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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 원안 |
2000만명 모두를 위한 교회를 자가비용으로 세울때 : 인당 3000만원, 4인가족 가장 1억2천만원 |
2안 : 삭감안 (비용) |
통일후 현재의 25%수준만큼 교회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 : 인당 750만원, 4인가족 3,000만원 |
* 물론, 북한에 교회를 임대방식의 건물로 지으면 46조로 많이 떨어져서 부담은 줄지만, 굳이 그리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을 깨달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부분은 현지면에선 다루지 않기로 하겠다.
개인적으로, 한국교회가 모든 북한사람들을 모두 믿겠다고 말하는 믿음은 좀 과도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은 그렇지만 실제가 받쳐주지 못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재의 대한민국의 신앙의 성적표이다.
통일이후에도, 나의 신앙에 대하여 국가권력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기 위하여 최소한으로 투입해야 하는 비용의 개인주의적인 신앙과 이기적인 발로에서 계산해보니 최저 북한관련 헌금을 인당 750만원, 4인가족 3,000만원을 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 750만원이 아니라 3,000만원은 작은금액은 아니다. 개인의 저축률은 1년에 평균적으로 500-1000만원밖에 되지 않는다. 거의 6년간을 제시해야 받을수 있을까말까한 금액인데, 자기관리가 뛰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금액조차 나오질 않는다. 이 목표수준은 첫 번째 가설로 세워본 금액이다.
교회건물을 짓는부분에서 어떤교회들은 사상적으로 초대교회는 건물이 없어도 교회가 없어도, 전문적인 목회자가 없어도, 찬양이 없어도 예배를 드릴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한 부분에서는 사상적인 설명이 필요하나,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일일히 설명하다가는 실제적으로 교회건물을 지을수 있고, 장소를 마련할수 있으며, 이를 통한 한국내에서의 하나님과 그에 속한 교회의 입지가 변할수 있음을 볼때 일일히 이러한 원론적이고 철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토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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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속에 이야기
[그래도 빼먹으면 큐티가 안되니까.. 말씀묵상에 따라 얻은 결론을 남겨봅니다.]
북한교회의 재건이라는 부분을 다루기이전에
교회건축에 대한 철학적 입장도 고찰해보고, 그런 부분들도 다루어야 하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재미있는것은, 하나님의 반응이고, 우리 성경에서도 교회건축을 위하여 애쓰는 신앙인이 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순수하게 신앙의 표출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교회건축을 하기 위해 모금을 하면 안되나요?
성경좀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제7장에 보면 제6장에서 다윗왕이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국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긴이후에, 불현듯 자신에 비하여 비천한 장소에 있는 하나님의 궤를 생각하고서 하나님의 법궤를 이에 상응하는 가치에 올려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입장을 표명하시면서도 이에 대하여 실천하려는 다윗왕에게 축복을 내려주시는 장면을 목도할수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해당장면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성전건축을 하려고 하는 다윗에서 이와같은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구구절절히 설명하고 계신걸까요?
먼저, 하나님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처음에 다소의 책망조로 시작하는듯 하였기 때문에 해당건축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으로 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실 것 같은데 후반부로 가면 전혀 다른 결론에 어리둥절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윗의 성전건축에 동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고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천막과 같이 평범한 텐트에서 삶을 지냈던 이유는, 이스라엘백성들의 눈높이를 맞추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들과 같이 인간을 억누르고 부담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며 인간을 사랑하며, 자신의 지은 창조물을 기뻐하고 축복해주길 원하는 마음이 담겨있음을 알고 각종 신전을 짓느라 고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그런 부분때문에 혹여나 눌림받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혹 다윗에게 바치는 헌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오도될 것으로 오해하여 먼저 다윗 왕에게 나단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알려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에 이를 언급하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음에 있어서, 그의 백성들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주의 뜻입니다.”라며 성전건축을 독촉하는 주의 종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전반적인 경제사정이나 교회의 경제규모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는 주의 종들은 조금은 확실히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다툼과 분란이 교회내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건축에 있어서 사람들이 오해가 없도록 경계하시면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한 다윗에게 다음과 같은 축복을 번영을 약속 짓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고 받은 댓가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오도하면
교회건축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주실것이다라고 오해하는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주님을 기뻐하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이에게 내리는 말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다윗의 모든 영광의 근원을 알려주심-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못하도록 하심]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이스라엘의 안정을 약속하심]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제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안정을 다음세대까지 약속하심]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자에게, 그의 마음과 노력을 인정하고 영원한 왕위를 약속하심]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리라”
[약속을 폐하지 않고, 계속 지속성의 약속을 허락하심, ‘사울왕 트라우마’를 가졌던 다윗에 대한 개인적인 배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내심으로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신 약속을 확정함]
놀랍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회건축에 대한 실태는 어떤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과거에 우리나라 수도서울에는 십자가가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를 지었고, 많은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 마음들을 알겠습니다만... 실제적으로는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난립하여 서울의 묘지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드라큘라는 절대 한국에 상륙하지 못하였을거야 라는 농담이 가득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사람들은 좋게 평가했고, 어떤사람들은 나쁘게 평가했습니다.
