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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솔희는 제이의 업체 사무실로 들어와 연습실과 녹음실 등을 둘러 보며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 거리고 있다.
“제이, 그러고 보니깐 에벌린이라는 그 신출내기가 안 보이나 했더니 그만뒀다고? 우리 제이의 호통에 확 쪼그라들고 질질 짜던 미국 소녀 말이야. 프로의 냉엄한 세계를 알긴 안 모양이네.”
“그래두, 우리 후배쟎어. 에벌린은 퇴사하고 보스톤 시내에 있는 UM 주립대학에 편입했어.”
“어머나? 이제 와서 전공을 바꾸겠다고? 따라갈수나 있을려나?”
“그게.......전공을 바꾼다기 보다 성악이랑 합창지휘, 뭐 잡다한 음악이론이랑 교육학 몇과목을 2년간 배우고 음악교사 자격증을 따려 한다는구만”
“와.......! 대박이다. 우리 전문 컨서바토리 피아노 마스터까지 따고 고작 고등학교 음악교사한다고? 시집이나 가서 편안하게 일할걸 찾는 모양이네? 차라리 전공과 무관한 job이나 얻으면 아무도 모르쟎아”
솔희는 그 자리에 있지 않은 남의 가쉽을 들춰내면서 제이와 수다를 떤다.
한두번 얼굴 마주치고 간단한 인사만 나눈 후배의 가쉽을 떠벌인다는 것은 그만큼 솔희가 여유가 확보되어서일수도 있다.
실제 솔희의 얼굴은 이혼 직후 많이 밝아졌다.
그녀를 옥죄이고 있던 그녀의 지위와 처지를 박차고 나온 뒤에 얻은 자유의 표상이었다.
어디선가 솔희의 가슴 한켠에 묵직하게 박혀 있던 웬지 모를 아련함과 아쉬움도 없진 않았지만 바쁜 일과 속에 먼 옛날의 꿈에서 든 생각처럼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솔희는 자신의 이혼 사실을 굳이 떠벌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았고, 바닥이 좁은 그 사회에서는 알음알음 솔희의 이혼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얼굴이 밝아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을 본 많은 이들은 솔희의 결정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었다.
모두들 솔희가 행복해지길 원한다는 덕담을 건냈고, 솔희는 그들의 격려에 한결 편안해지고 일에 집중할수 있게 되었다.
솔희가 유독 딸에게만 엄격했던 엄마의 치하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균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혼이란 또 다른 책임과 의무, 그리고 남편뿐 아니라 주변의 기대가 따르는 것이었고, 솔희는 나름 남편 정균을 통제하고 조종해 가면서 편리한 결혼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해 왔지만 결국 아내라는 위치와 책임에서 온전히 자유로울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별도로 연인을 두고 즐기며 가정도 유지하는 생활이란 것도 사실은 에너지의 소모가 심한 이중플레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자유로운 사랑과 성공이라는 목표에 방해가 되는 부부관계는 끝내는게 맞긴 했다.
시내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제이와 식사를 하고 연주회 관람을 갈수 있게 된 것은 덤으로 얻은 베네핏이나 마찬가지였다.
솔희는 그렇다고 생각보다 제이와 공공연히 데이트를 자주 하지는 못했다.
제이 역시 바쁜 남자였고, 솔희 입장에서도 연애에 깊이 빠지면 그녀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을 것이다.
미국생활 12년차의 솔희도 요즘 어렴풋이 드는 느낌이 있다면, 가정과 부부, 그리고 연애행각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각도 한국과 별 다를바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미국인들은 겉으로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다는것과 개인적 결정을 지지해주는 척하는게 한국과 달랐을 뿐 속내가 똑같다는 것을 느낀 것이, 제이와 공동연주회를 하고 난뒤 제이와 진한 입맞춤을 나눈 사건 때문에 음악인들의 SNS에 달린 충격적인 비아냥 댓글들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특히 불공평하고 모순적이라고 느낀 것은 싱글남성인 제이보다는 당시 유부녀였던 솔희에 대한 비아냥 댓글이 같은 여성 음악인들의 손가락에서 주로 나왔다는 것이다.
