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우키요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쓴글입니다.
참고해주시길.
에도(江戶)시대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의 이해와 고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
A445003 김 지 수
I. 들어가는 말
우리가 일본미술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들인 만화적인 선의 판화와 화려한 채색, 벚꽃이 수놓아진 기모노를 입은 여인 그림에서 생각나는 유려한 표현 등은 아마도 평소에 TV등의 여러 가지 매체들에게서 무의식중에 접해왔던 일본의 대표적 미술인 ‘우키요에(浮世繪)’의 이미지에서 받은 영향이 대부분일 것이다.
우키요에는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1336-1573)부터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7)말기까지 다수 제작되었다. 우키요에의 형식상의 기원을 찾자면, 일본 미술만의 독특한 양식인 금병풍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데, 17세기 후반에는 우키요에로의 진행이 보이는 다양한 포즈의 여인들 그림이 등장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들은 평범한 여인이나 규수가 아닌 대부분 유곽녀와 탕녀들이이었다. 화려한 기모노의 미인도들이 우키요에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우키요에는 대게 판화로 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판화가 아닌 붓으로 직접그린 육필 우키요에도 존재하였다. 우키요에의 주제는 주로 당대풍습을 다룬 풍속화이며, 피안의 이상보다는 차안의 현실에 주안점을 둔 당세풍을 추구하였다. 우키요에는 당대의 풍속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라는 점 외에 또 하나의 큰 의의를 가지는데 일본전통회화를 전 세계에 알려 높은 위상을 떨치게 했다는 점이다.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판화기술의 발달로 대량생산되어 세계적으로 수출되었고, 이는 서양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인상파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키요에(浮世繪)’라는 단어는 그리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닌데, 에도시대 중에서도 덴나(天和,1681-1684)연간에 비로소 정착하기 시작한 새로운 미술용어였다. 에도의 그림이라고 불리던 우키요에는 에도특산의 미술품 이었고 더불어 가격도 적당해 에도여행의 선물용품으로 매우 인기가 높았다. 이러한 이유로 에도를 기점으로 차츰 다른 지방에도 퍼지게 되었다. 실물로 완성된 우키요에는 에도라는 도시가 가진 고유한 성격에서 비롯된 특징들을 많이 담고 있다. 후에 히시가와 모로노부(菱川師宣)를 시조 격으로 에도시대의 우키요에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본고에서는 에도시대를 중점으로 이러한 우키요에의 아름다움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II. 작가들을 통해 본 에도시대 우키요에
1. 인물화가
풍속화의 점진적인 발전과 목판화 기법의 개량과 더불어 일본 서적삽화의 양식은 점점 더 표현상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유구한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쿄토와 오사카 같은 곳에서 책의 출판에 선두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앞서 말한 히시가와 모로노부(菱川師宣)의 등장과 함께 출판의 중심지가 에도로 옮겨졌다. 염직 바탕의 도안가 집안에서 출생한 모로노부는 가업을 도우면서 옷 문양 등의 밑그림을 도안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회화에 친숙해질 수 있었다. 딱히 스승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으며, 후에 에도로 진출한 그는 가업을 이어가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천성적인 회화의 재능에 스스로 눈을 뜨게 되었고, 때마침 활기를 띈 삽화본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된다. 그의 덕분에 그때까지 본문에 종속되어 있던 삽화들이 예술적으로 독립을 누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모로노부가 크게 성공한 이유는 그의 그림 양식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인데, 판화제작의 최신기술 개량의 이점을 최대로 활용하여 그는 육필화에 비해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수준의 판화를 생산해냈다.
삽화책에서 그림을 중심으로 한 그림책으로 발전하면서 풍속 표현은 문학에서 독립하고, 점차 책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나 그림 그 자체의 단위로 바뀌며 몇 장의 그림이 한 세트가 되는 이른바 소로이모노1)가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전체 12장으로 이루어진 모로노부의 작품인 <요시와라 풍속>은 이 같은 소로이모노의 대표적인 사례로 매우 유명하다. 모로노부의 풍속화 인물들은 화면 가득히 확대되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처럼 건장하고 대범한 동적인 모습은 목판화 본래의 명쾌함에 유연함을 더한 아름다운 조각선으로 표현되어있다. 향락적인 세상을 선명하게 묘사하여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그와 동시에 대량으로 작품을 배포하여 일반 감상자의 수요에 대비한 에도 특산의 우키요에가 비로소 이 시점에서 탄생한 것이다. 모로노부에 의해 계속 생산된 ‘세트’인 이들 판화는 곧 회화를 대신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예술양식과 기법은 일본판화의 초창기 전성 기간부터 1765년까지 급속도로 발달하였다.
