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관(倭館) ***
# 왜관이란...?
왜관(倭館)은 조선시대에 일본인들이 무역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조선으로 모여들며 생겨난 곳이고, 아울러 그들이 숙박을 하는 곳이자 통제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건국 이후 이 땅에 발을 디디는 일본인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 왜구(倭寇) :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이 일본의 침공을 실패하고난 이후인 13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연안부나 일부 내륙 및 동아시아 지역을 침략하고 약탈하고 사람들을 납치하며 밀무역을 행하던 일본인(또는 왜인)들로 구성된 해적을 가리킨다.
◆ 항거왜인(恒居倭人) : 세종에서 중종 연간의 약 60년 동안 지정된 포소(浦所:항구)에 머물면서 인근 근해에서 어획 등을 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대마도인들을 지칭하나, 이후로는 왜관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과 관련되거나 불법으로 눌러앉는 일인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 사송왜인(使送倭人) : 사신 명목으로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들에 대한 통칭. 일명 객왜(客倭)라고도 한다. 순수하게 교역을 위해 도항한 사람들은 따로 흥리왜인(興利倭人)이란 단어를 쓰기도 하였지만 조선정부에서는 점차 흥리선(興利船)을 제한하고 사송선(使送船)만 허가를 하게 되었다.
조선건국이래 아직은 선박의 도항과 교역에 관한 확실한 법령들이 제정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왜구의 소굴로 지목된 대마도(對馬島)에 대하여는 군사적 행동을 펼치면서 한편으로는 회유와 항복을 권하여 거기에 따르는 사람에게는 조선의 관직을 주는, 이른바 수직왜인(受職倭人)을 만들면서 일본의 지배계급들에게는 직위에 따라 상아나 구리로 만든 반족짜리 직인을 하사하여 외교문서에는 반드시 이 도장을 날인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일본과 조선의 교류에 의해 초기에는 일인 도항자 가운데 한양에 상경이 허용된 사절을 수용하기 위하여 객관(客館)이 설치되었는데, 중국 사신을 위한 태평관(太平館), 여진인들을 위한 북평관(北平館), 그리고 일인들을 위한 동평관(東平館)이 있었다.
한성부(漢城府)에 속한 5부 가운데 남부(南部) 11개 방의 하나인 낙선방(樂善坊)에 처음에는 동평관과 서평관이 설치되었는데, 오늘날의 중구 인현동 부근이며, 길 맞은편의 먹절(墨寺) - 오늘날의 묵정동 부근의 절 - 과 더불어 일본인 상경객들을 수용하였었다. 하지만 이들의 금수품 매매가 성행하자 동·서평관을 하나로 합쳐 1관으로 하고 높은 담장을 사방에 쌓아 문을 지키면서 잠상(潛商:밀매상)들을 단속하게 하였다. 이곳은 나중에 폐쇄되었지만 왜관동(倭館洞)으로 지명이 남게 된다.
한성 이외의 지역에는 최대 4곳까지 왜인들을 수용했던 왜관이 존재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에는 부산포(釜山浦) 지역의 왜관만이 남아있다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거류민 전관 지역으로 바뀌게 된다.
부산포의 왜관도 두모포(豆毛浦)의 구 왜관(古館)에서 우여곡절 끝에 신왜관 지역인 초량왜관(草梁倭館)으로 옮겨지며 본격적인 왜관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 두모포 왜관에서 초량왜관으로...
처음에 건설된 두모포 왜관(구 왜관)은 여러 가지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바람을 직접 받게 되어있어서 접안이 대단히 어렵고 포구가 왜관과 떨어져있는데다가 좁은 지역에 차츰 늘어나는 왜인들과 시설물들을 수용하기에 한계가 있었으며, 낡고 자주 불이 나는 것도 큰 문제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대마도주는 계속적으로 왜관의 이전과 확장을 건의해왔으나 조선정부로서는 통제하기가 어려운 왜인집단 거주지를 일시에 옮겨간다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명하면서 증.개축을 하는 등의 소극적이고 소규모의 공사만 되풀이하였다.
1667년의 큰 화재로 왜관지역 상당수가 불에 타버린 사건, 그리고 그 직후 일어난 하카다 상인 이토 쇼자에몬(伊藤 小左衛門)의 대마도주 통행증 날인위조 및 밀수사건에 의해 조정은 왜관에 대한 규제와 관리감독을 좀 더 철저히 하기 위하여 왜관의 기능을 충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전교섭을 시작하게 되었다.
= 두모포 왜관
1671년 2월의 교섭사로 왔던 쓰노에 효고노스케(津江 兵庫助 : 平成太)와 승려 겐죠(玄常)는 매우 강경한 어조로 새로운 왜관지역을 요구하고 나섰는데, 조정이 즉답을 피하고 나서자 쓰노에는 접대와 식사 등을 거부하면서 한성으로 직접 올라가 담판을 짓겠다고 하다가 급기야 왜관지역을 이탈하여 동래부로 난입하는 일을 벌이게 된다.
그사이 11월에는 도자기 가마터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왜관지역 거의 대부분을 태우는 일이 벌어졌고, 쓰노에 효고노스케는 뇌졸중으로 생각되는 증세로 쓰러져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왜곡되어 소문이 퍼져나가 할복자살 혹은 독살론까지 제기되며 조정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직접적인 교섭을 차일피일 미루던 조정에서도 차츰 태도를 달리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변하게 된다.
