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곡의 고금명성도] 133 (조선전기왕조실록) 초대왕 태조 이성계
조선왕조실록에 “고려 충숙왕 4년 (1335) 을해 10월 11일 기미(일)에 태조를 화령부 사제에서 낳았다”라고 되어 있고, 매해 10월 11일에 임금의 탄신일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더해 도계 박재완 선생의 명리요강엔 자시생으로 되어있으나, 정사 어디에도 태조의 태어난 시에 관한 정보는 없다.
[간략연보]
1세 (1335 을해년) 10월 11일 생
26세 (1360 경자년) 아버지 이자춘 사망 (이자춘 신도비명, 정릉 신도비명, 동문선에선 경자년 (1360년) 4월 18일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나 태조실록 총서와 고려사에서는 신축년 (1361년) 4월 30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7세 (1361 신축년) 반란군 수괴 박의를 잡아 목을 베는 공적 세움.
28세 (1362 임인년) 원나라 군대를 함흥에서 격퇴.
30세 (1364 갑진년) 다시 원나라 침입 격퇴
36세 (1370 경술년) 원나라 동녕부 원정으로 국토 확장
40세 (1374 갑인년) 개혁군주 공민왕 암살. 우왕 즉위.
46세 (1380 경신년) 황산대첩으로 왜구 섬멸. 이로 인해 당시 최영에 버금가는 영웅이 됨.
54세 (1388 무진년) 음력 5월 위화도 회군
57세 (1391 신미년)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 사망
58세 (1392 임신년) 정몽주가 이성계의 낙마 사고로 일선에서 물러난 틈을 타, 이성계 세력을 탄핵시킴. 하지만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상황이 타계됨. 7월 17일 조선의 왕으로 등극. 둘째 부인의 차남 방석을 세자로 책봉
60세 (1394 갑술년) 한양천도
62세 (1396 병자년) 둘째 부인이자 첫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 사망
64세 (1398 무인년) 음력 8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정도전 등과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이방석과 이방번을 죽임. 태조 이성계는 왕좌에서 내려오고 고향으로 내려옴. 정종 즉위.
66세 (1400 경진년)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은 바로 손위 동복형인 방간을 유배보내고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음. 정종은 상왕이 되고 이성계는 태상왕이 됨.
68세 (1402 임오년) 이성계가 배후에 있던 조사의의 난으로 이성계 사람들 여럿 처형당함. 태종이 보낸 무학대사의 간청으로 서울로 돌아옴.
74세 (1408 무자년) 5월 창덕궁에서 승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래 고려인이나 원나라가 지배하던 쌍성총관부 (지금의 함경남도에 위치) 소속 무인이었다. 원-명 교체기 원이 쇠퇴기에 접어들었을 때 이자춘은 고려 공민왕에게 투항하여 쌍성총관부를 조선이 원으로부터 탈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자춘의 사망 후 그의 아들 이성계는 아버지의 사설 군대와 가업을 물려받아 54세 때의 위화도 회군 전까지 최영 장군 다음가는 고려의 위대한 영웅이 되었다. 그는 활쏘기의 명장으로 전쟁이 일상이었던 고려말, 상대가 원나라이건 왜구이건 홍건적이건 백전백승을 한 장군으로 평생 전쟁에서 패배해본 적이 없었다. 아들 이방원 세력과의 대결 ‘조사의의 난‘에서 실패하기 전까지 그러했다.
원래 동북면의 장수들은 함경도 출신이라는 한계에 봉착하여 개경의 중앙 정치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고려말 잦은 전투와 전쟁으로 지친, 심지어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할 때 안동으로 피신까지 간 공민왕으로써는 동북면 장군들의 사병이 절실했고 결국 혁혁한 성과를 거둔 이들은 정치세력화 되었다.
당시 고려에는 친원파 권문세족이 강성했다. 그들은 백성들을 수탈하여 '국지불국(國之不國)', 즉 요즘 말로 '이게 나라냐'는 말이 유행하게 만든 원흉들이었다. 이들에 맞서 개혁군주였던 공민왕은 정몽주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대부들을 대거 등용했다. 하지만 1374년 개혁의 주체였던 공민왕은 암살 당한다. 왕위를 이어받은 우왕은 친원파로 권문세족이 다시 득세하기 시작한다. 이에 위기를 느낀 신진사대부들은 자연스럽게 우수한 사병을 보유하고 있는 동북면 장수인 이성계에게 접근하게 된다.
황산대첩으로 몇 년 전부터 이름을 날린 이성계의 나이 49세 때 (고려 우왕9년, 1383), 정도전이 동북면으로 찾아 간다. 이성계의 사설 군대인 가별초를 보고 '이런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라고 말한 이후, 그는 자신이 예전에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이라고 취중에 얘기한 것대로 이성계를 쓰게 된다.
당시 조정에선 친원파이자 권문세족인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우왕의 장인인 최영장군과 친명파이자 신진사대부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성계로 권력이 양분되었다. 세력을 확장하여 쌍성총관부를 내 놓으라고 하는 명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우왕은 요동정벌을 명했는데, 명을 받은 이성계는 진퇴양란에 빠졌다.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일단 목숨을 건질 확률이 적었으며, 설령 목숨을 건진다 해도 승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설령 승리를 한다 해도 친명파였던 이성계로서는 명나라를 친 모순에 빠지게 되니, 이래저래 우왕과 최영에게만 유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어명을 받든 이성계는 요동을 향해 진군하다 압록강 하류인 위화도에서 장마를 만나 군량이 바닥나고 군의 사기도 떨어진다. 이에 사불가론(四不可論, 1.작는 나라가 큰 나라는 치는 것 2.여름 농번기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 3.왜구가 쳐들어올 빌미를 제공하는 것 4.장마철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전염병이 우려 되는 것)을 앞세워 요동을 정벌하러 가지 않고 회군을 단행, 어명을 어긴 반란군이 되어 우왕과 최영이 있는 평양으로 향한다. 그의 결단은 장수들과 병사들의 지지를 얻었고 친위대만 주위에 있던 우왕과 최영은 개경으로 후퇴했지만 생포되고 유배 후 처형당했다. 왕위는 우왕의 아들 창왕이 계승했다. 하지만 창왕을 탐탁지 않게 여긴 이성계 세력은 기회를 보아 나중에 창왕과 그 지지세력도 죽이고, 허수아비인 공양왕을 내세운다.
우왕은 유약했다. 최영이 요동정벌 총사령관이기에 당연히 그가 정벌에 참여해야 했는데, 우왕은 ‘장인께서는(최영의 딸이 우왕과 혼인) 여기 남아야 왜구가 쳐들어 와도 저를 지켜주실 것 아닙니까? 선왕께서 변을 당할 당시도 장인께서 남쪽 정벌로 자리를 비웠을 때가 아닙니까? 제발 내 곁에 있어주시오’라며 청을 하여, 최영은 군대를 모두 정벌을 떠나는 이성계에게 주고 자신은 우왕 곁에 남았다. 만약 최영이 정벌에 참여 했다면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함부로 회군하지 못했으리라. 우왕은 이성계의 사불가론 상소의 3번째 ‘왜구에게 후방의 허점을 노출 한다’는 사안이 그렇게 걱정되었으면 요동정벌을 하면 안 되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가 전권을 쥔 조정에서의 신진사대부들은 둘로 갈리게 된다. 정도전처럼 역성혁명을 꾀하는 급진파와 개혁을 하더라도 고려왕조는 이어가야 한다는 정몽주로 대표되는 온건파가 그것이다. 정몽주는 정도전처럼 이성계의 책사였다. 특히나 정몽주는 고려 공민왕 때 학문, 외교, 경제, 군사, 등의 모든 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내던 터라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원치 않았던 그를 어떻게 해서든 포섭하려 노력했다. 그래야 민심도 잡고 권력찬탈의 정당성도 더욱 확보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사는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무도 예측 못하는 바, 이성계가 낙마로 일선에서 잠시 물러난 틈을 타, 친이성계 세력을 탄핵하는 정몽주를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죽이면서 사태는 일단락된다. 이 일로 이성계와 이방원의 부자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태조 이성계의 배우자로 신의왕후 한씨와 신덕왕후 강씨가 있었다. 신의왕후 소생으로 방우(조선 건국 직후 사망), 방과(후에 정종), 방의(야심이 적고 술자리에서 정치 얘기가 나오면 입을 닫는 것으로 유명), 방간(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사망), 방원(후에 태종), 방연(위화도 회군 즈음하여 사망)과 공주 둘이 있었고 신덕왕후 소생으로 방번과 방석(태조의 세자) 그리고 공주 하나가 있었다.
