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사단을 창립한 도산 안창호는 대한제국 말기에 태어나, 외세의 침략 속에서 나라의 운명이 기울다 못해 마침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나라를잃는 수치를 몸소 체험하였다. 당시의 의병항쟁과 동학농민전쟁 등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과 민족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민족해방운동이 지상 명제였다.
일찍이 청년 도산은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쾌재정 연설’로 명성을 떨친 이래 국내외를 드나들며 공립협회, 신민회(1907년), 청년학우회(1909년) 등을 조직하여 나라의 힘을 되찾기 위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교육과 산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것을 자주적으로 건설하기 위한 노력에도 선구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국권의 완전한 상실 이후에는 중국에 세운 임시정부의 초창기 중심 인물로 탁월한 지도력과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도산은 준비 없는 해방투쟁이나 실력 없는 독립운동만으로는 민족이 염원하는 해방과 독립을 성취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보다 원대한 목표와 경륜으로 진정한 민족자주독립을 위한 독창적이고 조직적인 사회운동단체로서 흥사단을 창립하여 나라를 구하는 대열에 앞장섰다.
신민회와 청년학우회가 일제로부터 소위 105인 사건 조작으로 해산을 당하고, 미국 망명길에 오른 도산이 미국에 이미 조직되어 있던 대한인국민회의 중앙총회장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민족독립을 위한 핵심적인 일꾼을 양성할 새로운 민족운동단체로 구상하여 창립한 단체가 바로 흥사단이다.
1913년 5월 13일 역사적인 창립을 보게 된 흥사단의 창립 위원은 8도의 청년 대표(경기-홍언, 강원-염만석, 충청-조병옥, 전라-정원도, 경상-송종익, 황해-민찬호, 평안-강영소, 함경-김종림)를 포함하여 25명이었다.
창립 초기에는 회원간의 독서, 운동, 저축 등의 동맹수련활동으로 그 토대를 굳건히 다져 나갔다. 그 후, 1919년 3ㆍ1 운동을 기점으로 상해로 건너간 도산은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으로는 중국과 국내에 흥사단과 동일한 목적과 정신을 가진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1920년에는 중국 상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 1922년에는 서울에 수양동맹회, 1923년에는 평양에 동우구락부를 각각 시작하였다.
국내 운동체인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는 일본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인격수양과 민족문화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실질적인 모근 사업과 내용은 흥사단과 동일한 것이었다.
1925년에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합하여 수양동우회가 되고, 다시 1929년에 동우회로 개정하였다.
1937년 6월 만주사변을 계기로 전시체제를 구축하던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강력한 통치로 다스리면서 치안유지법을 빙자하여, 합법적인 수양단체로 인정해 오던 동우회의 200여 명을 체포, 구금하고 강제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유명한 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이다.
동우회 사건 이후 흥사단운동은 국내에서는 일제의 삼엄한 탄압으로 재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미주지역 활동을 근간으로 해방이 되기까지, 조국독립을 위한 민족의 역량 기르기 운동을 꾸준히 해 나왔다.
감격의 8ㆍ15 해방을 맞아 미국과 중국 방면에서 귀국한 회원과 국내에 있던 회원들이 힘을 합하여 1945년 11월에 흥사단 국내위원부를 발족하고 국내 흥사단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이후 1946년 9월, 제1차 흥사단 국내대회를 계기로 흥사단 창립의 목적과 정신을 살려 나라 발전을 위한 본격적인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고 미주 지역에 있던 흥사단 본부를 국내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옛 미주 본부를 미주위원부로 개칭하고 로스앤젤레스에 사무실을 두어 흥사단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기로 하였다. 상해에 있던 원동위원부도 그대로 유지하여 흥사단운동을 자치적으로 펼쳐 나갈 수 있게 하였다.
1949년 10월, 제4차 대회를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개최하고 이 때 서울 을지로 2가 대성빌딩을 매입하고 대성문화사를 설립하였다.
1950년 6ㆍ25 전쟁으로 부산에 임시 연락처를 설치하고, 미주위원부의 도움을 받아 단우간에 서로 돕고 서로 구호하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단보』를 속간하고 1953년 5월 13일에는 창립 4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부산의 임시 단소를 1953년 9월 서울로 복귀하여 단무를 정상화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본부 건물로 대성빌딩을 마련하였다. 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연차대회, 젊은 단우의 규합 훈련, 국민교양계몽운동, 「금요개척자 강좌」의 개최, 『새벽』,『기러기』 외 각종 단 서적을 출판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이러한 꾸준한 활동으로 인해 흥사단은 자유당 정권의 표적이 되어 여러 가지 모략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그럴수록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맞서서 강좌와 언론, 청년운동 등을 통해서 거의 유일한 사회 비판세력으로서 직ㆍ간접적으로 사회 민주화 과정에 기여해왔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권이 수립되면서 헌정의 중단과 함께 흥사단은 2년 2개월 동안 활동정지를 당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활동 재기를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1961년과 1962년 8월에 각각 만리포 하기수련회를 개최하고 단우간의 정의를 다졌고, 대성문화사를 통하여 『도산 안창호』, 『흥사단 50년사』 등 다양한 서적을 출판하여 출판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63년 7월 22일 당국에 등록 절차를 마친 흥사단은 새로운 의욕으로 청소년 사업인 아카데미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63년 8월 25일 서울에 청년아카데미가 창립되고, 이어 31일에는 대학생아카데미가, 9월 14일에는 고등학생아카데미가 창립됨으로써 전국적인 아카데미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1964년 봄 이후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인천, 진주, 춘천, 전주, 제주 등지에서 분회가 설립되었고, 청주, 천안, 오산, 강릉, 군산, 익산, 장흥, 해남, 여수, 마산, 진해, 원주, 울산 등지에서 아카데미를 조직하였다.
