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소재지 : 光州廣域市 北歐 角化洞 甲坐原(광주광역시 북구 각화동 갑좌원)
○ 주 조 : 긍 기성군11세 묘소 전경(상위) 하위:함일(일사공)
생졸(生卒) : 1389년 고려 창왕 원년~1433년(세종15)
○ 연 역 : 1433년(세종15) 중국사신으로 갔다 오시다가 압록강 첨수참(水站)에서 득병(得病) 순직(殉職)하므로 세종대왕 께서는 훌륭한 인재를 잃었다고 애도(哀悼)하시고 승지(承旨)임은(林垠)을 보내 현 묘원(墓原)인 각화산 갑좌(角化山 甲坐)의 벌에 예장(禮葬)하시고 관곽(棺槨)과 제수비(祭需費)로 米豆(미두) 70석을 下賜(하사)하였다.
○ 서석산(무등산) 천황봉(天皇峰) 줄기를 타고 바람재로 뻗어내려 광야의 광주를 향하여 줄기줄기 이어내려와 조선대학을 만들고 또 여기에서 북으로 뻗어나가 척령산으로 이어져 나가다가 우암마을을 만들고서 각화산(角化山)에 이르러 기성군 할아버지 묘소를 만들었다. 각화산은 무등산에서 삼십리를 끌고와 만든 산이다. 이와같은 명당지에 나라님(세종)은 기성군 할아버지 사패지(賜牌地)로 하사(下賜)하시고 예장케 하시었다. 기성군 할아버지 묘소는 광주 지역에서 이름난 후손들이 융창(隆昌)하는 대길지이다.
■ 기성군행상(箕城君 行狀)
역문(譯文)
공(公)의 휘(諱)는 긍(兢)이요 성(姓)은 이씨(李氏)요 본관(本貫)은 함풍(咸豊)이다. 휘 언(彦)이 있어 비로소 고려조에 태어나 신무위대장군이 되고 함풍군(咸豊君)을 봉(封)하니 곧 공(公)의 시조(始祖)로서 강희(康熙) 38년 기묘(己卯)(1719년)에 사론(士論)으로 함평 사산 유허(咸平 射山 遺墟)에 사당(祠堂)을 세워 존봉(尊奉)하는 곳으로 하였다.
9세조(世祖)휘는 화(和)니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이요 8세조(世祖)의 휘는 상문(尙文)이니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이요 7세조(世祖)의 휘는 순지(順之)니 검교 흥위위대장군(檢校 興威衛大將軍)으로 위대(偉大)한 공훈(功勳)이 있어 영화로운 증직(贈職)이 위로 함풍군(咸豊君)에 미치고 6세조(世祖)의 휘는 림(琳)이니 문과(文科)로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이요 5세조(世祖)의 휘는 요(堯)니 사순위부호군(司巡衛副護軍)이며 배(配)는 구례장씨(求禮張氏)니 사재감 주부 동정 취량(司宰監 主簿 同正 就良)의 따님이다.
오자(五子)를 낳으니 휘 인원(仁元)은 첨서사사(詹書司事)요 차남(次男) 휘 인관(仁琯)은 문과(文科)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이요 차남(次男) 휘 인계(仁桂)는 영동정(令同正)이요 차남(次男) 휘 인검(仁檢)은 영동정(令同正)이요 차남(次男) 휘 인문(仁問)은 탄생하던 날 밤에 호군공(護軍公)꿈에 공자(孔子)가 와서 묻기를 아들을 낳았느냐? 하였으므로 이름을 인문(仁問)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덕(德)이 많고 장성(長成)한 후에는 문장(文章)의 높은 이름이 중국(中國)에 회자(膾炙)하여 대명(大明)에서 등과(登科)하니 벼슬은 시중(侍中)이다.
만년(晩年)에 본국(本國)에 돌아와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를고 영상(領相)을 증하니 곧 공의 고조(高祖)요 증조(曾祖)의 휘는 번(蕃)이니 문과 감사(文科 監司)요 조고(祖考)의 휘는 삼길(三吉)이니 증병조판서(贈兵曺判書)요 부친(父親)의 휘는 춘수(春秀)니 덕행(德行)과 재기(材器)가 있어 세상 사람들이 중인(衆人)을 어거하고 백성(百姓)을 구제할것으로 기대(期待)하더니 문과(文科)에 올라 응교(應敎)가 되었고 때마침 왜적(倭敵)이 수륙해도(水陸海島)를 침략(侵略)하므로 특(特)히 전라수사(全羅水使)를 제수(除授)하니 위명(威名)이 멀리 떨쳐 왜적(倭敵)이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이조판서(吏曺判書)를 증하고 사산사(射山祠)에 배향(配享)하였고 배(配)는 정경부인 안동김씨(貞敬夫人 安東金氏)니 직제학 근사(直提學 謹思)의 따님이다. 2자(二子)가 있으니 차자(次子)는 접(摺)이요 공은 곧 장남이다. 고려 공양왕(高麗 恭讓王) 1년(1389년)에 함평군 나산면 우치(咸平郡 羅山面 牛峙)에서 공을 낳으니 산수의 정기(精氣)를 받아 인품이 준수(俊秀)하고 용모(容貌)가 뛰어나며 덕화가 몸에 갖추었고 충의(忠義)가 강자에 가득하며 문장(文章)과 필법(筆法)이 당세(當世)에 독보하니 본조(本朝)의 인물(人物)로써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記錄)되고 관청의 좌변(坐屛)에 쓰였다. 일찍이 생원 진사 문과(生員 進士 文科)에 오르니 곧 조선조(朝鮮朝) 태종영악 을유(太宗永樂 乙酉)(1405)년이다.
