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년 여름. 그 이전 668년의 회고담
우리의 이야기는 시간과 인물의 초점을 잠깐 바꾸어 고중상에게로 돌아간다.
아, 아리하! 고중상은 아리하(속말수, 송화강)의 도도한 물을 바라보며, 다물 임금의 아내, 완산일매完山一梅 천국화天國花 매아리梅峨梨가 지었다는 시를 읊고 있었다.
아리하 푸른 물은 저리도 서러워서
천만년 쉬임 없이 울어 울어 흐르나
백의민족 가슴마다 고인 눈물이
못 견뎌 터져 나와 강수가 되었네
그가 시를 읊조리는 소리는 이내, 부여성 밖 아리하 가, 거대한 연무장에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함성소리에 파묻힌다.
아, 이 땅이 어떻게 확보한 땅이던가? 수천의 군사들과 함께 죽기로 서약하고 마침내 얻은 나라가 아니던가?
십팔 년 전(서기 668년) 그날, 고중상과 고구려 군사들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살을 에는 찬바람을 뚫고 속말수 가의 부여성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그 날 밤 부여성을 다물(수복)하지 못하면,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당군에게 항거하다가 함께 죽자고 하늘에 맹세했었다.
하지만 죽고자 하면 산다고 했던가? 삼천 군사가 쫓아오는 당군을 궤멸하기 위해 매복에 나서고, 일천 군사는 길을 우회해 강을 건넌 후, 나머지 군사들이 성안으로 화살을 날렸을 때 그 화살들에는 편지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만든 최후의 우책愚策이었다. 그야말로 천행天幸을 바랄 뿐, 기책奇策은 없었던 것이다.
성문을 열라. 해모수 임금 이십 팔대 손 대고구려 진국장군 고중상
{ 고중상(대중상)과 고조영(대조영)의 혈통에 대해, 그리고 당나라가 대진발해국을 "발해"라고 부른 까닭에 대해 }
1.
고구려의 태조무열제는 발해바다 서편의, 한나라가 설치한 발해군 지역과 그 북쪽을 다물하고 한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그 쪽에 열 개의 성을 쌓았는데<삼국사기><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이때 태조는 고구려 황족에게 그 땅을 맡긴 것 같다. 그들이 이른 바 “발해 고高씨”의 선조들일 것이다.
중국의 당나라가 대중상과 대조영의 나라를 “발해”라고 지칭한 이유가 궁금하다. 어쩌면, 대조영(고조영)은 발해 고씨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한편, <신당서>와 <협계태씨족보> 등을 감안하면, 대중상(고중상)과 대조영(고조영) 일가는, 고구려의 북부 즉 제나부와 제나부의 말갈족을 다스리던 고구려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이 둘을 종합하자면, 대조영 일가는 원래 발해 고씨였으나, 훗날 고구려 북부로 이동해 제나부와 제나부의 말갈족을 다스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대중상과 대조영(고조영)은 그들의 후손인 협계 태씨 태평술의 주장처럼, 해모수의 고손자 고주몽의 후손임이 분명하다(<협계태씨족보> 및 <구당서> 외 다수의 중국사서들 참조).
2.
발해 고씨가 고구려 왕족이었을 가능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서 엿보인다.
발해 고씨 고조용高照容(469-519)이 북위 효문제의 후궁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역사다. 발해 고씨와 고구려황실의 관계를, 그 무렵에 관한 역사적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다.
<위서/열전/고구려> 및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장수황제(394-491)가 죽었을 때, 고조용을 후궁(혹은 그녀가 황후였다는 설도 있다)으로 두고 있던 북위의 효문제(재위 471-499)는 동쪽 교외에서 장수황제의 죽음에 대한 애도식을 거행했다.
이 기록은, 발해 고씨가 고구려황실의 종친이었음을 거의 입증하고 있다. 이건 단순한 외교 관례를 넘는 행위였을 것이다. 자신이 총애하는 후궁 고조용이 장수황제와 가까운 친척관계였기 때문에 효문제가 특별히 애도식을 거행한 게 아닐까?
또한 <위서/열전/고구려>와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고구려의 문자명황제(?-519)가 죽었을 때, 북위의 영靈 태후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식을 거행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문자명황제가 사망한 서기 519년은 북위 효명제 재위(515-528) 시대다.
효명제가 누군가? 그는 선무제의 아들이다. 그리고 이 선무제는, 위에 언급한 고조용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발해 고씨 고조용의 아들 선무제의 정비正妃 영 태후, 다시 말해 고조용의 며느리 영태후가 고구려 문자명황제의 죽음에 애도식을 거행했다는 말이다.
