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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현대선교 흐름의 시작
15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에서부터 근대에 이르는 기간의 선교는 개종과 문명화에 초점을 맞추었고, 선교의 주체는 기독교국가의 국왕, 교황, 영주, 교회, 선교회였다. 이 기간 선교의 목표는 개척된 식민지 사회를 서구의 국가와 같이 기독교화하는 것이 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때가 그들에게 주어진 선교에 가장 중요한 시기이고 비기독교국가를 기독교국가로 만드는 핵심적인 과제를 선교가 담당하게 된 것으로 인식했다. 당시 선교의 이해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으로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표어가 있다. ‘이 세대 안에서 세계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generation)’. 그래서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근대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므로, 자원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할 기독교인의 의무로 교인들에게 받아들여졌고, 선교의 주도권이 교회와 선교사에게 있음을 모두 당연시 여기던 시기였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국가(Christendom) 교회는 선교를 위해 기독교국가가 가진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강점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선교에 있어서 복음을 받는 사람의 필요나 요청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책임을 강조하고, 선교를 위한 여러 수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선교현장의 사회와 문화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선교는 기독교 사회와 문화를 선교현장에 이식하는 모습으로 발전했다. 선교지에 서구식 교육체계, 의료보건, 종교와 법률과 같은 것으로 선교지를 변화시키기 위해 선교사는 사역에 많은 노력을 했다. 이런 선교에 대한 생각의 이면에는 서구사회와 문화는 기독교를 대표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존재했다. 그래서 선교 사역의 필요성과 진행 정도를 논의할 때 한 예로 서구화에 대한 진행 정도를 말하기도 하였다.
1. 세계 정치지형의 변화와 세계선교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까지 진행된, 근대 기독교국가 교회의 선교는 제국주의적 선교, 가부장적 선교, 자문화 중심주의적 선교였다. 이런 선교 모습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5년부터 1969년까지 기독교국가 혹은 서구국가의 식민통치를 받은 국가 중 99%가 독립을 하게 된다. 독립 후 신생국가들에서 나타난 종교 현상은 식민통치 이전의 과거 토착 종교가 다시 부흥하였고, 기독교는 부흥하는 다른 종교 가운데 소수의 종교로 전락하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다른 종교들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기독교 선교가 진행되었고, 근대 선교에 있어서 사용한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 여러 선교의 수단들을 사용할 수 없거나 힘이 약화되어 선교현장에 동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기독교국가 혹은 교회가 중심이 된 선교가 아니라 기독교 선교가 필요한 선교지 교회가 중심이 된 선교로 변화된 것이다. 선교의 행정과 진행에 있어서, 파송의 중요성은 약화되고, 선교와 선교사 수용이 강조된 선교로 변한다. 기독교국가 혹은 서구 국가로부터 식민지 국가가 독립하기 전에는 선교의 중심은 기독교국가 혹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교회-선교회였다. 식민지 국가의 독립은 식민지 국가의 교회가 기독교국가 교회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서구 기독교국가 교회의 종속이 아닌 자치의 교회로 발전한다. 그래서 선교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나 선교사를 파송에 관한 권한이 기독교 국가에서 선교지의 독립한 교회로 이관하게 된다. 그래서 독립된 식민지 교회는 선교사의 입국이나 출국에 관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게 되고, 선교에 있어서 필요한 선교사의 비자 문제나 선교사역지 배정문제 그리고 재산권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 선교사를 파송한 국가와 교회의 권한을 강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독립한 식민지 국가와 교회는 이전 기독교국가 교회와 선교회가 소유하고 운영한 자산을 국유화하거나 독립한 교회의 소유로 만들었다.또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종교적인 상황변화와 함께 국가사회의 시스템 변화가 일어난 국가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추종한 것은 마르크스의 이념이고, 국가체계는 공산주의 국가였다. 이들은 기독교를 국가의 통제 안에 두고, 기독교를 공산주의 국가의 통치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것은 그동안 진행되어 온 세계 선교에 대한 단절로 이어졌다. 중국을 예로 든다면 1954년 미국장로교회의 선교사 중 동아시아에 333명이 사역을 하였지만, 공산화가 이루어진 후 중국에서는 한 명의 선교사도 없었다. 공산화 이전에는 미국장로교회가 가장 많이 선교사를 파송한 아시아 국가는 중국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에 교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교회는 중국정부에 귀속되고 자립과 자치의 기준에서 통제된 교회로 공산주의 사회의 조직으로 존재하며 외부의 선교나 교회와 단절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세계의 정치지형 변화는 16세기부터 진행되어온 세계선교의 목적과 전략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는 기독교가 소수의 종교로 선교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B. 선교의 패러다임 변화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2년 독일 빌링겐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에 관한 독일어 보고서에서 칼 하르텐슈타인은 그동안 진행되어 온 선교에 대한 새로운 선교개념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언급한다. 칼 하르텐슈타인은 선교가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그 아들을 보내심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은 하나님 안에 있는 (성자, 성령)하나님을 세상에 파송하고,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주권을 세우시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전까지 선교신학은 철저히 성자 중심의 신학이었다면 하나님의 선교가 등장함으로 인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로 정리된다. 그래서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의 일부로 인식하게 되었다. 곧 선교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시작되며,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피조세계에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그동안 진행되어 온 교회 중심 선교를 비판한다. 교회는 독자적인 선교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에 가시적이고 실천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완성되어야 한다. 곧 교회는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는 것에 쓰임 받는 존재이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성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에 관해서 교회보다는 세상을 우선순위에 둔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구원받은 공동체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사명을 주신 교회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선교는 교회의 활동에서 하나님의 활동으로 정의되었고, 교회는 세상의 요청과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며 현재 나타난 현상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역사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선교는 단순한 개인의 전도에 대한 관심에서 전체 인류사회의 문제에까지 포괄적인 이해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하나님의 선교 이해는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주제 논의와 운동의 범위에 영향을 주었다. 단순히 교회의 틀에서 진행되는 복음과 전도의 문제에서 세계와 인류에 대한 인간적인 모든 문제를 선교의 주제로 다루게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모든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모든 영역이 선교의 영역이 되었다. 또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의 절대적인 배경을 성경에 두고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게 된다. 곧 성경은 하나님의 선교로 인해 우리에게 전달되었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교하심에 대한 예언과 실현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이 조명되었다. 그래서 선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의 원천은 성경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경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내용과 사실은 오직 한가지 하나님의 통치와 일하심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선교는 성경을 문학적, 문화적 관점에서 읽기보다는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하심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세계와 역사에 하나님을 어떻게 나타내시는가 하는 것으로 읽고 이해한다. 선교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선교의 범위와 내용, 성경의 중요성 등에 있어서 기독교 국가 안에 존재하는 교회들에 있어서 선교적 교회 운동의 배경이 되었고, 현재 선교의 특징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 되었다.
II. 변화하는 세계와 기독교 선교 상황
1. 위기와 기회 사이에 놓인 선교
지난 20세기 중반까지의 비기독교 국가에서 서구선교에 대한 비판적 저항은 모라토리움(Moratorium, 선교유예 혹은 한시적 선교활동 중지)과 세속화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또 기독교에 공격적이며 적대적인 비기독교 종교의 성장, 반기독교 정서의 증대, 종교다원주의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기독교국가의 선교 위기는 서구교회와 신학의 위기와 맞물려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와 신학과 선교에서 일어난 위기의 각 요소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했다. “기독교 선교 활동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가? 만약 있다면 오늘의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 전개되어야 하는가?” 1958년 가나 국제선교대회(IMC)에서 강사 중 한 명이었던 발터 프라이탁(Walter Freytag)은 “지금까지는 선교가 문제를 가졌으나 이제는 선교 그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라고 진단했다. 이후 선교 과제, 방법, 전략과 정책만이 아니라 선교가 무엇인가라는 선교이해 자체를 논의의 핵심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이러한 서구교회와 선교의 위기를 가져온 요소를 6가지로 분석한다.
➊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전세계에 퍼진 세속화로 현대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➋ 천 년 이상 기독교의 보금자리처럼 여겨지며 선교사업의 기지였던 서구에서의 탈기독교화 현상이다. 데이비드 바렛의 통계에 의하면, 1982년 당시 유럽과 북미에서 평균 5만 3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마다 지속적으로 교회를 떠나고 있다.
➌ 세계는 더 이상 기독교 지역과 비기독교 지역으로 양분할 수 없는 다원화 현상을 보인다. 서구의 탈기독교화와 타종교인들의 대규모 이민과 선교로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세계가 나타났다. 타종교에 대한 이해를 재검토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➍ 서구 혹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제3세계에 대한 정복과 착취에 공모한 역사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종종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벧전 3:15) 능력이나 의지를 잃게 된 점이다.
