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2일(일)
지누단다(1,780m)-뉴브릿지(1,340m)-씨울레바잘(1,170m)-나야풀(1,070m)-포카라(820m)
지난 밤, 술을 많이 마신 룸메이트는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천국행 열차에 탑승했다. 나는 모처럼 편히 앉아서 자연의 부름을 해결하고 치아를 깨끗이 닦고 침대에 누워 세계 평화를 즐겼다. 천국행 열차소리는 다른 날보다 더 씩씩하게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아름다운 밤이었다. 눈감으면 그대로 나도 그 열차에 편승해서 달릴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고도를 많이 내려왔기에 다른 롯지에 비해 덜 추웠다. 온천욕도 하지 않았는가. 노인으로부터 아주 잠깐이기는 하지만 마사지도 받았고. 숙면을 취했다.
이른 새벽, 아침식사를 서둘러 하고 지누단다를 출발해 1시간 30분 정도 걸어 뉴브릿지에 도작했다.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큰 문제가 없었다. 물론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을 더 조심해야 한다.사실 이때쯤에는 8박 9일간의 산행으로 누구나 지쳐있기 마련이다. 무릎에 통증도 있고 다리는 무거울 거다. 따라서 누구나 발을 디디는데 조심하게 된다. 앞으로 3시간 30분 정도만 걸으면 씨울레바잘에 도착한다. 거기에 우리가 타고 갈 짚차가 기다리고 있다.
티없이 맑은 아이의 웃음에서 밝은 네팔의 내일을 기대합니다.
씨울레바잘에 도착하기 30여분 전부터 커다란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선두에 서서 걷던 가이드 말에 의하면 자동차가 더 높은 곳까지 올라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길을 뚫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사람 하나가 지날 수 있는 길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유심히 살펴보니 나무를 베어 내고 산을 깎아 길을 넓히기 위해 불도저가 산을 밀어내고 굴착기로 땅을 파는 소리였다. 여기도 찬반의 생각들이 부딪히고 있으리라.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히말라야를 만들고 산속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의 어려움을 해소하려는 노력이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연의 파괴라는 측면은 무시하기로 했다.
드디어 씨울레바잘에 도착했다. 점심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주방팀이 준비한 마지막 식사는 김치볶음밥이었다.
그동안 매 끼니를 다른 메뉴로 맛깔스럽게 차려준 노고에 감사하며 그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나는 식사기도를 따로 하지 않는다. 아니 모든 기도를 따로 형식을 빌리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 내킬 때 마음속으로 빌고 기도한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따라 주는 숭늉을 마시고 대기하고 있던 짚차에 탔다. 뒷자리에 앉으려 하니 인솔자가 덩치 크신 분은 앞에 타야 한다며 나를 앞좌석으로 인도했다. 다른 분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언제나 일행들이 베푸는 따뜻한 배려가 느껴진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나야풀로 가기 전에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학용품을 전달하기 위해 들렀다가 쉬는 날(네팔은 토요일이 공휴일)이라 학교 앞 점포에 학용품을 맡겨놓고 왔던 엄홍길휴먼재단이 설립한 비레탄티 세컨더리 초등학교를 다시 찾았다. 네팔은 일요일이 한 주일의 시작으로 정상 수업을 하고 있었다. 명예교장겸 미술교사로 봉사하고 있는 김규현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학생 수가 자그마치 200명이 훨씬 넘는다고 했다. 산골짜기에 있는 학교에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니 모두들 놀랐다. 우리가 가져간 학용품이 그리 많지 않아 학생당 한 개씩 돌아갔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했다. 일행 중의 몇 분이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김규현 명예교장에게 금일봉을 전달했다. 김교장이 놀라며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보게 되었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사양하는 김교장의 주머니에 억지로 넣어 드렸다.
