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5년 프란시스 프리맨틀과 촉얌 트룽파 린포체가 번역한 영역본(트룽파본)을 토대로
웬츠본과 서먼본을 참고하여 번역한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자료
◇ 티벳(Tibet) 사자(死者)의 서(書)
◇ 유래와 기원
[티벳(Tibet) 사자(死者)의 서(書)]로 잘 알려진 이 책의 티벳어 원제는 [바르도 퇴돌(Bardo Thos-grol)]이다.
여기서 'bar'는 '사이'를 'do'는 '둘'이라는 뜻으로 'Bardo'는 '둘 사이', 곧 죽고 난 뒤와 다시 환생하기 까지의 사이를 뜻한다. 이 책에서는 이 바르도의 기간이 49일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장례후 다시 49제를 지니는 이유도 모두 다 이에서 유래한 까닭이다. [이집트 사자(死者)의 서(書)]와 함께 죽음에 관해 기록해 놓은 티벳 밀교의 경전으로 지금으로부터 1,200년전인 8세기, 티벳 밀교의 대가였던 위대한 스승 '빠드마삼바바(연꽃 위에서 태어난 자라는 의미)'가 저술한 100여권의 책 중 한 권이다.
그는 자신의 저술물과 여러 중요 경전 및 다른 신성한 물건들을 티벳 중부지역인 감뽀(Gampo)언덕에 감췄고 자신을 따르던 25명의 제자들에게 원하는 때에 환생하는 능력을 가르치고 자신이 감춘 그것들(이를 가리켜 테르마라 부른다)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어 세상이 준비될 때마다 테르마들을 하나 씩 세상에 내놓도록 하였다.
이 바르도 퇴돌, 곧 티벳 사자의 서는 그러한 제자들 중 한명의 환생자인 까르마 링빠(Karma Lingpa)에 의해 14세기 경 티벳 중부 감뽀(Gampo)의 어느 동굴 속에서 [환생의 서]와 함께발견되었다.
이 바르도 퇴돌은 빠드마삼바바가 가르친 여섯 해탈의 가르침 중의 하나로 들음을 통한 해탈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바르도 퇴돌에 '바르도 상태에서 들음을 통한 해탈'이라는 부제가 붙게 되었다. 나머지 다른 다섯 해탈의 가르침은 지님을 통한 해탈, 봄을 통한 해탈, 기억을 통한 해탈, 맛봄을 통한 해탈, 그리고 만짐을 통한 해탈이다.
이 모두는 빠드마삼바바에 의해 엮어졌고, 42 평화의 신들과 58 분노의 신들이 그려진 만달라 두 개로 이루어진 사다나(sadhana)와 함께 그의 아내 예셰 쵸갈에 의해 기록되었다.
본 서는 사바대중의 깨달음과 해탈을 염원하는 대원(大圓)님이 불자 및 일반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1975년 프란시스 프리맨틀과 촉얌 트룽파 린포체가 번역한 영역본(트룽파본)을 토대로 웬츠본과 서먼본을 참고하여 번역한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원 저자에게 물음이 있는 자는 buddhaeye@hanmir.com, 또는 옹강산(翁江山) 와송굴(臥松窟)로 연락하기 바란다.
▼ 들어가기에 앞서
《일러두기》: 영문 원서에 나오는 원래의 각주와 역주(譯註)를 제외한 나머지 각주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용어) : 원작의 책 말미에 분류해 놓은 산스크리트 용어풀이의 내용을 원문과 대조하기 쉽게 역자가 각주로 처리했다.
(웬츠) : 웬츠본(W. Y .Evans Wentz, The Tibetan Book of the Dead, Oxford University Press, 1960)에 나와 있는 본문에 대한 각주. 번역은 대부분 류시화씨가 번역한《티벳 사자의 서》(정신세계사, 1996)를 따랐다.
(류시화): 위의 책에서 원서의 각주에는 없지만 류선생이 추가해 달아 놓은 각주.
(서먼) : 서먼본(Robert A. F. Thurman, The Tibetan Book of the Dead, Bantam Books, 1994)의 본문에 대한 해설. 번역은 정창영씨가 번역한《티벳 사자 의 서》(시공사, 1998)를 따랐다.
1) 머리말
《바르도 퇴돌》은 여섯 해탈의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그 여섯이란, 들음을 통한 해탈, 지님을 통한 해탈, 봄을 통한 해탈, 기억을 통한 해탈, 맛봄을 통한 해탈, 그리고 만짐을 통한 해탈이다.
이것들은 빠드마삼바바에 의해 엮어졌으며, 42 평화의 신들과 58 분노의 신들이 그려진 만달라 두 개로 이루어진 사다나(sadhana)와 함께 그의 아내 예셰 쵸갈에 의해 기록되었다.1)
빠드마삼바바는 이 경전들을 중부 티벳의 감뽀(Gampo) 언덕에 감추었다.
감뽀는 위대한 스승 감뽀빠(Gampopa)가 나중에 그의 승원을 세운 곳이다.
많은 다른 경전과 신성한 물건들이 이런 방법으로 티벳의 여러 곳에 감추어졌다.
그것들은 테르마(terma)라고 불리며 ‘숨겨진 보물’이라는 뜻이다.
빠드마삼바바는 그의 뛰어난 25명의 제자들에게 테르마들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바르도 퇴돌은 후에 이 제자들 중 한 명의 환생자인 까르마 링빠(Karma Lingpa)에 의해 발견되었다.
2) 해탈이라는 말은 이 경우, 누구든 이 가르침에 접하는 자는-열린 마음이든 의심을 하든-이 보물에 담겨 있는 전승의 힘을 통하여 순간적인 깨달음을 일별(一瞥)하게 된다는 뜻이다.
까르마 링빠는 닝마 전통에 속해 있었지만 그의 제자들은 모두 까규 전통에 속해 있었다.
그는 이 여섯 해탈의 가르침을 제 13대 까르마빠인 되듈 도르제에게 처음 전승했으며, 되듈 도르제는 제 8대 트룽파인 규르메 텐펠에게 전승했다.
이 전승은 트룽파 계보인 수르망 승원에서 계속 유지되어 왔고 그곳으로부터 다시 닝마 전통으로 되돌아와 퍼졌다.
이 가르침을 배우는 제자는 두개의 만달라에 대해 완벽하게 정통하여 그 자신의 체험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사다나 명상법을 익히고 경전을 공부한다.
나는 이 전승을 여덟 살 때 받았다. 그리고 나의 스승에게서 이 가르침을 익혔다.
스승은 또한 나에게 죽어 가는 사람을 다루는 법을 이끌어 주었다.
그 후 나는 일주일에 보통 네 번 정도 죽어 가거나 죽은 사람을 방문했다.
그러한 죽음의 과정에 대한 끊임없는 접촉은 특히 가까운 친구나 친지들을 바라보는 것은, 덧없음이라는 개념이 철학적 견해보다 더욱 생생한 체험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 전통의 제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로 간주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가르침을 서양의 학생들에게 적용하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다나 명상법도 가까운 장래에 번역되어 이러한 전통이 완전히 성취될 수 있기를 바란다.
촉얌 트룽파, 린포체
Chogyam Trungpa, Rinpoche
2) 서문(緖文)
우연의 일치로 나는 이 서문을 계곡 건너 강톡을 바라보고 있는 시킴의 룸텍 승원에서 쓰고 있다, 강톡은 반세기 전《바르도 퇴돌》의 첫 영어판을 카지 다와삼둡이 번역하고 에반스 웬츠가 편집한 곳이다.
이 새 번역은 에반스 웬츠에게 헌사된 출판 시리즈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은 그들과의 연결이 그 이상임을 말해 준다.
그들의 작업은 널리 알려져 있고 불교에 대한 많은 관심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판에 대한 필요성이 요청되었다.
에반스 웬츠는 스스로 그의 서문에서 대답을 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그는 그들의 작업이 ‘선구자적인 성격’임을 인정했다.
그들의 작업 후, 특히 티벳에서 많은 고승들이 탈출한 이래 티벳 불교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학문적 주제가 아니라 현재 서양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살아 있는 전통이다. 이러한 상황이 번역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텍스트의 실제적인 적용, 그리고 그것의 생명력과 솔직한 정신의 전달이 크게 중요하게 되었다.
1971년 버몬트에 있는 타이거 명상공동체의 한 방에서 촉얌 트룽파 린포체는《티벳 사자의 서》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그 내용은 이 책의 해설에 포함되어 있다.
세미나 기간 동안 그는 티벳 원전을 사용했다.
반면 청중들은 에반스 웬츠본을 사용했다.
번역과 표현의 스타일에 관한 질문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 결과 새로운 판을 마련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번역에는 칼상(E. Kalsang)이 1969년 바라나시에서 발행한 티벳판과 세 개의 목판본이 함께 사용되었다.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몇 개의 탈락된 부분과 오류는 목판본을 참조하여 바로 잡았다. 그러나 이 네 개의 판본은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완전히 일치했다.
그런 까닭에 이전의 번역과 꽤 많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발견한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아주 세세한 부분은 그만두더라고 언급해야 할 눈에 띠는 항목이 몇 개 있다.
카지 다와삼둡은 번역에서 원래의 용어를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여 여러 차례 바꾸었다.
각주에서 편집자(웬츠)는 티벳 판본-필사본 하나와 목판본 하나-을 사용했으며 가끔 번역자(라마 카지 다와삼둡)가 잘못된 어떤 단어들을 바로 잡았다고 부기 했다.
이러한 변경의 대부분은 다른 판본에서도 발견되는 신들의 대응 방식, 상징 색 등을 일치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다음과 같다.
(참고한 판본은 1960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출판한 The Tibetan book of the Dead이다)
95 페이지 각주 3번에 여성성의 ‘쿤투장모’는 남성성의 ‘쿤투장포’로 바뀌었다.
이렇게 바뀌어 두 번 나온다.
그러나 이 줄의 전체 요점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진 마음의 합일을 상징하는데 있다.
에반스 웬츠는 이것을 같은 페이지 각주에서 언급했고 다음 페이지 각주 3번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그나 번역자가 잘못으로 간주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106 페이지의 ‘matter’(물질, 우리는 ‘form’이라 번역)과 109페이지의 ‘consciousness’(의식)는 비록 목판본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각기 첫째 날과 둘째 날에 나타나도록 하려면 서로 바꾸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108 페이지와 111페이지에서 배우자인 ‘상예찬마’와 ‘마마키’도 바뀌었다.
114페이지의 넷째 날에 아귀(굶주린 유령)들의 빛이 붉은 빛으로 되어 있고, 117 페이지 다섯째 날 아수라(질투의 신)들의 빛은 초록 빛으로 되어 있다.
반면 이번 판에서 이들의 빛은 각기 노란 빛과 붉은 빛이다. 여섯 세계의 색깔은 124 페이지와 174 페이지에 다시 나오는데 거기서 에반스 웬츠는 티벳어에 대한 각주를 달고, 색깔의 변경은 번역자가 한 것이며 그는 붓다들의 색깔과 일치시키기 위해 색깔을 바꾸었다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불교의 도해(圖解)는 완벽하게 일관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명백한 불규칙은 빈번하게 일어나며 항상 그 뒤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네 판본은 에반스 웬츠의 목판본과 일치하며,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필사본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치는 수정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역 사이의 차이점은 특히 불교 용어법에서 발견될 것이다. 원래의 불교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산스크리트에서 유래)로 쓰여졌고 7세기 이후 티벳어로 번역되었다.
당시 티벳어는 어떤 고차원적으로 발전된 사상의 체계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았으므로 불교는 큰 어려움 없이 채택될 수 있었다.
실제로 새로운 철학적인 언어가 불교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20세기 유럽어로의 번역은 완전히 다른 상황을 일으킨다. 서양의 사상은 동양과는 아주 다른 노선을 따라 발달해 왔다.
그래서 만일 철학이나 종교 어휘를 영어로 바꾼다면 그 영어 단어는 불교의 원래의 뜻과는 아주 다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연상과 함축을 내포하게 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의 산스크리트 단어를 완전히 대신할 수 있는 영어 단어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산스크리트 단어는 읽는 사람의 마음에 잘못 연상될 가능성이 없으나 산스크리트 단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바르도 퇴돌》이 티벳어로 쓰여진 것이지만 어떤 용어는 원래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유지하였다. 신들의 이름 또한 산스크리트어로 쓰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모습으로 더 많이 알려졌고 다른 자료에서 확인하기도 더 쉽기 때문이다. 비록 이 특별한 판본에서는 일관되지 않지만 이러한 관례는 종종 티벳 번역자들도 따르고 있다.
두 개의 티벳어 ‘바르도’(bardo)와 ‘이담’(yidam)을 소개하는 것은 아마 일관성이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한가지 이유는 단순히 이 단어를 쓰는 것이 가장 쉽다는 것이고 또 이 책의 주요 독자가 될 불교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아주 친근한 말이기 때문이다.
바르도에 대한 가능한 번역인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는 자주 반복되면 어색해진다. 이 말의 산스크리트어는 ‘안타라바바’(antarabhava)이며 친숙하지 않은 용어이다.
그것은 이러한 가르침이 인도에서보다 티벳에서 더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티벳불교에서 쓰이는 이담이라는 말은 ‘선택된 신’(chosen deity)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이쉬타데바타(istadevata)와는 다른 함축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힌두교와 친밀한 말이다.
그것은 ‘보호신’(protective deity) 또는 ‘수호신’(tutelary deity)으로 번역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 용어는 모두 개인적인 수호자나 보호자로 행동하는 외부적 존재의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담의 참된 의미는 완전히 내부적이고 정신적인 것이다.
이담은 존재 자신의 근본적인 속성의 표현이며, 그 속성과 관련시켜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의 모든 가능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의인화된 모습으로 영상화된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을 가장 잘 표현한 몇몇 단어들이 현대 심리학 언어의 일부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서양의 어떤 심리학파는 종종 서양 철학이나 종교보다 불교에 더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죄에 대한 개념은 필연적으로 원죄, 범죄, 그리고 처벌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대부분의 서양 가르침에서는 다른 여지가 없다. 대신 불교는 죄와 고통의 근본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이런 원인이 존재의 중심으로서 자신의 자아(self)나 에고(ego)를 믿는데서 생긴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믿음은 원죄 때문이 아니라 무의식 또는 존재의 참된 성품에 관한 무지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이 그릇되고 외곬수적인 관점을 통하여 전 생애를 경험하기 때문에 진정한 세계를 알 수 없다. 이것이 세계는 비실재(非實在)라고 말해지는 바로 그 의미이다.
그에 대한 치료는 환상을 꿰뚫어 보는 것이고, 거짓된 것의 부재인 비어있음(空)에 대한 통찰에 이르는 것이다. 비어있음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은 광휘(光輝, luminosity)이다.
그것은 참됨의 현존이고 삶의 활동이 일어나는 근본 바탕이다.
상태, 생각의 신경 패턴, 그리고 무의식의 영향 같은 개념의 말이 이 책에서는 의례적인 종교 용어보다 더 적절해 보인다.
이 책의 해설에서 나오는 신경증(neurosis)과 편집병(偏執病, paranoia) 같은 단어들은 병리학적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마음상태의 자연발생적인 결과를 표현한 것이다.
‘투영’(透影, projection)이라는 말은 우리가 자신의 마음가짐에 의해 물들여진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 그것은 티벳어 낭(snang)을 번역한 것이며, 기본적으로 내부적이든 외부적이든 간에 ‘빛’ 또는 ‘현상’(appearance)을 의미한다.
카지 다와삼둡은 이것을 ‘생각모양’ (thought-form) 또는 ‘환영’(vison)으로 번역했다. ‘투영’은 이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구분을 넘어선다.
이 책과 관련된 불교 심리학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의 해설에 언급된 상세한 설명에 대한 기초로서 유용할 것이다.
존재의 집중된 자아상태(ego-centred state)의 전개는 오온(五蘊)의 체계에서 분석된다. 온(skandha)의 문자적인 뜻은 무더기(heap) 또는 집단(group)이지만, 그것의 의미는 ‘정신적인 구성 요소’ 라고 할 때 더 잘 전달된다.
첫 번째 구성 요소는 물질(form, 色)로, 개체성과 분리된 존재의 시작이며 주관과 객관으로 들어가는 경험의 경계선이다.
지금 외부 세계에 대하여 아직 발달되지 않은 ‘자각’(self aware)이 있다. 이 순간 자아는 주변 환경에 대하여 반응을 한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인 느낌(feeling, 受)이다. 그것은 단지 본능적인 좋아함, 싫어함 또는 무관심 같은 것으로, 아직 충분히 발달되지 않는 감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즉각적으로 집중된 실재(centralised entity)가 수동적일 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재반응을 통해 더욱 복잡하게 변한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인 인식(perception, 想)이다. 그것의 최고조의 감각 상태에서 자아가 자극을 느끼면 자동적으로 그 자극에 대하여 반응한다.
네 번째 구성 요소는 의지(concept, 行)이며 인식에 따르는 지적이고 감성적인 판단 행위를 포괄하고 있다. 그것은 물건을 모으고 성격과 행위의 패턴을 조성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인식하는 감각과 마음의 결합인 의식(consciousness, 識)이 있다, 이제 자아는 그 자신의 이미지를 사방으로 투영한다.
이 책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자신의 투영을 인식하여 진실의 빛 안에서 자아의 감각을 분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혼란스럽고 무지한 마음의 상태인 이들 다섯 정신적인 구성 요소는 깨달음의 인자가 된다.
그들은 초월적 또는 정화된 모습으로 변화되는데, 그러한 모습은 다르마타(dharmata) 바르도에서 처음 닷새 동안 나타난다.
이러한 환영을 체험하는 동안, 존재의 여섯 세계 또한 나타난다. 이들은 혼란된 마음의 여섯 가지 중요한 상태이다.
자세한 것은 이 책의 뒤에 있는 <해설>에 쓰여 있다. 그들은 또 그 특별한 강박관념의 포기를 가능케 하는 대안과 함께 나타난다.
그것은 집중된 실재의 보호에 집착하기를 그치고, 대신 자신을 지혜와 일치하는 표명(表明3), manifestation) 속으로 용해시킨다.
이 ‘지혜들’은 다섯 여래의 만달라이다.
여래(如來, tathagata)의 문자적 의미는 ‘이와 같이 온’ 이며 그것은 ‘본질을 갖춘 자’로 바꾸어 쓸 수 있다.
그것은 붓다-‘깨달은 자’-와 같은 말이며 자이나교의 ‘승리를 거둔 자’와도 같은 말이다.
그래서 그 다섯 여래는 완전히 깨달은 의식인 불성(佛性)의 에너지가 지니고 있는 다섯 가지 주요 양식이다.
그들이 구체화하는 특성은 다섯 지혜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또는 마음의 상태인 윤회계에서 이 에너지들은 다섯 가지 독 또는 혼란된 감정들로 나타난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 장소, 사건 등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다섯 중의 하나와 연결된 탁월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또한 다섯 가족들(families)로 알려져 있다.
만달라의 중앙에 위치한 첫 번째 여래는 바이로차나(비로자나불)이다.
그는 다른 모든 것들의 발전과 고립되어 있는 혼란 또는 고의로 무시하는 무지의 근본적인 독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는 또 모든 것이 참모습으로 존재하는 무한하고 모든 곳에 두루 미치고 있는 공간인 다르마다투(法界)이다. 이것은 무지의 반대이다.
그는 최초이고 중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가족은 단순히 여래 또는 붓다 가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름은 또 무지의 반대를 의미한다.
두 번째 여래는 만달라의 동쪽(인도 전통에서는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악쇼비아(아촉불)이다. 다른 판본에서는 악쇼비아가 중앙에 나타나고 바이로차나가 동쪽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그들의 속성이 바뀌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왜 하얀색과 푸른색이 첫째 날과 둘째 날에 나타나는지, 왜 가끔 만달라 양식에서 명백한 혼동이 생기는지를 말해 준다.
악쇼비아는 바즈라(금강저)가족의 지배자이며 그의 독은 적대감 또는 증오심이다.
이것은 거울 같은 지혜로 변화되며, 그 거울 같은 지혜는 모든 것을 고요하게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비춘다.
만달라의 남쪽 부분 왼편에 있는 라트나삼바바(보생불)는 라트나 가족의 지배자이다. 라트나는 보석이라는 뜻으로 특히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소원성취 보석이다.
그래서 여기의 독은 무엇이든 많이 소유하는데서 생기는 자만심이다.
서쪽 편의 위에는 아미타바(아미타불)가 나타나며, 그의 가족은 파드마(padma) 즉, 연꽃이다. 그는 모든 것을 걸신들린 듯이 움켜쥐려는 열망과 욕망을 상징한다.
이 독에 대응하는 지혜는 분별이며, 그것은 열망에 침착함과 초연함을 제공하여 자비로 변형되게 한다.
마지막으로 북쪽의 오른편에는 카르마 가족의 아모가싯디(불공성취불)가 있다. 여기에서 카르마(Karma)는 행위를 의미하며 칼이나 십자형 바즈라로 상징된다.
질투심이 카르마와 관련된 독이며,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행위로 몰고 가는 탐욕스러운 야망에서 생긴다. 반면 그것의 깨달은 양상은 모든 행위를 성취하는 지혜이다.
다섯 여래는 많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해설에서 묘사되고 설명되어 있다.
그들은 또 그들의 여성 모습과 보살 감화력을 동반한다.
붓다들은 삶의 흐름을 넘어 존재하는 초월적인 깨달음의 속성을 구체화하는 반면, 보살원리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을 위한 활동적인 임무의 하나이다.
보살들은 다섯 지혜의 활동으로 나타난다. 여성 에너지는 그들을 완성시키고 그들의 완벽한 표현을 허락하는 풍부한 성분을 제공한다.
이들과 이 책에서 나타나는 다른 모든 신들은 실재에 비친 만물의 표정으로 기술되었다. 그들은 다양한 에너지의 표현을 구체화한다.
그 에너지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존재로서 체험하는 에너지이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삶을 에너지의 견지에서 지각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의 영향은 항상 우리에게 미치고 있다
해설에서 트룽파 린포체는 그들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말인 감정, 속성, 환경, 삶의 방법, 행위, 사건 등으로 번역했다.
그래서 이 책은 비록 표면상으로는 사자(死者)를 위해 쓰여졌으나 사실은 산자를 위한 것이다. 부처님은 사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질문은 지금 여기에서 진실을 찾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생의 교리, 존재의 여섯 가지 모습,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는 중간의 바르도 상태는 이번 생과 많은 관련이 있다,
그러한 것들이 또한 사후에도 적용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사람에게 바르도 퇴돌을 읽어 주는 목적은 그가 생전에 수행했던 것을 그에게 환기시키기 위해서라고 자주 강조되었다.
이 ‘사자의 서’는 우리에게 삶의 방법을 안내해 줄 것이다.
프란체스카 프리맨틀
Francesca Fremantle
3) 바르도(Bardo)에서 들음을 통한 대 해탈(解脫)
스승님, 세 카야님4),
아미타 부처님, 무한한 빛, 다르마카야님,
평화와 분노의 연꽃 신들, 삼보가카야님,
파드마삼바바, 존재의 보호자, 니르마나카야님께,
존경의 예를 올립니다.
바르도 상태에서 보통 능력을 지닌 요가 수행자를 위한 해탈의 방법인 이《들음을 통한 대 해탈》은 서문, 본론, 그리고 결론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서문은 인간 존재의 해탈법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누구든 최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확실하게 해탈시키는 가르침5)들을 공부해야만 한다 .
그러나 만일 그런 가르침들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그는 의식의 사출6)을 수련해야 한다. 그것은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에서 그것을 생각하자마자 해탈되는 수련이다.
이것은 확실히 보통의 능력을 지닌 요가 수행자들을 해탈시킬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런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다르마타 바르도7)에서 이《들음을 통한 대 해탈》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요가 수행자는 먼저〈임종시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관찰함으로써 해탈에 이르는 지침서8)〉에 의거하여 죽음의 징조들의 순서를 조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이 확실하게 완성되었을 때 그는 그것이 생각되자마자 자발적으로 해탈하는 의식의 사출을 실행해야 한다.
만일 사출이 성취되었다면《들음을 통한 대 해탈》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시신 곁에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읽어 주어야 한다.
만일 시신이 없다면 죽은 사람이 쓰던 침대나 의자에 앉아 진리의 힘을 선포9)하고 그의 의식을 불러 그가 앞에 앉아 듣고 있는 것을 상상하며 읽어야 한다.
이때 울부짖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좋지 않으므로 가족 친지들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만일 시신이 있다면 그때는 호흡이 멈추었을 때부터 동맥의 맥박이 멈출 때까지의 시간 동안 그가 사랑했고 신뢰했던 스승이나 진리의 형제10)가 이《들음을 통한 대 해탈》을 그의 귀에 가까이 대고 읽어 주어야 한다.
《들음을 통한 대 해탈》의 가르침 : 만일 재물(齋物)을 구할 수 있다면 삼보11)님께 정성들인 공양물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럴 수 없다면 무엇이 되었든 음식을 올리고 그 나머지 음식은 제한을 두지 않고 올라가 있는 것을 생생하게 마음으로 그려야 한다.
그리고〈부처님들과 보살님들께 구원을 청하는 기원문〉을 일곱 번 또는 세 번 읽고 난 후〈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로부터 구원을 청하는 기원문〉과〈여섯 바르도의 중요한 싯구〉를 크게 암송해야 한다.
그 다음에《들음을 통한 대 해탈》을 일곱 번 또는 세 번 읽는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에서 광휘12)를 설명하는 부분과 다르마타 바르도에서 안내할 때 대단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 부분, 그리고 생성 바르도에서 자궁의 입구를 닫기 위한 가르침이 있는 부분이 그것이다.
4)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Bardo)
<역주: 이 번역본에는 원래 상황을 알려주는 소제목과 날짜의 구분이 되어 있지 않지만, 읽어주는 사람의 이해를 돕고 실제로 죽은 사람에게 읽어 주는 부분을 쉽게 하기 위해 웬츠본을 참고하여 몇 개의 소제목을 달았다.
웬츠본에는 바르도를 치카이 바르도, 초에니 바르도, 시드파 바르도의 세 단계로 크게 나누고 있다. 이 책에서 그것은 각각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 다르마타 바르도, 생성 바르도에 해당된다.>
비록 지성적이기는 하지만 가르침을 받고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알아차렸더라도 수행을 거의 하지 않은 모든 종류의 보통 사람들에게 이 부분을 읽어 주면, 그들은 근본 광휘를 알아차려 바르도 체험을 거치지 않고 태어남이 없는 다르마카야(법신)에 도달할 것이다.
가르침의 방법 : 만일 생전에 그가 가르침을 청했던 스승이 있다면 가장 좋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와 함께 삼마야 서약14)을 했던 진리의 형제나 같은 계통의 영적인 친구가 좋다.
그도 아니라면 크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누군가가 그것을 여러 번 읽어 주어야한다. 이것은 그에게 스승이 설명해 주었던 것을 기억하게 한다. 그러면 그는 즉시 근본 광휘를 알아차리고 틀림없이 해탈될 것이다.
가르침의 시기 : 호흡이 멈추었을 때 프라나15)는 지혜의 통로 속으로 흡수되고, 광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일에서 벗어나 의식 속에서 분명하게 빛난다.
만일 프라나가 역류되거나 좌우의 나디16) 속으로 달아나면, 바르도 상태가 갑자기 나타난다. 그러므로 프라나가 좌우의 나디 속으로 달아나기 전에 읽어 주어야 한다.
호흡이 끊어진 후 내부의 맥박이 머무는 시간은 단지 한끼 식사에 걸리는 시간이다.17)
가르침의 방법 : 만일 호흡이 막 멈추려고 할 때 의식의 사출이 실행된다면 가장 좋다. 그러나 만일 실행되지 못했다면 누군가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 (이름)이여! 이제 당신이 좁은 길을 찾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호흡이 멈추자마자 당신의 스승께서 이미 가르쳐 주었던 첫 번째 바르도의 근본 광휘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다르마타18)입니다. 그것은 공간처럼 열려 있고 비어 있으며, 밝은 허공이고 중심부도 가장자리도 없는 순수하고 숨김없는 마음입니다.
그 순간 알아차리고 그 상태에서 머무십시오. 저 또한 동시에 당신을 안내해 드릴 것입니다.”
그가 호흡을 멈출 때까지 그의 귀에 대고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하여 그의 마음에 굳게 심어져야 한다.
그리고 나서 호흡이 멈추는 것이 들릴 때 그를 오른쪽 옆구리가 바닥에 닿게 눕혀 사자의 자세19)를 취하게 하고 잠을 일으키는 목의 두 동맥을 맥박이 멈출 때까지 강하게 눌러야 한다.
그러면 몸의 중앙 통로로 들어간 프라나가 되돌아 나오지 못하고 확실하게 브라만의 구멍20)을 통하여 나오게 될 것이다.
이제 가르침을 읽어 주어야 한다.
이 첫 번째 바르도 시기에 다르마카야의 왜곡되지 않은 마음인 다르마타의 광휘가 모든 존재들의 마음에 나타난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 상태를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호흡이 멈춘 후부터 맥박이 멈추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프라나가 중앙 통로 속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것의 지속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영적인 상태와 요가 수행의 수준에 달려 있다. 수행을 많이 했고 평정의 명상 수행으로 확고한 신념을 지닌 민감한 사람들은 오래 지속된다.
그런 사람을 안내하기 위한 노력으로 그의 몸에 있는 여러 구멍에서 고름이 나올 때까지 이 가르침을 반복하여 읽어 주어야 한다.
악하고 둔감한 사람에게는 이 기간이 손가락을 한번 퉁길 정도의 시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한끼 식사시간 정도 지속된다.
대부분의 수트라와 탄트라21)에서 이 무의식 상태가 4일 반 동안 지속된다고 하므로 일반적으로 그 정도의 기간 동안 광휘로 안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가르침의 방법 : 만일 그가 할 수 있다면, 그는 스스로 이미 주어진 가르침에 따라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스스로 할 수 없다면, 그때는 그의 스승 또는 사형 사제 또는 가까운 친구였던 진리의 형제가 곁에 머물며 죽음의 징조들의 순서를 큰 소리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읽어 주어야 한다.
“이제 흙의 자취는 분해되어 물이 나타나고, 물은 불로, 불은 공기로, 공기는 의식으로 분해됩니다.”
죽음의 순서가 거의 완료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을 갖도록 그를 격려해 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당신의 생각들이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혹은 만일 그가 영적 스승이라면,
“오, 스승님, 스승님의 생각들이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이 말을 그의 귀에 대고 부드럽게 말해 주어야 한다. 임종자가 진리의 형제 또는 다른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 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죽음이라 불리는 것이 이제 도착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죽음의 시간에 도착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죽음을 이용하여 오직 친절하고 자비로운 깨달은 마음의 상태를 지닐 것이다.
그리고 허공과 같이 한량없는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중생들을 위한 이 특별한 시간에 나는 죽음의 광휘가 다르마카야(법신)임을 알아차릴 것이고, 최상의 깨달음인 위대한 상징의 상태에 이르러 모든 존재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할 것이다. 만일 내가 이것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바르도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바르도에서 분할할 수 없는 위대한 상징의 모습을 얻어 허공과 같이 한량없는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무엇이든 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행위를 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잃지 말고 당신은 생전에 가르침을 받았던 모든 명상 수행을 기억하고 수련해야 합니다.”
이 말을 그가 한순간도 주의력을 흩뜨리지 않고 그의 수행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입술을 그의 귀에 가까이 대고 명료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
그 다음 그의 호흡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 그의 마비된 동맥을 강하게 누르고 다음의 말로 그를 환기시켜야 한다.
만일 그가 영적 스승 또는 뛰어난 영적 친구라면 다음과 같은 말을 해야 한다.
“스승님, 지금 근본 광휘가 스승님 앞에 비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수행 상태에서 오래 머무십시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안내해 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 (이름)이여, 잘 들으십시오. 지금 다르마타의 순수한 광휘가 당신 앞에 비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 순간 당신의 마음 상태는 본래의 순수한 비어있음(空) 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질도 아니고 색깔 같은 그런 속성도 아닙니다.
그것은 순수한 비어있음입니다.
이것이 다르마타이며 여성 붓다인 사만타바드리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의 상태는 단지 아무 것도 없는 비어있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걸림이 없고 생기에 차 있으며 순수하고 기쁨으로 진동하는 비어 있음입니다.
이 마음은 남성 붓다인 사만타바드라22)입니다. 이 두 당신의 마음, 어떠한 물질이 아닌 비어있음의 속성인 당신의 마음과, 기쁨으로 진동하고 밝게 빛나는 당신의 마음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다르마카야23)(법신)입니다.
이 당신의 마음은 엄청난 빛의 덩어리 모양으로 존재하는 분리할 수 없는 광휘와 비어있음입니다. 그것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영원한 빛24)입니다.
이것이 전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신 마음의 이 순수한 본성이 바로 부처임을 알아차릴 때, 당신 자신의 마음을 찾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에서 머무는 것입니다.”
이 말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세 번 또는 일곱 번 반복해서 말해 주어야 한다.
첫째, 그것은 이전에 그의 스승이 설명해 주었던 것을 그에게 환기시킬 것이다.
둘째, 그는 그의 순수한 마음이 바로 광휘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셋째, 알아차림으로써 그는 다르마카야와 분리할 수 없는 하나가 되어 틀림없이 해탈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첫 번째 광휘에서 알아차린다면 그는 해탈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그가 첫 번째 광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때 두 번째 광휘가 비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호흡이 멈춘 후 한끼의 식사시간이 지나면 나타난다.
선업 또는 악업에 따라 프라나는 오른쪽 또는 왼쪽의 나디로 달아난다. 그리고 몸의 여러 구멍을 통하여 밖으로 나오며, 의식은 갑자기 투명해진다.
이것은 한 식경 동안 지속된다고는 하나 그것은 그가 예민한지 아니면 둔한지, 그리고 그가 수행을 해 왔는지 아니면 수행을 해 오지 않았는지에 달려 있다.
그 다음 그의 의식이 빠져 나온다. 그는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그는 그의 일가친척들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 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볼 것이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을 것이다.
업에 따른 혼란스런 투영들의 방해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죽음의 왕의 공포가 아직 오지 않은 때인 이 기간 동안 이 가르침을 읽어 주 한다.
여기에는 완성 수행과 영상화 수행25)의 구분이 있다. 만일 그가 완성 수행을 했다면 그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나서 광휘로 안내하는 앞의 가르침들을 반복해서 읽어 주어야 한다.
만일 그가 영상화 수행을 했다면 사다나와 그의 원불26)(願佛)에 대한 묘사를 크게 읽고 다음의 말로 그를 환기 시켜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당신의 원불을 명상하십시오. 정신을 흩뜨리지 마십시오. 당신의 원불에 대해 강하게 집중하십시오.
그 원불이 물에 비친 달처럼 그 자신의 실체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생생하게 마음에 그리십시오. 원불이 견고한 물질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
만일 그가 보통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이 말해 주어야 한다.
“대비주(大悲主) 관세음보살님을 명상하십시오”
바르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이라도 이와 같이 안내 받음으로써 틀림없이 그것을 붙잡을 것이다.
그러나 명상 수행에 정통하지 못한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생전에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들 스스로 바르도 상태를 명료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스승이나 도반이 그것을 명료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명상 수행에 정통하다 하더라도 심각한 병 때문에 정신이 혼란해져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에서 그 가르침을 기억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가르쳐 주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비록 그들이 이전에 이 가르침에 대한 명상 수행에 정통했기는 하나, 계율을 어겼거나 삼마야 수행이 퇴보했기 때문에 낮은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이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만일 그가 첫 번째 바르도 기간 중에 이해한다면 가장 좋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면 그의 통찰력은 두 번째 바르도에서의 환기(喚起)에 의해 깨어나게 되고 그는 해탈될 것이다.
두 번째 바르도 기간 중에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던 그의 의식이 갑자기 명료해진다. 이것을 순수한 환영의 몸27)이라고 한다.
이때 그가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어머니와 아들의 진리 세계28)가 만나게 되고 그는 더 이상 업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어둠을 제압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카르마(업)의 힘은 가르침의 광휘에 의해 제압되고 해탈은 달성된다. 이 두 번째 바르도 상태는 사념체 앞에서 빛난다. 그리고 의식은 다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들을 수 있다.
만일 이때 이 가르침이 이해된다면 목적은 완수된다. 카르마의 혼란스런 투영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 자신을 어느 곳으로든지 가게 할 수 있다.
5) 다르마타 바르도(Bardo)
이 방법으로 비록 그가 근본 광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두 번째 바르도 기간 동안 광휘를 알아차림으로서 그는 해탈된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해탈되지 않았다면 그때는 세 번째 바르도인 다르마타 바르도가 나타난다. 카르마의 혼란스러운 투영들이 세 번째 바르도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다르마타 바르도의 위대한 가르침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력하고 매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일가친척들은 울부짖고 눈물을 흘린다. 그의 몫의 음식은 중단되고 그의 옷은 치워지며, 그의 침대는 해체되는 등의 일이 행해진다.
그는 그들을 볼 수 있으나 그들은 그를 볼 수 없다.
그는 그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들은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절망한 채 떠난다.
이때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소리와 색깔이 있는 빛과 광선이 그것이다. 그는 두렵고 공포스럽고 당황하여 점점 무기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순간 다르마타 바르도의 위대한 가르침을 읽어 주어야 한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아주 명료하게 해 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주의 깊게 들으십시오. 여섯 가지 바르도 상태가 있습니다.
탄생의 바르도, 꿈의 바르도, 삼매 명상의 바르도,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 다르마타 바르도, 그리고 생성(生成) 바르도가 그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당신은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와 다르마타 바르도 그리고 생성 바르도, 이 세 바르도 상태를 겪을 것입니다.
이 셋 중,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에서 다르마타의 광휘가 어제까지 비추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다르마타 바르도와 생성 바르도를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제가 설명해 주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지금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도착했습니다. 당신만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므로 이 생에 대한 욕망과 동경심을 갖지 마십시오. 설사 당신이 욕망과 동경심을 갖는다 하더라도 당신은 머물 수 없으며 오직 윤회계29)에서 방황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욕망을 버리십시오. 동경을 하지 마십시오. 불법승 삼보님을 기억하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다르마타 바르도에서 어떠한 무서운 투영들이 나타나더라도, 이 말을 잊지 말고 그 뜻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본질적인 요점은 투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르마타의 바르도가
나에게 밝아오는 때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버리고
무엇이 나타나든 그것은
나의 투영임을 알아차리며
그것이 바르도의 환영임을 알리라.
이제 이 중대한 시점에 이르렀으니
나는 내 자신의 투영들인
평화와 분노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 말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말하면서 그리고 그 뜻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 말을 잊지 마십시오.
