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작품을 읽고 각자 소감을 대글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1) 휴지 끄타리
신 미 경
“마지막인데, 잠시 들렀다 갈까?”
두 시간 정도 운전 후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의례 화장실을 먼저 들렀다. 칸을 확인하니 제집에서 길게 늘어져 있는 휴지가 보인다. 그 위 얼마 남지 않은 휴지 롤도 세워져 있어 안심하고 들어갔다. 무엇인가 나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심에 감긴 휴지가 얼마 남지 않은, 휴지 끄타리와 눈이 마주쳤다. 빈약한 차림새에 주목을 받자 당황한 듯하다. 나도 늘 봐왔던 모습에 다른 느낌이 들어 당황했다. 누군가의 부지런함으로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상황이리라. 왠지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예전 같으면 휴지의 부재를 대비한 사람을 칭찬했을 테지만 오늘은 자주 살피지 않는 게으름으로 느껴졌다. ‘쓸모가 다 할 때까지 제집에 있게 해줘도 될 텐데’
어느덧 퇴직 이후를 고민한다. 한 자릿수로 남은 정년에, 명예퇴직도 고민이다. 화장실 한 칸에서 쓸모의 끝을 드러내고 있는 휴지 끄타리 같다. 아직 퇴직 이후의 삶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별생각을 다 하네’ 손을 씻고 옷을 털며 생각도 털어낸다. 다시 출발이다. 이제 집이 얼마 남지 않았다.
(2) 가끔은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다
정종수
바람이 분다. 약간의 추위를 느끼게 하는 바람이다. 촉촉이 젖은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다. 거추장스러운 신발을 벗어 던지니 맨몸이 된 것 같다. 빨려드는 땅 기운이 전신을 시원하게 적신다. 날아갈 듯 상쾌함에 눈물이 난다.
키 큰 소나무를 등지고 벤치에 앉았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본다. 유별나게 푸른 하늘이 굴참나무 가지를 헤집고 땅으로 내려온다. 무릎 위에 앉는 하늘빛이 방긋 웃는다. 그 미소에 따스함이 가득하다. 굴러온 밤송이가 발 앞에 섰다. 건너편 밤나무가 쭉정이를 보냈다. 어디서 가을 냄새가 난다.
지나가는 여인의 발이 희고 곱다. 삶의 굴곡이 없기야 했겠냐만 큰 힘 들이지 않고 지나온 것 같다. 나란히 걷는 남자의 발도 희고 곱다. 부럽다. 갈색으로 부어있는 내 발을 슬쩍 당긴다. 부끄럽다. 아차! 미안하다. 그래도 사랑해야 할 내 발인 것을.
삶의 길 위에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았다. 숨 가쁘게 달려온 것도 아니건만, 왜 그리 쉬고 싶었을까? 큰 욕심 없이 살고 싶었다. 실익을 따진 인연이 빛깔나는 양주를 앞에 두고 마주 보는 것을 싫어한다. 오다가다 만난 인연이 선술집 나무 의자에 앉아 대포 한 잔 마시는 걸 좋아한다. 안락한 고급 승용차의 뒷좌석 보다 흔들리는 버스의 뒷자리가 더 편안하다.
정해진 출근 시간 팽개치고 아침 일찍 산길을 걷는다. 마음 가는 데로 몸이 따라가는 것도 순리라면 순리거늘, 어찌하여 몸 가는 데로 마음이 끌려다녀야 했던고. 내가 사랑하는 나의 하루가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 가끔은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다.
(3) 골목은 알고 있다(4)
장원태
골목 입구 갈림길에 섰다. 매번 가는 길이지만 항상 여기서 망설인다. 아내와 생각이 다르다. 집으로 가는 길이지만 아내는 큰길로, 나는 골목길로 가자며 버틴다. 동네 시장을 다녀오는 길이라 둘의 양손에는 장바구니며 꾸러미를 힘들게 들고 있다. 같이 산 세월이 얼마인데 참 사소한 일로 신경전이라니.