그럼 고조용의 며느리이자 선무황제의 정비인 영 태후는 어떤 인물일까? 그녀는 바로 고조용의 오라버니인 고언高偃의 딸로서 발해 고씨 적출인 것이다. 이 기록 역시, 발해 고씨가 고구려황실의 종친이었음을 입증해준다. 그러므로 영 태후는 자신의 친족인 고구려 문자명황제의 죽음에 애도식을 거행했을 것이다.
한편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 땅에 세워진 후고구려 대진발해국을 복속시키고자, 훗날의 대진국 황제 조영에게 “발해군왕”이라는 엉뚱한 관작을 부여하는가 하면, 당나라에서 진주자사 벼슬을 하던 고무광高武光에게 발해현백伯을, 검교호부상서 고중高重에게는 발해현자子를, 이부상서 고원유高元裕에게 발해현남男 등을 제수했다<발해국지장편>.
그들은 모두 발해바다 서쪽 발해군 땅에 살지 않았으나, 당나라는 고구려 황족인 발해 고씨들을 달래고자 그들에게 그 땅의 백작, 자작, 남작 등 작위를 수여했던 것이다.
3.
고구려 왕족 발해 고씨가 테조 무열제 때 진출한 발해바다 서쪽의 발해군 땅은, 원래 단군조선의 강역이었으며 훗날 위만조선 때까지도 우리 강토였다. 당나라가 대진발해국을 “발해”라고 부른 까닭은, 바로 그 사실과도 연결되어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그 땅을 점령하고자 애를 쓰고, 중국 사서들이 증언하는 대로, 고구려와 백제가 그 땅을 경영했던 것도, 실은 그 땅이 조선의 고토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백제가 요서를 경략했다는 중국 사서들의 기록에 의문을 표한다. 한반도 서남부의 조그마한(?) 나라 백제가 그 땅을 탐낼 하등의 이유도, 국력도 없었다는 억측을 내세우면서 말이다.
하지만, 백제의 요서경략에 관한 사서들의 직간접 기록은 최소한 열 번 이상 나온다.
만일 중국 사서들 앞에 꾸벅 죽으면서도 그 사서들의, 우리나라에 관한 이런 기록을 믿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사서에 그런 기록을 남긴 중국 사가들은, 정신이 나가서 그렇게 기록했는가?
실은 일부 사람들이 중국의 이런 기록들까지 애써 무시하는 이유는, 그보다 앞서 우리의 단군조선 시대사를 멸시천대하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읽으면, 그 땅은 원래 우리의 고토였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이런 말 하는 자를, 혹자는 국수주의자, 과대망상에 걸린 민족주의자라고 칭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를 안다고 자부한다면, 상식적으로 헤아려보라. 고대 우리민족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만주 북부에서 남으로 내려오면서 어느 방면으로 진출하고 어디에 정착했겠는가?
한민족의 조상들이 내려오던 방향에 맞추어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라. 아니 거꾸로 놓을 필요도 없다. 애독자님 같으면 어느 쪽으로 내려가겠는가?
먹을 것을 재배하기 힘들고 맹수도 많은 산악지대로 가서 살겠는가, 아니면 농사짓기 좋은 평야지대로 진출하겠는가?
우리 조상들의 일부가 동부평원으로 진출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동부평원은 중국 북동부의 가장 기름진 평원이다. 이곳을 우리 조상들은 회대淮岱지방이라 일컬었다. 회하와 대산 즉 태산 사이에 있는 지역이란 뜻이다.
태산은 드넓은 평원 위에 홀로 우뚝 선 산이다. 우리말에서, 높거나 크거나 많은 것을 가리킬 때, “태산 같다”는 관용어가 흔히 사용된다. 그 이유를 근원까지 헤아려 보라.
그 때는 동부평원이 무인지경이었다. 지금의 한족은, 우리 조상들, 그들이 말하는 동이족이 동부평원 땅에 정착한 이후 후대에 밀고 들어온 일명 화하족이다.
상고시대로 올라갈수록 중국의 역사가 동이족의 역사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점들에 관해서는 중국의 사가들도 인정한다.
중국의 동부평원과 동부 연안은 단군시대 이전부터 우리 동이족이 정착하고 또 경영한 우리 땅이었기 때문에 고구려도 백제도 한사코 그 땅을 되찾고자 그토록 애썼던 것이다.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몹시도 미워하고, 끝까지 군사를 보내 마침내 멸망시킨 한 가지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아, 만주 땅을 팔아버리더니, 이제는 고구려와 백제의 얼까지 팔아먹고자 하는가! 아, 배달겨레여, 한민족이여, 깨어날진저!