모로노부 이후에 가이게츠도 안도(懷月堂安度)라는 화가가 등장하는데, 그와 그의 화파는 산책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전문적으로 그렸다. 사실 모로노부 사망 이후에 우키요에의 존망의 위기가 있었으나 이러한 시련을 극복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로노부의 직속 문하의 제자들의 노력이 아니라, 히시카와파의 화풍을 개인적으로 추종하면서 그것을 학습한 가이게츠도 안도라는 화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이게츠도 안도는 모로노부의 공방 제작을 답습하면서도 더욱 조직력을 보강하여, 공방의 주재자인 안도 자신의 개성이 완벽하게 발휘된 전형적인 육필 미인도의 양산을 철저히 추진하고 있었다. 한쪽 손으로 기모노 앞섶의 도련을 잡고 조용히 걸어가는 풍만한 자태의 유곽 기녀입상은 가이게츠도파가 즐겨 그린 육필 미인도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때로는 소맷자락에 감춘 손을 수평으로 올리거나 양손으로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과 같이 변형된 형식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동일한 포즈에 의상의 문양만을 바꾼 유사품들이 분담작업을 통해 양산되었다. 공방의 주인인 안도가 본이 되는 원화를 제작하면 그 밑의 화가들이 거기에 약간변화를 주어 한 점의 그림으로 완성했다. 목판인쇄라는 대량 복제수단에 대항하면서 동시에 직접 그린 육필화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대중에게 널리 보급하고자 했던 안도는 현대의 애니메이션 프로덕션과 유사한 시스템을 고안해낸 획기적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었다. 대량생산된 이들의 그림은 화려한 옷의 율동적 움직임에 입체적 효과를 가한 특이한 형식을 창출해 냈다. 그 후에 이 주제는 목판 화가들에 의해서 다루어진다. 오쿠무라 마사노부, 니시무라 시게나가, 이시카와 토요노부 등과 쿄토파를 대표하는 니시카와 스케노부와 같은 여러 초창기의 우키요에 화가들은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그들의 고유양식을 창조하였다. 이중에서 18세기로 접어드는 시기의 화가인 오쿠무라 마사노부(奧村政信)가 가부키 배우를 소재로 하여 남성도 그림에 등장시키며, 우루시에(漆繪)2)라는 검은색을 칠한 부분에서 윤기가 나는 기법을 사용해 그림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의 그림 중에서 서양식 1점 투시도법을 적용한 풍속적 주제를 다룬 그림이 있는데 당대 서양화가 일본회화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에 적당한 자료이다. 이 밖에도 베니즈리에3)라고 알려진 기법과, 여기에 보라색과 노란색을 첨가함으로 차차 다색판화 기법의 완성단계로 가는 길을 열게 되었다. 이시카와 토요노부라는 그 시대의 화가는 그의 부드럽고 매혹적인 화풍에 잘 어울리도록 가끔 밝은 색채를 사용하며 이러한 새로운 기법의 가능성을 잘 모색하였다. 히시카와 모노로부가 에도의 삽화본에 그림을 넣으면서 시작된 우키요에 세계에 니시키에가 등장하기까지는 거의 1세기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니시키에의 창시자라 불리는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에서부터 우키요에의 황금시대가 개막되었다고 칭해져도 무리가 없겠다. 하루노부는 그 생애의 전기는 역사에 묻혀 알 수가 없지만 작품의 분석을 통해 그나마 유추해볼 수 있다. 아마도 무사집안 혹은 부유한 초닌 등 중국과 일본에 대한 기본적인 교양을 쌓을 수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림은 처음에는 아카데믹한 가노파에서 배웠으리라는 추측정도이다. 그가 우키요에에 등장한 시기는 1760년 무렵으로 짐작된다. 하루노부가 우키요에의 세계에 발을 들였을 당시에는 붉은색이나 녹색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색채 인쇄 판화인 베니즈리에가 유행하고 있었다. 색이 한정되어 오직 장식목적으로만 색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대상에 적합한 합리적인 색채구사 따위는 당연히 기대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어중간한 단계의 색채인쇄판화는 출판사의 요구에 따라서만 하루노부가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던 이유가 되었다. 당시의 그는 야쿠샤에와 미인화를 그리고, 때로는 명소그림, 무사그림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을 제작했다. 이러한 하루노부의 잠재된 재능을 발견한 사람은 오쿠보 타타노부라는 하타모토 계급의 고위무사였다. 오쿠보는 하루노부에게 에고요미4)의 제작을 의뢰하고 그를 후원하였다. 