쭉 뻗은 큰길 놔두고 왜 으슥한 곳으로 가느냐며 볼멘소리가 까칠하다. 장난감이 마음에 차지 않아 까탈부리는 아이 같다. 이럴 때는 무조건 앞장서서 먼저 내딛는 게 최고다. 골목으로 들어섰는데도 투덜거리는 지청구가 따라온다. 결국 아내는 내가 골목길을 택하는 걸 안다. 그럼에도 수년째 잔소리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골목에 묻어 놓은 추억이 있다는 것을 알라는 일종의 시위이다. 아내가 양보한 것뿐인데 뭐 그리 대단한 승리라도 한 양 휘파람까지 분다.
익숙한 하수구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가난하고 찌든 냄새다. 불쑥 마중 나온 냄새가 싫지만 않다. 마치 제임스 딘의 담배 연기는 향수와 같다는 열혈 팬의 말처럼 딱 그런 느낌이다. 오히려 냄새는 과거로 가는 시간을 앞당긴다. 골목에는 내 젊은 시절 추억이 꿈틀거린다. 고교 자취생 시절, 막다른 골목길 끝 집에서 3년을 보냈다. 시골에서 낯선 도시로 나왔고 매일 연탄불을 갈아야 했던 불편한 일상이 너무 싫었던 시절이었다.
냄새나는 골목길과 좁은 자취방에 따라온 가난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꼬불꼬불 길게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꼭 막다른 곳에 유배된 기분이었다. 여기서 기필코 탈출은 할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왕성한 젊은 혈기로 망나니처럼 골목을 쏘다닌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세상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골목 언저리쯤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대학 동기였던 아내는 우리 동네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조금 더 대로변에 가깝고 고급스러운 골목에서 다섯 명의 동생을 데리고 자취했다. 자취생이라는 같은 삶의 방식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쉽게 사랑에 빠졌다. 자취방 근방 골목길 곳곳에서 들짐승 영역 표시하듯 흔적을 남겼다.
첫 키스의 달달한 추억은 내 자취방 골목 회색빛 담벼락에 숨어 있다. 시멘트를 아무렇게나 덕지덕지 붙여놓은 울퉁불퉁한 곳에 그녀를 밀어붙였다. 등에 와 닿는 시멘트의 이물감 때문에 꿈틀거린 것이 나를 더욱 끌어안는 꼴이 되었다. 그걸 승낙의 표현이나 긍정의 의미로 오해해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어디든 골목길에 들어서면 그날 밤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내는 내가 광적으로 골목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때 사진찍기에 골몰할 때도 골목 사진만 가득 찍어 핀잔을 듣기도 했다. 골목은 옛 추억의 보고이다. 골목길을 걸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어린 나이에 연애한다고 잔소리하던 자취방 주인 할머니도 떠오른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 할머니! 돌아가셨겠지.”
뜬금없은 혼잣말에 아내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눈빛이다. 늦은 시간 대문 삐그덕거리는 소리에 할머니 잠을 깨울까 봐 도둑고양이처럼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다가 들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내가 가보고 싶다고 해 30년 전 자취하던 골목을 찾은 적이 있었다. 골목은 이미 사라졌고 낮은 집들은 모두 4~5층 규모의 빌라촌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 나이만큼 늙은 전봇대는 그대로 있었지만, 골목과 자취방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기억하는 것이 없고 흔적조차 사라졌다면 그건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변하고 잊히는 게 세상 순리라지만 참 감당 못할 슬픈 일이다.
골목 노변의 희미한 가로등과 헤어지면서 내가 과거에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추억 때문에 대로변보다 골목길을 선택하는 건 아닌지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래도 갈치찜에 깔린 무가 더욱 맛있어지는 나이가 되고 보니 시장에 오가며 즐기는 골목길조차 사라질까 조바심이 날 뿐이다.