첫째 부인 신의왕후는 남편 이성계가 전쟁터를 누비고 다닐 당시 아이들을 잘 키워냈으나 조선 건국 직전 사망하여 왕비가 되지는 못했다.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는 ‘버들잎설화’의 주인공으로 목이 마른 이성계가 물을 청하니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주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실까 그리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러한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었는데 남편 이성계와는 21살 차이로, 장남 방우보다 2살이 어렸다. 왕비 소생의 두 아들 중 형인 방번은 공양왕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고려 왕족을 지워야했던 새로운 국가의 세자가 되기 어려웠고 동생인 방석이 세자 자리를 꿰찬다. 하지만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에 의해 그의 배다른 형제인 방석과 방번은 생을 마감한다.
태조 이방원은 계모였던 신덕왕후를 매우 싫어하여 정동에 있던 신덕왕후릉을 현재의 성북구쪽 정릉으로 강제 이장하고 능에서 묘로 격하했으며 기존에 있던 석물들을 청계천 다리 공사에 쓰게 하여 백성들이 이를 밟고 지나가게 했다. 지금의 청계천 광통교 정릉 석물들은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 복원 사업 중에 발견된 것으로 이전에는 청계고가도로 밑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이방원이 계모를 이렇게나 싫어했다는 것은 이성계가 신덕왕후를 그리고 그녀의 자식 방번과 방석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역으로 보여준다. 당연히 그녀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았으니 왕비를 사랑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신덕왕후가 묻혀 있는 정릉에선 요즘 가을마다 버들잎축제가 열린다.
온건파 신진사대부 정몽주가 죽은 뒤 이제 한반도는 이성계 것이었다. 허수아비로 세운 공양왕을 내치고 이성계가 즉위했는데, 문제는 이제 나타났다. 왕조 설립에 공이 많은 이들을 위한 공신책봉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등장한다.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아들들이 그들이다. 특히나 방원은 위화도에서 아버지가 회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우왕과 최영이 가족들을 인질로 잡을까봐 그들을 데리고 빠르게 피신하여 공을 세웠고, 아버지의 뜻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당시 이성계 즉위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를 죽였으니 특등공신에 가까웠는데 왕자들에게는 거의 공이 돌아가지 않았다. 특히나 아무리 왕자라도 이제는 사병을 갖고 있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펼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불만이 많았다. 이에 방원은 부인(후에 원경왕후)이 친정에 감춘 무기를 가지고, 부인의 친정 남동생들인 민무질, 민무구 등의 도움으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이복 아우들인 방번과 방석을 죽인다. 아버지 이성계를 상왕으로 내치고 자신의 형인 방과를 정종으로 앉혀 명분을 만든 뒤, 제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에 욕심이 있던 형 방간까지 죽인 후 자신이 왕으로 즉위한다.
이성계의 입장에서 당시 이방원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개혁의 동지였던 정몽주에 이어 정도전이 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사랑했던 둘째 부인의 자식인 방번과 심지어 내가 세자로 책봉한 방석도 이방원이 죽이고, 방원의 이복도 아닌 동복형인 방과도 죽이는 등, 이방원은 이성계 입장에서는 모든 불행의 원흉이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이방원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방원 이상 가는 조선의 건국에 목숨을 걸고 공을 세운 이가 과연 또 몇이나 있을까?
말년의 이성계는 둘째 부인의 친척 조사의를 앞세워 동북면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한다. 당시 이성계 역시 동북면에 머무르면서 조사의에게 반란의 실리와 명분 모두를 제공한다. 처음엔 이방원이 동북면 함흥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궁으로 돌아오시라고 전갈을 자주 보냈다. 그렇게 파견된 박순과 송류는 이성계가 살해하여 불귀의 ‘함흥차사’라는 전설의 주인공이 된다. 조사의의 반란군은 초반엔 파죽지세로 진군하였지만 곧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이성계는 이방원과 화해를 했다고 전해진다.
[생시검증]
태조 이성계의 생애는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27-54세] 아버지 이자춘의 사망 후 가문의 배경과 자신의 능력으로 고려의 무관으로 전쟁터에서 명성을 쌓는 시기
[54-64세] 54세 무진년 위화도 회군부터 시작하여 58세 임신년 조선의 왕으로 등극한 이후 6년간 왕으로서의 제위 기간
[64-74세] 64세 무인년 아들 이방원에 의해 왕좌에서 내려와 정종 때는 상왕으로 태종 때는 태상왕이 되어 함흥으로 물러나 있다가 68세 임오년 부자간의 대결인 조사의의 난 실패로 한양으로 돌아온 후, 여생을 유람하며 보내다 74세 무자년 승하하기까지 시기
계속 승승장구하다 54-64세의 기간, 즉 위화도 회군부터 제1차 왕자의 난 직전까지가 태조 이성계 인생의 절정기였지 않았나 싶다. 이후로는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성계 인생의 행보 중에 특이한 점은 54세 무진년, 64세 무인년, 74세 무자년에 큰 변혁이 있었다는 점이다. 각기 위화도 회군, 제1차 왕자의 난, 그리고 승하한 해이다.
선천 명반에선, 1) 전장을 누비는 백전백승의 장군의 상이 있는지, 2) 인생 후반부에 자식인 이방원에 의해 다른 자식들이 많이 죽고 책사였던 정몽주와 정도전도 죽고 자신의 왕위도 내어 주는 상이 있는지를 중점으로 보겠다. 운추론에선 1) 54세 위화도 회군으로 목숨 걸고 어명을 거역하는 상이 보이는지, 2) 58세에 왕으로 등극하고, 3) 64세에 아들 방원에 의해 상왕으로 내려앉고 4) 74세에 승하하는지를 중점으로 생시 검증을 해 보겠다.
자시: 전장을 누비는 장군의 명이면 천이궁이나 관록궁 정도에 경양 등의 위권출중한 살을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인생 후반부에 가족 참상의 암시 역시 잘 보이지 않는다. 54세 위화도 회군은 계미대한 때의 일인데 대한 천이궁에 천량화권에 보필이 있다는 것 말고는 크게 이를 암시하는 상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선천과 대한에서 파조파가의 무파상이나 큰 변혁을 의미하는 칠살 혹은 격발이나 폭발의 암시 정도는 있어야하지 않을까한다. 64세 무인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아들 방석과 방번은 죽고 자신은 상왕으로 내려 앉는 사안은 임오대한 마지막 해이다. 만약 이 생시가 맞다면 임오대한은 왕으로써 권력을 누리고 마지막 해에 왕좌에서 내려오는 형상이니 초선종악의 상, 즉 기거나 상황이 좋은 태양과 안 좋은 태음 등이 비추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74세 무자년 승하하는데, 이는 신사대한 마지막 해이다. 선천 관록궁의 록존이 대한 관록에서 선천화기를 만나니 관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기 쉽다. 특히나 대한의 명궁이 태양이니 관록을 의미한다. 이 대한의 화두는 관록의 변화이지, 본인의 상망이라고 보기 쉽지 않다. 특히나 선천과 대한의 화권이 내궁으로 들어와 있고, 대한 재복선이 매우 길해 보인다.
축시: 오살특수격으로 본다면 격이 낮지 않고, 천이궁의 록마협된 경양은 장수의 명으로 적합하다. 명천선의 화양격발 화탐격발 그리고 홍란천희 등도 길이건 흉이건 사안이 증폭되어 인생의 스케일이 큰 것으로 해석이 된다. 부모궁 영성과 명궁 화성은, 이 두 궁의 교호관계가 심대하다는 것으로 특히나 이로인해 명궁이 화탐횡발이 되는 것에 기여하고 있으니, 아버지 이자춘이 기반으로 삼던 동북면의 사병들이나 가업을 아들인 이성계가 이어 받는 것을 암시한다.
