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퀸★단비 http://cafe.daum.net/dododanbi7
17.
[2부의 문이 열렸습니다. 와, 질문이 넘치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2년 동안 방송을 해오면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덩달아 신이 나네요!]
[이 기분 이어서 질문 할께요. 오리씨, 가장 최근에 기뻤던 적이 있나요? 너무 기뻐서 눈물이 찔끔 날 뻔했던 적이요.]
그 답을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오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있어요. 마음이 통한 분을 만난 거요. 제 상황에 대해 알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게 어마어마한 조언을 해주셨어요.]
[아, 그래요?]
[주문을 외우라고 알려주셨어요. Don't Worry, Don't Worry. Yes, We Can.]
딴청 피우고 안 듣는 줄 알았는데 이남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다.
[그 주문 정말 괜찮네요.]
[그렇죠? 흔한 말이잖아요. 그래서 저도 처음엔 뭐야, 했는데, 읊어보니까 좋더라구요. 여러분들도 다 같이 해봐요.]
[그럴까요?]
오리가 힘을 실어 외친다.
[넘어졌어? Don't Worry, Don't Worry. Yes, We Can. Yeah! 실패했어? Don't Worry, Don't Worry. Yes, We Can. Yeah!! 짜증나는 일 생겼어? Don't Worry, Don't Worry. Yes, We Can. Yeah!!]
[어~ 이거 효과 있는 것 같아요!]
[Don't Worry, Don't Worry. Yes, We Can.]
[Yeah!]
어느새 학교 안에서 방송을 듣는 아이들은 오리의 구호에 맞춰 한 목소리를 낸다.
[누군가에게 힘을 얻는다는 건 기쁜 일이에요. 많이 지치고,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함께 고민해주고, 때론 웃게 해주기도 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 건 큰 축복이죠.]
[맞아요. 그렇다면 반대로 최근 가장 슬펐던 적이 있나요? 진짜로 눈물을 펑펑 흘릴 만큼.]
방금까지 들떠 있던 분위기가 약간 숙연해졌다.
카메라를 보며 개구쟁이처럼 표정을 지어보이던 오리의 모습은 사라지고, 진지하고 촉촉해진 오리만 있었다.
목이 메이는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짧은 숨을 내뱉고 입을 열었다.
[제 친구 장원이와 사이가 좋지 않은 거요.]
[아….]
[다퉜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요.]
말이 잘 안 나왔다. 꼭, 생선을 먹다가 가시가 걸린 것 처럼 말이다.
[제 잘못으로 그 친구한테 큰 상처를 줬어요. 화낼 일도 아니었는데……. 사소한 일이었는데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요.]
오리의 눈가가 젖어들기 시작한다.
핏줄이 서며 눈이 붉어진다. 에어컨 공기에 뜨거운 눈물은 차가워진다.
[그 친구하고…, 가장 친한 그 친구하고 말하지 않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가장 슬프구요.]
이제는 목소리에 울음이 찬다.
방송이니까 참으려고 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장원의 시린 빈자리가 느껴져 울음을 막을 수가 없다.
[이 자리에 나오게 된 이유가… 그 친구한테 용서를 빌고 싶어서예요.]
오리는 장원이가 방송을 듣고 있으리라 믿었다.
[미안해, 장원아…….]
오리의 떨리는 감정이 방송 스피커를 통해 퍼져 나갔다.
봄날의 아득한 봄향기가 퍼지듯.
눈물 젖은 목소리가 학교를 장악했다.
[내가 이기적이었어. 너가 진짜 나를 위한다는 것도 모르고 오해하고… 너의 마음 한 번쯤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거… 어리석었던 거… 다 용서해줄래?]
지나가버리면 아무것도 아닐 것을, 왜 그렇게 사사건건 부딪히며 싸우고 목소리를 드높였을까?
친한 친구가 친한 친구에게 화를 내는 건, 어쩌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거다.
‘저 아이는 나를 다시 받아줄 거야,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라는 착각 아닌 착각으로 가슴 졸이면서 화를 내는 거다. 가슴을 졸이면서.
[장원이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 믿어. 나처럼 힘들고, 나처럼 아프고, 나처럼 슬플 거라고 믿어…….]