➎ 오늘날 세계가 부자와 가난한 자로 양분되어 있으며 대체로 부자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가난한 자들에 의해 그렇게 간주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대해 분노와 좌절을 가지며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전파를 꺼리게 된다고 한다.
➏ 이제는 전통적으로 피선교지로 간주되던 제3세계 교회들이 서구신학과 교회의 관례들을 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자율성을 강조해 왔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서구신학은 제3세계 신학으로 대체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서구교회 자체 안에 큰 불확실성을 심어놓았고 기독교 선교의 타당성에 대한 불확실성도 가져왔다.
이러한 비판과 저항 그리고 세계선교의 위기와 함께 세계선교의 기회도 새롭게 도래하였다. 예를 들면 이민, 이주, 유학, 취업, 난민 등으로 인한 인구증가와 인구이동이 그것이다. 이런 급증하는 인구의 이동은 선교와 선교지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였다. 러시아, 몽골, 캄보디아,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선교의 문이 열렸고 이것이 복음전파의 기회를 가져왔다. 선교의 새로운 기회는 제3세계에서 나타났다. 근대의 선교세계 구분은 기독교국가와 비기독교국가로 나누었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 파송된 선교사가 사역하는(선교사를 받아들이는) 국가로 구분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과거 선교사를 받아들였던 국가들인 제3세계국가가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과 사역하는 것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선교의 위기, 즉 위험과 기회는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
2. 세계기독교와 선교의 구심점 이동
기독교 선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일컬어지는 기독교 중심축의 이동과 세계선교의 구심점 이동은 21세기 선교의 가장 큰 흐름이다. 이제는 ‘세계기독교(World Christianity)’ 혹은 지구촌교회(Global Church)라는 말이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세계기독교란 하나의 통일된 조직체와 획일적인 기구적 통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계기독교는 다양한 상황에 부닥쳐 있는 세계의 모든 지역교회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고려하며, 특수성과 보편성의 창조적 긴장 관계 속에서의 선교를 모색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선교신학과 실천은 이전까지의 서구 중심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남반구 교회들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신학적인 주제나 용어와 주장을 남반구 교회들이 주도하거나 남반구 문화와 역사의 경험에서 통찰력을 얻어 신학화하고 있다.
이러한 추진력과 영감의 실례로,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는 그의 책 『벽을 넘어 열방으로』에서 페루 중앙고지의 한 복음주의 교회가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선교사를 파송한 일을 소개한다. 그리고 볼리비아에서 독일로 이민 온 한 여성이 하노버 근처의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교회에 다니면서 그곳으로 직장을 찾아서 온 한 청년을 전도하여 마침내 목사가 되게 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제 기독교 선교는 전세계 모든 교회의 공동책임이 되었다. 테오 순더마이어(Theo Sundermeier)는 남미의 상황과 문화를 신학화 하는 콘비벤츠(Konvivenz)를 설명하며, 2006년 2월에 있었던 WCC 제9차 총회에서 ‘총회장 밖의 총회’인 무찌라오(Mutirao)에서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고 말한다. 무찌라오란 말은 포르투칼어로 ‘만남의 장소’ 혹은 ‘공동사역’이라는 뜻인데 일종의 박람회와 같은 것이었다. 무찌라오는 총대와 옵서버들 외에도 모든 참가자가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해하고 나눌 수 있는 열린 광장을 제공하는 모임의 기능을 하였다. 이를 통해 전세계교회들의 경험과 목소리가 교환되었다. WCC는 이를 위해 2,300명의 사람을 무찌라오에 초대하였다. 회원교회와 에큐메니칼 기구는 자신들의 선교 과제와 이슈들을 거리, 전시장, 강당과 교실에서 워크숍, 세미나, 부스, 예술공연 등을 통해 나타내었으며 250개 이상의 모임이 열렸었다. 그때 무찌라오 모임에서 한국교회는 한반도 통일문제와 한국교회의 노력을 표현하는 부스를 운영하였으며 전체 무찌라오에서 다섯 명의 한국인 대표가 강연 및 발표를 하였다.
3. 아래로부터의 선교
뷜만은 ‘제3의 교회’의 특징을 말하며 ‘제3의 교회’의 태동이 가지는 희망은 ‘제1의 교회’의 ‘예배형식 유지’와 ‘교권적 폐쇄주의’도 아니고, ‘제2의 교회’의 ‘기독교왕국’의 회복도 아닌 인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부활의 소망’을 불러일으키려는 데 있다고 평가한다. 뷜만의 ‘제3의 교회론’에 따르면 21세기 기독교의 미래는 제3세계에 달려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무엘 에스코바가 지적한 또 다른 선교군단의 등장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비록 선교활동 보고서도 없고 선교 전문가 명단에 등재되어 있지도 않은, 신약시대 무명의 복음 전도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복음의 전파와 확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명성도 돈도 없으며 선교기관에 속하지 않은 가난한 사람, 이주노동자, 이민자, 난민 등의 “아래로부터의 선교사”에 의해 선교가 크게 진보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선교모델이고 성령의 권능 아래의 자발적인 교회 확장이다. 오늘날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이런 자발적인 복음 확장이 있는 것과 최근, 특히 가난한 도시 군중 속에서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강하게 나타난 것들은 아래로부터의 선교가 성령의 역사임을 입증한다. 물질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또는 기술적인 전문지식과 자원이 없지만 ‘역사와 전통이 없는 자들의 비전’에 따라 놀라운 선교역사가 새롭게 쓰이고 있다.
4. 선교의 ‘프리웨이’(freeway) 혹은 ‘멀티웨이’(multiway) 시대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선교현장은 지역적으로 확실하게 구분되었다. 서구지역은 선교사를 파송하며 선교하는 지역으로, 비서구지역은 선교현장으로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지역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서구교회의 쇠퇴와 제3세계 교회의 성장으로 이러한 구분은 의미를 잃어버렸다. 1963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CWME(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선교대회의 선교적 주제는 “6대륙 선교”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서구선교사만 아니라 제3세계 출신 선교사도 선교에 동참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19세기까지의 식민주의 개척시대의 오지나 멀리 이방 땅만 선교지로 보던 관점에서 소위 안마당인 서구도 선교지로 볼 수밖에 없는 의식전환도 표현한다. ‘모든 곳이 선교지이고 모든 사람이 선교사이다.’는 주장이 등장한다.지난 1966년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전도대회(Berlin World Congress on Evangelism)에서 존 스토트가 말한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선교하자”는 외침이 선교현장에서 실천되어야 할 때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고전적인 마태복음 28장 18-20절 본문이 아니라 그동안 거의 간과하고 있던 선교위임 본문인 요한복음 20장 21절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선교명령을 일방적으로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동역자가 됨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으로 고안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추진해가는 선교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북반구 교회와 남반구 교회는 서로 선교사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서로 재정적이며 영적인 자원을 공유하고 나누며 섬길 수 있어야 한다. 남반구 교회 간의 상호선교도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이제 전세계는 선교지이며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사를 받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파트너십을 실현해야 한다.
5. 새로운 선교 전략 모색
기독교의 중심점 이동과 더불어 세계선교의 구심점이 이동했다고 해서, 서구의 선교가 완전히 죽었다거나 인적·물적 자원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미 50여 년 전 ‘6대륙 선교’가 언급되었고 ‘6대륙에서 배출되고 6대륙에 배속’되는 선교사 시대가 제기된 것은 선교라는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볼 것과 전세계교회의 통전적 선교를 제시한 것이다. 제3세계 교회들의 선교참여를 ‘떠오르는 선교’라고 표현하여 오늘날 제3세계 교회의 선교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게 한 사람은 로렌스 키이즈(Lawrence Keyes)이다. 그는 “선교운동의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세계복음화의 초점이 제3세계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면서 제3세계 교회들의 선교가 급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여 년밖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장구한 서구교회의 선교역사에 비하면 아주 시작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축이 남반구로 옮겨가고 있고, 기독교 선교 중심축의 이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전세계를 향한 선교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성공을 하려면 북반구와 남반구의 자원이 함께 동원되어야 한다.
6. 세계화와 선교
교통, 통신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화 사회 구축과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 등으로 세계는 하나의 시장 체제화로 변하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의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구조로 세계화하고 있다. 냉전시대의 지배적이었던 군사적인 힘은 경제적인 힘으로 대체되어 시장의 지배로 변화하고 있다.
