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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인간
이제 와 새삼 네가 멋져 보이는 건, 별안간 찾아와 눌러앉은, 이름도 성격도 나이도 모르는 이 구멍 때문인지 모른다. 네 곁에 그녀가 있을 뿐인데 너는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표정과 말투와 손짓도 그러하다. 소주잔을 들고 고개 돌려 창밖 저 멀리 본다. 파도가 남긴 하얀 흔적을 썰물이 몰고 빠져나가자 어둠이 그 빈 곳을 채운다. 술을 털어 넣고 다시 너를 본다. 그녀의 손을 마주 잡은 너는 아름답다. 만약 내가 네 손을 잡았다면 내 옆에서도 네가 아름다웠을까? 구멍에 빠진 나를 본다. 나는 불안과 공허와 외로움이 나에게서 산란하는 현상을 구멍이라고 한다.
오늘 우리 신혼여행 온 거예요! 그녀가 돌연 내뱉은 말이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너는 이렇게 해명한다. 결혼한 건 아니고, 그러니까 결혼은 나중에 해야지. 순간 그녀가 다시 말한다. 우리 첫날이에요. 격리 씨가 원해서요.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와서는 두리번거리다가 파도가 빠져나간 흔적을 따라 걷는다. 까만 어둠 저편에서 하얀 파도가 밀려온다. 그래, 네 이름이 격리지. 그러고 보니 나는 오랫동안 너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너라고만 했다. 그것이 네가 내 손을 잡지 않은 이유였으리라. 너라는 말은 우리라는 말이 아니니까. 너라는 말로 내가 너를 경계했으니까. 하얀 파도가 두 발을 차갑게 적시고 다시 멀어진다.
내가 왜 이 바다에 왔을까? 구멍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인가! 게다가 첫날이라니! 왜 하필 내가 사는 이 도시 이 바닷가에서 그런 행사를 치르려는 거지. 도대체 나를 왜 불러낸 거지. 그러니까 복수하는 건가! 4년 전 격리는 이 바닷가에서 내게 고백했다. 생각해보면 참 멋대가리 없는 프러포즈였는데 다짜고짜 한 침대를 쓰자고 했다. 내 대답은 아주 짧았다. 넌 거기까지야! 라고.
택시를 타고 바닷가에서 빠져나오자 눈물이 난다. 휴대전화 연락처에서 격리의 전화번호를 차단하고 지우자 시원섭섭하다. 그래, 이쯤 했으니 확실한 이별이다. 역시 집이 최고지, 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어. 눈물을 닦고 집에 들어서자, 헉! 이건 뭐지! 격리와 그녀가 버젓이 소파에 앉아있다. 격리가 현관 비밀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지문인식이나 홍채인식 자물쇠로 바꾸지 않은 탓이다. 내가 이 집으로 이사했던 날 고전 스타일을 좋아하는 격리가 비밀번호 자물쇠를 사용하라며 직접 달아줬었다. 그렇다면 설마 우리 집에서 첫날밤을 치르겠다는 건가? 이것이 45년식 사랑법인가? 몹시 불쾌하다. 하지만 조금 전에 완벽하게 이별했으니, 흔들리면 안 된다. 불쾌한 감정에 마음 쓰면 안 된다. 빤히 바라보자 격리가 그녀를 정식으로 소개한다.
“우리의 로봇 가사도우미야. 이름은 가사도우미 0323이고.”
우리, 로봇, 가사도우미, 0323, 모두 낯설다. 냉동고에서 얼음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깨물자 긴장이 풀린다. 왜 우리냐고 묻자 방금 내게 프러포즈를 한 거란다. 그러니까 격리가 또다시 고백한 거다. 이번에도 낭만적이지 않지만, 멋대가리 없다기보다는 놀랍고 궁금하다. 고백하기 위해 로봇 가사도우미를 데려오다니. 격리가 자기와 함께 살잔다. 함께 살려면 무엇보다 가사도우미가 필요했단다. 내가 살림에 관심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며 전 재산을 들여 가사도우미 로봇을 샀단다. 자기는 갈 곳도 없고 돈도 없으니 마음대로 하란다. 막무가내 프러포즈이기는 한데 가사도우미가 왠지 끌린다. 그런데 0323이라는 이름이 좀 그렇다.
“이름은 그녀가 좋겠어.”