(쯧쯧, 지들이 마음 있으면 제이한테 대쉬해서 낚아채던가, 그럴 능력도 없는 것들이 참 별 오지랖은....)
솔희는 제이와 함께 합의하여 너무 공공연하게 시내에서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거나, 자주 만나지 않기로 했으며 서로에게 힐링과 위로가 필요할 때 그전처럼 외곽으로 드라이브 나가서 여전히 운치와 낭만섞인 데이트를 즐기기로 했다.
똑똑한 솔희는 지난번 제이와 함께 했던 1주일간의 여행에서 같이 온전히 붙어있기엔 너무나 피곤한 남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 여전히 긴장과 스릴있는 데이트를 하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생각했다.
또한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기에 제이가 혹시 결혼하게 되거나 혹은 다른 연인을 만나거나 솔희가 재혼을 하게 되더라도 간섭하거나 질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더하여 제이가 결혼하거나 솔희가 재혼한 이후에도 서로의 관계를 들통나지 않을 수준에서 가끔 밀회를 즐기기로도 약속했다.
이혼후유증을 뒤로 한 솔희는 점점 연주활동과 맹연습으로 돌입했다.
“하합, 푸푸, 하합, 푸푸, 하합~”
철푸덕, 철푸덕
정균의 두 발목에 묶인 모래주머니는 가학적으로 그의 발걸음을 늦추고 있다.
솔희를 떠나보내고 난뒤 정균은 매일 퇴근 길에 운동복과 모래주머니를 챙겨 해안가를 내달렸다.
잊으려고 했지만 바로 잊히지가 않는 것이 괴로웠다.
정균은 쿨하게 솔희를 보내 주었다고 자부했지만 결혼생활 중의 솔희의 불충실과 불성실한 일들을 당했던 일, 솔희의 혼외정사를 자각했을때의 일들은 이혼하고 며칠이 지나고나서야 한꺼번에 그의 뇌리를 엄습하여 괴롭히기 시작했다.
기운이 떨어지고 숨이 차올라올 때마다 그는 호흡을 정돈하기보다는 솔희에게 증오스러운 일, 무시당한 일, 그녀의 예민한 언사에 당한 것을 일부러 떠올렸다.
(못 참겠으면 밖에서 다른 여자랑 즐겨요, 업소가시던 다른 애인을 만들던지요. 저 그거 가지고 질투안해요. 남편 사랑 하나 바라보고 사는 여자들과 저는 다르거든요?)
(당신이 제게 한 약속이랑 다르쟎아요, 식언을 하시는 분이라 생각하고 싶진 않아요)
(제가 당신의 가정부도 아니고 섹파도 아니에요, 전 인격적이고 고상하고 고결한 대우를 받고 싶어요. 제가 당신을 그렇게 바라본 눈이 틀리지 않기를 바래요)
거기에 그녀의 예민한 심사가 폭발이라도 하게 되면 정균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물건을 집어던질 듯이 노기를 띠웠을 때의 솔희를 떠 올리며 가학적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샌디에고에서 외박하고 올라와 그의 앞에서 화장한 얼굴을 지워버리고 얼토당토 않은 핑계를 대고, 몰래 세탁기에 속옷으로 추정되는 세탁물을 넣고 도리어 정균에게 주부의 일과를 참견하지 말라며 큰 소리치던 솔희가 생각났다.
주부라는 말을 듣는걸 극혐했고 주부 일도 별로 안한 주제에......
“아, 쒸.....빌어 먹을, 제길!!”
하지만 제이라는 놈과 입을 맞추던 그 동영상, 그리고 그가 목격은 할수 없었지만 그놈과 벗고 나뒹굴고 물고 빨고 물리고 빨리고 하는 두뇌 속의 동영상이 재생되자 그는 급격히 달리기 속도를 올렸다.
솔희가 그의 허락없이 아이를 지워버린후 피임시술까지 받고 도리어 정균더러 결혼 전의 약속을 지키라고 겁박했었다.
정균의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의지이고 그의 아이가 생겨도 낳지 않겠다는 각오를 몸소 보여준 사건이다.
정균은 솔희가 수술받고 온 날, 경악한 상태로 솔희에게 고스란히 당했던 일을 떠올리자 달리기 속도가 더 올라간다.