(4) 나는 무엇을 심고 있는가
최 인 정
숲길을 걷는다. 가마솥을 달군 듯 뜨거운 여름날, 숲속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은 더위에 지친 나를 위무해준다. 편백의 날숨은 나무 깊숙이 품고 있던 피톤치드 향을 내어놓는다. 맑은 향기를 맡으며 번다한 생각도 분주하던 마음도 쉰다. 올곧게 뻗은 편백 숲길을 걷노라니 전남 장성의 축령산이 생각난다. ‘치유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곳. 해발 621m의 산에는 무려 250만 그루의 편백이 자라고 있다. 일제강점기 무분별한 벌목으로 상처 입은 산자락을 구하려고 임종국 선생이 한그루 한 그루씩 심었다고 한다. 산 둘레 어느 길로 가든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편백만이 빼곡하다. 한 사람의 꾸준함이 산 하나를 푸르게 물들인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 부피에. 그도 텅 빈 황무지에 30년간 떡갈나무를 심는다. 씨앗의 1할 만 싹을 틔웠고 또 절반은 자연의 힘으로 없어졌지만 쉬지 않고 심었다. 전쟁 중에도 심은 나무가 살아나자 황무지엔 물이 흘렀고 새들이 노래했다. 바람은 씨앗을 날려 풀이 자라게 하고, 비옥해진 땅에서는 꽃이 피기 시작했다. 땅은 숲이 되었고 사람들도 밝고 온순해졌다. 이제 축령산에도 삶에 지친 사람들이 찾아와 나무가 내어주는 향기로 위로받고 있다. 그들 모두 숲을 이루겠다는 꿈을 꾼 건 아니다. 나무가 사라진 메마른 땅에 희망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올여름은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무더위였다. 더위가 한 달만 더 지속되었으면 지쳐서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풍기는 밤새 쉼없이 돌아가고, 더위를 잘 이기는 나도 잠들기 힘든 밤의 연속이었다. 더운 걸 핑계 삼아 겹겹이 포장된 배달물건으로 냉장고를 채우며 편리함이 최고라고 위로했다. 에어컨 아래 앉아 일회용 컵에 담긴 아이스커피로 더위를 날려도 본다. 편리함과 시원함의 대가로 여름동안 내가 버린 일회용과 에너지는 얼마나 될까. 나무를 심어 숲을 살리는 희망이 아니어도 된다. 다만 내게 물어본다. 환경오염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지구의 심장에 지금 내가 심고 있는 것이 무엇인 지.
(5) 아이스크림의 시간
신진효
'12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둘이서 만나요 부라보콘···.'
광고를 보며 전영록은 매일 부라보콘을 실컷 먹어서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엄마 몰래 마늘을 빼내서 바꿔 먹었던 아이스케키와는 달랐다
도시의 맛이었다.
"우리 한 개씩만 더 먹고 이번 달에는 사 먹지 말자"
자취방에서 용돈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기며 누나가 말했다.
그 말은 도시락 반찬을 온갖 짠지로만 돌림빵 해주던 누나에게 들은 가장 통 큰 제안이었다.
우리는 일 분이면 다 녹여버릴 '부라보콘'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반 시간이나 핥았다.
너무 빨리 줄어드는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친구들 입까지 몇 번을 들락거려도 끄떡없던 눈깔사탕 같기를 바랐다.
까까머리 먹새가 환갑을 따라왔다.
오늘도 2+1 부라보콘을 냉동실 맨 뒤에 숨긴다.
그 동토에는 아내의 잔소리가 닿지 못한다.
외지에 닿은 첫 의식은 늘 아이스크림을 빨며 좌판을 순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낯선 곳은 아이스크림의 성지이고 분별이 사라진 해탈이다.
엄마와 함께 마산 누님 집을 방문했다.
비닐봉지를 들여다본 누님이 입을 틀어막으며 깔깔거린다.
아이스크림에 누나의 하얀 반 백 년이 흘러내린다.
(6) 네발 기기
박 보 현
뽀얀 앞니가 난 아기들을 보면 얼마나 이쁜가. 거기다가 배밀이를 하다 기어 다니기라도 하면 온 집안은 기쁨으로 흘러넘친다. 십 년을 기다려 얻은 귀한 손녀는 무척 늦게서야 앞니가 났다. 이제나저제나 기어 다니는지 궁금했다. 자꾸 묻기도 어려웠다. 제자리에서 버둥대며 맴을 돌뿐이었다. 앉고 기고 서고 하는 것은 때가 되면 줄 당연히 하는 줄 알고 살았다.