뭐. 우리는 좋게 평가하는 입장이지만, 상대적으로 잘 지은 성당이 지역별로 하나만 있는 카톨릭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좀 떨어지는것이 아닌가 싶어 우리도 뭔가 정리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없지 않은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대다수의 교회가 생각보다 좀 영세한 상태에서 높은 첨탐만 올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없던 교회들이 많이 생긴것이니 감사하지요.)
그러나 상대적으로 대형교회가 생기면서, 교회의 기업화인가?하는 의문도 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나 온누리교회나 사랑의교회와 같은 대형교회가 들어서면, 반경 3Km이내의 교회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작은교회의 성도들은 옆의 교회의 부강함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고, 그 잘 되어지지 않은 교회를 보면서 임대료를 내면서 급급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작은 교회의 성도들은 대다수의 교인들이 믿음이 없다고 하고, 다수속에 숨어있는다고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규모의 경제를 이룰만한 교회건물이 생기고, 그만큼 큰사역할수 잇는 기반이 생기니 감사하지요.)
어떤이는, 무소유교회를 추구하고, 어떤이는 큰교회를 다시 세분화하는 과정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북한의 교회건축이라는 부분을 이러한 많은 부분들에 대한 의문들에 대한 답안과 정리를 해나가면서도
이에 대한 나름의 해법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하는것입니다.
(그래도, 다양한 교회속에서 선택이라는 것을 할수있게 하신것이니 감사하지요.)
...
중요한것은, 개인적으로 제안하는 이러한 교회내에서 펼칠수 있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특별히 같은 동포로써 북한주민들중에 믿지 않는 이들에게 믿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대의적인 차원에서, 또한 만일 그러한 프로세스가 성경적으로 반하지 아니하며,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할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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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후 북한에 교회를 짓기 위하여
이에 대한 대안으로써, 교회에서 이러한 운동을 전개한다면 어떨까?
첫째로, 대규모의 교회, 이를테면, 여의도순복음교회나, 온누리교회나 사랑의교회에서 북한에 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재정마련을 위하여 각각의 교회가 3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사회기부단체(최소 자본금 3억원)을 만들고, 국가와 협의하여 교회가 소유한 사회기부단체에서 통일이전까지 교회건립을 위한 예산을 모아나가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인다면 말이다.
원래, 기부금모집등에 관한 법률에서는 종교단체에서 모금을 할수 없다. 그러나 특정목적을 둔 사회기부단체를 교회에서 만들어 관리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다. 온누리교회의 하용조목사님등의 굴지적인 인물이, 통일후 북한사회를 위한 교회건립을 위하여 이러한 프로세스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분당에 있는 분당중앙교회는 3만명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성도를 가지고 있지만, 사회에 대한이 있는 교회를 표방하며 교회자체적으로 100억원을 saving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자체재산에 대한 축척에 대해서는 놀라운 일이며, 해당교회가 지역의 학교등을 설립하기 위하여 사회기부단체등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때, 이러한 프로세스는 이미 어떤교회에서는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러나, 기부를 위한 사업체의 신뢰성과 금액의 관리의 적절성을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가? 어떤식으로 사업구도를 잡으며, 어떻게 그리스도안에서 기독교가 상호 연합하여 이러한 시너지를 만들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몇가지 해내야 하고 넘어서야 하는 단계와 각각의 기준들을 명확히 해야한다.