더욱이 1672년 대마도에서는 조선쪽으로의 항행을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사스나(左須奈) 항구를 새로 개통하고 해협을 깊게 파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앞세우며 제포(薺浦:진해 웅천)로의 왜관 이전을 들고 나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결국 1673년 4월 통제영과 가까운 쪽인 낙동강 서쪽지역으로의 이전은 불가하다고 통보하였는데, 이는 낙동강 동쪽지역은 괜찮다는 암시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8월부터는 초량항(草梁項), 다대포(多大浦), 절영도(絶影島:영도) 세 곳의 후보지가 거론되면서 실사에 들어가 다대포는 좁고 절영도는 지형이 좋지않다는 이유로 해서 결국은 초량소산(草梁小山:용두산)을 중심으로 한 초량지역이 낙점을 받아 10월에 정식으로 양측에 의해 결정이 내려졌고 당시 교섭사였던 스기무라 우네메(杉村 采安)는 11월에 이곳의 지도를 가지고서 대마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 초량(草梁)이란...?
부산시의 지도를 잘 살펴보면, 금정산을 거쳐 백양산으로 내려온 큰 줄기는 동쪽의 엄광산으로 갈라져 수정산과 구봉산, 그리고 그 기세를 용두산까지 뻗치고 있고, 서남쪽으로는 구덕산이 받아 그 힘줄기를 아미산과 천마산쪽으로 내리고 있다.
이 두 줄기 능선에 안긴 초량동, 영주동, 동광동 지역과 부민동, 충무동, 아미동, 초장동, 남부민동, 부평동 지역은 모두 ‘새띠’라 불리우는 억새와 띠가 무성한, 구릉과 초원지대였다. 맨 먼저 사람들이 들어와 이곳을 일구고 바다를 무대로 생활터전을 잡은 것은 오늘날의 부민동 지역이 먼저였을 거라고 추정하는데, 그것은 이곳에 처음으로 초량리(草梁里), 즉 풀이 우거진 언덕(등성이)이란 이름이 먼저 붙었기 때문이다. 당시로는 이 일대가 모두 동평현(東平縣) 소속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초량동 산등성이 쪽으로도 마을이 들어서면서 역시 초량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실제로는 바닷가쪽(현재의 중앙로가 바다였슴)에 해정리(海丁里)란 마을이 있었는데, 초량리 쪽으로 산비탈을 포함한 전체를 ‘초량’이라 불렀던 것이다. 중종 39년 제포의 폐쇄와 부산포의 개항시 그전까지만해도 대마도주와 교섭을 하던 것은 동평현령(東平縣令)이었으나, 이때부터 동래부를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로 승격시켜 외교권과 군사권을 부여하면서
왜관의 관리업무를 동래부사가 관장하도록 하였으며, 이후 동평현은 동평면으로 동래부에 편입되면서 부산면이 따로 독립하는 형태가 된다.
즉, 신왜관이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자리잡게되자 여기를 ‘초량왜관’이라 부르게 된 것도 이 일대 전체가 광범위하게 초량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차츰 집들이 오늘날의 초량과 부민동쪽에 들어차게되고 그 거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진 점을 감안하여 결국 부민동쪽, 즉 서구지역의 초량은 구(舊)초량리라 부르고 동구쪽의 초량을 신(新)초량리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1740년에 발간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나타나있다.
이후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구초량을 부민리(富民里)로, 신초량리를 초량리로 처음 부르게 하였다고 하나 즉시 정식명칭으로 등재되지는 않고 있다가 1904년의 동래군 가호안(家戶案)에 사하면 부민동(沙下面 富民洞) · 사중면 초량동(沙中面 草梁洞) 이란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때 혹은 이전부터 분리해서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초량
동에는 오늘날의 초량동과 영주동, 부평동이 포함되고 서쪽의 부민동에는 오늘날의 아미동, 충무동, 초장동, 남부민동이 속해있던 것으로 보인다.
# 초량왜관의 건설...
초량에 새로운 왜관을 건설하기로 약조가 된 다음, 대마도주였던 소우 요시자네(宗義眞)는 바쿠후(幕府)와 조선조정에 사신을 파견하는 공식절차를 밟은 다음, 즉시 사지 모쿠자에몬(佐治 杠左衛門)을 공사책임자로 선임하고 150여명의 공사인부들을 데리고 초량으로 들어왔다. 임시숙소를 지은 이들은 조선인 공사인부들과 더불어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이때가 1675년 3월이다.
초량왜관의 전체 크기는 다소간 기록에 따라 차이가 난다. 애초에 대마도측에서는 동서로 500칸(약 1,000m), 남북으로 250칸(약 500m)의 부지를 요구해왔으나 조정에서는 동서의 길이를 150칸 줄여 350칸만 허용한다고 하였다. 몇 차례의 교섭에 의해 조금씩 변동이 있었고, 마침내 1677년 대마도주와 역관 한시만(譯官 韓時晩)간에 의한 합의로 동서 370칸, 남북 205칸의 면적이 책정되어 공사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는데, 실제의 면적은 문헌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지만 가장 신빙성이 있는 부지면적은 다음으로 추정된다.