철푸덕거리는 모래주머니를 떼어내고 전 속력으로 해안가를 달리고 싶었다.
털썩!
내 아내 솔희의 몸속에 제이라는 놈이 배설한 수억마리의 올챙이 비슷한 미생물이 우글거린다는 상상을 하는 순간 속도는 한계에 이르렀고 호흡도, 근력도 다했고 그 자리에서 서서히 멈추어 땅 위에 퍼졌다.
정균의 몸을 천천히 통나무처럼 굴려 갈려 했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모래주머니 때문에 몸을 구르지도 못한채 엉거주춤한 상태로 큰 大자로 누워 짙은 곤색으로 변하는 초저녁의 하늘을 멍하니 바라본다.
“조짐이 이상하던 샌디에고 외박때 그때 잡았어야 했어. 내 입으로 이혼 협박을 해서라도 집에 묶어 놓아야 했어. 딱 한번의 실수로 용인하고 그 이후엔 엄하고 무섭게 해야 했어..........보스톤도 보내지 말아야 했어”
그는 지지난번 솔희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2차로 손찌검을 당하기 직전 그의 손바닥으로 솔희의 어깨를 짓눌러 완전히 굴복시킨 일을 회상했다.
간단한 완력에 솔희는 비굴할 정도로 약해졌고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잘못했다는 자백을 받았다.
냉랭할줄 알았던 솔희는 그때 무척 정균에게 따뜻해졌고 교회를 자의로 나온 사건에 대해 같이 교회 사람들 흉을 보며 정균을 편들어 주었다.
그날 밤에는 정균을 위해선 단 한번도 안하던 화장까지 하고 속비치는 드레스를 입고 잠자리에 들어와 정균의 몸에 착 감겨들어왔었다.
그의 단호한 모습과 실제로 무력행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고 알게된 솔희의 행동은 달랐기 때문이다.
“이래서, 나쁜남자, 나쁜남자 하는거구나. 정균, 이 병신XX, 죽어라, 나가 죽어! 니가 남자냐? 이런 결과를 가져온건 니 때문이야!”
“아니지,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내가 그 여자한테 뭘 잘못했다고오?!”
그는 미친 놈처럼 누워 스스로를 비난했고, 다시 그 비난에 의문을 표하는 독백을 거듭하는 모습이 마치 연극 배우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2층 부부침실로 올라온 정균은 솔희의 손에 의하여 내려지고 뒤돌려진 웨딩포토를 바라보며 다시 마음을 잡았다.
(그래, 이 무거운 웨딩포토를 자기 힘으로 내려서 뒤돌렸다는건 그만큼 그 여자의 의지가 강하다는거겠지. 이만 잊어버리자)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침대 옆의 집전화기가 울렸다.
테이블에 놓여진 휴대폰은 수신을 놓쳤다는 신호가 표시되어 있었고 정균은 잠시 고민하다가 집전화기를 받았다.
전화를 한 사람은 부동산의 L실장이었다.
“아유, 채선생님, 도통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혹시 집전화는 어떨까 했더니 받으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집의 바이어가 나타났는데 선생님이 제시한 조건보다 더 좋은 조건에 딜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손해는 안 보는거죠?”
“손해라니요? 마침 선생님과 사모님이 꾸며놓으신 앙상블 연습실에 필이 꽂히신 바이어에요. 젊은 미국여자분인데 그분도 피아니스트세요, 경제적 여유가 있으셔서 오히려 개조비용까지 쳐드리고 싶다고 합니다.”
부동산 실장은 다만 조건으로 그 피아니스트 부부가 정균 부부를 꼭 보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고, 정균은 아내가 보스톤에 가 있어서 볼수 없다고 말했다.
그 집에 입주하게 될 집 家長은 한국인이라고 했고 정균과 같은 음악매니아라고 전했다.
부동산 실장은 그들 부부가 주말에 정균이 집에 있을때 방문해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했고, 정균은 상당히 성가시고 귀챦을 것 같았지만 어쨌든 집을 좋은 가격에 팔수 있는 기회이기에 수락했다.