이름은 마음대로 해도 좋은데 무슨 의미냐고 묻는다. 내가 그녀라는 이름을 생각해 낸 건 일정한 거리를 두기 위해서다. 사람은 아니지만, 너무 사람 같으니까 그녀가 적당하다. 그냥이라고 대꾸하자 격리도 싱겁게 수긍한다. 나는 지금까지 평범한 일반인이 가사도우미 로봇을 살 수 있는 줄 몰랐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변하고 있었다니 미개인이 된 기분이다. 4년 전, 격리의 프러포즈를 거절하고 지금까지 나는 세상과 담쌓고 살았다. 철저히 혼자가 되어 4년 전 그 시점에 머물러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이에 구멍이 점점 자라며 자리 잡았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나의 무관심 혹은 나의 무지를 내색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전 재산을 들여 가사도우미 로봇을 사다니, 이해할 수 없다고 하자 격리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요즘, 다들 그래. 유행이랄까!”
역시 세상은 내가 무관심한 사이에 한참을 건너왔나 보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격리가 빙그레 웃는다. 그러니까 한 시간 전 바닷가 술집에서 그녀가 한 말은 사실이다. 오늘이 나와 격리의 신혼 첫날이다. 내가 감동한 건지, 아니면 이 구멍을 메꾸고 싶은 건지, 허허실실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하게 이별한 날, 우리 셋의 동거가 시작된 거다.
내 침실을 정리하는 그녀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너무 갑작스러워서인지 정신 사납고 혼란스럽다. 그러면서도 뭔가 기대가 된다. 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격리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해 프러포즈한 거라면 성공한 셈이다. 격리와 내가 나란히 소파에 앉아있자 그녀가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아름답단다. 딱 원하던 말이다. 정말 제대로 된 가사도우미다. 밥도 청소도 빨래도 전부 다 하겠다니 나쁘지 않다. 아니, 너무 훌륭하다.
아침에 눈을 뜨자 격리가 내 옆에 누워있다. 내 침실에서 타인과 아침까지 함께 잠을 자다니 믿기지 않는다. 사십 평생 처음 있는 일이다. 엄마는 나와 함께 잤을지도 모르지만, 엄마는 내가 기억하기 이전에 죽었다. 또 몇 번인가 술에 취해 남자와 함께 자기는 했으나 아침까지 함께 자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지난밤엔 아주 낯선 일을 해낸 건데 생각보다 괜찮다. 갑자기 이런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이 동거를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자 그녀가 주방에서 식사 준비 중이다. 아, 이런! 싱크대 앞에 서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예쁘다. 단순히 몸매가 예쁜 것만은 아니다. 밥하는 여자의 감성이랄까, 편안함이랄까, 사랑스러움이 몸짓에 묻어 있다. 한마디로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 술집에서도 느꼈던 감정인데 그녀는 나에게 상대적 초라함을 느끼게 한다. 그녀에게 부탁한다. 로봇에게 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왠지 좀 그렇지만, 반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녀가 너무 사람 같으니까.
“오해하지는 말고, 긴 치마를 입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곧바로 긴 치마를 입고 나오지만 내 부탁은 부질없다. 오히려 더 관능적이다. 헐렁한 운동복 바지를 건네며 다시 갈아입으라고 부탁하자 그녀가 방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격리와 그녀가 각자 방에서 나오다가 마주친다. 격리가 그녀를 보며 농담을 던지듯 오늘은 귀여워질 작정이냐고 묻자 그녀가 쑥스러운지 미소 짓는다. 로봇인데도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다. 또 무릎이 툭 튀어나온 운동복을 입었는데도 그녀는 격리 말대로 귀엽다. 한순간 질투가 솟구친다.
“그럼 나는?”
정말 개념 없이 벌써 내뱉었다.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려는데 다행히 격리가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대꾸한다.
“지난밤 정말 예뻤어.”
저절로 씽긋 미소가 지어진다. 부끄럽기도 하나 뻔뻔하게도 기분 좋다. 내가 그녀를 이겼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그녀는 로봇이고 나는 인간이지만 그깟 정체성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남자와 산다는 것은 그런대로 괜찮다. 그런데 그녀가 상을 차리자 격리가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다. 그녀가 그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이런! 저 로봇이 정말! 내쫓아야 하나?
신혼 둘째 날이자 일요일, 뭔가 해야 한다. 혼자라면 아직 침대 위에 퍼져 누워있을 텐데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니 불편하다. 눈치를 챘는지 격리가 백화점에 가겠느냐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외출준비하고는 운전까지 해준단다. 격리가 전 재산을 들였다더니 못 하는 게 없다. 에구! 이번에도 그녀의 옷차림이 눈에 거슬린다. 레깅스 바지를 입었는데 지나치게 날씬하다. 꼭 저렇게까지 날씬해야 하는 거야? 내가 또 개념 없이 이렇게 내뱉자 그녀가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격리가 상황을 정리하듯 그녀를 먼저 내려보낸다. 어이없게도 인간인 내가 로봇을 자꾸만 질투하고 있다. 격리에게 가사도우미를 바꿀 수 없느냐고 묻자 교환 비용이 많이 든단다. 굳이 그 돈을 들여 교환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란다. 할머니 가사도우미는 없었냐고 묻자 빙그레 웃더니 현재 출시된 가사도우미 모델은 모두가 아가씨란다. 역시 자본주의 나라다.