본질적인 요점은 무엇이 나타나든지 아무리 무섭더라도 그것은 당신 자신의 투영임을 확실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당신의 몸과 마음이 분리될 때 순수하고 투명하지만 아직 식별하기는 어렵고, 밝고 빛나며 겁을 주는 반짝임으로 마치 봄 들판의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는 다르마타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황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당신 자신의 다르마타의 자연스런 빛남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아차리십시오.
엄청난 천둥소리가 그 빛 안으로부터 들려 올 것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천 개의 천둥소리가 울리는 것 같은 다르마타의 자연스런 소리입니다.
이것은 당신 자신의 다르마타의 자연스런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무의식 성향들로 이루어진 사념체30)입니다.
당신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적인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소리나 색채나 광선이 생기더라도 그들은 당신을 해칠 수 없으며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그들이 단순히 당신의 투영임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이러한 것이 바르도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아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만일 당신이 그들이 당신의 투영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당신이 생전에 명상 수행을 했다 하더라도 이 가르침을 접하지 못했다면, 여러 색깔의 빛은 당신을 두렵게 하고 소리는 당신을 당황하게 하며 광선은 당신을 겁나게 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가르침의 본질적인 요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소리와 빛과 광선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윤회계를 방황할 것입니다.”
첫째 날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4일 반 동안의 무의식 상태가 지나면 당신은 움직이게 되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깨어나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바르도 상태임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때 윤회는 되돌아가게 되고31)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은 빛과 영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공간은 푸른 빛으로 빛날 것이며, 신성한 비로자나32) 부처님이 모든 곳에 고루 미치는 원의 중앙 세계로부터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하얀색이고, 사자 보좌에 앉아 여덟 개의 살이 달린 바퀴를 손에 들고 있으며, 그의 배우자 우주 공간의 여왕을 포옹하고 있습니다33).
그것의 근원적인 순수함 속에서, 의식의 무더기(識蘊34))의 빛이, 다르마다투35)의 지혜이며 밝고 분명하고 날카롭고 찬란하게 빛나는 빛이, 비로자나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의 심장으로부터 당신을 향하여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꿰뚫기 때문에 당신의 눈은 그 빛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 빛과 함께 천상 세계의 흐릿한 하얀 빛 또한 당신을 향해 나타나 당신을 꿰뚫을 것입니다.
그때 나쁜 업의 영향으로 당신은 겁이나 밝고 푸르게 빛나는 다르마다투의 지혜로부터 달아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 세계로부터 나오는 흐릿한 하얀 빛을 향해서는 즐거운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최상의 지혜로부터 나오는, 밝게 빛나고 매우 예리하고 분명한 푸른 빛을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빛은 다르마다투의 지혜라고 불리는 부처님의 광선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헌신의 마음으로 그 빛에 끌리십시오.
그 빛을 간절히 바라고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이 빛은 신성한 비로자나 부처님의 자비의 광선이다. 나는 그 안에 피난한다.’
그 빛은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에서 당신을 이끌어 주기 위해 나타난 신성한 비로자나 부처님입니다. 그 빛은 신성한 비로자나 부처님의 자비의 광선입니다.
천상 세계에서 나오는 흐릿하고 하얀 빛 안에서 즐거움을 취하지 마십시오.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그 빛을 동경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당신은 천상 세계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고 여섯 세계를 윤회할 것입니다. 그것은 해탈의 길을 막는 장애물입니다.
그러므로 그 빛을 바라보지 말고 밝게 빛나는 푸른 빛을 간절히 바라십시오. 그리고 신성한 비로자나 부처님을 강하게 집중하고 저를 따라 다음의 기원문을 반복하십시오.
강한 무지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다르마다투 지혜의 밝은 빛의 길을 따라
신성한 비로자나 부처님 제 앞에 나투시고
그의 배우자 우주 공간의 여왕님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 가소서.”
깊은 헌신의 마음으로 이 기원문을 외움으로써, 그는 신성한 비로자나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의 심장에 있는 무지개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빽빽이 채워진36) 중앙 세계에서 삼보가카야(보신) 부처님이 될 것이다.
둘째 날
그러나 만일 이렇게 인도 받은 뒤에도 그가 적대감과 신경증의 가리개들 때문에 빛과 광선을 두려워하여 달아난다면, 그리고 기원문을 외운 후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러워 진다면, 그때는 둘째 날에 금강살타의 만달라가 그를 이끌어 주기 위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지옥으로 데려가는 나쁜 업도 함께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인도해 주기 위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 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둘째 날에는 순수한 물의 원소인 하얀 빛이 비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금강살타-아촉불이 완전한 기쁨이 있는 푸른 동쪽 세계로부터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푸른색이고 손에는 다섯 개의 뾰쪽한 끝이 달린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코끼리 보좌에 앉아서 그의 배우자 붓다로차나를 포옹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남성 보살인 지장보살과 미륵보살, 두 여성 보살인 라시아와 푸쉬파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부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것의 근원적인 순수함 속에서 물질의 색온(色蘊)의 하얀 빛이, 거울 같은 지혜이며 눈부시게 하얗고 밝고 투명한 빛이, 금강살타와 그의 배우자의 심장으로부터 당신을 향하여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꿰뚫기 때문에 당신의 눈은 그 빛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 지혜의 빛과 함께 지옥 세계의 흐릿한 회색 빛 또한 당신을 향해 나타나 당신을 꿰뚫을 것입니다.
그때 적대감의 영향으로 당신은 겁이나 밝게 빛나는 하얀 빛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 세계로부터 나오는 흐릿한 회색 빛을 향해서는 즐거운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예리하고 밝게 빛나는 투명한 하얀 빛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이 지혜임을 알아차리십시오. 믿음과 동경의 마음으로 그 빛에 끌리십시오.
이렇게 생각하며 그 빛을 간절히 바라십시오. ‘이 빛은 신성한 금강살타님의 자비의 광선이다. 나는 그 안에 피난한다.’
그 빛은 바르도의 공포에서 당신을 이끌어 주기 위해 나타난 신성한 금강살타님입니다. 그러므로 그 빛을 간절히 바라십시오.
지옥 세계의 흐릿한 회색 빛에서 즐거움을 취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강한 적대감에 의해 축적된 당신의 신경증의 가리개들이 이끄는 길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당신은 지옥으로 떨어져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진흙 늪에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곳으로부터 결코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해탈의 길을 막는 장애물입니다. 그러므로 그 빛을 바라보지 말고 적대감을 버리십시오.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 빛을 동경하지 마십시오. 밝게 빛나는 하얀 빛을 동경하고 신성한 금강살타님을 강하게 집중하고 다음의 기원문을 외우십시오.
강한 적대감으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거울 같은 지혜의 밝은 빛을 따라
신성한 금강살타님 제 앞에 나투시고
그의 배우자 붓다로차나님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 가소서.”
깊은 헌신의 마음으로 이 기원문을 외움으로써, 그는 신성한 금강살타님의 심장에 있는 무지개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가 완전한 즐거움이 있는 동쪽 세계에서 보신 부처님이 될 것이다.
셋째 날
그렇지만 이와 같이 인도 받은 후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자만심과 신경증의 가리개들 때문에 자비의 광선 갈고리를 두려워하여 도망간다.
그래서 그때는 셋째 날에 신성한 보생 부처님37)의 만달라가 인간 세계를 향하는 빛의 길과 함께 그를 이끌어 주기 위하여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그를 인도해 주기 위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셋째 날에는 순수한 흙의 원소인 노란 빛이 비칠 것입니다.
동시에 신성한 보생 부처님이 영광스러운 곳인 노란 남쪽 세계로부터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노란색이고 손에는 소원성취 보석을 들고 있으며, 말의 보좌에 앉아 그의 배우자 마마키를 포옹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남성 보살인 허공장보살과 보현보살38), 두 여성 보살인 말라와 두파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부처님의 모습이 무지개 빛 공간으로부터 나타납니다.
그것의 근원적인 순수함 속에서 느낌의 무더기(受蘊)의 노란 빛이, 평등의 지혜이며 번쩍이는 노란 색이며 빛의 원반으로 둘러싸여 있고 밝고 투명하여 쳐다보기 어려운 빛이, 보생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의 심장으로부터 당신을 향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꿰뚫기 때문에 당신의 눈은 그 빛을 견딜 수 없습니다. 동시에 그 지혜의 빛과 함께 인간 세계의 흐릿한 푸른 빛 또한 당신의 심장을 꿰뚫을 것입니다.
그때 자만심의 영향으로 당신은 예리하고 투명한 노란 빛을 두려워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세계의 흐릿한 푸른 빛을 향해서는 즐거운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그 순간 밝고 예리하게 빛나는 노란 빛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이 지혜임을 알아차리십시오. 당신의 마음을 그 빛 안에 머물게 하고 무위(non-action)의 상태에서 쉬게 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그 빛이 당신 자신의 마음의 자연스런 광휘임을 알아차린다면, 설사 당신이 헌신의 마음을 내지 않고 기원문을 외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모습과 빛과 광선들은 당신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되어 합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것이 당신 자신의 마음의 자연스런 광휘임을 알아차릴 수 없다면 이렇게 생각하며 그 빛을 간절히 바라십시오.
‘이 빛은 신성한 보생 부처님의 자비의 광선이다. 나는 그 안에 피난한다.’ 그 빛은 신성한 보생 부처님의 자비의 광선갈고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빛을 간절히 바라십시오.
인간 세계의 흐릿한 푸른 빛에서 즐거움을 취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강한 자만심에 의해 축적된 당신의 무의식의 성향들이 이끄는 길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당신은 인간 세계로 떨어져 나고 늙고 죽고 고통받는 체험을 할 것이며, 윤회계의 진흙 늪에서 결코 빠져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해탈의 길을 막는 장애물입니다. 그러므로 그 빛을 바라보지 말고 자만심을 버리십시오.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 빛을 동경하지 마십시오.
밝게 빛나는 노란 빛을 동경하고 신성한 보생 부처님을 일념으로 강하게 집중하고 다음의 기원문을 외우십시오.
강한 자만심으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평등한 지혜의 밝은 빛의 길을 따라
신성한 보생 부처님 제 앞에 나투시고
그의 배우자 마마키님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 가소서.”
깊은 헌신의 마음으로 이 기원문을 외움으로써, 그는 신성한 보생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의 심장에 있는 무지개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가 영광스러운 곳 남쪽 세계에서 보신 부처님이 될 것이다.
넷째 날
이와 같이 인도 받음으로써 아무리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일지라도 해탈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여러 번 인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좋은 기회가 끝나 버려 알아차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주 나쁜 짓을 저질렀거나 삼마야 수행을 퇴보하도록 내버려둔 사람들이다. 욕망과 신경증의 가리개들의 방해를 받아 그들은 소리와 빛들을 두려워하여 달아날 것이다.
그래서 그때는 넷째 날에 신성한 아미타 부처님의 만달라가 욕망과 천한 행위로 생긴 아귀 세계의 빛의 길과 함께 그들을 이끌어 주기 위해 나타날 것이다.
그를 다시 인도하기 위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넷째 날에는 순수한 불의 원소인 붉은 빛이 비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신성한 아미타 부처님이 행복이 넘치는 곳인 붉은 서쪽 세계로부터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붉은색이고 손에 연꽃을 들고 있으며, 공작 보좌에 앉아 그의 배우자 판다라바시니를 포옹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남성 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39), 두 여성 보살인 기타와 알로카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부처님의 모습이 무지개 빛 공간으로부터 나타납니다.
그것의 근원적인 순수함 속에서 인식의 무더기(想蘊)의 붉은 빛이, 분별의 지혜이며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색이며 빛의 원반들로 둘러싸인 밝고 투명하고 예리한 빛이, 아미타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의 심장으로부터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심장을 꿰뚫기 때문에 당신의 눈은 그 빛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 빛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동시에 그 지혜의 빛과 함께 아귀 세계의 흐릿한 노란 빛 또한 비칠 것입니다.
그 빛 안에서 즐거움을 취하지 마십시오. 욕망과 동경을 버리십시오.
그때 강한 욕망의 영향으로 당신은 예리하게 빛나는 붉은 빛을 두려워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아귀 세계의 흐릿한 노란 빛을 향해서는 즐거움과 매력을 느낄 것입니다.
그 순간 예리하고 찬란하며 밝고 투명한 붉은 빛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이 지혜임을 알아차립시오. 그 빛 안에 당신의 마음을 머물게 하고 무위의 상태에서 쉬게 하십시오.
믿음과 동경의 마음으로 그 빛에 끌리십시오. 만일 당신이 그것이 당신 자신의 자연스런 광휘임을 알아차린다면, 설사 당신이 헌신의 마음을 내지 않고 기원문을 외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모습과 빛과 광선은 당신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되어 합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 빛을 이와 같이 알아차릴 수 없다면 온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여 그 빛을 간절히 바라십시오.
‘이 빛은 신성한 아미타 부처님의 자비의 광선이다. 나는 그 안에 피난한다.’ 그 빛은 신성한 아미타 부처님의 자비의 광선갈고리입니다. 헌신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달아나지 마십시오. 설사 당신이 달아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신과 분리되지 않고 그대로 머물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귀 세계의 흐릿한 노란 빛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강렬한 욕망에 의해 축적된 무의식의 성향들이 만든 빛의 길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당신은 아귀 세계로 떨어져 굶주림과 갈증으로 견딜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해탈의 길을 막는 장애입니다.
그러므로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당신의 무의식적 성향들을 버리십시오. 그 빛을 갈망하지 마십시오. 밝게 빛나는 붉은 빛을 동경하십시오.
그리고 신성한 아미타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를 일념으로 강하게 집중하고 다음의 기원문을 외우십시오.
강한 욕망으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분별하는 지혜의 밝은 빛의 길을 따라
아미타 부처님 제 앞에 나투시고
그의 배우자 판다라바시니님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 가소서.”
깊은 헌신의 마음으로 이 기원문을 외움으로써, 그는 무한한 빛 신성한 아미타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의 심장에 있는 무지개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가 행복이 넘치는 곳 서방 세계에서 보신 부처님이 될 것이다.
다섯째 날
이와 같이 함으로써 틀림없이 해탈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인도 받은 후에도, 중생들은 오랜 습관 때문에 그들의 무의식적인 성향들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질투심과 나쁜 업의 영향으로 그들은 소리와 빛들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자비의 광선갈고리에 걸리지 않고 바르도 상태의 다섯째 날 아래를 향하여 방황한다.
그래서 그 때는 자비의 광선을 지닌 신성한 불공성취 부처님의 만달라가 그들을 이끌어 주기 위하여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질투의 감정으로 생겨난 아수라 세계의 빛의 길 또한 그들을 이끌 것이다. 그때 그를 다시 인도해 주기 위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 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다섯째 날 순수한 공기의 원소인 초록 빛이 비칠 것입니다.
동시에 만달라의 지배자인 신성한 불공성취 부처님이 행위가 축적된 곳인 초록의 북쪽 세계로부터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초록색이고 손에는 십자형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하늘 높이 날고 있는 금시조의 보좌에 앉아 그의 배우자 삼마야따라를 포옹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남성 보살인 바즈라파니와 사르바니바라나비스캄빈, 두 여성 보살인 간다와 나이베드야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부처님의 모습이 무지개 빛 공간으로부터 나타납니다.
그것의 근원적인 순수함 속에서 의지의 무더기(行蘊)의 초록 빛이, 모든 행위를 성취시키는 지혜이며 번쩍이는 녹색이고 밝고 투명하고 예리하고 겁이 나며 빛의 원반들로 둘러싸인 빛이, 불공성취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의 심장으로부터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심장을 꿰뚫기 때문에 당신의 눈은 그 빛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 빛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 자신의 마음의 자발적인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행위와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최상의 상태에 머무십시오. 그곳은 멀고 가까움이 없고 사랑과 미움도 없습니다.
동시에 그 지혜의 빛과 함께 질투심으로 말미암아 생긴 아수라 세계의 흐릿한 붉은 빛 또한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미움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명상하십시오. 그러나 만일 당신의 정신력이 약하다면 그때는 단지 그 안에서 즐거움을 취하지만 마십시오.
그때 강한 질투심의 영향으로 예리하게 빛나는 초록 빛을 두려워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아수라 세계의 흐릿한 붉은 빛을 향해서는 즐거움과 매력을 느낄 것입니다.
그 순간 예리하게 빛나고 맑고 투명한 초록 빛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이 지혜임을 알아차리십시오. 그 빛 안에 당신의 마음을 머물게 하고 무위의 상태에서 쉬게 하십시오.
그리고 온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간절히 바라십시오. ‘이 빛은 신성한 불공성취 부처님의 자비의 광선이다.
나는 그 안에 피난한다.’ 그것은 모든 행위를 성취하는 지혜인 신성한 불공성취 부처님의 자비의 광선갈고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빛을 간절히 바라십시오. 그리고 달아나지 마십시오. 설사 당신이 달아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신과 분리되지 않고 그대로 머물 것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수라 세계의 흐릿한 붉은 빛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 빛은 당신의 강한 질투심에 의해 축적된 업이 이끄는 길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당신은 아수라 세계로 떨어져 전쟁과 싸움으로 견딜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해탈의 길을 막는 장애입니다. 그러므로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당신의 무의식적 성향들을 버리십시오. 밝게 빛나는 초록 빛을 간절히 바라고 신성한 불공성취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를 일념으로 강하게 집중하고 다음의 기원문을 외우십시오.
강한 질투심으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모든 행위를 성취하는 지혜의 밝은 빛의 길을 따라
신성한 불공성취 부처님 제 앞에 나투시고
그의 배우자 삼마야타라님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가소서.”
깊은 헌신의 마음으로 이 기원문을 외움으로써 , 그는 신성한 불공성취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의 심장에 있는 무지개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가 행위가 완벽하게 성취된 곳인 북쪽 세계에서 보신 부처님이 될 것이다.
여섯째 날
그의 선업이 아무리 미미할지라도 이와 같이 여러 단계를 인도 받음으로써, 만약 그가 첫 번째 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이어지는 단계에서 알아차리게 되어 틀림없이 해탈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여러 번 인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많은 무의식적 성향들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결코 다섯 지혜의 순수한 환영들과 익숙해 진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인도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무의식적 성향들에 의해 퇴보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자비의 광선갈고리에 걸리지 않고 빛과 광선들을 두려워하고 당황하여 아래쪽으로 방황한다.
그래서 그 때는 여섯째 날 다섯 가족들의 부처님들이 그의 배우자들과 수행(隨行) 신들을 데리고 한꺼번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여섯 세계의 빛 또한 한꺼번에 비칠 것이다. 그를 인도해 주기 위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어제까지 차례로 다섯 가족들의 빛이 나타났을 때마다 당신은 인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성향들의 영향 때문에 그 빛들을 보고 당황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기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다섯 가족들의 지혜에서 나온 자연스런 광휘가 당신 자신의 투영임을 알아차렸다면, 다섯 가족들 중 한 가족의 몸에 있는 무지개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가 보신 부처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주시하십시오.
이제 다섯 가족들이 모두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결합된 네 가지 지혜40)가 당신을 이끌어 주기 위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을 알아차리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네 개의 순수한 원소에서 나오는 네 가지 색깔의 빛이 비칠 것입니다. 모든 곳을 동시에 고루 비치는 원의 중앙 세계로부터는 그의 배우자와 수행신들을 동반한 비로자나 부처님이, 완전한 기쁨이 있는 곳인 동쪽 세계로부터는 그의 배우자와 수행 신들을 동반한 금강살타 부처님이, 영광스러운 곳인 남쪽 세계로부터는 그의 배우자와 수행 신들을 동반한 보생 부처님이, 연꽃이 피어나는 행복이 넘치는 곳인 서쪽 세계로부터는 그의 배우자와 수행 신들을 동반한 아미타 부처님이, 그리고 행위가 완벽하게 성취된 곳인 북쪽 세계로부터는 그의 배우자와 수행 신들을 동반한 불공성취 부처님이 무지개 빛 공간으로부터 나타날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다섯 부처님 가족들 너머에서는 분노한 모습의 수문장들 또한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승리자인 비자야, 죽음의 파괴자인 야만타카, 말의 머리를 한 하야그리바, 생명의 이슬 잔을 든 자인 아므르타쿤달리입니다.
그리고 여성 수문장인 갈고리를 든 안쿠샤, 올가미를 든 파샤, 쇠사슬을 든 쉬릉칼라, 요령을 든 간타 또한 나타날 것입니다41). 신성한 자들인 여섯 현인들도 나타날 것입니다.
백가지 희생물을 가진 강력한 천상 세계의 현인 인드라,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아수라 세계의 현인 베마치트라, 인간세계의 현인 샤카족의 사자(lion) 석가모니, 움직이지 않는 사자인 축생 세계의 현인 드루바싱하, 불타는 입을 가진 아귀 세계의 현인 즈발라무카, 진리의 왕인 지옥 세계의 현인 다르마라자가 그들입니다.
모든 부처님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완전한 선 사만타바드라와 사만타바드리42) 또한 나타날 것입니다.
이들 42명의 삼보가카야(보신)의 신들은 당신의 심장으로부터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투영들의 순수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알아차리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들 여러 세계 역시 달리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신 심장의 네 방향에 있으며 중앙까지 다섯 군데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당신의 심장에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들 영상들 또한 달리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신 마음의 근본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이와 같이 알아차리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들 영상들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완벽하게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그들 각각은 그들만의 장식품과 복장, 색깔과 자세, 그리고 보좌와 상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섯 쌍을 이루어 퍼져 있으며 각각의 쌍은 오색의 후광이 둥글게 에워싸고 있습니다.
모든 가족들의 남성과 여성 신들이 있는 하나의 전체 만달라가 모두 한꺼번에, 완벽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의 원불들임을 알아차리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다섯 가족들의 부처님들과 그들의 배우자들의 심장으로부터 나온 네 가지 지혜의 광선들이 각각 햇살이 퍼지듯이 아름답고 투명하게 당신의 심장에 비칠 것입니다.
먼저 밝고 하얀 광선들로 수놓은 천 같은, 번쩍거리며 빛나고 두려운 다르마다투의 지혜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심장으로부터 나와 당신의 심장을 비출 것입니다.
이 광선의 천 안에서 번쩍이는 하얀 원반 하나가 아주 투명한 빛을 내며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반사면을 아래로 향하고 있는 거울 같으며, 그 자신과 같은 다섯 개의 원반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다섯 원반들도 여러 원반들과 작은 원반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중심부와 가장자리의 구분이 없습니다.
거울 같은 지혜로 수놓은 밝고 푸른 천 위로 금강살타 부처님의 심장으로부터 터키 옥으로 만든 사발 같은 푸른 원반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아래를 향하고 있고 여러 원반들과 작은 원반들로 둘러 쌓여 있습니다.
평등의 지혜로 수놓은 밝고 노란 천 위로는 보생 부처님의 심장으로부터 금으로 만든 사발 같은 노란 원반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아래를 행하고 있고 여러 원반들과 작은 원반들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분별의 지혜로 수놓은 밝고 붉은 천 위에는 아미타 부처님의 심장으로부터 산호로 만든 사발 같은 번쩍이는 붉은 원반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아래를 향하고 있고 밝고 투명한 지혜의 심오한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과 같은 다섯 개의 원반들로 둘러 싸여 있으며, 그 다섯 원반들 역시 여러 원반들과 작은 원반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중심부와 가장자리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 빛들은 또한 당신의 심장을 비출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들 역시 당신 자신의 마음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달리 다른 곳에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다만 무념의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며 머무십시오.
그 상태에서는 모든 영상들과 광선들은 당신과 합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모든 행위를 성취하는 초록 빛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지혜의 에너지가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것이 결합된 네 가지 지혜의 체험이라고 불리는, 금강살타 부처님께로 가는 통로입니다.
인도를 받고 있는 이때 당신의 스승님의 가르침들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가르침의 의미를 기억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이전 체험들에 대하여 믿음을 갖게 될 것이고 따라서 당신은 그들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와 아들의 만남 같고 오랜 친구를 다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의심을 잘라 버리듯이 당신은 당신 자신의 투영들을 알아차려 순수하고 변함 없는 다르마타의 길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통하여 지속적인 명상 상태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지혜의 위대한 자기 존속의 모습(self-existing form) 안으로 녹아 들어가 결코 되돌아와 떨어지지 않는 보신 부처님이 될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지혜의 빛들과 함께 여섯 세계의 순수하지 않은 사람을 매혹하는 빛이 비칠 것입니다.
천상 세계의 흐릿한 하얀 빛, 아수라 세계의 흐릿한 붉은 빛, 인간 세계의 흐릿한 푸른 빛, 축생 세계의 흐릿한 초록 빛, 아귀 세계의 흐릿한 노란 빛, 그리고 지옥 세계의 흐릿한 회색 빛이 비칠 것입니다.
이들 여섯 세계의 빛들은 순수한 지혜의 빛들과 함께 비칠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 중 어떤 빛일지라도 붙잡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다만 무념의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며 머무십시오. 만일 당신이 순수한 지혜의 빛을 두려워하고 여섯 세계의 순수하지 않은 빛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당신은 여섯 세계 중 어느 한 곳에서 몸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점점 기진맥진해 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스러운 윤회의 광대한 바다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만일 당신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면 당신은 그러한 영상들과 순수한 지혜의 빛들을 두려워하게 되고, 윤회계의 순수하지 않는 빛들에게는 마음을 빼앗길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다만 예리하게 빛나는 순수한 지혜의 빛에 헌신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헌신의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다섯 가족들의 신성한 부처님들로부터 나온 지혜와 자비의 광선들이 자비로써 나를 붙잡아주기 위해 나타났다. 나는 그 빛들 안에 피난한다.’
여섯 세계에서 나오는 환상의 빛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 빛들을 동경하지 마십시오. 다만 다섯 가족들의 부처님들과 그의 배우자들을 일념으로 강하게 집중하고 다음의 기원문을 외우십시오.
다섯 가지 독43)으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결합된 네 가지 지혜의 밝은 빛의 길을 따라
승리자이신 다섯 가족들이시여 제 앞에 나투시고
다섯 가족들의 배우자님들 제 뒤에 나투소서.
순수하지 않은 여섯 세계의 빛의 길로부터
저를 구원하시고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소서.
순수한 다섯 부처님의 세계로 저를 데려 가소서.”
이 기원문을 외움으로써 뛰어난 사람은 그 자신의 투영들을 알아차리고, 비이원성과 합쳐져 깨달은 자가 된다.
중간 근기의 사람은 강렬한 헌신을 통하여 자신을 깨닫고 해탈에 이른다.
낮은 근기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기원문이 가진 정화의 힘에 의해 여섯 세계에서 재생하는 것을 막으며, 결합된 네 가지 지혜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금강살타 부처님의 통로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다.
이와 같이 분명하고 정확하게 인도 받음으로써 많은 중생들이 알아차리고 해탈될 것이다.
일곱째 날
그러나 교화되지 않은 곳에 사는 낮은 근기의 사람들이나 진리의 체험이 전혀 없는 악한 사람들, 그리고 삼마야 수행을 퇴보하도록 내버려둔 사람들은 그들의 업 때문에 혼란을 겪게 되어 인도 받을 때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래를 향하여 방황한다.
그래서 일곱째 날에 지식을 가진 신인 비드야다라44)들이 공간의 순수한 세계로부터 그들을 이끌어 주기 위하여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무지의 감정으로 생긴 축생 세계의 빛의 길 또한 그들과 만날 것이다. 그때 그를 다시 인도하기 위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 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일곱째 날에는 여러 색깔을 가진 순수한 빛 하나가 당신의 무의식적인 마음에 비칠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을 가진 신인 비드야다라들이 공간의 순수한 세계로부터 당신을 이끌어 주기 위하여 나타날 것입니다.
무지개 빛으로 채워진 만달라의 중앙에서는, 능가할 자 없는 완전히 발달된 비드야다라인 춤추는 연꽃 신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오색으로 빛나며, 그의 배우자인 붉은 다키니45)를 포옹한 채 초승달 모양의 칼과 피가 가득 찬 해골을 들고 결인(結印)을 하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만달라의 동쪽에서는 보살의 수행 단계를 완성한 자라고 불리는 비드야다라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미소짓는 빛나는 얼굴을 한 하얀색입니다.
그는 그의 배우자인 하얀 다키니를 포옹한 채 초승달 모양의 칼과 피가 가득 찬 해골을 들고 춤을 추며, 결인을 하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만달라의 남쪽에서는 생명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비드야다라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아름다운 모습을 한 노란색입니다.
그는 그의 배우자인 노란 다키니를 포옹한 채 초승달 모양의 칼과 피가 가득 찬 해골을 들고 춤을 추며, 결인을 하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만달라의 서쪽에서는 위대한 상징이라고 불리는 비드야다라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미소짓는 빛나는 얼굴을 한 붉은색입니다.
그는 그의 배우자인 붉은 다키니를 포옹한 채 초승달 모양의 칼과 피가 가득 찬 해골을 들고 춤을 추며, 결인을 하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만달라의 북쪽에서는 자발적으로 일어난 자라고 불리는 비드야다라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반은 화가 나 있고 반은 미소짓는 얼굴을 한 초록색입니다.
그는 그의 배우자인 초록 다키니를 포옹한 채 초승달 모양의 칼과 피가 가득 찬 해골을 들고 춤을 추며, 결인을 하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들 비드야다라들 너머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다키니 무리가 나타날 것입니다. 여덟 군데 화장터의 다키니들, 네 가지 부류의 다키니들, 세 군데 세계의 다키니들, 열 군데 방향의 다키니들, 스물 네 군데 순례지의 다키니들, 남녀 전사들과 하인들, 그리고 모든 남녀 진리의 수호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여섯 개의 뼈로 된 장신구를 걸치고 있으며, 북, 넓적다리뼈로 만든 나팔, 해골로 만든 북, 젊은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깃발, 사람 가죽으로 만든 파라솔과 리본, 사람 살로 만든 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 셀 수 없이 많은 여러 가지 악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흔들고 진동하기만 하면 우주의 모든 곳이 가득 찹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춤을 추며 모든 악기를 진동시켜 사람의 정신을 내동댕이칩니다46).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무의식의 세계에서 번쩍이고 진동하고 가물거리며 밝고 투명하고 예리하고 겁이 나는, 마치 오색실을 함께 꼰 것 같은 다섯 가지 색깔로 빛나는 순수하고 직관적인 지혜의 빛이 다섯 비드야다라 지배자들의 심장으로부터 나타나 당신의 심장을 꿰뚫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눈은 그 빛을 견딜 수 없습니다. 동시에 축생 세계의 흐릿한 초록 빛 또한 그 지혜의 빛과 함께 비칠 것입니다.
그때 무의식의 성향들에 의해 생긴 혼란의 영향으로 당신은 오색 빛을 두려워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축생 세계의 흐릿한 빛에는 마음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예리하게 빛나는 오색 빛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빛을 무서워하지 말고 다만 그것이 지혜임을 알아차리십시오.
그 빛 안에서 진리의 모든 자연스러운 소리들이 마치 천 개의 천둥이 울리는 것처럼 들려 올 것입니다.
그것은 함성과 째는 듯한 분노의 만트라47) 소리로 울려 퍼지고 천둥이 치는 듯이 으르렁거립니다. 그 소리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달아나지 마십시오.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마음의 활동이며 당신 자신의 투영임을 알아차리십시오. 축생 세계의 흐릿한 빛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 빛을 동경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당신은 무지한 축생 세계로 떨어져, 벗어날 길이 없는 그 곳에서 어리석고 말 못하는 노예 상태의 극심한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투명하고 밝은 오색 빛을 간절히 바라십시오. 그리고 신성한 비드야다라님들과 스승님들에게 일념으로 집중하고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전사들과 다키니들을 동반한 이들 비드야다라님들은 나를 공간의 순수한 세계로 이끌어 주기 위하여 나타났다.
비드야다라님들이시여, 이 날까지 과거 현재 미래의 그렇게 많은 부처님 가족들이 자비의 광선을 보내왔건만, 장점을 모으지 못했고 알아차리지 못한 저 같은 중생들에게 모든 배려를 다 해주소서. 아! 저 같은 중생들을 위해주소서.
모든 비드야다라님이시여, 제가 이보다 더 낮은 세계로 가는 것을 내버려두지 마시고 당신의 자비의 갈고리로 저를 붙잡아 속히 공간의 순수한 세계로 끌어당겨 주소서.’
일념으로 강하게 집중하고 다음의 기원문을 외우십시오.
신성한 비드야다라님들이시여,
저에게 관심을 보이시고
길을 가는 저를 위대한 사랑으로 이끄소서.
강한 무의식의 성향들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직관적인 지혜의 밝은 빛의 길을 따라
비드야다라님들 그리고 전사님들
제 앞에 나투시고
그들의 배우자 다키니님들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공간의 순수한 세계로 저를 데려가소서.”
깊은 헌신의 마음으로 이 기원문을 외움으로써, 그는 신성한 비드야다라들의 심장에 있는 무지개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가 틀림없이 공간의 순수한 세계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모든 유형의 영적인 친구들 역시 이렇게 한 결과 알아차리고 모두 해탈되었다. 나쁜 무의식 성향들을 가진 사람들조차 틀림없이 여기에서 해탈되었다.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 기간에서 광휘를 안내하고
평화로운 다르마타 바르도 기간을 안내
하는《들음을 통한 대 해탈》의
첫 번째 부분을 마침.
이티 삼마야 갸 갸 갸48)
이제 어떻게 분노의 신들의 바르도가 나타나는지 가르쳐질 것이다.
지금까지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에서 평화의 신들이 나타나는 일곱 단계를 지나왔다. 각각의 단계에서 인도를 받음으로써 설사 그가 한 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다음 단계를 갖게 되어 무수한 해탈의 달성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이 해탈되었다 하더라도, 중생의 수는 한량이 없고 나쁜 업은 매우 강하다. 신경증의 가리개들은 무겁고 두꺼우며 무의식 성향들은 오랫동안 지속한다.
그리고 이 혼란과 무지의 순환 주기는 줄어들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까지처럼 정확하게 인도 받아 왔다 하더라도 해탈되지 못하고 아래를 향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평화의 신들과 비드야다라들과 다키니들과의 만남이 지나간 후에는, 불꽃에 싸여 피를 마시는 58명의 분노한 신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들은 앞에서 나왔던 평화의 신들의 변형된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이전의 그들과 같지 않다. 이것이 분노한 신들의 바르도이다.
그래서 사자는 강한 두려움에 의해 압도되고 그래서 알아차리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된다. 마음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고 기절할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만일 조금이라도 알아차린다면 해탈은 쉽다. 왜냐하면 저항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마음은 산만해질 겨를이 없고 그래서 일념으로 집중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자가 이런 가르침을 만나지 못한다면 바다와 같은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아무런 쓸데가 없게 될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사원의 규칙을 잘 지키는 수도자나 위대한 철학자조차도 혼동되어 알아차리지 못하고 윤회계에서 방황한다.
그것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더 심하여 그들은 심한 두려움 때문에 달아나 더 낮은 세계로 떨어져 비참한 고통을 받는다.
그렇지만 탄트라 요가수행자는 설사 그의 수행이 가장 낮은 단계에 있다 하더라도, 피를 마시는 신들을 보는 순간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그들이 그의 원불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신뢰하여 그들과 하나가 되어 깨달은 자가 될 것이다.
그 비결은 이렇다. 인간 세상에서 그는 이들 피를 마시는 신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마음에 그리는 수행을 했고 그들을 경배했다.
그리고 단지 그림으로 그려진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거나 조각상을 보기만 했다 하더라도 그는 여기에 나타나는 모습들을 알아차리고 해탈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철학자들이나 수도자들은 종교적 수행의 계율을 지키는데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이 교리를 가르치는데 아무리 뛰어났다 하더라도 그들이 죽을 때 사리나 무지개 등과 같은 어떠한 징표도 없을 것이다49).
살아 있었을 때 그들은 탄트라의 가르침과 수행을 모욕하고 마음에 간직하지 않았다. 그들은 탄트라의 신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바르도에서 나타났을 때에도 알아차릴 수가 없다.
그들은 이전에 결코 본적이 없었던 것을 갑자기 보고는 그것을 적으로 생각하고 적대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더 낮은 차원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아무리 저들 철학자들이나 계율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착하다 하더라도, 탄트라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여러 가지 사리나 무지개 등이 그들 가운데서는 생기지 않는 이유이다.
탄트라 수행자는, 설사 그가 가장 낮은 수행 단계에 있고 세상에서 조악한 처신을 했으며 교양이 없고 세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가 탄트라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다만 그가 탄트라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어떠한 의심이나 불신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이 순간 해탈에 이를 것이다.
그래서 비록 그의 처신이 인간 세상의 관습에 따르지 않는 것이었다 해도 그가 죽을 때 사리나 무지개 같은 징표 가운데 적어도 한가지는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탄트라의 가르침이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상화 수행과 완성 수행을 해 왔고 핵심 만트라50)의 암송 등을 실천해 온 뛰어난 능력의 탄트라 요가수행자들은 다르마타 바르도에서 더 이상 내려가 방황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호흡이 멎자마자 비드야다라들과 전사들과 다키니들이 공간의 순수한 세계 속으로 그들을 이끌 것이다. 그 징표로서 하늘이 투명해지고 그들은 무지개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간다.
꽃비가 내리고 향기가 진동하며 하늘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고 광선과 사리 등이 나타난다. 이 모든 것들이 그 징표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들과 지계자(持戒者)들, 삼마야 수행을 퇴보하도록 내버려둔 탄트라 수행자들, 그리고 모든 보통 사람들은 이《들음을 통한 대 해탈》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다51).
위대한 상징 수행과 위대한 완성 수행52)을 수련해 온 영상 수행자들은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에서 광휘를 알아차리고 다르마카야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이《들음을 통한 대 해탈》을 읽어 줄 필요가 전혀 없다.
만일 그들이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 기간에 광휘를 알아차린다면 그들은 다르마카야(법신)에 이를 것이다.
만일 평화와 분노의 신들이 나타나는 때인 다르마타 바르도 기간에 알아차린다면 삼보가카야(보신)에 이를 것이다.
만일 생성 바르도 기간에 알아차린다면 니르마나카야(화신)에 이르러 이 가르침을 만날 수 있는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쌓은 행위의 결과들을 다음 생에서 계속 이어간다. 그것이 바로 이《들음을 통한 대 해탈》을 명상 수행 없이도 깨닫게 하는 가르침, 단지 들음에 의해 해탈하는 가르침, 한 순간에 무지를 끊는 가르침, 완전하고 즉각적인 깨달음을 주는 심오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을 접한 중생들은 더 낮은 존재로 떨어질 수 없다. 이 가르침과《지님을 통한 해탈53)》은 큰 소리로 읽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둘의 결합은 터키석을 아로새긴 황금 만달라와 같기 때문이다.