* 동면 약 280칸(560m)
* 서면 약 225칸(450m)
* 남면 약 375칸(750m)
* 북면 약 290칸(580m)< 다시로 가즈이(田代 和生) 저 『왜관』>
여기에다 용미산(龍尾山) 부분이 추가되면 거의 10만평 이상의 넓이가 나오며, 이는 구 왜관의 10배, 나가사키의 데지마 상관(商館)의 25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용미산을 중심으로 동면과 남면은 바닷가이므로 큰 문제가 없었지만, 나머지 서-남-북쪽으로는 위수 경계선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남쪽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법천(法川)이란 개울이 있었고, 그 상류에는 초량항(草梁項)으로 불리우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 개울가와 마을 입구가 각각 남쪽 및 서쪽의 경계가 되었다. 또한 북쪽으로는 연향대청이 있었고 이를 지나 구왜관쪽(현재의 초량쪽)으로 바다에 임한 산길을 따라가다보면 초량객사, 통역관숙소 등의 시설들이 산등성이를 따라 있었는데, 이 언덕을 사카노시타(坂の下)라 하였고 그곳을 지나면 구 왜관과의 사이에 민가가 있었는데, 그 민가 앞까지가 북쪽 경계가 되었다.(나중에 이 민가들을 초량쪽으로 철수시키고 담장을 쌓아 설문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경계부분에 조선측에서는 목책(木柵)을 쌓자고 하였으나, 대마도측에서는 흙을 파낸다음 둑과 석축(石築)을 쌓는 이른바 소보리(惣堀) 공법을 이용하자고 끈질기게 나와 결국 양측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석축을 쌓기로 하였다. 그러나 땅이 물러서 제대로 된 돌담이 쌓이질 않자 우선은 흙담을 놓게 되었고, 쉽게 무너뜨리거나 드나들기 쉬운 흙담은 이후에 빈번한 밀무역이나 교간(交姦)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1709년까지 모두 높이 약 6자(1.8m) 정도 되는 석축으로 교체가 이루어졌다.
문은 모두 3개가 설치되었다. 우선, 항구가 있는 동쪽 바닷가에는 바다로 통하는 수문(水門)이 있었는데, 이는 부정문(不淨門) 혹은 무상문(無常門)이라 하였고, 죽은 이를 대마도로 실어나르는데만 사용하였다. 열쇠는 조선측이 보관하고 있다가 필요하면 빌려주었다고 한다. 대마도로 시신을 실어나르는 것은 돈이 많이 들었기에 부자들이나 고위층만이 할 수 있었고, 일반인들은 왜관의 북쪽 복병산의 소나무 숲속에 매장을 하였다.
북쪽의 연향대청 부근에 있던 북문인 연석문(宴席門)은 사절이 왔을때 개방되어 동래부사가 주로 영접하고 임금의 위패에 절을 하는 숙배의식 및 연회와 객사이용을 위해 사용되었다. 연석문은 문의 안쪽에 사각형의 작은 광장을 담을 쌓아 만들고 왜관지역으로 통하는 문을 따로 내어 일본측과 조선측이 각각 잠글 수 있는, 외부세력의 침임을 막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일인들이 유일하게 조선인들과 접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동쪽편에 만들어진 수문(守門)을 통해서였다. 수문은 새벽에 개방되어 일인들이 필요한 부식이나 생활잡화 등을 수문앞이나 왜관 안에서 팔 수 있는 조시(朝市)가 열렸었고, 보통때는 하루종일 개방하여 두었다가 신시(申時) 경이면 폐쇄하였다. 빗장은 바깥쪽 뿐만 아니라 안쪽에서도 걸 수 있게 하였기 때문에 초소인 번소(番所)도 안팎으로 설치하여 양국인의 드나듦을 꼼꼼히 체크하는 감찰(監察)을 두었다.
용미산 바로 북쪽편에 선창을 만들었다. 구왜관의 선창이 거리가 떨어져있고 얕아서 접안이 어려우며 바람을 막을 곳이 없어서 계류하기에 힘들었던 것을 감안하여 남풍을 막아줄 수 있는 용미산을 이용하여 항구시설을 만든 것이다. 용미산에서 바다쪽으로 둥글게 막은 석축의 길이는 42칸(약 84m), 북쪽에서 바다쪽으로 만든 석축은 162칸(약 325m), 양 석축사이로 배가 들어오는 포구(浦口)는 34칸 4자(약 70m)가 되도록 하여 동서가 78칸 반, 남북으로 122칸의 규모가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선창에 2개의 잔교(棧橋)를 설치하였는데, 이 항구공사에는 범어사나 효의사 등에 있던 승려 400여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일 두 나라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초량왜관은 3년동안의 공사 끝에 1678년 4월 가구를 비롯한 짐들을 먼저 넣고 마지막날인 4월 14일 관수(館守)인 히라다 쇼자에몬(平田 所左衛門)을 비롯한 454명의 일본인들이 수문(守門)을 넘어 왜관으로 들어와 낙성식을 하고서 마침내 입주를 하게 되었다.
# 왜관의 모습과 관리
[ 서관(西館) : 3대청(大廳) 6행랑(行廊) ]
새로 만들어진 왜관은 용두산(龍頭山)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들어서있고, 동남쪽의 바다와 접한 용미산(龍尾山)으로부터 북쪽해안에 선창과 포구가 들어서있으며, 그 위쪽으로는 담장이 이어졌다가 출입문인 수문(守門)을 만나게 되며, 수문을 지나면 서쪽으로 담장이 이어지면서 연향대청으로 가는 연석문(宴席門)이 있고 다시 담장이 이어져 초량항 마을 입구에서 다시 법천을 따라 남으로 경계를 지고 있다.