우리가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그녀가 기다렸다가 차 문을 연다. 잠시 후 그녀는 운전대를 잡더니 뭔가 기계 동작을 하고는 출발한다. 내가 아무리 세상일에 무지하다고 하더라도 요즘 세상에 운전대를 잡고 수동으로 운전하다니! 그러고 보니 이 차는 격리가 예전에 타던 차다. 당연히 자동 운행 장치가 없다. 역시 고전 스타일을 좋아하는 격리의 고집 때문이다. 운전만큼은 인공지능에 맡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 격리 생각이다. 직접 운전대를 잡아야만 인간으로 살아있는 느낌이 든단다. 격리 같은 사람이 많은지 운전자 수동 방식의 자동차도 계속 생산될 뿐만 아니라 재래식 정비소도 존재한단다. 다소 놀라운 사실은 로봇인 그녀 또한 운전자 수동 방식 운전이 가능하단다.
얼마 후 백화점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생각보다 분주하다. 그러고 보니 백화점에 언제 왔었는지 기억에도 없다. 요즘에도 백화점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쇼핑하는 것을 즐기는가 보다. 이런 행위를 통해 구멍을 메꾸는지도 모른다. 백화점은 왠지 박물관 느낌일 것 같았으나 막상 와보니 사람이 꽤 있다.
옷을 고르고 있는데 그녀가 주차를 마치고 찾아온다. 차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자 우리가 물건을 사면 들어주겠단다. 괜찮다고 하자 이번엔 격리를 바라본다. 격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주차장으로 간다. 그녀의 주인은 격리 하나뿐인가 보다.
“우리의 가사도우미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자기 말만 듣지?”
격리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주인 등록을 해야 한단다. 집에 돌아가는 대로 나를 주인으로 등록하겠단다. 고개를 끄덕이고 옷을 고르자 격리가 형식일지라도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자고 한다. 형식이란 말이 귀에 꽂힌다. 형식이라는 게 어떤 의미냐고 묻자 진짜 결혼하는 것은 아니란다. 내게 부담 주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결혼이 싫다는 것인지, 격리의 진심이 궁금하다. 아마도 독신생활에서 탈출하려면 타인에게 기대야 하나 보다. 그래, 타인! 어쩌면 타인이 나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 사실을 오랫동안 외면했던 거다. 진심이 뭐냐고 묻자 이번엔 빨리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을 유보하겠단다. 문득 저쪽에 있는 흰색 원피스가 눈에 띈다. 드레스는 아니지만 입어 보고 싶다. 어차피 형식적인 결혼이라면 드레스는 필요 없다. 내가 원피스가 좋겠다고 하자 격리도 좋단다. 격리는 검은색 슈트를 고른다. 우리는 등지고 옷을 갈아입은 후 마주 보고 웃는다. 격리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더니 부케가 필요하다며 꽃다발을 준비해서 현관 앞에서 기다리란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자 그녀가 우리를 알아보고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치켜세운다. 차에 올라타자 작약으로 장식한 꽃다발이 조수석에 놓여있다. 격리가 당장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하자 그녀가 축하한다며 방긋 웃는다. 좋은 장소를 묻자 그녀는 곧바로 세 곳을 추천한다. 절과 성당, 사랑나무가 있는 강가다. 한적한 장소니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기에는 좋을 거란다. 세 곳 모두 거리가 가깝다고 했으나 내게는 모두 생소하다. 사랑나무가 있는 강가가 좋겠다고 하자 탁월한 선택이라며 치켜세운다. 비현실적인 몸매만 아니라면 로봇인지 사람인지 얼핏 보아선 구별하기 어렵다. 감정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으나 감성은 충만해 보인다. 감성이 충만한 것이 아니라면 상황이해와 연기력이 뛰어나다.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와 십여 분을 더 달리자 어느덧 차는 강을 따라 달린다. 저 멀리 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끈다. 순간 그녀가 사랑나무라고 알려준다. 근처에 다른 나무가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어떤 사연이 있는지 사랑나무가 나처럼 구멍에 빠진 듯 외로워 보인다. 이름이 왜 사랑나무냐고 묻자 나뭇가지의 생김새가 하트모양이란다. 에구! 사연이 참으로 시시하다. 그나저나 로봇이라서 그런지 모르는 게 없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녀가 사랑나무 앞에서 차를 세우더니 근사한 곳에서 예쁘게 결혼하란다. 차에서 내리자 둘레에 코스모스 꽃밭이 펼쳐져 있음에도 사랑나무는 외롭다. 어디선가 따돌림을 당하고는 강물을 타고 유람하다가 이곳에서 자리를 잡은 듯하다. 늘어진 가지를 중심으로 사진 각도를 잡으니 하트모양이 보인다. 그녀가 사진을 찍어주겠단다. 그녀가 준비한 꽃다발을 들고 격리와 함께 하트모양 중심에 서서 자세를 취하자 쑥스러우면서도 좋다. 형식이기는 하나 그녀가 우리 결혼의 유일한 증인이다. 증인! 나도 모르게 그녀를 사람 취급한 거다. 어쨌든 최선을 다하는 그녀가 보기 좋다. 그녀의 빼어난 외모 때문에 질투한 것이 부끄럽다. 인간이 로봇을 상대로 질투하다니, 로봇은 무생물인데 내가 어리석다. 아니, 무생물이 아닌가? 일단은 무생물이라고 생각하자. 고맙다고 말하자 보조개를 꽃 피우며 미소 짓는데 예쁘다. 저 미소를 보면 절대 무생물이 아니다.