여덟째 날
지금까지《들음을 통한 대 해탈》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다. 다음은 분노한 신들의 바르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안내가 있게 될 것이다.
이제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평화로운 신들의 바르도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멀리 방황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여덟째 날에는 피를 마시는 분노의 신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그들을 알아차리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영광스럽고 위대한 자라고 불리는 붓다 헤루카54)가 당신의 두뇌 속으로부터 나와 당신 앞에 정확하고 분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포도주색이고 세 개의 머리와 여섯 개의 팔, 그리고 따로 따로 넓게 벌리고 있는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오른쪽 얼굴은 하얀색이고 왼쪽 얼굴은 붉은색이며 가운데 얼굴은 포도주색입니다. 몸은 엄청남 빛의 덩어리처럼 불타오르고 아홉 개의 눈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당신의 눈을 응시합니다.
그의 눈썹은 번개의 섬광 같고 이빨은 구리처럼 번쩍거립니다.
그는 큰 소리로 “아-라-라!”, “하-하!” 소리치며 웃고 “슈-” 하는 큰 휘파람 소리를 냅니다.
그의 주황색 머리카락은 위를 향하여 불타오르며 휘날리고, 머리에는 마른 해골과 해와 달이 얹혀 있고, 몸에는 검은 독사들과 방금 자른 인간의 머리들이 휘감겨 있습니다.
그의 여섯 개의 손 중 오른쪽 첫 번째 손은 바퀴를, 두 번째 손은 도끼를, 세 번째 손은 칼을 들고 있고, 왼쪽 첫 번째 손은 요령을, 두 번째 손은 쟁기를, 세 번째 손은 해골바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의 배우자인 붓다 크로디슈바리55)는 그의 목을 포옹하고 있는데, 그녀는 오른손으로 그의 목을 휘감고, 왼손으로 피가 가득 담긴 해골바가지를 그의 입에 대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큰 거친 소리와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큰 소리를 냅니다. 지혜의 불꽃들이 그의 몸에 있는 불타오르는 금강저 같은 모든 털 사이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그는 두 다리를 굽히고 두 다리는 뻗은 가루다들이 받치고 있는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그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당황하지 마십시오. 그가 당신 자신의 마음의 모습임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는 당신의 원불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는 진실로 신성한 비로자나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입니다.
그러므로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알아차림과 해탈은 동시에 일어납니다56).”
이렇게 말해 주었을 때, 그는 원불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그 원불과 하나가 되어 보신(報身) 부처님이 될 것이다.
아홉째 날
그러나 만일 그가 그것을 두려워하여 달아난다면,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 때는 아홉째 날에 바즈라 가족의 피를 마시는 신이 그를 이끌어 주기 위하여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다시 인도하기 위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 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아홉째 날에는 신성한 바즈라 헤루카라고 불리는, 바즈라 가족의 피를 마시는 신이 당신 두뇌의 동쪽으로부터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검푸른색이고, 세 개의 머리와 여섯 개의 팔, 그리고 따로 따로 넓게 벌리고 있는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오른쪽 얼굴은 하얀색이고 왼쪽 얼굴은 붉은색이며 가운데 얼굴은 푸른색입니다.
그의 여섯 개의 손 중 오른쪽 첫 번째 손은 금강저를, 두 번째 손은 해골바가지를, 세 번째 손은 도끼를 들고 있고, 왼쪽 첫 번째 손은 요령을, 두 번째 손은 해골바가지를, 그리고 세 번째 손은 쟁기를 들고 있습니다.
그의 배우자인 바즈라 크로디슈바리는 그의 몸을 포옹하고 있는데, 그녀는 오른손으로 그의 목을 휘감고 왼손으로 피가 가득 담긴 해골바가지를 그의 입에 대고 있습니다.
그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당황하지 마십시오. 그가 당신 자신의 마음의 모습임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는 당신의 원불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는 진실로 신성한 금강살타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알아차림과 해탈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이렇게 말해 주었을 때, 그는 원불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그 원불과 하나가 되어 보신 부처님이 될 것이다.
열째 날
그러나 악업이 너무 두터운 사람들은 그 모습을 두려워하고 달아난다.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때는 열째 날에 라트나 가족의 피를 마시는 신이 그를 이끌어 주기 위하여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인도하기 위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 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열째 날에는 라트나 헤루카라고 불리는, 라트나 가족의 피를 마시는 신이 당신 두뇌의 남쪽으로부터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어두운 노란색이고, 세 개의 머리와 여섯 개의 팔, 그리고 따로 따로 넓게 벌리고 있는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오른쪽 얼굴은 하얀색이고 왼쪽 얼굴은 붉은색이며 가운데 얼굴은 불타는 듯한 어두운 노란색입니다.
그의 여섯 개의 손 중 오른쪽 첫 번째 손을 보석을, 두 번째 손은 사람 머리 세 개가 꽂힌 삼지창을, 세 번째 손은 몽둥이를 들고 있고, 왼쪽 첫 번째 손은 요령을, 두 번째 손은 해골바가지를, 그리고 세 번째 손은 삼지창을 들고 있습니다.
그의 배우자인 라트나 크로디슈바리는 그의 몸을 포옹하고 있는데, 그녀는 오른손으로 그의 목을 휘감고 왼손으로 피가 가득 담긴 해골바가지를 그의 입에 대고 있습니다.
그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당황하지 마십시오. 그가 당신 자신의 마음의 모습임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는 당신의 원불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는 진실로 신성한 보생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십시오. 깨달음과 해탈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이렇게 말해 주었을 때, 그는 원불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그 원불과 하나가 되어 깨달은 자가 될 것이다.
열 하루째 날
그러나 설령 이와 같이 인도 받은 후라 하더라도, 그는 악한 무의식의 성향들에 의한 방해를 받아 두려워하여 달아난다. 그래서 원불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만일 그가 야만타카를 보았을 때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때는 열 하루째 날에 파드마 가족의 피를 마시는 신이 그를 이끌어 주기 위하여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다시 인도하기 위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 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열 하루째 날에는 신성한 파드마 헤루카라고 불리는, 파드마 가족의 피를 마시는 신이 그의 배우자와 포옹한 모습으로 당신 두뇌의 서쪽으로부터 나와 분명하게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검붉은 색이고, 세 개의 머리와 여섯 개의 팔, 그리고 따로 따로 넓게 벌리고 있는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오른쪽 얼굴은 하얀색이고 왼쪽 얼굴은 푸른색이며 가운데 얼굴은 검붉은 색입니다. 그의 여섯 개의 손 중 오른쪽 첫 번째 손은 연꽃을, 두 번째 손은 사람 머리 세 개가 꽂힌 삼지창을, 세 번째 손은 몽둥이를 들고 있고, 왼쪽 첫 번째 손은 요령을, 두 번째 손은 피가 가득 담긴 해골바가지를, 그리고 세 번째 손은 작은북을 들고 있습니다.
그의 배우자인 파드마 크로디슈바리는 그의 몸을 포옹하고 있는데, 그녀는 오른손으로 그의 목을 휘감고 왼손으로 피가 가득 담긴 해골바가지를 그의 입에 대고 있습니다.
그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당황하지 마십시오.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그가 당신 자신의 모습임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는 당신의 원불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그는 진실로 신성한 아미타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십시오. 알아차림과 해탈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이렇게 말해 주었을 때 그는 그것이 원불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나누어 질 수 없는 하나가 되어 깨달은 자가 될 것이다.
열 둘째 날
그러나 설령 이와 같이 인도 받은 후라 하더라도, 그는 악한 무의식 성향들에 의한 방해를 받아 두려워하여 달아난다. 그래서 원불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 때는 열 둘째 날에 카르마 가족의 피를 마시는 신이 가우리들과 피사치들 그리고 요기니들과 함께 그를 이끌어 주기 위하여 나타날 것이다57).
그러므로 그를 다시 인도하기 위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열 둘째 날이 오면 신성한 카르마 헤루카라고 불리는, 카르마 가족의 피를 마시는 신이 그의 배우자와 포옹한 모습으로 당신 두뇌의 북쪽으로부터 나와 분명하게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몸은 어두운 초록색이고, 세 개의 머리와 여섯 개의 팔, 그리고 따로 따로 넓게 벌리고 있는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오른쪽 얼굴은 하얀색이고 왼쪽 얼굴은 붉은색이며 가운데 얼굴은 위엄 있는 어두운 초록색입니다.
그의 여섯 개의 손 중 오른쪽 첫 번째 손은 칼을, 두 번째 손은 사람 머리 세 개가 꽂힌 삼지창을, 세 번째 손은 몽둥이를 들고 있고, 왼쪽 첫 번째 손은 요령을, 두 번째 손은 해골바가지를, 그리고 세 번째 손은 쟁기를 들고 있습니다.
그의 배우자인 카르마 크로디슈바리는 그의 몸을 포옹하고 있는데, 그녀는 오른손으로 그의 목을 휘감고 왼손으로 피가 가득 담긴 해골바가지를 그의 입에 대고 있습니다.
그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당황하지 마십시오. 그가 당신 자신의 마음의 모습임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는 당신의 원불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는 진실로 신성한 불공성취 부처님과 그의 배우자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헌신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알아차림과 해탈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이렇게 말해 주었을 때 그는 원불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되어 깨달은 자가 될 것이다.
스승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는 그들이 자신의 마음의 활동인 투영들임을 알아차려 해탈될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마치 박제된 사자를 보는 것과 같아서 만일 그가 그것이 단지 박제된 사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매우 두려움을 느끼지만, 어떤 사람이 그에게 그것이 박제된 사자라는 것을 알려준다면 그는 그 사실에 깜짝 놀라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는 전 공간을 채우는 거대한 몸을 가진 피를 마시는 신들이 나타날 때 두려워하고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인도 받자마자 그는 그들이 자신의 투영 또는 원불임을 알아차린다. 그가 이전에 명상을 했던 광휘와 나중에 일어난 자기 존속의 광휘는 어머니와 아들이 만나는 것처럼 합쳐진다.
그리고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의 자기 해탈의 광휘가 자연스럽게 그의 앞에 일어나 그는 스스로 해탈된다.
열 셋째 날
만일 그가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비록 그가 착한 사람일지라도 여기서 되돌아가 윤회계를 방황한다.
그 때는 여러 종류의 머리를 가진 8명의 가우리들과 피사치들이 그 자신의 두뇌 속에서 나와 그의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다시 인도하기 위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여덟 명의 가우리들이 당신의 두뇌 속으로부터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 두뇌의 동쪽에서는 하얀색 가우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녀는 오른손에는 시체를 몽둥이처럼 들고 있고 왼손에는 피가 가득 담긴 해골바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남쪽에서는 노란색 가우리가 활을 쏘며 나타나고, 서쪽에서는 붉은색 프라모하가 바다 괴물을 깃발처럼 들고 나타나며, 북쪽에서는 검은색 베탈리가 금강저와 피가 가득 담긴 해골바가지를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남동쪽에서는 오렌지색 푸카시가 오른손의 내장을 왼손으로 먹으며 나타나고, 남서쪽에서는 어두운 초록색 가스마리가 오른손의 금강저로 왼손의 피가 가득 담긴 해골바가지를 휘저으며 그 피를 마시면서 나타날 것입니다.
북서쪽에서는 담황색 찬달리가 머리와 몸통을 뜯어 분리시켜 오른손으로는 심장을 들고 왼손으로는 몸을 뜯어먹으며 나타나고, 북동쪽에서는 검푸른색의 슈마샤니가 머리와 몸통을 뜯어 분리시켜 먹으며 나타날 것입니다.
다섯 명의 피를 마시는 헤루카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 여덟 명의 가우리들은 당신의 두뇌 속에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58).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여덟 명의 가우리들이 나타난 다음에는 성스러운 장소로부터 여덟 명의 피사치들이 차례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동쪽에서는 싱하무카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녀의 몸은 포도주색이고 사자 머리이며, 팔짱을 낀 채 시체를 물고 있는데 머리 갈기를 흔들고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비야그리무카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녀의 몸은 붉은색이고 호랑이 머리이며, 두 팔은 교차하여 아래를 향하고 있고 이빨을 으르렁거리며 노려보고 있습니다.
서쪽에서는 슈르갈라무카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녀의 몸은 검은색이고 여우 머리이며 면도칼과 내장을 들고서 그 내장을 먹고 피를 핥고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슈바나무카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녀의 몸은 검푸른색이고 늑대 머리이며, 두 손으로 시체를 입으로 옮기며 노려보고 있습니다.
남동쪽에는 그르드라무카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녀의 몸은 담황색이고 독수리 머리이며, 거인의 시체를 어깨에 메고 해골을 들고 있습니다. 남서쪽에서는 칸카무카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녀의 몸은 검붉은색이고 매의 머리이며, 커다란 시체 가죽을 어깨에 걸치고 있습니다. 북서쪽에서는 카카무카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녀의 몸은 검은색이고 갈가마귀 머리이며, 왼손에는 해골바가지를,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심장과 허파를 먹고 있습니다.
북동쪽에는 울루무카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녀의 몸은 검푸른색이고 올빼미 머리이며, 오른손에는 금강저를, 왼손에는 칼을 든 채 시체를 뜯어먹고 있습니다.
다섯 명의 피를 마시는 헤루카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 성스러운 장소로부터 나온 여덟 명의 피사치들은 당신의 두뇌 속에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무엇이 나타나든지 마음의 활동인 당신 자신의 투영들임을 알아차리십시오.”
열 넷째 날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네 명의 수문장 여신들 또한 당신의 두뇌 속에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알아차리십시오.
당신 두뇌의 동쪽에서는 하얀색의 몸에 호랑이 머리를 한 안쿠샤가 해골바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노란색 몸에 암퇘지 머리를 한 파샤가 올가미를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서쪽에서는 붉은색 몸에 사자 머리를 한 슈릉칼라가 쇠사슬을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북쪽에서는 초록색 몸에 독사 머리를 한 간타가 요령을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이들 네 수문장 여신들은 당신의 두뇌 속에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의 원불임을 알아차리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서른 명의 분노한 헤루카들이 나타난 다음에는 여러 종류의 머리와 상징물을 지닌 스물 여덟 명의 요기니들이 차례로 당신 두뇌에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무엇이 나타나든지 마음의 활동인 당신 자신의 투영들임을 알아차리십시오. 결정적인 순간에 도달한 이 순간 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하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동쪽에서 여섯 명의 요기니들이 당신의 두뇌 속에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포도주색의 악마의 여신인 락샤시는 야크59) 머리를 하고 있으며 금강저를 들고 있습니다. 오렌지색의 브라미는 독사 머리를 하고 있으며 연꽃을 들고 있습니다.
어두운 초록색의 위대한 여신인 마하데비는 표범 머리를 하고 있으며 삼지창을 들고 있습니다. 푸른색의 탐욕의 여신인 로바는 몽구스60) 머리를 하고 있으며 바퀴를 손에 들고 있습니다.
붉은 색의 처녀의 여신인 쿠마리는 노란곰 머리를 하고 있으며 짧은 창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얀색의 인드라니는 갈색곰 머리를 하고 있으며 창자로 만든 올가미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남쪽에서는 여섯 명의 요기니들이 당신의 두뇌 속에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노란색의 바즈라는 돼지 머리를 하고 있으며 면도칼을 들고 있습니다.
붉은색의 평화의 여신인 샨티는 바다 괴물 머리를 하고 있으며 꽃병을 들고 있습니다. 붉은색의 감로수 여신인 아므르타는 전갈 머리를 하고 있으며 연꽃을 들고 있습니다.
하얀색의 달의 여신인 간드라는 매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금강저를 들고 있습니다. 어두운 초록색의 몽둥이의 여신인 단다는 여우 머리를 하고 있으며 몽둥이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노란색의 악마의 여신인 략샤시는 호랑이 머리를 하고 있으며 피가 가득 담긴 해골바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서쪽에서는 여섯 명의 요기니들이 당신의 두뇌 속에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어두운 초록색의 식인 여신인 박시니는 독수리 머리를 하고 있으며 몽둥이를 들고 있습니다. 붉은색의 기쁨의 여신인 라티는 말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커다란 시체의 몸통을 들고 있습니다. 하얀색의 강력한 힘의 여신인 마하발라는 가루다 머리를 하고 있으며 몽둥이를 들고 있습니다.
붉은색의 악마의 여신인 락샤시는 개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금강도로 시체를 자르고 있습니다. 붉은색의 욕망의 여신인 카마는 후루티 새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활을 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초록색의 재산의 수호 여신인 바수락샤는 사슴 머리를 하고 있으며 꽃병을 들고 있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북쪽에서는 여섯 명의 요기니들이 당신의 두뇌 속에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푸른색의 포도주의 여신인 바유데비는 늑대 머리를 하고 있으며 깃발을 흔들고 있습니다. 붉은색의 여성의 여신인 나리는 들소 머리를 하고 있으며 막대기를 들고 있습니다.
검은색의 암퇘지의 여신인 바라히는 암퇘지 머리를 하고 있으며 이빨로 만든 올가미를 들고 있습니다. 붉은색의 바즈라는 까마귀 머리를 하고 있으며 어린아이의 가죽을 들고 있습니다.
어두운 초록색의 코끼리의 여신인 마하하스티니는 코끼리 머리를 하고 있으며 거대한 시체를 든 채 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푸른색의 물의 여신인 바루나데비는 독사 머리를 하고 있으며 독사로 만든 올가미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네 명의 수문장 요기니들이 당신의 두뇌 속에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동쪽에서는 뻐꾸기 머리를 한 하얀색 바즈라가 쇠갈고리를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남쪽에서는 염소 머리를 한 노란색 바즈라가 올가미를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서쪽에서는 사자 머리를 한 붉은색 바즈라가 쇠사슬을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북쪽에서는 독사 머리를 한 어두운 초록색 바즈라가 요령을 손에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이들 네 명의 수문장 요기니들은 당신의 두뇌 속에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들 스물 여덟 명의 요기니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노한 헤루카들의 활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알아차리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다르마카야(법신)는 비어있음(공)으로부터 평화로운 신들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을 알아차리십시오.
삼보가카야(보신)는 광휘로부터 분노한 신들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아차리십시오. 만일 58명의 피를 마시는 신들이 당신의 두뇌 속에서 나와 당신 앞에 나타날 때, 이때 당신이 무엇이 나타나든지 그것은 당신 자신의 통찰의 빛이 일어난 것임을 안다면, 당신은 즉시 피를 마시는 신들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깨달은 자가 될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심한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당신은 피를 마시는 신들을 죽음의 왕으로 볼 것이고, 그래서 그들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당신은 공포와 당황함과 아찔함을 느낄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투영들은 악마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윤회계에서 방황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윤회계에서 방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들 평화와 분노의 신들 중 가장 큰 신의 몸은 하늘 전체와 같고 중간 크기의 신은 수미산과 같으며 가장 작은 크기의 신은 우리 몸의 열 여덟 배와 같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현상들은 빛과 영상으로 나타납니다.
출현하는 모든 영상들이 당신 자신의 마음의 자연스런 광휘임을 알아차림으로써 당신 자신의 광휘는 그 빛과 영상들과 합쳐져서 당신은 깨달은 자가 될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당신이 보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아무리 무서울지라도 그것은 당신 자신의 투영임을 알아차리십시오.
그것이 광휘임을, 당신 자신의 마음의 자연스런 광휘임을 알아차리십시오.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이 알아차린다면 바로 그 순간 당신은 깨달은 자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완전하고 즉각적인 깨달음이 그 순간 일어 날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만일 당신이 지금 알아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두려워한다면, 모든 평화의 신들은 마하칼라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모든 분노의 신들은 죽음의 지배자인 다르마라자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투영들이 악마로 변함과 함께 당신은 윤회계에서 방황할 것입니다61).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만일 당신이 당신의 투영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설사 오랜 세월 동안 진리를 수행하고 모든 경전을 배웠다 하더라도 당신은 깨달은 자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투영들을 알아차린다면 비밀을 푸는 열쇠 한 개나 말 한마디에 깨달은 자가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투영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들은 당신이 죽자마자 다르마타 바르도에서 죽음의 지배자인 다르마라자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가장 큰 죽음의 지배자의 몸은 온 하늘을 가득 채우고 중간 크기의 죽음의 지배자는 수미산과 같습니다. 그들은 전 우주를 가득 채우며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의 이빨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고 유리같이 투명한 눈을 가졌으며, 머리카락은 머리 위에 묶여 있고 거대한 배와 가는 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손에 업의 기록판을 들고 “쳐라!”, “죽여라!” 소리치며, 뇌수를 빨며 머리를 걷어차고 내장을 끄집어냅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온 우주를 채우며 나타날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투영들이 이와 같이 나타날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무의식의 성향들로 이루어진 사념체이기 때문에 설사 당신이 죽임을 당하고 여러 조각으로 잘린다 해도 당신은 죽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진실로 비어있음의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의 지배자들 또한 당신 자신의 마음의 광휘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아무런 견고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어있음은 비어있음에 의해 해침을 당할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나타나는 평화나 분노의 신들, 피를 마시는 헤루카들, 동물의 머리를 한 신들, 무지개 빛들, 그리고 죽음의 지배자들의 무시무시한 형상 등은 아무런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그들은 다만 당신 마음의 자발적인 활동으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런 사실을 이해한다면 모든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당신과 분리할 수 없는 하나가 되어 당신은 깨달은 자가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이 알아차린다면 그들은 당신의 원불이 될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에서 나를 이끌어 주기 위해서 나타났다. 나는 그들 안에 피난한다.’ 삼보님을 기억하십시오.
당신 자신의 원불을 기억하십시오.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게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오 고귀한 원불이시여, 저는 바르도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구원자가 되어 주시고 자비로써 저를 붙잡아 주소서.’ 당신 스승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게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저는 바르도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구원자가 되어 주시고 자비로써 저를 버리지 말아주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피를 마시는 신들에게 간구하고 다음의 기원문을 외우십시오.
강한 무의식의 성향들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모든 두려움을 내버린 광휘 안에서
신성한 평화와 분노의 신들이시여,
제 앞에 나투시고
분노의 여신들과 공간의 여왕님들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저를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가소서.
사랑하는 친구들과 헤어져 홀로 방황할 때
제 자신의 투영들의
비어있는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부처님들이시여, 자비의 힘을 보내주시어
바르도의 공포가 오지 않게 하소서.
다섯 가지 지혜의 밝은 빛이 비칠 때
두려워하지 않고 제 스스로 알아차리게 하소서.
평화와 분노의 신들이 나타날 때
제가 두려워하지 않고
확실하게 바르도를 알아차리게 하소서.
악한 업의 힘으로 인하여 제가 고통을 받을 때
저의 원불이시여, 모든 고통을 제거하여 주소서.
다르마타의 소리가 천 개의 천둥처럼 울릴 때
그 모든 소리들이
여섯 음절62)의 소리가 되게 하소서.
제가 피난처 없이 저의 업을 따라갈 때
대비주 관세음보살님 저의 피난처가 되어 주소서.
무의식 성향들의 업 때문에 제가 고통받을 때
희열의 삼매와 광휘가 나타나게 하소서.
다섯 가지 원소들이
적이 되어 나타나지 않게 하시고
제가 다섯 부처님들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소서.
온 마음을 다해 이 기원문을 외우십시오.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당신은 틀림없이 보신 부처님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신을 흩뜨리지 마십시오.”
이상과 같은 말을 세 번 또는 일곱 번까지 반복해서 말해 주어야 한다. 지은 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리고 남아 있는 업이 아무리 나쁘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해탈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들을 위하여 무엇이 행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들은 세 번째 바르도인 생성 바르도에서 방황해야만 한다. 그때를 위한 가르침은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명상 수행에 아주 정통했든 또는 그렇지 않든 간에,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에서 두려움으로 인하여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들음을 통한 해탈》외에는 아무런 다른 방법이 없다. 명상 수행을 많이 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마음과 몸이 분리될 때 다르마타 바르도가 갑자기 나타난다.
생전에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체험을 해 온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에서 광휘가 나타날 때 아주 강해지므로 생전에 수행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생전에 탄트라 신들에 대한 영상화 수행과 완성 수행을 해온 사람들은 다르마타 바르도에서 평화와 분노의 환영들이 나타날 때 아주 강하다.
그러므로 특히 살아 있을 때 이《들음을 통한 해탈》을 통하여 마음을 철저하게 훈련시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이 경전은 지니고 있어야 하고 숙달되어야 한다. 큰소리로 읽고 적절하게 기억해야 한다. 하루에 세 번 빼먹지 않고 실천해야 한다.
여기에 있는 말의 뜻은 마음속에서 완벽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말과 뜻은 설사 백 명의 살인자들이 추격해 온다 하더라도 잊혀지지 않아야 한다.
이 경전이《들음을 통한 해탈》로 불린 이래 다섯 가지 큰 죄63)를 지은 사람들조차 만일 그들이 이 경전을 듣기만 해도 틀림없이 해탈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전을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서 큰 소리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멀리 퍼져야 한다.
설령 이 경전을 한 번 듣고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바르도 상태에서 마음은 아홉 배 이상 맑아지기 때문에 한 글자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전을 모든 사람에게 말해 주어야 하며, 모든 환자들 옆에서 읽어 주어야 하고, 모든 시신 옆에서 읽어 주어야 한다. 이 경전은 널리 전파되어야 한다.
이 경전과 만나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무지를 제거하고 공덕을 쌓은 사람 외에는 이 경전을 만나기 어렵다. 만일 누구든지 이 경전을 듣는다면, 단지 의심만 하지 않으면 그는 해탈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전을 정말로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이 경전은 모든 가르침의 정수를 뽑은 것이다.
《들음을 통한 대 해탈》중, 다르마타 바르도에서 인도하는 가르침을 마친다. 그것은 단지
듣거나 보는 것만으로도 해탈하는
바르도의 가르침이다.
사르바망갈람 (sarvamahgalam)
6) 생성 바르도(Bardo)
신에게, 스승님께, 원불님께, 다키니에게
존경의 예를 올립니다.
그들에 의해 바르도에서 해탈되게 하소서.
《들음을 통한 대 해탈》가운데
다르마타 바르도는 앞에서 가르쳐졌고
이제 생성 바르도에서 기억해야 할 점이 나온다.
앞에서 다르마타 바르도가 여러 차례 인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대한 명상 수행에 정통하여 좋은 업의 결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명상 수행에 정통하지 못했거나 아주 악한 사람들은 두려움과 나쁜 업으로 인하여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앞으로 10일 동안 그들에게 다음의 말을 다시 상기시켜 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잘 듣고 이해하십시오. 지옥 중생과 천상계의 신들과 바르도의 몸은 자발적으로 태어납니다.
다르마타 바르도에서 평화와 분노의 신들이 나타났을 때 당신은 그들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두려움 때문에 4일 반64) 동안 기절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회복되었을 때 당신의 의식은 더욱 투명해졌고 이전의 몸과 같은 하나의 몸이 생겼습니다65). 탄트라 경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생성 바르도에서 이전의 몸과 미래의 몸을 가지고
모든 감각들이 완전하며 방해받지 않고 돌아다닌다.
업의 결과로 기적의 힘을 보유하며
같은 속성을 지닌 신들의 순수한 눈66)들만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전’이란 당신의 기억으로 인하여 피와 살로 이루어진 당신의 이전의 몸과 같은 몸을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발광체이며 황금시대의 몸과 같은 몇 가지 표시를 지니고 있습니다67). 이것은 정신적 몸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바르도 체험의 사념체라고 부릅니다. 이때 만일 당신이 천신으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당신은 천상 세계를 체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또는 지옥 중생 가운데 어느 모습으로 태어날 예정이든 당신은 그 세계를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전’이란 4일 반 동안 이전 신체에 대한 기억 때문에 당신이 육체적인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미래’란, 그 후 무엇이 되었든 당신이 나중에 태어나게 될 곳에 대한 체험을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전과 미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어떠한 투영들이 나타나더라도 그들을 따르거나 마음을 빼앗기거나 동경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그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거나 동경한다면, 당신은 윤회계를 방황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참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어제까지 다르마타 바르도의 투영들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들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곳까지 방황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만일 당신이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명상할 수 있다면 당신의 스승이 가르쳐 준 순수하고 숨김없는 마음과 비어있음의 광휘에 머무십시오. 그리고 무집착과 무위의 상태에서 쉬십시오. 당신은 해탈에 이를 것이고 자궁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알아차릴 수 없다면 당신의 원불 또는 스승이 머리 위에 있다고 영상화하고 아주 강하게 헌신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계속 반복하십시오. 정신을 흩뜨리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누군가 말해 주어야 한다. 만일 그가 이것을 알아차린다면 그는 해탈되어 여섯 세계에서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쁜 업의 영향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모든 감각들이 완전하다’라는 것은 설사 당신이 생전에는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였다 하더라도 이제 바르도 상태에서는 당신의 눈은 물체를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모든 감각들은 분명하여 결점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감각들이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죽어 바르도 상태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징표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리고 가르침을 기억하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방해받지 않고’라는 말은 당신은 정신적 몸인 사념체이며 당신의 마음은 육체와 분리되어 더 이상 물질적인 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제 당신은 산중의 산인 수미산도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고 당신 어머니의 자궁과 금강좌68)를 제외하고는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생성 바르도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징표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대비주 관세음보살님께 간구하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업의 결과로 기적의 힘을 보유하며’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행위에 따른 업력의 결과로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명상 수행이나 공덕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수미산의 네 대륙을 순식간에 돌 수 있으며, 당신이 가고자 하는 어떤 곳을 생각하자마자 즉시, 또는 주먹을 폈다 오므리는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능력을 펼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능력에 대해서 생각하지 마십시오69).
이제 당신은 방해받지 않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할 수 없는 행위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리고 당신의 스승께 간구하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같은 속성을 지닌 신들의 순수한 눈들만 볼 수 있다’라는 말은, 바르도 상태에서 같은 속성을 지니고 태어날 예정인 존재들은 서로를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상계의 천신으로 태어날 예정인 존재들은 서로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섯 세계에 태어날 예정인 존재들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서로를 볼 것입니다. 그들을 동경하지 말고 다만 대비주 관세음보살님을 명상하십시오.
‘신들의 순수한 눈들만 볼 수 있다’라는 말은 또 천상계의 천신들의 장점으로 말미암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삼매에 든 명상 수행자의 순수하고 신성한 눈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항상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보는데 집중한다면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거나 그들의 명상이 방해받는다면 그들은 볼 수 없습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와 같은 사념체의 몸으로 당신은 당신의 집과 가족들을 마치 꿈속에서 만나는 것처럼 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에게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친척들과 가족들이 흐느껴 우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나는 죽었다. 이제 나는 어떡하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뜨거운 모래에서 버둥거리는 물고기와 같은 심한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고통스러워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만일 당신에게 스승이 있다면 그에게 간구하십시오. 또는 원불인 대비주 관세음보살님께 간구하십시오.
설사 당신이 당신의 친지들에게 애착을 가진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애착을 가지지 마십시오. 대비주 관세음보살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아무런 고통도 공포도 없을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리저리 움직이는 업의 바람에 휘말려, 의지할 것 없는 당신의 마음은 어찌할 도리 없이 깃털 같은 바람의 말을 타고 정처 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당신은 조문하러 온 사람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울지 마세요.’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지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내가 죽었구나.’라는 생각에 극심한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게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밤낮으로 항상 그곳에는 가을날 새벽의 회색 빛 같은 회색 안개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바르도 상태는 49일 동안 지속될 것입니다.
보통 생성 바르도에서 고통은 21일간 지속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업의 영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 때 두렵고 견딜 수 없이 맹렬하게 휘몰아치는 엄청난 업의 회오리바람이 뒤에서 당신을 내몰 것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 자신의 혼란스런 투영입니다. 무섭고 견딜 수 없는, 거의 빛이 통하지 않는 어둠이 ‘쳐라!’, ‘죽여라!’ 하는 소리와 함께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70).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주 악한 일을 저질렀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업의 결과로 인간의 살을 뜯어먹는 악마들이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무기를 갖고 있으며 함성을 지르고 ‘죽여라!, 쳐라!’ 등의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당신은 많은 무서운 야생 동물에게 쫓기고 있는 것을 느낄 것이고 눈과 비와 폭풍과 어둠 속에서 많은 군사들에게 추격 당하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산들이 무너지고 호수가 넘치고 불이 번지는 소리와 사나운 바람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71). 두려움 때문에 당신은 아무 곳이라도 달아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깊고 무시무시한, 하얀색과 붉은색과 검은색의 세 낭떠러지에 의해 방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바야흐로 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려 하는 순간에 있게 될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그것은 실제의 낭떠러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적대감과 열망과 무지입니다72). 지금 당신은 생성 바르도에 와 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대비주 관세음보살님을 부르십시오. ‘오 관세음보살님, 스승님, 삼보님, 저(이름)를 지옥에 떨어지게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이렇게 열렬히 간구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공덕을 쌓았고 덕이 높으며 진리를 수행해 온 사람들에게는 모든 종류의 완벽한 기쁨이 그들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완벽한 희열과 행복을 체험할 것입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무관심하고 무지한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즐거움이나 고통을 체험하지 않고 단지 무지와 무관심만 나타날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와 같이 무엇이 일어나든지, 어떠한 즐거움이나 욕망의 대상이 나타나든지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동경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스승과 삼보님께 바치십시오. 당신의 가슴속에 있는 집착과 동경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만일 즐거움도 고통도 없는 무관심의 체험이 일어난다면,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명상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상대성을 초월한 절대 고요의 경지인 위대한 상징의 상태에 당신의 마음을 머물게 하십시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때 다리, 사당, 절, 탑 등이 당신을 잠시 보호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73).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몸과 분리되어 있어 정착할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은 분노와 추위를 느낍니다. 그리고 의식은 가볍고 빠르고 흔들리고 일시적인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아! 나는 죽었다. 이제 나는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당신은 갑자기 공허해지고 추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강렬하고 끝없는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당신은 어는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잡다한 모든 생각을 놓아 버리고 당신의 마음을 근본 상태에 머물게 하십시오.
당신에게 바쳐진 음식 외에는 아무 음식도 먹을 수 없는 때가 왔습니다. 친구들도 확실하지 않습니다74). 이 모든 것들은 생성 바르도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념체의 징표입니다.
이때의 즐거움과 고통은 당신이 지은 업에 의해 결정됩니다. 당신은 고향 땅과 친구들과 친지들 그리고 당신 자신의 시신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제 나는 죽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념체는 극심한 고통에 빠질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제는 몸을 하나 찾아야지.’라고 생각하고는 몸을 찾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닐 것입니다.
설령 당신이 당신 자신의 시신 속으로 아홉 번을 들어간다 하더라도, 다르마타 바르도에서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당신의 시신은 겨울이라면 얼었을 것이고 여름이라면 부패했을 것입니다.
혹은 그렇지 않다 해도 당신의 친지들이 화장해 버렸거나 무덤에 묻었거나 새나 야생 동물에게 주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들어갈 데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당신은 크게 낙담하여 모든 바위와 돌 사이에 끼어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통을 받는 것이 생성 바르도 입니다. 육체를 찾는 것조차 단지 고통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에 대한 갈망을 잘라 버리고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무위의 상태에서 머무십시오.”
이렇게 인도해 주면 그는 생성 바르도에서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인도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업의 힘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 (이름)이여, 잘 들으십시오. 이렇게 당신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당신의 업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달리 누구를 탓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업입니다. 그러니 이제 삼보님께 열렬히 간구하십시오. 그들은 당신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간구하지 않고 위대한 상징의 명상 수행도 모르며 당신의 원불을 명상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당신 안에 있는 선한 양심은 당신의 모든 선행을 모아 하얀 조약돌로 하나 하나 셀 것이고, 악한 양심은 악행을 모아 검은 조약돌로 하나 하나 셀 것입니다75).
이때 당신은 아주 겁이 나고 무서워서 와들와들 떨며 ‘저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라는 거짓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의 왕은 ‘내가 업의 거울을 볼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가 거울을 보았을 때 당신의 모든 죄와 공덕이 거울 안에서 순식간에 분명하고 뚜렷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거짓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왕은 밧줄로 당신의 목을 감아 끌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머리를 자르고 심장을 찢고 창자를 끄집어내며 골수를 핥고 피를 마시고 살을 먹고 뼈를 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죽을 수도 없습니다. 몸이 여러 조각으로 잘려 나가도 당신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
계속해서 난도질당하는 상태는 극심한 고통을 야기합니다. 그러므로 하얀 조약돌이 세어질 때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거짓말을 하지 말고 죽음의 왕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사념체이기 때문에 설사 당신이 죽임을 당하고 난도질되어도 당신은 죽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진실로 비어있음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의 왕은 비어있음의 본래 모습이며 당신의 혼란스런 투영입니다.
당신은 비어있음이고 무의식의 성향들로 이루어진 사념체입니다. 비어있음은 비어있음을 해칠 수 없습니다. 특성이 없는 것은 특성이 없는 것을 해칠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나타나는 죽음의 왕, 신, 악령, 소머리를 한 악마 등은 당신 자신의 혼란스런 투영들을 떼어놓으면 따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십시오. 이 순간 모든 것이 바르도임을 알아차리십시오.
상대성을 초월한 절대 고요의 경지에 대해 명상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명상하는 법을 모른다면 당신을 두렵게 하는 것의 본성을 자세히 고찰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아무런 본성이 없는 비어있음을 볼 것입니다. 이것이 다르마카야(법신)입니다. 그러나 이 비어있음은 없음이 아닙니다.
그것의 본성은 큰 자각과 명료함이 함께 하는 두려운 마음입니다. 이것이 삼보가카야(보신)의 마음입니다. 비어있음과 광휘는 둘로 나누어진 것이 아닙니다.
비어있음의 본성은 광휘이고 광휘의 본성은 비어있음 입니다. 이제 숨김없는 마음인 분리할 수 없는 ‘비어있음-광휘’는 벌거벗겨지고 그것의 창조되지 않은 상태에서 머뭅니다.
이것이 스바바비카카야(원초신76))입니다. 그것의 자연스런 에너지는 방해받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나타납니다. 이것이 자비로운 니르마나카야(화신)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이와 같이 이해하십시오. 당신이 알아차리는 순간 당신은 네 가지 몸 안에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정신을 흩뜨리지 마십시오. 이것이 부처와 중생의 경계선입니다. 이 순간은 이렇게 말해집니다.
한 순간에 그들은 분리되고
한 순간에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다.
어제까지 당신은 정신이 흩뜨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바르도 상태가 나타났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지금 당신이 정신을 흩뜨린다면 자비의 밧줄은 끊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심하십시오.”