용두산 서쪽에는 3대청(大廳)이 산을 지고 남북측으로 일렬로 늘어서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왜관 본래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객관(客館)이었다. 애초에는 동(東)대청, 중(中)대청, 서(西)대청으로 불렀지만 용두산의 서쪽을 서관(西館), 동쪽을 동관(東館)이라 부르는 것이 통례가 되는 바람에 왜인들은 남쪽 바닷가와 가까운 순서로 각각 다음과 같이 부르게 되었다.(원래이름 = 바뀐이름)
* 서대청(西大廳) = 일특송옥(一特送屋)
* 중대청(中大廳) = 참판옥(參判屋)
* 동대청(東大廳) = 부특송옥(副特送屋)
원래 특송사(特送使)는 정기적인 공물헌납을 위한 세견선과는 달리 일본의 특별한 동향을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기유약조 이후 세견선 역할속에 포함되어 버렸다고 볼 수 있다. 구리도장인 도서(圖書)는 일본의 실력자들에게 조선정부가 발행한 인장으로서, 통교자들임을 인정하는 사인(私印)으로 관인(官印)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기유약조 이후 수도서인(受圖書印), 즉 도서를 받은 일본인은 대마도주 소우씨와 승려였던 겐소(玄蘇), 그리고 대마도주아래 중신이었던 야나카와(柳川)씨 등으로 확대되어 대단히 줄어버린 세견선송사를 보충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특송은 대마도주인 소우씨로부터 직접 파견된 송사로 가장 규모가 컸고, 부특송은 야나카와송사(柳川送使)로 다음으로 사절의 인원이 많았으며, 이들은 각각 일특송옥과 부특송옥에 머물렀다. 참판(參判)은 임시사절인 차왜(差倭)의 일본식 명칭이었다. 그 외의 건물명칭이 없는 사절인 세견선사 일행이나 겐소의 이정암송사 등은 비어있는 곳에 배정을 하였다. 이러한 모든 일본인 사절을 가리켜 첨관(僉官)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서관을 총칭하여 ‘첨관옥(僉官屋)’이라고도 하였다.
각 대청은 다시 중앙의 대청(20칸)이라 불리우는 너른 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칭인 집이 붙어 들어서있는 형태였는데, 한 채의 가로 폭을 합하면 80칸 정도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대청의 양쪽채를 동헌(東軒:35칸)과 서헌(西軒:25칸)이라 하였으나, 대마도에서는 각각의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다.
* 일특송옥 : 제1선 정관가(第一船 正官家), 일특송사 정관가
* 참판옥 : 정관가(正官家), 도선가(都船家)
* 부특송옥 : 부관가(副官家), 정관가
각각의 집 앞에는 뜰이 있고 출입문과 담이 있었으며 각 첨관옥마다 서쪽으로 길게 뻗은 두 채의 행랑(行廊), 혹은 사자옥(使者屋)을 가지고 있어서 이를 6행랑이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수행원들이 묵는 곳이었다.
일단 이 서관에 묵는 사신 일행은 짜여진 공식일정인 연향대청에서의 행사를 마치면 거의 즉시 귀국해야 했으므로 단기 체류자들을 위한 공식객관이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동관에 있던 건물들은 장기 체류자 혹은 거류민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였다.
[ 동관 지역의 대표적 건물들 ]
동관에도 동관을 대표하는 3대청이 있었는데, 각각 관수왜가(館守倭家), 재판왜가(裁判倭家), 개시대청(開市大廳) 이었다.
# 관수왜가(館守倭家:관수가)
관수(館守)란 왜관의 왜인들을 통솔하여 치안을 담당하고 왜관내의 주요한 일들을 주관하는 직책이며, 대마도주 소우씨의 신하였다. 인조 17년(1639)에 처음 파견되었는데, 2년이 임기로서 녹봉은 조선에서 받아왔다. 관수를 교체하게 되면 대마도주는 반드시 오늘날의 신임장과 같은 서계(書契)에 이름을 명기하여 신고해야만 했었으며, 부산포에 도착 즉시 동래부사를 면회하여 다례식(茶禮式)과 연향(宴享)을 행하였다.
관수왜가는 용두산자락 높은 곳에 계단과 석축을 올려 48칸의 집에 75칸의 담장을 두른 일본식의 가옥으로 지어졌으며, 집무실과 숙소가 함께하는 건물이었다. 오늘날 용두산공원에서 부산호텔로 내려오는 높은 계단이 관수왜가가 위치했던 곳이며, 이후 강화도조약으로 폐지된 관수가는 1879년 일본 관리관청이 되었다가 1880년 양풍(洋風)의 일본영사관 건물로 바뀌게 된다.
# 재판왜가(裁判倭家:재판가)
재판(裁判)은 역시 왜관내에 근무하면서 분쟁이 일어났을때 주로 이를 해결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양국간 외교교섭에 관한 직분이 주어졌다. 즉, 양국간에 분쟁이 생기면 우리측의 1년 혹은 2년의 근무연한이 있긴 하였으나, 원칙적으로는 임시직으로서 상주하는 직책은 아니었다고 한다.