기다란 의자에 격리와 나란히 앉아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갑자기 시작된 이 동거가 과연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결혼식을 흉내 내면 기분이 좋을 줄 알았으나 여전히 구멍이 느껴진다. 진짜가 아닌 흉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내 감정을 나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 격리에게 지금 행복하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하더니 나는 어떠냐고 되묻는다.
“까닭을 모르겠어. 결혼식을 올리고 나니 오히려 더 구멍이 크게 느껴져.”
“구멍?”
“응. 그게 산란 현상인데 말이야. 그러니까 불안, 초조, 외로움, 그런 거.”
솔직한 심정이다. 예전에 격리는 이런 나의 직설화법 때문에 당혹스러워했었으나 지금 내 앞에 있는 격리는 여유롭게 웃는다. 내가 알던 격리가 아니다. 괴팍하고 고집스러운 내 성격에 면역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가 떨어져 있던 지난 4년 동안 격리에게 어떤 일이, 그러니까 표정을 숨기는 능력을 터득하게 한 어떤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며 격리가 외롭다는 내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내 결혼식이니까 행복해야 한다. 즐겁다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러니까 외로움도 간혹 즐거워, 오늘 같은 날은 특히 더.”
즐겁다는 말은 진실인데 격리가 옆에 있어 그런지도 모른다. 내가 씽긋 미소 짓자 격리도 빙그레 따라 웃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차 근처는 물론 멀리까지 둘레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격리가 전화하자 저쪽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격리가 소리 나는 쪽으로 뛰어간다. 코스모스 꽃밭 한가운데에서 멈춰 서더니 쭈그리고 앉아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그녀가 쓰러졌던 모양이다. 내가 뛰어가자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가 멋쩍게 웃으며 우리에게 미안하단다. 잠시 혼선이 생겼을 뿐 지금은 괜찮아졌단다. 혼선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로봇이 맞다. 격리가 빨리 병원에 가야겠다고 말한다. 병원이라고!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재빨리 끼어든다.
“로봇 병원이에요. 수리 센터 말이에요.”
그러자 격리가 로봇이 완벽하지 못한 것 같다며 투덜댄다. 그녀가 운전석으로 가자 격리가 막아서더니 자기가 운전하겠단다. 나도 그게 좋겠다고 하자 그녀가 뒷좌석에 앉는다. 굳은 그녀의 표정이 왠지 사람처럼 느껴진다. 로봇도 감정을 표출하나 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가 로봇 병원에 다녀오겠다며 어디론가 간다.
이튿날 아침 거실로 나가자 그녀가 언제 돌아왔는지 어느새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어제와는 느낌이 다르다. 완벽했던 그녀가 조금은 흐트러져진 모습을 보인다. 어제 쓰러졌던 일 때문에 그녀에게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질투하자 그녀가 자세를 바꾼 것인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그녀가 안쓰럽다. 또한, 까닭은 알 수 없으나 그녀가 사람답게 느껴진다.
인사를 건네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가 갑자기 기침한다. 로봇이 기침하다니! 그녀가 서너 번 더 기침한다. 감기라도 걸린 걸까? 로봇도 감기에 걸리나? 인공지능이면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도 있는 건가? 바이러스 감염이 감기 증상으로 나타난 건가? 의심은 빨리 해결해야 한다.
“감기 걸렸나 봐요?”