54세 무진년 위화도 회군은 임오대한 때의 일인데 고려의 장군으로 승승장구하던 이 대한 마지막엔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 전체의 권력마저 획득한다. 특수격은 선천을 볼 때만 해당된다는 점에서 임오대한에 살을 많이 본다는 것은 이 대한 중에 운이 안 따를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무력을 쓰는 장수 입장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운동선수나 무용 등을 전공하는 이들의 명반은 살을 보는 대한에서 오히려 큰 성취를 얻을 수 있다. 특히나 선천 부관선이 자부살의 인인위귀(사람으로 인해 귀해짐)인데 그러한 선천 부관이 대한 부관선에 와선 화탐횡발 화양격발에 그러한 격발의 규모를 더욱 크게 만드는 폭발을 암시하는 홍란천희마저 있으니 이 대한의 폭발적 대길함을 충분히 보여준다.
55-64세의 기간엔 왕으로서의 권력을 누리다 이 대한 마지막 해에 아들 이방원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는 시기이다. 54세 위화도 회군 이후로 전장을 직접 지휘하는 일이 없이 고려의 최고 권력자로서 개경에서만 활약을 하니 살을 보지 않는 대한으로 온 것이 잘 들어 맞는다. 신사대한의 관록궁엔 선천의 태음화기가 있어 언듯 흉해 보이나, 삼방사정에서 그 밖의 흉성은 보지를 않고 오히려 쌍화권을 보니 내 마음이 쓰이는 (나(己) + 마음(心)) 것을 의미할 뿐 큰 흉상은 아니다.
제1차 왕자의 난은 64세 무인년 때의 일이다. 대한 명궁의 태양은 관록과 자식을 주하는데, 마침 무인년 유년 명궁인 인궁은 대한의 자녀궁이자 선천의 관록궁이다. 인궁의 칠살은 육친형극과 본인변화를 암시하는데, 이 해에 아들 이방원에 의해 다른 배다른 아들 방석과 방번이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자신은 왕에서 상왕으로 내려 앉게된다. 그리고 이 모두는 자부살의 의미답게 갑작스럽게 발생한다.
65-74세 경진대한에 상왕과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다가 대한 말 74세 무자년에 승하한다. 선천에서 봤던 변방에서 승승장구하는 장군의 명으로 보이는 것에 결정적 역할을 한 천이궁 록마협 받은 무곡경양의 대한이다. 그러하기에 이 대한 중에 그렇게 무기력하게 상왕과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지 않을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사실, 이 부분이 생시검증을 하기 이전부터 의문이었다. 분명 고려의 영웅 백전백승 장군이었으니 천이궁에 위권출중함이 보일텐데, 그리고 선천 천이궁 대한은 보통 60-70대일텐데, 그렇다면 이성계의 명반 상에 선천 천이궁 대한에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물러가 있는 그런 무기력한 암시가 보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 축시 명반을 보고 그러한 의문이 풀렸다.
선천 노복궁 록존이 대한 노복궁에서 선천 화기를 만나 노복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쉽다는 것이 핵심이다. '근본적인 변화'라고 점잖은 표현을 썼으나 이 나이 대의 노복궁의 저러한 모습은 사실 노복궁이 깨졌다고 봐야한다. 경진대한 노복궁에 선천의 화기가 있는 것만으로도 그 궁이 깨졌다고 할 수 있지만, 원래 선천 노복궁에 록존 있기에, 일반적으로 화기를 맞아 깨진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양타협기가 이 대한에 와서 완성된다고 봐야 한다. 노복궁은 communication궁으로 어디를 가든 이방원이 감시를 붙여서 이 대한 내내 운신을 하기 쉽지 않은 상이 그대로 읽힌다. 심지어 상왕 이성계가 함흥에 있을 때 궁으로 돌아오시라는 이방원의 전갈을 보낸 신하들을 다 죽여 '함흥차사'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자미심전1, p.418의, 이건희 회장 명반의 정유대한 역시 선천 노복의 록존이 대한 노복에서 선천화기를 만나는 대한으로 이 대한 중에 뇌졸중으로 장기간 입원을 하고 자신은 결국 사망하면서 아들은 감옥에 가게 된다. 젊은 시기의 대한에선 달리 봐야지만 나이들어서의 대한에서 선천 노복 록존이 대한 노복 화기운으로 오는 시기는 특히 유의해야 한다.)
74세 승하한 해는 무자년인데 자궁은 대한 이차발생궁이다. 경진대한 록기로 상망의 상관궁선 중에 상문백호가 있는 축미궁이 인동되지 않았다. 무자년 유년 부질선인 축미궁은 거울공명되면서 유년 천기화기로 인동된다. 상관궁성의 완성이다.
인시: 살성이라고는 공겁 밖에 비추지 않아 무장의 명반으로 보기 쉽지 않다. 특히나 천이궁에 록존이 있어 이 명반의 주인은 자신의 행동 무대에서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특히 복덕궁 태음화기에 화성이 동궁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신사대한 정도에 천이상에서 여성 육친의 형극으로 마음을 상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의 인생과 맞지 않다.
묘시: 오살특수격임을 체로 놓고 해석해 보자면, 무파상 파조파가다노록이기에 왕조을 없애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자신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난 이성계의 인생과 부합한다. 관록궁은 화탐격이고 재백궁은 쌍록협, 록마협, 록권협을 받은 묘왕지 경양이 있어 자신의 생각을 현실로 표출하는 것에 (재백궁은 복덕궁의 현실투영궁, 자미심전1. p.53) 거리낌이 없는 상이 역시나 태조의 인생과 부합한다. 다만 운을 따져보니 잘 안 맞는다. 위화도 회군은 54세 때의 일로 기묘대한인데, 기묘가 아니라 경진대한이라면 이해가된다. 경진대한 명궁에 위권출중한 쌍록협 록마협 록권협을 받은 경양과 큰 변화를 의미하는 칠살이 있는데 대한 부관선이 파조파가를 의미하는 무파상이니 그러하다. 하지만 기묘대한은 대한 명궁에 록존이 좌하면서 삼방에서 각종 길성이 보이는데, 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은 아무런 일을 안했는데 일이 잘 풀리는 것을 의미할 뿐, 천량화권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반란을 꾀할 정도의 운으로 볼 수는 없다. 또한 64세 무인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좌에서 물러 나가는 해는 무인대한인데, 대한 차원에서는 수긍이 간다. 일단 대한 명궁 앉은 자리가 파조파가 무파상인데 대한 자녀궁에 선천화기가 있으면서 대한 무간 천기화기로 그러한 사해궁선이 인동 되니 그러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무인년에 발생하기 보다는 그 전 해인 정축년 정도가 적당하다. 대한의 록기를 유년에서 수미상접 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 대한 자녀 흉상의 암시는 있지만 자녀로 인해 나의 관록에 문제가 생기는 상은 읽기 어렵다.
진시: 낮생인 태양이라 주성인데 보필을 보고 삼방에서 쌍록과 삼태팔좌 등을 또한 보니 지도자 명반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나 천이궁의 보필은 자신의 수하 장수들이라고 해석한다면 그들의 희생을 토대로 일월의 다양한 수하들의 노고로 인해 자신의 성과를 이루게 됨으로 볼 수 있다. 태음화기(忌)는 그들의 봉사와 희생을 향한 나의(己) 마음(心)이 가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자녀궁 쌍록마와 록권협된 묘왕지 경양과 동궁한 자미화과는 자식인 이방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부터 왕위 등극까지의 54-58세는 무인대한으로 대한 명궁 은근한 격발인 영탐과 영타격 외에 어떠한 격발의 암시도 없다. 위화도 회군은 은근한 격발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64세는 기축대한인데, 이 대한 중에 자식으로 인해 내가 왕좌에서 물러나는 상 역시 잘 읽히지 않는다.