학교 방문을 마치고 트레킹 시발점이었던 나야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포카라로 간다. 나야풀에서 포터와 주방팀과 헤어지기 전에 아쉬운 작별을 나눴다. 나왕누리와는 그곳에서 작별을 나눴다. 그는 한국에서 오는 다른 팀을 만나 또 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는 순박한 스물 두 살의 청년, 힘들어 하는 내게 짐을 달라며 앞가슴에 메고 걸으며 그는 즐거워했다. 약한 사람(?)의 짐을 들어주는 기쁨을 즐겼으리라. 그의 앞날에 그가 믿는 신의 가호가 항상 함께 하기를 빈다.
포카라 호텔에 투숙하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 세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룸메이트와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가이드 대장 템바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함께 있던 비루도 같이 갔다. 걷다가 보이는 첫 번째 마시지 삽에 들어갔다. 우선 가격표를 봤다. 한 사람이 90분에 5,000루피였다. 50달러가 조금 안 되는 돈, 한국 돈으로 5만 원 정도. 템바가 뭐라고 하니까 3 000루피만 달라고 했다. 그래서 네 사람 분을 내려고 하니 템바가 자기들은 차라리 그 돈으로 무얼 사먹고 있는 편이 더 낫다고 했다. 그것도 옳은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가지라고 하고 둘이 들어갔다.
오마이갓, 너무 춥다. 무슨 마사지 삽이 이렇게 추운가. 콧물이 질질 흐르고 몸이 으실으실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몇차례 휴지를 달라해서 콧물을 닦고 코를 풀어댔다. 그리고 난로를 켜달라고 요청했다. 조그만 전기 난로를 가지고 왔으나 전혀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만 그런가? 룸메이트도 춥다고 컴플레인 하는 소리가 들린다. 마사지 하는 아가씨도 코를 훌쩍이며 코를 풀기 시작했다. 오마이갓, 마사지를 받으러 온 것인지 코를 풀러 온 것인지 모르겠다. 도저히 못견디겠다. 추워서. 그만 하라고 했다. 그리고 룸메이트와 그집을 나왔다. 온천욕을 하고 올라오다가 만난 노인에게 서서 받았던 그 손길이 진정으로 나의 피로를 풀어주는 마사지였다. 아, 그때 좀더 참고 있었어야 했는데....
호텔로 돌아와 잠깐 누웠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다. ‘산마루’라는 한국음식점으로 걸어서 갔다. 삼겹살을 먹었다. 일행 중의 특수교육학과 출신 동창생으로 현재 특수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는-우리가 독수리 4형제라고 이름 붙인- 선생님들이 맥주 값은 지불한다는 안내가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소주가 먹고 싶다고 했다. 인솔자는 소주 값이 엄청 비싸다며 주저했다. 그러자 룸메이트가 자신이 지불할테니 마음껏 드시라고 했다. 아름다운 밤이다.
삼결살을 시키고 또 시켜서 배터지게 먹었다. 이렇게 삼결살을 많이 먹은 적이 없었다. 룰룰랄라 노래부르며 룸메이트와 호텔을 향해 걷는데 포항에서 온 두 분 중의 한 분이 자기가 살테니 입가심으로 한 잔 더하자고 했다. 아까 소주를 찾을 때 룸메이트가 선뜩 마시자고 한 그것에 대한 답례를 겸한 요청같았다. 그래서 마침 가까이에서 걷고 있던 여선생님까지 넷이 이차를 위해 마땅한 집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와인 한 병과 브랜디 작은 것 2병을 더 마셨다.
딸딸딸 해져서 걷는데 여 선생님은 몸이 좋지 않다며 호텔로 먼저 가겠다며 들어가시고 셋이 호텔 앞에 있는 통닭집에서 맥주를 시켜 또 마셨다. 치맥... 밤이 깊어가며 술도 함께 깊어갔다.
통닭집에서 나와 바로 앞에 있는 호텔로 들어가려는데 포항분이 한 잔 더 하자고 했다. 발동이 걸린 것이다. 더 이상은 아니다. 극구 사양하고 숙소로 들어가 그대로 꿈나라로. 물론 치아와 중요 부위를 깨끗이 닦고. 포근한 이불 속에서.
