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배 두목에서 최초의 선교사가 된
이기풍 목사(1865-1942)
이기풍 목사에 대해서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젊은 시절 폭력배 두목으로 방랑생활을 한 그가 예수를 믿고 조선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어 한국인 최초 장로교 목사 7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으며,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창설되면서 제주도에 최초 선교사로 파송 받은 것이다."
이기풍은 1868년 11월 21일 평양에서 농부인 부친 이제진과 모친 김 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치 있고 슬기로워 동네 사람들에게 신동이라고 불렸다. 여섯 살 때 사서오경을 줄줄 외웠고, 열두 살 때는 백일장에 나가 붓글씨를 써서 장원이 되었다. 그는 성품이 괄괄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혈기가 방장해졌다. 그는 석전(石戰)과 박치기의 명수였다. 어려서부터 부자와 높은 벼슬을 가진 고관대작들을 몹시 증오했으며, 성격이 과격하고 싸움과 술을 좋아해 청년시절 평양에서 유명한 폭력배로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
서양 선교사들이 서양 귀신을 앞세워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 한다는 생각을 한 이기풍이 사무엘 마펫(S. A. Moffett, 馬布三悅, 1864-1939, 이하 마포삼열) 선교사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뒤를 따라가 집을 알아둔 후 친구 대여섯 명과 몰려가 돌을 던지자, 이 집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마침 외출 중이었기 때문에 인명 피해는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한 달이 지나고 우연히 평양 장터를 지나다 서툰 조선말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마포삼열 선교사를 보았다. 이기풍은 반사적으로 발밑에 있는 돌을 주워 마포삼열 선교사를 향해 던졌다. 돌은 그대로 날아가 선교사의 턱을 정통으로 때렸고, 그 자리에 거꾸러진 선교사는 피가 낭자하게 땅에 흘렀다. 특별히 이때 이기풍이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졌던 상황에 대해 길진경은 그의 아버지 《영계 길선주》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기풍이라는 젊은이가 많은 구경꾼들이 둘러 서 있는 뒤에서 물에 적시어 눈 속에 묻어 얼린 솔방울을 선교사에게 던졌다. 그 솔방울은 선교사의 턱에 맞아 피를 뿜게 했다. 마포삼열은 손수건으로 턱을 감싸 쥐고 군중의 수모와 야유를 받으면서 숙소로 돌아갔다.
이 사건이 있었음에도 주눅 들지 않고 더욱 열심히 전도하던 마포삼열 선교사가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 지원을 받아 장대현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때 교회 건축 이야기를 들은 이기풍이 건달들을 데리고 가서 건물을 때려 부수고 불살라 건축 현장을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었다.
한편, 1894년에 일어났던 청일전쟁은 선교사들과 교회를 핍박하던 이기풍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으로 삽시간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변한 평양은 기근까지 겹쳐 기아에 허덕이며 더욱 힘든 상황이었다. 이때 이기풍은 원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과거의 오만하고 기고만장했던 패기가 모두 사라졌다. 할 수 없이 친구들의 권유로 담뱃대에 그림을 새겨서 팔기 시작하였다. 이기풍은 붓글씨뿐만 아니라 묵화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하루는 그림을 그린 담뱃대를 한 묶음 들고 힘없이 걸어가다가 윌리엄 스왈른(William L. Swallen,1865-1954, 이하 소안론) 선교사를 만났다. 그 순간 자신이 과거 평양에서 마포삼열 선교사를 핍박했던 일들이 생각나 양심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자신이 했던 일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이 나타나 그에게 말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너무 놀라서 깨보니 꿈이었는데,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는 이전에 자신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던 사람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기풍으로부터 꿈 이야기와 자신의 죄의식에 대한 고민을 듣게 된 이 사람이 이기풍을 소안론 선교사에게 데리고 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때 소안론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명히 당신을 예수님이 귀하게 쓰실 징조요. 당신 죄는 예수님이 다 사하여 주셨소. 기뻐하시오.”
평양의 폭력배 두목 이기풍은 자신이 과거에 선교사를 괴롭힌 사실을 고백하면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그때 나이가 30세였는데, 예수를 믿은 이후 그의 생활은 전적으로 달라져서 해가 뜨면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청일전쟁이 끝나고 평양으로 돌아온 이기풍은 옛날에 어울리던 석전패 술친구들을 모아 돌팔매질을 한 마포삼열 선교사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자기가 과거에 집 안으로 돌을 던지고 턱에 상처를 낸 난봉꾼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후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노라고 흐느끼며 용서를 구했다. 이기풍의 감격스럽고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마포삼열 선교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뿐이었다.
