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보드카, 고량주 등 이른바 '하드 리커'(hard liqure)로 불리는 독한 술의 소비가 최근 2~3년간 둔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반면 맥주, 와인, 약주 등 부드러운 술은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대중주의 주역으로 자리잡고 있다. 부드러운 술이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다 젊은층 소비자들 중심으로 독한 술을 기피하는 음주 경향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음주를 즐겼지만 최근에는 대화와 사업을 위한 매개 수단으로 음주 문화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소주시장의 경우 4~5년전만 해도 알코올도수 25도 제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올 5월말 현재 22도 이하 소주가 전체 판매량의 70% 에 달할 정도로 저도주 위주로 물갈이가 이루어졌다. 99년 알코올도수 23도 시장을 처음 열었던 진로의 '참진이슬로'도 올 3월 이같은 추세를 거역하지 못하고 알코올도수를 1도 더 낮췄다. 보해(전남), 하이트21(전북), 금복주(경북), 무학(경남) 등 지방 소주업체들도 이같은 움직임에 속속 동참하고 있다. 두산은 아예 녹차잎을 우려내 만든 22도 '산'(山) 소주를 개발하고 건강 바람에 불을 붙였다. 국내 소주시장은 지난 65년 대중화된 30도 희석식 소주가 주류를 이루다가 74년 25도 소주가 등장해 25년간 시장을 석권했다. 이어 99년부터 올해초 22도 소주들이 출현하기 전까지 23도 소주가 시장을 주도했다. 주요 소주제조업체들은 한발 더 나가 20도 미만의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수면밑에서 연구 개발을 시작한 상태다. 독한 소주를 즐겨먹던 애주가들이 20도 미만의 소주를 마신 뒤 '밍밍해서 못 마시겠다'고 말할 때가 이제 곧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부드러운 술 바람은 약주시장과 매실주시장을 키우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약주와 매실주시장은 저도주 선호경향에 힘입어 최근 3년간 연평균 20% 이상의 고속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다. 국순당 백세주가 독주해 왔던 약 주시장의 경우 올해초 진로의 '천국'과 두산의 '군주'등 대형 주류회사들이 잇따라 진출해 신(新)-구(舊) 세력간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배상면주가의 '산사춘', 배혜정도가의 '부자' 등이 가세했고 경북에 본사를 둔 금복주도 찹쌀 100%로 만든 '화랑'을 앞세워 수도권 시장에 대대적인 판촉공세를 퍼붓고 있다. 이들은 모두 알코올도수가 14~16 도 수준으로 과음만 하지 않으면 부담이 거의 없고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기능성을 내세우고 있다. 순한 술 시장을 개척했던 매실주도 최근 금가루를 넣은 기능성 신제품이 잇따라 출시되면서 시장 규모가 지난해보다 200억 정도 많은 1200억원대로 커질 전망이다. 민속주 시장에서도 문배술, 안동소주 등 40도 이상은 판매가 줄어드는 반면 이강주, 고창복분자주, 가야왕주 등 25도 미만의 저도수 민속주들은 판매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등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서울의 압구정동이나 청담동, 대학로, 홍대앞 등에 즐비한 웨스턴 바에서는 맥주나 와인 등 순한 술이 전체 매출의 평균 70~8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3~4년 전만 해도 보드카나 데낄라 등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들이 붐을 이뤘지만 이제는 그야말로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다. 웨스턴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젊은이들도 한자리에서 모두 병을 비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위스키를 마시다가 남겨둔 뒤 다시와 마시는 '키핑'(keeping) 문화가 새로운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강남역에 위치한 웨스턴바 '위니바퍼'의 조선희 바텐더는 "최근 1~2년새 고객들의 키핑 비율이 30% 가량 늘어났다"며 "2~3차로 이어지는 술자리보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술을 즐기려는 경향이 확산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관계당국도 2003년부터 주류전문 소매점제도를 도입해 청소년들의 음주를 통제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편의점, 슈퍼마켓 등 일반 소매점포에서 맥주만 살 수 있고 위스키, 소주 등 알코올도수가 높은 술은 사지 못하게 된다. 순한 술을 선호하는 경향이 확산되면서 와인 수요층의 저변도 계속 넓어지고 있다. 최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국내에 수입된 와인 규모는 지난해 총 2000만 달러를 기록해 3년전인 98년의 650만 달러 보다 무려 3 배 이상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헌배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건강을 먼저 생각하는 소비 경향은 주류 시장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같은 추세가 일시적인 유행이라고 보기 힘들다"며 "알코올도수 자체보다는 기능성이나 향기 또는 칼러 등 개성을 중시한 주류 제품이 시장을 선도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