사시: 인생의 큰 변화가 한번 이상 있다는 칠살명이다. 身궁에 쌍록마협, 록권협을 받는 자미화과에 경양이 있으니 인생 후반부에 더욱 위권출중하기 쉽다. 이 身궁은 또한 부처궁이기도하니 첫 부인보다는 두 번째 부인이 나을 수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신덕왕후는 ‘버들잎 설화’의 주인공이다. 자녀궁에 양타협살이 있으니 아들은 거의 다 죽거나 자신의 왕위를 빼앗거나했던 이성계의 인생을 보여주는 듯 하다. 자녀궁은 또한 내가 그 미래를 책임져주는 대상이기도 하니 책사였던 정몽주와 정도전의 죽음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사실 이성계의 인생 전체를 보았을 때 자녀궁에 록존이 있을 확률이 꽤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래야 나의 복덕의 현실투영궁인 재백에 타라를 주게 되어 내 생각을 현실에서 이어가게 해주기도 하고 지연시켜주게 되기도 한다. 또한 나의 부처궁엔 경양을 주게되어 대궁인 관록궁의 위권출중함을 더해주는 길한 역할도 하지만 두 번째 부인에게는 자녀궁 이방원의 록존 때문에 온 경양이 눈엣가시로서의 역할 역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이 안 맞는다. 위화도 회군은 54세 때의 일로 기축대한인데 외궁인 대한 전택궁 진궁이 강해 위험을 무릅쓴 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대한 명궁인 축궁과 관록궁인 사궁은 어떠한 격발의 암시도 보이지 않는다. 64세 때의 제1차 왕자의 난은 무자대한 때의 일로, 대한 자녀궁이 피해궁선이 된다. 하지만 자녀 흉상으로 인해 대한 관록궁이 상왕으로 물러선 것에 비해 대한의 관록궁인 진궁이 매우 위권출중하다. 만약 진궁에 경양만 있는 게 아니라 지겁도 있으니 흉하다고 본다면 애시당초 경진대한 자체가 흉했어야한다. 이래저래 안 맞는다.
사실 축시 명반이 아니었으면 사시도 유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으로 보기에는 세부적인 운추론에 있어 아귀가 안 맞는 것 외에, 천이상에서 위권출중한 장군의 명이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54세 위화도 회군 직전까지 왜구, 원나라, 홍건적, 등을 전장에서 물리친 야전사령관이자 고려의 영웅이라고 보기에는 선천 천이궁과 인생 전반기의 천이궁이 전부 얌전해 보인다.
오시: 사궁 천상이다. 위권출중한 점이라고는 부처궁에서 관록궁으로 차성된 화탐횡발과 동궁한 자미화과인데, 이것 하나로 백전백승의 장수이자 나라를 세운 왕으로 보기는 힘들다. 함몰격이기에 (함몰격: https://cafe.daum.net/reedoo/JdlW/1763) 인생이 고달픈 업보 많은 인생이고, 살성이 대한 명궁에 안 나오기 시작하는 기축대한부터 겨우 편안해지는 이의 명반으로 보인다.
미시: 록마협과 영탐협을 받은 거화양이다. 거문은 태양빛을 받아야 그 어두움이 걷히는데, 자궁 함지 태양이라 그 빛이 미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살특수격으로 본다면 선천을 좋게 봐주고 명궁에 있는 경양으로 장군이나 왕의 명이라고 볼 수는 있다. 특히나 身복덕궁의 천량화권과 천형은 현대인이라면 군경계통이기 쉽다. 하지만 위화도회군은 대한 명궁 파조파가다노록에 대한 관록궁 자미화과가 있는 정해대한 그리고 제1차 왕자의 난은 왕좌에서 물러나 향수나 즐기는 천동 대한에 대한 관록궁 기월 태음화기가 있는 병술대한이 어울리나, 이 명반상 위화도회군은 54세 생일 전까지인 무자대한이고 제1차 왕자의 난은 64세 생일 전까지인 정해대한이다. 묘하게 운의 톱니가 하나씩 안 맞는다.
신시: 명궁이 묘궁 천동인데, 록존이 지공과 동궁한다. 무정성이거나 혹은 정성이 있어도 살이 같이 있는 록존 명궁은 양타협 때문에 구두쇠가 되기 쉽다. 천형을 보지 않으니 특수격도 아닌데 길성은 보이지 않고 살성만 비추는 명반이다. 그 어떠한 것으로도 장군이나 왕으로 보이지 않는다.
유시: 오살특수격으로 볼 수 있고 인생에 몇 번의 큰 변화가 있다는 칠살명이다. 복덕궁에 록마협을 받는 묘왕지 경양이 있고 천이궁에 자미화과가 있어 시원시원한 성격의 행동 무대에서 명성을 쌓는 장군 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운 하나하나가 안 맞는다. 54세 위화도 회군이 발생한 시기는 병술대한인데 대한 천이궁에 경양이 있다는 것 말고는 항명하여 왕을 물러나게 하는 상으로는 약하다. 제1차 왕자의 난은 64세 을유대한인데, 대한 명궁 태음화기만으로 이를 추론하기는 힘들다. 또한 이 대한에서 이성계는 왕권을 휘두르다 마지막 해에 아들에 의해 권력을 빼앗긴다. 그렇다면 그렇게 9년 동안 길하다가 마지막 해에만 매우 흉한 상황이 이 대한의 암시로 드러나야 하는데 그런 암시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64세 무인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자식이 반란을 일으키는 암시는 전혀 찾을 수 없다. 결국 을유대한은 천이궁 록존으로 자신이 주도해서 무언가 일을 추진한 나라를 세운 군주로서의 상과는 거리가 있고 대한 관록궁에 각종 보좌길성이 있으니 나라를 세운 직후의 상황이라기 보다는 알아서 잘 굴러가는 조직을 운영하는 시기로 봐야 한다.
술시: 창곡협을 받은 축궁 천기화록이다. 복덕궁 태음화기에 양타협기가 되어 전택궁의 경양과 부모궁의 타라가 침탈하기 매우 쉬운 구조라서, 매우 민감하고 소심한 성격이 되기 쉽다. 장군이나 왕으로 보기는 힘들다. 굳이 왕이라고 본다면 자미심전2, p. 442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명반과 비슷하다. 왕조를 개창한 군주로 보이지 않는다. 54세 위화도 회군은 을유대한인데, 길하게 횡발하는 상이 읽히지 않는다. 64세 제1차 왕자의 난은 갑신대한인데 자녀에 의해 왕권을 빼앗기는 암시 역시 찾기 힘들다.
해시: 관록궁에 강왕한 경양이 있고 살을 많이 보니 변방을 지키는 장군의 모습처럼 보인다. 게다가 전택궁에 양타협기가 있어 가족의 참상을 말하는 듯 하고 복덕궁엔 자미천부에 화과가 있어 이상을 품고 있고 이를 드러내는 형상이 보인다. 하지만 54세 위화도 회군은 갑신대한의 일로 대한 명궁에 칠살이 있고 자부살에 화성이 있으니 본인 변화가 갑자기 발생할 수 있는 암시가 있으나, 아무리 특수격으로 보더라도 운에서 살은 온전히 살로 해석을 해야 하기에 왕조를 개창하는 시기라고 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대한 재백궁에 경양이 있는데 그러한 경양이 삼방에서 대모와 공겁 등을 보고 있으니 요즘 말로 돈으로 플렉스하다가 (돈자랑 하다가) 망하는 운이다.
결론적으로 축시생으로 보인다.
[선천 명반 분석]
명신궁 삼방사정에서 천형, 공겁, 화성, 그리고 괴월을 보는 오살특수격이다. 명궁에 화탐횡발, 명천선으로 화양격발과 역시나 폭발을 암시하는 홍란천희가 있어 그 위세가 높다. 천이궁의 록마협된 경양은 변방에서 성과를 올리는 장수의 명으로 적합하고 이러한 천이궁의 정성이 무곡이니 그 행동력은 누구 못지않다. 그리고 그러한 무곡은 삼방에서 괴월을 보니 무곡으로 변방에서 움직일 기회는 이 명에게 항상 주어진다.
부모궁 영성과 명궁 화성은, 이 두 궁의 교호관계가 심대하다는 것으로 특히나 이로 인해 명궁이 화탐횡발이 되는 것에 기여하고 있으니, 아버지 이자춘이 기반으로 삼던 동북면의 사병들이나 가업을 아들인 이성계가 이어 받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 또한 부모궁의 천수는 전택궁의 천량과 더불어 身복덕궁을 쌍노인성으로 협해주니, 항상 일을 진행할 때 신중하게 그리고 능숙하게 함을 알 수 있다. 특히나 身복덕궁에 있는 정성에 천상이 있으니 부모궁과 전택궁으로부터 받는 힘이 격외로 중요하다.
노복궁에 록존이 있어 전택궁 화권과 더불어 관록궁을 록권협해주고 질액궁 천마와 더불어 천이궁을 록마협 해주니 길한 대인관계격(자미심전1, p.155)이다. 정몽주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대부들과 긴밀하게 연락하고 협조하여 대업을 성취했으니, 이는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나중에 정몽주는 온건개혁파로 뜻을 달리 하게 되지만 말이다. 참고로 노복궁의 역할이 지대하면서 명궁과 암합을 하는 명반으로 자미심전1, p.389의 이건희 회장이 있는데, 이 회장은 선천 노복 록존이 대한 노복에서 선천화기를 만나는 운인 정유대한에 오랜 입원 끝에 사망했고 이성계 역시 선천 노복 록존이 대한 노복 화기를 만나는 운인 경진대한에 승하한다.