한편, 원산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던 이기풍은 소안론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1893년에 원산항의 명석동교회를 설립하는 데 일조하게 되는데, 이 사실에 대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소안론은 선복을 환착(換着)하고 조사 전군보, 이기풍과 병력(竝力)하야 수륙각지(水陸各地)에 열심 전도함으로.”
우리는 여기서 이기풍의 세례를 받은 날과 조사(助師)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사례는 이기풍이 1896년에 세례를 받고 조사가 되어 재령 선교구 지도자로 활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한영제는 1894년에 소안론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1989년부터 매서인 직분을 받아 함경남북도 일대를 누비며 전도했으며, 그 후 황해도 일대에서 조사로 활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이기풍의 조사 활동은 1893년에 시작되었으며, 1894년에는 소안론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함흥군 읍내교회를 세우는 데 일조하게 된다. 당시 선교사들은 세례를 주는 일에 매우 신중했으며, 따라서 세례 받지 않고 조사로 활동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이기풍은 청일전쟁으로 평양이 피폐해지자 살기 위해 원산으로 떠났다. 청일전쟁은 1894년 6월부터 1895년 4월 사이에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기풍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아 조사로 활동한 것은 1894년 후반기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01년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장로가 된 이기풍은 1903년에 조선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1907년 9월 17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설립되면서 최초 한국인 7명의 장로교 목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안수받았다. 다음 날 오전 노회가 속개되면서 마포삼열 선교사 요청으로 대표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설립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었는 데,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록'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새로 장립한 목사 칠인 중 일인을 선교사로 파송한 일
2. 제주 선교사는 이기풍 씨로 전도인 한두 사람과 동반하여 파송할 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 받은 이기풍은 기일 선교사의 동의로 전라남도 대리위원으로 참석하
면서, 이후 전라도의 신앙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목사 가운데 첫 번째 인물이 된다. 그는평안도 출신이었지만 자신의 삶 절반을 전라도에서 보냈다. 당시 이기풍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던 대부분의 동기들은 출신 지역 혹은 연고가 있는 지역에서 사역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이기풍은출신 지역과는 전혀 다른 무연고 지역으로, 그것도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황무지로 사역지를 선택했다. 이와 같은 이기풍의 선택은 집안의 무인 기질을 발휘하여 진취적이며 도전적인 것에서 기인한다고 할 것이다.
이기풍은 1903년 첫째 부인이 아이를 낳다가 사별하자 마포삼열 선교사 주례로 윤함애와 재혼했다. 당시 윤함애는 기일 선교사에게 5년 동안 보호를 받으면서 평양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이길함(Graham Lee) 선교의 집에서 지냈고 있었다. 그녀가 25세 되던 해에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중매하자 "저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려고 결심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사양했다. 그러나 일주일 만에 이기풍의 첫째 부인이 아이를 낳고 죽게 되면서 마포삼열 선교사가 다시 요청했을 때 금식기도 후 결심하고 이기풍과 결혼하였다.
1908년 1월 11일 길선주 목사가 시무하는 장대현교회에서 이기풍의 제주도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렸다. 이기풍은 제주도 선교지에 가기로 결정하던 날 밤 윤함애 사모와 철야기도로 밤을 세웠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괴나리봇짐을 머리에 이고 1908년 1월 17일 평양역을 떠나 인천항으로 갔다. 인천항에서 조그마한 목선을 타고 몇 번이나 큰 풍랑을 만나며 간신히 군산항을 거쳐 목포에 도착했다. 이기풍은 제주도에 먼저 들어가서 살펴보고 집을 마련한 후에 가족들을 데려가기로 하고 홀로 떠났다. 그런데 목포를 떠난 지 한 달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중 제주도로 가던 배가 난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44일 만에, 난파되어 배에 탔던 모든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으나 이기풍은 헤엄을 쳐서 추자도에 상륙하여 겨우 목숨을 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후 이기풍은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타고 겨우 목적지에 발을 딛게 되었다. 그런데 전도의 불타는 사명으로 제주도에 왔지만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극심한 핍박에 직면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제주성 안에 방을 붙이며 이기풍을 박해했다. 심지어 제주도 사람들을 모처럼 만나기라도 하면 아예 고개를 돌리고 손을 저으며 도망쳤다고 한다. 이기풍은 제주도에서의 선교가 너무 힘들고 더는 용기를 낼 수 없이 좌절감에 빠져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약 두 달 만에 다음과 같은 답장이 왔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를 않고 있고,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 노력하시오.