이런 세계화 추세는 선교사역에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예로, 기독교 문서선교를 들 수 있겠다. 성경번역선교사가 신약성경을 에콰도르의 부족언어로 번역할 때, 항공 선교회가 이 선교사를 원주민이 사는 오지의 외딴 마을로 날라다 주면, 거기서 그는 이메일을 통해 번역 초고를 캐나다에 있는 상급 책임자에게 보내서 기술적인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그리하여 원고가 다 준비되면 텍사스의 달라스에서 전문가들이 편집 작업을 하고, 그 출판원고가 다시 이메일을 통해 한국으로 보내져서 책으로 출간되면 에콰도르로 연결되는 교역 중심지인 마이애미로 급송되어, 마침내 현지인들의 손에 전달될 수 있다. 거리가 좁혀졌고 시간이 줄어들었으며, 복잡한 과정의 단계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전문가들의 협조를 구할 수 있게 되었고, 바빠서 모이기 힘들 때는 SNS를 통해 중요한 의사결정에 모든 사람을 참여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세계화 과정이 선교에 긍정적 영향만 주지 않는다. 세계화 추세에 편성하는 선교사역은 자칫 방향 없는 속도 추구에 빠질 수 있고, 로버트 슈라이터의 말처럼 ‘효과 없는 효율’로 전락할 소지가 다분하다. 이렇게 되면 기술적 합리성은 편협하고 비현실적이며 비인간화를 낳을 수 있다. 선교사의 사역에 대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잣대가 가시적 프로젝트와 교회개척의 숫자로 결정되고, 선교사들은 압박을 받으면서 일하게 된다. 만약 정해진 기간에, 가능하면 빠른 기간 안에 세례를 베푼 횟수, 개종자의 수와 교회개척이 많지 않으면 그들의 사역은 실패로 간주되고, 그것은 곧 믿음의 부족과 영성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한다. 선교의 세속화 혹은 시장경제화로 인해 후원교회와 선교사는 함께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 쉽게 ‘이기적이며 팽창주의적인 자기 사업’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또, 세계화는 경제 강대국 이익을 중심으로 한 세계무역질서로 재편되어 약소국들의 경제구조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점을 야기할 수 있다. 결국 강대국에 의존적인 시장체제를 만들고, 인간 존재를 상품화하며, 빈부격차의 증대와 불평등의 증가, 약소국의 부채증가, 공공자산과 서비스 부문의 경제적 사유화, 이익 우선주의에 따른 유전자 조작과 토지의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등 전세계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세계화의 대안으로 WCC는 2006년 2월 제9차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에서 복음의 정신으로 세계화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하며, 부정의(不正義)한 세계경제구조의 변화를 도모하는 ‘AGAPE(Alternative Globalization Addressing People and Earth)’라는 대안적 세계경제 지침서를 발표하였다.
7. 종교다원화 현상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서구중심의 식민제국주의 세계가 끝나고,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적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새로운 독립국가의 탄생으로 인하여 세계는 다중심, 다원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전에는 서양 문화가 가장 진보, 발전한 우월한 문화이고 서양 기독교가 보편적 진리임을 의심치 않았던 서구 기독교와 신학은 타종교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서구교회의 약화와 타종교의 르네상스가 맞물려 1960년대부터 종교 연구와 종교신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촉진되었다. 이제 타종교 이해는 선교에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선교적 과제가 되었다.
서구교회와 신학은 오늘날의 종교다원화 현상을 큰 도전으로 인식하고 있다. 타종교의 존재와 부흥은 서구 기독교의 자기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하고,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시아, 아프리카의 교회들에게 있어서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이미 선교 초기부터 신앙 영성과 삶의 현장에서 씨름해온 문제이다. 따라서 타종교에 대한 신학적 대응과 자세도 자연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수자로서 기독교는 다수자로서의 전통종교에 대해 한편 배타적인 자세를, 다른 한편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심지어 다원주의적 입장을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정체성, 즉 복음의 복음됨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며, 타종교들도 21세기에 와서 더 강한 선교적 활동을 주력하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제랄드 앤드슨(Gerald Anderson)은 ‘종교신학과 선교학(Theology of Religions and Missiology: A Time of Testing)’이란 글에서 “다가오는 미래에 선교학의 그 어떤 이슈도 종교신학보다 더 중요하고 더 난해하며 더 논쟁적이고 혹은 더 결정적인 것은 없다.”고 주장하며 지금까지의 기독교신학이 종교에 대하여 가졌던 입장과 태도를 크게 둘로 나누어 분석한다.
첫째는 타종교에 대한 신학적 무지이다. 오늘날과 같은 종교다원화 시대에 서양의 기독교신학은 그에 대해 대처할 신학적 준비가 부족하여 신학적으로 무시해왔다는 것이다. 사실 서구교회는 오랜 선교경험을 통하여 타종교와의 접촉을 해 왔으나 그 경험을 신학적으로 잘 정립하지 못하였다.
둘째는 신학적 상대주의이다. 이것은 계시의 다원성과 종교들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대개 성경을 언급하지 않거나 성경을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로 본다. 이 종교다원주의 문제는 WCC 내에 심각한 신학적 분쟁을 불러일으켰으며, 1991년 호주 캔바라 총회 때 주제발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여성신학자 정현경으로 인하여 성령론과 혼합주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정교회가 WCC를 탈퇴하느냐 마느냐 하는 위기를 낳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서 타종교에 대한 건전하고 복음적인 종교신학을 정립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종교의 부흥과 종교다원화 현상과 함께 종교 간 갈등과 테러가 세계평화와 공존을 방해하는 21세기의 선교상황은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관용과 대화를 요청하며 지난날 서구 중심적 종교 우월주의를 수정하게 한다.
III. 미래 선교 전망과 방향
1. 선교적 교회로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최근 서구교회와 신학의 초점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로의 변화이다. 제11차 국제선교학회에서 기조강연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화 영(Hwa Yung)은 서구교회의 지나친 자기비판과 진보적인 신학과 선교에 대한 방향전환을 요청하며, 교회성장은 지나친 자기비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강조에서 왔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미국에서도 교회성장 운동 이후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으며,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의 본질을 선교로 보고, 교회는 세상에 보냄받은 존재로 이해한다. 자기 사람들을 불러내시고 또 보내셔서 인간의 역사와 세상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로서 자기이해를 한다.
21세기에 요청되는 선교하는 지역교회에 대해 로잔 3차대회의 문서 39번에서 missional congregation를 통해 28가지로 정의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만 열거하면 선교적 교회란 교회에 대한 콘스탄틴적 모델을 포기하고 관계형성과 다양한 문화와 욕구를 수용하며 갱신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 밖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통전적 교회 구조를 만들며 평신도 지도력 중심의 구조를 형성한다. 예배와 공동체와 선교를 통합하는 교회 구조와 ‘오라’와 ‘가라’의 구조를 조성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만인제사장 이론을 반영하며, 이 이론을 토대로 하는 다양한 지도력을 활성화한다. 선교적 교회는 그들의 비전을 공유함과 동시에 상호관계성을 가지며 다른 교회·선교단체와 관련을 맺는다.
2. 선교의 ‘블루 오션’(blue ocean)을 모색할 것이다.
과도한 경쟁과 소위 ‘너 죽고 나 살기’식의 레드 오션(red ocean) 선교는 윈-윈(win-win) 전략을 기본으로 하되 기존 경쟁체제가 포착하지 못한 틈새를 파고드는 블루 오션(blue ocean) 선교로 변화되어야 한다. ‘블루 오션’ 선교의 형태로는 전통적인 선교 단체의 본부가 서구세계에 있었다면 제3세계에 선교본부를 옮기는 현상, 장기사역과 단기사역의 조화와 단기사역의 증대, 현지지도력을 배양하는 것, 평신도와 목회자 선교사의 협력, 비거주 선교 등을 들 수 있겠다.
3. 기독교의 정체성의 모색과 상황화의 바른 실천방향이 계속 추구될 것이다.
앞으로의 선교는 복음의 보편성과 특수성, 기독교의 정체성과 상황성이 창조적 긴장 속에서 계속 논의될 것이다. 선교에 대한 새로운 문제 제기는 새로운 세계상황의 출현으로 말미암는다. 다양한 21세기 상황에서 기독교 선교의 방향은 통전적인 관점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가 ‘변화하는 선교(transforming mission)’를 추구할 때 복음이 선교지 상황, 사람, 제도,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바꾸고 변혁하는 것을 일차적으로 의미한다. 변혁을 시키는 주체는 성령이시며, 그의 도구로 쓰임받는 것은 성령의 임재 아래 있는 지역교회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참된 정체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인신매매, 노예제도, 여성할례, 여성차별, 인종문제 등 불의한 상황에 대해서 교회는 저항하고 변화시켜야 한다.더 나아가 선교사가 더 이상 자신의 상황과는 다른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이전의 자신과 동일하지 않다는 이유로 선교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그와 아울러 선교사를 파송, 후원, 관리하는 본국교회의 자기개혁과 갱신이 요청된다. WCC 살바도르(Bahia Salvador) 대회 보고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복음과 문화의 진정한 상호작용을 위하여 교회가 문화적 정체성을 복음과 혼동하여 그에 충성을 다하거나, 아니면 복음이 교회의 문화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아니 된다.