재판왜가는 32칸의 일본식 목조가옥에 담장 68칸의 규모로 세워졌는데, 현 타워호텔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개시대청(開市大廳)
개시대청은 공식적인 무역업무를 보던 곳이었다. 이곳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조선의 호조(戶曹)와 동래부사가 지정한 상인(都中)으로서 이전에는 무제한으로 급패(給牌)하였으나, 난상(爛商)과 잠상(潛商:밀거래) 등의 통제를 위하여 개시일(開市日)에 미리 지정된 인원만 물금패(勿禁牌)를 지니고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개시청 내에서만 거래를 확정하고 공식적으로 양측에 통보가 되어야만 하며, 이곳을 나와서 다른 왜방(倭房)에서 따로이 거래를 하는 것은 잠상으로 간주하여 양쪽다 강력히 처벌하였다. 또한 호조에서는 1명의 수세계사(收稅計士)를 파견하여 개시일에 거래에 대한 수세를 하였는데, 대략 1년에 250량을 걷어 왜사의 접대비용에 보태었다.
개시대청은 관수가와 재판가 사이 수문(守門)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으며, 그 날짜는 처음에는 매월 3순(旬), 즉 10.20.30일에 개시하였으나, 이후 매 3,8일로 바뀌어 매월 6회 개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개시대청은 40칸의 규모로서 오늘날 부산호텔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밖에 동관에 있었던 건물들로는 재판가 북쪽의 동향사(東向寺), 관수왜가와 개시대청 사이에 있었던 응장(鷹匠)과 응부옥(鷹部屋), 그리고 관수가를 중심으로 하여 남쪽 아래로 의사옥(醫師屋:醫倭家)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쪽으로 대관가(代官街)를 두었다.
# 대관가(代官街)
대관(代官)은 왜관내에서 실무행정을 맡아보던 대마도주 파견 관리들이었는데, 공사(公私)의 상거래와 왜관내 필요물품출납 등을 맡아보고 있었다. 그들은 관수왜가 남쪽에 무리로 숙소를 겸한 사무실들을 짓고 거주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대관가 남쪽으로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조달이 되지 않는 것들을 가져오거나 만드는 집들, 그리고 일반편의점들로 이루어진 상점가가 있었는데, 고색무역가(藁索貿易家:다다미방), 소주가(燒酒家), 주방(酒房), 목수왜가(木手倭家), 약재무역가(藥材貿易家), 백당가(白糖家:설탕가게), 조포가(造泡家:두부가게) 등이 즐비하게 늘어있었으며, 도자기를 굽는 곳도 있었다.
[ 왜관의 감시 ]
왜관은 수문(守門)과 연향문(宴享門)을 포함하는 3면의 돌담장이 쳐져있었는데, 애초에는 토담으로 시작하였다가 1706년(숙종35)에 돌담장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길이 1,273보(步)에 높이는 6척(尺)이었으며, 연향문의 경우 외측 열쇠는 동래부사가 가지고 있어서 사신에게 연향을 베풀때만 개방이 되었다. 보통때는 외문 밖에서 동복병막의 복병장(伏兵將)이 지키고 내문 안에서는 일본측의 왜인경찰격인 금도왜(禁徒倭) 2명이 지키고 있었다.
왜관의 정식 통문(通門)이자 동문(東門)인 수문(守門)은 오늘날 부산호텔 부근 아래쪽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조석으로 개폐하였는데, 수문직(守門直)은 동래감영에서 10일 교대로 파견되어 매일 군관 1명과 통사(通事:통역) 2명, 그리고 문졸(門卒) 2명이 당번을 서면서 동래부사가 발행한 왜관출입증(첩문:帖文)을 검사하고 왜인들에 대해서는 몸수색을 하기도 하였다.
1720년(숙종46)에는 동래부사 정향익(鄭享益)과 관수 아사이(淺井)가 의논하여 서관 담장 밖인 오늘날의 국제시장과 부평동쪽에 외호(外濠)를 파서 왜인들이 밖으로 월장(越牆)하지 않도록 하였다.
왜관의 경계선 밖에는 조선측의 경계초소가 설치되었는데, 이를 복병막(伏兵幕)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3곳이 운용되었으나, 1739년(영조15)에는 6곳으로 늘렸다. 복병막은 각각 3칸의 막소였으며, 인근 군진에서 파견되어나온 장교 1명과 군졸 2명이 근무하였다. 이들은 몰래 왜관을 빠져나온 왜인들을 붙잡아들이는 일을 하였다. 각 복병소의 위치와 담당은 다음과 같다.
* 동 1 복병막 : 동북쪽 복병산기슭 - 개운포진(開雲浦鎭) 관할
* 동 2 복병막 : 연대청 동남쪽 담장 부근 - 포이진(包伊鎭) 관할
* 서 1 복병막 : 왜관 밖 서북쪽 모퉁이 - 서생진(西生鎭) 관할
* 서 2 복병막 : 왜관 서쪽 담장밖 - 두모진(豆毛鎭) 관할
* 남 1 복병막 : 왜관 담장 밖 서남쪽 모퉁이 - 다대진(多大鎭) 관할
* 남 2 복병막 : 1 복병막의 서남쪽 - 서평진(西平鎭) 관할
오늘날의 복병산(伏兵山)은 이 복병막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밖에 왜관 외곽의 경계초소격인 설문(設門)이 있었다. 숙종 35년(1709:동래읍지 기록) 혹은 숙종 36년(1710:동래부지 기록)에 설치되었는데, 부산진성이나 구왜관지역과 신왜관을 잇는 길에 영선산쪽 꼭대기로부터 동쪽 바닷가까지 수백보의 성을 별도로 쌓고 문을 만들어 왜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하였는데, 이를 설문이라 하였다. 설문은 3칸으로서 동래부에서 파견된 장교 1명은 10일마다 교대근무를 하였으며, 통사 1명과 심부름꾼(走番) 1명은 매일 출퇴근하였다.