일반대중들은 이 새로운 작품들에 열렬한 호응을 보였으며, 출판업자들은 조금도 지체함 없니 한정판으로 만든 호화판 상업용 판본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비단(니시키)의 효과와 유사하다 여겨져 니시키에라 불리었다. 이들 판화의 좋은 호응에 용기를 얻어 하루노부는 1770년에 그가 죽기 전까지 약 6년 동안 쉴새없이 제작하여 600여점이 넘는 판화를 남겼다. 그의 선구자인 이시카와 토요노부나 쿄토의 니시카와 스케노부의 양식까지도 자기화하면서 그는 날아갈듯 가벼운 몸매, 날씬한 허리, 작은 손발, 그리고 거의 무표정한 형식화된 얼굴을 한 여인상에 거의 초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인물화는 시적 정취가 강하며, 다양한색채의 조화와 대비효과로 인해 세세한 것들까지도 적절한 질감을 표현하면서 순수한 회화적 효과 역시도 차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로 <우야궁예미인도>는 자신의 정적을 저주하러 신사에 가는 소녀를 환상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렸는데, 그녀가 들고 있는 등불은 어둠을, 부러진 우산은 격렬한 폭풍우를 암시한다. 허나 그녀의 섬세한 자태는 추호의 근심이나 슬픔도 나타내지 않으며, 도리어 구도와 색의 조화로부터 비상한 신비스러움에 가까운 아름다움이 스며 나온다. 이처럼 농밀한 시적정취를 지닌 환상적 회화세계를 표현해낸 하루노부의 영향력은 메이와(明和) 연간(1764-1772)의 우키요에의 세계를 하루노부의 화풍일색으로 물들였다.
하루노부 사망이후 일시적으로 우키요에의 세계에 허탈상태가 찾아오기도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다시 힘찬 양식이 전개되게 된다. 이 시기인 안에이(安永)연간(1772-1781)에는 여인상의 대가인 이소다 코류사이 같은 화가나, 배우들의 초상화를 전문으로 한 카츠카와 슌쇼 등의 화가들이 하루노부의 품위 있는 표현양식을 채택하여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인물화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기존에 틀에 박힌 표현에서 벗어났는데, 이러한 사실주의 양식의 조류에 따라서 탄생한 위대한 화가로는 도리이 기요나가(鳥居淸長)를 들 수 있다. 기요나가는 1752년 에도의 온자이모쿠초 1초메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고, 이 지역 주변엔 이른바 신바(新場, 신사카나바의 준말)라고 불리던 어시장이 매일 들어서곤 했다. 남자다운 협기와 시원시원한 성격을 자랑하며 단순명쾌함을 추구하는 담백한 성격이 아마도 어시장 사람들의 전형일 것이다. 신바에서 태어났다는 조건이 기요나가의 인격과 예술의 형성에 크게 작용했던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예능 방면에서도 열렬한 연극 팬들 속에 섞여 자랐으며, 서점주인의 아들이었기에 에조시나 니시키에 등에도 어릴 때부터 친숙하게 접할 기회가 있었던 그는 연극그림과 야쿠시에 전문 화가였던 도리이 기요미츠(鳥居淸光)에게 가르침을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안에이(安永) 연간에 걸쳐 스승인 기요미츠의 화풍에서 대담하게 벗어나고자 애쓴 기요나가는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독자적인 미인화풍을 개발하는 데에 힘을 기울여 마침내 덴메이(天明)연간에 접어들 무렵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개성적 양식을 성립하게 된다. 산수나 실내를 배경으로 묘사한 아름다운 비례와 이목구비를 지닌 여인들은 대부분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에 알맞은 중용을 보여준다. 배경은 항상 어느 특정 계절에 맞는 시상으로 충만해 있기는 하지만 전체구도의 서정적 분위기는 여인들의 실체를 결코 나약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이제까지의 기법적 발달에 힘입어 그의 판화들은 밝고 조화로운 색채에서 뛰어남을 발휘했다. 허나 그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1785년 스승인 기요미츠가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대를 이어나갈 장자가 없어, 그 대신으로 기요나가는 기요미츠 집안의 4대째 당주를 잇게 된다. 도리이 집안의 과중한 업무에 쫓겨, 간세이(寬政)연간에는 아쉽게도 기요나가의 장기인 미인화와는 멀어지게 되고 만다. 하지만 다행히 이방면에서 가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磨)가 <미인 오쿠바에5)>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우타마로는 여인들의 내면 심리묘사에 치중한 그림을 추구하였다. 이외에도 도슈샤이 샤라쿠(東洲薺寫樂)라는 이름의 (혹자는 김홍도가 아닐까라고 추측키도 하는) 매우 짧은 활동기간을 가진 정체불명의 화가 역시도 가부키 배우들의 배역의 연기형식과 배우의 본래 모습에 주목한 사실주의적 우키요에를 많이 남기고 있다.