애벌레 껍질을 뚫고 나오려 죽을힘을 다한 나비라야 활기차게 날 수 있다는 책을 보던 중이다. 좁은 산도를 빠져나오려 고통을 감내한 신생아는 첫울음을 울면서 폐가 열리고 스스로 호흡이 가능해진다. 이 순간의 에너지야말로 앞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엄청난 힘이 된다. 손녀는 제왕절개로 태어났기에 발육이 늦은 거라며 마음을 달랬다.
아들 내외가 대구에 왔다. 9개월에 접어든 손녀는 한껏 재롱을 떨었다. 눈을 맞추어 웃고 얼굴을 핥고 품 안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런 한편 아들의 얼굴에 뭔가 긴장감이 돌았다. 며느리가 복직할 테니 육아 문제려니 했다.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놨다. 아들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순간 나는 오열했다.
손녀는 요즘 여러 가지 치료를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서울 A 병원 재활센터에 따라가 보았다. 그날따라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나는 치료실 안으로 들어가고 남편은 창문 밖에 서 있었다. 집에서도 운동시켜야 하기에 설명을 잘 들으려 애썼다. 우산 속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는 분명히 웃고 있는데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손녀의 동영상을 받았다. 엉금엉금 네발 기기를 하여 거실에서 건넌방까지 갔다. 그리고 높다란 매트에도 한 번 만에 쑥 올라갔다. 고시 합격이라도 한 것 같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게오르규의 ≪25시≫처럼 닥쳐온다 해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도둑처럼 닥친 고통의 짝은 소리 없이 피는 꽃, 기쁨이려니. 끝 (6.0)
(7) 소통이 뭔가
김 종 성
어린이날을 맞아 서울에서 유치원 다니던 손녀 둘이 내려왔다. 직장을 다니는 며느리를 졸졸졸 따라다니는 네 살짜리 둘째 ‘o림이’가 재미있다. 거실에서 잘 놀던 둘째가 갑자기 울며 보챈다.
“할부지, 배가 아파~”, “밴드 있어?”
‘그래~’
밴드를 찾아주니, 밴드를 배꼽에 갖다 붙인다.
그것을 보고 웃으니,
“할부지, 웃지 마~, 그러캐 웃는 거 실어해”
……
누가 ‘o림아’ 이름을 부르면 대답도 안한다. 대신에 동화책이나 TV에서 마음에 드는 캐릭터 이름, ‘개구리’, ‘무당벌레’, ‘매미’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이야기 속에서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걸까? 손가락이 아프거나 머리가 아파도 손가락과 이마에 밴드를 붙인다. 질문이 많고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질문에 대해 대답을 피하면 싫어한다.
노래를 같이 부르다가 장난삼아, ‘~하구나’를 ‘~하지요’로 틀리면,
“할부지 따라해 봐~, ‘하’, ‘구’, ‘나’~” 하면서 될 때까지 고쳐준다. 자꾸 틀리면 화를 낸다. 소통이 잘 안되면 화를 내며 울어 버린다. 남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것이 어려운데, 그 맹랑한 어린 속마음이 궁금하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엄마는 집에 없다. 아침밥이 먹기 싫어 늦장을 부리면,
“o림아 안 돼~”
아빠는 출근에 바쁜 마음이다. 밥을 다 먹고 먼저 유치원 갈 준비를 한 언니가 미워진다. 그러다 좋아하는 할머니표 ‘멸치볶음’이 보이면, 그릇째로 끌어안고 방에 가서 혼자 밥을 먹는다. 언니가 나를 째려보면 모두들 웃는다.