# 왜관의 관청과 관리 및 업무
<< 1 >> 주요 관청 건물
설문의 안쪽으로는 우선 (1)초량객사(草梁客舍)가 있었다. 객사는 대동관(大東館)이라고 불렸으며, 정청(正廳)을 사이에 두고 동헌(東軒)과 서헌(西軒), 그리고 좌우 익랑(翼廊)이 있었으며, 중문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사신이 오면 동래부사와 첨사가 이들을 맞아들이고 사신들은 역대 왕들의 전패(殿牌)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숙배의식(肅拜儀式)을 여기서 행하였다.
[중앙이 설문과 초량객사 및 부속관청, 좌측이 연향대청이다]
[초량객사 숙배의식 확대도]
객사의 부속공관으로서는 훈도(訓導:통역관이면서 왜관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직책)가 기거하는 성신당(誠信堂), 별차(別差:훈도를 도와 왜관에서 정기적인 개시가 열릴때 내려보내는 통역)가 거처하는 빈일헌(賓日軒)과 집무실인 별차청(別差廳), 역관(譯官)들이 있던 유원관(柔遠館), 통사(通事:사역원 소속의 역관)가 근무하던 통사청(通事廳), 통인(通引:잔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이 근무하던 통인방(通引房), 사령(使令:관청의 잡일을 맡아보는 사람)들이 근무하던 사령방(使令房), 임금의 명령을 받아 출장을 내려온 관리가 머물던 출사청(出使廳), 별도의 훈도와 별차 집무실인 훈별사령청(訓別使令廳) 및 왜관의 왜인들에게 땔나무와 숯을 지급하던 급왜시탄막(給倭柴炭幕) 등이 함께 있었다.
이들은 현 봉래초등학교 부근에 있었으나, 1909년 영선산 착평공사때 설문과 더불어 없어져버렸다고 한다.
왜관의 북문인 연석(향)문 밖으로는 (2)연향대청(宴享大廳)이 있었다. 연대청이라 불리웠던 이 건물은 가장 중요한 관아 가운데 하나로 왜사(倭使)의 접대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오늘날의 남일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정문의 우측에 복병막이 있었으며, 문은 3칸반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돌담장과 박석이 깔린 뜰을 지나면 돌계단이 있었는데, 총 35칸의 연대청과 왜사들을 접대하는 둥근장소 및 사무실인 공수청(公須廳) 28칸이 있었다. 중심건물에 붙은 유원관(柔遠館) 현판의 의미는 ‘유능극강(柔能克剛)’ ‘유능황복(柔能荒服)’에서 온 것으로 우수한 문화권이 낮은 문화권 국가를 예의로서 선도한다는 뜻이다.
이밖에도 동.서고(庫)와 탄막(炭幕)과 같은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 2 >> 조선측 관리와 업무
1. 접위관(接尉官) - 중앙정부에서 부산포에 파견된 3품 종사관인 경접위관(京接尉官)과 동래부사 혹은 부산첨사가 접위관행사를 할때인 향접위관(鄕接尉官)이 있다. 세견선과 일본 본토에서 중요한 왜사(대차왜:大差倭)가 왔을때 외교권과 통상교섭권을 가지고 이들을 맞은 것은 경접위관이었으며, 이외의 대도주주 파견 소차왜(小差倭)나 중요하지 않는 왜사는 향접위관이 주로 담당하였다. 숙배의식 후 연향대청에 초대하여 외교문서 접수 등 외교교섭과 함께 진상물 교환과 연향을 베풀었다.
2. 차비관(差備官) - 가훈도(假訓導)라고도 하며 동래부에 소속된 교회(敎誨) 혹은 총민(聰敏)직으로 왜어에 능통한 사람으로서 훈도나 별차의 직무를 맡았다. 원래 접위관이 외교문서를 받으면 차비관이 이를 분석하였으며, 조문(弔問) 파견 왜사가 왔을때 접위관 이외에 당상관(堂上官)으로서의 차비관이 없으면 당하관(堂下官) 1명이 배석해야 하는데 이마저 없을 경우 역관 1명이 접위관을 호송하여 차비관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3. 훈도(訓導) - 일어 통역관으로서 왜관사무 전반을 맡아 동래부사와 부산첨사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으며, 관수와 상의한 일의 집행을 맡았다. 부산포 왜관의 근무자는 종9품의 왜학훈도(倭學訓導)였으며, 30개월의 임기동안 성신당(誠信堂) 곁 처소에 기거하면서 솔속(率屬)으로 통사(通事) 2명, 배통사(陪通事) 2명, 소동(小童) 2명, 시군(柴軍) 2명, 관직 2명(館直) 2명, 말 1필을 두었다.
4. 별차(別差) - 교회나 총민 출신으로서 훈도와 함께 왜관주변을 살피고 모든 세법(稅法) 상황과 왜관출입자 및 구왜관을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5. 소통사(小通事) - 훈도와 별차에 속한 왜학학생(倭學學生)으로, 소동과 관직 중에서 차례로 승급하여 30여명 가량을 두었다. 인솔대표를 수통사(首通事)라 하였으며, 왜관의 문들과 복병막, 설문, 기타 관아에 배치되어 왜관과 관련된 잡무에 종사하였다.