2. 산수화가
멋있는 여인들과 배우초상화를 가장 중요한 테마로 삼은 일본판화는 18세기 말에 그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판화의 역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고, 풍경화라는 또 다른 장르에서 많은 걸작품을 산출해 냈다.
이 새로운 시도의 선구자는 누구나 한번쯤은 이름을 들었을법한 유명한 화가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였다. 시골이었던 에도의 외곽에서 태어난 그는 ‘카츠시카 지역의 농부정신’을 끝까지 잃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1778년 카츠카와 슌쇼(勝天春章)의 화실에 들어가서 배우의 초상이나, 삽화 등을 그리다가 스승이 죽은 후 동료였던 슌코와의 의견충돌로 화실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호쿠사이는 다양한 회화 기술을 습득하는데, 카노파, 스미요시파, 린파, 셋슈파에서 중국화와 서양화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여러 화파를 다루었다. 이후 독자적인 고난을 길을 걸으면서 미지의 분야에 대한 끝없는 도전정신과 지칠 줄 모르는 화혼을 불태운 화가로 삶을 살았다. 호쿠사이의 이름은 <불타는 후지산>,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 뒤로 보이는 후지산>등이 있는 니시키에 연작인 <후가쿠36경>을 그린 풍경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이러한 독특한 풍경화를 제작할 수 있는 원인 중 가장 신빙성 있는 이론은 네덜란드 판화의 영향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서양 화풍의 순수 풍경판화세트를 출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에도의 경관이나 그 주변의 바다풍경을 그린 이 판화들에는 라틴 알파벳을 흉내 낸 일본 글씨로 화제가 쓰여 있고 과장된 기하학적 투시법과 음영법이 적용되어 선묘로 그려진 인물들과 이상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호쿠사이는 여기서 일본회화와는 전혀 다른 아주 낮은 단일시점을 채택하였다, 이 두가지 원리가 바로 호쿠사이로 하여금 후지산 연작과 같은 걸작품을 낳게 한 것이다. 1804년부터 에도명소 연작을 출판하였으며, 1814년에는 유명한 호쿠사이 망가, 즉 그의 평생의 결실이 담긴 드로잉들로 형성된 일종의 그림 백과사전이 출간되기 시작하였다. 1831년부터 후가쿠36경을 연작출판 하였는데 실제로는 46경이 포함되어있다. 호쿠사이에 의해 재구성된 자연의 새로운 극적모습은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 지우기 어려운 선명한 기억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호쿠사이 외에도 유명한 풍경화가로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를 꼽을 수 있겠다. 가난한 하급무사의 큰아들로 태어난 히로시게가 화가로 자립할 뜻을 지닌 이유도 이러한 박봉의 무사계급을 탈피해 보고자하는 의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1809년에 연이어 부모의 상을 당한 후 우타가와 도요하루의 제자로 들어가 우키요에의 기술을 사사받는다. 1818년에 그의 데뷔작은 보통 우키요에와 마찬가지로 염가의 배우그림이었다. 1830년대부터 기념비적인 <이치유사이의 동도 명소>라는 10장짜리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풍경화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여기에서부터 서정적 풍경화를 지향하고자 한 히로시게의 화풍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데, 다만 그림 속에 점묘로 표현된 생활풍속에 대한 관찰은 미흡한 감을 남긴다. 자연과 사람의 조화가 이루어진 히로시게 만의 명소풍경화가 완성된 시기는 2-3년 뒤의 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호에이 도판 도카이도53역참>에 의해서 실현된다. 히로시게의 대표작인 <쇼노> 역시도 이에 속한다. 호쿠사이의 풍경판화의 넘치는 기백과 달리 히로시게가 표현한 자연은 섬세한 필치와 조화로운 색상들에 의해서 전달되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시적분위기가 가득했다. 이와 같이 완전히 스며드는 부드럽고 서정적인 느낌은 당대 대중들의 취향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의 자연관은 언제나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고 시적 호소력으로 충만했다. 히로시게는 호쿠사이보다 지속적으로 인기를 누렸지만 <토카이도 풍경판화 40세트>를 그럴 때 즈음엔 그의 영감도 바닥나 있었다. 그러나 1837-42년으로 편년되는 <키소카이도6)>시리즈와 그의 말년에 출판된 눈, 꽃들, 그리고 달 등 일본산수화의 중요 3요소를 표현한 대작풍경화 세 점에서 충분히 표현되었다.