그녀가 황급히 돌아서더니 살며시 미소 지으며 대꾸한다.
“네, 그런가 봐요.”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그녀가 돌연 표정을 바꾸더니 농담이라고 한다. 양파가 매워서 재채기했단다. 도마 위에 양파가 놓여있다. 그러나 로봇이 농담하는 것도 그렇고 재채기하는 것도 그렇고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니면 내가 로봇은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격리가 방에서 나와 그녀에게 인사한다. 그녀도 격리에게 인사하더니 다시 음식을 만든다. 격리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 그녀가 양파를 썰다가 재채기를 하더라고 말하자 격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단다. 가사도우미 로봇은 사람과 비슷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어졌단다. 웃거나 우는 것은 물론이고 하품하거나 재채기를 할 수 있단다. 사람다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란다. 일단 수긍했으나 어제 일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녀가 감기에 걸린 것만 같다.
“그런데 어제 그녀가 쓰러진 이후 자꾸만 사람답게 느껴져.”
격리는 고개를 내젓더니 가사도우미는 최대한 인간답게 만들어졌다고 다시 강조한다. 또다시 수긍해보지만, 뭔가 수상하다. 로봇이면 로봇다워야지 로봇이 사람다우면 어쩌라는 거지. 게다가 격리 또한 뭔가를 감추기라도 하듯 그녀의 행동에 관해 자꾸만 해명하고 있는 느낌이다.
점심때가 되자 그녀가 냉면을 만든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해서다. 육수가 차갑기는 하나 나는 늘 그랬듯 얼음을 동동 띄운다. 냉면 맛이 훌륭하다. 그녀는 음식을 먹지 않지만, 어떤 음식이든 잘 만든다. 그녀는 먹는 대신 한 달에 한 번 배터리를 충전한단다. 나는 평소 습관대로 얼음을 입에 넣고 깨물려다가 순간, 캑! 얼음 하나가 목에 걸린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 벌떡 일어나 몸부림치자 격리가 우왕좌왕하며 등을 두드린다. 거실에서 지켜보던 그녀가 달려온다. 그 뒤로 정신이 아득하다. 그러다가 한순간 목이 뚫리고 숨쉬기가 편하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민첩했던 행동을 천천히 되새긴다. 내가 캑캑거리자 그녀는 내 등 뒤로 가더니 자세를 낮추고 내 배를 양손으로 안고는 자기의 왼손으로 자기의 오른손을 감쌌다. 그런 다음 오른손 엄지손가락 밑 부분을 내 명치 부분에 대더니 위로 들어 올리며 뒤로 잡아당겼다. 서너 번 반복하자 목구멍을 막고 있던 얼음덩어리가 툭 빠져나왔다. 얼음을 뱉었다. 죽을 뻔했다가 살았다. 그녀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능수능란하고 완벽했다. 그녀는 생명의 은인이다. 내가 고맙다고 하자 보조개 웃음을 짓는다. 그녀가 사람이면 좋겠다.
잠시 후 나는 아주 곤란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녀의 행동을 뒤집어 볼수록 가슴이 뜨거워진 거다. 그녀가 나를 안았을 때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그냥 온기가 아니라 그녀의 숨소리를 느꼈다. 로봇을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길래, 사람보다 더 사람답게 느껴지는 걸까? 내가 타인에게서 이런 온기를 언제 느꼈지? 격리와 함께 자는 것은 좋지만 격리에게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격리를 절실히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격리 또한 나를 절실히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 지금 나는 그녀를 안고 싶다. 그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다. 혼자 오래 살다 보니 나의 성 정체성에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사실 내게는 관계를 자꾸 정리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친구가 없는데도 격리는 아주 오랫동안 내 곁에 남아있다. 지금 나와 격리 사이에 로봇이 끼어있는 이 상황이 갑자기 낯설다. 어쩌면 그녀와 나 사이에 격리가 끼어있는지도 모른다. 아! 이 이상한 느낌은 뭐지? 차라리 그녀가 사람이라면 덜 혼란스러울 것 같다. 어쨌거나 지금은 관계 정리가 어렵다.
격리를 처음 만난 것은 이십오 년 전, 2020년 5월이다. 코로나19 전염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했던 탓에 입학식은 취소됐고 온라인 강의를 듣다가 실습 때문에 대학교에 처음 등교했던 날이었다. 그날 격리는 내게 대학이 처음이라서 그러는데 우리 친구 할까요? 라고 물었다. 처음이면 다 친구 하는 거냐고 되묻자 친구가 있으면 덜 낯설지 않겠냐며 마스크를 쓴 채 웃었다. 그때 격리 덕분에 대학이 낯설지 않았다. 그 이후 오랫동안 격리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냥 좋단다. 그러다가 4년 전에 내게 프러포즈했다. 그러고 보니 격리가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한 것은 며칠 전 동거 첫날이었다. 홀딱 벗은 나를 보며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사랑이었을까? 그 순간 내 몸을 원한다는 말이었겠지!
