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건천읍 밀양손씨 시조묘(풍수상 명혈이 아니라도 훌륭한 시조묘가 될 수 있다) 1. 밀양손씨 시조와 분파 * 밀양손씨는 인구 30만(2015년), 19개파, 25위의 大姓이고 시조는 孫順이다.
* 밀양손씨의 먼 시조(元祖, 都始祖)는 구례마(俱禮馬)로서 BC 57년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추대한 六村長중 한명이다. 유리왕때(AD 32년) 구례마의 손자 손직이 손씨성을 사성(賜姓)받았고 8백년간 세계(世系)가 불명하다가 원조의 31세손으로 알려진 손순이 경주 모랑리 출신으로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死)때 효자로 소문나서 문효공 월성군에 봉해지고 밀양손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런데 동일한 시조아래의 후손들은 본(本)을 같이하는 것 즉 동성동본(同姓同本)이 통례인데도 손순의 후손들은 본을 달리하는 4계파(系派)를 형성하고 있는 특이한 사례이다.
* 손순에게는 2자가 있었는데 장남의 아들 셋(손순의 손자들)이 밀양(장손 손익함계열), 평해, 경주를 본(本)으로 하는 3개파로 분파되고 차남의 아들이 청주파로 분파하였다. 현재 밀양손씨들은 손순을 1세로 계산한다. 즉 손순이 기세조(起世祖)이다. 4개의 本으로 나누어진 4系派는 모두 시조를 손순으로한 一祖之血族(한 始祖에 다른 本)이다. 2017년기준으로 밀양파는 27만명, 평해는 1만6천명, 경주는 7만8천, 청주는 1천명인데 청주는 인구가 적어서 제외하고 손순의 후손은 3계파(系派)로 형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 밀양손씨들은 손세(孫勢)가 미미하던중 손순의 7세손 손긍훈(孫兢訓, 생몰불명)은 밀양파소속으로 고려 태조가 936년 후백제 견훤의 아들들이 점거한 경주를 평정할 때 선봉으로 공을 세워 광리군에 봉해지고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켜 中興祖(中始祖)가 되었다.
2. 시조 손순의 묘(천년간 실전된 묘) * 손순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려운 살림에 홀어머니를 모셨는데 어린 자식이 어머니 음식을 빼앗아 먹자 자식을 인근 취산에 묻기로 하였다. 부부가 땅을 파는데 석종이 나왔다. 기이하게 여겨 아기를 묻지않고 돌아와 종을 치니 소리가 왕궁까지 들렸고 흥덕왕이 그 내역을 듣고 집과 쌀을 하사하고 國孝라 부르고 월성군에 봉하였다. 손순은 종이 나온 곳에 弘孝寺를 짓고 종을 걸어 두었는데 후백제와의 전란중 없어졌다. * 후손들이 1970년 손순이 하사받아 살던 터에 손순 유허비(한곡면 소현리623)를 세우고 1992년 손순의 부부를 모시는 문효사를 세웠다. 석종이 나온 곳에 대하여 남사리 삼층석탑(남사리234-2, 탑골, 보물907호)이라는 견해와 남사리 북 삼층석탑(남사리313-4, 사저수지邊, 경북 문화재7호)이라는 견해가 있다. 자식을 묻으려 취산에 갔다고 하니 탑골에 있는 석탑이라 생각된다.
* 손순의 묘는 오랜 동안 실전되었다가 1967년 경주 건천읍 모랑리536-1에 있는 주인없는 효자묘가 손순 묘라고 판정하고 1986년 석물 치장을 하였다. 천1백년간 실묘하였던 것이다. 밀양손씨들은 중시조 광리군묘(밀양 교동산 74-6)에 더 열성을 드린다.
3. 간산 * 손순의 묘는 단석산에서 들판 가운데로 내려와서 만든 작은 동산에 있다. 들판이 경지정리된 탓에 입수래룡을 알기 어렵다. 풍수 속담에 입수 일절(一節)만 확실하고 혈장이 잘 짜여있다면 어느 산에서 흘러 왔는지 따지지 마라고 하느니 만큼 입수래룡이 불명한 것은 흠이 아닐 수도 있다. 어떤이는 연화부수의 명혈이라고 감탄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평야에 외톨로 던저져있고 생기가 없다. 큰 씨족의 시조묘가 맞는지 또는 제대로 찾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 통상 시조는 영웅 호걸 또는 고관대작이고 그분의 묘는 대혈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①자신의 선조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고 ②명망있는 인물이 아니라도 건장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면 많은 후손을 퍼뜨릴수 있으며 ③명혈이 아니라도 혼령발복등 다른 요인으로 번성의 계기를 마련하였을 수 있다. ④각 성씨 시조묘는 천년을 경과하면서 육골은 흔적없이 삭아 없어졌을 터인데 지금도 후손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시조는 후손을 퍼뜨릴 씨앗을 심을 뿐이고 5~6대후부터는 후손들이 각자 번성할 터전을 마련해야 될 것이다. 눈덩이는 굴러가면서 커지는 것과 같다. 기세조는 기세조일 뿐이고 그 묘소는 경모하고 기념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지금도 발복에 관여하는 장소로 미화할 것은 아니다. 수십만명의 후손에 대하여 길흉화복에 일일이 관여하려면 신(神)의 역량(力量)을 가져야 할 것이다. * 밀양손씨와 유사한 경우로 김해김씨 삼현파의 기세조 김관의 묘도 상당기간 실묘되었다가 찾았으나 손순묘와 같이 평지 동산이고 허술하다.(2023.4) * 손순묘 지도-- * 묘역—공동묘지 같다 * 손순의 묘---1967년 손순묘로 판단. 1986년 석물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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