소통사 가운데 훈도와 별차에 직속된 자를 배통사라 하였다.
6. 문정관(問情官) - 왜인과 왜선이 조선근해에 표류하였을 때 그들을 구호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로서 왜학학생 가운데 별차로 임용되었다.
이밖에 예단직(禮單直:외교문서의 보관 및 전달자), 과지숙수사령(果支熟手使令:과일과 요리 담당), 마직(馬直:마지기), 시한(柴漢:땔감 운반자), 발군(撥軍:문서 전달자) 등이 있었으며, 무관(武官) 솔속으로는 초탐(哨探:정찰자), 복병장(伏兵將), 수문장(守門將), 설문장(設門將), 고직(庫直:창고지기), 식솔(食率), 대동색이(大同色吏:대동미 관리자), 포도군관과 기타 심부름꾼이 있었다.
<< 3 >> 왜인 관리자와 업무
1. 관수(館守) - 인조 17년(1639) 처음 파견된 이래 대마도주 소우(宗)씨의 신하로 왜관 내의 왜인경찰을 통솔하여 치안을 맡고 왜관의 전반적인 관리를 책임지는 직책이다. 관수를 교체할때는 대마도주가 신임장과 같은 서계를 제출하도록 되어있으며, 부임하자마자 동래부사를 면회하여 서로의 부하들과 다례식 및 연향을 행하였고 녹봉은 조선측에서 지급하였다. 관수왜가는 그의 거처이자 집무처였다.
2. 재판(裁判) - 효종 2년(1651) 처음 인정된 직책으로서 상업적 외교적 분쟁이 왜관에서 발생하면 대마도주의 부하로서 파견되어 분쟁조정을 맡아보는 관리였다. 상주관리가 아니라 임시임용이었고 재직년한은 1~2년이었다. 교대시에는 대마도주가 서계를 동래부와 예조에 제출하였다.
3. 대관(代官) - 인조 13년(1635)에 대관 24명이 대마도에서 처음 파견되어 왜관 내에서의 각종 실무를 나누어 맡아왔다. 숫자는 숙종 10년(1684)에 10명으로 감소하였는데, 주로 공사(公私)의 상거래와 출납을 책임진 하급관리들이었다. 1대관(一代官)은 3대관(三代官)과 더불어 공적인 나무, 숯, 쌀, 문서 등을 주관하였으며, 3대관은 1년마다 교대하였기 때문에 연조대관(年條代官)이라 하였다.
이밖에도 관수왜가 북쪽 용두산 기슭에 자리잡은 동향사(東向寺)에는 중이면서 양국 사이에 왕래하는 문서수발을 담당하는 서승(書僧) 1명과 통사(通詞:역관) 1~2명, 책실(冊室:서기) 1명, 전의(典醫) 1명, 금도(禁徒:경찰) 8명, 응장(鷹匠), 도공(陶工), 나졸(邏卒) 등이 있었다.
[ 왜관의 건설과 관리 ]
“불이 나면 대마도는 그 안(왜관)에 들어있는 재물을 잃게 되지만, 조선은 건물을 새로 짓지 않으면 안된다.” 이 논리는 넓은 왜관을 차지하고자 했던 왜인들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만큼의 넓은 왜관을 차지하고나서 집과 집사이에 빈터를 두거나 돌담장을 둘러 불길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는 등 처음부터 계획도시적인 면모로 집을 지었다.
그들의 필요에 의해 건축물들을 올렸으니 두모포 왜관은 대마도주가 돈을 대고서 건설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 집을 짓는 것도 원래는 대마도측에서 돈을 대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공사 책임자였던 사지 오쿠자에몬은 관수의 급여가 조선조정에서 나온다는 핑계로 관수왜가는 조선측에서 돈을 대어 짓기로 하였다.
그러나 건물 자체는 외양은 조선식인 반면, 내부는 ‘일본식’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즉, 다다미를 넣고 화로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내부 인테리어 모습이었고 조선식 온돌은 설치하지 않았다. 또한 조선에는 없던 목욕탕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동서 3대청과 동관의 ‘일본식’ 집의 목재와 못, 기와 등 건축자재는 모두 조선국내에서 조달하기로 하고 나중에 대마도가 값을 치르는 것으로 하였다. 단, 일본식 내부자재가 필요한 것들은 대마도에서 실어오기로 하였는데, ‘일본식’으로 짓는데 사용된 목재값과 상쇄하기로 하였다.
왜관 건설시 처음에는 흙을 져나르는 인부가 500명, 목수가 300명 정도 동원되었고, 나중에는 그 수가 1,000명까지 늘어나게 된다. 여기에 일본의 목수와 미장이, 톱장이, 잡역부들까지 가세하여 거대한 한-일 공동건설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미 두모포 왜관에서의 축적된 경험으로 한식과 일식의 절충된 건축양식이 협력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농번기가 되면 조선인 인부와 목수들은 일단 철수하고 일본인들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왜관 신축 공사에 들어간 조선인 인부는 연인원 125만 명, 일본인 목수 연인원 2,000명이라는 수치가 나오며, 총 공사비는 조선측에서 지불된 것만 해서 쌀 9천석, 은 6천냥이었는데, 당해연도 공무역(公貿易)에서 상쇄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공사비는 당시 바쿠후(幕府)의 도움없이도 엄청난 무역으로 이윤을 보고 있던 대마도주 측에서 나왔다.