노복궁이 이렇게 중요하지만, 단순한 대인관계격 이상의 의미가 이 명반에 숨겨있다. 재백궁 록마협 -> 질액천이궁 허모 -> 천이궁 록마협 -> 노복궁 양타협 -> 관록궁 록권협으로 도미노격(자미심전1, p.165)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도미노가 재백궁에서 관록궁까지 이어지고 이 궁들이 전부 현실투영궁(자미심전1, p.53)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근본이나 생각을 현실로 표출하는 것에 각 궁들이 유기적으로 엮여서 이를 돕는 구조이다. 특히나 그 중심이 되는 천이궁은 무곡으로 봉무간염(자미심전1, p.109)에 의해 身복덕궁과 격외로 엮여 있으니, 사상가가 아닌 행동가의 명반이 무엇인지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보통의 경우 천이궁이 身궁이면 행동가 스타일이고 복덕궁이 身궁이면 사상가 스타일이 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렇게 묘한 예외도 있으니 조심해야한다.
아니 어쩌면 이성계는 행동가이자 사상가이기도 한 듯싶다. 물론 건국에 있어 정도전으로부터 절대적인 도움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예를 들어 건국 초에 조정에서 앉지 않고 서서 회의를 주관하기도 하고, 건국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 세력들도 보듬어 가려고 노력하는 등의 일일이 세부적인 사안들을 전부 정도전이 조정하듯 지시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성계 자신도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명반 상으로는 身궁이 복덕궁에 좌한 것으로 이를 알 수 있다.
[자녀의 그리고 자녀에 의한 흉상]
이성계 나이 54세 때의 위화도 회군에서 자녀의, 좀 더 구체적으로 이방원의, 역할이 매우 컸다. 위화도에서 아버지가 회군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왕과 최영이 그의 가족을 인질로 잡을까봐 피신시킨 덕분에 무사했다. 이방원이 자신의 뜻과 어긋나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이성계의 인생의 후반부, 그의 나이 58세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기 직전, 역성혁명의 마지막 걸림돌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인 것이다. 비록 그는 온건개혁파로 역성혁명을 반대하기는 했지만, 이성계 입장에서 오랜 동안 개혁의 뜻을 같이 했으며 능력있고 신망있는 그런 인재를 포섭하지 못하면 혁명의 명분을 확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입장을 물어보지도 않고 이방원이 독자적인 행동을 하니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64세에 이르러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과 그의 이복 동생들을 죽인다. 이방원과의 마지막 충돌은 68세 때로, 이성계는 죽은 둘 째 부인의 친척 조사의를 시켜 난을 일으켜 이방원을 퇴위시키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정종을 다시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물론 난은 쉽게 진압이 되었고, 이 후 이성계는 ‘방원이는 하늘이 내린 것 같다’며 대립각을 거두고 화해하게 된다.
이성계 인생에 있어 자녀 문제는 평생의 화두였는가? 그렇지 않다. 58세 때부터 이방원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이야 환갑 전은 한창 때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당시 58세면 거의 인생 막바지 단계로 봐야한다. 사실 이성계와 이방원의 대립 그리고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이복 동생들을 죽인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기에 본격적으로 태조의 인생을 연구하기 전엔 자녀궁에 록존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인생 전반부에도 자녀의 흉상이 있어야 말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 ‘인생 전반과 중반엔 문제가 없다가 후반부에 가서 자녀가 말을 안 듣고 급기야 내가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한 다른 자녀를 죽이기까지 하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身궁에 답이 있는가?’라는 화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축시 명반을 보고 알았다. 자녀성인 천동에 록존이 좌한다는 점이 그 답이다. 홍콩의 섭한량 선생은 자녀나 부모 등의 사안을 볼 때 그 해당궁은 전혀 보지 않고 자녀성과 부모성만 보고 판단을 한다고 하나, 이는 치우친 추론법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만큼 궁뿐 아니라 성도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천이궁 경양이 강왕해지면 해질수록 록존이 받는 압박은 심대해진다. 이에 록존과 동궁한 자녀성인 천동 역시 그 받는 압박의 강도가 더해진다. 고려 장수로서 천이궁 경양의 위권출중함을 휘두를수록 자녀와는 떨어져 살게 되는 정도로 발현되었지만, 이제 새로운 개창 군주로서의 위권출중함을 상징하는 고려 혹은 조선반도 최고의 힘을 가진 경양이 된 이상, 록존과 동궁한 천동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나마 록존천동이 있는 궁 자체에 살이 없기에 이 정도지, 만약 록존에 살성까지 동궁하고 있다면, 젊었을 때에도 고려의 장수로써 경양을 휘두를 때마다 자녀의 흉상이 있었을 것이다.
경양의 힘이 커질수록 록존이 받는 피해 역시 커짐은 무엇이든 지나치면 좋지 않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진리가 숨겨진 자미두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중 하나이다 (자미심전1, p.413에 이건희 회장 명반 상의 경양과 록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도 참고).
[신궁(神弓) 이성계]
이성계의 충격과 공포를 자아내는 활솜씨는 야사와 정사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 나타난다. 보통은 개국 군주의 미화라고 생각할만도한데 그러한 기록이 너무 많이 남아있으니 역사학자들도 그가 신궁이었다고 인정한다. 일단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기사를 보면,
태조(太祖)는 대초명적(大哨鳴鏑, 소리통을 장착해서 날라갈 때 소리가 크게 나도록 만든 화살)을 쏘기를 좋아하였다. 싸리나무로써 살대를 만들고, 학의 깃으로써 깃을 달아서,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순록의 뿔로써 소리통을 만드니, 크기가 배만 하였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서, 보통의 화살과 같지 않았으며, 활의 힘도 또한 보통 것보다 배나 세었다. 젊었을 때 환조(桓祖, 아버지 이자춘)를 따라 사냥을 하는데, 환조가 화살을 뽑아서 보고 말하기를, "이는 (범상한) 사람이 쓸 수 있는 보통 물건이 아니다."고 하였다.
동녕부의 고안위가 산성에 웅거하면서 항전을 하자 이성계는 성의 병사들 얼굴에 70발을 쏴 70명 모두 맞췄다. 이를 보고 고안위는 도망갔으며, 성안의 적군들의 사기가 떨어져셔 곧 항복하였다. 이것을 보고 주위 여러 성들이 항복하였는데 그 수가 1만 여 호나 되었다.
동녕부 산성을 점령한 후, 요동성 전투에서 처명이라는 적장에게 항복 권유를 하였는데 단칼에 거절 당하자, 이성계는 활을 들어 처명의 투구를 날려버렸고 두 번째 권유에도 거절하자 처명의 허벅지를 맞췄다. 이에 처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급히 말을 돌렸고 이성계는 놔줬다. 상처를 치료하고 돌아온 처명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싸움을 걸자 세 번째 설득을 한다. “이번에 말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머리를 쏘겠다”. 결국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이성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삼남의 내륙지방으로 침투한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이성계와 그의 의형제 이지란이 현재의 남원시 운봉읍의 황산에서 왜구의 무리와 대전하였을 때 한 왜장이 나이가 어림에도 무예가 출중하고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어 관군이 큰 낭패를 보았는데 그가 아기발도라 불리는 장수였다. 이에 이성계가 이지란에게 말하길 " 내가 화살로 저 놈의 투구줄을 맞춰 투구를 벗길테니, 그때 네가 저놈의 머리를 쏘아 죽이거라." 말했고 말은 그대로 되어 적장의 머리를 맞췄다.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백고(180m) 밖에 있는 배나무를 쏴서 가지에 달려 있는 배를 털어뜨려 그 배로 손님을 대접했다.
여진정벌 때 기병의 말의 눈을 쏘아 넘어뜨리기도 했으며 온 몸에 갑옷을 입은 장수가 달려오자 투구를 쏘아 맞췄는데 그 장수가 놀라서 입을 벌리자 입 안으로 화살을 쏘아 죽었다.
자미두수 명반에 神弓 이성계의 모습이 있을까? 매우 잘 나타나 있다.