이렇게 인도해 주면 그가 이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알아차리고 해탈에 이를 것이다. 만일 그가 이와 같이 명상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이 명상하는 법을 모른다면 불법승 삼보님과 대비주 관세음보살님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간구하십시오.
모든 무서운 투영들이 관세음보살님 또는 당신의 원불임을 명상하십시오. 당신이 인간 세상에 있었을 때 스승의 이름과 비밀리에 전달받은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죽음의 왕인 다르마라자에게 말하십시오77).
설사 당신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진다 해도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과 공포를 버리십시오.”
이렇게 인도해 주면 비록 그가 전에는 해탈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해탈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래서 해탈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또 다른 노력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다시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 주어야 한다.
“지금 현재의 체험들은 매 순간마다 당신을 차례로 기쁨과 슬픔의 상태로 빠지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투석기에서 돌이 하나씩 발사되는 것과 같습니다78).
그러므로 이제 어떠한 열망이나 적대감도 만들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더 높은 차원의 세계에 태어날 예정이고 그 때 더 높은 차원의 세계에 대한 체험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당신이 남기고 온 장소에 있는 친척들이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많은 동물의 희생을 바치고 있다면 순수하지 않은 생각들이 당신에게 일어나 당신은 격렬한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79).
그리고 그 분노는 당신이 지옥 중생으로 태어나게 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있던 자리에서 무슨 일이 행해지든 화를 내지 말고 친절함에 대해 명상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뒤에 남겨 둔 당신의 소유물에 집착하거나 혹은 어떤 사람이 당신의 물건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을 알고 그 물건에 대해 애착한다면, 당신은 뒤에 두고 온 사람들에게 화를 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더 높은 차원의 세계에 도달할 예정이라 하더라도 지옥 중생이나 아귀 중생으로 태어나는 원인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설사 당신이 남겨 두고 온 물건에 대해 집착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이나 갈망을 포기하고 그것들을 내버려두십시오. 온 마음으로 집중하여 그 물건들을 당신의 스승과 삼보님께 바쳤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무욕의 상태에 머무십시오.
죽은 사람을 위하여 칸카니 진언80)이 암송되고 ‘더 낮은 차원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정화 의식’ 등이 당신을 위해 거행될 때, 당신의 업으로부터 생긴 예민하고 초능력적인 지각 작용으로 당신은 그들이 삼마야 서약을 지키지 않는 조심성 없는 처신을 하는 사람으로서, 순수하지 않은 마음으로 졸며 무성의하게 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신심이 없고 불신의 감정이 있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죄받을 행위를 했으며, 의식의 집행이 잘 이행되지 않고 있음을 볼 것입니다81).
그래서 당신은 ‘아 이들은 나를 속이고 있구나! 정말로 이들은 나를 속이고 있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생각으로 당신은 크게 슬퍼하고 낙심할 것입니다. 게다가 순수한 헌신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여 당신은 불신하고 신앙심을 잃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낮은 차원의 세계로 떨어지는 확실한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주 해롭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뒤에 남겨 두고 온 영적인 친구들에 의해 의식의 진행이 아무리 순수하지 않게 거행된다 하더라도, 순수한 믿음과 헌신의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그래, 나의 투영들이 순수하지 않은 게 틀림없어! 부처님의 말씀이 어떻게 순수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이들은 거울에 비친 내 자신의 결점을 보는 것처럼 내 자신의 순수하지 않은 투영들 때문이야.
이 사람들로 말하자면, 그들의 몸은 승보이고 그들의 말은 법보이며 그들의 마음은 부처님의 본성(불보)이므로 나는 그들 안에 피난한다.’
그러면 당신이 남겨 두고 온 곳에서 어떤 일이 행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순수한 생각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설사 당신이 삼악도(지옥, 아귀, 축생) 중 한 곳에 태어날 예정이고, 그때 그 세계에 대한 체험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당신의 친지들이 죄로부터 자유로운 덕 있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스승들과 스님들이 완벽하게 순수한 몸과 말과 마음의 거룩한 진리를 수행하고 있다면 그들을 바라볼 때 당신은 큰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설사 당신이 더 낮은 차원의 세계에 떨어질 예정이었다 하더라도 즉각적으로 당신을 더 높은 차원의 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수하지 않은 마음을 갖지 않고, 선입관 없는 순수한 헌신의 마음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요약하자면, 지금 바르도 상태에서 당신의 마음은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빛이고 움직이기 쉬운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은 아주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나쁜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좋은 행위만 기억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쌓은 공덕이 없다면 헌신과 순수한 생각을 하십시오. 당신의 원불과 대비주 관세음보살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다음의 기원문을 강렬하게 집중하고 외우십시오.
사랑하는 친구들과 헤어져 홀로 방황할 때,
내 자신의 투영들의 텅 빈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부처님들이시여, 자비의 힘을 보내주시어
바르도의 공포가 나타나지 않도록 해 주소서.
제가 나쁜 업의 힘으로 인하여 고통 당할 때
원불이시여, 모든 고통을 물리쳐 주소서.
존재의 근원인 다르마타의 소리가
천 개의 천둥처럼 으르렁거릴 때
그 모든 소리가 여섯 음절의 소리가 되게 하소서.
제가 피난할 곳 없이 저의 업을 따를 때
대비주 관세음보살님, 저의 피난처가 되어 주소서.
제가 무의식 성향들의 업으로 고통 당할 때
희열의 삼매와 광휘여, 일어나소서.
이 기원문을 간절히 외우십시오. 틀림없이 당신에게 길을 인도해 줄 것입니다.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전적으로 확신하십시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해 주었을 때 그는 기억하고 알아차려 해탈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여러 번 해주었어도 악업의 영향 때문에 알아차리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다시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해 주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사자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만일 당신이 지금까지 말해 준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제 당신이 과거의 삶에서 가졌던 몸은 점점 희미해지고 미래의 몸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슬픔에 잠겨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이처럼 고통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어떤 종류의 몸이라도 나타난다면 찾아가리라.’
그리고 당신은 어떤 것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향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닐 것입니다. 이 때 존재의 여섯 세계로부터 여섯 개의 빛이 비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업에 의해 당신이 태어날 예정인 세계의 빛이 가장 밝게 비칠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잘 들으십시오. 만일 당신이 여섯 세계의 빛에 대해서 묻는다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천상 세계로부터는 흐릿한 하얀 빛이 비칠 것입니다.
아수라 세계로부터는 흐릿한 붉은 빛이 비칠 것입니다. 인간 세계로부터는 흐릿한 푸른 빛이 비칠 것입니다. 축생 세계로부터는 흐릿한 초록 빛이 비칠 것입니다.
아귀 세계로부터는 흐릿한 노란 빛이 비칠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 세계로부터는 흐릿한 회색 빛이 비칠 것입니다. 이것이 여섯 세계의 빛입니다.
그 순간 당신의 몸 또한 당신이 태어날 예정인 세계의 빛깔을 띨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때 가르침의 본질적인 요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어떠한 빛이 비치더라도 대비주 관세음보살님으로 여기고 그것에 대해 명상하십시오.
빛이 나타날 때 그것이 대비주 관세음보살님이라는 생각에 대해 명상하십시오. 이것이 가장 심오하고 본질적인 요점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중요하며 태어남을 막아줍니다.
당신의 원불이 누구이든 그를 그 자신의 실체가 없는 환상과 같은 환영으로 여기고 오래 명상하십시오. 이것을 순수한 환영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원불을 가장자리로부터 안쪽을 향하여 사라지게 하고, ‘비어있음-광휘’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잠시 머무십시오. 이 상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시 원불에 대해 명상하고 그 다음에 다시 광휘에 대해 명상하십시오.
이와 같이 교대로 명상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당신의 마음 또한 가장자리로부터 안쪽으로 사라지게 하십시오82). 공간이 있는 곳은 어느 곳이든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은 어느 곳이든 다르마카야(법신)가 있습니다. 다르마카야의 단순하고 무아의 상태에서 머무십시오.”
이 상태에서 태어남은 방지되고 그는 깨달은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수행이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명상수행에 정통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혼란스러워 자궁 입구를 향하여 방황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궁 입구를 닫는 가르침은 아주 중요하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만일 당신이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이제 업의 힘에 의해 위로, 옆으로, 아래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 대비주 관세음보살님을 명상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그 다음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당신은 회오리바람, 눈보라, 우박폭풍, 온 사방이 닫히는 어두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쫓아오는 체험을 할 것입니다.
선업을 쌓지 않은 사람들은 고통의 장소로 도망가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선업을 쌓은 사람들은 기쁨의 장소에 도착하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때,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당신이 태어날 예정인 나라와 장소의 징후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왜냐하면 가르침의 심오하고 본질적인 요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신이 이전에는 알아차림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수행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여기에서 요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들으십시오.
이때 자궁 입구를 닫는 방법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궁 입구를 닫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들어가는 사람을 멈추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열려 있는 자궁을 닫는 것입니다. 다음의 방법은 들어가는 사람을 멈추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 (이름)이여, 당신의 원불이 누구이든지, 그를 환상이나 물에 비친 달처럼 그 자신의 실체가 없는 환영의 모습으로 뚜렷하게 영상화시키십시오. 만일 당신에게 특별한 원불이 없다면 대비주 관세음보살님을 생생하게 영상화시키십시오.
그리고 그 원불을 가장자리로부터 안쪽으로 사라지게 하십시오.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광휘-비어있음’에 대해 명상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심오한 비밀입니다. 이것에 의해 자궁으로 들어가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명상하십시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당신을 멈추게 하지 못하고 당신이 자궁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이때 막 들어가려 하는 자궁 입구를 닫는 심오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들으십시오. 저를 따라 <바르도의 중요한 싯구>에 있는 다음의 구절을 외우십시오.
지금은 생성 바르도가 나에게 밝아오는 때
마음을 일념으로 집중하고
선업의 결과들을 오래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자궁 입구를 닫고 그 반대의 것을 생각하리라83).
지금은 인내와 순수한 생각이 필요한 시간
질투심을 버리고 스승과 그의 배우자를 명상하리라84).
이 말을 크고 분명하게 말하고 당신의 기억을 깨우십시오. 그 의미에 대해 명상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은 생성의 바르도가 나에게 밝아오는 때’는 당신이 생성 바르도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표시로 만일 당신이 물을 들여다본다면 당신은 당신의 반사된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림자가 없습니다. 이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육체적인 몸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생성 바르도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념체의 징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당신은 정신을 흩뜨리지 말고 일념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 일념으로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은 고삐로 말을 제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이든 당신이 집중하는 것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행위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진리와 가르침과 가르침을 전해 준 사람, 그리고 당신이 생전에 가르침을 받았던 이《들음을 통한 대 해탈》같은 경전의 권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선업의 결과를 오래 유지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정신을 흩뜨리지 마십시오.
지금은 높은 차원의 세계로 올라가는가 아니면 낮은 차원의 세계로 떨어지는가가 결정되는 시간입니다. 지금은 단 한 순간일지라도 게으름에 미끄러져 들어간다면 당신은 영원히 고통을 받을 그런 시간입니다.
지금은 당신이 일심으로 집중함으로써 영원히 행복하게 될 수 있는 그런 시간입니다. 일념으로 당신의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선한 업의 결과를 오래 유지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이제 자궁 입구를 닫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해집니다.
자궁 입구를 닫고 그 반대의 것을 생각하리라.
지금은 인내와 순수한 생각이 필요한 시간.
이제 그 시간이 왔습니다. 먼저 자궁 입구가 닫혀져야 합니다. 자궁 입구를 닫는 방법은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방법들을 잘 이해하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때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투영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을 보았을 때 그들 사이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다만 기억하고 남자와 여자를 스승과 그의 배우자로 여기고 명상하십시오. 마음속으로 엎드리고 깊은 헌신의 마음으로 예물을 바치고 가르침을 구하십시오.
당신이 강렬하게 이 생각에 집중하자마자 자궁 입구는 틀림없이 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해도 자궁이 닫히지 않고 당신이 바로 자궁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스승과 그의 배우자를 당신의 원불이나 배우자를 동반한 대비주 관세음보살님으로 여기고 명상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 마음의 예물을 바치십시오. 이렇게 하면 자궁 입구가 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해도 닫히지 않고 자궁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열망과 적대감을 쫓아내는 세 번째 가르침이 있습니다.
태어남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알에서 태어나는 것(卵生),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胎生),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것(化生), 그리고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濕生)이 그것입니다.
이들 가운데 알에서 태어나는 것과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은 비슷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수컷과 암컷이 성적인 결합을 하고 있는 투영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순간 만일 당신이 열망과 적대감의 힘으로 인하여 자궁으로 들어간다면, 당신은 말이나 새, 개, 인간 등으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남자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남자의 체험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격렬한 적대감을 느낄 것이고 어머니에게는 선망과 욕망을 느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여자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여자의 체험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강한 질투심과 시샘을 느낄 것이고 아버지에게는 강한 욕망과 열정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자궁으로 인도하는 길로 들어가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한 가운데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희열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 희열에 찬 상태에서 당신은 의식을 잃고 태아는 몸이 성숙할 때까지 둥글거나 타원형으로 자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당신은 눈을 뜰 것입니다.
당신은 강아지로 변해 있습니다. 전에는 인간이었는데 이제 당신은 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개집이나 그와 비슷한 돼지우리 또는 개미언덕, 벌레굴 속에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그밖에 당신은 송아지나 염소 또는 양 등으로 태어날지도 모릅니다.
이곳으로 되돌아 올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크나큰 어리석음과 무지의 상태에서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경험할 것입니다.
지옥 세계와 아귀 세계 등 존재의 여섯 세계 이곳 저곳을 이와 같이 돌면서 당신은 한량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강력하거나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아아! 스승의 신성한 가르침을 지니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윤회의 엄청난 낭떠러지로 떨어져 견딜 수 없는 무한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말을 잘 듣고 이 가르침을 이해하십시오.
자궁 입구를 닫고 그 반대의 것을 생각하리라.
지금인 인내와 순수한 생각이 필요한 시간,
질투심을 버리고 스승과 그의 배우자를 명상하리라.
앞에서 말했듯이 당신은 질투의 감정을 가질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남자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당신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미워할 것입니다.
당신이 여자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당신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미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를 위한 심오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열망과 적대감이 이와 같이 일어날 때 이렇게 명상하십시오.
‘아! 나는 열망과 적대감에 매달려 지금까지 이렇게 윤회계를 방황하고 있는 그런 악업을 지닌 존재구나.
만일 내가 이와 같은 열망과 적대감을 계속해서 느낀다면 나는 끝없이 윤회계를 방황하고 오랜 세월을 고통의 바다에 깊숙이 가라앉을 것이다.
아! 나는 이제 다시는 열망이나 적대감을 갖지 않으리라.’
당신의 마음을 강렬하게 그리고 일념으로 이 생각에 집중함으로써 스스로 자궁 입구를 닫을 것이라고 경전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정신을 흩뜨리지 마십시오. 일심으로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그러나 만일 이렇게 한 뒤에도 자궁 입구가 닫히지 않고 당신이 자궁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그때는 비실재적이고 환상적인 모든 것의 본성에 관한 가르침으로 자궁 입구를 닫아야 합니다.
이렇게 명상하십시오.
‘아! 아버지와 어머니, 엄청난 폭풍, 회오리바람, 천둥, 무서운 투영들 그리고 모든 현상들은 그들의 참된 본성에서는 환영에 불과하다.
그들이 어떻게 나타나든지 그들은 실재가 아니다. 모든 물질은 거짓이며 헛된 것이다. 그들은 아지랑이 같아서 영원하지 않다. 그들은 변하는 것이다.
갈망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두려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내 마음의 투영들이다.
그리고 내 마음 자체도 처음부터 환상인데 외부의 어느 곳에서 그들이 이처럼 나타날 것인가. 전에는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헛된 것을 진실한 것으로, 환영을 실재로 믿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윤회계를 방황해 왔다. 만일 그들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여전히 윤회계에서 방황할 것이고 틀림없이 고통의 진흙 늪에 빠질 것이다.
이제 그들은 모두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메아리 같고, 환상의 도시 같고, 아지랑이 같고, 영상 같고, 눈에 보이는 환영 같고, 물에 비치는 달 같은 것이다. 그
들은 한순간도 실재가 아니다. 확실히 그들은 진실이 아닌 거짓이다.’
이 확신에 일념으로 집중함으로써 그들의 실재에 대한 믿음은 파괴됩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내부에서 확신이 서면 자아에 대한 믿음은 돌아서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은 비실재에 대한 이해를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한다면 자궁 입구는 틀림없이 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한 뒤에도 실재에 대한 믿음이 파괴되지 않고 자궁 입구가 닫히지 않아 당신이 자궁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이때를 위한 심오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만일 이렇게 한 뒤에도 자궁 입구가 닫히지 않았다면, 이제 다섯 번째 방법인 광휘에 대한 명상에 의해 자궁 입구가 닫혀질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내 자신의 마음이며, 이 마음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차단되지도 않은 비어있음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당신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인위적이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십시오. 그것은 물에 물을 붓는 것처럼 그 자신의 본성 안에 일체 완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바로 있는 그대로 느슨하고 열려 있고 긴장을 푼 상태입니다. 마음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느슨하게 머물게 함으로써 당신은 네 종류의 탄생으로 들어가는 자궁 입구가 틀림없이 닫혀질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됩니다.”
자궁 입구를 닫기 위한 진실되고 심오한 많은 가르침들이 지금까지 있었다. 능력이 뛰어나거나 중간이거나 낮은 사람, 그 누구라도 이 가르침들에 의해 해탈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바르도 상태에서 의식은 이 세상의 일에 대하여 초자연적인 지각작용을 보유하기 때문에 그는 해주는 말을 잘 들을 수 있다.
둘째, 설사 그가 벙어리나 장님이었다 하더라도 이제 그는 모든 감각들이 완전하기 때문에 해주는 말을 잘 들을 수 있다.
셋째, 두려움으로 끊임없이 압도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는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해주는 말을 잘 듣는다.
넷째, 의식은 의지할 육체가 없어서 집중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바로 나타나기 때문에 인도하기가 쉽다.
마음은 아홉 배 이상 명료해지기 때문에 설사 그가 바보라 해도 이때의 마음은 아주 명료해져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명상을 할 수 있다.
이런 본질적인 요점들이 그 이유이다. 같은 이유로 죽은 사람을 위하여 의식을 거행하는 것 또한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이《들음을 통한 대 해탈》을 49일 동안 참을성 있게 읽어 주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비록 그가 한 번 인도해 주었을 때 해탈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음 번에는 해탈에 이를 것이다.
그것이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의 인도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렇게 인도해 준 경우라도, 선행을 하는 데에는 익숙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바로 악행을 하는데 아주 능숙했던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앞에서 그렇게 많이 인도 받았고 명상의 대상들을 제시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강력한 신경증의 가리개들의 영향으로 인하여 그들은 해탈되지 못했다.
그래서 만일 앞에서 자궁 입구가 닫히지 않았다면, 자궁 입구를 선택하는 심오한 가르침이 이제 있을 것이다.
누군가 부처님들과 보살님들께 도움을 청하고 피난처를 되풀이하며 말해야 한다85). 그리고 나서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 (이름)이여, 죽은 자는 누구입니까? 잘 들으십시오. 당신은 지금까지 그렇게 여러 번 가르침을 인도 받았건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자궁 입구가 닫히지 않았다면 이제 몸을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을 위한 자궁 입구를 선택하는 가르침은 하나가 아니라 진실 되고 심오한 많은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하고 정신을 흩뜨리지 마십시오. 강하게 집중하여 잘 듣고 이해하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이제 당신이 태어날 예정인 대륙의 징표와 특성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리십시오. 당신이 태어날 예정인 곳을 조사하고 대륙을 선택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고상한 몸들이 사는 동쪽 대륙에 태어날 예정이라면, 암수 거위들이 떠다니는 호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반대의 것을 생각하고 그곳에 가지 마십시오. 비록 그곳은 행복이 가득한 곳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번성하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장미와 사과의 섬인 남쪽 대륙에 태어날 예정이라면, 훌륭하고 아름다운 집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가능하다면 그곳에 들어가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소들이 있는 즐거운 곳인 서쪽 대륙에 태어날 예정이라면, 암수의 말들이 놀고 있는 호수를 볼 것입니다. 거기로 들어가지 말고 이곳으로 돌아오십시오. 비록 그곳은 즐거운 곳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번성하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기분 나쁜 소리가 나는 곳인 북쪽 대륙에 태어날 예정이라면, 가축이나 나무들이 있는 호수를 볼 것입니다. 그것들은 재생의 표시입니다. 그곳으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비록 그곳이 장수하고 덕이 많은 곳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번성하지 않은 곳입니다. 들어가지 마십시오86).
만일 당신이 천신으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여러 가지 보석으로 만들어진 고층의 절들을 볼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곳에 들어가기에 적당하면 그곳에 들어가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아수라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아름다운 작은 숲이나 회전하고 있는 불의 바퀴 같은 것을 볼 것입니다. 그곳에 절대 들어가지 말고 반대의 것을 생각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동물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마치 안개 속에서 바위 동굴과 땅에 나 있는 구멍 그리고 띠집을 보는 것 같은 풍경을 볼 것입니다. 그곳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아귀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나무의 그루터기와 곧추 서 있는 검은 물체, 낮은 동굴과 검은 천 조각들을 볼 것입니다. 그곳에 들어간다면 당신은 아귀가 되어 배고픔과 갈증 등의 온갖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그곳으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반대의 것을 생각하고 강하게 인내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지옥 중생으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당신은 악업을 지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거나, 어쩔 수 없이 들어가거나, 또는 검고 붉은 집들과 검은 구덩이와 검은 길들이 있는 어두운 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곳에 들어간다면 당신은 지옥에 들어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그곳에서 열기와 추위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절대 들어가지 말고 조심하십시오. 그것이 ‘자궁 입구를 닫고 그 반대의 것을 생각하리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금 필요합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설령 당신이 가지 않기를 원해도 당신은 힘이 없습니다. 당신은 어쩔 수 없이 가야합니다.
당신의 뒤에서는 업의 복수자들이 쫓아오고 앞에서는 복수자들과 살인자들이 당신을 끌고 갑니다. 암흑, 태풍, 격렬한 폭풍, 고함소리, 눈과 비, 사나운 우박폭풍, 그리고 눈보라가 당신 주위에서 회오리 칠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들로부터 달아나 피난처를 찾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앞에서 말한 훌륭한 집이나 바위 은신처 또는 땅위의 구멍, 나무 사이, 연꽃의 둥근 구멍 등에서 안전을 구할 것입니다.
그곳에 숨어 당신은 두려워하여 나오지 않고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제 나는 이곳을 나갈 수 없어.’ 그리고 떠나기를 두려워하여 당신은 그곳에 강하게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밖으로 나간다면 만나게 될 바르도의 공포 때문에 당신은 극단적인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당신은 안으로 숨어 아무리 나쁜 몸이라 해도 그것을 취합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그것이 악마들의 힘이 지금 당신을 방해하고 있는 표시입니다. 이때를 위한 심오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듣고 이해하십시오.
이 공포의 시간, 당신이 어찌하지 못하고 복수자들에게 쫓길 때, 즉시 온 마음을 다하여 커다란 몸집과 두꺼운 입술을 한, 모든 악한 힘을 부수어 먼지로 변하게 하며 두려움을 주는 분노한 태도로 서 있는 신성한 최상의 헤루카 또는 하야그리바나 바즈라파니87), 또는 만일 있다면 당신의 원불을 영상화하십시오.
그의 축복과 자비로써 복수자들로부터 분리되면 당신은 자궁 입구를 선택할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되고 심오한 가르침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해하십시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명상하는 천신 등은 삼매의 힘을 통하여 태어납니다. 아귀 등과 같은 악령들의 집단은 바르도 상태에서 사자의 태도가 바뀌어서 생긴 것입니다88).
그들은 아귀나 악마 등 여러 가지 환영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러한 정신적인 몸으로 변했습니다. 깊은 바다에 사는 아귀들과 허공을 날아다니는 아귀들, 그리고 8만 가지의 모든 악령들은 그들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그러한 정신적인 몸을 얻었습니다.
이때 가장 좋은 것은 비어있음에 관한 위대한 상징을 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할 수 없다면 그때는 모든 것을 환영으로 여기십시오89).
만일 그것도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원불인 대비주 관세음보살님을 명상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바르도 상태에서 보신 부처님이 될 것입니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이 업의 힘에 의해 자궁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면, 이제 자궁을 선택하는 가르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어떠한 자궁 입구가 나타나더라도 들어가지 마십시오. 만일 복수자들이 나타나 당신이 자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하야그리바를 명상하십시오.
지금 당신은 미묘한 초자연적인 지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장소를 다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을 하십시오. 여기에 두 개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순수한 부처님의 세계로 이동하는 가르침과 순수하지 않은 윤회계의 자궁 입구를 선택하는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방식으로 행동하십시오.
순수하게 정화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공간의 순수한 세계로 이동하기 위하여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아, 내가 지금도 여전히 이 윤회계의 진흙 늪에 남아 있으니 참으로 슬프구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한량없는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미 부처가 되었건만 나는 해탈되지 못했다. 이 순간부터 나는 이 윤회계가 지겹고 두렵고 신물이 난다.
이제 벗어날 준비를 할 때가 왔다. 나는 서쪽 희열에 찬 세계의 아미타 부처님의 발 아래에 있는 한 송이 연꽃 안에서 자발적인 탄생을 이루어야 한다.’
이런 생각과 함께 서쪽 희열에 찬 세계에 대하여 강렬하게 집중하십시오. 이 노력을 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혹은 만일 당신이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일념으로 강하게 집중하여 당신이 원하는 세계인 순수한 세계나 완벽한 기쁨의 세계, 또는 빽빽이 채워진 세계나 버드나무 잎의 세계, 혹은 야자나무 산이나 우르겐의 연꽃 빛의 궁전90)으로 주의를 돌린다면, 당신은 즉시 그 세계에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미륵 부처님이 계시는 기쁨이 넘치는 세계91)로 들어가길 원한다면, 마음을 집중하고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바르도 상태의 이 순간 내가 기쁨이 넘치는 세계에 계시는 진리의 왕 미륵 부처님께로 갈 때가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갈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미륵 부처님이 계신 연꽃 속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당신이 이렇게 할 수 없어 자궁으로 들어가고자 하거나 들어가야 할 자궁을 발견한다면, 여기에 순수하지 않은 윤회계에서 자궁 입구를 선택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들으십시오. 앞에서처럼 당신의 초자연적인 지각으로 당신이 선택하려는 대륙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번성하는 곳으로 들어가십시오.
만일 당신이 불결한 거름더미에 자발적으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당신은 그 악취를 내뿜는 더미가 달콤한 냄새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에 매력을 느껴 그곳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신뢰하지 말고 욕망과 증오심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자궁 입구를 선택하십시오.
다시 다음과 같이 마음을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우주의 황제나 거대한 사라수 나무 같은 바라문, 또는 명상 수행에 정통한 자의 아들로, 또는 순수한 진리의 혈통을 지닌 가계 안에서, 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신심이 있는 가족 안에서 태어날 것이다.’ 이 생각에 집중하면서 자궁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때 당신이 들어가는 자궁을 신들의 궁전으로 축복하고 시방(十方)의 제불 보살님과 원불, 특히 대비주 관세음보살님께 간구하고 그들이 힘을 보내 줄 것을 간절히 바라며 자궁으로 들어가십시오.
자궁 입구를 선택할 때 업의 영향 때문에 좋은 자궁 입구가 나쁘게 보이고, 나쁜 자궁 입구가 좋게 보이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한 번 더 가르침의 본질적인 요점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십시오. 설령 자궁 입구가 좋게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믿지 말고 나쁘게 나타나더라도 싫어하지 마십시오.
진실되고 심오하고 중요한 비결은 최상의 평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도 악도 없고 받아들임도 거부도 없으며 열망도 적대감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경험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나쁜 무의식 성향들의 병을 제거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이런 방식으로 열망과 적대감을 끊을 수 없다면, 그가 짐승들같이 낮은 것 중에서도 가장 낮고, 보잘것없는 죄인들 가운데에서 피난처를 얻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은 사람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다음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고귀한 집안의 사람이여, 만일 당신이 자궁 입구를 선택하는 방법을 모르고 열망과 적대감을 제거할 수 없다면, 앞에서 언급된 어떠한 체험이 일어나더라도 삼보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을 피난처로 삼으십시오.
대비주 관세음보살님께 간구하십시오. 머리를 높이 세우고 가십시오. 당신이 두고 온 친지들과 친구들, 아들 딸들에 대한 집착과 갈망을 버리십시오.
인간 세계에서 나오는 푸른 빛이나 천상 세계에서 나오는 하얀 빛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보석으로 장식된 궁전과 즐거움의 정원으로 들어가십시오.”
이 말을 일곱 번 반복해서 읽어 주어야 한다. 그 다음 부처님들과 보살님들께 간구한 다음,〈두려움을 막아 주는 바르도 기원문〉과〈여섯 바르도의 중요한 싯구〉그리고〈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로부터 구원을 청하는 기원문〉을 일곱 번 읽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몸의 구성 요소를 자발적으로 해방시키는 지님을 통한 해탈92)〉과〈무의식적 경향들을 자발적으로 해방시키는 일상 수행93)〉을 분명하고 또렷하게 읽어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올바르게 행함으로써 고도의 통찰력을 가진 요가수행자들은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에서 의식의 방출을 실행한다.
그리고 바르도에서 방황할 필요 없이 그것을 통과하여 해탈에 이른다. 그들보다 수준이 조금 낮은 수련을 한 소수의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에서 다르마타의 광휘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통과하여 깨달은 자가 된다.
그들보다 더 낮은 수준의 사람들은 계속되는 다르마타 바르도 기간동안 평화와 분노의 신들이 나타날 때 그들의 업에 따라 한 번의 가르침에 또는 다음 번의 가르침에 해탈된다. 거기에는 여러 단계가 있어서 그들은 적당한 단계에서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선업을 별로 쌓지 못했고 많은 신경증의 가리개들과 나쁜 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생성 바르도를 향해 방황하며 내려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사다리의 디딤판처럼 많은 가르침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의 가르침에 또는 그 다음 번의 가르침에 알아차리고 해탈될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선업을 거의 쌓지 않아 앞에서 말한 기간 동안 알아차리지 못하고 두려움에 의해 압도되는 사람들에게는 자궁 입구를 닫는 법과 자궁 입구를 선택하는 일련의 가르침이 차례로 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의 가르침에 또는 다음 번의 가르침에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명상의 대상에 대한 믿음은 최상의 무한한 덕성의 상태에 이를 것이다.
짐승들처럼 가장 낮은 수준의 존재라 하더라도 피난처를 가지는 미덕에 의해 낮은 세계에서 되돌아오게 된다.
그들은 모든 자유와 좋은 기회를 전부 갖춘 귀중한 인간의 몸을 얻을 것이다94). 다음 생에서 그들은 거룩한 스승과 영적인 친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해탈될 것이다.
만일 이 가르침이 생성 바르도 기간에 받아들여진다면, 그 가르침은 그 사람의 선업의 결과에 오래 지속된다. 그것은 마치 부러진 배수관에 파이프를 연결시켜 놓은 것과 같다95).
아주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이 가르침을 들었을 때 해탈되지 않기는 불가능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모든 평화와 분노의 부처님들과 신들의 자비로운 초대, 그리고 유혹자와 부정적인 힘들의 초대는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 단지 이 가르침을 듣는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가짐은 영향을 받고 해탈에 이른다. 영향은 쉽게 받는다. 왜냐하면 사념체는 살과 뼈로 된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바르도 상태에서 아무리 멀리서 방황하고 있다 해도 그들은 초자연적인 미묘한 지각작용으로 보고 듣는다. 그리고 나타난다. 이것은 아주 도움이 된다.
그때 그들은 이해하고 마음은 즉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투석기와 같고 백 사람의 힘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통나무를 물에 집어넣었을 때와 같다.
그때는 한사람으로도 어느 곳이든지 순식간에 이동시킬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고삐로 말을 제어하는 것과 같다96).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누군가 가까이 가야 한다. 만일 시신이 있다면 한 친구가 이 가르침을 콧구멍에서 피와 고름이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읽어 주어야 한다.
그 동안 시신은 건드리지 않은 상태로 있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지켜야 할 일은, 죽은 사람을 위하여 동물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하고 시신 앞에서 친구들이나 친지들이 다른 곳에서는 행해졌을지도 모르는 행동인 눈물을 흘리거나 한탄하거나 시끄럽게 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많은 덕행이 베풀어져야 한다. 이《들음을 통한 대 해탈》과 마찬가지로 다른 가르침들 또한 이 가르침에 이어서 읽어 주면 아주 좋다.
누구나 이 경전을 끊임없이 읽고 말과 용어의 뜻을 외워서 익혀야 한다. 그리고 죽음이 확실하고 죽음의 징표가 나타날 때, 만일 죽어 가는 사람의 상태가 괜찮다면 그는 그것을 스스로 크게 읽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만일 그가 그럴 수 없다면 진리의 형제가 읽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기억하면 틀림없이 해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추호도 의심할 바가 없다.
이 가르침은 어떠한 수련도 필요하지 않다. 이 가르침은 단지 보여주고 들려주고 읽어 주는 것만으로 해탈하는 심오한 가르침이다.
이 심오한 가르침은 큰 죄인들을 비밀의 길로 인도한다. 만일 누구라도 이 가르침의 말과 용어를 잊지 않는다면 일곱 마리의 개들에게 쫓긴다 해도 죽은 순간의 바르도에서 해탈될 것이다.
설사 삼세(三世)의 부처님들이 찾는다 해도 이보다 더 나은 가르침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티.
인간을 해탈시키는 바르도의 가르침이며 심오하고 가장 깊숙한 정수인《들음을 통한 대 해탈》.
이 보물은 성취자 까르마 링빠에 의해
감뽀다르 산에서 발견되었다.
진리와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이 되기를!
사르바망갈람
(sarvamahgalam)
7) 기원문(祈願文)
이 기원문들은《바르도 퇴돌》과 관련된 테르마 경전의 모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기원문들은 모두《바르도 퇴돌》자체에서 헌신적인 수행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으며, 그중 몇몇 싯구는 죽은 사람을 향한 가르침으로 인용된다.
종종 단순히 ‘기원문’으로 번역되는 이 말의 문자적인 뜻은 ‘소원의 길’이다. 그것은 외부에 있는 신에게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화하고 지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마음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선한 욕망을 일깨움으로써 영감으로 작용하며, 그 영감은 목표로의 이행을 이끈다.
(1) 부처님들과 보살님들께 구원을 청하는 기원문
누구든지 죽을 때가 되면 그는 항상 부처님들과 보살님들께 구원을 청해야 한다. 삼보님께 물질적 정신적 공양물을 바치고 손에 향기로운 향을 들고 다음의 말을 강하게 집중하며 말해야 한다.
“오 자비롭고 모든 것을 아시며 사랑과 다섯 종류의 눈을 갖추고 계시며, 모든 중생들의 보호자이신 시방에 계신 부처님들과 보살님들이시여, 자비의 힘으로 이곳에 오셔서 이들 물질적 정신적 공양물을 받아 주소서.
오 자비로운 분이시여, 당신은 생각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 분별의 지혜와 사랑의 자비, 효력 있는 행위, 그리고 보호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 자비로운 분이시여, 이 사람(이름)은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나고 있으며 선택의 여지없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런 피난처도 보호자도 협력자도 없습니다. 이 생에서의 빛은 꺼졌고 다른 세상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는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업의 힘으로부터 쫓기고 있고 광활한 황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런 견고한 바탕이 없는 곳으로 가고 있으며 큰 싸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는 엄청난 악령들에 의해 붙잡혀 있습니다.
그는 죽음의 왕이 보낸 사자(使者) 때문에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그의 업 때문에 그는 존재 후의 존재(윤회)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친구 하나 없이 홀로 가야 할 때가 왔습니다.
오 자비로운 분이시여, 그(이름)의 피난처가 되어 주소서. 그는 아무런 피난처가 없습니다. 그를 보호하여 주시고 지켜 주소서.
엄청난 바르도의 어둠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시고, 엄청난 업의 폭풍이 그를 비켜 가게 하소서. 엄청난 죽음의 왕의 공포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시고, 바르도의 길고 위험한 좁은 길에서 그를 이끌어 주소서.
오 자비로운 분이시여, 당신의 자비를 아끼지 마시고 그를 구원하소서. 그를 삼악도에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옵소서. 이전에 맹세했던 당신의 서원을 잊지 마시고 신속하게 자비의 힘을 보내 주소서.
오 부처님들과 보살님들이시여, 그(이름)를 위하여 당신의 자비와 숙련된 수단을 아끼지 마시고 그를 자비로 잡아 주소서.
중생들이 악업의 힘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내버려두지 마옵소서. 삼보님들이시여, 바르도 상태에서 고통받을 때 피난처가 되어 주소서.”
이 기원문을 스스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깊은 헌신의 마음으로 세 번 읽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들음을 통한 대 해탈》과〈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로부터 구원을 청하는 기원문〉, 그리고 〈두려움을 막아 주는 바르도 기원문〉을 읽어야 한다.
(2) 여섯 바르도의 중요한 싯구
지금은 탄생의 바르도가
나에게 밝아오는 때
인생에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나는 게으름을 버리고 공부와 반성과 명상의,
정신을 흩뜨리지 않는 길로 들어가
투영들을 만들고 그 길에 주의를 기울여
삼신(三身)을 깨달으리라.
지금 내가 인간의 몸을 한 번 받았으니
마음이 방황할 시간이 없도다.
지금은 꿈의 바르도가
나에게 밝아 오는 때
부주의한 무지의 시체 같은 잠을 버리고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내 생각들을
그 본연의 상태로 들어가게 하리라.
광휘 안에서 꿈을 제어하고 변형시켜
짐승처럼 잠자지 않고
잠과 수행을 완벽하게 하나로 통일시키리라97).
지금은 깊은 명상의 바르도가
나에게 밝아오는 때
모든 산만함과 혼란스러움을 버리고
집착과 동요가 없는 무한한 상태에서 머물며
영상화 수행과 완성 수행98), 이 두 수행을 굳게 하고
이 명상의 시간, 행위에서 벗어나 일념으로
혼란스런 감정의 힘에 빠지지 않으리라.
지금은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가
나에게 밝아오는 때
모든 집착과 갈망을 버리고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가르침의
분명한 자각 안으로 들어가
의식을 태어나지 않은 마음의
공간 속으로 방출하리라.
이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을 떠날 때
나는 그것이 덧없는 환상임을 알리라.
지금은 다르마타의 바르도가
나에게 밝아오는 때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버리고
무엇이 나타나든 그것은
나의 투영임을 알아차리며
그것이 바르도의 환영임을 알리라.