지승문원사 사예(知承文院事 司藝)요 세종 선덕 정미(世宗 宣德 丁未)(1427년)에 중시(重試)에 올라 예조참의(禮曺參義) 이조참의 참판(吏曹參議 參判) 직제학(直提學) 겸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지춘추관(知春秋관) 대사성경연(大司成 經筵) 의금부사(義禁府事) 오위(五衛) 도총부(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숭록대부(崇祿大夫) 이조판서(吏曺判書)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역임하고 기성군(箕城君)에 봉(封)하였다.
전라도(全羅道) 감시관(監視官)으로써 함평(咸平)을 지내다가 시(詩)를 지어 이르되 「자손에게 끼친 덕(德)이 내게 더욱 깊어서 다행(多幸)히 성대(聖代)를 만나 유림석에 참가했네 비단 옷 버젓하게 고향(故鄕)을 찾는 길에 함평의 옛 자취를 이야기로 들었도다.」 선덕 을묘(宣德 乙卯)(1435)년에 매죽헌 성삼문(梅竹軒 成三問)으로 더불어 연경(燕京)에 봉사(奉使)하여 영시(英試)를 맞추고 전자(篆字)를 써서 받치니 황제(皇帝)께서 크게 칭찬하시어 문장(文章)과 명절(名節)이 더욱 중국에 나타났다.
계축(癸丑)(1433)년 5월에 종계변무사(宗系辨使)로 두차례 연경에 사신(使臣)으로갔다가 돌아와 압록강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러 병사(病死)하니 춘추는 44세다. 임종시(臨終時)에 시(詩)를 지어 이르되 「궁전에서 두 번이나 월계화를 꺽었고 상대(霜臺)에서 세 번이나 황제님을 배알했네. 좋은 소식 임금님께 아뢰옵지 못하고 압록강 가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네」 하였다. 어제 제문(御製 祭文)에 이르되 산하의 기운이요 수월(水月)의 정신이로다. 두 조정에 이름나고 백세에 공경하리로다.
승지임은(承旨林垠)을 명(命)하여 제사(祭祀)를 베풀고 광주 편방면(片坊面)(지금의 광주 북구) 각화산 갑좌(甲左)의 벌에 예장(禮葬)하였고. 사림(士林)이 추모(追慕)하여 함평 사산사(射山祠)에 배향(配享)하였다. 대저 함풍군(咸豊君)이래로 관작이 혁혁하고 덕(德)을 쌓은 수백년(數百年)에 공(公)에게 이르러 당대의 공렬이 선조에게도 빛이 있으니 아! 위다하도다.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광산이씨(光山李氏) 대사성(大司成) 초(椒)의 따님이요 판도판서(判圖板書) 순(順)의 손녀요 한림 직학사 숙백(翰林 直學士 淑伯)의 증손이다.
4자1녀(四子一女)가 있으니 장남 휘 백원(伯源)은 남대 정언(南臺 正言)이며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하여 문장 경학(文章 經學) 세상의 으뜸이 되고 좌익 원종공훈(佐翼 原從功勳)에 참여 하였으며 일남(一男)을 낳고 차남(次男)휘 숙문(叔汶)은 상의 직장(尙衣 直長)이니 일남(一男)을 낳고 차남(次男) 휘 중하(仲河)는 이녀(二女)를 낳고 차남(次男)휘 계강(季江)은 사남이녀(四男二女)를 낳으니 여는 정의지(鄭衣智)에게 출가하고 묘(墓)는 각화산(角化山)에 합평하였다.
1917년 정사(丁巳)5월 중순 양성(陽城) 이병수(李炳壽)
咸平李氏 先祖文化遺産總覽에서 발췌 建煥 31世 30世孫
함평이씨기성군파모임
|
첫댓글 2011년 1월 광주에 근무하게 되면서 참배차 들렸습니다.
최근의 사진을 보시려면
http://sandl.kr/150103220882
참조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