“할머니, 배가 콕콕 아파~”
“o림아, 울지 마라 할미가 봐줄게, 내 손은 약손이고, ‘o림이’ 배는 똥~배~”
나를 무릎베게에 눕히고 배를 만져주면 금방 나은 것 같다. 이런 할머니와 대화하며 노는 것이 좋지만, ‘딩동~’하며 엄마가 퇴근해 오면, 한 걸음에 쫓아가 안기고 싶다.
어린이 날이라 대형마트에 갔다. 아이들을 카트에 나눠 태우고 쇼핑을 한다. 원하는 과자라도 발견하면 뒤로 던지는 놀이를 하며 다녔다. 아이들이 재미있어한다. 그런데 둘째가 엄마를 처다 보며 심하게 보챈다.
“어디가 아파, o림아 ”,
“응, 배가 아파~?”
아침에 집에서 배가 아프다고 해서 배꼽에 밴드를 붙여준 일이 생각났다. 깜짝 놀라 어리둥절했다. 그 사이 며느리는 아이를 데리고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간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기침도 한다. 결국은 토하고 만다. 진짜로 배가 아팠던 것이다.
질문은 아이의 가장 중요한 대화방식이자, 소통을 원한다는 뜻이다. 아이의 질문에 대응하는 부모나 어른들의 태도가 아이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응방법에 따라 아이가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리라. 가끔 만나는 손녀들은 할아버지를 낯설어 하지도 않고, 얘기도 하며 같이 어울려 논다. 곧잘 질문도 한다. 그때마다 재미있게 대답하려한다. 그런데 배가 아프다는 ‘o림이’의 속마음과 왜 소통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할부지 배가 아파~“
(8) 우리 엄마
홍양순
“엄마, 내일 토요일인데 집에 있어?”
친정엄마에게 전화로 여쭈니 집에 있다고 하셨다.
“엄마 우리 내일 엄마 집에 갈게.”
“피곤한데 집에서 쉬지 뭐하러 오려고 해”
라는 엄마의 말에 반가움이 실렸다. 하룻밤 잠도 못 자고 또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냥 집에서 쉬라고 하면서도 은근히 기다림이 묻어나는 엄마의 목소리에 가슴이 저려온다.
“엄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있으면 돼. 내일 함께 먹을 점심과 저녁 찬거리 다 준비 해 놓았어”
뇌경색과 연이은 교통사고로 몸이 편치 않은 엄마가 행여 먹거리에 마음 쏟을까 염려되어 연신 안심을 시켜드렸다. 시골집으로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미리 하지 않은 연유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오래전부터 딸들이 친정 갈 때마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지키는 규율 같은 것이기도 하다. 오전에 간다는 둘째 딸의 전화에 우리 엄마 또 이른 아침 일어나 유모차에 의지해 대문 밖을 몇 번이나 서성일 테지. 그러다 우리가 도착할 무렵이면 아예 마을 입구 벤치에 앉아서 모퉁이를 하염없이 바라볼 우리 엄마.
(9) 의자 세 개(3)
장 병 문
내가 독서실에서 공부할 때는 의자 두 개만 있으면 잠을 잘 수 있었다. 의자 하나는 엉덩이 밑에 두고 하나는 머리를 받치면 잠이 온다. 책으로 베개를 하면 더욱 편안하다. 의자 세 개면 발 뻗고 잘 수 있다. 남는 의자가 하나 더 있으면 그걸로 발뒤꿈치를 받치면 혈액 순환도 잘 되고 편안한 밤을 보낸다. 그 정신으로 산다. 빈티 날지 모르지만, 내 몸뚱이 하나 너무 호강시킬 생각은 없다.
조수미 씨가 프랑스 대극장에서 ‘아베 마리아’를 부르는 것을 영상으로 보았다. 엄청난 호소력이다. 전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공연을 취소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마라.’는 어머니의 말에 이렇게 자리에 섰다고 했다.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 노래를 들을 것이라고 했다. 정말 천상에 까지 울려 퍼지는 노래 같았다. 관객들이 같이 울었다.