저 백제를 세운 임금은 조상들과 조상들의 고토를 잊지 않고자 성姓까지 조상의 이름인 부여(단군왕검의 4남)로 칭하지 않았던가!
단군왕검의 아들 부여가 다스리던 땅이 바로 고리국(단군조선에 속한 소국가. 대부여, 고구려, 백제, 대진발해국, 고려, 조선, 대한민국 코리아가 모두 그곳을 고향으로 두고 있다)이었고, 고리국은 요서 땅을 포괄하고 있었던 것이다(고리=고구려=고려=코리아). 백제의 요서경략은 바로 거기까지 연원이 닿아있다.
어디 이것이 단순한 추측인가? 고대 역사기록 뿐만 아니라, 고고학의 유물들이 여실하게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그 땅이 속칭 “청동기 시대”와 그 이전부터 우리 동이족이 논밭 갈고 씨 뿌리며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던 우리의 고토였음을.
좌우간 지금의 중국 하북성에 속한, 요서의 발해바다 서편 발해군 땅은 화하족과 우리 동이족이 뺏고 빼앗기를 번갈아 한, 전쟁 다발지역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땅이었다가 나중에는 그곳이 분쟁지역으로 변하고 지금은 중국으로 넘어가 있다.
우리는 이 순서에 몹시 주의해야 한다. 우리 땅 → 분쟁지역 → 남의 땅. 일본이 독도를, 중국이 이어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단군조선과 대부여, 특히 번조선 땅 위만조선의 힘이 약해지고 우리나라가 사십분分오십렬裂 되는 열국시대로 진입하기 직전, 위만조선의 제후, 발해바다 서편지역을 다스리던 예군濊君 남려가 자기 백성 28만호를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는 바람에 그 땅을 거저먹은 중국의 한나라는 그 곳을 처음에 창해군이라 명명했다가 후에 발해군에 합하고, 뒷날에 이르러 발해 고씨 고홍高洪을 그 땅의 발해태수로 임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명목상의 임명이지 실질적으로 발해군을 그에게 맡긴 것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고구려 황족에게 옛 조선의 땅을 맡기겠는가? 고홍이 살던 곳은 수현이었다<발해국지장편>.
발해 땅에 정착해 고구려 황실과 긴밀히 연락해오던 발해 고씨들은 중국의 북위 시대에는 중앙정부와 황실에 진출해 큰 세력을 떨치기도 했다. 전술했듯이, 특히 그들의 딸 고조용高照容(469-519)은 북위 효문제孝文帝의 후궁으로 들어갔다가, 그녀가 낳은 아들 원각元恪이 황제(선무제宣武帝, 재위 500-515년)로 즉위하자, 황태후가 되기도 한다.
4.
고주몽의 후손으로서(태평술의 말) 고구려 황실의 종친이자, 어쩌면 발해 고씨의 자손으로서 고구려 북부(제나부)의 왕족이 되었을 이 사람, 고구려가 망할 당시 서압록(현재의 요하)을 지키던 고구려 진국장군<태백일사/대진국본기> 고중상은, 중국사서인 <신당서>와 <협계태씨족보/발해국왕세략사>에서 걸걸乞乞중상으로 불린다.
이렇게 불리게 된 경위에 관해서는, 본서 제5권 말미를 보라.
열여덟 해 전 그날, 해시亥時(밤 10시 전후)가 되었을 때 고중상의 휘하에 남은 삼천 병사는 성안으로 수천 발의 화살을 날렸다. 고구려 병사들은 모두 활쏘기의 명수들이다.
고구려인들은 어렸을 적부터 경당扃堂이라는 학교에서 글공부와 활쏘기에 전념했다<신구당서>.
삼천 군사는 순식간에 사거리가 가장 긴 편전片箭을 성중으로 쏘아 보내고 후퇴했다.
적진에서 즉각적인 응사應射가 왔다. 수천발의 화살이 마치 비 오듯 이쪽으로 쏟아졌으나 거리가 멀어 당군의 화살들은 고구려 병사들이 있는 곳까지지 도달하지 못했다.
연남건이 당군에게 빼앗긴 부여성을 탈환하기 위해 오만 군사를 거느리고 갔을 때는, 동북부여를 장악하고자 부여성에 배치한 당군의 전력이 막강하던 때였으므로 남건은 평양성을 염려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중상이 부여성에 당도했을 때는, 당군이 평양성을 이미 함락시키거나(<삼국사기><신당서><태백일사/대진국본기>에 의할 경우) 아니면 평양성으로 주력부대를 보내고(<구당서>에 의거해 추론컨대) 부여성엔 소수의 방어 병력 밖에 없던 시기다.