설명이 길어지면 사람들이 잘 모르니 그냥 넘어가고 실제적인 이야기를 더 해보자.
사실, 어떤부서에서 부흥을 위하여 내가 찾는것은 하나의 영혼이며, 하나의 영혼이 어떠한 꿈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그래서 내가 교회를 돌아다니며 부흥을 위하여 하는 일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있는 꿈은 무엇이며, 해당꿈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지원해줄까를 생각해본다. 생각마다 오늘날 각각의 좌절된 꿈들을 찾고 그것을 회복시키며 강화시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뭐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꿈을 실현시켜주고, 동시에 나의 꿈도 지원받기를 위한 상호적인 소망을 가정에 두고서이다.
교회부흥도 사실은 아주 쉽다.
각각의 교회나 기도하는 무리들의 좌절된 꿈을 회복시켜 주고 회복하는 것이다.
예언자중에 릭 조이너라는 사람이 있다. 그분은 교회의 선배들의 업적을 찾아서 그것을 다듬을 필요성에 대해서 예언을 한적이 있어서 이것이 예언인지 합리적 사고인지 궁금해서 웃은적이 있다. 예언과 합리적 사고에 대해선 나중에 논할 기회가 있길 바라겠다.
북한을 위한 사역단체중, 과거 북한에 현존하는 교회에 대한 자료를 모집하고 수집하는 단체가 있다. 하지만 그 단체가 어느정도 작업을 진척시킨 이후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그러면 나는 기독교선배들의 꿈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어떠한 프로세스와 과정을 거쳐야 할지를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개발사업에서는 어떤사람이 지역사회에 대한 어떤꿈을 꾸면, 해당비전에 대하여 그림을 그려서 표현한다. 이른바 청사진이고, 이른바 조감도이다. 해당 조감도는 나름대로 구체적이기 때문에 이해하는 전제가 된다. 과거의 폐허가 된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선행연구가 필요하고, 때로는 해당교회를 현대적 건물로 바꾸어 건축할 것인지, 혹은 역사는 비평이다라는 관점을 가지고 새롭게 지어야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청사진이 있고, 그것을 전시한 사이트가 있다면 모금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없는것보다 보다 구체적이기 때문에 해당자금을 모으는데 더욱 유리하다.
내가 생각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북한의 교회자료를 모은 관련단체와 협약하여 관련지역과 교회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통일후 해당교회에 대한 재건을 목적으로 국가와 협의하여 1년이상의 연속적인 모금운동을 할수 있도록 협의하는 것이다. 국가의 기부금모집등에 관한 법률운동에 따른 모금활동은 1년이내에 하게 되어 있으며, 연속적이게 하지는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교회건물에 대해서는 300억이상의 건물이 될터이므로, 1년의 모금만으로는 불가하다. 적어도 연속적인 모금활동을 해야한다. 이러한 부분에서는 교회의 큰 어른이신들의 도움을 기대해 볼수 있다. 그분들에게 교회건축에 대하여 목도할지 안할지는 모르지만 성경상의 다윗과 같이 여호와의 전을 사모하여 그것을 건축하는 프로세스등에 대하여 동참하고 주도적으로 참여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일일까? 여기서 키포인트는 통일후 북한을 위한 재정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한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할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이런운동을 펼치면, 기독교인이 한국사회내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로써 충분히 화려하게 국가에 기여할수 있게 되지 않을까? 예를 들어보자. 교회가 이런형태의 모금활동을 펼치고 이러한 프로세스와 개선을 위하여 노력하자는 취지의 운동을 벌이면 충분히 먹힌다. 왜냐! 대한민국내에서는 연속적인 정부의 정책이 부재하다. 또한 각각의 대통령이 바뀔때마다 자신의 업적을 위하여 정책공약의 남용으로 인하여 국가적으로 예산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사회의 미래지향적인 모습을 위하여 일으키는 이와같은 형태의 운동은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할수 있고, 자각의 목소리를 높일수 있다. 해당방식은 국가가 하지 못한다. 남북한이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교회에서 통일을 위한 기금을 모은다는데 북한의 정치세력이 외교적으로 북한을 합병하고 흡수하려는 노력이 아니냐고 분노해도 정부에서 주도하는 운동도 아니기 때문에 뭐라 할수 없지 않은가?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등에서 북한의 통일방식을 임대방식으로 하여 개발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만일 정부가 용인한다면 교회내에서 그러한 통일사역의 일부분이라도 도울수 있는 자체적인 운동을 해보겠다고 하면 충분히 먹일것이다. 그것도 3만명이 넘는 대형교회를 필두로 이와같은 운동을 벌인다면, 충분히 국민적으로 먹어줄수 있다.