이제 이 중대한 시점에 이르렀으니
나는 내 자신의 투영들인
평화와 분노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지금은 생성의 바르도가
나에게 밝아오는 때
마음을 일념으로 집중하고
선업의 결과들을 오래 유지하도록 노력하며
자궁 입구를 닫고 그 반대의 것을 생각하리라.
지금은 인내와 순수한 생각이 필요한 때
질투심을 버리고 신들과
그 배우자들을 명상하리라.
멀리 벗어난 마음으로
죽음이 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의미 없는 행위들을 실행하여
빈손으로 돌아가 이제 완벽한
혼란의 상태가 되었구나.
필요한 것은 성스러운 진리를 알아차리는 것
그런데도 바로 이 순간 어째서
진리를 수행하지 않는가?
거룩한 성취자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일 네가 마음속에 스승의
가르침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너는 너 자신을 기만하는 것 아닌가?’ 라고.
(3)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로부터 구원을 청하는 기원문
스승님들, 원불님들, 다키니님들께
존경의 예를 올립니다.
큰 사랑으로 우리들을
좁은 길에서 인도해 주소서.
혼란으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숙고와 명상공부의,
정신을 흩뜨리지 않는 빛의 길을 따라
신성한 계보의 스승님들 제 앞에 나투시고
그의 배우자 다키니님들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가소서.
강한 무지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다르마다투 지혜의 밝은 빛의 길을 따라
신성한 비로자나 부처님 제 앞에 나투시고
그의 배우자 우주 공간의 여왕님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 가소서.”
강한 적대감으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거울 같은 지혜의 밝은 빛의 길을 따라
신성한 금강살타님 제 앞에 나투시고
그의 배우자 붓다로차나님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가소서.
강한 자만심으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평등한 지혜의 밝은 빛의 길을 따라
신성한 보생 부처님 제 앞에 나투시고
그의 배우자 마마키님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가소서.
강한 욕망으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분별하는 지혜의 밝은 빛의 길을 따라
아미타 부처님 제 앞에 나투시고
그의 배우자 판다라바시니님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가소서.
강한 질투심으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모든 행위를 성취하는 지혜의 밝은 빛의 길을 따라
신성한 불공성취 부처님 제 앞에 나투시고
그의 배우자 삼마야타라님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가소서.
강한 무의식의 성향들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내부로 향한 지혜의 밝은 빛의 길을 따라
비드야다라 전사님들 제 앞에 나투시고
그의 배우자 다키니님들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가소서.
사납고 혼란스런 투영들로 인하여
제가 윤회계를 방황할 때
모든 두려움을 버리는 빛의 길을 따라
신성한 평화와 분노의 신들 제 앞에 나투시고
그들의 배우자 다키니님들과 공간의 여왕님들
제 뒤에 나투소서.
바르도의 위험한 좁은 길을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완전한 부처님의 나라로 저를 데려가소서.
공간의 원소가 적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시고
푸른색 부처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소서.
물의 원소가 적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시고
하얀색 부처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소서.
흙의 원소가 적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시고
노란색 부처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소서.
불의 원소가 적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시고
붉은색 부처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소서.
공기의 원소가 적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시고
초록색 부처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소서.
원소들의 무지개가
적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시고
모든 부처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소서.
빛과 소리와 광선들이
적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시고
무한한 평화와 분노의 신들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소서.
모든 소리들이 제 자신의
소리임을 알게 하시고
모든 빛들이 제 자신의 빛임을 알게 하시고
모든 광선들이 제 자신의
광선임을 알게 하시고
바르도가 제 자신임을 자발적으로 알게 하시고
제가 삼신(三身)의 세계에 이르게 하소서.
(4) 두려움을 막아 주는 바르도 기원문
제가 인생의 여행에서 그 끝에 도달하여
이 세상의 친지들은 아무도 나와 함께 하지 않고
홀로 바르도 상태에서 방황할 때
평화와 분노의 부처님들이시여,
자비의 힘을 보내주시어
빽빽한 무지의 어둠을 걷어 주소서.
사랑하는 친구들을 떠나 홀로 방황할 때
제 자신의 투영들의 텅 빈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부처님들이시여, 자비의 힘을 보내주시어
바르도의 공포가 나타나지 않게 하소서.
다섯 가지 지혜의 밝은 빛이 비칠 때
두려워하지 않고 제 자신을 알아차리게 하소서.
평화와 분노의 신들이 모습을 나타낼 때
두려움 없이 확신하며 바르도를
알아차리게 하소서.
제가 나쁜 업의 힘으로 인하여 고통받을 때
평화와 분노의 부처님들이시여,
고통을 걷어 주소서.
다르마타의 소리가 천 개의 천둥소리처럼 울릴 때
그 소리가 대승의 가르침 소리로 변하게 하소서.
제가 피난처 없이 저의 업에 따를 때
평화와 분노의 부처님들이시여,
저의 피난처가 되어 주소서.
제가 무의식적 성향들의 업으로 고통받을 때
희열의 삼매와 광휘가 일어나게 하소서.
생성 바르도에서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순간
유혹자의 거짓 가르침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원하는 곳에 도착했을 때
악업으로 인한 환영의 공포가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야생의 육식동물이 으르렁거릴 때
그 소리가 진리의 소리 여섯 음절이 되게 하소서.
제가 눈과 비와 바람과 어둠에 쫓길 때
분명하고 신성한 지혜의 눈을 받게 하소서.
바르도에서 같은 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질투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의 세계에
태어나게 하소서.
심한 갈증과 허기가 열망에 의해 일어날 때
갈증과 허기, 더위와 추위의 고통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결합해있는 미래의 부모님을 볼 때
평화와 분노의 부처님들과
그들의 배우자들을 보게 하소서.
다른 이들을 위하여 제가 태어날 곳을
선택할 능력을 가지고
좋은 징조와 함께 완벽한 몸을 받게 하소서.
스스로 완벽한 인간의 몸을 얻어
저를 보거나 듣는 사람은 모두
즉시 해탈되게 하소서.
제가 저의 악업을 따르지 않게 하시고
제가 지닌 공덕만 따르게 하소서.
제가 어느 곳에서 태어나든지 바로 그곳에서
금생의 원불을 정면에서 만나게 하소서.
제가 태어나는 순간 걷고 말하는 법을 알아
과거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능력을 얻게 하소서.
상중하의 세 배움의 단계에서
제가 단지 듣고 생각하고 봄으로써
이해하게 하소서.
어느 곳이든 제가 태어나는 땅이
축복 받게 하소서.
그래서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게 하소서.
오 평화와 분노의 부처님들이시여,
저와 다른 이들이 바로 당신 그대로,
당신 자신처럼 되게 하소서.
당신의 모습과 당신의 상(祥)스러운
표시를 지니고
당신의 수행원들과 당신의 긴 수명과
당신의 세계를 허락하소서.
사만타바드라, 평화와 분노의 신들,
무한한 자비, 순수한 다르마타의 진리의 힘,
그리고 일념으로 명상 수행하는 탄트라의 제자들,
그들의 축복으로 이 기원문이 이행되게 하소서.
8) 역자(譯者) 후기(後記)
1927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종교학 교수인 에반스 웬츠 박사가 편집한《바르도 퇴돌》이《티벳 사자의 서》라는 제목으로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서구세계에 일으킨 반응은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서양 심리학계의 거장 칼 융은 1938년에 출판된 스위스 초판본의 해설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티벳 사자의 서》의 초판이 나온 이래 나는 지금까지 수년 동안 언제나 내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 책에서 새로운 생각과 발견을 위한 영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근본적인 통찰력을 얻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너무 많이 말하게 하거나 말이 별로 없게 만드는《이집트 사자의 서》와는 달리《티벳 사자의 서》는 원시적인 야만인이나 신들의 세계가 아닌 인간 존재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지성적인 철학이다.
그 철학에는 불교 심리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책이다.”
웬츠 박사는《바르도 퇴돌》의 필사본을 인도 다르질링의 한 사원에서 구한 후 시킴으로 건너가 티벳 승려인 라마 카지 다와삼둡의 정식 제자로 입문하여 5년 간 가르침을 받았다.
그 이전까지 그는 신비한 동양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5년 이상의 시간을 야자나무가 늘어 선 스리랑카의 해변으로부터 인도 대륙을 거쳐 빙하로 뒤덮인 히말라야의 고지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동양의 현자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때로는 도시 속에서 살았고 때로는 밀림 속에서도 살았으며, 요가 수행자들과 함께 산 속의 토굴에서 살았다. 때로는 승려들과 함께 사원에서 살았고, 때로는 구원을 찾는 군중들 틈에 섞인 먼 순례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919년 시킴의 강톡에서 그들은《바르도 퇴돌》의 번역을 마쳤다. 번역은 라마 카지 다와삼둡이 했고, 에반스 웬츠는 그가 구술하는 주석과 해설을 받아 적고 책의 편집을 맡았다.
《티벳 사자의 서》는 웬츠 박사의 초판(이하 웬츠본)이래 지금까지 두 번 더 영역되었다. 두 번째 영역은 1975년 프란시스 프리맨틀과 촉얌 트룽파 린포체가 번역했고(이하 트룽파본), 세 번째 영역은 1994년 달라이 라마의 서양인 정식 제자이며 현재 콜롬비아 대학의 종교학과장인 로버트 서먼 스님이 번역했다(이하 서먼본). 한글 번역은 웬츠본은 류시화 선생이 했고, 서먼본은 정창영 선생이 했다. 필자가 번역한 이 책은 트룽파본이다.
몇 해 전 류시화 선생의 번역을 구입하여 읽었을 때 사람이 죽은 뒤의 의식 상태를 비로소 알게되어 기뻤다.
사후에 어떤 과정을 거쳐 다음 생을 받는지에 대해 티벳 스승들은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다음 명료한 의식을 가진 채 다시금 인간의 육체 속으로 환생한 후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티벳 사자의 서》는 원래 죽은 자를 위해 읽어주는 경전인데, 웬츠본은 해설과 주석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지만 막상 독송을 하려고 하면 지나치게 꼼꼼한 주석과 소제목의 분류 때문에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던 중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amazon.com)을 통해 웬츠본 외에 다른 번역이 있음을 알았다. 첫 눈에 들어 온 것이 트룽파본이었다.
미국의 영화배우 리차드 기어가 170분 동안 그 책을 녹음한 테이프도 있었다. 책과 테이프를 구입한 후 틈 나는 대로 테이프를 들었다.
그런데 (당연한 일이지만) 리차드 기어의 담담하고 명료한 리딩을 원서와 대조하며 듣다가 뜻이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영어사전을 펼쳐들고 단어를 찾아보기 시작하다가 아예 한글 독송용으로 만들어 보자고 한 것이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이다.
웬츠본은 250페이지에 깨알같은 각주가 150여 개 달려 있다. 그러나 트룽파본은 120페이지의 얇은 책이다. 본문의 주석도 20여 개에 불과하다.
군더더기(?)를 모두 뺀 담백한 내용이어서 독송용으로는 그만이다. 서문에서 프리맨틀이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은 웬츠본의 몇 가지 오류를 바로 잡고 있다.
그리고 웬츠본은 1927년대 영국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현대인을 위한 표현이 필요하게 되었다. 두 책을 대조해본 결과 본질적인 내용에서는 일치하고 있지만 표현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나중에 번역된 모든 번역본은 웬츠본의 바탕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만큼 웬츠본의 선구적인 역할은 위대한 것이다.
역자는 죽음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해주는 일이라고는 이미 죽은 뒤에 통보를 받고 영혼을 위로하는 시달림을 해 주거나 사찰에서 재를 모시는 정도였다.
특별히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형식적일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마음이 허전했다. 한 사람의 존재가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들이 하는 일이란 서둘러 묻어버리거나 화장하여 재를 흩어버리는 정도다.
그나마 종교의식을 통해서 장례를 치를 때는 조금 나은 편이다. 집에서 치르는 장례는 망자를 위한 축원 하나 없이 죽은 지 삼일이 되면 허겁지겁 관을 장의차에 실어 나르는 것이 고작이다.
경비를 문제삼아 아예 49재를 무시하거나 지낸다 하더라도 아주 간략하게 형식에 치우친 경우가 부지기수다. 정말로 어려운 형편이어서 절에서 재를 다 못 지낸다 하더라도 자손들이 오롯한 마음으로 집에서 망자를 위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남은 자들이 망자를 생각하는 정성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가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경전에는 사자에 대한 안내뿐만 아니라 남은 자들이 해야할 일까지도 자세하게 안내하고 있다.
죽은 사람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안다면 마음이 더욱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독송용이 필요한 것이다.
트룽파본이 독송용으로 좋기는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도 있다. 먼저 이 책은 서먼 스님의 지적처럼 웬츠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번역이기는 하나 해설에서 심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어서 현대 심리학에 밝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실제로 번역에 가장 힘이 들었던 부분이 이 해설 부분이었고, 따라서 이 부분만큼은 번역이 잘 되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또 경전 본문에 대한 주석도 거의 없기 때문에 티벳불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막연하고 환상적인 장면의 나열로 보일 수 있다.
이 책은 강의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 같다. 즉 이 책은 스승으로부터 한 대목 한 문장마다 설명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원전 같은 번역본’이다.
웬츠본의 해설에서 웬츠 박사가 말한 다음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라마 카지 다와 삼둡은《티벳 사자의 서》에는 반드시 이 해설문과 같은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이유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이나 북방불교의 특정 종파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자들이 이 번역본을 잘못 해석하고 나쁘게 이용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 해설문이 자칫하면 철학적 절충주의의 산물로 여겨져 비판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초판 서문에서 고백한 대로, 이 긴 해설문을 쓴 것이나 경전에 수많은 주석을 붙인 의도는 어디까지나 순수하게《티벳 사자의 서》가 가진 독특한 철학과 가르침을 분명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것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경전의 내용에 정통한 자격 있는 입문자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신비 세계에 입문한 스승들만이 이 경전을 해설할 자격을 갖추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27년대의 시대에 비해 2000년대인 현재의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티벳불교(밀교)에 대한 어설픈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역자는 처음에는 트룽파본 그대로 옮기려고만 했다. 독송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조금씩 번역을 하다 보니 티벳 불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자 역시 쉽게 들어오지 않는 대목이 많이 있음을 알았다.
아무리 독송용이라고는 하나 읽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가치는 반감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경전 원문의 경우 웬츠본의 주석을 찾아 많은 부분의 주석을 옮겨 달았다.
원래 웬츠본의 주석은 산스크리트어와 티벳어까지 표기하는 등 아주 세밀하여, 주석을 따라 다니다 보면 전문 학술 서적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다.
사실 그 점이 웬츠본의 뛰어난 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현재 학문적 엄밀성보다는 실천 수행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웬츠본의 주석을 옮기면서 독송시 꼭 알아야 할 부분만 간추려 실었다.
또 티벳 불교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는 이《티벳 사자의 서》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부록으로〈티벳 불교〉를 실었다.
이 글은 티벳 스승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8년간 티벳 불교를 공부한 후 80년대 초 송광사에서 5년간 선수행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가 선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스티븐 배춸러의《연꽃 속의 보석이여》(심재룡 역, 불일출판사, 1989)에서 뽑은 글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티벳 불교 전반에 대한 스티븐의 명쾌하고 탁월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부분부터 잘 숙독하여 티벳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고 난 후 경전의 해설과 주석을 꼼꼼히 챙겨 보아야 한다.
자격 있는 스승의 가르침을 직접 듣는다는 기분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여 정독할 것을 권한다.
실제로 이《티벳트 사자의 서》를 독송할 때 경전의 원문에 나오는 주석을 보지 않아도 다 이해가 될 때 비로소 독송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해설〉부분은 원래 앞에 나와 있는 것인데 뒤로 순서를 바꾸었다. 처음부터 난해한 심리학적인 해설을 읽다보면 본문에 대한 흥미가 반감될 것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부록과 본문을 먼저 보고 난 후, 좀 더 깊이 들어가기를 바랄 때 해설을 보기 바란다. 처음에는 해설을 무시하는 것이 좋다.
본문 번역은 직역을 원칙으로 했지만 영어와 한국어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특히 한글에는 없는 수동태의 빈번한 사용 때문에) 웬츠본과 서먼본을 참고하여 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몇 몇 부분은 의역을 했다. 후일 더 나은 번역이 나와 이번의 미흡한 번역을 대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죽음은 삶과 따로 분리되어 있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회피하여 동전을 던져 버린다면 삶까지 던져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삶에서도 자유롭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죽음을 잊기 위해 눈앞의 현상에 온 정신을 쏟고 있다.
탐진치 삼독의 마약으로 자신을 잊고자 한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쓴 맛 뿐이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 왔지만 언제나 같은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다.
티벳의 스승은 말한다. 우리는 이 지구별이라는 학교에 공부하러 온 학생이어서, 열심히 공부할 때만 다음 생에서 영적인 진화가 한 단계 오른 탄생을 갖게 된다고.
모든 것을 6근(根)을 통해 밖에서 찾는다면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마음 공부만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이 경전을 하루에 세 번 독송할 것을 권하고 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독송해야 한다. 그것이 이 경전의 근본 뜻이다.
하지만 출가 수행자가 아닌 일반 사람이 현대 생활에서 하루에 세 번 독송은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경전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조용히 정좌하고 크고 또렷한 소리로 독송하기를 권한다.
그런 실천수행이 따르지 않고 단지 지적 호기심으로만 대하는 사람이라면, 삶과 죽음의 친절한 안내서인《티벳 사자의 서》라 하더라도 결코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불기 2544년 4월, 옹강산 와송굴에서 역자 합장
3. 해설(解說)
이 책이 전하는 말
우리가《티벳 사자의 서》의 제목을 언급할 때 한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티벳 사자의 서》와《이집트 사자의 서》를 죽은 사람에 대한 신화나 전승의 경지에서 비교 접근하는 것은 요점을 놓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요점이란 탄생과 죽음의 근본적인 원리는 현생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탄생의 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죽음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으며 완전히 다른 죽음의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우주의 서》이다. 우주는 탄생과 죽음을 담고 있다. 우주는 숨을 쉬고 행위를 하고 행동하는 환경을 창조한다. 그것은 이 책에 영감을 제공하는 근본적인 환경이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 티벳의 뵌 문화에서는 죽은 사람 뒤에 남은 영혼의 힘을 다루는 방법 즉 죽은 사람, 발자국, 체온 등 그가 죽은 뒤에 남겨진 것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매우 정밀한 지시들이 있다.
뵌 전통과 이집트 전통 둘 다 죽은 사람의 의식을 다루기보다는 발자국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 같은 특별한 유형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이해시키고자 하는 기본 원리는 온전한 정신과 미친 정신 또는 혼란과 깨달음의 불확실성이며, 온전한 정신 또는 미친 정신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나는 온갖 환영의 전개에 대한 가능성이다.
바르도(bardo)는 틈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죽은 후에 아직 결정되기 전까지의 간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삶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간격도 의미한다.
죽음은 삶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바르도 체험은 우리의 근본적인 정신적 구성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항상 온갖 종류의 바르도를 체험한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과대망상증과 불확실성의 체험을 한다. 우리의 근거는 확실하지 않은 것 같고, 우리가 추구해 온 것이나 우리가 되어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은 죽어 가는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한 책일 뿐만 아니라 이미 태어난 사람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탄생과 죽음은 바로 이 순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바르도 체험은 우리가 경험하는 우리 정신 상태의 여섯 세계처럼, 존재의 여섯 세계로 보여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에 기술된 것과 같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서로 다른 신들로 보여질 수 있다. 처음 7일 동안에는 평화의 신들이 나타나고 다음 7일 동안에는 분노의 신들이 나타난다.
그곳에는 다섯 여래와 온갖 종류의 공포와 혐오스러운 양식으로 나타나는 다섯 여래의 사자(使者)인 헤루카(heruka)들과 가우리(gauri)들이 있다.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세부적인 묘사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상황에서 아주 많이 일어나는 것들이며 단지 죽음 뒤에 나타나는 황홀한 체험이나 환상이 아니다. 이들 체험은 순수하게 삶의 상황에서 보여질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의 명상적인 상태에서 볼 때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심리적인 영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 줄 수 없으며 모든 것은 순전히 우리들 개개인에게 위임되어 있다. 스승들이나 영적인 친구들이 그러한 가능성을 부추길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죽어 가는 사람에게서 실제로 일어나는지 알 수 있을까? 무덤에서 돌아와 그들이 겪은 경험을 우리에게 얘기한 사람이 있는가?
그러한 인상은 아주 강해서 방금 태어난 몇몇 사람은 죽음과 탄생 사이의 기간에 대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하면서 부모와 사회에 의해 고정된 관념을 주입 받는다. 그 결과 원래의 깊은 인상들은 우연히 생기는 갑작스런 일별(一瞥)을 제외하고는 점점 희미해진다.
그러한 경우조차 우리는 그런 체험을 의심쩍어 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명백한 바탕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어떠한 종류의 불확실한 체험이라도 가볍게 취급되거나 전부 무시된다.
우리가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관점에서 이 과정을 바라보는 것은 신화에 대한 공부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바르도의 연속적인 과정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이 조금 필요하다.
몸과 의식 사이에는 갈등이 있다 그리고 그 곳에는 탄생과 죽음의 끊임없는 체험이 있다. 그곳에는 또 광휘인 다르마타 바르도의 체험이 있고, 생성 바르도의 체험이 있으며, 가능성 있는 미래의 부모 또는 태어날 환경에 대한 체험이 있다.
우리는 또한 지금 이 순간에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는 분노와 평화의 신들의 환영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그것을 바라본다면, 죽음의 실제 경험과 바르도 상태는 순수한 신화도 아닐 것이며 특별한 충격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것과 함께 움직여 왔고 그 모든 일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
첫 번째 기본적인 바르도 체험은, 견고한 세상과의 접촉에 대한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자신이 정말로 죽어 가고 있는지 또는 계속 살 수 있을 지에 대한 불확실성의 체험이다.
이러한 불확실은 육체를 떠난다는 입장이 아니라 순전히 근거를 잃는다는 입장에서 겪게 된다. 그것은 실재의 세계에서 나와 비실재의 세계로 들어갈 가능성이다.
우리는 실재의 세계란 즐거움과 고통, 선과 악을 우리가 체험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는 어떤 지적인 행위가 있다.
그것은 완전한 이원적(二元的)인 관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들 이원적인 느낌과 완벽하게 접촉한다면, 그 완전한 이원성의 체험은 비이원성(non-duality)의 체험 그 자체이다.
그러면 전혀 아무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아무런 갈등이 없는, 완벽하게 열려 있고 분명한 관점으로 이원성을 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굉장하게 에워싸고 있는 단일성의 통찰력이 있다. 갈등은 이원성이 전혀 그 본래 모습대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것은 매우 서투른 방법인 편견을 가진 방법 안에서만 보인다. 사실 우리는 어느 것도 적절하게 지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내 자신과 나의 투영들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원적인 세계를 혼란이라고 말할 때 그 혼란은 완벽한 이원 세계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엄청난 불만족과 불확실의 원인이 된다. 그것은 점점 어리석게 되는 공포의 장소를 만든다.
그 장소는 이원성의 세계를 떠나 일종의 선명하지 않고 희미한 비어있음(空)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그곳은 안개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묘지인, 죽음의 세계이다.
이 책은 몸의 여러 원소들의 입장에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죽음의 체험을 기술한다. 육체적으로 당신은 흙의 원소가 물의 원소 속으로 분해될 때 무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물의 원소가 불의 원소 속으로 분해될 때 당신은 순환의 기능이 멈추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한다. 불의 원소가 공기의 원소 속으로 분해 될 때 따뜻함이나 성장함에 대한 모든 느낌이 분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공기의 원소가 공간 속으로 분해 될 때 당신은 물질 세계와 접촉하는 마지막 느낌을 잃는다.
마지막으로 공간 또는 의식이 몸의 중앙통로인 나디(nadi)로 분해될 때 그곳에는 내부의 광휘에 대한 감각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내부로 향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내면의 빛이다.
이러한 체험들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실체(實體)적이고 논리적인 상태는 분해된다. 그리고 당신이 깨달음에 이르고 있는지 아니면 제정신을 잃고 있는지는 완전히 확실하지 않다.
그러한 체험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넷 또는 다섯 가지 서로 다른 단계 안에서 보여질 수 있다.
먼저 실체적인 육체의 속성, 활기 있는 논리는 희미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육체적 접촉을 잃는다.
그러면 당신은 자동적으로 더 기능을 잘 하는 상황인 물의 원소 속으로 피난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마음이 여전히 작동을 잘하고 있다고 인식시킨다.
다음 단계에서 마음은 적절하게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는지에 대해 완전히 확신을 하지 못하며, 어떤 것이 그것의 순환 속에서 작동하기를 멈추기 시작한다.
연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감정을 통하는 방법이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사람, 또는 어떤 것을 생생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순환하는 물의 속성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미움의 격렬한 온도가 더욱 중요하게 된다. 그것도 점차 공기 속으로 분해된다,
그리고 그곳에는 개방 상태의 희미한 체험만 있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집중이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려는 노력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것은 속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체험은 광휘이다. 당신은 더 이상 버둥거릴 수 없기 때문에 기꺼이 항복한다. 그 순간 어떤 태평스러움 같은 것이 일어난다.
그것은 마치 고통과 즐거움이 동시에 생기는 것과 같다. 혹은 얼음같이 차갑고 강력한 소나기와 끓는 뜨거운 물이 당신의 몸에 동시에 부어지는 것과 같다.
그것은 격렬하고 강력하고 충분한 체험이며, 고통과 즐거움이 같아지는 통일성의 체험이다. 어떤 것이 ‘되고자’ 하는 이원적인 버둥거림은 두개의 극단적인 힘에 의해 완전히 혼란 상태가 된다.
그것은 깨달음에 대한 희망의 힘과 미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힘이다. 두 극단적인 힘들은 너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약간의 이완을 허락한다.
그리고 당신이 더 이상 버둥거리지 않을 때 광휘는 스스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다음 단계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광휘의 체험이다. 광휘는 중립적인 바탕이나 배경이며 격렬함이 느슨해 질 때 나타나는 틈이다.
그때 어떤 지성이 깨어난 마음의 상태와 연결하기 시작하고, 명상적인 체험이나 불성의 순간적인 일별로 이끈다.
그 명상적인 체험이나 불성을 또한 다르마카야(法身)라고 부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기본적인 지성과 연결시킬 아무런 방법이 없고 혼란된 에너지가 여전히 우리의 마음과정을 지배한다면, 그 에너지는 맹목적이 되고 마침내 다른 약화된 에너지 수준으로 떨어진다.
말하자면 광휘의 순수한 에너지로부터 떨어지는 것이다. 기본적인 어떤 움켜쥐는 성향은 광휘의 상태에서 발달하기 시작하며, 그로부터 세계의 여섯 영역에 대한 체험이 그것의 격렬함에 따라서 발전한다.
그러나 긴장은 에너지의 활성자(activator)없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는 움켜쥐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본능의 서로 다른 형태의 관점에서 세계의 여섯 영역을 바라 볼 수 있다.
지옥 세계
우리는 가장 격렬한 세계인 지옥 세계와 함께 시작할 수 있다. 먼저 그곳에는 점점 세게 형성되는 에너지들과 감정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단계에서는 그 에너지들이 우리를 통제하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 에너지들을 통제하는지 아주 혼동이 된다.
그때 갑자기 우리는 이 모든 행로의 궤도를 잃는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광휘인 텅 빈 상태로 들어간다. 그 텅 빈 상태에서 싸움을 하려는 강렬한 유혹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편집병은 또 공포를 가져온다. 원래 편집병과 공포는 어떤 것에 대항하여 싸우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싸우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발달되었을 때 공포는 그 자신에게 반대하기 시작한다.
그가 닥치는 대로 휘둘러 치려고 할 때, 투영과 싸우는 대신 그는 내부를 향하여 공격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앞에 있는 양의 다리를 보고는 그것을 붙잡아 요리하기를 원했던 어떤 수행자의 이야기와 같다.
그의 스승은 그에게 그 양의 다리에 열 십자 표시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그는 그 십자 표시가 자신의 가슴에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런 종류의 개념이다. 당신은 공격하거나 싸우거나 또는 이겨야 할 어떤 것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증오는 그와 같다.
당신은 어떤 것에 화가 나면 그것을 파괴하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정은 스스로를 파괴하게 되며, 그것은 내부를 향하여 돌아선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한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당신은 분노 그 자체이기 때문에 도망칠 곳은 아무 데도 없다.
당신은 항상 당신 자신에게 붙어 다니고 있다. 그것이 지옥의 전개이다.
지옥에 관한 아주 생생한 묘사는 감뽀빠의《해탈의 보석 장식》에 기술되어 있다.99) 상징적으로 각각의 격렬한 고통은 그 자신의 정신적인 모습이다.
지옥 세계에서 당신은 바로 벌을 받지 않지만 무서운 분위기에 의해 압도된다. 그것은 시뻘겋게 달아 있는 쇠로 된 벌판과 산, 그리고 불꽃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설사 당신이 도망가기로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불에 달구어진 쇠의 벌판을 건너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도망가지 않기로 했다면 숯으로 변한다.
그곳에는 심한 폐소공포증이 있고 모든 방향에서 들이닥치는 열기가 있다. 온 땅은 뜨거운 쇳덩어리로 변하고 모든 강은 쇳물로 변하며 하늘 전체에 불길이 퍼져 있다.
지옥의 다른 양상은 모든 것이 완전히 얼어붙은, 추위와 눈과 얼음의 세계에 대한 체험이다. 이것은 의사 소통을 완전히 거부하는 적대감의 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분노의 일종으로 강한 자만심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 자만심은 자기만족으로 강화된 냉랭한 환경으로 변하여 그 시스템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춤을 추거나 미소를 짓거나 음악을 듣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귀 세계
그 다음 우리는 아귀(餓鬼) 또는 굶주린 유령이라는 또 하나의 마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이번에 우리는 적대감에 의해 작동하는 광휘가 아니라 강렬한 탐욕에 의해 작동하는 광휘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곳에는 결핍의 감각이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풍족함의 감각도 있어 서로 모순되지만 동시에 함께 작동하고 있다.
아귀 세계에는 많은 재산을 모은 것 같은 굉장히 부유한 느낌이 있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지 당신은 찾을 필요가 없다.
당신은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우리를 더욱 굶주리게 하고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만족을 소유하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 어떤 것을 찾고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그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며 근본적으로 물릴 줄 모르는 배고픔이다.
그것은 배가 꽉 차서 더 이상 먹을 수 없지만, 먹는 것을 사랑하여 음식의 냄새와 그것을 먹고 맛보고 씹고 삼키고 소화시키는 즐거움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 모든 과정은 호화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당신은 정말로 배가 고파 먹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시기심을 느낀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배와 아주 가는 목과 조그만 입을 가진 사람을 상징한 것이다. 이 체험은 여러 다른 단계에 있으며 그것은 배고픔에 대한 격렬함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집어 들 수는 있지만, 그러면 그 음식은 녹아 버리거나 혹은 그것을 먹을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집어들어 입 속으로 넣을 수 있지만 그것을 삼킬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삼킬 수 있지만 일단 그것이 위장으로 들어가면 불붙기 시작한다. 그곳에는 모든 종류의 배고픔이 있으며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소유의 기쁨은 일단 우리가 어떤 것을 소유하게 되면 더 이상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더 많은 소유물을 찾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완전히 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그래서 그곳에는 끊임없는 강렬한 배고픔이 있다.
그것은 결핍감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으며, 이미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곳에 있는 것은 교환행위의 에너지이다. 그것은 더욱 자극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모으고, 집어들고, 놓고, 먹는다.
그러한 종류의 에너지는 자극제이지만 움켜쥐려는 속성은 그것을 아주 어색하게 만든다. 일단 당신이 갖기를 원하는 어떤 것을 잡으면 당신은 더 이상 그것을 잡는 기쁨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내려놓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그것은 투영들에 대한 일종의 애증관계(love-hate relationship)이다.
그것은 이웃집의 정원이 더 푸르게 보이는 것과 유사하다. 일단 그것이 우리 소유가 되면 우리는 그것을 처음에 보았을 때와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기쁨이나 즐거움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연애 사건(love affair)의 낭만적인 속성은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축생 세계
축생 세계는 유머 감각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는 우리가 광휘 속에서 중립으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능적으로 무지한 역할인 귀머거리와 벙어리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당신이 유머감각의 영역을 완벽하게 숨기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웃거나 미소짓지 못하는 동물로 상징된다. 동물도 기쁨과 고통을 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유머감각이나 풍자는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이론적 또는 철학적 결론을 내리는 어떤 종교적인 틀을 믿음으로서 발달시킬 수 있었다.
그러한 사람은 일을 할 때 일관성이 있고 매우 훌륭하며 아주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만족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의 농장을 끊임없는 주의와 개방과 능률로 질서 정연하게 정성을 들이는 농부와 같고 사업을 하는 사업가와 같으며, 혹은 그의 삶에 애매한 영역이 전혀 없는, 예측할 수 있고 안전하여 매우 행복한 가정을 가진 남자와 같다.
만일 그가 기계장치를 사면 거기에는 항상 사용설명서가 들어 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는 변호사나 목사 또는 경찰 등 모든 종류의 전문가에게 갈 수 있다.
그 전문가를 또한 그들의 직업 안에서 안전하고 안락하다. 그것은 완전히 분별 있고 예측 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대단히 기계적이다.
부족한 것은, 만일 알려져 있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위협 당하고 있다는 과대망상의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다르게 보이고 그들의 모든 생활 방식이 불규칙해 보인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의 존재조차 위협이 된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근본적으로 기본 양식을 위협한다. 그래서 표면상으로는 건전하고 견실하지만 유머 감각이 없는 상황은 동물 세계이다.
인간 세계
인간 세계는 생존하고 존속하는 삶인 축생세계와 꼭 같지 않은 다른 종류의 상황을 나타낸다. 인간 세계는 열망과 모험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성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풍부하게 하려는 탐구와 발전의 영역이다. 인간 세계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아귀 세계와 정신적으로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또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한 행동으로 집어넣는 축생 세계의 요소를 다소 가지고 있다.
그리고 특별한 어떤 것이 인간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열망과 함께 나타나는 아주 이상한 종류의 의심으로 인간들을 더욱 교활하고 부정직하고 믿을 수 없게 만든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도구를 발명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붙잡기 위해 모든 정교한 수단을 동원하여 그 도구들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리고 그 다른 믿을 수 없는 사람은 그 자신의 반대 도구들의 장비를 발달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계를 엄청난 성공과 업적으로 조성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구와 반대도구의 점진적인 확대는 끊임없이 발달하여 더 많은 열망과 음모의 원천을 이끌어 들인다. 결국 우리는 그러한 큰 과업을 성취할 수 없다.
우리는 탄생과 죽음의 지배를 받는다. 그 체험은 태어날 수 있지만 또한 죽을 수도 있다. 우리의 발견들은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인 것이 된다.
아수라 세계
아수라 또는 질투하는 신들의 세계는 의사 전달이 되는 가장 높은 세계이다. 그것은 매우 지성을 갖춘 환경이다.
당신이 갑자기 광휘로부터 분리될 때 거기에는 마치 누군가 당신을 황야 한 가운데 떨어뜨린 것과 같은 당혹감이 있다.
거기에는 뒤를 돌아보고 자신의 그림자가 진짜인지 아니면 어느 누구의 책략인지 의심하는 성향이 있다.
과대망상은 에고(ego)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유능한 레이더 시스템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희미하고 조그만 물체를 집어들고 하나 하나 의심을 한다.
그리고 삶의 모든 경험을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질투 또는 시기의 세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기나 질투가 아니라 생존과 승리에 바탕을 둔 극단적으로 근본적인 어떤 것이다.
인간 세계 또는 축생 세계와는 달리 아수라 세계의 목적은 순전히 음모의 세계 안에서 작동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이 그곳의 전부이며, 그것은 직업과 오락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외교관으로 태어나 외교관으로 자라고 외교관으로 죽는 것과 같다. 관계와 음모는 그의 생활방식이고 그의 모든 살림살이이다.
이 음모는 감정적 관계나 친구 사이의 관계, 또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 등 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천상 세계
마지막으로 무대는 신들의 세계인 천상 세계이다. 다시 그가 깨어나거나 광휘의 발을 내 디딜 때, 그곳에는 예상치 못했던 몇몇 종류의 기쁨이 있고 그는 그 즐거움을 유지하려고 한다.
중립 지역으로 완전히 녹아 들어가는 대신 그는 갑자기 자신의 개체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개체성은 자신의 책임감과 자신을 지속하려는 생각을 가져온다.
그 자신을 지속하는 것은 영원히 열중과 평화의 상태에서 사는 삼매100)의 상태이다. 그것은 자만심의 세계로 알려진 신들의 세계이다.
자만심은 자신의 집중된 몸을 조성하는 감각이며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감각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에고의 생활에 도취된 상태이다.
당신은 인간의 영토가 아닌 광휘 대신 당신이 그 무엇 ‘이다’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결국 고마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신은 그 무엇 ‘이기’ 때문에, 편안함과 즐거움을 가져오는 자기 자신을 유지해야 하고 자신과 병합(倂合)하기를 완성해야 한다.
세계의 이들 여섯 영역은 윤회계 안에서 모든 삶의 주제의 원천이며 또한 다르마카야의 세계로 나아가는 원천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 책에 기술된 생성 바르도 환영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세계이다.
자아의 관점으로부터 나오는 여섯 영역 체험의 세계와, 초월적 자아의 관점으로부터 나오는 여섯 영역 체험의 세계는 서로 대결한다.
이들 환영들은 당신을 윤회로부터 구원해 주는 신들 또는 당신을 해치는 악마라기보다는 중립적인 에너지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르마타 바르도
여섯 세계와 더불어 우리는 몇 가지 바르도(bardo)의 기본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바르’(bar)는 사이를 의미하고 ‘도’(do)는 섬 또는 두 물건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경계 표시를 의미한다.
그것은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섬과 같다. 바르도의 개념은 말짱한 정신과 미친 정신 사이의 기간, 혹은 혼란과 막 지혜로 전환되고 있는 혼란 사이의 기간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죽음과 탄생 사이의 체험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과거의 상황은 일어나 막 지나가 버렸고 미래의 상황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틈이 있다. 이것이 기본적인 바르도 체험이다.
다르마타 바르도는 광휘의 체험이다. 다르마타(dharmata)는 모든 것의 본질을 의미하며 그 속성은 ‘있음’(is-ness) 이다.
그러므로 다르마타 바르도는 기본적이고 개방적이며 중립적인 바탕이다. 그리고 그 바탕의 인식이 다르마카야(dharmakaya)이다. 그것은 진리의 몸 또는 법칙의 몸이다.