미술실 소파에 앉아 팔레트에 물감을 짜며 방송을 듣던 장원이는 눈물을 흘렸다. 이제 막 짠 초록색 물감에 눈물이 떨어진다. 깨끗한 팔레트는 투명 무지개색으로 번져가고 있다.
“그래. 나도 그랬어. 너무 아팠어, 기지배야.”
[우리 이렇게 지내지 말자. 나 더 이상 못 하겠어.]
“나도 그래.”
[너 없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애. 너랑 이런 식으로 지내는 거, 너무 불편하고 싫어. 넌 내 영원한 반쪽이고, 난 네 영원한 반쪽이잖아…….]
“그렇지. 반쪽…….”
[우리… 다시 뭉치자. 날 용서한다면……,]
“용서 같은 거 필요 없어, 우리 사이에.”
[이 방송 끝나기 전에… 방송실로 와줄래?]
장원이는 팔레트와 붓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갈색 앞치마도 벗어던지고 미술실을 나섰다.
[4분 후에 뵐께요.]
남자와 여자가 심장을 나눈 사이라면, 친구는 마음을 나눈 사이다.
* * *
미술실은 방송실과 가깝다. 1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음악이 나갈 동안 오리와 만날 시간은 충분했다. 장원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 단 몇 십초만에 방송실 앞에 도착했다. 방송실 앞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부장의 특권으로 장원은 문을 열고 방송실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목에 붙어 땀이 줄줄 흐르지만, 숨이 차지 않는다. 워낙 달리기로 단련되어 있는 몸이다.
방송 부스 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오리가 장원의 눈에 들어온다. 장원이를 아직 못 본 듯 하다. 그 옆에서 조인은 티슈를 갖다 바치느라 마찬가지로 정신이 없었고.
“오리야!”
장원이 부스 문을 열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오리가 고개를 든다. 놀라서 더 울기 시작한다.
“자, 자, 장원아. 으헝.”
앉아있던 오리가 일어나고, 장원은 오리를 껴안아준다.
그동안 꽁꽁 얼어있던 모든 걸이 풀리는 순간이다.
두 사람의 볼은 눈물 길이 되어 눈물에게 길을 내어준다.
꽉 안고 있어 서로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방송부 아이들은 질질 짠다.
평소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는 메마른 조인도 코끝이 시큰거리는 걸 느끼고 훌쩍댄다.
“그만 울어. 그만….”
“내가……, 내가,”
“쉬이잇.”
장원이가 오리의 말을 가로 막는다.
네 마음이 곧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기에…….
굳이 말이 필요 없다.
장원이가 오리를 다독였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두 볼에 들러붙은 눈물을 손으로 서로 닦아준다.
“내가 용기가 없어서, 너한테 하지 못한 말이 있어. 정말로 사랑해, 친구야.”
“나도, 사랑해.”
눈물 겨운 상봉을 이어가고 싶은데, 4분짜리 노래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
“오리야. 방송사고 나면 나 징계 받을 지도 몰라.”
방송부 부장인 장원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마무리 잘 해줘.”
“물론이지.”
“이따 봐.”
장원이 방송 부스를 나갔다. 대신 방송부실 안에 가장 중앙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프로듀서와 나란히 앉아 오리를 향해 파이팅을 날린다.
오리는 그제야 눈물을 멈추고 환하게 웃는다.
회색빛이었던 하루하루가 단박에 분홍빛 하루로 바뀌었다.
사람의 힘이란, 대단하다.
눈물의 장이었던 부스 안은 다시 활기차졌다.
노래가 끝나고 조인이 4분 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이야기했고, 오리와의 토크를 이어 나갔다.
방송부 전용 핸드폰으로 오리와 장원의 화해를 축하한다는 메시지는 쇄도했고, 응원의 목소리가 방송부실까지 넘어 들어왔다.
[오늘 이오리씨와 함께 한 특집방송 너무나 의미 있었고, 즐거웠어요. 오리씨는 어떤 가요?]
[생애 최고의 첫 방송으로 기억할 거예요. 너무 좋았어요! 끝난다는 게 아쉽기만 하네요.]
[어우~ 마지막이라뇨. 또 방송에 출연해주셔야죠.]
[아, 그래도 되나요? 하하하.]
조인이 손에서 절대 떼지 않았던 대본을 내려놓았다. 마지막 질문은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오리가 울어서 살짝 부은 눈을 동그랗게 뜨려고 노력했다.