물론, 관련법률에 의거하여 이러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각각의 부문들이 양보해야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먹힐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는것이다. 개발방식에서도 사업제안서와 사업수지와 청사진을 놓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사업의 진행을 할수가 있는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에서는 많은 부지런함이 필요하고 보완이 필요하다. 1년이상의 연속적인 기부금모집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교회건축을 위한 사업을 벌이면, 정부의 입장에서 남용의 요소로 인하여 이러한 프로세스에 대한 예산적 내용에 대한 남용의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전국적으로 벌어질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는것에 대한 심각한 과부하와 의심을 들을수 있다. 또한 이러한 기부금모집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하는 모금행위가 생각보다 오랜시간에 걸릴수가 있는것이다. 예를 들어 평양과학기술대학원에서 그 사업규모에 비하여 모금을 하는데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이러한 공정성의 논란을 희석시키고, 모금기간을 단축시킬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기부금모집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진행하는 사업을 자본시장통합법하의 신탁법과 통합하여 공익신탁이라는 부분과 연계하여 자금운용에 대해서는 신탁회사에 맡기고 이를 상품화해서 관리하는 것으로 보완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특정조건을 가미할 경우, 예를 들어 모금을 위한 활동내역이 특정퍼센트를 지으면 먼저 건축물까지 완공하고 나머지 부분까지 감당할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공익신탁이라는 방법이 실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사례는 전무하다. 공익신탁이라는 가능성을 전제로 관련법률을 열어두었지만 한국의 어떠한 금융기관도 이러한 방법에 있어서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열어둔 사례는 전무하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신탁법이라는 것의 유래가 기독교단체들이 만든것이기 때문이었고,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신탁은 기본적으로 기독교단체에서 이루어졌다. 그 역사와 유래를 말한다면, 영국과 독일의 use제도에서 유래한다. 과거 신권과 정부의 권한이 상호 대립하는 시절, 사람들은 죽으면 자신의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습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정부에서 예산의 징수가 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전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교회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교회를 위하여 쓸수 있는 장을 열기 위하여 신탁을 만들어 자신의 재산을 맡아 교회사업을 위해 쓰도록 하였고, 신탁회사는 해당자산의 관리를 통해 교회의 필요할 것을 공급했고, 세금도 납부했다. 물론, 이러한 제도가 탄생한것과 그 성장과정에는 굴곡이 있다.
어찌되었던 이것도 하나님을 존경하여 만든 백성들이 만든 제도이므로 원래의 의미를 회복하여 해당신탁방식에 대한 실제적인 길을 열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이러한 공익신탁과 기부금모집등에 관한 모집을 연결시켜 새로운 금융상품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던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위해서 전제해야할 몇가지가 있다.
첫째는 기부금모집등에 관한 법률과 공익신탁을 결합하여 금융상품을 만드는 경우, 국가에서 이러한 예외적인 상황에 있어서는 장기적인 모금활동을 할수 있도록 풀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정부의 관련부서와 협의해야 하는 부분인것이다. 교회가 남북의 통일을 대비하여 교회건립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려고 하는데 해당교회에서 해당금액을 1년이상을 모으는데 있어서 이러한 케이스에 대해서는 연속적인 해수를 통해 할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여야 한다.