4.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선교가 계속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성령이 교회 안에서 역사하도록 하시고 그의 선교를 수행하신다. 성령의 충만과 권능으로 하는 선교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기 이름을 내지 않는다. 성령의 속성 자체가 자기를 물려주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특성을 가진다고 한다. 일찍이 성령과 선교에 관한 연구를 한 해리 보어(Harry Boer)에 의하면 성령은 선교의 참된 동기와 방향과 목표를 보여준다. 성령은 결코 교회의 관심을 교회 자체에 집중시키지 않고 ‘당신의 사랑이 실행되고 당신의 생명이 표현되고 당신의 증거가 촉진되는 것’으로 만족한다.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성령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선교에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밀 부르너(Emil Brunner)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말씀의 연속성 문제, 즉 정통 교리의 보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연속성 문제, 즉 성령에 근원을 두는 것도 중요하다. 성령의 영감으로 살아가는 예수 공동체, 이것이 생명의 비결이며 진정한 교제와 능력의 비결이다.
”2004년 9월 29일-10월 5일까지 태국 파타야에서 로잔포럼(The 2004 Forum for World Evange -lization by the Lausanne Committee for World Evangelization)이 열렸다. 로저 패럿(Roger Parrott)은 미래 선교의 성패 여부는 성령의 바람을 감지하고 그 성령의 바람을 동력으로 해서 선교에 임하느냐 아니면 그저 기술공학적 발전에 의존하는 인간의 사업으로 전락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의 선교의 동기와 힘이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가에 대해 비유적으로 돛단배와 모터보트를 비교하면서 말하였다.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선교사는 성령의 바람으로 움직이는 돛단배를 운전하는 자이지, 결코 휘발유만 필요로 하는 모터보트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하였다. 패럿은 미래의 선교가 성령의 바람에 따라 움직여야 함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성령이 이끄는 선교를 하려면 먼저 성령의 바람을 알고 그 바람의 방향을 감지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성령의 바람과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야 한다. 성령의 바람을 감지하기 위해 필요한 분별력, 돛을 올리고 바람을 받아 새로운 해안을 향해 나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따라서 성경과 성령과 선교는 함께 어울려 나가야 한다.
5. 증거와 대화가 창조적 긴장관계 속에서 적극 추진될 것이다.
앞으로 추구해야 할 타종교에 대한 선교유형은 ‘대화와 선교’로 나누기보다는 ‘증거와 대화’의 긴장관계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화’는 선교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증거와 대화를 통해 창조적 긴장관계 속에서 선교는 창조적 결실을 얻도록 해야 한다. 이것에, 보쉬는 “담대한 겸손(bold humility)”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심판관이나 변호사가 아니라 증인으로, 군인이 아니라 평화의 사도로, 억압적인 상인이 아니라 섬기는 사도로, 십자군 정신이 아니라 십자가 영성으로 증거와 대화에 임하게 되면 새로운 선교의 열매를 맺으리라 믿는다.제9차 WCC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의 의장 보고서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점에서 종교적 다양성을 인식하여 “다른 종교와 세계 속에 있는 ‘숨은’ 그리스도의 증표들과 성령의 존재를 분별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해야 한다”고 말하며, 종교 간 대화의 방향을 제시했다. 종교 간 대화는 어디까지나 기독교 진리의 정체성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종교 간의 공동의 가치를 심화하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종교의 오용을 막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해야 한다. 스티븐 베반스(Stephen B. Bevans)는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에서 대화야말로 오늘날 세계화되고 다중심적인 세상에서 유일한 선택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대화 속에는 대화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선포하는 순간을 포함하고 있고, 선포해야만 한다. 대화는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하는 권면을 위한 선포나 그 필수성을 결코 대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고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는 대화적이기 때문에 오늘날 대화는 가장 깊이 있는 “모든 형태의 기독교 선교의 기준이고 필수적인 태도이다.” 선교활동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대화는 성령의 임재와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 속에 있는 ‘말씀의 씨앗’의 현존을 인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이란 선교의 불변수에 초점을 맞춘다. 이 사람들은 삶의 대화에서 만나고, 행동의 대화를 통해 일하고, 신학적 교환의 대화와 영성의 대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6. 협력선교를 더 강력하게 추진하게 될 것이다.
2천 년 기독교 선교역사를 단순화하여 보면, 앤드류 월즈(Andrew Walls)의 말처럼 선교의 핵심 선두주자가 바통을 바꾸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지역의 교회가 선교의 주자로 쓰임 받다가 쇠퇴하게 되면 다른 주자가 떠오르는 순환의 과정이었다. 확실한 것은 이렇게 달려온 선교에 모든 교회는 헌신과 순종으로 본분을 다했다. 특히 오늘과 같이 다원화되고 세계화된 세상에서 그리고 선교현장이 전세계로 확장되고 온 세계교회가 함께 선교에 참여하는 시대오늘날의 세계선교 307에 선교는 어느 한 교회의 일방적인 주도에 의해 진행될 수 없다. 따라서 협력선교는 21세기의 시대적 요청이고 기독교의 공신력과 진정성을 드러내는 방안이 될 것이다.
이제는 개교회나 노회적 차원의 독자적인 선교사 파송과 후원의 차원이 아니라 교단적 차원에서 다른 교단과 선교단체 및 선교현장의 교단과 협력관계를 이루며 ‘상호존중’, ‘상호배움’ ‘상호나눔’의 선교를 실현해야 한다. 선교사나 후원교회나 교단의 일방통행적 선교나 지나친 경쟁과 과도한 중복투자는 시대착오적이며, 선교현장의 현지교회나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이다.
WCC 제9차 총회는 협력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한 방향으로서 ‘에큐메니칼 형성(ecumenical formation)’을 말하였다. 이것은 단지 필요나 목표로서가 아니라 향후 에큐메니칼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실질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의라고 한다. 이제 선교는 전세계교회의 협력과 하나됨과 관련된다.
7. 선교활동의 다변화가 전개될 것이다.
전통적인 선교는 개인 영혼구원과 교회개척 및 성장으로 제한되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이후 선교는 정의를 추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며, 불의의 주된 원인이 되는 자본주의에 대하여 비판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피압제자들에 대해 무관심한 제국주의 국가를 경계하며, 모든 경제적·정치적·개인적 해방운동을 지원하며 압제자에 반대하는 것을 포함하게 되었다. 21세기 선교는 복음진리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토대로 전도와 교회개척과 성장을 도모해야 하나, 거기에 머무르거나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 세계에 그의 뜻을 선포하며 또한 그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여 그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다. 선교현장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선교 방식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봉사 선교, 교육과 의료와 빈곤퇴치 사역, 세계경제의 불평등 변화와 경제적 구조악 제거, 정의·평화·창조의 보전, 생태계 보존과 생명 살리기 운동 등에 매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전문가를 선교인력으로 개발하고 사역의 현장에서 헌신하도록 후원해야 한다. 특히 타종교권과 사회주의권에서의 선교는 전통적인 교회 중심적 선교보다는 NGO 형태의 디아코니아 사회복지, 지역사회개발 선교가 더 활발히 전개되어야 한다.
제9차 WCC 총회에서 논의된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구적 정의’의 추구는 다음의 영역을 포괄하는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 선교의 다변화를 위해 참고가 될 것이다. 아래 내용은 긴급히 요청되는 ‘지구적 정의’의 실현을 도모하는 ‘변혁하는 정의(transformative justice)’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정의, 인종차별, 계급주의의 결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응답하는 정의
•부유함과 가난함의 계통을 따라 나뉜 세계의 치욕을 비난하고 불공평한 경제, 사회구조 변화에 공헌하는 정의
•창조돌봄과 신앙전망과 생명공학, 정보기술, 감독과 안전관리 기술, 에너지 기술 등과 같은 과학과 새로운 기술의 사용 및 오용을 통합하는 정의
•HIV/AIDS에 대한 교회의 응답에 도전하고 이를 촉진하는 정의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의 삶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에서 기독교 정체성과 증거의 불가분 부분으로서 예언자적 봉사에서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 정의
•논쟁 해결과 화해를 위한 노력과 과정에 참여하는 정의
IV. 나오는 말
교회의 본질인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다(요 3:16).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이고, 선교의 근거, 내용, 목적, 방법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구성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교의 출발이고, 과정이며, 목표 성취에 적합한 것이다. 지상의 나그네 교회는 연약하고 상처받기 쉽고 상황적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이며 포괄적이고 구체적이어서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을 성취케 하신다.