身복덕궁에 있는 염정(廉貞)의 염(廉)을 파자해 보면, 广과 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兼는 한 손으로 두 가닥의 곡식을 잡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겸할 겸’자로, '彐' 부분이 손이다. 하지만 두 가닥의 곡식이 아닌 활줄을 손으로 잡은 모습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한다. 그렇다면 广은 활대이다. 염정의 정(貞)은 ‘곧을 정’자로, 같이 해석해 보면 곧게 손으로 활을 잡은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천상(天相)의 相자는 나무(木)에 있는 눈(目)으로 나무로 만든 지지대에 있는 과녁의 정중앙의 눈 부분을 의미한다. 동궁한 천공은 공허한 하늘을 화살이 가르는 의미이고, 역시나 동궁한 지겁(地劫)의 劫은 ‘위협하다’는 의미로 이성계의 활솜씨가 가히 위협적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천량과 천수, 두 가지 노련함의 별들이 협을 하니 노련한 신궁(神弓)으로써의 身궁의 의미가 그대로 드러난다.
자미심전1, p.66의 바둑기사 이창호 국수의 복덕궁도 천량천수의 협을 받고 있는데, 애늙은이라는 별명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고 바둑 기풍도 젊은 시절부터 늙은이처럼 매우 원숙하여 당대의 원로 기사들조차 이를 당해내지 못했다. 상대 입장에서 왜 지는지도 모르고 지는 바둑이 많았다. 이창호가 프로기사가 되기 전 단계인 한국기원 연구생 시절, 당시 현역 프로기사 2단 정대상 사범과 연구생실에서 두었던 연습 바둑 역시 정확하게 그런 상황이었고, 이를 역시나 한국기원 연구생이었던 필자 두 눈으로 옆에서 목격한 바 있다. 천량천수가 복덕궁을 협하여 원숙함을 주는 상황을 명반에서 볼 때마다 당시의 '크게 당하지도 않았는데 왜 내가 졌지'라고 말하는듯한 정대상 사범님 표정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다 알겠는데, 화살은 어디에 있는가? 이성계의 몸(身)을 떠난 경양은 이미 당신이 눈 깜짝할 사이 천이궁으로 가 있다. 봉염간무이다.
[갑신대한(25-34세), 26세 경자년 혹은 27세 신축년 아버지 이자춘 사망]
46세 황산전투로 고려의 영웅이 되기 이전까지인 이성계 인생의 초중반은 고려의 유능한 장수로 명성을 얻으며 승승장구하던 기간이다. 이 중 아버지 이자춘의 사망이 26세 경자년인지 27세 신축년인지 기록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를 살펴보겠다. 이자춘 신도비명, 정릉 신도비명, 동문선에선 경자년(1360년) 4월18일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나 태조실록 총서와 고려사에서는 신축년(1361년) 4월30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대한 염정화록으로 身궁이 인동되고 태양화기로 전택에서의 질액궁이 인동된다. 이차발생 이차결과 등을 따지기 전에 이렇게 대한 명궁에 웃어른을 상징하는 자미가 있고 물려받음을 암시하는 천무가 있으면서 대한의 화록과 화기가 身궁과 질액궁으로 떨어지고 각기 육친을 암시하는 염정과 남성육친을 암시하는 태양이라는 것은 이 대한 중에 웃어른 상망으로 내가 무엇인가 물려받는 암시가 강하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부모궁에 영성, 명궁에 화성이 있어 부모궁의 영향으로 나의 명궁이 화탐횡발이 되는 것이 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택궁의 화권이 마침 노복궁에 있는 록존과 더불어 관록궁을 록권협시켜 주는 것 역시 선천 차원에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부모궁과 전택궁의 천수천량이 복덕궁을 협하는 것은 정신적인 완숙함이 가문의 내력이라는 의미이고, 그러한 복덕궁이 마침 身궁인 점은 역시나 가문의 내력으로 장수 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렇듯, 선천 부모궁과 전택궁의 향배를 보니 물려받는 암시가 매우 강한 명반이라서 갑신대한 명궁에 있는 자미화과, 천무와 록기의 궤적은 의미가 심대하다.
이차결과는 상문백호가 있는 축미궁선이고 대한의 피해궁이자 질액궁인 묘궁은 일차결과인 태양화기에 의해 암동이 된 상태이다.
경자년은 대한의 관록궁이자 일차발생궁으로 身궁에 좌하면서 육친과 관록을 암시하는 염정을 깔고 있다. 유년 태양화록으로 록기전도가 되어 결과의 의미를 가지니 선천 태음화기와 더불어 축미궁을 인동시킨다. 축미궁은 유년의 부질이자 선천의 자전선으로 집안의 부모를 뜻하는데, 이러한 외궁에 상문백호와 동궁한 선천화권이 있는 것은 육친에게 좋지 않다. 유년 천동화기가 묘궁인데, 이곳은 유년 전택궁이자 대한의 부질선으로 이곳이 록기전도에 의해 발생의 의미를 띤다. 그리고 이것으로 대한에서 암동 된 궁선이 유년에서 명동 되어 상이 발현되는 메카니즘도 구현된다. 그러하기에 이 궁선의 의미는 매우 중요한다. 묘유궁은 전택의 부질의 변화선이다. 저 록존이 깨지고나서 유년 관록이자 대한 재백궁에 있는 강왕한 경양이 내 것이 된다. 이해에 아버지의 상망으로 가업을 잇게 되는 상이 선명하다.
이번엔 신축년은 어떠한지 살펴보겠다. 신축년은 대한 이차결과선인 축궁에 좌하면서 육친에게 안 좋은 외궁의 화권이 상문과 함께 있다. 유년 부질선엔 갑작스러움을 의미하는 자부살이 있기는 하지만 지연을 의미하는 타라가 있으니 아버지 상망을 생각해 보기는 쉽지 않다. 또한 유년 거문화록으로 인한 문제궁이 축미궁선인데, 이곳은 유년의 명궁으로 경자년엔 이 궁선이 유년 부질선이기에 아버지를 암시했었던 것과 대비된다. 선천 천기화록과 유년 거문화록으로 인한 이차발생이 묘유궁이 되기는 하나, 이곳은 유년 재복이자 대한 부질선이다. 경자년에 이 궁선이 전택의 부모궁이었던 것과 역시나 대비된다. 신축년은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가업을 이어가는 것에 자신의 고충이 있는 유년으로는 볼 수 있지만, 아버지 상망의 암시는 그 전해인 경자년이 훨씬 선명하다.
[임오대한(45-54세)]
46세 (1380 경신년) 황산대첩으로 왜구 섬멸. 이로 인해 당시 최영에 버금가는 영웅이 됨.
54세 (1388 무진년) 음력 5월 위화도 회군
보통 명반 내에서 '군기반장'의 역할은 천량, 경양, 천형, 화권이 담당하기 마련이다. 이 명반에선 특이하게도 축궁 천량화권의 삼방사정에서 편사식으로 록마가 보이고, 진궁 경양의 협으로 록마가 들어오고 오궁 천형 또한 록마협이 되어 있다.
계미대한엔 천이궁에 천량화권이 있고, 임오대한엔 명궁에 천형이 있으며 신사대한은 천형과 경양의 협을 받고 있고 경진대한엔 명궁에 경양이 있다. 물론 이 4개 대한 모두를 퉁쳐서 단순히 위권출중 40년이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각 대한별로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아무리 특수격이라해도 살파랑은 록을 봐야 '안정'된다. 하지만 역성혁명을 하려는 자가 '안정'된 운에 와서 이를 실행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문제는 역으로 너무 불안정한 시기에서는 혁명이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인데, 임오대한은 삼방사정에서 록을 보지는 못하나 록마협을 받는 운이니 이는 교묘하게 절충된다. 다시 말해, 스스로 잘나서가 아닌 주변의 도움으로 무언가 혁신적인 바를 추진하기에 적당한 대한이다.
변화를 주하는 여러 정성들이 있다. 천기는 발빠른 변화를 대표하고 탐랑은 속내를 감추기 위해 치장하는 정도의 변화이지만 파군은 옛 것을 파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변화이다 (파구창신 破舊創新), 물론 칠살이 가장 큰 변화를 의미하지만 말이다. 선천 탐랑이 대한 파군운에 온 것은 무언가 평소보다 더 큰 변화를 도모하기 좋다. 마침 대한 복덕궁에 가장 이상적이며 원대함을 의미하는 자미천부적 생각이 화과로 드러나는 상이 있고, 변혁을 주하는 선천 관록 칠살이 대한 관록에서 화탐과 화양 격발 그리고 폭발을 의미하는 홍란천희를 만나니, 이 보다 더 좋은 개창의 시기는 없다.