모난 소나무가 산천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누구의 아들은 공부를 잘하여 외국에 가더니 아버지가 아파 누워도 얼굴도 안 보인단다. ‘설 추석 명절 생일 때 찾아와서 안부 묻고 용돈 주는 자식이 진짜 내 자식이지’라고 말한다. 나는 내 아들이 자기 일하고 있을 때 굳이 집 쪽을 바라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내 아들아 옆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네 멋대로 살아라.’
(10) 생의 가장 반짝이던 순간
고진숙
벨을 누르니 젊은 여성이 어서 들어오라며 반갑게 반기었다. 문을 열었더니 긴 복도가 보였고 작은 방이 두 개였다. 거실 없이 싱크대 앞에 식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작은 방을 보여주며 창문을 열었다. 와, 저 멀리 보이는 산 능선이 힘든 나를 확 품어 주는 듯했다. 산은 온통 가을이 붉게 타는 단풍으로 휘감겼다. 창밖을 넋 놓고 보았다. 저 멀리 산이 나를 불렀다. 왜 지금 왔냐고. 떠나기 싫었다.
주인 여성은 나보다 젊었다. 이 집은 자기 외할아버지가 손수 지어 준 집이라고 했다. 식탁도, 책상도 모두 할아버지가 손녀를 생각해서 만들어 준 거라며 자랑했다. 자기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어 급하게 내놓은 집이라고 했다. 바로 구매해 주면 좋겠지만 전세도 괜찮단다. 약간의 돈이 부족했고, 집이 너무 높은 곳에 있어 오가는 길이 걱정이었다. 다시 연락하자면 헤어졌다
앉아 있어도 누워 있어도 작은 방에서 본 산 능선이 아른거렸다. 가을 단풍이 제일 아름다울 때 그곳 풍경과 나는 만났다. 연인이 유혹하듯 꼼짝 못 하게 했고, 자꾸 생각나게 했다. 집이 높은 곳에 있는 것도 감수하자고 했다. 부족은 돈 일부는 부모님께 도움 받았다. 주인 여성이 떠나도 친척하고 나머지 부분은 해결하기로 했다. 드디어 내 집이 생겼다.
그 집을 구하는 돈으로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다. 더구나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집을 구할 수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으로 호사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다른 곳에서는 절대 안 되는 그 무엇을 충족시켰다. 창문을 열었을 때의 풍경에 빠졌던 이유도 그래서 더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서울에서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했다. (5.5)
첫댓글 주제구현에 주목했습니다
(1)얼마 남지않은 퇴직을 휴지에 빗대 고민하는 비유가 좋다
(2) 숨가쁘게 살아 온 지친 삶의 모습이 잘 묘사됐다
(3) 골목에서의 추억어린 성공한 사랑을 재미있게 잘 풀어썼다
(4) 환경오염된 지구에서의 편리함을 자신의 꾸준함의 부족을 탓하는 자조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5) 아이스크림에 대한 사랑이 도시락반찬을 빼앗던 시절의 습관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6) 발육이 다소 늧은 손녀의 네발기기를 바라보는 조부모의 따뜻한 시선이 읽힌다
(7)
(8) 몸이 편치않은 엄마 얘기를 대화체로 쓴 것이 읽기좋다. 애틋한 딸의 마음이 예쁘다
(9) 잘키운 지식을 용서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측은하다
(10) 내 집 마런의 기쁨을 잘 묘사했다
기억에 남는 문장만 골라 봤습니다.
(1) 화장실 한 칸에서 쓸모의 끝을 드러내고 있는 휴지 끄타리 같다.
(2) 오다가다 만난 인연이 선술집 나무 의자에 앉아 대포 한 잔 마시는 걸 좋아한다.
(4) 지구의 심장에 지금 내가 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5) 아이스크림에 누나의 하얀 반 백 년이 흘러내린다.
(6) 도둑처럼 닥친 고통의 짝은 소리 없이 피는 꽃, 기쁨이려니.
(7) 밴드를 배꼽에 갖다 붙인다.
(8) 또 이른 아침 일어나 유모차에 의지해 대문 밖을 몇 번이나 서성일 테지.
(9) 빈티 날지 모르지만, 내 몸뚱이 하나 너무 호강시킬 생각은 없다.
