에 임신(壬申,영조28)년 경사가 있었던가 보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만고(萬古)에 없는 일이니 당신께서는 천만 불행하여 이 지경이 되셨으나, 아들을 두셔서 당신
뒤를 잇고 상하 자효(慈孝)가 무간(無間)하니 다시야 무슨 일이 있으라고 꿈에나 생각하고 있으리요.
갑신(甲申, 영조 40)년 2월, 처분은 너무도 천만 뜻밖이니 위에서 하신 일을 감히 아랫사람이 이렇다 하리요마는, 그 때 내 심경(心境) 망극하기는 견주어 비할 곳이 없으니, 내가 화변(禍變) 때 모진 목숨을 끊지 못하고 살았다가 이 일을 당할 줄은 천만 죄한(罪恨)이다. 곧 죽고 싶되 목숨을 뜻대로 못하고 그 처분을 원하는 듯하여 스스로 굳이 참으나 그 망극비원하기 모년(某年, 영조 38) 에 내리지 않고, 선희궁께서 음식을 끊고 경통하시던 일이야 어찌 다 기록하리요.
세손이 어린 나이에 고금에 없는 지통을 품고 또 제왕가(帝王家)의 당치 못할 변례(變例)를 당하셔서 과하게 애통하시고 상복을 벗을 제 우는 소리가 철천극지(徹天極地)하여 초상이 천지 어둡게 막히던 때 설움에서 더하시니, 연세도 두 해가 더하시고 (13세로) 당신 만나신 반 갈수록 지원하니, 이를 대하여 내 간장 쇠가 녹듯이 터질 듯 곧 목숨을 끊고자 하되, 세손의 서러워하심은 차마 못 견딜 것이다. 내가 없으면 세손의 몸이 더욱 외롭고 위태로우니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갈수록 세손을 보호하는 것이 으뜸인 것이다.
애통하던 마음을 새롭게 하여 굳게 잡아서 세손을 위로하되 서러울수록 천금의 몸을 보호하여 비록 유한이 많으나 스스로 착하여 아버님께 보답하라고 여러 가지로 타일러서 진정하시게 하였다.
세손이 종일 음식을 끊고 울면서 과상(過傷)하시는지라, 위로하며 옆에 품고 누워 달래서 잠을 들게 하려 했지만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니 그 정경이 고금에 어찌 있으리요.
그 날이 바로 2월 20일이니 어찌하여 그 처분이 되신지 이상하며, 불의에 거둥 오셔서 선원전(璿源殿)에 오래 머무르시고 나를 와 보시니, 내 무엇이라 감히 아뢰리요.
모자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성은이오니, 처분이 이러하온들 무슨 말씀 아뢰리요
네 그리 하는 것이 옳다.
하시니, 가뜩한 정리에 이 서러운 말이나 없으면 아니하랴. 갈수록 내 명도(命途)에 기막히게 죄스러운 일이니 스스로 몸을 치고 싶은들 어찌하랴. 만고에 없는 일이다.
7월(영조, 40) 담사(禮祀:대상을 지낸 다음해에 지내는 제사)에 선희궁께서 내려오셔서 지내시고, 가을 후는 모이어 고식(시어머니와 며느리)이 상의하시고 정녕히 약속하시더니, 홀연히 등창이 나서 7월 26일 하세(下世)하시니 망극하기가 어찌 예사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리요. 당신이 나라를 위하여 자모로서 하지 못할 일을 하시고, 비록 선군(先君, 영조대왕)을 위하신 일이나 그 지통이야 오죽하시리요. 상시의 말씀이,
내가 못할 일을 차마 하였으니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으리라. 내 본심인즉 나라를 위하고, 임금의 몸을 위한 일이나, 생각하면 모질고 흉하니 빈궁은 내 마음을 알 것이어니와 세손 남매는 나를 알겠느냐.
하시고 밤에는 늘 잠을 못 이루시고 동편 툇마루에 나와 앉으셔서 동녘을 바라보며 상심하시고, 혹 그런 처분을 하지 않았어도 나라가 보전되지 않았을까, 내가 잘못하였는가 하시다가도 또 그렇지 않다. 여편네의 약한 소견이지 내 어찌 잘못하였으리요 생각하시곤 했다. 혼궁(魂宮)에 오시면 부르짖어 울고 서러워하셔서 심중에 병이 되어 몸을 마치시니 더욱 슬프다.