한국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전체 선교계획 가운데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마치 세계선교의 ‘마지막 주자’라든지 ‘선교의 선두주자’라고 교만하거나 허영을 부릴 것이 아니라 겸손한 가운데 주신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에 순종하는 전세계교회는 마치 모자이크의 한 부분처럼 기능하며 온전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낼 것이다. 선교의 위대한 기회를 맞이한 한국교회는 선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시대적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I. 현대선교 흐름의 시작
15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에서부터 근대에 이르는 기간의 선교는 개종과 문명화에 초점을 맞추었고, 선교의 주체는 기독교국가의 국왕, 교황, 영주, 교회, 선교회였다. 이 기간 선교의 목표는 개척된 식민지 사회를 서구의 국가와 같이 기독교화하는 것이 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때가 그들에게 주어진 선교에 가장 중요한 시기이고 비기독교국가를 기독교국가로 만드는 핵심적인 과제를 선교가 담당하게 된 것으로 인식했다. 당시 선교의 이해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으로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표어가 있다. ‘이 세대 안에서 세계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generation)’. 그래서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근대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므로, 자원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할 기독교인의 의무로 교인들에게 받아들여졌고, 선교의 주도권이 교회와 선교사에게 있음을 모두 당연시 여기던 시기였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국가(Christendom) 교회는 선교를 위해 기독교국가가 가진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강점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선교에 있어서 복음을 받는 사람의 필요나 요청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책임을 강조하고, 선교를 위한 여러 수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선교현장의 사회와 문화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선교는 기독교 사회와 문화를 선교현장에 이식하는 모습으로 발전했다. 선교지에 서구식 교육체계, 의료보건, 종교와 법률과 같은 것으로 선교지를 변화시키기 위해 선교사는 사역에 많은 노력을 했다. 이런 선교에 대한 생각의 이면에는 서구사회와 문화는 기독교를 대표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존재했다. 그래서 선교 사역의 필요성과 진행 정도를 논의할 때 한 예로 서구화에 대한 진행 정도를 말하기도 하였다.
1. 세계 정치지형의 변화와 세계선교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까지 진행된, 근대 기독교국가 교회의 선교는 제국주의적 선교, 가부장적 선교, 자문화 중심주의적 선교였다. 이런 선교 모습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5년부터 1969년까지 기독교국가 혹은 서구국가의 식민통치를 받은 국가 중 99%가 독립을 하게 된다. 독립 후 신생국가들에서 나타난 종교 현상은 식민통치 이전의 과거 토착 종교가 다시 부흥하였고, 기독교는 부흥하는 다른 종교 가운데 소수의 종교로 전락하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다른 종교들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기독교 선교가 진행되었고, 근대 선교에 있어서 사용한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 여러 선교의 수단들을 사용할 수 없거나 힘이 약화되어 선교현장에 동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기독교국가 혹은 교회가 중심이 된 선교가 아니라 기독교 선교가 필요한 선교지 교회가 중심이 된 선교로 변화된 것이다. 선교의 행정과 진행에 있어서, 파송의 중요성은 약화되고, 선교와 선교사 수용이 강조된 선교로 변한다. 기독교국가 혹은 서구 국가로부터 식민지 국가가 독립하기 전에는 선교의 중심은 기독교국가 혹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교회-선교회였다. 식민지 국가의 독립은 식민지 국가의 교회가 기독교국가 교회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서구 기독교국가 교회의 종속이 아닌 자치의 교회로 발전한다. 그래서 선교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나 선교사를 파송에 관한 권한이 기독교 국가에서 선교지의 독립한 교회로 이관하게 된다. 그래서 독립된 식민지 교회는 선교사의 입국이나 출국에 관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게 되고, 선교에 있어서 필요한 선교사의 비자 문제나 선교사역지 배정문제 그리고 재산권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 선교사를 파송한 국가와 교회의 권한을 강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독립한 식민지 국가와 교회는 이전 기독교국가 교회와 선교회가 소유하고 운영한 자산을 국유화하거나 독립한 교회의 소유로 만들었다.또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종교적인 상황변화와 함께 국가사회의 시스템 변화가 일어난 국가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추종한 것은 마르크스의 이념이고, 국가체계는 공산주의 국가였다. 이들은 기독교를 국가의 통제 안에 두고, 기독교를 공산주의 국가의 통치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것은 그동안 진행되어 온 세계 선교에 대한 단절로 이어졌다. 중국을 예로 든다면 1954년 미국장로교회의 선교사 중 동아시아에 333명이 사역을 하였지만, 공산화가 이루어진 후 중국에서는 한 명의 선교사도 없었다. 공산화 이전에는 미국장로교회가 가장 많이 선교사를 파송한 아시아 국가는 중국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에 교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교회는 중국정부에 귀속되고 자립과 자치의 기준에서 통제된 교회로 공산주의 사회의 조직으로 존재하며 외부의 선교나 교회와 단절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세계의 정치지형 변화는 16세기부터 진행되어온 세계선교의 목적과 전략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는 기독교가 소수의 종교로 선교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B. 선교의 패러다임 변화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2년 독일 빌링겐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에 관한 독일어 보고서에서 칼 하르텐슈타인은 그동안 진행되어 온 선교에 대한 새로운 선교개념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언급한다. 칼 하르텐슈타인은 선교가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그 아들을 보내심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은 하나님 안에 있는 (성자, 성령)하나님을 세상에 파송하고,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주권을 세우시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전까지 선교신학은 철저히 성자 중심의 신학이었다면 하나님의 선교가 등장함으로 인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로 정리된다. 그래서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의 일부로 인식하게 되었다. 곧 선교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시작되며,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피조세계에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그동안 진행되어 온 교회 중심 선교를 비판한다. 교회는 독자적인 선교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에 가시적이고 실천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완성되어야 한다. 곧 교회는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는 것에 쓰임 받는 존재이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성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에 관해서 교회보다는 세상을 우선순위에 둔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구원받은 공동체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사명을 주신 교회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선교는 교회의 활동에서 하나님의 활동으로 정의되었고, 교회는 세상의 요청과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며 현재 나타난 현상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역사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선교는 단순한 개인의 전도에 대한 관심에서 전체 인류사회의 문제에까지 포괄적인 이해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하나님의 선교 이해는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주제 논의와 운동의 범위에 영향을 주었다. 단순히 교회의 틀에서 진행되는 복음과 전도의 문제에서 세계와 인류에 대한 인간적인 모든 문제를 선교의 주제로 다루게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모든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모든 영역이 선교의 영역이 되었다. 또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의 절대적인 배경을 성경에 두고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게 된다. 곧 성경은 하나님의 선교로 인해 우리에게 전달되었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교하심에 대한 예언과 실현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이 조명되었다. 그래서 선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의 원천은 성경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경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내용과 사실은 오직 한가지 하나님의 통치와 일하심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선교는 성경을 문학적, 문화적 관점에서 읽기보다는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하심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세계와 역사에 하나님을 어떻게 나타내시는가 하는 것으로 읽고 이해한다. 선교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선교의 범위와 내용, 성경의 중요성 등에 있어서 기독교 국가 안에 존재하는 교회들에 있어서 선교적 교회 운동의 배경이 되었고, 현재 선교의 특징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 되었다.
II. 변화하는 세계와 기독교 선교 상황
1. 위기와 기회 사이에 놓인 선교
지난 20세기 중반까지의 비기독교 국가에서 서구선교에 대한 비판적 저항은 모라토리움(Moratorium, 선교유예 혹은 한시적 선교활동 중지)과 세속화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또 기독교에 공격적이며 적대적인 비기독교 종교의 성장, 반기독교 정서의 증대, 종교다원주의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기독교국가의 선교 위기는 서구교회와 신학의 위기와 맞물려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와 신학과 선교에서 일어난 위기의 각 요소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했다. “기독교 선교 활동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가? 만약 있다면 오늘의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 전개되어야 하는가?” 1958년 가나 국제선교대회(IMC)에서 강사 중 한 명이었던 발터 프라이탁(Walter Freytag)은 “지금까지는 선교가 문제를 가졌으나 이제는 선교 그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라고 진단했다. 이후 선교 과제, 방법, 전략과 정책만이 아니라 선교가 무엇인가라는 선교이해 자체를 논의의 핵심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이러한 서구교회와 선교의 위기를 가져온 요소를 6가지로 분석한다.
➊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전세계에 퍼진 세속화로 현대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➋ 천 년 이상 기독교의 보금자리처럼 여겨지며 선교사업의 기지였던 서구에서의 탈기독교화 현상이다. 데이비드 바렛의 통계에 의하면, 1982년 당시 유럽과 북미에서 평균 5만 3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마다 지속적으로 교회를 떠나고 있다.
➌ 세계는 더 이상 기독교 지역과 비기독교 지역으로 양분할 수 없는 다원화 현상을 보인다. 서구의 탈기독교화와 타종교인들의 대규모 이민과 선교로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세계가 나타났다. 타종교에 대한 이해를 재검토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➍ 서구 혹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제3세계에 대한 정복과 착취에 공모한 역사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종종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벧전 3:15) 능력이나 의지를 잃게 된 점이다.