뭔가 이상하다. 며칠이 지나도 격리가 출근하지 않는다. 까닭을 묻자 나와 함께 살기 위해 집을 팔아 로봇을 사고 직장은 그만두었단다. 직장과 우리 집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어쩔 수 없었단다. 내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로봇이 일을 대신에 해주니 인간이 더는 일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는 건지, 나만 괜히 고집을 부리고 회사에 다니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 회사 사람들만 해도 모두 열심히 일한다. 그러니까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먹고살려고 아등바등 발버둥 치고 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으나 아직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먹여 살리지 못한다. 오히려 인공지능 때문에 많은 사람이 실업자가 된다. 벌써 오래전부터 그래왔으나 여전히 그렇다.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잠식하고 있는 이런 세상에서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다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정식으로 결혼한 것은 아니니, 내가 문제 삼을 수는 없다. 문제는 지금 나는 출근하고 격리와 그녀는 집에 있다는 사실이다. 괜히 불안하다. 오히려 그녀가 사람이라면 이 관계를 정리할 수 있겠지만.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격리가 직장을 구하겠단다.
현관을 나서다가 그녀에게 회사까지 데려다줄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녀가 흔쾌히 앞장선다. 격리가 나를 그녀의 주인으로 등록한 모양이다. 차를 타고 회사에 가는 동안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묻자 그녀가 이렇게 대답한다. 격리를 처음 만난 건 나를 만나기 이틀 전이며, 감정을 직접 느끼지는 못하나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부닥쳐있는지는 파악할 수 있고,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와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속일 수도 있나요?”
한순간 나를 힐긋 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주인이 시키는 일은 다 하지만, 그것이 속이는 일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으며, 로봇이기 때문에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다고 한다. 주인이 원하면 살인도 할 수 있냐고 묻자 가사도우미는 사람을 대상으로 폭력을 가하지 않는단다.
“그럼 남자와 성행위를 할 수 있나요?”
다시 나를 힐긋 보더니 생식 기관이 모양은 하고 있으나 어떤 기능도 하지 못한단다. 아! 왠지 안심은 되지만 몸매가 저렇게 완벽한데 남자와 사랑할 수 없다니 안쓰럽다. 회사 앞에 도착하자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오겠다고 말하고는 돌아간다. 그녀가 한 말을 여러 번 되새긴다. 분명히 마음만 먹으면 감정 연기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로봇이 마음을 먹다니,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모르겠다.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얻기 위해 시내에 나왔다며 격리에게서 전화가 온다. 격리는 호텔에서 근무했었는데 관련된 일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단다. 로봇에게 마음이란 것이 있느냐고 묻자 설마라고 대꾸한다. 나도 그냥 웃어넘긴다.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가 오자 내 삶이 완벽하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며칠 사이에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자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완벽한 그녀 때문에 내 삶이 윤택하다. 그녀에게 정말 마음이란 것이 있어서 지금의 내 마음 상태에 대해 공감해주면 좋겠다. 어쩌면 내가 지금 그녀에게 깊이 빠져들고 있는 모양인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집에 도착하니 밥상이 차려져 있다. 격리도 때맞춰 집에 들어오더니 몇 군데 면접을 보고 왔단다. 요즘도 대면 면접을 하느냐고 묻자 좀 더 확실히 하려고 일부러 찾아갔단다. 격리의 표정을 보니 모든 일이 잘될 것 같다. 내가 이렇게까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다니 놀랍다.
자정쯤 목이 타 물을 마시려고 문을 연 순간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와 잽싸게 방으로 들어간다. 물을 마시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눕자 한순간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벌떡 일어나 앉는다. 이 밤에 그녀가 왜 화장실에서 나왔을까? 배설이 필요 없는 그녀가 이 한밤중에 왜? 격리가 왜 그러느냐고 묻는다. 격리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왠지 느낌이 싸하다. 딱히 이유는 모르겠으나 지금 나의 의심을 격리에게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혼자 오래 살아서 그런지 나는 이런 직감을 믿는 편이다.