지각자(知覺者) 혹은 행위자가 근본 공간으로 분해되기 시작하면, 그 근본 공간은 다르마 즉 진리를 내포하지만 그 진리는 윤회의 입장에서 변형된 것이다.
그래서 다르마타가 나타나는 공간인 윤회계와 진리 사이의 공간은 다섯 여래와 평화와 분노의 환영(幻影)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의 기본 바탕을 제공한다.
이들 다르마타의 표현들은 물리적 또는 시각적인 용어에서가 아니라 에너지의 견지에서 표현된 것이다.
그 에너지는 흙, 물, 불, 공기 그리고 공간이라는 원소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보통의 물질이 지니고 있는 거친 수준의 원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묘한 수준의 원소를 말하고 있다. 지각자의 관점에서 볼 때 환영들 속에서 다섯 여래들을 지각하는 것은 환영도 아니고 인식도 아니고 확실한 체험도 아니다.
만일 당신이 바라보아야 할 환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환영이 아니다. 그리고 바라봄은 그 자체 속에 당신과 신을 환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외향적인 길이 있다.
당신은 지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단 당신이 지각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그 체험을 당신의 시스템 안으로 끼워 넣기 때문이다.
그 시스템은 또한 관계의 이원적인 스타일을 뜻한다. 당신은 그것을 알 수조차 없다. 이것은 당신의 체험이라고 당신에게 말해 주는 관찰자가 있는 한 당신은 여전히 당신으로부터 그러한 에너지를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정말로 탄트라 미술에서 모든 상징적인 도해를 여는 요점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설명은 이들 서로 다른 신들은 심리적인 초상화라는 것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이러한 것 보다 더 깊은 어떤 것이 있다.
가장 고도로 발전되었고 그리고 위험한 수련 형식 가운데 하나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7주간의 명상을 하는 바르도 은거수행이다.
거기에는 서로 다른 모양의 눈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다섯 여래의 원리에 대부분 바탕을 둔 아주 단순한 심상101)들이 있다.
평화로운 여래들의 중심 장소는 당신의 가슴에 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의 가슴에서 서로 다른 모양의 눈을 본다.
그리고 분노한 신들의 원리는 두뇌 속에 집중되어 있어서 당신은 당신의 두뇌 안에서 서로 응시하고 있는 어떤 눈들의 모양을 본다.
이들은 보통의 심상들이 아니며, 그들은 전부 정신이상과 바탕상실의 가능성에서 다르마타 원리를 향하여 나타난다.
그 다음 순수하고 뚜렷한 광휘의 체험이 전개된다. 그것은 번쩍 번쩍거린다. 어떤 때는 당신이 그것을 체험하지만 어떤 때는 당신이 단지 그 속에 있을 뿐 체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르마카야와 광휘 사이의 여행이 있다. 보통 제 5주쯤 되는 때에 다섯 여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생긴다.
그리고 이들 환영들은 실제로 일어나며 미술의 견지가 전혀 아니다. 당신은 그들의 존재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순수하게 에너지에 바탕을 둔 추상적인 속성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에너지가 독립하여 완전한 에너지가 되었을 때, 그것은 그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보통의 인식 관념을 초월하는 스스로를 지각한다.
그것은 마치 당신이 걸을 줄 알기 때문에 걷는 것과 같다. 정신은 어떠한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걷는다.
그것은 어떠한 자아의식이 없는 독립적인 에너지 같은 것이다. 그것은 결코 환상이 아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당신은 결코 알지 못한다.
환영의 본성
바르도 상태에서 전개되는 환영과, 그 환영과 함께 나타나는 찬란하게 빛나는 색깔과 소리들은 지각자의 관점에서 유지할 필요가 있는 어떤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지만 그들은 침묵의 표현과 비어있음의 표현처럼 바로 나타난다.
이들 환영들을 적절하게 지각하기 위해서 지각자는 근본적인 집중된 에고(ego)를 가질 수 없다. 여기서 근본적인 에고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명상하게 하거나 지각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명확한 지각자가 있었다면, 누구든 신이나 외부적 실재의 현시(現示, revelation)를 가졌을 것이고 그 지각은 거의 비이원적인 수준까지 확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지각은 대단한 행복과 즐거움이 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관찰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을 향해 바라보는 근본적인 정신적 실재, 미묘한 개념 또는 충동 같은 더욱 미묘한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통일성의 개념을 이끌어들이는 확장, 개방, 행복감의 아름다운 생각을 지각하기 시작한다.
이 우주의 개방성과 확장성의 느낌은 아주 쉽고 편안한 상태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보호처인 자궁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러한 합일의 영감 때문에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마음과 친절한 마음을 갖게 되고 아름다운 말을 한다.
정말로 어쩌면 몇몇 신의 환영의 모습은 그러한 상태에서 지각될 것이며, 혹은 빛의 번쩍임 또는 음악 연주 또는 어떤 존재의 접근으로 지각될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그 자신과 그리고 그의 투영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경우, 그의 투영에 의존하지 않는 여래들의 환영을 죽은 후 바르도 상태 기간 중에 보는 것은 그를 극도로 초조하게 만든지도 모른다. 여래들의 환영은 결코 합일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섭도록 적대적이다. 그들은 의사 소통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반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냥 화가 난 듯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나타나는 첫 번째 환영은 평화로운 신들의 환영이다. 여기서의 평화는 우리가 얘기해 왔던 사랑과 빛의 느낌에서도 나오는 평화로움이 아니라, 완벽하게 에워싸고 있는 평화이며 움직일 수 없고 대적할 자가 없는 평화이다.
그리고 시간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도전 받지 않는 상태의 평화로움이다. 평화의 상징은 원의 모양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입구가 없으며 영원하다.
단지 죽은 후의 바르도 상태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생 동안 유사한 체험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이 아름답고 평화스럽고 사랑스러운 우주와의 합일 상태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몇몇 다른 원소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정확히 평화로운 신들의 환영과 같은 종류이다. 당신은 당신의 근거를 잃어버릴 가능성과 모든 합일을 완전히 잃을 가능성, 당신 자신과 같은 당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릴 가능성, 그리고 철저하고 완벽하게 조화로운 상태 속으로 분해될 가능성을 발견한다.
조화로운 상태 속으로 분해되는 것은 물론 광휘의 체험이다. 이 순수한 평화로움의 상태는 굉장히 무서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는 종종 합일의 개념조차 더 이상 적용할 수 없는 다른 차원에 대한 갑작스런 일별에 의해 당신의 믿음이 흔들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분노의 신들에 대한 체험이 있다. 그들은 평화로움의 다른 표현으로 부정하고 고집이 센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종류의 대피선도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그들에게 접근하여 그 상황을 바꾸려고 한다면 그들은 당신을 뒤로 던진다.
그런 종류의 일은 삶의 상황에서 감정과 함께 항상 일어난다. 어쨌든 모든 것이 평화롭고 조화로운 곳에 대한 일치감은 최종 진리를 붙잡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열망이나 적대감 또는 어떤 갈등이 일어나 갑작스런 에너지의 폭발이 있을 때마다 갑자기 어떤 것이 당신을 깨우기 때문이다.
그것은 평화로움 속에 있는 분노의 성질이다. 당신이 어떤 종류의 상황들을 안락하게 하는 에고를 만드는데 열중할 때, 숨김없는 마음의 실제적인 진실과 감정의 다채로운 면은 가능한 한 아주 격렬한 방법으로 당신을 깨울 것이다. 그
것은 마치 갑작스런 사고 또는 갑작스런 혼란과 같다.
물론 이들을 무시하고 원래의 생각을 계속 이어나갈 가능성은 항상 있다. 그래서 세 번째 바르도 상태에서 몸을 떠나 광휘 속으로 들어간 다음 광휘로부터 깨어나 이들 환영들을 지각한다는 개념은, 관련시킬 몸조차도 없는 개방된 공간 속으로 인도되고 있는 것처럼 상징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곳은 당신이 합일의 개념을 가질 수 없는 개방된 공간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합쳐질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전환되거나 일정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떠다니는 에너지의 번쩍임이 있다.
여기에서 번쩍임은 마음에 대한 정의이며, 다른 상태로 전환되거나 또는 올바른 것으로 판명될 수 있는 속기 쉬운 에너지이다.
자신을 자유롭게 하여 다섯 여래 세계의 삼보가카야(보신) 수준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끊임없이 같은 게임을 하려는 어떤 시도가 있느냐 또는 없느냐에 달려 있다.
이들 생생하고 다채로운 체험과 동시에 또한 그곳에는 여섯 바르도 체험의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체험이 있다.
여섯 세계에 대한 지각과 다섯 여래에 대한 지각은 하나의 상태이지만 그들은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다. 여래에 대한 지각자 같은 마음은 육체적인 몸과 마음 사이의 연결을 아주 자연스럽게 유지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의 신성(神性)과 몸의 신성 사이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다. 그들은 둘 다 같기 때문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
《티벳 사자의 서》는 말한다. 당신이 몸에 대한 무의식적인 열중에서 처음 깨어날 때, 당신은 시각적인 체험을 갖는다.
그 체험은 세밀하고 정확하고 분명하고 밝고 두려우며, 봄날 들판의 아지랑이를 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당신은 천 개의 천둥이 동시에 울리는 것 같은 소리를 듣는다. 정신적인 상태인 그곳에는 느슨함과 분리된 느낌이 있는 한편 동시에 지능이 지나치게 높아져 마치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몸이 없는 거대한 머리를 가진 사람과 같다.
그래서 여래들의 환영을 지각하기 위한 준비인 이 바르도 상태의 실제적이고 시각적인 체험은, 분명하고 지적이고 밝게 빛나지만 동시에 막연하여 파악하기 어려우며 당신이 정확하게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감각적 체험은 또한 청각 영역에서도 일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으르렁거리는 심원(深遠)한 소리가 지진이 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진동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유사한 체험은 또한 삶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비록 육체적인 몸이 없는 바르도 상태의 체험이 더 분명하고 더 환각적이기는 해도 삶의 상황에서는 극단적인 아지랑이의 모습이 아닌 근본적으로 쓸쓸한 속성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에고로서 연결시킬 아무런 배경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 생기는 쓸쓸함과 깜박임이다. 그 에고없음(egolessness)의 순간적인 일별은 흔들림을 초래한다.
첫째 날
이 책에서는 4일 동안의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 광휘 속으로 들어가면, 이것이 바르도 상태라는 사실에 대한 순간적인 알아차림이 있고 바로 그 순간 윤회 체험의 반대 과정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은 몸 또는 모양과는 반대인 빛과 이미지의 지각이다. 확실한 모양의 상태가 되는 대신 그것은 속성의 막연한 상태이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눈부신 빛을 받는다. 그 빛은 몸과 지성을 연결하는 의사소통의 연결 고리이다. 비록 당신이 광휘의 상태 속으로 흡수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눈부신 속성을 가진 날카롭고 정밀하게 작동하는 어떤 지성이 있다. 그래서 정신물리학적인 몸과 지적인 마음인 지성은 변형되어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이 경우 공간의 색은 푸른 색이고 나타나는 환영은 바이로차나이다. 바이로차나는 앞과 뒤가 없는 붓다로 묘사된다.
그는 한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모든 것에 고루 미치는 파노라마 같은 환영이다. 그래서 바이로차나는 종종 모든 방향을 동시에 지각하는 네 개의 얼굴을 한 명상하는 모습으로 의인화된다.
그는 하얀 색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지각작용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최초의 색인 하얀 색이다.
그는 방향과 시간의 개념을 초월하는 것을 나타내는 여덟 개의 살이 달린 바퀴를 들고 있다. 바이로차나의 모든 상징은 중심과 가장자리는 어느 곳에나 있다는 파노라마 환영의 분산 관념이다.
그것은 의식의 무더기(識蘊)를 초월하는 의식의 완벽한 개방이다. 그것과 함께 그곳에는 신들의 세계에 대한 환영이 있다. 푸른 색의 심도는 두려움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잡을만한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얀 빛의 일별은 어둠 속에서 켜져 있는 램프를 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당신은 그 빛을 향하여 걸어가는 경향이 있다.
신들의 세계는 또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난다. 우리가 기쁨과 즐거움 같은 정신적인 상태에 몰입될 때마다 우리는 우리자신과 자신의 투영들에 몰입되는 것이다.
그러한 기쁨이 올 때마다 그 반대의 가능성도 또한 있다.
그것은 중심부가 없이 모든 곳에 골고루 미치는 바이로차나의 속성이다.
거기에는 만족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고 우리가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아무런 기본 바탕이 없기 때문에 전혀 매력적이지 않고 극단적으로 초조하게 하는 것이다.
파노라마식 개방의 환영을 갖는 것은 아주 좋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지각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면 그것은 에고의 관점으로부터 나온 무서운 것이 된다.
신들의 세계와 바이로차나의 두드러진 차이는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리고 종종 우리가 집중된 정신적 즐거움의 원천에 매달려야 할지 아니면 우리가 중심부가 없는 순수한 개방상태 속으로 가도록 해야 할지 하는 선택은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
이 체험은 적대감으로부터 나타난다. 왜냐하면 적대감은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가 바이로차나를 보지 못하게 멀리 떼어놓기 때문이다.
적대감은 뚜렷하고 견고한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분노의 상태가 되면 그것은 마치 우리 자신이 호저102)가 된 것으로 상상하고 우리 자신을 방어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발휘하는 것과 같다. 그곳에는 파노라마 환영의 여지가 전혀 없다.
우리는 결코 네 개의 얼굴을 갖기를 원하지 않으며 거의 한 개의 눈조차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집중되어 있고 완벽하게 내부로 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분노가 우리를 바이로차나의 광대한 속성으로부터 달아나게 만드는 이유이다.
둘째 날
몸의 원소를 초월하는 하얀 빛이 분명해지기 시작하면, 완벽한 기쁨의 세계인 동쪽에서 바즈라사트바(Vajrasattva, 금강살타) 또는 악쇼비아(Aksobhya, 아촉불) 여래가 나타난다.
악쇼비아는 ‘동요되지 않는’이라는 뜻이고 바즈라사트바는 ‘바즈라 존재’ 라는 뜻이다. 그들은 둘 다 강인함과 견고함을 나타낸다.
인도 신화에서 바즈라는 모든 다른 무기와 보석을 부수고 다이아몬드를 자를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보석 또는 천둥번개이다.
수 백년 동안 수미산에서 명상 수행을 한 어떤 현자가 있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뼈들은 바즈라로 변했다. 신들의 왕인 인드라(Indra)가 이것을 발견하고 그의 무기로 삼았다. 백 개의 뾰족한 끝이 달린 바즈라(vajra)가 그것이다. 바즈라는 세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것은 경솔하게 사용될 수 없다. 둘째, 그것은 항상 적들을 파괴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셋째, 그것은 항상 손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파괴할 수 없는 견고한 것이다.
바즈라사트바-악쇼비아 여래는 다섯 개의 뾰쪽한 끝을 가진 바즈라를 잡고 있다. 이 절대적으로 견고한 물건과 함께 그는 코끼리 보좌에 앉아있다.
무엇이 이보다 더 견고할 수 있겠는가. 그의 배우자는 붓다의 눈을 가진 여신인 붓다로차나(Buddha-Locana)이다.
불교 전통에서는 다섯 가지 형태의 눈이 있다. 몸의 눈, 붓다의 눈, 지혜의 눈, 천상의 눈, 그리고 진리의 눈이 그것이다. 이 경우 붓다의 눈은 깨어있음과 관련이 있다.
당신은 매우 견고하고 안정된 상태를 가질 수 있지만 만일 당신이 출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흐르지 않을 것이다. 여성 원리는 자동적으로 바깥을 연다.
그녀는 출구 또는 견고함에서 흐름으로 들어가는 의사전달 요소, 삶의 상황 같은 모든 일에 있어서 활성화를 제공한다.
그는 흙의 정수인 크시티가르바(Ksitigarbha, 지장보살)를 동반한다. 그는 모든 종류의 비옥함과 성장을 나타내며 또한 그러한 특별한 붓다의 표현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는 또 사랑스러운 자 마이트레야(Maitreya, 미륵)를 동반한다. 견고하고 동시에 비옥한 그러한 안정은 삶을 충실하게 하기 위하여 감정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감정적이고 자비로운 사랑의 속성이며 헌신적인 동정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다음 여성 보살들이 있다. 라시아(Lasya)는 춤 또는 무드라(mudra, 手印)의 보살이다. 그녀는 댄서보다 춤을 더 잘 추며 몸의 아름다움과 존엄을 나타내는, 예물을 올리는 여신이다.
그녀는 여성 원리의 위엄과 매력을 보여준다. 푸쉬파(Puspa)는 꽃의 여신이며 환영, 경치, 풍경의 보살이다.
물질의 무더기(色蘊)를 초월하는 것은 하얗게 빛나고 투명하고 정밀한 거울 같은 광선이다. 그 빛은 바즈라사트바와 그의 배우자의 가슴에서 비친다.
그 빛과 함께 빛나지 않는 회색 빛인 지옥의 빛이 있다. 사람이 그러한 바즈라의 속성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을 지각할 때 그것은 함께 일하기에는 너무 복잡해 보인다.
그래서 그것을 단순화하여 회색 빛 속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그 빛은 항상 지성적인 바즈라 속성과 연결되어 있는 지옥 또는 근본적인 과대망상의 개념과 결합되어 있다.
지성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 당신은 모든 일에 있어서 무엇이 옳은가 보다 무엇이 틀렸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것이 자연스런 바즈라의 지성적인 속성이고 비평적 논리적 마음의 태도이다. 그것은 또한 충실함을 가져온다.
만일 당신이 비평적 태도의 논리에 기초를 두고 어떤 것을 이해한다면, 당신의 지혜는 굉장히 단단하고 뚜렷한 바탕에 근거를 두게 된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양상의 지옥의 세계이다. 그것은 비평적 태도가 어떤 종류이던 견실함 또는 기본적인 건전함과 관계하지 않고 연쇄반응, 다시 말해서 자명종 시계 같은 편집병의 연쇄반응이 시작될 때이다.
셋째 날
이 연속되는 날들의 과정에서 바이로차나의 다르마다투(法界) 속성은 공간을 제공해왔고, 바즈라사트바-악쇼비아 속성은 견실함을 제공해 왔다.
이제 라트나삼바바(Ratnasambhava, 寶生佛)의 환영이 묘사된다. 라트나삼바바는 라트나 가족의 중심인물이다.
라트나 가족은 풍부함과 존엄, 다른 지역으로의 부의 확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근본적으로 견고하고 부유하고 확장적이다.
라트나 속성의 부정적인 측면은 다른 영토로 진군하기 위하여 풍부함을 이용한다는 것이고, 공간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확장한다는 것이며, 의사소통의 방해가 있는 곳에 대하여 관대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점이다.
라트나삼바바는 흙을 상징하는 노란 색이다. 그것은 부유함과 풍부함의 뜻을 가진 비옥함이다. 그는 소원을 성취시켜주는 보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또 부족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
리고 그의 배우자 마마키(Mamaki)는 물을 상징한다. 풍부하고 비옥한 토양을 갖기 위해서 흙은 물을 필요로 한다.
아카샤가르바(Akasagarbha, 허공장)보살은 공간의 정수이다. 그런 풍부한 바탕과 함께 당신은 또 원경(遠景)을 만들기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선(善)인 사만타바드라(Samantabhadra)가 있다. 그는 기본적인 힘이며 라트나 가족 전체 만달라의 고유 속성이다.
집 또는 사원을 지을, 혹은 새로 경작할 장소를 선택하는 전통적인 방법에 따르면(그것은 티벳의 뵌 전통에 의해 아주 잘 발달되었다.)
당신은 그저 아무렇게나 집을 지어서는 안되며 정신적인 요소들을 포함시켜야 한다. 동쪽으로는 개방된 느낌이 있어야 하고 남쪽으로는 시내와 강이 있어 감미로운 느낌이 있어야 한다.
서쪽에는 바위들이 있어 요새 같은 느낌이 들며, 북쪽에는 산들이 늘어서 있어 보호해 주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그곳에는 또 땅의 모양을 바라보면 알아차릴 수 있는 지하수가 있고, 샘물 옆에는 보통 늪이 아닌 집을 짓기 좋은 암반으로 된 기초 터가 있다.
그러한 적절한 형태와 장소에 있는 그 특별한 바위 물질을 사만타바드라, 땅의 사만타바드라라고 부른다.
사만타바드라는 또 열망과 긍정적인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기본적인 신뢰이며 미래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방법이다.
라트나삼바바는 여성보살 말라(Mala)를 동반한다. 말라 보살은 라트나의 흙의 속성 중 가장 빛나는 부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화환, 목걸이, 팔지 등 온갖 종류의 장식품을 바치는 여신이다. 다른 여성 보살인 두파(Dhupa)는 향을 나르는 여신이다.
그녀는 냄새와 향기를 상징하며, 신성한 공기와 오염 없는 공기, 그리고 식물이 자라는 공간과 흐르는 강물 등 땅이 만드는 환경적 상황을 상징한다.
라트나 가족과 결합되어 있는 빛은 차별하지 않는 평정의 노란 빛이다. 그러나 라트나 만달라의 모든 세부사항과 풍부함은 너무 정교하고 존엄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당신은 매우 단순하고 자기 만족이 있는 조그만 구속으로 뛰어 들어가려고 한다. 그 곳은 자만심이 있는 곳이며 인간 세상의 흐린 빛이 있는 곳이다.
넷째 날
넷째 날에는 정화된 불의 원소가 있다. 그것은 빠드마(padma) 가족인 아미타바(Amitabha, 아미타불)로 상징된다. 아미타바는 무한한 빛을 의미한다.
그리고 빠드마의 기본 속성은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끄는 따뜻함이고 개방적이며 자비롭다. 그 빛은 단지 자연스럽게 비치므로 끝이 없다.
그것은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적대감의 뜻이 아니며, 어떠한 물질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다 태우는 불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연꽃도 같은 의미이다. 연꽃은 해 또는 달이 비칠 때 피어나며 그 꽃은 빛을 향한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나타나는 어떤 상황도 받아들인다.
그것은 또 완벽하게 순수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자비는 진흙이나 더러움 속에서 자라지만 연꽃은 온전히 완벽하고 깨끗하다.
공작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은 재차 개방성과 수용성을 의미한다. 신화에 의하면 공작은 독을 먹여 기른다고 한다. 공작의 아름다운 색은 독을 먹음으로써 만들어졌다.
그것은 멀리 확장하는 개방성이기 때문에 어떠한 종류의 부정적인 상황도 다룰 수 있다. 사실 자비는 부정적인 상황에 의해서 원기가 왕성해 진다.
하얀 옷을 입은 여신인 그의 배우자 판다라바시니는 돌로 짠 어떤 옷에 관한 인도 전설의 상징과 관련이 있다. 그 옷은 오직 불에 의해서만 깨끗해진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는 불의 정수를 상징한다. 또한 태우는 과정, 정화, 완전한 자비의 결과를 상징한다.
그 다음 자비의 정수인 아발로키테슈바라(Avalokitesvara, 관세음보살)가 있다. 그는 모든 방향을 살피는데 그것은 자비의 궁극적인 지성이다.
자비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그 지성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그것은 예리하고 자동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바보 같고 맹목적인 자비가 아니라 항상 그 기능을 이행하는 지성적인 자비이다.
만주스리(Manjusri, 문수보살) 역시 자비의 자동적인 면을 상징하지만 여기에서는 순수한 충동적인 속성이라기보다는 지성적이다.
그 또한 자비를 전달하는 소리의 창조자이다. 그는 모든 말의 원천인 비어있음(空)의 소리를 상징한다.
그 다음 만주스리의 음악을 노래하는 여성 보살 기타(Gita)가 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등불 또는 횃불을 들고 있는 알로카(Aloka)가 있다.
자비의 모든 과정에는 리듬과 빛이 있다. 그것은 지성의 깊이와 능률의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으며, 무한하고 모든 곳에 고루 미치는 아미타바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흰옷 입은 붓다의 순수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식의 무더기(想蘊)를 초월하여 분별하는 자각의 빛인 붉은 빛을 비추는 완전한 빠드마 가족이다. 자비는 매우 상세하고 정밀한 것이다.
그래서 분별하는 자각의 지혜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받아들임이나 거절의 입장에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그것은 아귀 세계와 관련이 있다. 이 세상에는 갈등이 있다. 왜냐하면 열망은 보통 인간 세계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날카로움과 정확함, 깊이와 존엄 등 이들 모든 빠드마 속성은 너무나 압도적이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당신은 귀머거리와 벙어리 게임을 하려고 한다. 당신은 그러한 완벽한 그림으로부터 몰래 도망하여 평범한 열정이 있는 바깥 도피선으로 가려고 한다.
다섯째 날
다섯째 날에는 공기와 바람의 순수한 속성인 까르마(Karma) 가족이 있다. 그것은 질투의 색인 초록 빛이다. 축적된 행위의 세계로부터 아모가싯디(Amoghasiddhi, 불공성취불)여래가 나타난다. 까르마 가족은 행위, 이행, 능률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강력하여 아무 것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아모가싯디는 모든 행위와 모든 힘의 성취를 의미한다.
그는 손에 십자형 바즈라를 들고 있다. 바즈라는 우리가 바즈라 가족에서 보았던 것처럼 강하고 파괴할 수 없는 모든 행위의 이행을 상징한다.
십자형 바즈라는 모든 방향에서 완벽하게 지각되는 모든 행위들의 영역을 의미한다. 그 행위들은 파노라마 식으로 이행된다. 종종 그것은 여러 색깔을 지닌 바즈라로 묘사된다.
그는 가루다(garuda)의 일종인 샹샹(shang-shang)의 보좌에 앉아있다. 이 특별한 유형의 가루다는 음악 연주자인데 그는 두 손에 두 개의 심벌즈를 가지고 있으며 아모가싯디를 등에 태우고 있을 때 그것을 연주한다.
그것은 재차 아주 강력한 이미지와 이행의 상징이다. 가루다는 모든 영역을 망라하여 날 수 있으며 모든 공간을 에워싸고 있는 초월적인 일종의 수퍼새(super-bird )이다.
아모가싯디의 배우자는 신성한 말씀의 구세주 또는 삼마야인 삼마야따라(Samaya-Tara)이다. 탄트라의 가르침에는 삼마야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삼마야는 바로 그 순간 생생한 상태의 실제적인 이행이다.
다음에는 바즈라를 잡고 있는 자라는 뜻인 바즈라파니 보살이 있다. 다시 그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상징한다. 그는 에너지의 보살이다.
그리고 또 모든 장애의 정화자인 사르바니바라나비스캄빈 보살이 있다. 만일 어떤 장애가 업의 행위과정에서 오해 또는 무능으로부터 나와 현실의 생생한 상황과 접촉하게 되면 보살은 이들 장애를 깨끗이 쓸어낸다.
다시 말해서 이 카르마 가족은 모든 장애의 결여와 이행의 힘, 이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 다음은 여성 보살인 간다(Gandha)와 나이베드야(Naivedya)가 있다. 간다는 향수의 보살이며 그녀는 인식감각(sense-percept tion)또는 느낌을 상징하는 모든 종류의 향기 식물로 만들어진 정수(精髓)를 나른다.
효과적이고 숙련된 활동을 하기 위해서 당신은 발달된 인식감각이 필요하다. 나이베드야는 숙련된 행위에 영양을 공급하는 명상의 음식을 바친다.
까르마 가족은 의지의 무더기(行蘊)를 초월하여 아수라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한편 혼란과 그것과 반대되는 모든 지혜의 체험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 경우 그들 둘 다 점유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혜는 모든 가능성의 배경을 완벽하게 감싼다.
그 가능성이란 주관과 객관, 에너지, 구성, 기질, 속도, 공간 등의 견지에서 상황을 다루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살피는 것이다.
반면에 혼란은 상황을 다루는데 있어서 매우 제한된 방법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그 자신을 확장시켜 왔거나 발달시켜 오지 않았다. 혼란은 발달되지 않은 원시적인 지혜이다.
반면 지혜는 완벽하게 발달된 것이다.
여섯째 날
다음에는 42명의 모든 평화로운 신들의 진보와 발전이 있다. 다섯 여래, 네 천왕, 네 여신, 그리고 여섯 세계가 동시에 나타난다.
모든 감성적 상황이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섯 여래들이 모든 공간과 모든 방향에 가득 차 있는 곳 안에서 근본적으로 당황하게 된다.
그곳에는 틈도 없고 탈출 할 수도 없고 아무런 피난처도 없다. 왜냐하면 네 개의 문 또한 네 가지 모습의 헤루카(Heruka)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동쪽문의 수문장은 승리를 거둔 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진정시킴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는 분노한 모습으로 나타나 문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당신은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는 파괴할 수 없고 적수가 없는 평화의 속성을 상징한다. 그것이 그를 승리를 거둔 자 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 다음 남쪽 문에 있는 두 번째 수문장은 죽음의 왕 야마(Yama)의 원수이다. 그는 부(富)를 증가시키는 업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시간과 공간의 관점에서 볼 때 부는 한정적이고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한계를 넘은 그는 죽음의 왕의 지배자이다.
서쪽 문에는 말머리를 한 하야그리바(Hayagriva)가 있다. 그는 경보시스템에 해당한다. 그것은 마치 모든 예측되지 않은 상황에서 말의 울음이 당신을 깨우는 것과 같다.
그것은 지적인 열망인 매력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당신이 열망에 몰입되지 않도록 당신을 깨운다.
북쪽문의 수문장은 아므르타의 소용돌이 또는 죽음방지약인 아므르타쿤달리(Amrtakundali)이다. 그는 특별히 죽음과 관련이 있다.
만일 희망을 포기하고 자살하려는 충동이 생기면 죽음방지약이 당신을 구할 것이다. 자살은 결코 답이 아니다. 당신에게는 평화로운 승리의 존재가 있다.
그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어떠한 극단적인 개념도 정복하는 자로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경보를 보내는 매력적인 장치이고, 당신에게 죽음방지약을 주는 자살원리이다.
근본적으로 당신은 어떤 피난처 없이 완벽하게 갇혀 있다.
게다가 수문장의 여성원리들이 있다. 만일 당신이 도망치려고 한다면 당신을 고기처럼 찍기 위해 갈고리를 가진 여성원리가 있다.
혹은 당신이 모든 공간을 채우며 다른 어떤 가능성도 용납하지 않는 자존심 때문에 탈출하려고 한다면 올가미를 가진 여신이 당신의 온 몸을 묶어 어떠한 확장 기회도 주지 않고 내버려 둘 것이다. 다른 가능성은 속도에 근거한 열망을 통하여 도망가는 것이지만 그때는 쇠사슬을 가진 여신이 당신을 꽁꽁 묶기 때문에 당신은 발을 움직여 도망갈 수가 없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을 적대감으로 두렵게 하려고 하여 당신의 방법을 쓰려고 한다면, 아주 큰 소리가 나는 요령을 든 여신이 당신의 적대감을 지닌 큰 외침과 분노의 깊은 목소리를 진압한다.
그 다음 당신은 부득이 세계의 여섯 영역과 마주치게 된다. 천상 세계의 붓다, 아수라 세계의 붓다, 인간 세계의 붓다, 축생 세계의 붓다, 아귀 세계의 붓다, 그리고 지옥 세계의 붓다가 그것이다.
이모든 환영들은 당신의 심장 중심으로부터 나타난다. 그곳은 감정과 열망과 즐거움과 관련이 있다.
일곱째 날
그 다음에는 비드야다라(Vidyadhara)들이 의사전달 원리의 정수인 목의 중심으로부터 빛을 비추기 시작한다. 평화의 신들은 심장과 관련이 있고 분노의 신들은 두뇌와 관련이 있다.
이야기는 그 둘을 연결하는 전달고리이다. 그것이 비드야다라이다. 비드야다라는 지식 또는 통찰의 보유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아주 평화스럽지도 않고 아주 분노하지도 않은 중간의 상태이다. 그들은 인상적이고 압도적이며 위엄이 있다. 그들은 탄트라 스승의 신성한 모습을 상징하며 그 스승은 우주의 마법적인 양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축생세계의 초록색 빛이 나타난다. 그 빛은 깨우쳐 줄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한 무지를 상징한다.
분노의 신들
이제 다섯 여래들의 원리는 헤루카들과 그들의 배우자들로 변형된다. 가족들의 기본 속성은 계속되지만 이제 그들은 아주 드라마틱하고 연극 같은 방법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그들의 기본적인 속성이라기 보다는 바즈라, 빠드마 등의 에너지이다. 헤루카들은 세 개의 머리와 여섯 개의 팔을 가지고 있다.
이것의 상징적인 의미는 변화의 능력이며 루드라(Rudra)의 진압에 관한 신화에 나타나 있다.
루드라는 완벽한 에고상태(ego-hood)를 성취한 자이다. 한 스승 아래서 공부하던 두 친구가 있었다. 스승은 그의 가르침의 정수는 자발적인 지혜(spontaneous wisdom)라고 말했다.
설령 그 사람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만족시키더라도, 그는 근본적인 자발성에 의해 하늘의 구름처럼 자유롭게 된다고 했다. 두 제자는 그 말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했다.
한 사람은 나가서 긍정적인 그리고 부정적인 자신의 성격과 관련된 자발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무런 강요 없이 자신의 성격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격려하지도 않았고 억압하지도 않았다. 또 한사람은 나가서 사창가를 만들고 친구들을 모아 큰 갱단을 조직했다.
그들 모두는 자발적인 방법으로 행동하여 인근 마을 습격하고는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은 납치했다.
얼마 후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자발성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스승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들은 스승에게 각자의 경험을 말했다. 스승은 첫 번째 제자의 방법은 옳고 두 번째 제자의 방법은 틀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번째 제자는 그의 모든 노력과 에너지가 비난받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칼을 뽑아 그 자리에서 스승을 죽였다.
그 자신이 죽었을 때 그는 연속되는 환생의 과정을 겪었다. 오백 생은 전갈로 태어났고 오백 생은 자칼로 태어났으며 계속하여 비슷한 다른 것으로 환생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신들의 세계에서 루드라로 태어났다.
그는 완전히 자란 이빨과 손톱이 있는 세 개의 머리와 여섯 개의 팔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신들은 너무나 소름이 끼쳐 그와 그의 어머니의 시체를 화장터로 끌고 가 무덤에 묻었다. 그 아기는 어머니의 피와 살을 먹고 살아났다.
그래서 그는 아주 무섭고 강건하고 힘이 넘치게 되었다. 그는 화장터 주변을 배회했다. 그리고 모든 주변의 유령들과 신들을 지배하여 자신의 왕국을 만들었다.
그 일은 그가 세 겹으로 된 전 우주를 정복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때 그의 스승과 동료 제자는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 그들은 그를 진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즈라파니는 그 자신을 말의 머리를 한 분노한 붉은 모습의 하야그리바로 나타났다. 그
리고 루드라의 왕국에서 그의 존재를 포고하는 울음을 세 번 울었다.
그리고 그는 루드라의 항문을 통하여 몸 안으로 들어갔다. 루드라는 극도의 창피를 당했다. 그는 진압되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의 몸을 좌대 또는 탈것으로 바쳤다.
루드라의 모든 부속물과 그의 왕족 복장의 세세한 장식품들 즉 해골 왕관, 해골 잔, 뼈로 된 장신구, 호랑이 가죽 셔츠, 사람 가죽과 코끼리 가죽으로 된 숄(shawl), 갑옷과 투구, 두 날개, 그의 머리에 있는 초승달 등이 헤루카의 복장으로 바뀌었다.
먼저 다섯 가족의 어느 가족과도 관련이 없는 위대한 헤루카(The Great Heruka)가 있다. 그는 다섯 가족들 사이에 있는 공간이다.
위대한 헤루카는 모든 분노한 헤루카들의 근본적인 에너지를 만든다. 그리고 나서 붓다 헤루카, 바즈라 헤루카, 라트나 헤루카, 빠드마 헤루카, 그리고 까르마 헤루카가 그들의 배우자들과 함께 나타난다.
그들은 도전 받을 수 없는 난폭하고 원기 왕성한 에너지의 속성을 상징한다. 근본적으로 다섯 가족들의 속성은 열려 있고 수동적인 평화로운 상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벽하게 안정된 것이어서 아무도 방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평화로운 상태의 무시무시한 힘은 분노의 상태를 표시한다. 그것은 종종 자비로운 분노, 미움 없는 분노로 묘사된다.
그 다음에는 분노한 에너지의 다른 모습인 가우리(gauri)들이 있다. 다섯 헤루카들은 에너지의 존재 그 자체이다. 반면에 가우리들은 활성화한 에너지이다.
하얀 가우리는 시체 위에서 춤을 추는데, 그녀의 행위는 생각의 과정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기의 시체로 만든 가죽 컵을 들고 있다.
일반적으로 시체는 존재의 근본적이고 자연스런 상태를 상징한다. 생명이 없는 몸은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아무런 활동적인 생각이 없는 상태이며 마음의 비이원적인 상태이다.
그 다음 노란 여신은 활과 화살을 들고 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숙련된 수단과 지식의 통일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임무는 그 둘을 함께 가져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바다 괴물의 가죽으로 만든 승리의 깃발을 들고 있는 붉은 가우리가 있다. 바다 괴물은 벗어날 수 없는 윤회의 원리를 상징한다.
여신이 그것을 깃발로 들고 있는 것은 윤회가 거부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 북쪽에 있는 검은 색의 베탈리(Vetali)는 바즈라와 해골 잔을 들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다르마타의 변치 않는 속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바즈라는 파괴 할 수 없는 것이고 해골 잔은 숙련된 수단의 또 다른 상징이다. 우리는 그들 모두를 자세하게 샅샅이 조사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분노한 신들의 만달라와 연결된 이들 가우리들과 전달자들(messengers)에 대한 기본 개념을 말한다면, 이들 감각의 특별한 인물들은 특별한 에너지를 이행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분노의 신들은 희망을 상징하고 평화의 신들은 두려움을 상징한다. 초조감에서 두려움은 생긴다. 왜냐하면 에고는 어떤 방법으로도 두려움을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전적으로 무적이다. 두려움은 결코 저항하지 않는다. 분노한 에너지의 희망적인 속성은 영원히 창조적인 상황이라는 점에서의 희망이다.
그것은 실제 그대로 보여지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본적이고 중립적인 에너지이며, 선에 속한 것도 아니고 악에 속한 것도 아니다.
그 상황은 압도적이어서 당신의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통제하거나 또는 통제된다는 문제는 정말로 없다.
그런 성향은 당신을 당황하게 하며 당신은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당신이 아주 빠르게 운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알아차리고는 브레이크를 밟는 것과 같다.
이것은 사고의 원인이 된다. 가우리들의 임무는 몸과 마음 사이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경우 마음은 지성이고 몸은 당황하는 것 같은 충동적인 속성이다.