➎ 오늘날 세계가 부자와 가난한 자로 양분되어 있으며 대체로 부자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가난한 자들에 의해 그렇게 간주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대해 분노와 좌절을 가지며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전파를 꺼리게 된다고 한다.
➏ 이제는 전통적으로 피선교지로 간주되던 제3세계 교회들이 서구신학과 교회의 관례들을 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자율성을 강조해 왔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서구신학은 제3세계 신학으로 대체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서구교회 자체 안에 큰 불확실성을 심어놓았고 기독교 선교의 타당성에 대한 불확실성도 가져왔다.
이러한 비판과 저항 그리고 세계선교의 위기와 함께 세계선교의 기회도 새롭게 도래하였다. 예를 들면 이민, 이주, 유학, 취업, 난민 등으로 인한 인구증가와 인구이동이 그것이다. 이런 급증하는 인구의 이동은 선교와 선교지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였다. 러시아, 몽골, 캄보디아,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선교의 문이 열렸고 이것이 복음전파의 기회를 가져왔다. 선교의 새로운 기회는 제3세계에서 나타났다. 근대의 선교세계 구분은 기독교국가와 비기독교국가로 나누었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 파송된 선교사가 사역하는(선교사를 받아들이는) 국가로 구분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과거 선교사를 받아들였던 국가들인 제3세계국가가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과 사역하는 것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선교의 위기, 즉 위험과 기회는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
2. 세계기독교와 선교의 구심점 이동
기독교 선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일컬어지는 기독교 중심축의 이동과 세계선교의 구심점 이동은 21세기 선교의 가장 큰 흐름이다. 이제는 ‘세계기독교(World Christianity)’ 혹은 지구촌교회(Global Church)라는 말이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세계기독교란 하나의 통일된 조직체와 획일적인 기구적 통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계기독교는 다양한 상황에 부닥쳐 있는 세계의 모든 지역교회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고려하며, 특수성과 보편성의 창조적 긴장 관계 속에서의 선교를 모색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선교신학과 실천은 이전까지의 서구 중심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남반구 교회들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신학적인 주제나 용어와 주장을 남반구 교회들이 주도하거나 남반구 문화와 역사의 경험에서 통찰력을 얻어 신학화하고 있다.
이러한 추진력과 영감의 실례로,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는 그의 책 『벽을 넘어 열방으로』에서 페루 중앙고지의 한 복음주의 교회가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선교사를 파송한 일을 소개한다. 그리고 볼리비아에서 독일로 이민 온 한 여성이 하노버 근처의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교회에 다니면서 그곳으로 직장을 찾아서 온 한 청년을 전도하여 마침내 목사가 되게 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제 기독교 선교는 전세계 모든 교회의 공동책임이 되었다. 테오 순더마이어(Theo Sundermeier)는 남미의 상황과 문화를 신학화 하는 콘비벤츠(Konvivenz)를 설명하며, 2006년 2월에 있었던 WCC 제9차 총회에서 ‘총회장 밖의 총회’인 무찌라오(Mutirao)에서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고 말한다. 무찌라오란 말은 포르투칼어로 ‘만남의 장소’ 혹은 ‘공동사역’이라는 뜻인데 일종의 박람회와 같은 것이었다. 무찌라오는 총대와 옵서버들 외에도 모든 참가자가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해하고 나눌 수 있는 열린 광장을 제공하는 모임의 기능을 하였다. 이를 통해 전세계교회들의 경험과 목소리가 교환되었다. WCC는 이를 위해 2,300명의 사람을 무찌라오에 초대하였다. 회원교회와 에큐메니칼 기구는 자신들의 선교 과제와 이슈들을 거리, 전시장, 강당과 교실에서 워크숍, 세미나, 부스, 예술공연 등을 통해 나타내었으며 250개 이상의 모임이 열렸었다. 그때 무찌라오 모임에서 한국교회는 한반도 통일문제와 한국교회의 노력을 표현하는 부스를 운영하였으며 전체 무찌라오에서 다섯 명의 한국인 대표가 강연 및 발표를 하였다.
3. 아래로부터의 선교
뷜만은 ‘제3의 교회’의 특징을 말하며 ‘제3의 교회’의 태동이 가지는 희망은 ‘제1의 교회’의 ‘예배형식 유지’와 ‘교권적 폐쇄주의’도 아니고, ‘제2의 교회’의 ‘기독교왕국’의 회복도 아닌 인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부활의 소망’을 불러일으키려는 데 있다고 평가한다. 뷜만의 ‘제3의 교회론’에 따르면 21세기 기독교의 미래는 제3세계에 달려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무엘 에스코바가 지적한 또 다른 선교군단의 등장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비록 선교활동 보고서도 없고 선교 전문가 명단에 등재되어 있지도 않은, 신약시대 무명의 복음 전도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복음의 전파와 확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명성도 돈도 없으며 선교기관에 속하지 않은 가난한 사람, 이주노동자, 이민자, 난민 등의 “아래로부터의 선교사”에 의해 선교가 크게 진보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선교모델이고 성령의 권능 아래의 자발적인 교회 확장이다. 오늘날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이런 자발적인 복음 확장이 있는 것과 최근, 특히 가난한 도시 군중 속에서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강하게 나타난 것들은 아래로부터의 선교가 성령의 역사임을 입증한다. 물질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또는 기술적인 전문지식과 자원이 없지만 ‘역사와 전통이 없는 자들의 비전’에 따라 놀라운 선교역사가 새롭게 쓰이고 있다.
4. 선교의 ‘프리웨이’(freeway) 혹은 ‘멀티웨이’(multiway) 시대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선교현장은 지역적으로 확실하게 구분되었다. 서구지역은 선교사를 파송하며 선교하는 지역으로, 비서구지역은 선교현장으로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지역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서구교회의 쇠퇴와 제3세계 교회의 성장으로 이러한 구분은 의미를 잃어버렸다. 1963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CWME(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선교대회의 선교적 주제는 “6대륙 선교”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서구선교사만 아니라 제3세계 출신 선교사도 선교에 동참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19세기까지의 식민주의 개척시대의 오지나 멀리 이방 땅만 선교지로 보던 관점에서 소위 안마당인 서구도 선교지로 볼 수밖에 없는 의식전환도 표현한다. ‘모든 곳이 선교지이고 모든 사람이 선교사이다.’는 주장이 등장한다.지난 1966년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전도대회(Berlin World Congress on Evangelism)에서 존 스토트가 말한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선교하자”는 외침이 선교현장에서 실천되어야 할 때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고전적인 마태복음 28장 18-20절 본문이 아니라 그동안 거의 간과하고 있던 선교위임 본문인 요한복음 20장 21절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선교명령을 일방적으로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동역자가 됨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으로 고안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추진해가는 선교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북반구 교회와 남반구 교회는 서로 선교사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서로 재정적이며 영적인 자원을 공유하고 나누며 섬길 수 있어야 한다. 남반구 교회 간의 상호선교도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이제 전세계는 선교지이며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사를 받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파트너십을 실현해야 한다.
5. 새로운 선교 전략 모색
기독교의 중심점 이동과 더불어 세계선교의 구심점이 이동했다고 해서, 서구의 선교가 완전히 죽었다거나 인적·물적 자원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미 50여 년 전 ‘6대륙 선교’가 언급되었고 ‘6대륙에서 배출되고 6대륙에 배속’되는 선교사 시대가 제기된 것은 선교라는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볼 것과 전세계교회의 통전적 선교를 제시한 것이다. 제3세계 교회들의 선교참여를 ‘떠오르는 선교’라고 표현하여 오늘날 제3세계 교회의 선교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게 한 사람은 로렌스 키이즈(Lawrence Keyes)이다. 그는 “선교운동의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세계복음화의 초점이 제3세계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면서 제3세계 교회들의 선교가 급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여 년밖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장구한 서구교회의 선교역사에 비하면 아주 시작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축이 남반구로 옮겨가고 있고, 기독교 선교 중심축의 이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전세계를 향한 선교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성공을 하려면 북반구와 남반구의 자원이 함께 동원되어야 한다.
6. 세계화와 선교
교통, 통신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화 사회 구축과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 등으로 세계는 하나의 시장 체제화로 변하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의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구조로 세계화하고 있다. 냉전시대의 지배적이었던 군사적인 힘은 경제적인 힘으로 대체되어 시장의 지배로 변화하고 있다.