III. 우키요에의 타락과 서양에 끼친 영향
우키요에의 이러한 발달을 뒤로한 채, 오랜 세월간의 도쿠가와 막부 지배체제는 거의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봉건정권은 경제적 어려움, 황권 복권운동, 그리고 해외로부터의 개방 압력 등 여러 가지 당면문제들에 더 이상 대결할 능력이 없었다. 이시기 전반에 팽배해있던 시민들, 특히 에도시민들의 불안감은 그들로 하여금 순간의 쾌락만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우타가와 쿠니사다, 우타가와 쿠니요시 등의 화가의 노력과 호쿠사이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받은 키쿠카와 에이잔의 힘씀에도 불구하고 일본판화는 18세기의 시원한 디자인 감각과 우아함을 잃고 관능적 표현으로 빠져들었다. 우키요에의 색채는 점점 더 천박한 길을 걸어갔고, 이때의 말기 우키요에인 미인도나 배우초상 역시도 쇠퇴일로로 접어들었다. 기괴한 소재의 귀신그림이나, 칼로 사람을 해하는 사무라이 그림, 피가 낭자한 시신이 등장하는 그림 등 타락하는 형식이 보이는 것도 이시기의 일이다.
일본판화는 19세기 중엽에 발달이 마지막 주기에 이르렀다, 헌데 이때 바로 세계의 다른 편, 특히 프랑스에서는 예술가와 예술 애호가 사이에 막 이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로코코시대의 그토록 열광적이던 중국풍을 잠재우고 점차 은근한 매력을 발산하던 일본문화의 열풍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파리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때에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일본은 주로 칠기와 도자기를 비롯한 일상용품을 전시하였는데 이들을 포장할 때 완충제 역할로 넣었던 것이 바로 우키요에였다. 이런 포장지로 쓰였던 흔해빠진 우키요에 조차 유럽인의 눈에는 동양에 서온 신기한 물건으로 여겨져 수집대상이 되었다.
일본의 판화가들의 목판화는 평면성과 자유로운 색채의 사용 대담한 디자인 등이 특징인데 이는 당시 유럽화가들이 이미 시도하고 있었던 자연주의에서 일탈하고자하는 의지와 일맥상통하였다. 사실주의적 재현성을 추구해야하는 유럽미술의 보수적 견지에서 보았을 때, 간략한 형태와 단순한 색채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 내며 매체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추상성까지 지닌 일본의 우키요에는 매력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네, 모네, 드가, 휘슬러, 고갱, 반 고흐 등등 많은 화가들의 열정에 불을 붙였던 것들이 매우 저질화 된 19세기의 삼류작품들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이 사실은 이들 화가들의 작품에 나타난 일본 판화들, 예로 들면 마네의 <에밀 졸라상>이나 반 고흐의 <탄기 신부상>에서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열풍을 부르기를 자포니즘(Japonism)이라고 칭했는데 이러한 유행의 원인은 새로운 것에 대한 맹목적인 호기심이기도 했다.