대저 모년(茶年) 일을 지금 사람이 누가 나같이 알며 설움이 나와 부왕 같은 이 있으며 경모궁[사도세자]께 사이 없는 정성이 나 같으리요. 그러기에 내가 매양 부왕께 아뢰었다.
동궁이 비록 아드님이시나 그 때는 젊은 나이셔서 저만큼 자세히 모르실 것이니, 모년에 속한 일은 저에게 물으시지, 외인의 시끄러운 말은 곧이듣지 마소서. 그것들이 일시 총애를 얻으려고 상감께 별 소문을 들어다가 드려도 모두 괴이한 말입니다.
"누가 모르겠느냐. 그놈들이 부모 위한 정성이 없다고 무한히 욕을 하니, 욕도 피하고, 경모궁을 위하였다면 인자도리(人子道理)에 그렇지 않다. 말을 차마 못하여 누가 추증(追贈)하며 누구 시호하면 저희 하자는 대로 하여가니 그런 일에는 분명히 알며 끌리어 흐린 사람이 되기를 면치 못한다.
하시니, 내 부왕(父王)의 지통을 차마 생각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대저 그 대처분으로 세상에 두 가지 의논이 있어서, 옳고 그른 것을 알 수 있다.
한 의논은 대처분이 광명정대하여 천지간에 떳떳하니 영묘(英廟)의 성덕대공(盛德大功)을 칭송하여 조금도 애통망극해 하는 의사가 없으니, 이것은 경모궁을 불효한 죄로 돌리고, 영묘의 처분이 무슨 적국을 소탕하거나 역변(逆變)을 평정한 모양이 되니, 이렇게 말하면 경모궁께서 또 어떠한 처지가 되시리요. 이는 경모궁과 부왕께 망극한 일이로다. 또 한 가지 의논은 경모궁께서 본디 병환이 아니신데 영묘께서 참언을 들으시고 그런 지나친 처분을 하시니 복수 설치(雪恥 : 욕됨을 씻음) 하자는 것이므로 경모궁을 위하여 원통한
치욕을 씻자는 말인 듯하나 그것은 영묘께서 무죄한 동궁을 누구의 감언을 듣고 처분하신 허물로 돌리게 함이니, 이렇다면 영묘께서 또 어떠한 실덕(失德)이 되리요. 두 가지 말이 모두 삼조(三朝)에 망극하고 실상에 어긋나는 소론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부친은 수차 말씀하신 듯이, 병환이 망극하여 옥체가 위태하심과 종사가 매우 위태로웠으므로 상감[英祖]께서 애통망극하시나, 만만 부득이 하여 그 처분을 하시고, 경모궁께서도 본심이 도실 때는 짐짓 누덕(累德)이 되실까 근심 걱정하셨으나, 병환으로 천성을 잃어서 당신도
하시는 일을 모두 모르셨던 것이다.
병환이 드신 것도 망극한데, 병환은 성인(聖人)도 면치 못한다 하니, 경모궁의 일호의 누덕이 어찌 되리요. 실상이 이러하고 그 때 사정이 이러하니, 바른대로 말하여서 영묘의 처분도 만부득이 하신 일이요, 경모궁에서도 불행히 망극한 병환으로 만만 부득이한 터를 당하셨던 것이다.