[오리씨의 인기가 지속될 거라 예상해봅니다. 이 생활을 어떻게 즐기실 예정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기다리고 기다렸던 마지막 질문이다.
이남에게 전해 받은 뜻을 펼칠 시간이란 말이기도 하다.
[제 두 손으로 사랑을 쥐기엔 너무 많은 걸 가졌습니다. 이 두 손에 담긴 사랑을 이제는 나눠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오리가 카메라를 보며 외쳤다.
[저는 저와 뜻을 함께 할 친구들을 모을 생각입니다.]
[아-!]
모두가 뜻밖의 대답에 놀랐다.
[UCC를 정말 신나고 재밌게, 그리고 바르게 이용할 수 있도록 앞장서려고 합니다. 실은 미국 뉴욕 오렌지 예술고등학교에서 도전장이 날아왔어요. UCC로 미국과 한국의 작품 대결을 해보자는 도전장이요. 저는 그걸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어머나, 그런 일이 있었어요?]
[네.]
사실이었다.
얼마 전, 해외 동영상 사이트에 접속한 오리는 쪽지 한 통을 받았다. 미국 여고생이 보낸 것으로 자기 이름과 학교, 주소, 전화번호를 정확하게 밝히고 쪽지를 보낸 이유도 상세히 적어 보낸 것이다.
이름은 그레이스 케린지. 18살 오리와 같은 나이이고, 미국 뉴욕 오렌지 예술고등학교에 재학 중! 현재 학교 치어리더 주장이며 춤과 노래를 사랑하는 백인 여자아이. 졸업하고 연기자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특별히 ‘한국드라마를 좋아한다’고도 했다.
UCC를 통해 오리를 알았고, 대단하다고 느꼈다고….
UCC로 대결을 한 번 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 있으면 쪽지를 달라고 했다.
오리는 케린지의 블로그로 넘어가 케린지가 어떤 아인가 살펴봤다. 그녀의 블로그엔 그녀의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케린지는 아주 예쁘게 생겼다. 긴 금발머리와 푸른 눈이 참 매력적이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사진이 전부인데, 사진을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번지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학교 내에서 클럽 활동하는 사진이 주를 이루었는데, 치어리더 친구들과 함께 한 사진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하얀색과 빨간색 줄무늬로 된 치어복을 입고 브이자로 두 팔을 들어 올려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치어동작을 연습하는 동영상도 봤는데, 실로 대단했다. (그녀의 목뼈에 금이 갈까봐 오리는 가슴을 졸이며 봐야 했다.)
결론적으로 오리는 케린지가 아주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저와 함께 해줄 친구들을 모집합니다. 관심 있으신 학우들은 토요일 날 방과후에 2학년 5반으로 와주세요. 춤, 노래, 랩, 연기 등등 장끼가 있으면 무엇이 되었든 대환영입니다! 그냥 마음 편히 와주세요!]
[우후! 전 단소를 불 줄 아는데,]
조인이 농을 던졌다.
[어떻게 저도 괜찮을까요?]
[Of course! 단소든 리코더든, 할 줄 아는 게 없어도 대환영입니다. 그냥 오세요! 완벽한 사람을 뽑는 게 아니예요. 창조를 하기 위해 모이는 거니까요. 부담 없이, 마음 편히!]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오리씨와 함께 최강고를 뽐내실 분은 토요일 방과후 2학년 5반으로 달려가세요.]
조인이 깔끔하게 멘트를 했다.
더 할 말 없냐는 눈짓을 보냈고, 오리는 됐다고 사인을 했다.
[오늘 이렇게 나와 줘서 고맙습니다, 이오리씨.]
[오늘 너무 행복했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걸 깨닫고 갑니다.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오리가 구호를 외쳤다.
[Don't Worry, Don't Worry. Yes, We Can. Yeah!!]
방송은 성공적이었다. 엄청났다. 보통 대박이 아니었다. 초대박이었다.
방송부는 방송부대로, 오리는 오리대로 좋았다.
방송시간 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 소중한 친구와의 우정까지 되찾았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오리의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하모니였다.
학교는 축제 분위기였다.
방송실 문을 열고 나오자, 방송을 듣고 오리를 응원 나온 아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점심도 안 먹고 방송 했을 거라며 먹을 걸 쥐어 주는 아이들도 많았다.