오늘도 천국행 기관차 소리-드르렁 드르렁-를 들으며 네팔의 깊어가는 마지막 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1월 23일(월)
포카라(820m)-카트만두(1324m)
어제 저녁식사를 마치기 전에 인솔자가 “내일 아침 사랑곶 일출을 보겠냐?”고 물었다. 일정에 없는 곳인데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모시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경비를 따로 걷지 않고 특별히 만든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푼힐 전망대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일출을 봤는데 또 무슨 일출이냐고 그냥 자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볼 것은 하나라도 더 본다는 나의 여행 준칙에 따라 무조건 가겠다고 했다.
십여 명이 5시에 모여 승합차를 타고 출발했다. 포카라의 아침은 여인들이 열고 있었다. 어둠이 가시기도 전, 대부분의 집 마당을 여인들이 쓸고 있었다. 포장도로 옆의 비포장 길에서 먼지가 이는데도 꼭두새벽부터 부지런히 비질을 하고 있었다. 다시 먼지가 앉을 것임을 알면서도 비질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있었다. 집 안팎을 깨끗이 하며 하루를 시작하려는 여인들의 마음이 바로 네팔의 밝은 내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40여 분만에 사랑곶에 도착했다. 제법 걷는다는 생각이 들 무렵, 한 상점 앞에서 멈췄다. 가이드 대장 템바가 주인에게 옥상에서 일출을 조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일인당 50루피를 내면 옥상을 이용해도 좋다며 찌아(네팔의 국민차, 밀크티)를 한 잔씩 제공하겠다고 했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가까이서 멀리서 지겹도록 봤기에 지칠 만도 한데 다시 펼쳐 놓고 보는 히말라야 영봉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엷은 안개로 가려진 봉우리들이 새로운 히말라야를 느끼게 해주었다. 선명하게 보일 때와 희미하게 보일 때, 어느 것이 더 나은가하는 물음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다 좋으니까.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네팔에서의 일출은 ‘뜨는 해를 기다리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서서히 솟아오르면서 그 빛이 히말라야 영봉을 비칠 때 펼쳐지는 쇼를 감상하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포카라 공항으로 이동했다. 10시 30분에 떠날 예정이었던 카트만두행 비행기는 계속 출발시간이 지연됨을 알리고 있었다. 만일 비행기가 뜨지 않으면 버스로 여섯 시간을 가야 한다. 4시 30분에 쿤밍행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과연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다행히 출발하기는 했다. 2시가 넘어서. 그래도 불안하다. 국내선 공항에서 국제선 공항으로 이동하는 시간도 있으니까. 에잇, 기왕 버린 몸 다부지게 버리자는 생각도 들었다. 또 놓치면 다음 비행기를 타면 되지 않은가. 그렇게 마음을 정하니 아주 편한 마음이 되었다.
카트만두에 도착하자마자 가이드 대장 템바가 공항직원에게 사정을 얘기하자 자동차에 타라고 했다. 일행들과 작별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차에 올라탔다. 템바가 동행했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국제공항으로 갔다. 국제공항에서는 가이드 Biru가 찾은 짐을 갖고 기다리고 있었다. Biru는 오늘 새벽에 버스를 타고 미리 와서 찾은 짐을 받아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들과 다음 일정을 진행해야 하는 템바는 타고 온 택시를 타고 국내선 공항으로 떠났다.
네팔에서 샀던 것들 대부분을 Biru에게 가방 째 주었다. 그리고 찾지 못했던 짐 속에 들었던 라면과 기타 약품 등도 줬다. Biru는 다 주시면 어떡하냐며 사양했으나 그렇게 주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그가 내게 행한 친절과 보살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쿤밍해 비행기를 제 시간에 탔고, 예정대로 상하이를 거쳐 32시간 만에 1월 24일 LA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긴 여정의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