“앙상블 연습실 채선생님이 꾸미신건가요, 아님 사모님이 직접 꾸미셨나요? 제 와이프가 그냥 이거에 꽂혀서리........”
주말이 되자 약속한 시간에 강수현이라는 IT 관련 사업을 하는 33세의 한국인 가장과 그의 아내로 Lisa Kang이라는 이름을 쓰는 28살의 아름다운 백인여성 피아니스트가 찾아왔다.
이들은 결혼한지 3년이 되었다고 한다.
3년차면 신혼이라면 신혼이고, 권태기가 있을수도 있는 시기이기도 하고 부부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관록이 붙어가는 시기일 것이다.
정균은 그들의 자기소개를 듣자 정균과 솔희가 이루었던 가정과 공통분모가 많은 이들 부부와 동일시하게 되며 그의 결혼생활 3년차를 생각해 보았다.
솔희는 1년차까지는 정균에게 많이 웃어주었고, 늘 함께 하지 못하는 것에 미안한 티를 내주었기에 견딜수 있었었다.
3년차에 이르러 솔희의 차가움과 냉정함은 전신동상으로 죽어가는 시신처럼 넓어졌었다.
그때 솔희가 잠시 임신했었을 때의 행복감과 만족감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하지만 이내 솔희는 자의로 수술을 받았고 그로 인한 정균이 강하게 받은 패닉과 충격,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절망감에 길길이 뛰던 그는 결국 솔희에게 굴복했다.
거기에 또 절대 잊을수 없는 솔희의 샌디에고에서의 의문의 외박과 다음날 귀가해서 의문의 행동을 한 시기가 그때였고, 그의 결혼 3년차부터 오늘날의 돌이킬수 없는 사태의 씨앗들이 뿌려진 시기였다.
그는 속으로 부아가 났는지 질투가 났는지 강씨 부부를 향해 냉소적인 저주를 퍼부어 대고 있었다.
(분명 이들 부부는 지금쯤 어디엔가 금이 가고 있어. 감수성 예민한 피아니스트이니 성깔 오죽할려고. 남들 안보는데서 선진국 여자가 후진국 남편을 무지 잡아대고 있겠지? 책임감 강하기로 소문난 동양남자 호구 하나 물어서 편히 살고 음악인들 파티에서 만난 동족 백인남성들하고 혼외정사는 기본일거고, 태아도 한두번 떼었겠지, 물론 씨앗이 누구건지 알게뭐야, 저러다가 나중에 애정식었다고 이혼하자고 덤비고 재산 반 갈라서 나가겠지. 이봐요, 강선생! 정신차리고 부인 주변과 행동을 샅샅이 살피라고!)
Lisa라는 파란색 눈동자에 웨이브진 블론디 머리카락의 젊은 미국인 부인은 정균이 솔희와 그 현악 멤버들을 위해 꾸며놓은 방음장치가 되어 있고 창을 강화유리로 바꾼 그 6평 정도의 연습실에 마음이 팔려 연거푸 원더풀, 팬타스틱과 아이 러브 잇을 외치고 있었고 벌써부터 업라이트 피아노를 가져다 놓을 위치를 재고 있었다.
"Wow! Is that your wife? She looks absolutely beautiful, She is not only beautiful but also graceful and elegant!! (와, 이분이 당신 아내인가요? 정말 아름다와요. 아름다울뿐 아니라 기품이 엿보이고 우아하기까지 하네요! )“
리사는 응접실로 나와 아직도 남아 있는 웨딩포토를 바라보며 특히 솔희의 미모에 특별한 감명을 받은뒤 그녀를 칭찬하며 솔희의 웨딩사진에서 눈을 떼지를 못했다.
그러다 리사의 눈의 방향은 웨딩 사진 위의 알수 없는 한자 투성이의 아름다운 붓글씨 현판에서 멈추었다.
“音樂愛好家 主人과 音樂家 夫人의 空氣로 빚는 美麗한 家政”
새 주택 오너가 될 강수현도 그 현판에 필이 꽂힌 듯 한참을 감명받은 듯이 바라보는데 리사가 옆에서 계속 쿡쿡 찌르며 자기도 공유하고 싶다는 눈치를 주었다.