“언니! 너무 멋졌어요!”
“이오리 최고!”
“방송 끝내줬네!”
“통쾌했어!”
아이들은 오리를 보자마자 달려들며 구호를 외쳤다. ‘Don't Worry, Don't Worry. Yes, We Can. Yeah!!’, 말이다. 아무래도 이 구호가 학교의 전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장원이와 손을 꼭 붙잡고 방송실을 나온 오리는 흐뭇해서 웃는다.
“너무 고마워! 다들 고마워!”
* * *
수업이 끝나고 최강고 학생들의 보호를 받으며 오리는 유유히 학교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방송은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00명도 안되던 방송부 카페는 단 몇 시간 만에 4만 명이 넘는 가입자로 넘쳐났고, 학교 홈페이지는 갑작스러운 접속에 과부하가 걸려 다운된 상태였다.
이미 오리의 방송은 일파만파 퍼졌다. 해외 동영상 사이트에도 영자막까지 깔려 떠다녔다.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오르는 건 일도 아니었으며, 오리의 방송 관련 인터넷 기사는 포털사이트 메인을 장식했다.
이진기 해명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다 지쳐 선수 친 오리의 첫 방송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방송 한 방이면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겠지 생각했는데, 오히려 기자들은 오리라는 여학생에 대해 더 큰 호기심이 생겼다. 취재하고 싶어서 안달이나 수업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경비 아저씨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교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허나 불행하게도 기자들은 땀 찔찔 흘린 고생의 보답도 못 받고, 오리의 얼굴을 볼 수 조차 없었다.
바로, 최강고 아이들 때문에.
교복을 입은 군사들이 얼마나 강한지 기자들은 깜짝 놀랐다.
지훈의 농구부 후배들과 오리 보호하기에 자진 동참하겠다고 나선 최강고 아이들이 오리를 둥그랗게 감쌌다.
기자들의 취재 경쟁에 말려들지 않고 교문을 통과할 수 있게 구령을 맞춰 학교를 빠져 나왔다. 오리는 학교 아이들에게 감동받았고, 너무나 고마웠다.
오리와 그녀의 친구들이 안전하게 버스에 탈 수 있게 도와주었다.
기자들에겐 틈이 없었다.
오리는 2학기 들어 처음으로 평온하고 행복했다.
늘 위(胃)가 긴장해서 신경세포가 삐죽 삐죽 서서 아팠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다.
편안한 마음으로 지훈이와 장원이, 달래, 미소와 함께 오리는 왕자네 빵집으로 향했다.
이오리, 김장원 재회 기념 파티를 하기 위해서.
지훈이네 어머니는 언제나 자상한 미소로 아이들을 반긴다. 지훈의 온화한 심성이 분명 어머니를 닮은 것이리라.
미아가 되어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며 부모를 찾아주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따뜻한 행동, 할머니의 무거운 짐을 들어달라고 말도 안 했는데 먼 동네까지 옮겨다 주는 지훈의 어진 행동들은 분명 돈을 생각하기보다 정을 베푸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늘 지훈이네 빵집은 마이너스였다.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많았다. 욕심도 없고 악착같은 면도 없었다. 이는 지훈의 어머니 방침이었다. 베푸는 것이 진정한 풍족함이라 여겼다.
가장 넓고 좋은 테이블에 앉은 오리와 아이들 앞엔 가장 맛있고 큰 생크림 케이크가 놓였다.
만들지 얼마 되지 않은 지훈의 어머니 작품이었다.
사르르 녹을 것만 같은 생크림 위엔 보기 좋게 붉은 색의 딸기, 주황빛의 귤, 초록색 키위, 갈색 초콜릿, 핑크빛 체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소고기가 들은 샌드위치, 꽃모양 쿠키가 테이블을 가득 메웠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것처럼 들떴다.
“이오리, 김장원의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이오리의 프로젝트를 위하여!”
시원하고 하얀 우유가 담긴 투명한 우유잔을 천장 위로 솟아 올렸다. 하얀 교복 셔츠와 우유는 잘 어울렸다.
허겁지겁 먹을 필요가 없었다. 이들 앞에 놓인 케이크는 엄청 컸으니까.
“잘 먹겠습니다!”
모두들 지훈의 어머니께 감사 인사를 했다.