임의단체로 활동하던 흥사단은 1969년 8월 19일 문교부(현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의 승인을 받아 사단법인화하였다. 그 후 대성빌딩을 매각하고 1977년 9월 24일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에 새 흥사단 회관을 완공하여 새롭게 출발하였다.
1963년 아카데미운동을 시작한 후 20여 년간 흥사단운동은 크게 활성화되었다. 해방과 전후시기에 태어난 세대들이 도산사상을 접하고 흥사단운동의 역사적인 맥을 이어 오면서 흥사단의 발전과 한국사회의 민주적 발전에 큰 기여를 해왔다. 그리고 전국적인 아카데미운동 확산의 한 결실로 주요 도시의 소규모 분회조직이 전국 15개 지부와 12개 예비지부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확산된 학생아카데미가 양적으로 팽창되면서 마침내 80년대 들어서서는 조직체계의 갈등과 이완현상이 나타났고, 이념적 이질화 현상이 일어났다. 정치 사회의 변화와 이로 인한 학생 사회의 가치관 및 학생운동 양상의 변화에 흥사단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여 조직이 쇠퇴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1983년 5월 14일 남산 숭의음악당에서 창단 70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그 해 10월 23일에는 흥사단 본부 강당에서 70차 전국대회가 ‘민족의 주인 되어 통일의 길을 닦자’라는 표어 아래 개최되었다. 아울러 창단 7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흥사단 운동 70년사』를 발간하기로 하고 3년 여의 작업 끝에 1986년 1월에 발간하였다.
1991년 1월 단발전기획특별위원회에서 흥사단의 이념, 조직, 사업 등 각 분야별로 중장기계획으로서의 제1차 흥사단 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1994년 4월 30일과 5월 1일 양일간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린 세미나에서는 ‘제2의 청소년 흥사단 운동’에 단력을 집중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본부에서는 흥사단아카데미를 포함한 청소년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뒤따랐다.
1991년부터 해마다 5월에 대학로에서 청소년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아울러 통일꾼 수련대회, 통일 백일장, 역사 기행 등 청소년을 위한 수련거리를 다양하게 기획하여 운영하고 있다.
1993년, 서울 강서청소년회관 수탁 운영을 계기로 광주, 대전, 전주 등 지부에서도 이와 유사한 청소년 문화의 집을 수탁 운영하면서 다양한 청소년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다양한 시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91년에 공선협 결성에 참여하였고 1996~1997에는 한국시민단체협의회와 사무처를 운영하였으며, 1998~2001년까지는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처를 운영하는 등, 기타 여러 부분에 걸쳐 활발한 연대협력사업을 전개하였다.
1989년 6월에는 도산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고 건전한 청소년 육성을 위한 사업의 지원활동 등을 목적으로 하는 부설 연구기관으로 ‘도산아카데미연구원’을 개원하였다. 이어 청소년연구원(1992), 청소년 자원봉사센터(1995), 도산청소년재단(1996), 문화사업단(1997)을 각각 설립하였다.
한편, 1994년 5월에는 아카데미 창립 3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단위아카데미 동문 조직을 전국 차원으로 묶어 총동문회를 결성하여 졸업 이후에도 흥사단운동의 맥을 이어 갈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아카데미 총동문회는 포럼, 동맹 등산, 세미나, ‘총 동문회 밤’ 등을 개최하고 있다. 그 동안 아카데미를 통해 배출된 동문 수는 2003년까지 약 10만 명에 이른다.
2000년 4월 15일~16일, 대전 유성에서 개최한 창단 87주년 기념세미나에서는 새 천년과 새로운 세기를 맞아 사회 변화의 본질을 짚어보고 사회 개혁과 시민사회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한 끝에 향후 흥사단이 중점적으로 전개해 나갈 3대 흥사단 운동과제를 설정하였다. 3대 운동은 민족통일운동, 교육운동, 투명사회운동으로서 그 동안 흥사단운동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를 통해 향후 흥사단운동이 주력해야 할 과제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이를 통해 21세기 한국사회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미 1997년 3월에 흥사단민족통일운동본부(흥민통)가 창립되어 ‘민족통일, 평화통일, 조기통일’의 운동이념과 조직적인 틀을 갖추고 범시민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가운데, 2001년 5월에는 ‘나부터 정직하게 다 함께 투명사회’라는 운동 슬로건으로 투명사회운동본부가 창립되었다. 투명사회운동은 반부패를 위한 법ㆍ제도개혁운동과 시민의 의식과 생활개혁운동을 통하여 정직하고 투명한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시민 운동체이다.
2002년 10월에는 교육 개혁을 위한 시민운동의 요구와 도산의 사상과 교육철학을 전파할 목적으로 교육운동본부가 창립되어 교육시민운동과 민주시민교육 지도자 과정, 청소년 리더십 학교 등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가고 있다.
민족과 더불어 수난과 발전의 고락을 함께 하며 이제 100년의 시점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는 독립운동을, 해방 이후에는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부단한 사회운동을, 그리고 1990년대 이후로는 청소년 사업과 3대 시민운동에 주력하는 한편 한국사회 발전에 기여할 인재양성운동에 앞장서 왔다.
이러한 흥사단운동의 결실로 현재 전국 27개 지부 조직과 미주의 6개 지부, 그리고 각종 부설 및 유관기관에서 다양한 형태로 흥사단운동을 펼치고 있다.
흥사단운동의 목적인 ‘민족 전도 번영의 기초 수립’의 과제는 세계화 시대에 더욱 절실한 보편적 가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재양성과 시민사회운동의 전통은 보다 발전적으로 계승되어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