"hmm.....Honey, It does means, ‘"An enchanting home crafted by a music Enthusiast family head and a musician wife"
강수현이 대략 이렇게 아내인 리사에게 번역을 해주자 리사는 백인 특유의 오버스러운 제스츄어로 그 큰 눈을 뜨고 껌뻑거리며 과장된 몸짓을 내보였지만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I was really impressed. Doesn't that writing seem to be about our marriage life?"(나 정말 감동이야, 꼭 우리 가정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아?“)
결혼생활 내내 솔희는 그 현판에 대한 일말의 관심도 눈길도 없었던데다가 이제는 깨어진 가정에 아무 소용이 없었을 뿐더러 그 현판의 진정한 오너가 나타났다는 생각에 그 현판을 새 집주인 부부에게 기증하기로 했다.
”저기요, 강사장님, 원하신다면 제가 이 현판을 놓아두고 가겠습니다. 님의 가정에 정말 잘 어울리는 듯 합니다. 사모님도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채선생님은 어쩔려구요? 채선생님댁도 저희와 공통점이 많은데 말이죠“
”그 서예가 선생님과 저희 부모님과 교류가 꽤 많이 있습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뵌 분이라 어리광부리듯 하나 더 써달라고 하면 써주실것입니다. 강사장님 내외분에게도 어울릴 현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미스터강이 고맙다고 정균에게 인사를 하자, 옆의 귀여운 미국인 아내 리사는 두 사람의 대화의 분위기를 대충 알아들었다는 듯이 그녀도 정균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정균은 그들 부부와 함께 인근의 고급 갈비집으로 내려갔다.
그가 교회를 나오기 직전에 구역담당 목사와 지휘자와 성가대장을 접대했던 곳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은 심정으로 내려간 것이 그들 부부가 절대로 정균을 놓아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정균은 이혼으로 집을 판다는 말을 행복해 보이는 이 새로운 오너가 될 부부에게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이왕이면 새로 이주해 들어올 부부에게 희망과 긍정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정균은 그들 부부에게 솔희가 6개월전 먼저 보스톤으로 떠났고 정균도 최근에 보스톤에서 조건 좋은 직장을 얻었으며, 하루에 한번씩 정균의 아내가 빨리 집을 정리하고 보스톤으로 와서 살림을 합치자고 독촉을 하는 중이라는 거짓말까지 해 놓았다.
의외로 리사라는 그 미국인 부인은 한식을 먹을줄 알았고 젓가락질도 잘했고 남자 둘이 쓰는 한국말의 분위기와 의미를 제대로 잘 파악하고 있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제 사촌여동생이 첼로 전공인데 지금의 리사가 대학원졸업 리사이틀을 하는데 협주를 했죠. 저는 여동생줄 꽃다발을 준비해 갔었고, 뒷풀이를 하는데 여동생이 속이 안 좋아 화장실에 가서 나오질 않는거에요. 그때 리사가 그 꽃다발 자기가 맡아 두겠다고 해서 리사한테 맡기고 바쁜 저는 빠져나왔죠. 크으........그런데, 다음날 사촌여동생한테서 자기 꽃다발 어떻게 됐냐고 따지는 전화가 왔지 뭡니까?“
"에엥? 그래서요!"
"그래서 그 리사이틀한 피아니스트 친구에게 잠시 맡겨뒀다고 말했더니 동생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더군요. 저더러 꽃다발 찾아내라고 난리를 부렸거든요! 그러다가 이렇게 된거에요. 캬아~ 그때 연주회를 가는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미스터강은 살짝 리사의 눈치를 귀엽게 살폈고, 리사는 남편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들었는지 쾌활하게 웃으며 팔꿈치로 남편의 옆가슴을 귀엽게 때린다.