설인귀의 부대를 선봉으로 삼아 당군이 부여성을 공격할 때 부여성의 욕살 고정문이 당군에 항복했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다. 당군은 부여성에 당나라 군대와, 당나라에 항복한 고구려인 군대를 주둔시키고, 고구려 백성 무마용으로 항장降將 고정문을 부여성에 그대로 눌러 앉혔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가 물러간 후 고정문은 마음을 돌이켜 부여성에 배치된 당군을 사로잡고 부여성을 재장악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자 당나라에서는 양현기와 고구려의 항장 이타인 등을 다시 부여성으로 파견해 부여성을 재차 점령하고 고정문을 죽인다. 그 일이 바로 당나라 총장 원년, 서기 668년 한 해 동안에 있었던 일이다.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양현기陽玄基와 이타인李他仁의 묘지명에서 추론할 수 있다. 양현기는 “총장원년(668년)에 배반한 수령인 고정문 등을 죽였다 總章元年··· 誅反首領高定問等.”
이타인은 “조서를 받들어 나아가 부여성을 토벌하고 괴수들을 거듭 죽였다奉詔進討扶餘 重翦渠魁.”
이타인은 당나라에 귀순한 고구려인으로서 귀순 후 당나라에서 받은 관작이 책주도독겸총병마柵州都督兼總兵馬였다. 이는 명목에 불과하지만, 고구려 동북지방의 최고수령이라는 뜻이다.
양현기는 당나라 사람으로 검교동책주도독부장사檢校東柵州都督府長史였다. 다시 말해 당나라 사람 양현기는 고구려인 이타인을 감시하고자, 고구려 부여성의 동북쪽을 맡은, 우리나라 이북오도청의 부도지사 같은 이였다.
이 두 사람, 양현기와 이타인의 부대가 부여성을 다시 당나라 휘하로 거두어들인 것이다.
고구려의 진국장군 고중상이 부여성에 들이닥친 것은, 고정문이 죽고 부여성이 당나라 휘하로 재차 들어간 직후일 것이다. 그 때 부여성 안에는 당나라에 항복한 고구려군대가 존속해 있었다. 그 중 일부가 부여성을 탈환하고자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부여성의 남은 성민들이 당군에 섞인 고구려 항병降兵들과 함께 의거를 일으켜 성문들을 장악한 것은, 마침 우연히도 고중상의 군대가 화살에 편지를 달아, 안으로 쏘아 보낸 뒤 얼마 있지 않아서다.
고중상의 부대가 화공火攻으로 성문을 공격하기 직전이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그 밤, 수년간 특수 훈련을 받았던 열두 용사는 무사히 속말수를 건넌 후 동남쪽 성벽 아래, 치雉가 성벽과 연결되어 있는 모서리로 접근했다. 치는 성벽에 다가오는 적들을 쉽게 발견하고 사격하기 위한 성벽의 돌출부다.
원 성벽과 치 성벽이 구십도 각도로 맞닿은 이곳은, 발견되면 화살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위치이지만, 구조상 발을 딛고 올라가기가 다른 곳보다 더 수월한 편이다.
그들이 밤 고양이처럼 성벽의 치에 접근하고 있을 그 시각, 성문 안에서는 부여성 고구려인들의 의거단義擧團이 성문을 점령하고자 벼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성 밖에서 고려 병사들의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들어 왔다. 용기를 얻은 의거단은 즉시 일어나 성문에 배치된 당나라 병사들을 제압하고 성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진국장군 고중상은 당시에 유명한 고구려의 명장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던 것이다.
고중상의 수천 군사는 함성을 지르며 물밀 듯이 밀고 들어가 당나라 잔당들을 장악했다.
고중상의 주력부대가 북서쪽의 성문으로 밀어닥치는 동안 아우성과 포효 소리가 난무하는 혼란한 틈을 이용해 동남쪽에서도 열두 용사가 무사히 성벽을 올라가 번개처럼 성문을 점령하고 말았다.
양쪽에서 당군 잔당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지만, 큰 희생 없이 그들을 제압하고 부여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숨도 고르기 전, 어느 길로 왔는지 알 수 없는 당나라 잔류 부대가, 고중상 부대의 부여성 진격 정보를 입수하고, 부여성을 지원하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들이닥쳤다[이는 나의 추정이며 역사적 사실과 맞는지 알 수 없다].
고중상은 그들과 일생일대, 건곤일척의 처절한 혈투를 벌이게 된다. 그 혈투는, 물론 고중상 군대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의 부여성은 두 번 빼앗기고 두 번 빼앗기를 거듭한 후, 마침내 고중상의 치하에 들어갔다.
