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일로는
고려때부터 군사의요충지(활생산자료; 대밭의 군락지)
해산물이 풍부하고 곡창지대의 물물교환이 처음 시작하고 고려중기에
5일장으로 변천하였다
(15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나타났고1470년(성종 1)에 장문(場門)이란 이름의 시포(市鋪)가 처음 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1925년 일로 동남쪽 인의산 돈도리에서 회도를 잇는 방조제가 완공되어 뭍으로 변했다. 거의 5리나 되는 둑을 축조한 주체는 일본인 히또미로쿠타로(人見鹿太郞)였다. 그는 5천 두락 크기의 에니와(榮和)농장을 차렸다. 간척지 논은 염분제거를 위해 다량의 관개용수가 필요하다. 회산저수지는 그 역할을 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
도장포 뜰은 30년전 1895년경에 오룡산과 도장포를 막아 간척사업이 되였다
시장터는 도장포 뜰이 막기 전까지
상인의 배들이 자유스럽게 왕래한 최상지점 천금성(구장터) 자리였고
간척사업으로 통로가 막히자 시장터를 일로 윗사거리 뒷편에 옮겼다가
협소하고 불편하여
현제의 구역 앞편에 옮겼으니 1960년 경이다.
< 남악터 >
고려 때 임성(任城)·군산(群山)·극포(極浦)부곡이었다가 조선시대 삼부곡을 ‘삼향(三鄕)’이라 칭하면서 1906년까지 나주목의 월경처였다.
소속읍에서 멀리 떨어져 타 군현에 들어 있는 땅을 월경처라 한다.
삼향은 나주읍성에서 90리 거리인 무안 땅에 있는 나주 관할 지역으로 화살촉의 산출지였다.
18세기 당시 700여호 2천여명이 살고 있어 나주목 관내에서 읍성안 다음으로 많았다.
갯벌(干潟地)을 개간하여 농토를 일궈 원남악(남메기)을 비롯하여 회룡(구래·천마·남산·죽도), 신흥(응동), 오룡, 안동(안골, 밭재, 마하, 부흥, 해창)마을이 들어섰다.
1910년대 해주오씨의 땅이 3할이 넘었고, 김해 김·밀양 박·연안 차·안동 권씨 순으로 땅을 소유했다.
1930년대에는 초정 김성규와 아들 우진·철진 소유가 1/3 이상이었고, 현준호와 차성술도 4만여평을 갖고 있었다.
옛날에는 일로보다는 삼향이 더 인구가 많았고
일로는 회산 앞으로 인의산 가는 구릉지 청호리까지 이르는 긴 구릉지가 형성 되였고
자방포뜰 영화농장뜰 막기전의 지형은 지금하고는 천지차이 이다
간척사업으로 농토가 많아지고 차츰 필요에 의하여 인구가 늘어 일로가 읍에 이르게 되었다.
옛날 삼향은 나주목의 2번째 큰인구가 있었고
지금의 일로는 무안군에서 2번째 큰 인구가 형성되다.
다시 도청이 삼향오룡으로 옴에 큰도시가 형성 되였다.
손에꽃돌 2021,6,27
헛소리쟁이의 아침에
< 시간에 기대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