지훈이 접시에 케이크를 잘라 주자, 아이들은 은빛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조인이 기지배, 오늘 같은 날은 과외 좀 빠지면 안되나? 이 언니들이 견우와 직녀처럼 운명적으로 만났는데!”
장원이 말했다.
“그 과외가 하루에 100만원이 넘는다잖어.”
달래의 말에 미소가 손을 젓는다.
“아니야. 다른 이유가 있어. 과외 선생이 자기 타입이래.”
“으~ 여우~”
어찌 보면 조인이는 동네북 같다. 그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미우나 고우나 친구라는 것이다. 잘난 척 할 때만 빼면 말이다! 특히 돈지랄!
“그래도 조인이 오늘 진행 잘 했어.”
“무슨 소리야. 오리 네가 잘해서 걘 거저먹은 거지. 내가 써준 질문지를 잘 읽은 것뿐이라고.”
“조인이 옆이라 떨리지 않았어.”
아이들이 오늘 있었던 점심 방송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다.
오리에겐 칭찬을 조인에겐 비난 작렬이다.
달래와 미소는 반에서 컴퓨터로 연결해서 봤는데, 조인이 얼굴이 너무 커서 부담스러웠단다.
오리로서는 좋은 일이지, 뭐.
“너 울 때 나도 막 울었잖아.”
“달래가 통곡을 했어.”
“미소 너도 울었잖아.”
“너보단 덜했지. 난 콧물까진 안 흘렸어.”
“안 우는 게 이상해. 난 감수성이 예민해서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난다구.”
“낙엽 굴러가면 웃어야 되는 건데?”
“뭐가 됐든.”
쿨한 달래가 말하고 까르르 웃는다. 여고생들의 웃음 소리는 빵집을 생기 있게 만든다.
빵을 고르던 중년 부부도 그 웃음 소리에 같이 웃는다.
“장원이 너 얼굴이 쏙 빠졌어. 알아?”
오리의 말에 장원이 히죽거리며 자기 얼굴을 한 손으로 비빈다.
“마음고생 좀 했지, 뭐~”
“바보. 나 보란 듯이 살이 쪄야지!”
“나 너랑 좀 더 떨어져 지내야 할까봐.”
장원이 장난끼 가득해서 말한다.
“얘가!”
“너랑 떨어져서 점심 먹으니까 살이 쑥쑥 빠져. 입맛도 없고. 다이어트 스트레스도 안 받고 살 빠져보긴 난생 처음이야.”
“안되겠다. 오늘부터 김장원 살찌우기 돌입이다!”
지훈이 마침 잼과 밀로 만든 식빵을 가져왔다.
오리는 지훈이 만든 일명 ‘오리잼’을 자랑하며 얼른 식빵에 잼을 발라 장원이 입에 넣어주었다.
“우리 지훈이가 직접 만든 잼이야. 내가 오늘 특별한 날이라 주는 거다.”
장원이 맛을 보더니 ‘오!’하고 감탄한다.
“맛있지?”
“응! 잼 맛 끝내주는데?”
장원이 지훈이를 향해 엄지를 치켜든다.
“그렇지? 이거 지훈이가 날 생각해서 만든 거다~”
오리가 자랑을 하며 바쁘게 식빵에 잼을 발라 달래와 미소도 나눠준다.
남자친구를 만들고 싶어도 눈이 너무 높고, 남자친구가 될 만한 인물을 학교에서 찾기도 힘들고, 인물이 반반한 남자애들은 왠만해선 모두 여자친구가 있다며 늘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달래와 미소가 부러워서 난리다.
“좋겠다, 좋겠어. 오리 입이 찢어지네, 찢어져.”
“나도 나한테 잼 만들어주는 남자친구 있었으면 좋겠네.”
“김지훈. 네 주변에 너처럼 잼 만드는 남자애 없냐?”
달래의 엉뚱한 질문에 모두들 폭소한다.
지훈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든다.
“아이고. 내가 혼자라도 해먹어야 겠다.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비법 좀 전수해줘.”
지훈이 알았다며 입술을 연다.
“간단해.”
“어서 말해봐.”
“오리를 향한 사랑만 있으면 돼.”
“윽.”
초절정 닭살 멘트에 오리 빼고 세 아이들은 속을 게워내는 시늉을 한다.
오리는 지훈을 사랑스럽게 쳐다본다.