동서의 3대청은 25년마다 대수리(大監董)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필요할때마다 적기에 수리(小監董)를 하였다. 여기에 필요한 유지와 관리보수는 7진(鎭)이 맡았는데, 동래부의 허가를 맡아 부담 경비의 분산 차원에서 7진 이외의 지역에서 경비를 제공받도록 하였다.
[현재의 부산시가지와 초량왜관 당시의 모습을 비교한 지도]
# 개항 이후의 왜관 - 전관거류지
산업혁명을 거친 구미 열강들은 자본수출시장의 확대와 독점을 위하여 개발 후진국의 통상문호개방 및 뒤이은 식민지화에 경쟁이 시작되었다. 중국과 일본은 봉건적인 폐쇄정책을 펼쳤지만 1842년의 중국 문호 개방과 홍콩 할양, 그리고 1854년의 미-일 화친조약으로 양국의 강제적인 개방이 이루어졌다.
봉건적 번주(藩主) 연합체제였던 일본은 개방이후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필요하게 되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천황제(天皇制)의 통일국가를 지향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지방의 호족들은 이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이를 잠재우기 위하여 대두된 것이 바로 정한론(征韓論)이었으며, 그 시작으로 부산의 개항(開港)을 우선 요구하기로 하였다.
당시 조선조정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정하에 철저한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고 어떠한 통상요구도 응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 일본측은 1868년 11월 최초로 왕정복고를 알리는 국서를 대차사(大差使)를 통하여 동래부에 접수하려 하였으나, 그 내용 속에 여태까지 관례로 서계(書契)에 사용하던 호칭과 도장을 일본측에서 바꾸어버려 동래부 훈도가 국서의 수령을 거부하였다.
대마도측에서 외교문서수령을 촉구하는 다른 사신이 왔지만 흥선대원군의 명령을 받고 있던 동래부측은 1872년까지도 이 문서의 수령과 사신의 접견을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1873년 11월 3일 대원군이 하야하자 고종은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쪽으로 외교관계를 선회하게 되었고, 1874년 대마도주를 대신하여 직접 일본 외무성에서 파견된 모리야마 시게루(森山 茂)가 사신으로 오자 대원군측의 부사를 대신하여 부임한 동래부사측은 동래부 비장을 몰래 보내어 비밀리에 접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지지부진한 상태를 일거에 뒤집고자 운요오호(雲楊號) 등 군함을 보내어 부산 앞바다에서 포격시위를 벌이다가 마침내 강화도로 가서 초지진 등을 파괴하자 조정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1876년 무려 8척의 군함이 동원되어 부산포와 강화도에서 시위를 벌이며 새로 부임해온 일본측 전권대신 구로다(黑田 淸隆)는 인천부사를 통하여 사전접촉을 하기 시작하였고, 1876년 2월 11일 강화부 연무당에서 전권대신 구로다와 접견대관(接見大官) 신헌(申櫶) 사이에 첫 회담이 시작되었다.
공방전이 오고가던 끝에 조정은 거의 무력 앞에 그들이 내민 조약안을 받아들여 마침내 1876년 2월 27일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으로 불리우는 12개 항목의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1 관(款) - 조선국은 자주지방(自主之邦)이며 일본과는 평등지권(平等之權)을 보유한다.
제 4 관 - 초량왜관을 패쇄하고 새로운 조관(條款)에 따라 무역항으로 개항하며, 개항지 내에서 일본인이 땅과 집을 임차할 수 있다.
제 5 관 - 나머지 5도에서 20개월 이내에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한다.
제 7 관 - 일본은 조선의 근해에서 자유로운 측량을 할 수 있다.
제 10 관 - 일본인이 조계(租界)에서 조선인과 관련된 죄를 범할 경우 일본인 관원에 의해 처벌받는다.
1관은 청국(淸國)과의 종속적 관계를 끊기위한 내용이며, 4관은 부산포가 개항하여 왜관을 일본인 거류지(居留地)로 조계화함으로써 이땅에 발을 붙여 침략의 교두보를 만들기 위한 것이고, 5관은 원산과 인천 등 다른 지역에도 그들이 발을 붙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7관은 군사적인 침략이 가능하도록 길을 연 것이고 10관은 우리의 이땅에서의 우리의 자주권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우월감을 내세운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불평등조약임에도 조정은 결국 8월 5일 세부적인 우호조규(友好條規)에 서명하였는데, 이 속에는 일본관리의 조선 내지(內地) 여행의 자유화 · 전관 거류지 설치 · 수문(守門)과 설문(設門) 폐지 · 조계내 자유왕래 · 조선인 고용가능 · 상품과 화폐의 자유유통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200여년간 계속되어온 초량왜관은 일본인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로 최초의 조계가 설정되었으며, 그 속의 땅과 집들에 대한 영대차(永貸借)는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으므로 일본영토와 똑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1876년에 82명의 인구가 머물던 이곳은 1880년 402가호 2,066명, 1890년 728호 4,344명, 1900년 1,082호 6,067명, 1910년에는 4,508호 21,928명으로 인구가 유입되어 급속히 일본화되어갔고, 1883년 7월부터는 항구 10리 이내의 자유왕래구역이 기장,김해,명지,양산으로 확대되었다가 1884년 1월부터는 울산 남창, 창원, 마산, 삼랑진, 가덕도, 밀양까지 넓혀지면서 마침내 일본인들은 이 땅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첫댓글 여기는 책이ㅋ
근데 지금의 왜관이 그왜관이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