부왕도 또한 애통하여 각각 의리로 말을 하여야 실상도 어기지 않고, 의리에도 합당하거늘, 위의 두 가지 논의 같으면 하나는 영묘께 실덕이 되고, 하나는 경모궁께 누덕이 된다. 부왕께는 망극하니, 이 두 의논이 모두 삼조에 대한 죄된 말이다. 한번 그 처분이 거룩하시다 하여, 우리 부친만 죄를 삼으려 하여 뒤주를 들었다 하니 뒤주 아니신들 곡절은 다른 기록에 올렸으니 여기는 또 쓰지 않겠다. 이런 말하는 놈이 영묘께 충성인가, 경모궁께 충절인가. 부왕이 대처분을 위하노라 하면 물론 동서남북지언(東西南北之言)하고
용서하시고, 모년 모일에 시비였다 하면 유죄무죄(有罪無罪)간, 부왕 입으로 그렇지 않다 못하실 줄 알고 그 일을 가지고 그 화를 삼아 저희 뜻대로 농간질을 하여 사람을 해치고, 저리하여 충신을 자처 하니, 만고에 이런 일이 어디 있으리요. 40년 이래 그 일로 충역(忠逆)에 혼잡되고, 시비가 뒤바뀌어 지금까지 정치 못하니, 경모궁 병환이 만부득이 하셨고, 영묘 처분이 또한 부득이 하셨던 것이다. 뒤주는 영묘께서 스스로 생각하신 것이다. 내든지 부왕이든지 지통은 스스로 지통이요, 의리는 스스로 알고, 망극 중에 보전하여
종사(宗社)를 길게 지탱한 성은(聖恩)을 감축하고, 그 때 여러 신하들이 할 수 없어서 말한 것을 후인(後人)이 상상하여 때 만남을 불행히 여길 뿐이지, 그 처분에야 군신(君臣) 상하에 이렇다 말을 어찌 용납할 수 있으리요. 그 당시에 되어가던 일을 내 차마 기록할 마음이 없으나, 다시 생각하니 주상(主上, 순조)
이 자손으로 그 때 일을 망연히 모르는 것이 망극하고 또한 시비를 분별치 못하실까 민망하여 마지못해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나 그중 차마 일컫지 못할 일 가운데 더욱 일컫지 못할 일은 빠진 조건이 많으며
내 머리가 다신 만년(晩年)에 이것을 능히 써 내니, 사람의 모질고 독함이 어찌 이에 이르는고. 하늘을 부르고 통곡하매 나의 팔자를 한탄할 뿐이다.
* 연대: 정조 19(1795) 작자의 회갑 때 친정 조카의 요청으로 처음 쓴 후 순조 원년(1801, 67세), 68세, 71세 때 쓴 이본(異本)이 있음.
혜경궁 흥씨(惠慶富 洪氏, 1735∼1815) : 조선시대 영조의 아들 장조(莊 祖,思悼世子)의 비(妃). 본관은 풍산. 영풍부원군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임. 9세 때인 1744년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1762년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자 혜빈(惠嬪)에 추서됨. 후에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99년, 남편이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 (敬聽王后)로 추존. 1795년, 사도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많은 일생을 (한중록)이라는 자서전적인 수필로 남겼음.
해설 1
이 글은 1795년, 정조의 어머니이며 사도세자빈인 혜경궁 홍씨가 남편의 참변과 자신의 기박한 운명을 회상하여 자서전적으로 기록한 수상이다. 총 4편인데, 제 1편은 정조 19년 작자의 회갑 때 쓰여졌고, 나머지 3편은 순조1년∼5년 사이에 쓰여졌다. 사본에 따라 한등록한등만록 등의 이칭이 있다.
제1편은 조카에게 주기 위한 순수한 회고록으로 친정중심으로 기록하였는데,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와 입궁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나머지 3편은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순조 1년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로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에 대한 일종의 해명서이다. 제2편에서는 친정의 몰락에 대한 자탄을 주로 서술했는데, 정조가 초년에 외가를 멀리 한 이유나 아버지 홍인한을 멸망시킨 홍국영(洪國榮)의 전횡을 폭로하고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며 누명이 벗겨지는 날이 오기를 염원한다.
이듬해에 쓰여진 제 3편은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2편에 이어 정조가 말년에 외가에 대해 뉘우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는 사실을 기술했다.
제4편은 며느리 가순궁(嘉順宮)의 요청으로 썼는데, 사도세자 참변의 진상을 폭로하고 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일어나게 된 경위와 궁중 내의 갖은 음모에 의해 일어난 임오화변의 참상을 자세히 서술하고 친정의 연루 혐의를 해명하였다. 홍씨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 비사의 내막을 폭로한 것도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
너무 길어요 끝까지 읽을려면 며칠 걸릴것 같네요
천처히 보세요 40년 된한인데그리 짧을수가 없지요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