”아이고, 그것참 인연이네요, 리사 사모님이 강선생님을 첫눈에 맘에 들어 했군요, 강선생님같은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그런 용기있는 재치를 부리시다니 역시 서부개척 프론티어의 손녀는 다릅니다! 그런데 부인께서 음악 현업에 계신데 두분이 함께 하실 시간이 부족하진 않으신지요?“
”아뇨? 가끔 주말연주나 저녁연주가 있긴 하지만 그야말로 가끔이죠. 대부분의 저녁과 주말은 같이 지냅니다. 무슨 문제라도?“
”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희 집사람은 하필 모든 연주가 저녁과 주말로만 몰려 있었죠“
”"That's a rare case.(그런 것은 희귀한 케이스인데요)!“
리사라는 여자는 두 사람의 한국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영어로 자신들이 업무외적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강한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어쩌면 그리도 남편 강사장이 궁금해 하거나 알고 있는 것이 있거나, 특정 사물이나 화제에 반응하는게 있다면 남김없이 그녀도 남편 강씨와 공유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몇 달 사이에 부부와 가정생활에 대해 냉소적으로 변한 정균은 저 리사라는 피아니스트 역시 연기를 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교회에 가면 솔희는 정균의 팔짱을 놓치 않으면서 정균을 향해 늘 밝게 웃어주었고 정균은 그것이 연기임을 알면서도 행복해 했었다.
미스터강과 리사는 오버스럽고 닭살돋는 행위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다.
(휴우.......미국여자인데다가 음악가라고? 어떻게 행복할수 있겠어? 최악의 조합이지. 저건 거짓말이고 연기야)
세 사람은 소맥을 들어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고 함께 들이켰다.
미스터강은 리사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정균에게 곤란한 요구를 했다.
아까 이들 부부가 이 식당으로 오는데 차 안에서 리사가 솔희와 통화라도 한번 해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거짓말 한번 하면 그 거짓말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 개의 거짓말이 더 필요하다더니 그는 매우 난감해졌지만 매우 태연한 태도로 새로운 거짓말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 이 시간이 연주회를 하는 시간이에요. 그래서 통화가 지금 안됩니다. 저도 다음주에 보스톤으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전화번호 지역코드도 다 바뀌게 되지요“
”사모님께서도 우리 채선생님 빨리 오시길 손꼽아 기다릴 것 같습니다“
”어휴, 말도 마세요. 집 빨리 처분하고 오라고 난리입니다. 그렇쟎아도 이사올 가정의 주부님이 현역 피아니스트라고 말씀드렸드니 좋아하더라구요, 연습실도 유용하게 잘 쓰길 원한다는 말씀 꼭 전해달래요“
”영광입니다. 사모님께서도 혼자 먼저 보스톤에서 몇 달째 생활하시면 힘드시고 외로울텐데 이제 두분이 합치게 되었으니 저희가 다 기분이 좋네요“
사실 정균이 꾸며준 연습실에서 솔희가 앙상블 멤버들을 끌어들인 것은 두세번 정도에 불과했고 그녀는 그곳에서 개인연습을 한 것이 몇 번 되지 않았었다.
불편하게시리 미스터강이 정균에게 전화번호를 요구했으나 정균은 곧 보스톤 지역번호로 바뀌게 되어 전화번호를 줄수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결국 정균은 미스터강에게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하나 주는 것으로 그들과의 연락처 교환을 마쳤다.
집의 매매 계약서에 싸인하고 새 오너 부부와 식사까지 한 그는 이제 정말 큰 일 하나를 마쳤다.
그리고 정균은 어린 시절부터 모아온 살덩어리같은 클래식 음반들을 주변 도서관과 학교에 기증해 버렸다.
클래식 음악을 떠나 살수 없었던 정균, 클래식 음악을 하는 여성과 결혼해서 그녀를 서포트하면서라도 클래식 음악을 늘 옆에 두고 싶어 했던 정균, 그냥 버림받은 이혼남이 되었다.
그는 만약 클래식음악과 거리가 멀었더라면 이런 불행한 결혼생활과 수치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어린시절부터의 추억이 묻은 클래식 음악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자동차에 고정된 클래식 다이얼도 다른 것으로 바꾸었고 케이블 TV의 클래식 채널도 해지했다.
어느 지역의 한인 봉사단체에 위대한 음악가들의 전기나 음악감상이나 비평을 담은 수십권의 책자들을 기증하고 관계자들에게 인사를 받고 나오는 순간 정균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인생의 1막이 내려가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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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이제 2부로 접어 듭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꾸준히 읽어 주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