“로맨틱한 대사였어, 지훈아. 레시피는 이오리. 음~ 너희들은 절대 못 만들 걸~”
똑같다, 똑같아.
어쩜 이 커플 이리도 닮았냐?
얄미운 것들.
달래는 우유를 벌컥 벌컥 들이켰다.
미소는 태연한 척 하며 말한다.
“난 이진기랑 사귈 거야.”
“얜 또 뭔 소리야? 방금 너희 두 사람 닭살에 얘 더위 먹었어. 어쩔 거야?”
“나 더위 안 먹었어, 진달래!”
미소가 팔꿈치로 달래의 옆구리를 툭 친다.
“우리 담임한테 이진기랑 데이트하게 해달라고 할 거네요~ 이게 더위 먹은 거라고 생각해? 충분히 실현 가능한 꿈이란 말이야.”
“장원이랑 오리는 선생님하고 딜을 한 거고. 넌 딜할 게 없잖아.”
“만들면 되지, 뭐가 문제?”
오리는 그 날이 떠오르며 미소를 말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은 더 안달이 나는 법.
그냥 두는 편이 상책이나 싶어 놔뒀다.
오리는 신이남이 생각났다. 지금쯤 쫓기고 있는 신세가 되었을 거다.
안됐다.
방송에서 이진기와 각별한 사이임을 밝혔기 때문에 여자 선생님들한테는 인기를 얻을 테고, 남자 선생님들한테는 이유 없는 매서운 눈초리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전교생, 아니, 전국민은 이진기 만나게 해달라고 이남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남 걱정 해줄 때가 아니지.
담임은 분명 즐기고 있을 거다.
오리는 금방 이남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장원이 너 그 날 나 진짜 미워서 안 나왔지?”
오리는 꽁- 하고 묻어놨던 궁금증을 풀어놨다.
“나 꼴보기 싫어서.”
“아니야, 얘!”
장원이 강하게 부정했다.
오리의 마음이 놓인다.
“진짜야?”
“응. 그 날 나도 너랑 이진기 만나고 싶었다구. 근데 더 바쁜 사정이 있었어.”
“말해줘.”
“내 일이 아니라서 아직은 말하기 그렇다. 나중에 다 말해줄게. 기다려줘.”
“알았어.”
장원이가 곤란해지는 게 싫어서 오리는 캐고 싶은 걸 멈췄다.
“더 이상 안 물어볼게.”
비밀이 없는 사이니, 때가 되면 말하겠지.
오리는 자세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영원이와 관련된 일일 거라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사실 너 안 나오길 잘했다 싶더라구. 너에게 이진기는 완벽한 슈퍼스타잖아.”
“완벽하지 않았니? 설마, 네 앞에서 코팠니?”
“아니~”
“그거 아니면 됐어.”
달래, 미소, 장원이 모두 안심하는 표정이다.
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특별히 실망한 것도 아니고, 이진기가 실망할 만한 짓을 하지도 않았지만, 여고생이 바라는 인기배우는 신비한 베일에 감싸여져 있는 고귀하고 완벽한 드라마나 영화 속 왕자여야 한다.
과묵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 이슬만 먹고 살 것 같고, 눈빛 한 방으로 여자들을 죄다 쓰러뜨리는 남자 말이다!
이진기의 드라마 ‘빛의 눈물’을 열렬하게 시청했던 팬이라면 더더욱! 그가 말 많은 아줌마 타입이라는 걸 알면 안된다.
오리가 봤을 때 그는 재치 넘치고, 소탈하며 여성스럽다. 그런 면은 드라마에서 보던 모습과는 다르게 귀엽게 느껴진다.
하지만 썰렁한 농담으로 사람을 얼게 만드는 걸 좋아하는 여고생이 몇이나 될까?
이해심 없고 환상만 너무 큰 애들이 이진기를 만나면 그 부분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밥을 족히 3공기는 비워야 할 것이다.
“그 날 난 고생한 거 밖에 기억 안 나.”
“잘생겼잖아. 눈 호강한 거지.”
“얼굴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 선글라스 낀 남자하고 내내 있어봐. 그래도 좋겠나.”
“그 우수에 젖은 눈빛을 못 본 게 아쉽긴 하겠다.”
“입술이랑 코는 봤으니까 그냥 감사해.”