이튿날 새벽, 또다시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본다. 뭔가 촉이 발동한다. 그녀 몰래 화장실에 들어가 휴지통을 뒤졌으나 아무것도 없다. 내 직감이 무뎌졌나 보다. 그런데 그녀는 아침 내내 뭔가 초조하다. 출근하려는데 그녀가 꽉 찬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선다. 다시 촉이 발동한다. 나는 내가 버리겠다며 쓰레기봉투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온다. 쓰레기장으로 가서 봉투를 열고 안을 뒤진다. 비닐봉지에 싸인 무엇인가가 눈에 띈다. 비닐봉지를 펼치자 생리대가 나온다. 내 것이 아니다. 아! 이런, 내 직감이 맞다. 그렇다면 그녀는 로봇이 아니다. 지난 며칠간 있었던 일을 뒤집어 보자 격리와 그녀는 뭔가 불안해 보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으나 잠시 후 정신을 집중하자 하나하나 정리된다. 다만, 격리가 왜 그녀와 함께 내게 왔는지 의문이다.
격리가 다니던 호텔에 전화해 격리를 찾자 두 달 전에 회사를 그만뒀단다. 퇴직한 것이 아니라 해고당했단다. 대학 친구들을 수소문하다 보니 격리를 잘 아는 친구와 연락이 닿는다. 친구가 말을 아낀다. 어쩔 수 없이 격리와 결혼할 생각이라고 하자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더니 격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격리는 같은 회사에 애인이 있었는데 그 애인이 실수했고 격리가 그 실수를 덮어줬단다. 하지만 그 일이 탄로 나자 두 사람 모두 해고당했으며, 격리는 그녀가 회사에 입힌 손해를 대신 변상하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됐다고 한다. 변상하지 않으면 그녀가 형사고발을 당할 처지였다는 거다. 이렇게 말한 그 친구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덧붙인다.
“그런데 그 여자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라고 소문났었어!”
그렇다면 그녀가 틀림없다. 그런데 빼어난 미모라는 말이 귀에 거슬린다. 빼어나게 예쁘면 한 남자의 인생을 망쳐도 괜찮다는 건가! 그녀에게 가졌던 호감이 순식간에 달아난다. 격리가 지나치게 고전적이다 보니 생각까지 순진한 거다. 그렇다면 나라도 이 상황을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나로서는 격리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 그녀에게 문제가 있으니 그녀만 집을 나가면 된다. 그러려면 격리가 그녀와의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해야 한다.
퇴근 후 격리를 밖으로 불러내 내가 알아낸 것들을 이야기하자 의외로 순순히 모든 사실을 인정한다. 그녀를 내보내는 조건으로 진짜 결혼식을 올리자고 하자 이번에도 순순히 받아들인다. 격리가 나를 선택하기는 했으나 너무 쉽게 결정하자 뭔가 꺼림칙하다. 격리의 진심이 궁금하다. 격리가 나를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빈털터리가 되자 내게 붙어있으려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격리는 곧바로 그녀를 불러낸다. 격리가 그녀에게 떠나 달라고 부탁하자 그녀가 눈물을 보인다. 드디어 그녀의 진짜 인간다운 모습을 본다. 그런데 막상 그녀의 눈물을 보자 내 마음이 아프다.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녀가 순순히 떠나겠단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순조롭다. 왠지 두 사람은 이런 순간을 예상이라도 한 것만 같다. 그렇다면 분명히 어떤 음모가 있는 거다.
그러함에도 이 상황에서 이상한 것은 오히려 나다. 어이없게도 내 마음 한편에서 그녀를 잡아야 한다는 욕구가 솟구친다. 그러자 옆에 있는 격리가 한없이 작아 보인다. 갑자기 혼자라는 적막감이 밀려온다. 그녀가 없는 이 상황이 슬프다. 도대체 왜 이런 감정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 마음이 조금씩 엉성해졌나 보다. 이젠 타인 없이는 내가 살 수 없나 보다. 그런데 왜 그 타인이 격리가 아니고 그녀지?
그녀가 떠난 이후 집도 나도 엉망이다. 내 생활이 몹시 불안하다. 구멍이 자꾸만 커진다. 그녀가 보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격리가 결혼식은 자기가 알아서 준비하겠다고 하더니 의외로 분주하게 서두른다. 그러다가 한 달 후, 놀랍게도 그녀에게서 꼭 할 말이 있다며 만나자는 연락이 온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미안하다며 진실을 털어놓는다. 그녀는 이야기하는 내내 눈물을 보인다.
다시 한 달 후, 결혼식 하루 전날 내가 신혼여행 가방을 싸자 무심히 바라보던 격리가 무슨 짐을 그렇게 많이 싸냐며 어디 이사 가느냐고 묻는다. 대꾸하는 대신 그녀하고 연락은 하느냐고 묻자 절대 아니라고 시치미 뗀다. 나는 격리와 그녀가 어제 만난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외국으로 떠나기 전에 격리와 마지막으로 만날 거라고 내게 연락해 왔었다.