이 편지를 받고 이기풍은 평양으로 돌아가려고 쌓아둔 봇짐을 풀어버리고 다시 용기를 얻어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가 예수를 영접한 김재원을 비롯하여 홍순홍, 김홍련 등을 만나 향교골에서 기도회를 가졌으며, 1908년 6월에는 소학교를 시작했다. 1910년에는 성내 일도리 중인문 안에 6칸 초가를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1908년부터 1917년 동안 이기풍은 제주도에 성안교회를 비롯하여 금성, 삼양, 성읍, 조춘, 모슬포, 한림(수원), 용수, 세화 등의 교회들을 세웠다. 특별히 1908년에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김재원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금성리교회에서 훗날 제주 출신 1호 목사가 되고, 제주도에서 첫 순교한 이도종이 있다. 1908년의 독노회 보고에 의하면 이기풍이 제주도에 파송 받은 지 1년이 되지 않아 원입교인 9명, 주일 출석 20명이라는 선교 결과가 보고되었다.
이기풍은 1916년에 건강과 여러 가지 이유로 7년간 제주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제주도를 떠났다. 1년간의 안식년을 마친 그는 1916년 8월에 전라남도 광주 금동에 있는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하였다.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교인수가 점점 많아지자 교구를 나누어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와 양림교회(현 광주양림교회)로 분립하게 되었다. 1916년 전라노회 부노회장에 피선된 그는 1918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휴직했다가, 1919년 9월경에 회복되어 광주 제중원 전도목사로 사역을 감당했다. 그리고 1920년 3월에 순천읍교회(이후, 순천중앙교회)로 부임해 시무하면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총회장에 피선되고, 1921년 9월에는 제10대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24년 1월에 고흥읍교회로 부임한 이기풍은 이후 1927년 2월에 제주도를 떠난 지 12년 만에 성내교회 제2대 위임목사이자, 제6대 담임목사가 되어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는 이때를 제주도 2차 선교라고 했는 데, 이 시기에 그의 목회 활동은 1차 선교 때와는 달리 기도훈련과 성경 교육, 그리고 전도가 중심이었다. 이기풍이 제주도에서 2차 선교를 감당하던 1930년에 제주노회는 전남노회에서 분리 독립했다. 1931년에는성내교회를 후임자에게 맡기고 육지로 돌아와 같은 해 5월에 벌교읍교회로 부임하고, 1933년 6월에는 순천노회장에 피선되었다.
한편, 1938년 1월에 여천군 우학리교회로 부임한 이기풍은 1940년 9월 총회에서 최초의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940년 11월 15일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서 고초를 당하였다. 당시 이기풍을 검거한 죄목은 세 가지였다. 첫째, 신사참배를 거부한 죄, 둘째 미국 선교사와 동역했기 때문에 스파이 죄, 셋째 묵시록을 전문으로 강해한 죄였다.
당시 일제는 "천황-신민"이라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는 찬송가 가사 100여 곳을 삭제하거나 정정할 것을 1942년 4월 1일자 회보 게시했다. 여기에 보면, “왕, 대왕, 만백성, 백성, 임금, 구주, 구세주, 만유의 주재, 다스리네"라는 하나님의 통치권과 관련된 단어를 삭제하거나 정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와 관련된 단어인 "군병, 충성, 싸우라"는 단어를 "일꾼, 정성, 일하라" 등으로 바꾸고, 십자가 군병"이나 "내 주는 강한 성", "믿음이 이기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라는 단어와 재림, 악마, 세상의 혼란 등을 삭제하도록 했다.
당시 이기풍은 70세가 넘은 고령으로 모진 고문에 몸이 점점 쇠약해져 갔다. 그는 경찰서 안에서 완전히 탈진상태가 되어 똑바로 앉아 있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취조를 당할 때마다 다음과 같이 완강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나는 죽어도 일본 귀신한테 절할 수 없다. 너희들이 지금 총을 쏘아 죽인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어.
여수 고등계 형사실에서는 늙은 이기풍을 더 괴롭힐 궁리를 했지만, 고령인데다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죽을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광주형무소로 이첩되기 직전 1941년 4월에 병보석으로 석방하였다.
석방된 이기풍은 우학리교회로 돌아와 목회를 계속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약해져서, 병보석으로 풀려난 지 2개월쯤 지난 1942년 6월 20일, 75세를 일기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열정적인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유해는 우학리에 안장되었다가 1953년 광주기독묘지에 이장되었고, 1988년 4월 1일 광주제일교회가 관리하는 제일동산 당회장 구역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