태평하고, 이진기의 환상이 큰 아이들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여기 김지훈씨 계십니까? 퀵서비스 입니다!”
빵집 문이 열리며 지훈을 찾는 퀵서비스 기사 아저씨가 안으로 들어와 쩌렁 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지훈은 자기 이름을 부르자 자리에서 일어나 퀵서비스 기사 앞으로 갔다.
“김지훈씨 맞으세요?”
“네.”
“여기요.”
기사 아저씨는 큰 상자를 지훈에게 안겨주었다.
“여기다 사인 해주세요.”
뭐지? 다들 궁금하여 목을 빼었다.
지훈이 사인을 하고, 기사 아저씨는 바로 빵집을 나갔다.
선물상자를 품은 지훈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뭐야? 누구야?”
“주소는 없는데.”
“빨리 풀어봐. 궁금하다.”
지훈은 체크무늬 겉포장을 뜯어내었다.
포장이 벗겨지고 사각상자의 겉 표면이 드러났는데, 명품 정장 브랜드 마크가 붙어있었다.
상자 뚜껑을 열어보고는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곱게 접혀진 검은색 정장 세트, 그 위에 나비 넥타이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연한 아이보리색 초대장이 있었다.
지훈은 우선 초대장을 꺼내 읽어보았다.
고급스러운 초대장은 파티 초대장이었다.
우아한 금색 테두리가 물결을 놓는 중앙 가운데 궁서체로 검은색 글씨가 박혀있다.
『 금요일 저녁 7시, 골드 호텔 야외 잔디 홀
영화 ‘당신입니다’ 500만 돌파 기념 파티에 귀하를 초대합니다. 』
당신입니다……라면, 유별이다.
지훈은 초대장에 껴있던 핑크빛 종이도 읽어보았다.
「내 영화 성공 축하파티야. 너가 내 파트너가 되어줘. 이 파티에 와주면 미련 없이 이오리한테 널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내 추억의 마지막을 장식해줘. 꼭 와줘, 지훈아.」
지훈이 오리를 바라보았다.
오리도 지훈을 바라보았다.
……초대를 했어.
유별은 정말 별로에요-_-
재미있어요
지훈이는 오리꺼맞죠??ㅎㅎ
유별 왜 그렇게 사니?ㅜㅜ
헐헐헐헐 그러면 기사들이,,,,,,,,,,,,,,,,,,,,,,,,,,,,,,,,,,,,,,,,,
파티장에서 유별이 뭔 짓을 할 것 같아.
난 은근히 유별한테 끌린다.
유별이 싫어요!!
,...... 유별이 지훈이 여자친구가 오리라는 걸 알면서도 초대를...
유별 나쁜애같지는 안은데 흐음 어쩔생각인거지?
음.. 진짜로 가면 오리한테 보내줄려나? ㅎㅎ
완전 우정물에 가까운것같아요. 재밌네요
뭔가 꾸미는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별은 오리와 친구하고싶어하닌깐.. 그렇게 심한건 아닌거 같아여 ㅋㅋ 난 별이 안쓰럽던데 ㅋㅋ
난왠지싫으면서도 은근히유별이끌리는것같아요
정말... 손에 땀을 쥐게한 진행이였어요!!
과연지훈이의선택은
지훈이는 과연 누굴 ?
오리 방송잘하는데요 +_ +
유별...머야 갑자기 껴서는.... 친해지고 싶다면서..오리는 초대안하나???ㅋ
유별....좀...오리 어쩔????오리랑 같이 파티가면 안되나???오리를 이뿌게해가지궄ㅋㅋ
유별이도 잘됐으면 하는데...
별아 이제그만 오리를 나줘 너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
이고 은근 무서운 예감이 .....
에구...지훈이가 어떻게 할지 궁금하네요...ㅠ_ㅠ근데 지훈이 너무 멋있어요!>_<
이남쌤이랑되는거아니에요? 왜 지훈이를계속조아해요?ㅜ.ㅜㅋ
뭔가 불안함이 엄습하는데...ㅠ
난 유별 좋은데..ㅠㅠ 얘도 불쌍한 아이잖아,,ㅋ 오리랑 친구됐으면~
난 시러 !!!!!!!!!!!
아 유별이 좀 착한것같은데....제발 나쁜짓만 안하기를 ㅠㅠ
오리랑 친해지고싶단거 아니였나;;;유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