대한 천량화록으로 자전선끼리 묘유궁을 궁간공명시켜 피해궁인 묘궁을 인동하고 선천 화기가 있는 유궁을 인동하여 록기전도가 되었다. 이에, 대한 무곡화기는 발생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발생인 부관명천인 진술궁 때문에 재복부관선인 인신궁이 또한 공명이 되고 이 궁선도 록기전도를 감안한 일차발생이다. 즉, 자신의 원대한 생각(신궁 대한 복덕궁의 자미천부)을 자신감있게(대한화권) 표출(선천화과)하여 관록(인궁 선천 관록궁)에서의 획기적 변화(칠살)를 추구하는 것이 이 대한의 시발점이다. 대한 최종결과는 묘유궁인데, 이곳은 전택의 변화선으로 요동정벌을 위해 위화도까지 가서 그곳에서 장마를 만나 군의 사기도 떨어지고 회군 요청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등 진퇴양난에 빠지는 상황을 보여준다. 물론 이 대한 전반에 걸쳐 친원파인 우왕과 최영이 친명파인 이성계를 견제하는 바람에 전택에서의 근심걱정이 많은 상도 대한 전택궁의 태음화기로 보여준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되어 친명파인 이성계에 대한 고려 조정의 견제는 더욱 심해진다. 물론 묘궁은 대한의 자녀궁으로 자녀성인 천동이 있으면서 피해궁이기도 하다. 일단 이러한 묘궁의 록존이 깨져야 진궁 경양의 위권출중함을 쓸 수 있다. 다시 말해 자녀의 흉상이 있고 나서 거사를 성취할 수 있다. 선천 자녀궁이 흉했으면 이 대한의 자녀 흉상이 매우 컸을텐데 그렇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명태조실록 권193 홍무21(1388) 8월13일 기사를 보면 위화도 회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王怒殺成桂之子 (왕(고려 우왕)이 노하여 성계의 자식을 죽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여기에 맞는 아들은 이방원의 손위 형인 이방연이다. 특이하게도 이방연의 죽음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엔 기록이 없다. 그 이유는 아마 이성계가 아들 목숨을 내버리고 왕이 된 비정한 인물이라는 바를 부각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로서는 애당초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했다. 우왕과 최영장군이 있던 평양에 첫째와 둘째 아들인 방우과 방과가 있었는데, 위화도 회군 소식을 들은 직후 탈출에 성공했고 개경에 있던 다섯째 아들인 방원은 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역시나 피신한다. 하지만 이방원의 바로 밑 동복아우 방연은 우왕에 의해 처형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연은 방원과 더불어 고려시대 과거시험에 합격했을 정도로 가문의 자랑이었던 뛰어난 아들이었으니 그의 죽음은 이성계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묘유궁선은 기본적 록기법의 관점에 의하면 록기전도로 인한 최종결과이다. 하지만 피해궁의 관점에서 보면, 피해궁에 있는 록존이 깨지는 것이 먼저이고 이로 인한 양타의 상이 발현되는 것이 나중이다.
위화도 회군이 있던 무진년은 록기전도를 감안한 대한의 발생선 자리이면서 행동을 주하는 무곡이 있으며 폭발을 암시하는 각종 성계들이 있고 유년 관록궁은 신궁으로 자미천부에 선천화과와 대한화권까지 있으니 매우 길하다. 오히려 록권과가 없는 진술궁보다 길하다. 그런 인신궁이 무진년의 관록궁이 되면서 유년 천기화기와 선천 태음화기로 인해 이차결과가 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유년 탐랑화록은 대한 무곡화기를 물고 유년 천기화기는 대한 천량화록을 무니, 유년의 록기가 대한의 록기를 수미상접하는 점도 유의미하다. 폭발의 진술궁과 갑작스러운 위권출중의 자부살 인신궁을 종합하자면, 요동을 정벌하러 떠나게 된 것이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역성혁명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갑작스럽게 일이 추진된 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최영 장군도 정벌에 같이 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우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최영은 자신의 군사를 이성계에게 내주고 우왕 곁에 있게 된 것도 천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동정벌은 우왕과 최영의 이성계를 견제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래서 이성계는 압박감을 느끼며 요동정벌에 나서게 되는데, 그 압박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위화도 회군을 했으니 당시 정국의 상황이나 정벌을 위한 출정 명령이 많은 압박이었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명반상으로도 이성계의 당시 직장 환경인 조정을 의미하는 대한 전택궁에 태음화기가 있는 것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 대한 내내 이성계의 신경이 전택의 변화에 가 있을 수밖에 없는 기간이다.
[신사대한(55-64세)]
57세 (1391 신미년)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 사망
58세 (1392 임신년) 정몽주가 이성계의 낙마 사고로 일선에서 물러난 틈을 타, 이성계 세력을 탄핵시킴. 하지만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상황이 타계됨. 7월 17일 조선의 왕으로 등극. 둘째 부인의 차남 방석을 세자로 책봉
60세 (1394 갑술년) 한양천도
62세 (1396 병자년) 둘째 부인이자 첫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 사망
64세 (1398 무인년) 음력 8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정도전 등과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이방석과 이방번을 죽임. 태조 이성계는 왕좌에서 내려오고 고향으로 내려옴. 정종 즉위.
대한의 앉은 자리가 선천의 질액궁이다. 대한 거문화록으로 이 궁선을 인동하면서 특수이차발생으로 자궁 질액身궁을 건드리는데, 이 궁에 육친의 성인 염정이 있다. 문제궁으로 축미궁선의 상문백호를 인동하고 대한이차발생과 대한 문창화기는 묘유궁 부관의 형노선으로 선천 태음화기를 인동시키니, 이 대한 중에 부인이 사망한다. 첫째 부인 신의왕후는 신미년에 그리고 둘째 부인 신덕왕후는 병자년에 죽는데, 신미년보다 병자년에 배우자 상망의 상이 더 선명하니 이성계가 둘째 부인을 더 가까이 하고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사실로 보인다.
신미년과 병자년 공히 록기전도된 대한의 록기를 유년에서 수미동기시킨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신미년 앉은 자리는 대한의 문제궁선이지만 전택의 재복선에 상문백호가 있으니 그저 집안사람의 상망이 있을 수 있다는 암시만을 띠지만 병자년 앉은 자리는 대한의 특수이차발생궁이자 질액身궁이며 육친을 의미하는 염정이 있다. 단순히 집안의 사람과 매우 가까운 육친 혹은 육친처럼 가까운 친구의 의미를 가진 염정은 느껴지는 강도가 사뭇 다르다. 이 명반의 주인이 부인이 하나인 현대인이라면 병자년에 배우자 질병 조심하라고 간명할 듯하다.
이번에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여준 덕분에 왕으로 등극하는 상황을 고찰해보자. 대한 관록궁의 선천 태음화기는 삼방사정에서 별다른 살성을 보지 않기에 관록의 향배를 무조건 나쁘게만 봐서는 안된다. 조정에서 이성계가 항상 조심하는 상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위화도 회군 이 후에도 자신이 바로 왕으로 등극하지 않고 창왕과 공양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내세웠다.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개혁을 원하지만 역성혁명까지는 바라지 않는 대신들도 다 포용해서 새 왕조를 세우기를 원했다. 또한 조선 건국 전,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권문세족이 가지고 있던 막대한 토지를 환수하여 다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토지개혁과 과전법을 시행한다. 전권을 장악했으면 바로 즉위하고 싶을 수 있으나 천량천수의 협을 받는 이성계의 복덕궁을 보면 절대 그럴 인물이 아니다. 심지어 새 왕조 개창 후, 편전에서 회의를 주관할 때도 앉지 않고 서서 보고를 받았다고하니 그의 조심성과 신중함은 남달랐다. 이 모두가 대한 관록궁 길성을 보는 조심스러운 태음화기의 모습이다.
예전에 술 마시고 볼 일이 급해 사람이 보이지 않는 바로 옆의 숲 근처에서 해결을 하는데, 같이 있던 분은 기필코 귀찮아도 멀리 있는 화장실에서 볼 일을 해결한 분이 계시다. 그 분 명반은 각종 길성을 보지만 천이궁에 활동무대에서의 조심스러움을 암시하는 화기가 있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건국의 시기를 보던 이성계는 58세 임신년에 낙마하여 조정에서 잠시 물러나 쉬게 된다. 이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온건개혁파의 수장 정몽주는 이성계파들을 숙청하기 시작한다. 이를 본 이방원은 병상의 아버지를 끌고 개경으로 돌아오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한다. 그리고 그 해에 이성계는 즉위한다.