그것은 육체적인 행위이다. 가우리들은 지성과 행위 사이에 끼어 든다. 그들은 에고가 자기 보존을 계속하는 것을 자른다. 그것이 그들의 분노한 속성이다.
그들은 파괴적인 에너지를 창조적인 에너지로 변화시킨다. 마치 루드라의 몸이 헤루카의 몸으로 변형된 것처럼 당황 또는 행위의 충동적인 속성 배후에 있는 힘은 변화된다.
죽어 가는 사람
티벳 문화의 사람들은 죽음을 특별하게 초조한 또는 힘든 상황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 서양에 있는 우리들은 종종 죽음과 관계하는 것을 아주 힘들게 생각한다. 아무도 우리에게 최종적인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두려운 거부, 사랑의 근본적인 거절과 같은 것이어서 아무도 진실로 죽어 가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도우려고 하지 않는다.
죽어 가는 사람이 혼수상태이거나 의사 전달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가 죽어 가고 있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실제로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친구 또는 남편 또는 아내라면 이것은 정말로 믿음을 전달할 가장 좋은 기회이다.
적어도 누군가 당신을 진정으로 돌봐 주고 거짓으로 무마하지 않으며, 당신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기쁜 상황이다. 그것이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진리이며 대단히 아름다운 근본적인 신뢰이다. 우리는 정말로 그러한 원리가 발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실제로 죽어 가는 사람과 관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때 그에게 죽음은 신화가 아니며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죽음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친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을 알고 당신은 당신이 죽어 가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순간 진정으로 함께 만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정과 의사 전달의 가장 좋은 최상의 표현이며, 죽어 가는 사람에게 대단히 풍족한 영감을 일으킨다. 당신은 그의 신체적 상황과 관계 맺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신체적 감각, 의사 전달 감각, 청각, 얼굴 표정 등 미묘하게 악화되는 상황을 감지해야 한다. 그러나 항상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미소지을 수 있고, 그들의 늙음과 싸우려 하지 않으며, 그들의 악화되는 감각과 싸우려 하는 대단히 힘이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러한 상황 또한 알아야 한다.
죽어 가는 사람이 당신이 그를 위해 어떤 의식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제외하고는 단지 ≪바르도 퇴돌≫을 읽는 것만으로는 잘하는 일이 아니다. 당신은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이해를 해야 한다. 단순히 책을 읽어 갈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화처럼 만들어야 한다.
“당신은 죽어 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들과 가족들을 떠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주위 환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서 떠날 예정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곳에는 연속되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친구들과 가르침과의 긍정적인 관계에 따른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근본적인 연속성에서 계속 작업을 하십시오. 그것은 에고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이 죽을 때 당신은 육체를 떠나는 모든 종류의 외부 상처의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오래된 기억들은 당신에게 환각으로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환영과 환각이 어떻게 나타나든 다만 도망가려 하지 말고 다만 나타나는 것과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곳에 머물며 그 환영들과 하나가 되십시오.”
당신이 이 모든 것을 행하고 있는 동안 죽어 가는 사람의 지성과 의식은 점점 약해진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주위의 느낌에 대한 더 높은 의식 또한 발달시킨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다만 그에게 말을 하기 위해 말을 해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진실이라는 근본적인 따스함과 신뢰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흙의 원소는 물의 원소 속으로 분해되고, 물의 원소는 불의 원소 속으로 분해되며, 이러한 점진적인 몸의 분해는 마침내 광휘의 원리 속에서 끝난다는 등의 분해되는 과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을 광휘 속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당신은 그것과 일치하는 기본 바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기본 바탕은 그 사람의 확고한 믿음이다.
“당신의 친구들은 당신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여기에 있으며 당신에게 당신이 죽어 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감추고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자리에서 지켜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바로 지금과 일치시키는 것은 대단히 강력하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곳에는 몸과 마음 사이의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와 두뇌는 분해되지만 당신은 어떤 견고한 바탕을 제공하며 그 상황과 일치시키고 있다.
평화와 분노의 신들의 환영에 관한 한 개개인이 그들과 일치시켜야 할 일이 아주 많이 남아있다. ≪바르도 퇴돌≫에서는 당신이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내어 그에게 그 환영들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직 죽음이 계속되고 있다면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관계하는 한 그것은 대단히 어림짐작으로 하는 일일 것이다. 당신이 죽은 사람과 접촉하여 손해 보았다는 실제적인 증거는 없다. 전체적인 요점은 이렇다.
당신이 죽어 가는 사람을 가르칠 때 당신은 실제로는 당신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안정은 죽어 가는 사람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안정되어 있다면 자동적으로 바르도 상태의 그 사람은 그 안정에 끌리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어 가는 사람에게 매우 온전하고 견고한 상황을 제공하는 것이다.
단지 그와 일치시키고 서로가 동시에 마음을 열고 두마음의 만남을 발전시키도록 하라.
촉얌 트룽파, 린포체
◇ 티벳불교
4. 티벳 불교의 이해
티벳 불교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는 이《티벳 사자의 서》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부록으로〈티벳 불교〉를 실었다.
이 글은 티벳 스승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8년간 티벳 불교를 공부한 후 80년대 초 송광사에서 5년간 선수행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가 선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스티븐 배춸러의《연꽃 속의 보석이여》(심재룡 역, 불일출판사, 1989)에서 뽑은 글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티벳 불교 전반에 대한 스티븐의 명쾌하고 탁월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부분부터 잘 숙독하여 티벳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고 난 후 경전의 해설과 주석을 꼼꼼히 챙겨 보아야 한다.
자격 있는 스승의 가르침을 직접 듣는다는 기분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여 정독할 것을 권한다. 실제로 이《티벳트 사자의 서》를 독송할 때 경전의 원문에 나오는 주석을 보지 않아도 다 이해가 될 때 비로소 독송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1. 티벳 불교의 전래
티벳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하는데 주된 장애의 하나는 아무래도 아직까지 티벳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스러운 영기(靈氣)일 것이다.
‘티벳’이라는 낱말에서 우선 느끼는, 멀리 중앙아시아 어딘가에 있는 눈 덮인 나라, 그리고 그곳의 영적인 생활에 접근하는 일은 국경을 넘으려는 시도만큼이나 어렵다는 이미지, 황폐하나 기묘하고 매혹적인 불모의 평원, 그리고 우뚝한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는 풍경 속에서 신비스러운 의식에 참가하는 붉은 승복을 입은 작은 라마승들, 타오르는 후광 속에 삼켜지는 무서운 악마, 환희에 넘쳐 미소짓고 있는 수많은 팔을 가진 신들, 바위 자체에서 솟아 나온 듯이 보이는 위압적인 조형들, 야크와 무시무시한 눈사람, 달라이 라마, 깊이 있게 울리는 징과 뿔피리 소리, 꽹과리와 의식 등등을 떠올리게 된다.
사진 속에서 우리에게 인사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세련되지 못한 표정으로 우리를 빤히 쳐다보거나, 공들여 꾸민 화려한 비단이나 상징물들 속으로 물러난다.
여기서 우리는 거칠고 거의 길들지 않은 열정에 매우 이질적인 세련미가 독특하게 섞여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티벳의 표면적 인상은 많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통속적인 상상에 의해 거의 있을 법하지 않은 환상적인 사건의 배경이 되어 버렸다.
진지하건 않건 간에, 많은 책들이 신비스러운 일화를 제공하고, 진기한 교리나 의식의 예를 기록함으로써 이러한 인상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티벳에 대한 이 같은 일반적 관념이 아무리 매혹적이고 또 실제로 그런 점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서 드러나는 부분보다는 모호하게 왜곡된 측면이 많았다.
티벳에서 수행하는 불교의 형태에 관해서는 특히 더 그러하다. 우리가 티벳불교를 생각할 때 마음을 혼란시키는 저 현란하고 이국적인 이미지 모두는 어떤 점에서 그 영적인 전통의 외면적 모습일 따름이다.
그 전통의 또 다른 모습은 냉정하고 합리적이며, 정확하고 체계적이다. 이러한 외면적인 모습은 인류가 지켜온 가장 심원하고 광대한 종교체계의 하나를 그 밑에 감추고 있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래서 티벳불교의 가르침에 접근할 때에는,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 종교가 주는 신비하고도 사람을 매혹하는 이미지가, 산에 사는 이 경건한 종족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정도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잔인한 신과 엄숙한 의식은 매우 제한된 의미만을 지니며, 외적으로 이같이 표현된 이 종교의 내면적 활력을 이해함으로써만이 비로소 그 참된 의미를 완전히 알 수 있다.
티벳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앞서 말한 티벳에 관한 통속적인 이미지로부터 시작하지 말고, 이 종교의 내면 세계부터 고찰한 다음 차차 외부로 눈을 돌려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처럼 티벳불교도들의 내면 세계를 이해하고 난 다음에야 그들의 영적 생활과 가치가 스스로 노출된 외면적 세계를 점차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티벳불교는 인도불교의 전통에서 유래한다. 비록 많은 부분이 나중에 티벳에서 단독으로 발전된 소산물이긴 하지만 그 주류는 인도라는 원천에서 흘러나온 것임은 너무도 자명하다.
따라서 티벳불교도의 의식세계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붓다와 그 제자들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인생관에서 찾아야 한다.
또한 티벳불교의 기본적인 세계관은 고대 인도불교도의 관점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티벳불교의 기본 틀을 이해하려면 12세기 이전 인도 불교도들의 내면적, 그리고 외면적인 정신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인도에서 티벳으로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7세기 송첸 감포 왕(617~698) 때이다. 이미 433년에 일련의 불경과 종교의식, 용구들이 전래되었으나 송첸 감포 왕 때에 와서야 비로소 불교를 국교로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사원을 건립하였으며, 역경작업이 이루어졌다. 10세기 초엽 잠시 반불교적 군주인 랑달마 왕에 의해 심한 박해를 받은 시기를 제외하고 티벳에서 불교는 끊임없이 그 힘이 강화되었다.
초기에 가장 두드러지게 발달한 시기는 티송 데첸 왕(790~844) 때이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많은 인도 승려들이 초빙되었고, 최초의 티벳인 승려가 탄생했으며, 티벳 학자와 인도 학자의 공동작업으로 유례 없이 많은 역경사업이 이루어졌다.
불교가 전파되기 이전의 티벳 문화의 발전 단계는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지배적인 종교는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이 혼합된 것으로, 뭉뚱그려서 ‘뵌’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언어기술법이 없었으므로 기록된 문학작품이나 역사문헌도 없었다.
기원전 2세기까지 이 나라는 통일되지 못한 상태로 다수의 경쟁적 봉건국가와 부족연맹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인구 또한 적었으며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
많은 티벳인들은 유목생활을 했고 고정된 부락이나 교역 중심지는 몇몇에 지나지 않았다.
일찍부터 이 나라의 남쪽과 동쪽은 아시아에서 가장 발달된 인도와 중국이라는 두 문명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험준한 지리적 고립성으로 인해 대륙의 문화발달을 공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처음 전해졌을 당시 전법승(傳法僧)들은 티벳을 우회해 가버렸다.
티벳 영토 내의 산맥을 직선으로 넘는 통로를 택하기 보다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거쳐 티벳 북쪽으로 우회하는 길로 인도와 중국을 오가는 편이 여행자들에게 용이했던 것이다.
따라서 티벳인들은 인접한 국가의 문화와 종교적 발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만 했는데도 불구하고,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되기 이전에는 어느 것도 확고히 뿌리내릴 수 없었다.
티벳은 불교의 도입과 더불어 비로소 고도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 이미 자체 내에 세련된 문화와 문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티벳은 앞으로 나아갈 모든 문화발전의 기초로서 불교를 수입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불경을 번역하기 위해 티벳인들은 우선 그들의 말에 맞는 문자를 만들고 문법체계를 구성하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작업은 송첸 감포 왕의 재상이었던 삼보타 라는 천재에 의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인도에 가서 북인도의 산스크리트(Sanskrit)어를 모델로 하여 문자를 만들었다.
또한 그는 티벳 문법에 대한 최초의 책을 편찬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문법 학습의 기초교재로 쓰인다.
이리하여 티벳어로 된 번역문들은, 기존 전통 속에서 잡다한 여러 철학적 함축성이 뒤섞여 오염된 단어들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진 언어체계를 사용한 것이므로 기존 개념으로부터 혼동을 피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로부터 번역한 글은 원문의 용어가 갖는 불교적 함축만을 그대로 옮길 수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뛰어난 명증성(明證性)과 직접성을 지닌 불경 번역본을 이룩했다. 고도로 발달된 한 종교가 집성했던 거의 모두를, 새로이 발명한 기술(記述)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랠파젠 왕(866~901) 때에 이르러서 번역 방식이 표준화되었고 그때까지 이룩한 번역은 모두가 수정되어야만 했다.
많은 경전들이 수 차례씩 번역되었는데, 여러 세대에 걸쳐서 학자와 번역자들이 수정하고 검토한 끝에 최종적인 형태가 완성되었다.
불교가 티벳에 뿌리를 내리는데는 약 400년(700~1100)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 기간에 많은 티벳인이 가르침을 받거나 수행을 쌓기 위해, 또는 역경사업을 계속하기 위한 산스크리트어 학습을 위해 인도에 유학했으며 또한 많은 인도인 스승들도 티벳으로 와서 가르침을 널리 전했다.
번역된 많은 불경을 모아 공식적인 ‘경전’으로 편찬하였을 때 그 수는 약 220권의 분량에 이르렀다(여기에 대한 정확한 숫자는 편집방식에 따라 다르다.).
이 중에서 100권 이상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설법을 담고 있다.
이것들을 총칭하여〈강규(經藏〉라 한다. 그 나머지 역경들은 인도의 대가들이 붓다 시대부터 써왔던 400여종의 주석으로서〈뗀쥬르(論藏)〉즉 ‘논(論)의 번역’이라고 불린다.
거기에 덧붙여 티벳인 자신들에 의해서도 많은 주석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여타의 언어로 된 불교전적보다 더욱 방대하였다.
물론 인도 불교 전통 속에서의 가르침 자체가 워낙 방대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경전에 기록된 모든 사항에 대해 티벳인들이 명료하게 총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인도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철학적 관점에서나 실천 수행에 있어서나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했다.
따라서 초기 티벳의 불교학자들에게는 다양한 교의(敎義)와 수행을 티벳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통합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
그리하여 티벳인들이 불교에 대해 체계적으로 기술된 내용의 대부분은 이미 인도 문헌에서 나타났던 통합성의 선구적인 시도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특히 경전에 나타나는 일반적 교리와 밀교(密敎)를 조화시키고자 하는 경우에 있어서 불교의 교리와 수행관 전체를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종합 모델을 만들어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티벳불교의 서술은 그 교리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인도의 불교와 대동소이하나, 깨달음에 이르는 체계적인 단계를 이룩하는 방식에 있어서 상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티벳 불교에서 독특한 것은 어떤 특정 교리의 내용이나 통찰이 아니라 그 자신의 빛 아래에서 이들을 배열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논리 바로 그것이다.
그 독자적인 특이한 색채는 티벳불교 고유의 특정 요소 때문이 아니라, 불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들을 티벳적인 심성과 결합시키는 방식 때문인 것이다.
2. 티벳불교의 가르침
티벳불교의 가르침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단계를 밝히는 것에 맨 먼저 관심을 두고 있다. 그 내용에는 대부분 전통적인 인도의 우주관에서 유래한 전체적 세계관과 그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 등도 포함된다.
불교의 가르침이 이러한 우주관을 기반으로 하여 설명되었기 때문에 티벳인들도 이 점을 자신의 사고 방식에 편입시켰던 것이다.
이 우주론에 그려지는 세계는 여러 상이한 존재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메루’(sumeru104), 須彌山) 라는 높고 장엄한 산이 있으며 그 남쪽의 바다 한 가운데에 사람이 사는 삼각형의 큰 대륙이 위치해 있다.
수메루산은 거대하고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사면체의 피라미드같이 생겼으며, 구름 위의 천공(天空)에 까지 닿는다.
수메루산의 층에는 많은 상이한 천인(天人)의 영역이 있다. 맨 밑의 영역에 아수라(阿修羅)가 있다. 아수라는 자신보다 높은 천인의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 천인들에 대한 질투로 고통받는다. 따라서 자주 그들과 갈등을 일으킨다.
아수라 바로 위에 머무르는 천인은 장수하고 만족스런 삶을 살며, 살아있는 동안 물질적,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지 않지만 죽음이 다가와 그 행복한 상태가 상실되리라는 예상을 하게 되면, 그들은 큰 슬픔을 겪는다.
이러한 감각적인 천(慾界天)의 평면 위에 두 가지 또 다른 천계가 있다. 순수 형상계(色界天)와 무형계(無色界天)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그 정신의 집중 정도에 따라 여러 계층의 천인이 산다. 그
들은 욕계천의 존재보다는 수명이 훨씬 길고 유복하지만 그들도 또한 끊임없이 죽고 윤회하는 괴로움을 받는다.
땅위와 아래에는 그 고통의 정도에 따라 구별되는 세 가지 영역이 있다. 그것은 육생 동물과 조류 어류를 포함하는 짐승의 영역(畜生界)과 어둡고도 불행한 존재로서 살아야 하는 여러 유령과 영혼들을 포함하는 프레타계(餓鬼界), 그리고 끊임없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존재들의 세계인 여러 지옥계이다.
이 우주에 있는 대부분의 감각이 있는 존재(有情物)는 위의 세 세계에 살고 있으며, 인간계, 아수라계, 천계의 세 가지 상급 세계에 태어나는 축복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다.
전통적인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 영역은 전혀 별개의 존재 영역이 아니다. 어떤 삶의 형태에서 죽은 후에는 자신의 행위가 누적된 힘(karma, 業)에 따라 같은 혹은 다른 계에 태어난다.
한 삶에서 다음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의식의 미묘한 흐름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현생은, 감각을 지닌 존재로서 계속 윤회하는 맥락에서 보면 극히 단명한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세계도 무한히 큰 우주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티벳불교도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우주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연과학에 기초한 세계관에 익숙해 있는 사람일지라도, 티벳불교도들에게는 확고한 실재성을 갖는 이런 우주관에 주의를 기울여서 그것을 일종의 정신에 대한 상징적인 도해(圖解)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근대 과학의 우주관이 여타 사람들에게 실재적인 것만큼이나 이것이 실재적이다. 티벳인들의 세계관의 원천인 불교의 가르침은, 근대인에게 우주에 대한 과학적 묘사가 권위적인 만큼이나 권위 있다.
티벳인들이 불교를 받아들일 때, 그들은 단지 종교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받아들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티벳의 스승들이 제시하고 있는 불도(佛道)는 시종여일하게 이 기본적 세계관을 함축한다.
이러한 길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에서는, 다른 영역에 비해 인간 존재가 얼마나 많은 영적 가치를 지니는가를 자각(自覺)하라고 일깨운다.
인간으로 태어나게된 무한히 큰 행운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보라고 한다.
모든 다양한 삶의 형태 가운데서 붓다의 가르침으로 최상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이런 기회란 극히 드물 뿐 아니라 만약 이 기회를 잘 활용치 못한다면 무수한 생에서 다시는 이런 기회를 맞이하기 힘들다.
이같이 숙고해야만 하는 이유는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와 희소성을 자각함으로써 그 정신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토록 인간을 고무하는데 있다.
다음 단계에서는 인생의 가치에 대한 자각에 덧붙여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그 불가피한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진리(Dharma, 法)만이 사후의 자기 운명을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되풀이하여 생각하게 한다.
이 관법의 목적은 그가 현재는 인간이지만 죽음이 닥쳐와 우주 내의 다른 생명형태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지지 않으려면 수행을 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데 있다.
인간으로서의 삶이 귀중하면서도 동시에 덧없음을 확고히 의식하게 되면, 관법의 다음 단계에서는 세 가지 존재영역(地獄界, 餓鬼界, 畜生界)의 비참한 특성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이러한 영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고 또한 누구든지 그 영역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자각한다면 무슨 방법으로든 그런 운명을 피하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그의 마음은 내생에 계속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천계에 환생할 수 있도록 보장되는 길을 찾는다.
따라서 이 우주에 사는 것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업의 법칙에 대해 보다 깊이 숙고하게 되는 것이다.
티벳인들이 배우는 불교전적에는 업의 작용을 일으키는 심리적인 구조, 어떤 행위가 초래하는 여러 상이한 결과들 그리고 특정 행위를 윤리적으로 평가할 방법들이 세부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윤리적인 인과과정을 세세한 데까지 잘 알게 되면, 좀더 바람직한 존재 형태로 환생해서 불행한 세계에 떨어질 위험을 면할 수 있는 여러 행동을 취하는 데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불교의 가르침은 이 우주 내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운명을 보다 잘 인식하고, 아울러 그 운명을 조정하는 법에 대한 통찰력을 갖는 것에 그 목표를 둔다.
앞서 말한 숙고를 통해 어떤 이의 삶에 일단 기본적인 윤리적 지표가 주어지면, 붓다(Buddha, 佛 : ‘깨달은 자’라는 뜻), 다르마(Dharma, 法 : ‘붓다의 말씀 또는 진리’ 라는 뜻), 상가(Samgha, 僧 : ‘불교교단 또는 수행승’ 이라는 뜻)라는 세 가지 의지처에 귀의하게 된다.
이 세 가지 ‘보물’(三寶)을 믿음으로써 영적인 관심이 궁극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확실한 지주를 갖게 되는 것이다.
붓다를 믿음으로써 우주와 우주를 초월한 것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의 권위를 받아들이게 되며. 다르마를 수행함으로써 깨달은 사람(覺者 즉 붓다)의 가르침에 나타난 사고와 행위 원칙을 받아들이며, 상가에 귀의함으로써 다르마의 길에 굳건히 서있는 남녀들의 보살핌과 지도를 받게 되는 것이다.
티벳불교 특유의 의지처의 개념에 대해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모든 불교 전통에서 귀의의 원천으로 삼는 삼보(三寶) 외에 라마(Lama)라는 제 4의 귀의처가 덧붙여진다는 것이다.
‘라마’는 심각한 혼란을 야기해 왔던 개념으로 티벳 승려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이다. 실제로 이것은 ‘영적인 스승’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의 ‘구루’(guru)와 동의어이다. 따라서 ‘라마’는 불교의 이론과 수행의 면에 있어서 남을 이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수련한 사람에 대한 칭호이다.
심지어 라마는 꼭 승려일 필요는 없으며 실제 티벳 불교의 역사에서 몇몇 유명한 라마는 출가하지 않은 평신도였다.
티벳 불교의 수행에 있어서 라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불도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는 스승은 붓다와 똑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길을 따라 가면서 어떠한 진보를 이룬다면 그것은 모두 처음 그에게 이 길을 가르쳐 준 스승의 자비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스승의 또 스승으로 해서, 결국은 붓다에게까지 이어지는 스승의 계보를 통하여 가르침을 받아온 자신의 영적 스승이 없이는 불교전통의 지혜에 생생히 접촉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라마는 종종 붓다에 비견되며, 어떤 수행자의 실제적인 영적 수행에 있어서는 역사상의 석가모니(Sakya-muni, 釋迦牟尼 : 샤키야族 출신의 聖者 라는 뜻) 보다도 여러 면에서 더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티벳 불교도는 귀의처에 대해 맹세할 때, 붓다, 다르마, 상가에 앞서, 라마에 대해 귀의한다고 먼저 말한다.
귀의의 대상에 헌신하는 행위를 통해 특별히 불교적인 인생관을 받아들임으로써 붓다의 눈으로 이 우주를 바라보게 된다.
다른 존재계 어디에 태어나건 그것이 고통으로부터의 최종적인 해방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최상의 무색계에 환생하더라도 결국 다른 곳에 다시 태어나야 한다.
따라서 붓다는 이 우주에 살고 있는 자들의 운명을 ‘순환’(輪廻)으로 본다. 선행 혹은 악행의 힘에 이끌려 한 계(界)에서 다른 계로 계속 돌아다니는 것이다.
깨달음으로 이르는 길의 다음 단계는 욕망을 포기하는 단계이다. 여기서는 존재의 속성으로서의 고통 뿐 아니라 이 같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인식이 함께 수반된다.
가장 뚜렷한 원인은 업 자체의 힘이며 이것이 어떤 존재를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사정없이 몰아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업의 근원에는 의지가 있으며, 이 의지력의 뿌리는 바로 쾌락은 따르고 싫은 것은 피하려는 힘이다.
또한 더 깊이 살펴보면, 이 욕구하고 피하려는 힘은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을 끊는 것에서 비롯하여 삶에 대해 전혀 새로운 태도를 지니게 된다.
즉 무지와 욕구 및 회피를 동시에 뿌리 뽑기 위해 인내한다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악한 행위의 고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나머지 단계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제까지 기술한 의식의 상태를 계발하기 위한 티벳의 수행법인 관법(觀法)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수도의 각 단계에는 각각에 해당하는 통찰이 있다. 즉 인간생활의 소중함에 대한 통찰, 낮은 계의 지독한 비참함에 대한 통찰, 욕망에서 떠나야 할 필요성에 대한 통찰 등이 그것이다.
이 통찰들은 처음에는 분석적인 방법으로 얻어진다. 수행자는 이러한 통찰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이 통찰을 흐리게 하는 일상적인 그릇된 관념에 대해 정연한 설명을 듣는다.
수행자는 이 설명의 요체를 기억하고 그 의미에 대해 체계적으로 명상해야 한다.
매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일종의 정규적인 명상을 한다. 이 요체에 대해 숙고하고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검토해 볼수록 그것은 내면에 스며들어 자신의 삶이나 세계를 보는 시각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명상이 진전되면 여기서 계발시키고자 하는 통찰이 애써 끌어낸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평상시의 마음가짐으로 되는 단계에 이른다.
여기에 이르면 이 주제를 더 이상 지적으로 분석할 필요는 없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주의력 전체를 오로지 각성 그 자체가 시작되는 바로 그 점에 집중시켜야 한다.
주의력의 정도가 떨어지면 다시 명상의 요체를 간단히 훑어서 내면에서 길러지고 있는 각성을 다시 확고히 한다.
집중력에 의해 통찰은 점차 새로워지고 강력한 힘을 얻게되어 마침내 의식 내에 확고히 뿌리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티벳의 라마들은 명상으로 감성을 계발시키는 두 가지 수련단계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첫 번째 단계는〈분석적 명상(觀修行)〉으로, 수행자는 명상의 대상에 대해 반복해서 숙고하며 논의와 추론으로써 그것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집중적인 명상(止修行)〉의 단계로, 여기서는 대상에 대해 개념적으로 사고하기를 멈추고 대신 전력을 다해 분석하고 숙고를 통해 이룬 각성 자체의 상태에 주의력을 모은다. 이와 같이 각성의 집중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우선 기초적으로 사유하는 과정을 진행시키는데, 마침내 집중된 각성 상태에서는 사고의 산만한 기능은 스스로 사라져 버린다.
① 자비(慈悲)
근본적으로 티벳에서 우세한 불교 형태는 마하야나(Mahayana), 즉 ‘大乘’(큰 수레)이다. 이 전통에서는 자비 즉 자애로움이라는 특성과 다른 사람을 위해 깨달음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타적인 결단(Bodhicitta, 菩提心)을 강조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또한 대승불교도는 역사적인 실존 인물로서의 석가모니에서 벗어나 불타관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붓다의 깨달음의 여러 측면을 상징하는 수많은 붓다와 보살(菩薩)들을 인정한다.
대중적인 수준에서는 이들 붓다와 보살들을 단지 숭배와 기도의 대상으로 삼으나 좀 더 깊은 단계에서는 명상을 통한 의식의 특정 상태를 의인화한 것으로 이해한다.
수행자들은 이 것에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러한 특성을 계발시키는 데 도움을 받는다.
티벳의 천불전(千佛殿)에는 문자 그대로 수천의 붓다와 보살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티벳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Avalokitesvara)이다.
티벳인에게 ‘첸라지’(Chenrazee)로 불리는 관세음보살은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난다. 주로 네 개의 팔을 갖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 몸체는 빛나는 흰색이고 왼쪽 어깨에 사슴가죽을 댄 법의를 늘어뜨려 입었다. 보석을 쥔 두 손은 가슴께에 모으고 두 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올렸으며 오른손에는 수정 염주를, 왼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머리에는 다섯 가지 보배로 장식된 관을 쓰고 있으며 온몸이 후광에 싸여 연화좌로 받쳐진 하얀 달 모양의 쟁반에 앉아 있다. 붓다의 자비의 화신으로서 모든 존재(衆生)에게 은은하고 온화한 미소를 보낸다.
티벳인들이 관세음보살에게 품고 있는 특별한 애정은 선사시대 신화에도 잘 나타난다. 전설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이 원숭이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온 적이 있었다 한다.
그 원숭이의 왕은 독실한 재가불자로 수행을 하기 위해 티벳의 산으로 갔다. 그런데 동굴 속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그를 보고 그 곳의 마녀가 사랑에 빠졌다.
그에게 애정을 불러일으키려고 어느 날 마녀가 미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처음에 그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으나 자기와 결혼하지 않으면 나라 안의 생명을 모두 잡아먹겠다고 마녀가 위협하는 바람에 결국 그는 결혼하기로 했고 각기 다른 여섯 존재계에서 환생해 온 여섯 아이를 낳았다.
처음에 그 가족은 여기저기 가까운 곳에서 따온 야생과일을 먹고 살았으나 그것이 곧 동이 났다. 자식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원숭이의 왕은 관세음보살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그의 애원에 응해 관세음보살은 땅에서 자라는 많은 곡물들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을 먹고 살게 되자 원숭이와 마녀 사이의 자식들은 털가죽이 벗겨지고 꼬리가 없어졌다. 마침내 그들은 인간처럼 직립하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티벳 종족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이 종족의 기질은 두 선조-원숭이 왕과 마녀-와 관련되어서 원숭이 왕으로부터는 근면과 친절, 종교에의 열정이라는 자질을 물려받았고, 마녀에게서는 무뚝뚝함, 질투, 격정을 물려받았다고 한다105).
관세음보살과 영적 교류를 이루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며 그 중 한 가지를 택하여 관세음보살이 대표하는 마음의 특성에 초점을 맞춰 수행해야 한다.
티벳인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것은 ‘옴 마니 밧메 훔’(Om mani padme hum ; 아아, 연꽃 속의 보석이여, 란 뜻)이라는 만트라(Mantra, 眞言)를 음송하는 것이다. 순박한 농부에서부터 세련된 형이상학 박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티벳인들이 만트라를 왼다.
호흡에 맞춰 끊임없이 외며 종종 염주를 짤깍거리며 함께 외기도 한다. 보통 개개의 음절은 들리지 않고 율동적인 콧노래같이 들린다.
이 소리가 일터와 가정, 사람이 다니는 길과 금욕적인 수도원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원을 보면〈만트라〉라는 의미는 ‘마음을 보호함’이라는 뜻이다. 만트라를 되풀이 외움으로써 특정한 영적 주제에 주의력을 집중시킬 수 있다.
‘옴 마니 밧메 훔’의 경우는 관세음보살이라는 형태로 의인화된 붓다의 자비가 그 주제이다. 이러한 방법으로써 사람을 혼란시키는 유해한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호되어 어느 정도 내적인 고요를 얻으면, 수행자는 마음을 보다 각성되고 집중된 상태로 유지 할 수 있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옴 마니 밧메 훔’이라는 만트라의 기능은 여러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가장 기초단계에서는 다만 멀리 극락에 있는 외부의 신에 대한 기원일 뿐이다.
만트라를 계속 욈으로써 관세음보살이 그를 물질적인 고난이나 병으로부터 지켜주며 사후에 관세음보살의 정토에 환생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보다 깊은 단계로 접어들면 만트라란 사람의 마음을 자비의 수행에로 이끄는 수단이다. 최종적으로 보면 관세음보살은 자비 그 자체이며, 이 품성은 모든 생명체 속에 완벽하게 드러나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잠재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관세음보살과 연관된 보다 고차원적인 수행에 있어서는 관세음보살을 외부적인 힘이나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 자신과 동일한 천인(天人)으로 생각한다.
만트라의 개개 단어나 음절에도 역시 의미가 부여된다. 어떤 수행에서는 ‘옴?마?니?밧?메?훔’의 여섯 음절 각각이 여섯 가지 존재계와 상응하며, 각 음절에는 각 계를 상징하는 특정한 색깔이 대응한다.
만트라를 음송할 때 수행자는 각 음절에서 뻗어 나와 그 음절과 관련된 특정 계의 존재들을 비추는 무수한 광선을 상상한다.
이렇게 해서 만트라 수행을 모든 존재영역에 대한 자각으로까지 확장시키며 동시에 만트라를 음송할 때 지녔던 자기중심적인 생각들을 약화시킨다.
더욱이 이 빛은 고통받는 일체 중생에 대한 관세음보살의 가없는 자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와 같이 만트라를 외는 것은 기도자의 경건한 반복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통합된 영적 통찰을 발전시키려는 상징적이고도 복합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만트라를 해석하는 또 다른 방법은 각 단어가 지니는 상징적 의미를 살피는 것이다. ‘옴’은 먼저 붓다의 완전하게 통일된 몸과 말과 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 단어 ‘마니’는 ‘보석’이라는 산스크리트어이고 세 번째 ‘밧메’는 ‘연꽃’이라는 뜻이다. 보석과 연꽃의 상징적 의미도 여러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승 불교 체계 내에서 이 두 가지는 무엇보다도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두 가지 주제 즉,〈방편(方便)〉과 〈반야(般若)〉를 가리킨다.
방편은 보석으로 상징되며, 타인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에 뿌리를 두는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모든 측면을 말한다. 관용, 도덕적 행위, 인내, 자비 그 자체, 자애 등이 이에 포함된다.
연꽃으로 상징되는 지혜 즉, 반야는 지(止)와 관(觀)이라는 내적 특질을 의미하며. 그것을 통해 실재(實在)의 참 본성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 음절 ‘훔’은 오온(五蘊, Panca-skandha)을 상징한다.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인간의 기본 구성요소로 생각해 온 것이다. 그런데 깨달음의 상태에서는 이 오온이 현재의 오염된 상태로부터 다섯 디야니 붓다(Dhyani buddha, 五方勝佛)로 전환한다.
즉 깨달음의 청정한 측면과 각각 상응하는 것이다.
이상의 해석에 따르면 ‘옴 마니 밧메 훔’이라는 만트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전 과정을 상징적이고도 아주 축약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이 길이 하나의 과정이며 또한 전환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방편과 반야를 수행함으로써 생사의 윤회에 속박된 존재에서 붓다로 전환하게 된다.
붓다의 마음은 윤회로부터 자유로우며, 그 말과 행위는 타인에 대한 자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만트라는 관세음보살의 특성과 또한 그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수행의 본질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능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것은 수행자가 그 수행을 얼마나 철저히 내면화시키느냐에 달려있다.
단지 만트라만 외운다고 해서 방편과 반야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사유와 명상을 통해 이들 특질을 체계적으로 계발해 나가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자비는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 즉 방편일 뿐 아니라 대승불교의 전체적인 기반이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은 붓다의 마음 중 한가지 특질을 인격화시킨 것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 수행의 원동력을 구체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실제적으로 개인의 이러한 특질을 발전시키기 위해 티벳의 스승들은 여러 가지 관법을 가르친다. 자비심을 계발하기 위한 예비적인 기반으로 무엇보다도 먼저 아주 거친 집착하는 마음과 타인을 혐오하는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관계를 해치는 습관적인 편견과 선입관이 사라진 평정한 상태가 되도록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균형 있는 마음의 태도를 발전시키려고 자기 앞에 있는 세 종류의 사람-친구, 개인적인 적, 자기와 무관한 사람-을 상상하도록 가르친다.
이 사람들을 차례로, 그들을 향한 자기 감정의 성격을 집중적으로 검토한다. 각각의 경우에서 자기에게 비친 세 종류의 사람이란, 그들의 내적인 특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주관적이 태도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람은 ‘친구’, 저 사람은 ‘적’, 또 하나는 ‘남’ 이라고 뚜렷이 구별지음으로써 그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근본적인 인간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스스로 장벽을 만든 것이다.
자신이 덧씌운 분별의 장벽을 넘어 일체중생이 근본적으로는 동질이라는 것을 유념하도록 훈련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상태는 성숙하게 된다.
관법의 다음 단계에서는, 모든 존재란 본래 동등할 뿐 아니라 또한 본질적으로 자신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무수한 과거의 생애 동안 우리를 낳고 길러주신 어머니의 자애로움에 항상 의지해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그 통찰은 시작된다.
우리의 과거 생애란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유정(有情)들도 모두 어느 때인가 한 번은 우리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현생에서의 어머니를 보면 전생의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치렀을 자기 희생과 인간적인 고초를 자세히 생각해 낼 수 있다.
마음속에서 어머니의 자애를 확실히 깨닫는다면, 모든 존재들이 한 번은 이렇게 헌신적인 관심을 우리에게 베풀었었다는 것도 아울러 떠올리게 된다.
이 관법을 수행해 가는 동안 이생에서의 자기 어머니 같이 타인이 자신에게 친절하다는 느낌이 점차 강렬해지면, 마침내 혐오나 무관심 같은 감정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타인들이 본질적으로 친절하다는 인식이 마음속에 확고히 자리잡으면, 그들이 우리를 위해 베푼 만큼 우리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들 모두가 오염된 충동과 행위에 의해 현재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음을 생각한다면 마치 우리의 어머니가 고통에 처했을 때 우리가 느끼게 될 똑같은 감정을 그들에게도 느낄 것이다.
이러한 감정에서 출발하여 그들을 고통에서 자유롭게 하여 행복하게 만들고 싶은 열망을 갖는, 그런 과정을 통해 자비심 즉 타인을 고통에서 구하려는 의지, 자애로운 온정, 행복을 선사하려는 욕구가 마음속에 뿌리내리게 된다.
이 관법의 다음 단계에서는 자비와 자애로운 온정이라는 목적을 실제로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찾아내고자 한다.
우선 고통의 본질과 근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비가 지향하는 목적과 수단이 모두 달라질 수 있음을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 질병을 치유시키는 것이 목적이며, 병의 원인에 대한 적절한 처방이 수단이 되리라.
그런데 불교의 인생관에 비추어 보면 고통의 범위는 이생에서 경험하는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병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이란 윤회하는 존재가 갖는 기본적인 속성이고, 따라서 되풀이되는 생과 사의 수레바퀴에 개인을 묶어 놓는 업의 세력과 뿌리깊은 심리적 충동들을 근절시키지 않는 한 고통은 제거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윤회의 원인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자비와 자애로운 온정이라는 불교도의 목표가 완전히 달성될 수 있다.
