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팝니다
강순희
rjfma6@hanmail.net
D 지하 쇼핑몰로 들어서자, 음악이 발길을 잡아끌었다. 나나 무스쿠리의 ‘오버 앤드 오버’ 올드 팝이다. 청아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는 선율은 왈츠 리듬에 실려 가슴을 울렸다. 제목처럼 거듭거듭 듣고 싶은 귀에 익은 노래는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지하상가에서 ‘M 레코드’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큰 시장 쪽으로 길을 건너려고 계단을 내려왔다가 알게 된 곳이다. 하늘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지상의 블랙홀 같은 큰 시장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주변은 팔고 사는 사람과 행인들이 뒤엉겨 늘 북적대는 곳이다. 반면 동서로 길게 뻗은 지하상가는 여성 옷 가게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나이 든 아주머니 몇이 단골 가게를 찾아올 뿐 한산한 편이었다. 레코드 가게와 가까운 벤치에는 노인들이 앉아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쉬고 있었다. 번잡한 큰길 아래, 일부러 찾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공간에 음악을 파는 집이 있었다. 기다림에 익숙한 할아버지 사장님은 말없이 앉아 세월을 낚고 있는 듯 보였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아마 손님만은 아닐 것도 같았다.
얼마 뒤 다시 그곳을 찾았다. 다른 가게는 미처 문을 열지 않은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그는 가게에 나와 있었다. 지하상가 입구와 가깝고 갈림길의 코너에 있어 목이 좋은 자리였다. 그는 유리문을 통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훤히 보이는 곳에 앉아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자세가 꼿꼿한 백발의 그는 셔츠 위에 재킷을 단정히 입고 편안해 보이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나는 주로 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 편인데 원하는 시디를 사는 일이 쉽지 않았다. 책, 음반, 팬시류를 파는 대규모 매장에서는 유명 아이돌의 앨범만 눈에 띄었었다. 드디어 이곳에서 듣고 싶었던 음악 시디 몇 장을 샀다. 그는 USB보다 시디가 음질이 좋다며 귀띔해 주었다. 영수증에 나와 있는 ‘M 소리사’라는 상호가 시선을 끌었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음악에 대해 모르면 장사를 할 수 없다고 하며 시원시원하고 능숙하게 손님을 대했다. 그새 사장님과 친해져 궁금한 것을 더 물어보았다.
원래는 큰길 건너 D 은행 옆에 있다가 지하상가로 옮겨왔다고 했다. 요즘 장사가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임대료 내기도 어렵고 수지가 맞지 않아 대부분은 사라졌단다. 고속도로 휴게소와 리어카로 음반 시장이 옮겨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축음기 시절부터 음반 판매와 관련된 일을 해 왔단다. 고향을 떠나 여든일곱이 될 때까지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레코드 가게는 지금도 열려 있다.
“살다 보니 세월이 그리 흘렀네요.”
툭 내뱉는 한마디에 그의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연세에 비해 젊고 건강해 보이신다고 했더니 건강을 위해 소일거리 삼아 유지하고 있을 뿐, 가족력 탓에 지병이 있어 많은 종류의 약으로 버틴다고 했다.
가게 안을 빙 둘러보았다. 수많은 LP, 시디, USB가 벽의 수납장과 바닥의 진열장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중년에게 인기 있는 유명 트로트 가수들의 포스터도 여기저기 붙여 놓았다. 세 층으로 쌓아 둔 음악 재생 장치는 시디플레이어와 전축인 듯 보였다. 유리문 한쪽을 차지한 기타는 음반 가게임을 알리는 상징이 되어 멋스럽게 걸려 있었다. 가게 밖 높은 곳에 걸린 두 개의 스피커는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적당한 볼륨의 음악을 쏟아내고 있었다. ‘M 레코드’라 적힌 예스러운 간판은 멈춘 시곗바늘처럼 세월을 비껴가 버렸다. 닳아서 반들반들한 몇 개의 나무 의자가 마주 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번씩 바꾸어 앉으면서 지루함을 조금은 덜어낼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의자는 주워 온 거라고 굳이 얘기하신다. 원목이라 단단하고 아직 쓸 만했다. 여든일곱 어르신이 출근, 퇴근을 반복하는 일터,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그곳이 있어 음악이 주는 위로를 누릴 수 있었다.
음악의 힘은 대단하다. 한 곡을 듣고 나면 다음 곡이 시작되기 전에 그 노래의 반주가 먼저 떠오른다. 음악은 몸에 흡수되고 나이테처럼 기억 속에 흔적으로 남아 어느 순간 밖으로 뿜어져 나오나 보다. 화려한 무대 장치와 영상 없이 오직 가수의 목소리에 집중해서 노래를 들으니 각기 다른 음색이 오롯이 드러난다. 짧은 노래 한 곡에 담긴 드라마 같은 긴 얘기를 그려내는 그들의 감성과 표현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디지털 음원 시대에 턱없이 뒤처지지만, 발품을 팔아 사들인 좋아하는 노래 몇 곡으로 가을 내내 행복할 것 같다.
◎ 2018년 《수필춘추》등단/ 상록수필문학회 회원/ 대구수필가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