둘째는 기부금모집등에 관한 법률과 공익신탁을 결합하여 문제를 풀경우, 이러한 상품이 추가적인 PF기법을 가미하여 건축물을 완공시키는 시스템일 경우, 금융기관인 신탁과의 양해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개발사업의 경우에는 이정도 교회건축을 위해서는 (규모에 대해서는 다음기회에 세부적으로 들어가자) 최소한 40억의 수수료가 필요한데, 신탁회사의 경우, 특정한 조건하에서 최소수수료 예를 들어 15억정도에서 해당 프로세스를 진행해 달라는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관리형신탁의 경우, 5억에서 10억의 수수료를 받는것을 감안할때 적정수수료라고 할수 있다고 보여지나... 일반적인 모금을 통한 비용이 15억 상당의 금액을 특정회사에 대한 수수료를 주어야 한다는 부분에 대해서 납득하기 어려울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조율과 이해가 필요하다. 즉, 신탁회사들과 해당자금에 대한 부분을 협의해야 하는 과정이 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교회건립의 프로세는 최소 300억이상의 사업규모에 의하여 필요하므로, 북한에 세우는 교회의 규모와 정도는 300억상당의 교회건축을 전제로 하는 프로세스이다. 그러나, 현대교회의 변화에 따라서 교회건축물에 대한 비용을 사는것에 대한 이해가 불가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구조를 납득하기 어려울수 있다. 이에 대한 부분에서 본인은 성도들을 납득시킬수 있는 근거들과 자료들을 가지고 있으나, 이런방식으로 대규모 교회를 짓는것이 북한의 교회건축을 하는데 더 수월한 방법임을 일단 말하고 싶고, 이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세부적으로 들어갈 기회가 있을것이다.
또한, 세번째로는 교회자체적인 내부의 문제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이 부분이 좀 어렵다. 기부금모집등에 관한법률과 자본통합시장법의 신탁부분을 연계하여 공익신탁으로 특정한 상품을 만든다면, 교회성도들의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 부분인데 이 부분이 조금 어렵다.
개인적으로 북한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교회가 십일조이상의 금액을 내어서 해당사역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십일조이상의 금액을 내지 않으면 세계선교를 위해서 일할수 없는가?에 대한 문제였는데. 처음에 서두에서 풀었듯이 레슬리 화이트의 이론과 같이 이에 대한 효율성을 증가시키는것으로 사회발전을 이룰수 있다는 신념하에서 십일조내에서의 비용을 통해 선교를 위한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는 점을 먼저 말해본다. 이러한 고민은 나에게 말씀에 대하여 조금 더 깊이 들어가도록 하였다.
우리의 온전한 십일조란 무엇이고, 얼마나 되는것인가?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십일조가 율법이 아니라 권리라고 의식될만한 내부적인 자율성이 있음을 알고 손바닥을 친적이 있다. 유대인들은 십일조에 대해서 전체금액에 대한 규제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되, 10의 5조를 한 사람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까? 혹은 이슬람사람들은 왜 십의 2조를 할까? 혹은 국가적인 상태에서 신정일치시대의 십일조와 오늘날의 십일조는 다르다고 보아야 하는것이 아닐까? 등등의 많은 묵상을 기반으로 이해하고 그안에서 대단히 자유롭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기명, 무기명으로 통하여 젊었을때 한번쯤은 10의 5조를 드려본적도 있었다. 하지만 세금의 환금은 10%밖에 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십일조를 많이 하는것이 의롭다 아니다를 가지고 생각해본적은 없었다. 다만, 말할수 있는것은 십일조를 나의 의무로 생각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이 하는것이 나의 짐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십일조를 권리로 해석했기 때문에 율법적인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자유했다.
내가 이러한 말들을 할때, 어떤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내용들이 방언으로 들릴수 있다는것을 이해한다. 적어도 나는 성경을 10번이상 읽은 사람으로 그 응용과 묵상에 대해서 과거에는 평범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지만, 대다수의 평균보다는 이해가 높다는 사실을 유감스럽게도 스스로 인정하고 납득하게 되었다. 남들보다 먼저 깨달은 선지자? 또는 지식인으로써 오늘날의 교회,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의 교회에서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상이 있는 나로서는 남들이 하지 않는 고뇌가 많다.