(10) 앉아 있어도 누워 있어도 작은 방에서 본 산 능선이 아른거렸다.
1. 휴지 끄타리/ 신미경
휴게소 화장실에서 남아 있는 휴지 끄타리를 보며 퇴직 이후 삶을 생각한다. 퇴직 후 삶을 너무 걱정하는 듯합니다. 그리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2. 가끔은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다 / 정종수
촉촉이 젖은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다. 걸으며 밤나무를 보며 가을을 느낀다. 앞서가는 남녀의 고운 발을 보며 거친 자기 발을 바라본다. 양주 대신 선술집 대포 한 잔 마시는 걸 좋아한다. 여기까지만 써야 더 괜찮은 듯합니다.
3. 골목은 알고 있다 / 장원택
사라지는 골목길에 대한 아쉬움은 모두가 공감하는 글입니다.
아내에 대한 추억이 많은 골목길이네요.
4. 나는 무엇을 심고 있는가 / 최인정
숲길을 걷는 나를 숲속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더위에 지친 선생님을 위무해 주네요. 그러면서 나무에 대한 고마움.
여름동안 편리하게 사용한 일회용과 에너지는 얼마냐고 묻고 있는 자신에 대한 반성.
환경에 대한 생각, 나무가 숲을 살리듯, 내 삶에 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5. 아이스크림의 시간 / 신진효
부라보콘의 노래를 듣기만 해도 신이 났고, 부라콘의 껍질을 조금씩 벗겨내며 한 입을 물었을 때의 달콤함은 잊지 못하죠.
‘낯선 곳은 아이스크림의 성지이고 분별이 사라진 해탈이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해탈이라는 경지.
6. 네발 기기 / 박보현
십 년을 기다려 얻은 귀한 손녀의 병원 진료 시작으로 안타까워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옵니다. 병원에 안 다니기를 바랍니다.
7. 소통이 뭔가 / 김종성
손녀와 지내면서 아이와 어른의 소통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군요.
8. 우리 엄마 / 홍양순
뇌경색과 교통사고로 몸이 편치 않은 엄마에 대한 딸의 염려와 사랑 이야기. 딸이 아무리 걱정한다고 해도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읽으며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이 났습니다.
9. 의자 세 개 /장병문
어렵게 살아 내게 한 의자.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소프라노 조수미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으로 가려했지만, 엄마의 만류로 공연을 취소하지 않고 계속했다는 이야기.
내 아들에게 ‘네 멋대로 살아라.’라고 하지만 그 말에는 큰 뜻이 새겨져 있네요.
1. 휴지 끄타리
은퇴하는 심정을 휴지 끄타리에 비유가 공감됩니다. 그러나 은퇴를 다룬 '끝난사람(우치다테 마키코 저)'도 끝난사람은 아닙디다.
2. 가끔은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다
리듬 있는 단문이 잘 읽힙니다. 특히 일상에서 인생으로의 반전(넷째 단락)이 좋아요
3. 골목은 알고 있다
골목길의 추억을 상큼하게 건져올리셨네요. 읽는 사람의 추억도 소환해줘서 고맙습니다. 키스할 때 가로등은 좀 침침했을테고. 마침 비라도 내렸으면...
4. 나는 무엇을 심고 있는가
마지막을 종결이 아닌 자신에게 되묻는 열림으로 마무리한 게 좋습니다.
6. 네발 기기
엄청 낙담했을 슬픔의 구체성을 절제함으로써 읽는 이가 더 헤아려보려 하게 됩니다.
7. 소통이 뭔가
그저 귀엽고 말았을 아이의 작은 행동에서 세대 간 소통 문제를 끌어내셨네요.
8. 우리 엄마
짧은 글이지만 어머니의 행동양식이 잘 나타납니다.
9. 의자 세 개
쿨한 아버지일 수 있었던 이유를 독서실의 결핍에서부터 끌어온 비유가 있어 좋음.
(10) 생의 가장 반짝이던 순간
전개가 참 매끄럽고, 집과 연관된 마음이 잘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