일반인이 생각하기에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덕분에 왕이 될 수 있는 임신년(58세) 사안과 이방원이 정도전과 배다른 아우들을 죽여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자신이 상왕으로 내려앉게 된 무인년(64세) 사안이 각기 길과 흉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대한의 임신년과 무인년은 같은 인신궁선 상에 있는 등 매우 유사하다. 어차피 절대권력자여서 새 왕조 건국의 시기만을 가늠하고 있던 자신이 자신의 뜻대로 신중하게 나라를 세우려는 의도를 꺽은 일과 자신이 상왕으로 내쳐지는 일은 둘 다 흉인가? 적어도 이성계는 그리 생각했다.
같은 복덕궁 천량천수협의 이창호는 스승인 조훈현 국수로부터 각종 타이틀을 따내는 것이 가시방석에 앉는 일이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일부러 스승에게 져줄 수도 없는 일이고 스승의 타이틀을 야금야금 뺏어 오는 것도 싫었다. 범인(凡人)은 생각하기 쉽지 않은 복덕궁을 가진 인물들이다.
아무리 그래도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지위에 관해서는 이 두해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우선 58세 임신년의 앉은 자리는 자전부관선, 즉 직장에서 자부살의 갑작스러운 사안 발생의 유년이다. 외궁의 자미화과를 깔고 있으니 자신이 주도하기 쉽지 않은 유년이다. 외궁의 자미는 노기주로 해석할 수 있다. 64세 무인년의 앉은 자리는 역시나 자전부관선의 자부살인데 그 중 칠살을 깔고 앉아 있다. 칠살은 본인변동과 육친불리를 암시한다. 임신년은 대한의 전택궁이데 비해 무인년은 대한의 자녀궁이니, 무인유년 칠살의 육친불리와 더불어 간명하자면, 자녀에 관한 불리한 상이 더 읽힌다. 임신년 조선 개국 시에 자녀의 흉상은 없었지만 무인년 상왕으로 내려앉을 때에는 자식이 다른 배다른 자식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임신년의 유년 자녀궁은 사궁으로 천형 경양의 협을 받고 있는 묘왕지의 태양이니 자식의 상황이 강왕하면서 내궁이니 나에게 길한 의미를 띤다. 특히나 이 사궁엔 대한의 문곡화과가 있어 아들 이방원의 야심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해이기도 하다. 록기전도를 감안한 발생의 의미를 가진 대한 문창화기와 임신유년의 천량화록으로인해 이러한 유년 자녀궁인 사궁이 이차발생이 된다. 무인년 자녀궁은 해궁으로 어둠을 의미하는 거문에 역시나 음적인 살성이자 분리, 이별을 암시하는 영성이 있다. 이처럼 자녀 흉상을 중점으로 비교해 보면 임신년보다 무인년에 그러한 암시가 더 강하다.
이 대한에 두 명의 부인이 다 사망한 기간인데 대한 명궁이 여성육친을 암시하는 태음이나 배우자를 암시하는 파군도 없고 선천 부처궁 자리도 아니고 관록과 자식을 상징하는 태양운인지 이제야 알겠다.
결론적으로 이성계는 이미 전 대한 마지막 해인 54세 위화도 회군으로 실질적 절대권력자가 된 상태에서 신사대한을 맞이했고, 58세 정몽주를 죽인 일로 아들 이방원의 야심을 알게 되어 이런저런 견제를 했지만 64세 제2차 왕자의 난으로 결국 권력을 빼앗긴다. 이성계에게 있어 조선이 개창된 58세 1392 임신년은 이방원의 흑심을 알게 된 것이 중요했을 뿐, 새 왕조를 공식적으로 출범한 일은, 이미 전권을 휘두르고 있던 이성계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실제 왕으로 즉위 후 개국 공신책봉을 하면서 이성계의 견제는 노골적이 되었다. 자신의 아들들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나중엔 첫째 부인의 아들들이 가지고 있는 사병을 전부 관군으로 편입시키려고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구테타를 일으킨 요인들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되었다.
[경진대한(65-74세)]
66세 (1400 경진년)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은 바로 손위 동복형인 방간을 유배보내고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음. 정종은 상왕이 되고 이성계는 태상왕이 됨.
68세 (1402 임오년) 이성계가 배후에 있던 조사의의 난으로 이성계 사람들 여럿 처형당함. 태종이 보낸 무학대사의 간청으로 서울로 돌아옴.
74세 (1408 무자년) 5월 창덕궁에서 승하
66세에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은 상왕으로 자신은 태상왕으로 내려앉는다. 방원이를 이렇게 놔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이성계는 2년 뒤, 이미 죽은 둘째 부인의 집안 친척 조사의를 앞세워 이방원을 몰아내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정종 이방과를 다시 왕위에 앉으려는 ‘조사의의 난’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 일로 이성계는 직접 참여하진 않고 뒤에서 조정을 하긴 했지만, 인생 최초의 전쟁에서의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 후, 이방원 입장에서 아무리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버지였지만 유교와 성리학의 국가 조선의 국왕이 아버지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부자지간에 서로 화해하게 된다. 이성계는 나중에 이런저런 일들을 계기로 이방원에게 “아무래도 너는 하늘이 내린 것 같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 대한의 마지막 해인 74세 무자년에 승하한다.
이 대한의 경양으로 무언가 일을 벌이기 쉬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명궁과 암합까지 하면서 그 역할을 했던 노복궁 록존이 대한 노복궁에서 선천화기를 만나는 운이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문제가 많은 대한으로, 가볍게는 이방원이 감시를 붙여 주변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하고 무겁게는 조사의의 난으로 친이성계파가 숙청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잘못하다가는 세상과의 단절을 암시하기도 하여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나이들어 노복궁이 깨지는 것은 매우 유의해야한다.
74세 승하한 해는 무자년인데 자궁은 대한 이차발생궁이다. 경진대한 록기로 상망의 상관궁선 중에 상문백호가 있는 축미궁이 인동되지 않았다. 무자년 부질선인 축미궁은 거울공명되면서 유년 천기화기로 인동된다. 상관궁성의 완성이다.
첫댓글 와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찬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앗..^^;; 쑥스럽습니다
저는 역사학자 이덕일선생을 좋아하는데 심곡선생의 이 글을 읽으면서 그의 책을 읽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이성계평전을 읽는듯한 느낌이 들정도 입니다.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다 좋았지만 이성계가 신궁인 이유를 복덕궁이자 몸궁의 염정천상으로 해석해내는걸 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극찬을 해주셔서 ^^;; 대중을 위한 역사서겸 두수입문책을 남기기위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파자를 해보는 것도 포함해서 다 이두샘께 배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10.01 06:4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10.01 09:03
자미두수의 맛에 흠뻑 젖어버렸습니다. 생시검증은 넘 어렵습니다.^^ 힝~~!! 아직 가야할길이 멀었네요 ㅎㅎ
난이도가 상당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해서 제가 노래하나 불러드리겠습니다. :((:: 심곡샘 !~~ 님은 먼곳에~~~))
시간을 전혀 모르는 경우 생시검증은 난해하다기 보단 방대합니다^^;; 몇 시간 정도 걸릴 문제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임은정검사가 책을 내었네요,
책 제목이 마음에듭니다
저도 자미두수는 같은. 마음입니다^^감사합니다
대단하십니다. 방대한 역사적 고증과 함께 꼼꼼한 생시검증까지...정말 대단합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분명 제 글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류도 있을겁니다^^;; 그래도 요즘은 실록 국역본도 인터넷에 다 나오니..
감사합니다~~
글을 읽고 나면 항상 자미 공부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리고,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늘 감사합니다.^^
옙 자미두수는 정말 신묘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옙 감사합니다~
제가 열공은 한다한들
이 정도의 경지에는 도달하기 어려울 듯하고
그져 내용이라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기를 ...
좋은 내용 잘 보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뭐 경지까지야..^^;; 감사합니다~
멋있네요..ㅎㅎ 전 언제 이렇게 분석할지, 보고 감탄이 나옵니다!
옙.. 하다보니 내용이 방대해졌어요.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