자포니즘의 새로운 파도를 열었던 작가들은 츠키오카 호넨을 포함한 우키요에 말기의 화가들이었다. 너무나 진부하고 타락했던 것으로 취급되었던 이 판화들로부터 당시의 유럽화가들이 그처럼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그들은 말기 우키요에를 알고 난 후인 1889년의 파리 세계 박람회 때에 가서야 우타마로의 미인도에서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그보다 훨씬 더 지난 다음에야 하루노부의 전 원시적인 아름다움이나 초기 판화가들의 역동적인 구도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결국은 한 나라의 미술이 퇴락한 매너리즘 형태가 해외에 알려지고 후대에 길이 남을 혁신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IV. 맺음말
대량생산되는 매체를 통한 대중들을 위한 미술은 흔히들 어느 시대에나 높게 평가받지 못하고, 혹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일본의 우키요에 역시 당시에는 값싼 싸구려 종이인쇄물이었으며, 작가들은 화가라기보다는 기술공으로 취급받았다. 예술적 신념으로 일한 화가도 있었지만, 우습게도 생계를 위해 우키요에의 세계에 뛰어든 화가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장식적인 것에 치중한 가벼운 작품 혹은 값싼 그림으로 불렸던 이러한 우키요에가 에도의 명물로 자리 잡고 후에는 유럽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에게 까지 영향을 끼치니 이것에는 정말 주목해봐야 할 교훈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우키요에의 경향은 대부분이 지극히 자극적이며 감각적이었다. 이러한 요소와 더불어 당대의 모습을 꾸밈없이 담아내는 등 사람들의 흥미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고, 그림의 원초적인 목적인 감상의 기능을 확실히 수행해 낼 수 있었다.
예술의 의미를 배우는 예술학도로서 이런 말을 한다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현대미술의 경향은 점점 이러한 감상의 기능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는 느낌이 있다. 작품의 형식에서 느껴져야 하는 감각적 쾌락과 감상의 기능은 거의 배제된 체 의미와 내용에 중점을 둔 소위 말하는 ‘어려운’ 작품들만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현대미술은 대중들과 단절된 지 오래고 사람들은 미술에서 얻던 즐거움을 현대의 다른 매체에서 충족하기 시작하며 미술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위험하다고 보이며, 이런 상황에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키요에의 전성기의 아름다움과 매너리즘 기의 독특함이 세계를 사로잡았던 것을 보고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 라는 텍스트에서 언급했듯이 현대의 우리는 조금 더 잘보고, 잘 듣고, 잘 느끼며 예술을 가슴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호쿠사이의 후지산 판화는 함축적 의미를 지님이 아니라 그림 그 자체로서 충분히 매력적이며 가슴속에 정감과 울림을 주며, 우타마로의 미인도에서 깊은 사색에 잠긴 여인의 얼굴은 인간적인 감성에 간지러운 자극을 남긴다. 풍경화든 인물화든 이들 모두의 색채는 우키요에라는 양식 안에서는 창조되었다면 어느 것이든지 단순명쾌하고 화려하다. 또한 어떤 면으로는 서정적이어서 인간의 감성에 많은 즐거움을 안겨다준다.
하지만 언제부터 이러한 미술의 기본적인 즐거움들을 잊은 채 의미만을 찾으려고 하는 현대사회가 되었던 것일까……. 마찬가지로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미술을 배우고 있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렵게만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내가 언제부터 탄생했는지도 참 모를 일이다. 우키요에를 한가지의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 우리미술이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세계적으로도 명망을 얻는 쪽으로 나아가야하는 새로운 방향을 탐색 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본고를 마친다.
참 고 문 헌
1. 고바야시 다다시, {우키요에의 미}, 이다미디어, 2004
2. 안혜정, {내가 만난 일본미술 이야기}, 아트북스, 2003
3. 아키야마 테루카즈, {일본회화사}, 예경, 2004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에도시대 우키요에의 전반적인 내용을 잘 정리 하신거 같습니다.. 부조장님 수고하셨어요!
ㅎㅎㅎ 조장님 수고많으십니다. 조장권한이 강화된것 같으니 힘내세요^^
흥미로운글입니다.. 후기 타락의 길을걷던 우키요에가 서양에 건너가 자포니즘을 형성시킨 사실이 묘하군요.. 잘 읽었습니다~ 아참 이번 2차 과제도 힘내서~^^
축-구 ㅇㅑ구 농-구 ㅂㅐ구를 뮤_직_과 함.께 즐ㄱㅣㅅㅔ요.
K , U , C , U , 7 , 5 , 쩝꼽 (추_천_인1234)
회-원ㄱㅏ입ㅅㅣ 3000원ㅈㅣ급ㅁㅐ일 첫-충-전5% 추ㄱㅏㅈㅣ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