앞의 단계에서 자비로운 관심이 벗과 적 또는 남을 가리지 않고 모든 유정에게로 확대되었다. 티벳인은 타인에게 느끼는 감사와 은혜의 느낌을 강조할 때 ‘모든 어머니 같은 유정물(有情物)들’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렇게 모든 존재의 고통에 대해 자비로워질수록, 존재계에서 겪는 고통에 대해 점점 더 넓게 그리고 깊이 알게 된다. 따라서 이런 고통의 일부만을 덜어 보겠다는 생각은 죄악이다.
그 가슴속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자비심과 자애로운 온정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모두 근절하도록 노력한다는 일견 불가능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결단의 태도를 ‘증상승의락’(增上勝意樂)이라 하는데, 수행자는 이 ‘뛰어난 의지’를 가지고서 모든 존재를 모든 형태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영원한 평화를 얻게 하려는 자비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이제 이런 고원한 포부를 실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일지 살펴보자.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하는 위치에 있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고통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자신의 혼란한 마음의 매듭을 풀지 못한 사람이 이웃의 매듭을 풀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비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선행조건은 다른 사람에게서 제거해 주려는 바로 그것을 자신에게서 먼저 제거하는 것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이것은 도덕적인 행동과 집중력, 그리고 지혜를 체계적으로 응용하여 모든 오염된 심리적 충동과 업의 흔적을 없애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수행자가 다만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해서 타인에게서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윤회하는 존재라는 속박 속에서 스스로가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하는 동시에 타인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남과 의사 소통하는 솜씨를 익히는 것도 필요하다.
해탈하는 지혜와 해탈하는 방법, 이 두 가지 능력이 최고도로 발달되는 것은 붓다의 지위에서이다. 왜냐하면 붓다는 실재(實在)의 본질에 대한 지혜를 통해 고통으로부터 해탈한 자이면서 동시에 아직도 존재계에서 다른 이들의 해탈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상승의락을 실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불위(佛位)를 얻고자 열망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열망이 가득 찬 마음 상태를 보리심이라고 한다. 일단 이런 태도가 꾸밈없고 자연스럽게 되면 수행자는 보살의 길에 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보살은 자신의 삶을 다른 이들이 깨달음을 얻는데 바친다.
② 지혜(智慧)
지혜의 목표는 생과 사의 윤회를 끊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지혜가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까닭은 되풀이되는 존재의 순환 속에 우리를 얽어매는 것이 바로 지혜와 반대되는 무명(無明)이기 때문이다.
무명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실제와 다른 모습으로 경험하도록 만든다. 무명에 뒤덮인 마음을 지닌 사람은 어두운 방에서 한 토막의 새끼줄을 뱀으로 알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과 같다.
무명 때문에 마음의 청정함이 흐려지고 우리는 혼란과 잘못으로 빠져들며 혼란스러운 감정의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뱀인 줄 알고 공포에 질린 사람이 갖가지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명 때문에 지적, 정서적으로 혼란된 사람은 비현실적이며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이것이 윤회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혼란 때문에 비합리적인 행동이 유발되며 비합리적인 행동 때문에 불쾌한 좌절을 경험하게 되며, 그런 경험으로 인해 다시 마음이 어지러이 혼란해진다.
이것이 생과 사 그리고 다시 태어남(還生)이라는 체계로 확장되면, 이러한 순환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우리는 한 존재계에서 다른 존재계로 끊임없이 내몰린다.
이 혼란을 풀고 비합리적인 행동과 고통을 낳는 연쇄반응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지혜를 통해 자아(自我)와 세계(世界)의 실제적인 모습을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 과정은 여러 수준에서 또 다양한 강도로 일어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수행해 나가는 모든 단계란 지혜를 길러나가는 과정이다.
실재에 대한 오해가 사라지면 지혜가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지혜란 상대적인 진리(俗諦)와 궁극적인 진리(眞諦) 모두를 그 대상으로 한다. 여하튼 윤회하는 존재의 뿌리에 박혀 있는 혼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신과 세계에 관한 궁극적인 진리인 진제(眞諦)를 파악해야 한다.
인도에서 티벳으로 전파된 모든 교파는, 이 진제를 구성하는 내용에 대해, 또한 그것이 속제(俗諦)와는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각기 독특한 견해들을 발전시켰다.
비록 이 견해들은 붓다가 설한 경전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교파에 따라 매우 다르다.
더욱이 자신의 입장을 지키고 다른 교파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벌인 토론과 논쟁에 대한 방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티벳인들은 잘 정비된 몇 가지 불교철학의 체계와 더불어 각 교파를 옹호하는 다량의 논쟁 문헌을 상속받았다.
결국 티벳에서는 자체적으로 불교철학을 더욱 발전시키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대부분 인도의 선구자들이 확립시켜 놓은 철학적 사유와 이론의 테두리 안에 머물렀다.
전통적으로 티벳인들은, 주요한 불교철학의 학파로 비파사사(毘婆沙師), 경량부(輕量部), 유식학파(唯識學派 또는 唯心學派), 중관학파(中觀學派)의 넷을 꼽는다.
이 중 전자 둘은 소승불교(小乘佛敎) 전통의 대표로, 후자 둘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전형으로 여긴다.
티벳인들은 이 네 가지 사상체계를 모두 배우지만 실천적인 목적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경량부, 유식, 중관의 철학이다.
티벳 승려들은 철학적?교리적 훈련의 기초로 먼저 경량부의 이론을 배운다. 용어를 신중하게 정의하고, 논리학과 토론법을 학습하며, 인식론의 주된 이론에 대한 설명들을 배우는 것이다.
비록 경량부라는 틀에 의거하여 배우기는 하지만, 경량부 철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불교 체계에로 확장된다. 논리학이나 토론법 및 인식론에 있어서 훈련은 이후의 철학적인 연구에 대한 기초로서도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어린 학생이 이 과제를 확실히 파악하도록 하는 데에 여러 해가 걸리기도 한다. 실제로 학생들은 철학적 연구에 필요한〈도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기술을 배웠으므로 이후에 난해한 대승불교 사상을 연구할 때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경량부의 이론 자체도 상당히 중요하므로, 유식과 중관을 배우기 전에 면밀하게 배울 필요가 있다.
경량부의 입장은 일종의 ‘현상론적 실재론’(現象論的 實在論)이라고 할 수 있다.
경량부 철학자들은, 궁극적인 진리란 개념을 통하지 않고 직접적인 인식을 통해 바로 지각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형태, 소리, 냄새, 맛, 감촉같이 감각적인 지각으로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여러 수준의 직접적인 정신적 지각을 통해 인식되는 것을 포함한다.
이렇게 궁극적으로 진실한 형상(法106), Dharma) 개개는 무상하며, 원인(因)과 조건(緣)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파괴될 운명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필연적으로 다른 것의 원인이 된다.
그것들은 자체의 실체성을 지니고 있고 주관적이거나 개념적인 어떤 조건과도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경량부에 따르면 상대적인 진리(속제)란 직접적인 인식을 통해 곧바로 지각될 수 있는 궁극적인 실재에 사람들이 덧씌운 심리적 구조물일 따름이다.
관념이나 추상적인 개념, 일반론 따위의 심리적 구조물은 무상과 연기(緣起)라는 역동적인 과정 속에 포함되지 않는 영속적인 현상이다.
속제의 전형적인 예로는 ‘막히는 장애물의 부재(不在)’라고 단순히 정의할 수 있는 공간(空間)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공간 개념은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감각적 지각에 기초하여 마음이 구성해서 직접 경험세계에 끼워 넣은 것이다.
이런 공간은 형태나 소리처럼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는 실재한다. 형태나 소리가 공간 내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 그 움직임을 막는 장애물이 없다고 추론하는 것은 옳다. 따라서 추상적 공간은 상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비록 궁극적 진리라는 다듬지 않은 원재료에 우리가 투영시키고 있는 이 상대적 진리가, 궁극적 진리에 대한 직접적 순수인식을 모호하게 하지만 그들이 실제적으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서 궁극적 진리를 은폐하는 것은 우리가 궁극적 진리에 덧붙인 그릇된 정신적 구조물들이며 이것들이 궁극적 진리와 모순되는 것이다.
우리의 실재인식(實在認識)을 왜곡하고 따라서 세계와 우리 자신을 실제 모습과 다른 것으로 보이게 하는 그릇된 정신적 구조물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
이 중 첫째 것은 영원이라는 관념인데 실재로는 무상한 대상 세계에 잘못 적용하게 된다(常).
두 번째는 즐겁지 않은 것에 적용하는 즐거움의 관념이다(樂).
세 번째는 무아인 것에 우리가 적용하는 자아라는 관념이다(我).
이 세 가지 뿌리깊은 관념은 기본적으로 무상(無常)하고 고통스러우며(苦), 무아(無我)인 궁극적 진리와 완전히 반대되는 허구이다 .
그러므로 궁극적 진리를 직접적으로 명료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실재의 무상?고?무아라는 본성을 왜곡하고 가리우는 상?락?아(常?樂?我)의 그릇된 관념을 마음속에서 제거해야 한다.
이것은 경량부 뿐만 아니라 모든 불교 교파의 목표인 것이다. 그런데 경량부가 다른 교파와 구별되는 것은 궁극적 진리의 내용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서다.
경량부에서는 무상하고 고통스러우며 무아인 무수한 현상(法)들 그 자체가 궁극적 진리라고 하는데 반해, 중관과 유식에서는 이런 현상들을 상대적 진리라고 여길 뿐이다.
대승학파인 유식(唯識)의 기본적 교리는 ‘세상 만물은 오로지 마음 뿐’이라는 것이다. 존재의 물질적?정신적 요소들이 고유한 독립적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량부와는 달리 이 유식에서는 마음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물질적 실체는 없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마음속에 근원이 있는 것이다. 마음과 물질을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가지의 분리되고 무관계한 현상으로 보는 태도에서 모든 혼란이 야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의 본질에 대한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상?락?아 라는 커다란 오해를 버리는 것과 더불어, 외적으로 현상세계가 존재한다는 뿌리깊은 오해도 아울러 제거해야 한다.
마음과 물질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한 다른 모든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유식에서는 궁극적 진리란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원론적 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과 그 대상이 두 개의 독립된 실체라는 오해를 버려야 한다. 이 교파에서는 물질-형태?소리?냄새 등 비정신적 현상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이 마음이라는 실체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책상을 볼 때 책상이라고 생각하는 지각작용과 책상 자체는 완전히 구별되고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책상’과 ‘책상이라는 지각’은 마음속의 한 가지 원천에서 나온 불가분의 것으로 양자 모두 실재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두 개의 독립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명(無明)이라는 습관적인 힘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진리란, 외부세계나 모든 정식적 상태와 같은 무상한 현상들 그리고 이런 현상들에 덧씌워져 대응하여 구성되는 관념과 개념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우리 자신은 상대적 진리의 범주로 떨어진다.
이런 현상들은 바로 마음이라는 원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주객분리에서 벗어난 상태를 궁극적인 진리라고 판단한다.
자아와 우주의 본질에 대한 습관적 개념들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계가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의 마음을 떠나 외적, 물리적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유식철학에서는 마음의 ‘외부’와 ‘내부’사이의 구별은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며 그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없다. 마음의 본질만 이해하면 우주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승교파의 두 번째는 중관파(中觀派, 또는 中道派)이다. 중관파라는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이 철학의 목적은 극단적 입장을 떠나 중도적인 관점에서 사물의 실재를 인식하는 데에 있다.
이 학파에 따르면, 경량부와 유식철학의 관점은 모두 극단적인 것이어서 분석적인 비판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다.
경량부의 실체관은 그 체계의 정당성마저 의심케 하는 몇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중관학파에서 지적하는 첫 번째 약점은 존재의 개별적이고 현상적인 요소들을 궁극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만약 형태라든가 소리 또는 심리상태 등이 이런 궁극성을 갖는다면, 이 현상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고찰함으로써 궁극적인 실체를 보다 뚜렷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번 이렇게 분석해 보면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모든 단일체는 수많은 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어떤 궁극적인 주체도 의미가 점점 희박해진다 나아가 이 부분들도 다시 원자와 같은 요소들로 나뉠 수 있으며 그것조차 머리 속에서는 무한히 분석될 수 있는 것이다.
경량부의 두 번째 큰 결점은 존재가 드러나는 데 마음이 기여하는 역할을 무시하는 점이다. 예를 들면 우리 마음속에 형성된 책상이라는 관념이 없이도 책상을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나 개념이라는 도구와 전혀 무관하게 어떤 존재를 설명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추구함으로써 중관부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여러 독립된 요소들에 의해 구성되는 경량부의 실체관이 납득할 수 없는 것임을 드러내려고 한다.
중관 철학자들은 유식학파의 교리에 대해서도 역시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몇 가지 의문점을 제시한다.
유식철학은 존재를 창출하는 데 마음이 맡은 역할을 알고는 있으나 그 중요성을 너무 과장한다고 비판한다.
그들에게는 마음이야말로 다른 모든 현상이 궁극적으로 수렴될 수 있는 유일한 실재이다. 따라서 경량부에서 존재요소를 그렇게 생각하듯이, 유식에서는 마음을 독립된 궁극적 실재로 간주한다. 그런데 마음이, 마음에 나타나는 어떤 대상과도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주장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라는 마음의 필연적인 속성과는 상치된다.
그래서 의식상태를 어떤 것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같이 중관부에서는 중도적인 입장에 도달하기 위해 극단적인 경향을 보이는 모든 입장에 대해 체계적으로 비판을 가한다.
극단주의는 모두 자신이 믿는 바가 다른 조건들과는 전혀 관계없이 궁극적인 타당성과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중관부에서 보는 바로는, 이제까지 궁극성을 주장해 온 어떤 것도 실은 궁극적이고도 내재적인 자기 동일성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궁극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공(空, Sunyata)이라고 한다. 나아가 ‘공’조차도 어떤 독립된 고유의 실체(自性)를 갖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중관에서는 ‘공’을 궁극적 진리라고 여기지만, 그것을 궁극성이라는 고정적 특질을 지닌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공'과 별개의 모든 현상들을 중관부에서는 단지 상대적으로 또는 편의적으로 진실한 것으로 여긴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에서 진실한 것을 통하는 것을 상대적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떠어떠한 특성을 지닌 대상은 책상이다.’ 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의 책상은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므로 이런 표현은 상대적으로만 진실하다.
실제로 이런 경우를 살펴보려고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면, 우리의 상식적인 판단기준이 부당하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우리가 책상의 각 부분에서 ‘실제’의 책상을 찾으려 한다든가, 책상이 의식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해 보려고 하면 곧 우리는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가설의 틀이 와해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결국 궁극적이고 불멸한 핵심으로서의 자성(自性)을 지닌 것은 없으며 대상을 지각하는 의식과 무관하여 존재하는 책상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불교 철학에 대해 이상과 같이 간략한 개관은 여러 논의들 중에서 뚜렷한 일부분만을 다룬 것이다. 교리 연구에 뜻을 둔 티벳 승려는 난해한 불교 사상 전체에 정통하기 위해서 20년 이상을 정진해야 한다.
교리라든가 각 학파의 주된 관점을 배우는 외에도, 깨달음으로 가는 여러 수행법과 일종의 불교현상론이라 할 수 있는 아비달마 논서들, 승단의 계와 율과 같은 과목도 광범하게 공부해야 한다.
티벳인들이 이런 연구를 하는 데는 각 국의 학자들이 편찬한 주석서(論, Sastra)를 일차적인 기초로 삼는다. 인도의 주석서도 참고하지만 경전(經, Sutra)자체에 대해서 세부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들은 붓다가 설법을 행한 의도는 주석들 속에 가장 확실히 표현되어 있으며, 처음부터 복잡하고도 일견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경전 내용을 읽기 시작하면 초보자들은 점점 더 혼란에 빠지게 되리 뿐이라고 생각한다.
주석은 경전 속에 감춰져 있는 보물을 여는 열쇠이다. 따라서 교리학습을 할 때 맨 처음 해야할 일은 이 열쇠를 얻는 것이다 한번 이것을 얻으면 경전의 난해함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된다.
그러나 불교의 최종 목표가 교리적인 연구나 철학적 탐구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훈련과정은 연구와 논리적 탐구로부터 얻어지는 분석적 지혜를 계발하도록 기여할 수는 있으나 가장 뿌리깊은 윤회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 주지는 못한다.
이 일은 명상으로부터 얻어지는 지혜가 해야하는 일이다. 연구하고 탐구한다는 것은 실로 이러한 지혜에 굳건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며, 이것이 지혜를 대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개개인의 역량과 성향에 따라 명상적 지혜를 계발시키는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있다. 지적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먼저 불교철학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은 궁극적 진리의 본질에 대해서 분석적으로 이해해보도록 권장한다.
여기서 티벳 전통은 대부분 중관부의 관점을 중시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유식적인 요소를 가미하기도 하고, 혹자는 두 사상 체계에 대해 독자적인 견해를 발전시켰다.
일단 수행자가 확고한 지적 통찰을 얻게되면 그 다음은 정신활동을 멈추고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지’(止, samatha)를 수련하도록 가르친다.
이 때 모아진 집중력과 분석적 통찰을 결합시켜 의식의 가장 깊은 영역까지 그 통찰이 미치도록 한다. 나아가서 집중력이 지속되면 그 힘에 의해 성찰의 분석적 측면은 감쇄되어 마침내 소멸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자는 궁극적 진리에 대해 개념적인 것이 아닌 직접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며 따라서 뿌리깊은 습관적인 힘(習氣)과 무명(無明)을 근절할 수 있다.
지적 분석을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여러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닦도록 가르친다. 보통 처음에는 지(止)를 수련한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가라앉고 확고하게 되면 이어서 간단한 일련의 추론이나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혼란된 사고와 충동의 장막 뒤에 감추어진 궁극적인 진리에 바로 이르도록 한다.
이렇게 통찰을 얻는 가장 잘 알려진 방법으로는 ‘마하무드라’(Maha-mudra)와 ‘최원만’(最圓滿, Tib. dzog-chen, 족첸)의 가르침을 들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마음의 기본적인 본질을 실현하는 매우 직접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밀교 수행과 곁들여서 가르쳐진다.
③ 탄트라-밀교
흔히들 티벳불교는 일종의 탄트리즘일 뿐이며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는 티벳의 고유한 무속신앙과 곧 습합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이런 견해들은 요 근래 티벳불교에 대한 신빙성 있는 문헌이 증가함에 따라 수정되고 있지만, 불교에 있어서 탄트라 수행의 기원과 역할에 대해 아직도 상당한 혼란이 남아 있다.106)
앞 절에서 보았듯이 티벳불교는 그 기본적인 방향과 외형이 인도 불교의 고전적 전통에 확고히 기반을 두고 있다.
세계관과 인간의 존재 이유는 탄트라나 티벳의 토속 신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불교 사상에 따라 결정된다.
더군다나 탄트라 가르침 자체도 고유 문화의 산물이 아니라 인도에서 전래된 것이다. 주된 탄트라 경전 대부분은 산스크리트어에서의 번역본이며 밀교 수행의 계보는 인도 스승에서부터 이어져 온다.
인도와 마찬가지로 티벳인들도 밀교의 가르침은 석가모니 자신이 처음 교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깨달음을 얻은 존재가 많은 모습으로 동시에 현현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교리에 따라서 석가모니가 특별한 밀교적 형태로 화현하여 선택받은 제자들에게 비전(秘傳)의 가르침을 베풀었다고 믿는다.
붓다가 가르친 밀교는 전수자들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지혜를 전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또한 인간이 충분히 진보되어 그 땅에 널리 퍼지게 되기까지는 인간계가 아닌 영역에서 보존되어 왔다고 한다.
티벳밀교의 시조는 인도인인 빠드마삼바바라 할 수 있다.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빠드마삼바바는 연꽃 송이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는 붓다가 열반한 8년 후에 지금의 북 파키스탄 지방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그가 가진 탄트라 힘 때문에 천 년 이상 살았다고 한다.
또한 많은 티벳인들은 그가 아직도 랏사 지방에 살아 있어서 고도의 영적 성취를 얻은 사람들은 그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9세기에 티송 데첸 왕의 초청으로 티벳에 왔다. 그에게 부과된 임무는, 최초의 주요 수도원인 삼예(Samye)사원을 짓는 데에 방해하는 악령을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이 악령의 힘을 격파하고 나서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대승불교와 탄트라의 가르침을 설파하였고 또한 불교 전파를 방해하는 그 지방의 악령을 굴복시켰다.
탄트라 수행에서 얻은 힘을 보여줌으로써 빠드마삼바바는 고유의 무속(巫俗)사제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고, 티벳인들의 종교적인 심성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던 영성(靈性)의 수준에 곧바로 호소할 수 있었다.
그가 반불교적인 악령의 힘을 ‘굴복’시키고 ‘개종’시킨 의미는 티벳인들에게 보다 고차원적이고 보편적인 불교의 가르침을 소개함으로써 그들의 심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무속신을 부셔버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 교리나 철학을 공부하는 학자들과는 달리 불교의 가르침을 순수 개념적 형태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상징적 형태로 구체화시켰다.
빠드마삼바바는 탄트라의 힘이라는 매체를 통해 불교를 전래함으로써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티벳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자신이 일단 굳건한 형태로 구체화하고 체험한 종교적 진리에는 쉽게 반응하는 티벳인들의 내면적인 영적 성향 때문에 탄트라는 곧이어 대중 속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불교의 가르침은 티벳인들 속에 살아있게 되고 절대적인 사상과 교의로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티벳불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한 탄트라의 등장이 아니라, 비탄트라적인 것과 탄트라가 하나의 체계적인 전체로서 통일하는 방식이다.
티벳의 주요학파들은 각기 인도로부터 전래된 여러 다양한 전통들을 결합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한 총괄적인 구도를 제시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탄트라’(tantra)라는 산스크리트어는 탄트라 가르침이 수록된 문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티벳인들이 ‘탄트라’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대부분 주요 경전을 가리키는 수트라(sutra)와 구별되는 일련의 불교 문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
탄트리즘’과 ‘탄트라 불교’라는 말은 현대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로 티벳어에는 정확히 이에 대응하는 표현이 없다.
티벳인들은 탄트라 문헌들에 수록된 가르침과 수행법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밀주’(密呪, guhyamantra)라는 표현을 쓴다.
탄트라 문헌 속에서 가르치는 수행을 활용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일러 ‘금강승’(金剛乘, Vajrayana)이라고 한다.
탄트라 문헌에는 강규, 즉 석가모니의 말씀을 모은 경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4부로 나뉜다. 각 부는 모두 탄트라를 수행하는 각 단계를 묘사하고 있는 여러 글들을 담고 있다.
그 4부란 크리야 탄트라, 챠리야 탄트라, 요가 탄트라, 그리고 아누타라요가 탄트라이다. 4가지 탄트라 문헌의 교의는 모두 티벳에 보전되어 있으나, 티벳인들은 실제 수행에서는 크리야 탄트라와 아누타라요가 탄트라를 주로한다.
닝마빠에서는 더욱이 아누타라요가 탄트라 대신 마하 요가(Maha Yoga), 아누 요가(Anu Yoga), 아티 요가(Ati Toga)의 세 가지 내면적 탄트라를 들고 있다.
이들 탄트라 가르침의 4가지(닝마빠의 경우 6가지) 부분은 일차적으로 신격107)(神格, deva)과 맺는 관계의 유형에 따라 계위가 나뉜다.
여기서 신격이란 말은 기독교나 힌두의 신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이것은 특히 붓다로서 인격화되고 구체화된 빛나는 상징적 존재를 가리킨다.
탄트라를 수행하는 목적은 첫째로 어떤 사람을 깨달음의 상태로 들어서도록 하고 나서 점차적으로 그 상태를 자신의 의식 속으로 수렴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신격(神格)과 일치되는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얻어지며 신격이 상징하는 특징에 대한 통찰이 점차 심화되어 자기 자신의 것으로 되는 것이다.
탄트라에서 깨달음을 통해 얻는 관계란 원인과 결과라는 형식이 아니며 인격 상호간의 굳건한 관계라는 형식을 취한다.
특히 탄트라 문헌의 네 부분 각각에서는 이러한 신격과의 관계 유형을 남?녀간의 성적 결합의 단계와 비교하면서 뚜렷이 설명하고 있다.
우선 크리야 탄트라를 수행할 때에는 자신과 분리되어 주체성을 갖는다고 여기는 신격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집중한다.
자기 앞에 있는 공간에 신격을 재현하여 영상화하는 법을 배우며,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자신의 마음의 성질에 대해 깊이 명상한다.
그리고는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찬미와 기도를 올리며 만트라를 음송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빛으로 해체되어 자신의 육체?언어?마음속으로 녹아 들어오는 것을 상상한다.
이 탄트라의 계위에 속하는 신격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觀世音菩薩도 같은 인물이다), 문수보살(文殊菩薩, Manjusri), 금강역사(金剛力士, Vajrapani), 금강살타(金剛薩?, Vajrasattva), 따라(多羅, Tara) 등이다.
그들은 각각 자비?지혜?힘?청정함?깨달음의 작용을 상징한다.
크리야 탄트라는 더럽고 오염된 인간조건과, 청정하며 더럽혀지지 않은 신격이 대조되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격과의 관계 정립을 통해 그들이 대표하는 특질을 흡수해 가면서 점차로 자기 자신에게서 더러움을 제거하여 결국 신격의 상태에 이르고자 한다.
그러나 아누타라요가 탄트라를 훈련하는 데에는 신격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즉 신격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고 자신이 사는 곳과 신격의 정토를 동일시한다.
‘자신이 곧 신격’이라는 자부심을 기르기 위해 신격과 다르다는 어떤 생각도 버려야 한다. 그런 수행을 통해 자신이 하는 행위를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의 행위로 여기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 방식은 아누타라요가 탄트라에만 독특한 것으로, ‘붓다의 삼신108)(三身)을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삼는 것’이라 부른다.
다시 말하면 깨달음을 먼 목표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 현 존재의 매 국면 내에서 깨달음을 이루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탄트라 수행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신격과 진정한 합일을 이룸으로써 자신의 정신이나 말이나 몸으로 드러나는 표현이 붓다의 깨달음이 상태를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합일을 실현하는 것은 깨달음 자체를 성취하는 것과 동등하다.
신격들과 합일하는 여러 다양한 단계는 깨달음을 실현하려는 탄트라의 독특한 접근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티벳불교를 돌아보면 자비와 지혜를 점진적으로 습득하는 것도, 깨달음의 최종 결과도, 대승 경전에서 묘사되는 것과 같다.
수트라와 탄트라 문헌들과는 그 목표의 본질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 다를 뿐이다.
티벳인들이 대개 탄트라 문헌의 가르침을 수트라의 교리보다 우위에 두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즉 탄트라 수행의 결과가 어떤 점에서 다르거나 우월해서가 아니라, 탄트라 수행의 ‘방법’이 비탄트라 수행법보다 짧은 시간 내에 신속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월한 것이다.
그래서 금강승을 ‘신속한 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신속한 방법은 단지 쉽기만 한 지름길은 아니다. 수행자에게 최고의 노력을 요하는 모진 수련이 요구된다.
신격과 합일하려면 첫 단계를 수련하기 전에 엄격한 도덕적 계율을 지킬 각오가 되어야 하며 길고 험한 예비단계를 거쳐야 한다.
출가를 위한 기본적인 자질을 배양해야 할 뿐 아니라, 이타적인 보리심109)일으켜야 하고, 궁극적인 진리에 대해 일정 수준의 통찰력을 기른 후에 또 특수한 다섯 가지 예비 수련을 해야 한다.
그 예비 수련이란 첫째 오체투지(五體投地)를 오십만 번 행하고, 둘째 오백 음절로 된 금강살타 만트라를 십만 번 암송하고, 세 번째 불?법?승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맹세를 십만 번 읊조리고, 네 번째 수행자 각각의 스승(Lama)이 내려준 만트라를 십만 번 암송하는 것이다.
이 예비수련의 목적은 탄트라 수행에 대한 수행자의 결심과 신념을 강화시키고 그 마음속에서 수행을 방해하는 성향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일단 예비 수련이 끝나면, 어느 한 신격의 만달라110)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입문, 즉 ‘관정(灌頂)’이란 해당 신격과 관련된 수행에 들어가기 위해 탄트라 전수자로부터 권위를 부여받는 과정이다
이것은 전수자가 그 신격의 상태를 실현했음을 수행자가 완전히 알아보아야만 가능하다. 한 신격의 만달라는 그 신격의 독특한 세계와 같은 것이다.
흔히 만달라는 대칭인 원형의 형태로 되어 있지만 실은 실제의 만달라계(界)를 2차원의 다이아그램으로 단순화시킨 것이다. 실제로 만달라는 거대한 공간이며 그 정 중앙에는 천인이 사는 궁전이 있다.
만달라 전체는 신격된 지혜의 현현(顯現)이며 그 깨달음의 상태와 분리될 수 없다. 또한 투명하고 빛나는 세계이며, 그 각 부분 부분은 모두 깨달음의 모습을 상징한다.
신격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아누타라요가 탄트라의 첫 번째 기본단계는 자신과 세계에 대해 가졌던 ‘일상적’ 관념들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자신을 신격으로, 그리고 이 세상을 만달라로 여기고 생각하는 것을 배움으로서 이것은 달성된다. 이렇게 일상적인 생각들을 전환시키려면 신격과 만달라의 각 부분 부분을 계속해서 영상화하고 조합해 나가야 한다.
순수하고 텅 빈 공간을 확장해 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한 부분에서 부분으로 신격과 만달라의 형상을 현현해 내도록 수련한다.
모든 형상과 색채를 수행자가 손을 뻗어 만질 수 있다고 느낄 정도로 사실적으로 보일 때까지 마음의 눈에 확고하게 고정한다.
그리고 수행자는 이 우주를 조각조각 분해한다. 만달라의 외부계는 점차 안으로 녹아 들어오고 다시 신격 속으로 녹아 들어온다.
그러면 실격은 점차 그의 마음 정중앙점으로 흡수되는데, 이는 최종적으로 텅 빈 공간 속으로 다시 분해되어 버린다.
자신 및 세계에 대한 일상적인 관념을 전환시키는 외에 신격과 만달라의 형태를 반복해서 영상화시키고 분해하는 수행은 집중력과 상상력을 강화시켜준다.
그런데 이 영상이 수행자에게 아무리 생생하게 느껴진다 해도 오로지 집중된 상상력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수행자가 깨달은 존재와 그의 세계의 외적 형상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제 이 형상에 깨달음의 실질적인 힘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렇게 신격과 만달라의 모습을 영상화하는 탄트라 수행의 첫 단계를〈생성의 단계(生起次第)〉라고 하며 이러한 위에서 깨달음이 실현되는 최종단계를〈완성의 단계(圓滿次第)〉라고 한다.
아누타라요가 탄트라의 가르침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육체와 정신을 삼중(三重)구조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육체와 정신에는 거친 수준, 미세한 수준, 극히 미세한 수준이 있다. 거친 수준이란 육체로 보면 물리적 형체에 해당하며, 정신으로 보면 정상적으로 깨어있는 의식 상태를 말한다. 미세한 수준이란 생명력(prana), 혈맥(nadi), 챠크라(cakra)를 말하며, 정신에서는 꿈꾸는 상태를 말한다.
극히 미세한 수준은 심장 속의 불멸의 에너지 방울(bindu)이며, 정신적으로는 깊은 수면상태의 의식이다.
수트라에서의 불교 수행이란 대체로 물리적 존재와 깨어있는 의식인 거친 수준에 한정된다. 그러나 탄트라에서는
특히 완성의 단계 동안에는 육체와 정신 모두 미세한 내지 극히 미세한 수준에서 수행하도록 한다.
이렇게 육체와 정신을 여러 층으로 분화시킴으로써 심신(心身)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불교 이해 또한 달라진다.
육체와 정신은 단지 거친 수준에서만 서로 다르고 분리된 것이다. 그러나 미세한 수준에서는 정신을 생명력과 분리해 볼 수 없다.
정신 혹은 의식이 있는 곳에는 항상 욕망 내지 충동을 동반하는 미세한 육체적 에너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극히 미세한 수준에서는 마음과 몸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정신과 육체란 단일한 현상인데 점차 거칠어져 가는 과정을 통해서 둘 간에 분화가 생기고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육체와 정신에 대한 견해를 통해 죽음에서 환생하는 과정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육체 및 정신의 세 수준은 죽음, 죽음과 환생의 중간기, 즉 중음(中陰, Tib. bardo)의 상태, 그리고 특정 계로 환생하는 세 단계에 유비(類比)해서 이해할 수 있다.
24시간 동안에 육체와 정신은 죽음→중간기→환생의 과정과 같은 단계를 경험한다. 즉 모든 의식과 에너지가 심장으로 모여 깊은 수면에 빠지는 것은 죽음과 같고, 깊은 수면에서 빠져 나와 꿈을 꾸는 것은 중간기와 같으며, 깨어나서 외부 세상과 육체를 의식하는 것은 환생에 비견된다.
두 경우 모두 해체와 생성의 동일한 유형을 취한다. 죽음과 깊은 수면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통일되고 극히 미세한 형태로 작용하며, 중간기와 꿈꾸는 동안에 몸과 마음은 미세한 수준으로 움직이며, 환생과 깨어있는 의식에서는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거친 상태로 나타난다.
인생을 이같이 기본적인 유형으로 규정하고 나서, 탄트라에서는 붓다의 삼신설(三身說)을 철저히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해 나간다.
전통적인 대승의 교리를 따르면, 이 삼신(三身, trikaya)은 붓다의 세 가지 기본적 측면을 나타낸다. 법신(法身)은 보편적이고 근본적이며 깨달음의 영적인 핵심이다.
보신(報身)은 정토에 계시는 영묘한 붓다의 모습이며 고도의 단계에 있는 보살만이 직접 접할 수 있다.
그리고 화신(化身, 혹은 應身)은 실제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물리적인 모습이다. 탄트라 가르침에서는 붓다의 삼신이 육체와 정신의 세 수준 및 죽음?중간기?환생의 세 가지 과정과도 관련된다.
대승 경전의 약간 형이상학적인 해석과는 대조적으로 탄트라의 권위자들은 깊은 수면?꿈?깨어있음의 과정과, 죽음? 중간기? 환생의 과정에 기반이 되는 해체와 생성의 원칙이 법신? 보신? 화신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탄트라 수행의 목적은 깊은 수면? 꿈? 깨어있음 그리고 죽음?중간기?환생이라는 오염되고 불만족스러운 과정을 법신? 보신? 화신이라는 정화된 측면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수트라에서 가르치듯이 먼저 삶과 죽음의 윤회로 몰고 가는 힘을 끊고서, 다음에 법신이라는 초월적 상태를 실현하며 끝으로 존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보신과 화신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을 죽음과 중간기와 환생으로 이끄는 해체와 생성의 과정은 법신이 보신과 화신의 모습을 취하도록 하는 바로 그것과 본질적으로는 같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트라에서는 욕망과 증오의 힘을 극도로 제거하지만 탄트라에서는 에너지와 의식의 보다 미세한 수준이 단지 거칠게 나타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들의 중성적인 활동적 본성을 파악하여 정신의 건전한 자질로 재구성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육체와 정신의 활동에서 미세하거나 극히 미세한 수준의 움직임에 대해서 우리는 보통 의식하지 못하거나 통제하지 못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완성의 단계에서 명상의 힘을 통해 미세한 혹은 미세한 수준의 정신과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고양시키는 여러 방법을 배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시작하기 전에〈생성의 단계〉에서 신격과 만달라의 형상을 생성?분해하면서 개발한 집중력을 완전히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존재의 육체적 정신적 힘을 미세한 내지 극히 미세한 수준에서 실제로 고양시키고 효율적으로 변환?재조정하는 능력은 그러한 집중력을 통해서만 습득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생성의 단계는 깨달음을 준비하기 위한 리허설과도 같다. 죽음? 중간기? 환생의 과정을 법신? 보신? 화신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세밀하고도 상징적으로 연습해 보는 것이다.
그 다음에 잇따른 완성의 단계는 실제 공연으로 비유될 수 있다.
완성의 단계로 진행한 수행자는 미세한 및 극히 미세한 수준의 의식을 활동시키기 위해 육체의 에너지 조절에 대해 여러 수행을 해야 한다.
이 수행에서는 특히 극히 미세한 수준에서 육체 및 정신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다른 육체적?정신적 기능이 발생하는 심오한 근원이다.
이것을 달성하려면 거친 내지 미세한 수준의 모든 에너지와 정신을 모아서, 심장에 있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에너지 방울로 분해시켜야 한다.
이 과정은 죽음의 과정과 유사하다. 이 수행에서 채택하는 방법의 하나는 성적 흥분을 통해 생성되는 강력한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적’(性的) 수행은 절대로 난잡하게 배워서는 안되며 완성단계라는 고도의 수준에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
일단 극히 미세한 수준에서 육체와 정신이 활성화되고 나면 그것의 중성적인 상태에서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집중된 자각 상태로 전환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수행자는 법신의 기초를 확립하며, 탄트라 식으로 말하면 신격의 마음 가장 깊숙한 수준과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상태를 이룬다.
그리고 나서 미세한 내지 거친 수준의 육체적?정신적 활동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미세한 수준에서 수행자는 신격과 만달라의 빛나는 모습을 다시 영상화한다. 이것은 붓다의 보신의 측면으로서, 꿈과 그리고 죽음 환생의 중간기에서 변화된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물질성과 깨어있는 상태의 거친 수준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붓다의 화신의 측면으로 깨어나서 신격의 모든 측면과 합일을 이루고 전환하는 과정을 끝맺는다.
아누타라요가 탄트라 수행에 참여하길 원하면, 먼저 자격을 갖추고 있으며 어떤 특정 신격의 만달라를 그에게 전수해 주고자 하는 스승을 찾아야 한다.
스승의 충고와 수행자의 기질에 따라 여러 가지 신격 중 하나를 선택하여 수행법을 전수 받는다. 이러한 신격들 중 흔히 택하는 것으로는 구햐사마쟈, 챠크라삼바라, 야만타카, 마하칼라, 바즈라요기니 등이다.
일단 전수 받고 나면 그 신격과 만다라를 묘사하는 짤막한 경전을 매일 참구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그 수행의 목표와 기본 윤곽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생성 및 완성 단계의 수행에 전적으로 몰두하려면 엄격한 명상훈련에 돌입해야 한다. 이 명상훈련은 혼자서 혹은 동료수행자들 소집단과 함께 할 수도 있다.
수행은 삼년, 석달, 삼일 이런 식으로 진행되며, 그 동안 수행의 전 과정을 통과하게 된다. 티벳의 라마승들은 흔히 탄트라 수행의 삼년 과정을 몇 번 반복하여 이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