오늘날 평균적인 사람들의 십일조가 10%도 되지 않는 사회에서 대략 50%나 그 미만만이 십일조를 드리는 사회속에서 이러한 방식의 십일조를 제안하는데에는 남다른 고뇌가 있었다. 또한 국가가 드리는 십일조가 국가에 의해서 환급받는 사실등의 제한적 요소와 국가아래에서의 종교적인 입장에 대해서도 약간의 고뇌가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교회에 드리는 십일조를 20%이상 드리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20%나 된다는 것을 깨닫고, 교회가 기부금모집등에 대한 단체에 의거하여 기부단체를 만드는것이 성도들이 드려지는 교회에 대한 헌물에 보다 많은 자율성을 증진시키고, 교회내의 예산을 투명하게 하고, 더 나아가 교회가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화평하고 그 사회를 주님께 인도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창구를 낼수 있음을 확신하기에 이러한 방식에 대하여 좁지만 길이라도 열어두는 방식으로 사역하는 것이 성화의 과정에 대하여 이해한 성도들의 사역방식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이러한 부분을 추가할수 있는 방안으로 구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에 나아가기까지 다소 불편한 여러가지 과정이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이것이 교회에 이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 여기에는 개인의 판단이 들어있다.
만일, 이러한 방식으로 일하면 교회는 몇가지 유익이 생긴다.
첫째, 십일조의 투명성이 증대된다.
둘째,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 증대됨으로, 복음에 대한 통로가 많아지고 높아진다.
셋째, 북한교회설립에 대한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빨리 할수 있으며, 북한사역에 있어서 규모화 전도에 이바지 할수 있다.
넷째, 불투명한 북한사역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청사진을 제시할수 있다 .예를 들어 모금활동에 있어서 향후 북한교회에 대한 공동체 구성이 특정한 목적이 부여됨으로 명확해지고 조직화할수 있다. 이를테면 모금활동을 하더라도, 설계도와 청사진을 제시하며 모금할수 있다.
다섯째, 경제발전에 통로를 제공하고 하나의 해법이 되며, 고용창출에 이바지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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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좋은점이 무지하게 많은데... 일일히 적기에는 너무 글이 글어지니 생략하겠다.
다음번에는 십일조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온전한 십일조에 관하여 좀 짧은 글로.... 십일조에 대한 묵상을 나눠보고.
안식년과 희년에 경제적 유익에 대한 나눔을 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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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단, 저는 하나님안에서 어떠한 꿈을 꾸면서 그것이 성경적으로 올바른일인지 검토하는 방식으로 성경공부를 합니다. 글은 좀 길지만, 그러한 전제내에서 제가 하는 업에 대하여 매칭을 시켜서 성경공부를 하는거지요.
통일후 북한교회에 대한 재건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묵상하는 방식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말씀이 지겹지 않아서 재미있는데.. 뭐.. 이런식으로 하는 케이스는 많이 없으리라고 봐요... 음.. 다음에는 좀 쉽게 쓰겠습니다.
사실, 이 성경해석법은 절대적해석법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를 다루려면 누군가는 정부에 교회가 세금을 내는것이 옳다고 보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논하려면 또 길어져요..
게다가 온전한 십일조가 몇%냐에 대한 또 묵상이 들어가서 논쟁의 요지가 있습니다. 휴... 지면으로는 좀 짧은데 저의 경우는 십일조를 율법으로 해석하지 않고 권리이자 놀이처럼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좀 재미있는 간증도 좀 많아요... 그러니 초심자들 입장에서는 너무 자유도가 높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흑.
사실 공익신탁의 성경적 기원을 이야기해도 하루종일 분량이고, 기부금모집등에 관한 법률도 하루종일 분량이고, 최근 유행하는 사회적기업에 대한 내용도 하루종일 분량이고, 창조-타락-구속의 원리를 이야기해도 하루종일이고.. 그러네요.. 에궁
어려우신 분들은 교회건축에 대한 다윗에게 하신 말씀편만 보세요.. 하나님이 다윗에게 교회를 짓기전에 하나님의 입장을 언급하신 것은 그만큼 중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말씀하셔서 향후 지침이 되고 오해가 되지 않도록 설명하신 따뜻한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에 심은 행위에 대해 갚아주시는 장면이 나오네요.. 살짝 감동이었습니다.
교회의 건축방식을 임대방식으로 하는가? 건립방식으로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대천덕신부의 제자나 헨리조지계통의 제자들에게 좀 이의제기의 대상이 있을수 있고 교회의 부의 축적이라는 부분에서 박노자와 같은 분들의 입장을 공감하셨던 부분들에게는 좀 반감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커뮤니케이션해요.. 질문하면 답글달테니 모르시는부분은 질문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