고중상의 군대가 부여성을 재탈환하고 당군을 끝까지 막아 격퇴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당나라와 신라에 항복하지 않은, 동북지방 고구려의 성들은 앞을 다투어 고중상의 세력에 합류하고, 속말수 아래에 있던, 당나라에 항복한 사십여 성도 다시 고중상에게 돌아왔다.
부여성에서 고중상이 제장들을 모아놓고 긴급 대책회의를 연 것은, 거듭 찾아온 당나라 군대를 물리친 직후다. 고중상의 얼굴은 일말의 희망과 기쁨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제장들, 이것은 틀림없는 하늘의 계시요.”
“······?”
장수들이 의아한 얼굴로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지난 구월 보장제께서 연남산을 보내 항복하실 때 그 때 요승 신성의 농간으로 평양성이 함락되었다고 알고 있었으나, 최근 소식에 의하면, 평양성은 요승 신성의 배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남건의 굳건한 방어로 그 후에도 한 달 이상 버티다가 우리가 부여성을 탈환하던 동짓달 초하루 그날에 비로소 함락되었다고 하오.”
<구당서/고구려전>에 의하면, 평양성 함락일은 668년 11월이다.
제장들의 낯빛에 미묘한 기운들이 서린다.
“하늘은 평양성을 불타게 버려두고 고구려를 망하도록 방치하셨지만, 바로 그날 우리에게 단군조선의 고도 백악산아사달, 부여성을 되찾아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단군조선과 대부여, 고구려의 국통을 잇게 하신 것이오!”
고중상의 목소리는 다소 떨리기까지 했다. 그의 말을 듣는 좌중의 얼굴에도 감격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고중상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좌중의 소란이 진정된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군이 신라와 함께 언제 이곳으로 또 다시 물밀 듯 밀고 들어올지 알 수 없소. 지난번에는 천행으로 성을 되찾고 당군을 격퇴했지만, 우리가 이곳에 안주하다가 만에 하나라도 성이 또 무너지면, 부여성은 동북지방의 관문이므로 고토 다물(회복)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소.”
“그렇다면 장군의 뜻은 무엇이오?”
“폐하께서는 이미 항복하시고 나라가 망했지만, 우리가 좀 더 안전한 곳으로 가서 터를 잡는다면 훗날 나라 전체를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오.”
제장들의 분위기는 우려와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고중상의 말에는 어떤 든든한 확신이 넘치고 있었다.
“방어하기도 더 쉽고 힘을 기르기도 더 수월한 곳에 요새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오. 이곳 부여성은 전초기지로 남겨두고, 우리가 힘을 길러 고토를 다물할 수 있도록, 다른 굳건한 터전이 마련되어야 하오.”
“그럼 당나라군에 항복하지 않은 북부여성 아사달(하얼빈)로 올라가면 어떻습니까?”
“그곳은 단군왕검께서 나라를 여신 유서깊은 고도古都이지만, 사방이 광활하게 트인 벌판이어서 자칫하면 몰살당하기 쉬운 곳이오. 내 생각은 환웅임께서 처음에 자리를 잡았던 백산白山(백두산) 아래가 좋을 듯하오.”
“특별히 물색해 두신 곳이라도 있습니까?”
“그곳은 나의 고향이므로 난 그곳 지리를 손바닥 보듯 환하게 알고 있소.”
백두산 지역이 고중상의 고향이라는 기록은, <협계태씨족보>에 나온다.
고중상은 지도를 펼쳐놓고 제장들에게 설명했다.
“여기서 동동남으로 대략 오백여리를 가면 홀한하(모란강)의 서쪽 기슭에 동모산이 있소. 이 산은 위가 넓고 평평한 분지盆地인데 옛 성터가 남아있고, 성터의 주변도 탁 트여 있어서 적이 오는 것을 쉬이 감시할 수 있소. 탁 트인 주변 평지의 바깥사방은 모두 산지라서 동모산과 주변 평지는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소.”
“그렇다면 그 성터를 수리해 그곳을 터전으로 삼고 나라를 되찾자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곳을 흔히 일컬어 밝달성(박다리성, 악다리성, 오동성敖東城)이라고 하는데, 바로 환웅임금의 옛 신시神市 성터라고 전해지고 있소.”
환웅임금의 신시배달국, 단군왕검의 단군조선, 해모수의 대부여, 고주몽의 고구려는 같은 혈통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고구려 황실의 후예 고중상이 백두산 북쪽의 그 옛 성터(동모산)에 집착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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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9. 2. 초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