“프랑스로 떠난다던데 자기는 모르는 거야?”
격리는 눈을 치켜뜨고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모르겠단다. 격리 생각이 궁금해 넌지시 묻는다.
“그녀에게 우리 집 살림을 계속 맡기면 어떨까?”
격리가 힐긋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쪽으로 획 돌린다. 당황한 것 같은데 아무런 대꾸가 없다. 그 뒤통수에 대고 다시 말을 잇는다.
“난 자기만 좋으면 상관없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떠나기 전에 빨리 잡아야 하니까, 잘 생각해봐. 오늘밖에 시간이 없어.”
하지만 격리는 온종일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더니 잠들기 직전에 묻는다.
“정말 그녀와 함께 살아도 괜찮겠어?”
내가 정색하고 빤히 쳐다보자 금세 표정을 바꾸고는 그냥 해본 말이란다. 농담이라며 잠이나 자자고 한다.
“아니야, 내가 연락해볼게.”
그녀에게 전화하자 곧바로 받는다. 내가 함께 살자고 말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하겠단다. 전화를 끊고 격리의 표정을 살피자 입술을 실룩거린다. 저런! 좋은가 보다.
이튿날 아침, 격리에게 미용실에 간다고 말하고는 두 시간 일찍 집에서 나온다. 격리와는 식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집에서 나와 곧바로 공항으로 가 비행기에 올라타자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곧바로 지난 새벽에 격리가 보낸 문자를 보여준다.
‘우리 다시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나는 3년간 프랑스에 있는 지사로 파견 근무 간다. 그녀와 함께 지낼 생각이다. 그녀라면 나를 온전하게 보호해줄 것 같다. 애인을 그렇게까지 이용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격리는 기생충이다. 지난 두 달간 나는 내가 사는 이 세상에 관해 학습했다. 격리는 전 재산을 들여 로봇을 사는 것이 유행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로봇이 산업 현장 전반에 등장하자 많은 사람이 갈 곳을 잃었다. 그 사람 중에 일부는 다른 사람에게 달라붙어 기생충처럼 살아간다. 그러니까 기생 인간이 유행이다. 우리가 태평양 하늘에 있을 때쯤 격리는 혼자 예복을 입고 결혼식장에 있을 거다. 그리고 내일 새로운 집주인이 들어오면 격리는 결국 거리로 쫓겨나게 될 거다. 아주 마땅한 일이다.
한 달 전, 나를 찾아온 그녀가 내게 털어놓은 이야기는 이렇다. 격리는 자기 집을 팔아 마련한 돈과 회사 공금을 유용해 주식과 코인 등 여기저기에 투자했다. 어느 순간 그 돈이 모두 먼지처럼 날아갔다. 격리와 사귀던 그녀는 격리가 회사 공금을 횡령한 사실을 알고도 덮어준다. 그러다가 들통이 나자 그녀는 격리가 형사고발을 면하는 조건으로 자기의 전 재산을 회사에 넘겼다. 호텔 입장에선 이미지를 생각해 조용히 처리했던 거다. 격리는 그녀를 설득해 내게 달라붙었고 나와 결혼식을 올린 후 내 재산을 가로챌 계획이었다. 격리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돈의 노예가 됐던 거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격리를 더는 믿을 수가 없어 내게 털어놓는 거라고 했다. 또 내가 걱정되어 속일 수가 없었단다. 그녀를 믿었다. 이것이 그녀가 내게 털어놓은 진실이고 내가 확인한 사실이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후,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가 빙그레 웃는다. 난 여전히 그녀의 황금비율 몸매가 궁금하다.
“어떻게 몸매가 그렇게 그림 같죠?”
“사실은 요즘 로봇 신체 성형이 유행이에요.”
그러니까 나도 얼마든지 로봇 몸매를 가질 수 있단다. 세상 좋기는 한데 어쩌다가 사람이 로봇을 따라 하게 됐을까?
그녀는 내 옆에 있다. 비록 나를 초라하게 만들지만, 지금 내게는 그녀밖에 없다. 외국 생활을 하는 동안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거다. 물론 뻥 뚫린 구멍까지도.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예쁜 그녀와 내가 과연 잘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 내가 의지하는 사람은 그녀다. 목구멍을 뚫어준 그녀의 따듯한 온기를 믿는다. 믿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일지도 모르니까? 더는 나 혼자가 아니기를, 나의 미래는 진정 그녀이기를.
첫댓글 역쉬 발상이 남다르셩. ㅎㅎ
사실은 처음 쓴 게 오래됐는데ㆍ갑자기 기생충이란 영화가 나와서 그냥 접었다가 최근에 수정한 글이에요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