이런 세계화 추세는 선교사역에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예로, 기독교 문서선교를 들 수 있겠다. 성경번역선교사가 신약성경을 에콰도르의 부족언어로 번역할 때, 항공 선교회가 이 선교사를 원주민이 사는 오지의 외딴 마을로 날라다 주면, 거기서 그는 이메일을 통해 번역 초고를 캐나다에 있는 상급 책임자에게 보내서 기술적인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그리하여 원고가 다 준비되면 텍사스의 달라스에서 전문가들이 편집 작업을 하고, 그 출판원고가 다시 이메일을 통해 한국으로 보내져서 책으로 출간되면 에콰도르로 연결되는 교역 중심지인 마이애미로 급송되어, 마침내 현지인들의 손에 전달될 수 있다. 거리가 좁혀졌고 시간이 줄어들었으며, 복잡한 과정의 단계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전문가들의 협조를 구할 수 있게 되었고, 바빠서 모이기 힘들 때는 SNS를 통해 중요한 의사결정에 모든 사람을 참여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세계화 과정이 선교에 긍정적 영향만 주지 않는다. 세계화 추세에 편성하는 선교사역은 자칫 방향 없는 속도 추구에 빠질 수 있고, 로버트 슈라이터의 말처럼 ‘효과 없는 효율’로 전락할 소지가 다분하다. 이렇게 되면 기술적 합리성은 편협하고 비현실적이며 비인간화를 낳을 수 있다. 선교사의 사역에 대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잣대가 가시적 프로젝트와 교회개척의 숫자로 결정되고, 선교사들은 압박을 받으면서 일하게 된다. 만약 정해진 기간에, 가능하면 빠른 기간 안에 세례를 베푼 횟수, 개종자의 수와 교회개척이 많지 않으면 그들의 사역은 실패로 간주되고, 그것은 곧 믿음의 부족과 영성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한다. 선교의 세속화 혹은 시장경제화로 인해 후원교회와 선교사는 함께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 쉽게 ‘이기적이며 팽창주의적인 자기 사업’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또, 세계화는 경제 강대국 이익을 중심으로 한 세계무역질서로 재편되어 약소국들의 경제구조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점을 야기할 수 있다. 결국 강대국에 의존적인 시장체제를 만들고, 인간 존재를 상품화하며, 빈부격차의 증대와 불평등의 증가, 약소국의 부채증가, 공공자산과 서비스 부문의 경제적 사유화, 이익 우선주의에 따른 유전자 조작과 토지의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등 전세계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세계화의 대안으로 WCC는 2006년 2월 제9차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에서 복음의 정신으로 세계화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하며, 부정의(不正義)한 세계경제구조의 변화를 도모하는 ‘AGAPE(Alternative Globalization Addressing People and Earth)’라는 대안적 세계경제 지침서를 발표하였다.
7. 종교다원화 현상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서구중심의 식민제국주의 세계가 끝나고,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적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새로운 독립국가의 탄생으로 인하여 세계는 다중심, 다원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전에는 서양 문화가 가장 진보, 발전한 우월한 문화이고 서양 기독교가 보편적 진리임을 의심치 않았던 서구 기독교와 신학은 타종교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서구교회의 약화와 타종교의 르네상스가 맞물려 1960년대부터 종교 연구와 종교신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촉진되었다. 이제 타종교 이해는 선교에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선교적 과제가 되었다.
서구교회와 신학은 오늘날의 종교다원화 현상을 큰 도전으로 인식하고 있다. 타종교의 존재와 부흥은 서구 기독교의 자기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하고,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시아, 아프리카의 교회들에게 있어서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이미 선교 초기부터 신앙 영성과 삶의 현장에서 씨름해온 문제이다. 따라서 타종교에 대한 신학적 대응과 자세도 자연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수자로서 기독교는 다수자로서의 전통종교에 대해 한편 배타적인 자세를, 다른 한편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심지어 다원주의적 입장을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정체성, 즉 복음의 복음됨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며, 타종교들도 21세기에 와서 더 강한 선교적 활동을 주력하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제랄드 앤드슨(Gerald Anderson)은 ‘종교신학과 선교학(Theology of Religions and Missiology: A Time of Testing)’이란 글에서 “다가오는 미래에 선교학의 그 어떤 이슈도 종교신학보다 더 중요하고 더 난해하며 더 논쟁적이고 혹은 더 결정적인 것은 없다.”고 주장하며 지금까지의 기독교신학이 종교에 대하여 가졌던 입장과 태도를 크게 둘로 나누어 분석한다.
첫째는 타종교에 대한 신학적 무지이다. 오늘날과 같은 종교다원화 시대에 서양의 기독교신학은 그에 대해 대처할 신학적 준비가 부족하여 신학적으로 무시해왔다는 것이다. 사실 서구교회는 오랜 선교경험을 통하여 타종교와의 접촉을 해 왔으나 그 경험을 신학적으로 잘 정립하지 못하였다.
둘째는 신학적 상대주의이다. 이것은 계시의 다원성과 종교들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대개 성경을 언급하지 않거나 성경을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로 본다. 이 종교다원주의 문제는 WCC 내에 심각한 신학적 분쟁을 불러일으켰으며, 1991년 호주 캔바라 총회 때 주제발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여성신학자 정현경으로 인하여 성령론과 혼합주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정교회가 WCC를 탈퇴하느냐 마느냐 하는 위기를 낳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서 타종교에 대한 건전하고 복음적인 종교신학을 정립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종교의 부흥과 종교다원화 현상과 함께 종교 간 갈등과 테러가 세계평화와 공존을 방해하는 21세기의 선교상황은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관용과 대화를 요청하며 지난날 서구 중심적 종교 우월주의를 수정하게 한다.
III. 미래 선교 전망과 방향
1. 선교적 교회로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최근 서구교회와 신학의 초점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로의 변화이다. 제11차 국제선교학회에서 기조강연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화 영(Hwa Yung)은 서구교회의 지나친 자기비판과 진보적인 신학과 선교에 대한 방향전환을 요청하며, 교회성장은 지나친 자기비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강조에서 왔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미국에서도 교회성장 운동 이후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으며,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의 본질을 선교로 보고, 교회는 세상에 보냄받은 존재로 이해한다. 자기 사람들을 불러내시고 또 보내셔서 인간의 역사와 세상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로서 자기이해를 한다.
21세기에 요청되는 선교하는 지역교회에 대해 로잔 3차대회의 문서 39번에서 missional congregation를 통해 28가지로 정의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만 열거하면 선교적 교회란 교회에 대한 콘스탄틴적 모델을 포기하고 관계형성과 다양한 문화와 욕구를 수용하며 갱신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 밖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통전적 교회 구조를 만들며 평신도 지도력 중심의 구조를 형성한다. 예배와 공동체와 선교를 통합하는 교회 구조와 ‘오라’와 ‘가라’의 구조를 조성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만인제사장 이론을 반영하며, 이 이론을 토대로 하는 다양한 지도력을 활성화한다. 선교적 교회는 그들의 비전을 공유함과 동시에 상호관계성을 가지며 다른 교회·선교단체와 관련을 맺는다.
2. 선교의 ‘블루 오션’(blue ocean)을 모색할 것이다.
과도한 경쟁과 소위 ‘너 죽고 나 살기’식의 레드 오션(red ocean) 선교는 윈-윈(win-win) 전략을 기본으로 하되 기존 경쟁체제가 포착하지 못한 틈새를 파고드는 블루 오션(blue ocean) 선교로 변화되어야 한다. ‘블루 오션’ 선교의 형태로는 전통적인 선교 단체의 본부가 서구세계에 있었다면 제3세계에 선교본부를 옮기는 현상, 장기사역과 단기사역의 조화와 단기사역의 증대, 현지지도력을 배양하는 것, 평신도와 목회자 선교사의 협력, 비거주 선교 등을 들 수 있겠다.
3. 기독교의 정체성의 모색과 상황화의 바른 실천방향이 계속 추구될 것이다.
앞으로의 선교는 복음의 보편성과 특수성, 기독교의 정체성과 상황성이 창조적 긴장 속에서 계속 논의될 것이다. 선교에 대한 새로운 문제 제기는 새로운 세계상황의 출현으로 말미암는다. 다양한 21세기 상황에서 기독교 선교의 방향은 통전적인 관점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가 ‘변화하는 선교(transforming mission)’를 추구할 때 복음이 선교지 상황, 사람, 제도,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바꾸고 변혁하는 것을 일차적으로 의미한다. 변혁을 시키는 주체는 성령이시며, 그의 도구로 쓰임받는 것은 성령의 임재 아래 있는 지역교회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참된 정체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인신매매, 노예제도, 여성할례, 여성차별, 인종문제 등 불의한 상황에 대해서 교회는 저항하고 변화시켜야 한다.더 나아가 선교사가 더 이상 자신의 상황과는 다른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이전의 자신과 동일하지 않다는 이유로 선교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그와 아울러 선교사를 파송, 후원, 관리하는 본국교회의 자기개혁과 갱신이 요청된다. WCC 살바도르(Bahia Salvador) 대회 보고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복음과 문화의 진정한 상호작용을 위하여 교회가 문화적 정체성을 복음과 혼동하여 그에 충성을 다하거나, 아니면 복음이 교회의 문화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아니 된다.
4.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선교가 계속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성령이 교회 안에서 역사하도록 하시고 그의 선교를 수행하신다. 성령의 충만과 권능으로 하는 선교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기 이름을 내지 않는다. 성령의 속성 자체가 자기를 물려주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특성을 가진다고 한다. 일찍이 성령과 선교에 관한 연구를 한 해리 보어(Harry Boer)에 의하면 성령은 선교의 참된 동기와 방향과 목표를 보여준다. 성령은 결코 교회의 관심을 교회 자체에 집중시키지 않고 ‘당신의 사랑이 실행되고 당신의 생명이 표현되고 당신의 증거가 촉진되는 것’으로 만족한다.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성령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선교에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밀 부르너(Emil Brunner)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말씀의 연속성 문제, 즉 정통 교리의 보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연속성 문제, 즉 성령에 근원을 두는 것도 중요하다. 성령의 영감으로 살아가는 예수 공동체, 이것이 생명의 비결이며 진정한 교제와 능력의 비결이다.
”2004년 9월 29일-10월 5일까지 태국 파타야에서 로잔포럼(The 2004 Forum for World Evange -lization by the Lausanne Committee for World Evangelization)이 열렸다. 로저 패럿(Roger Parrott)은 미래 선교의 성패 여부는 성령의 바람을 감지하고 그 성령의 바람을 동력으로 해서 선교에 임하느냐 아니면 그저 기술공학적 발전에 의존하는 인간의 사업으로 전락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의 선교의 동기와 힘이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가에 대해 비유적으로 돛단배와 모터보트를 비교하면서 말하였다.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선교사는 성령의 바람으로 움직이는 돛단배를 운전하는 자이지, 결코 휘발유만 필요로 하는 모터보트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하였다. 패럿은 미래의 선교가 성령의 바람에 따라 움직여야 함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성령이 이끄는 선교를 하려면 먼저 성령의 바람을 알고 그 바람의 방향을 감지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성령의 바람과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야 한다. 성령의 바람을 감지하기 위해 필요한 분별력, 돛을 올리고 바람을 받아 새로운 해안을 향해 나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따라서 성경과 성령과 선교는 함께 어울려 나가야 한다.
5. 증거와 대화가 창조적 긴장관계 속에서 적극 추진될 것이다.
앞으로 추구해야 할 타종교에 대한 선교유형은 ‘대화와 선교’로 나누기보다는 ‘증거와 대화’의 긴장관계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화’는 선교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증거와 대화를 통해 창조적 긴장관계 속에서 선교는 창조적 결실을 얻도록 해야 한다. 이것에, 보쉬는 “담대한 겸손(bold humility)”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심판관이나 변호사가 아니라 증인으로, 군인이 아니라 평화의 사도로, 억압적인 상인이 아니라 섬기는 사도로, 십자군 정신이 아니라 십자가 영성으로 증거와 대화에 임하게 되면 새로운 선교의 열매를 맺으리라 믿는다.제9차 WCC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의 의장 보고서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점에서 종교적 다양성을 인식하여 “다른 종교와 세계 속에 있는 ‘숨은’ 그리스도의 증표들과 성령의 존재를 분별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해야 한다”고 말하며, 종교 간 대화의 방향을 제시했다. 종교 간 대화는 어디까지나 기독교 진리의 정체성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종교 간의 공동의 가치를 심화하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종교의 오용을 막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해야 한다. 스티븐 베반스(Stephen B. Bevans)는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에서 대화야말로 오늘날 세계화되고 다중심적인 세상에서 유일한 선택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대화 속에는 대화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선포하는 순간을 포함하고 있고, 선포해야만 한다. 대화는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하는 권면을 위한 선포나 그 필수성을 결코 대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고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는 대화적이기 때문에 오늘날 대화는 가장 깊이 있는 “모든 형태의 기독교 선교의 기준이고 필수적인 태도이다.” 선교활동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대화는 성령의 임재와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 속에 있는 ‘말씀의 씨앗’의 현존을 인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이란 선교의 불변수에 초점을 맞춘다. 이 사람들은 삶의 대화에서 만나고, 행동의 대화를 통해 일하고, 신학적 교환의 대화와 영성의 대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6. 협력선교를 더 강력하게 추진하게 될 것이다.
2천 년 기독교 선교역사를 단순화하여 보면, 앤드류 월즈(Andrew Walls)의 말처럼 선교의 핵심 선두주자가 바통을 바꾸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지역의 교회가 선교의 주자로 쓰임 받다가 쇠퇴하게 되면 다른 주자가 떠오르는 순환의 과정이었다. 확실한 것은 이렇게 달려온 선교에 모든 교회는 헌신과 순종으로 본분을 다했다. 특히 오늘과 같이 다원화되고 세계화된 세상에서 그리고 선교현장이 전세계로 확장되고 온 세계교회가 함께 선교에 참여하는 시대오늘날의 세계선교 307에 선교는 어느 한 교회의 일방적인 주도에 의해 진행될 수 없다. 따라서 협력선교는 21세기의 시대적 요청이고 기독교의 공신력과 진정성을 드러내는 방안이 될 것이다.
이제는 개교회나 노회적 차원의 독자적인 선교사 파송과 후원의 차원이 아니라 교단적 차원에서 다른 교단과 선교단체 및 선교현장의 교단과 협력관계를 이루며 ‘상호존중’, ‘상호배움’ ‘상호나눔’의 선교를 실현해야 한다. 선교사나 후원교회나 교단의 일방통행적 선교나 지나친 경쟁과 과도한 중복투자는 시대착오적이며, 선교현장의 현지교회나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이다.
WCC 제9차 총회는 협력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한 방향으로서 ‘에큐메니칼 형성(ecumenical formation)’을 말하였다. 이것은 단지 필요나 목표로서가 아니라 향후 에큐메니칼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실질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의라고 한다. 이제 선교는 전세계교회의 협력과 하나됨과 관련된다.
7. 선교활동의 다변화가 전개될 것이다.
전통적인 선교는 개인 영혼구원과 교회개척 및 성장으로 제한되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이후 선교는 정의를 추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며, 불의의 주된 원인이 되는 자본주의에 대하여 비판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피압제자들에 대해 무관심한 제국주의 국가를 경계하며, 모든 경제적·정치적·개인적 해방운동을 지원하며 압제자에 반대하는 것을 포함하게 되었다. 21세기 선교는 복음진리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토대로 전도와 교회개척과 성장을 도모해야 하나, 거기에 머무르거나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 세계에 그의 뜻을 선포하며 또한 그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여 그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다. 선교현장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선교 방식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봉사 선교, 교육과 의료와 빈곤퇴치 사역, 세계경제의 불평등 변화와 경제적 구조악 제거, 정의·평화·창조의 보전, 생태계 보존과 생명 살리기 운동 등에 매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전문가를 선교인력으로 개발하고 사역의 현장에서 헌신하도록 후원해야 한다. 특히 타종교권과 사회주의권에서의 선교는 전통적인 교회 중심적 선교보다는 NGO 형태의 디아코니아 사회복지, 지역사회개발 선교가 더 활발히 전개되어야 한다.
제9차 WCC 총회에서 논의된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구적 정의’의 추구는 다음의 영역을 포괄하는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 선교의 다변화를 위해 참고가 될 것이다. 아래 내용은 긴급히 요청되는 ‘지구적 정의’의 실현을 도모하는 ‘변혁하는 정의(transformative justice)’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정의, 인종차별, 계급주의의 결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응답하는 정의
•부유함과 가난함의 계통을 따라 나뉜 세계의 치욕을 비난하고 불공평한 경제, 사회구조 변화에 공헌하는 정의
•창조돌봄과 신앙전망과 생명공학, 정보기술, 감독과 안전관리 기술, 에너지 기술 등과 같은 과학과 새로운 기술의 사용 및 오용을 통합하는 정의
•HIV/AIDS에 대한 교회의 응답에 도전하고 이를 촉진하는 정의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의 삶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에서 기독교 정체성과 증거의 불가분 부분으로서 예언자적 봉사에서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 정의
•논쟁 해결과 화해를 위한 노력과 과정에 참여하는 정의
IV. 나오는 말
교회의 본질인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다(요 3:16).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이고, 선교의 근거, 내용, 목적, 방법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구성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교의 출발이고, 과정이며, 목표 성취에 적합한 것이다. 지상의 나그네 교회는 연약하고 상처받기 쉽고 상황적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이며 포괄적이고 구체적이어서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을 성취케 하신다.
한국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전체 선교계획 가운데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마치 세계선교의 ‘마지막 주자’라든지 ‘선교의 선두주자’라고 교만하거나 허영을 부릴 것이 아니라 겸손한 가운데 주신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에 순종하는 전세계교회는 마치 모자이크의 한 부분처럼 기능하며 온전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낼 것이다. 선교의 위대한 기회를 맞이한 한국교회는 선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시대적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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