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는 810년경 10살 아래인 정년(鄭年)과 함께 唐으로 떠나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에 입대하여, 30대 초반(818년 경)에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이 되었다.
唐은 고구려를 멸망시킨(668년) 후 고구려인 20여 만명을 산동성 지방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다(조선초 인구가 500여 만명 이었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원이었음).이들 유민의 후손 중 이정기(李正己, 732-781년)는 당에서 사실상 독립한 왕국을 세웠고, 이왕국은 3대에 거쳐 60여년간 유지하다 당과 맞서게 되었다. 무령군(805년 창설)은 이들을 공격하는 최선봉군이었으며, 장보고는 고구려 유민 세력을 평정한 공으로 '중소장'이 되었다.
고구려 유민세력의 반란 평정 이후 무령군의 감군(減軍)이 시행된 821년경 장보고는 군대를 떠나(사직 또는 해임) 823년에 등주(鄧州) 문등현에 적산법화원(845년 불교탄압시 파손되었음)을 세웠고, 그곳을 중심으로 신라인의 세력을 모아 적산법화원 운영이나 해상교역에 이용함으로서 재당신라인 사회의 실질적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828년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세력을 장악하였으며, 閔哀王을 폐위하고 神武王을 즉위(839년) 시킬 만큼 세력을 키웠으며, 840년 唐으로 견당매물사, 日本으로 회역사 등 무역사절단을 보내어 해상무역까지도 장악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은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이 일본의 마지막 견당사의 일원으로 唐을 방문하면서 838. 6. 13일부터 847. 12. 14일까지 9년 6개월간 기록한 기행문으로, 9세기의 당나라와 재당 신라인의 생활을 소개하고 있으며, 엔닌(圓仁)이 839. 6. 7일부터 840. 12. 19일까지 7개월간 적산법화원에 머물렀으나 장보고와 만난 적은 없다. 그러나 장보고는 엔닌의 일행을 알고있었으며, 그의 휘하에 있는 견당매물사 병마사(兵馬使) 최훈(崔暈)은 상관의 뜻에 따라 엔닌의 일행을 각별히 돌보아 주었다.
八及公의 근거가 된 ‘林大使’ 관련 기록은 839, 5. 16일과 839. 6. 7일 2회이며, 원문의 일부는 각각 “商人孫清送林大使宅”와 “張詠及林大使王訓”으로 두 문장이다
첫 번째 문장 “商人孫清送林大使宅” 의 국역은 “상인 손청 편으로 임대사댁에 보냈다” 이다.
그런데 “商人孫清及林大使宅”로 즉, ‘送’자가 ‘及’자로 고쳐 “상인 손청 편으로 급 임대사댁에 보냈다”로 국역을 하였다. 글자는 변경되었으나 국역은 똑같은 것이다.
두 번째 문장 “張詠及林大使王訓”의 국역은 “장영과 임대사 그리고 장훈” 이다. 여기서의 ‘及’자는 접속사인 ‘과, 와’로 국역을 해야 자연스러운데도, 八及公을 의미하는 “장영 급 임대사 그리고 장훈”으로 국역을 하였다.
위 두 문장을 근거로 “평택임씨 가문에 전해오는 구전설화에 도시조와 7학사께서 신라사람인 장장군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서 신라로 오셨다고 전해지는 구전설화가 있다. ~(중략)~ 구전으로 내려오던 시대적 상황과 인물 등이 맞아떨어져 기록을 찾게 되었다.” 고 하고 있다.
엔닌의 기록에 의하면 장영(張詠), 임대사(林大使), 왕훈(王訓)은 적산법화원에서 신라인 거류민 등과 관련된 잡다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신라인으로, 연간 500석의 소출을 내는 법화원 장전(莊田)의 관리자이다. 장전은 장보고가 기증한 것으로 13만평 쯤 된다고 한다.
엔닌은 청해진대사 장보고(張保皐), 신라소 압아 장영(張詅), 신라원 총관 설전(薛詮) 등에게 대사라고 호칭하여 이름을 알 수 있으나, 임대사(林大使)는 어디에도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장영(張詠)은≪입당구법순례행기≫에 등장하는 신라인 가운데 가장 빈번히 언급되고 있는 자로 엔닌(圓仁)의 기록에 의하면, 자신의 구법 활동과 귀국을 성심으로 도운 우호적이고 불심이 두터운 신라인이었고, 평로군절도사십장(平盧軍節度同十將) 겸 등주제군사압아(登州諸軍事押衙)인 동시에 등주(鄧州) 문등현 관내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을 총괄하는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 압아(押衙, 신라소의 책임자)였으며, 왕훈(王訓)은 소촌(邵村)의 촌장이다.
엔닌의 기록에 당인, 신라인. 일본인 등이 많이 등장하지만 신라인은 50명이며(이중 27명은 승려), 이들의 성(性)과 이름, 맡은 임무(직업) 등이 표기되어 있으나 林大使만이 이름이 없이 성(性)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대사(大使)는 존칭으로, 대인(大人)과 같으며, 신라인이 당나라 조정에 벼슬하거나 혹은 도병마사(都兵馬使)·압아(押衙) 등의 무관에 임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엔닌(圓仁)은 장보고(張保皐)·장영(張詠)·설전(薛詮, 신라방 최고책임자인 총관)에게도 대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적산법화원이 사찰임에도 승려가 아닌 장영(張詠), 임대사(林大使), 왕훈(王訓)과 같이 세속인이 전적으로 맡아 관리하고 있던 것은, 이들이 재당 신라인으로 신라방 또는 신라소에서 책임자의 역할을 하는 장보고 수하의 최측근들이기 때문이다. 즉, 장보고는 신라 청해진에 머무르고 있고(828년부터), 이들 3명을 중심으로 적산법화원이 운영되고 장보고의 대당 무역사절인 견당매물사(‘대당매물사’라고도 함)를 도와주고 있었다.
적산법화원은 唐의 고위관리도 방문하던 곳이다. 장보고가 신라 閔哀王을 폐위하고 神武王을 즉위시켰을 때 唐 文宗이 이를 승인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인 책봉신라왕사(冊封新羅王使)로써 청주병마사(靑州兵馬使)를 신라로 파견하는데 이들 일행 30여명이 출발 전에 적산법화원에 머물렀다.
“장보고가 무령군에 있을 때 八及公과 알게 되었으며, 835년에 발생한 ‘甘露의 變’ 때 八及公이 참소를 당하여 고향인 복건성 향아촌에 낙향하였다가 장보고의 도움으로 적산법화원 견당대사로 계셨다”는 가정이 가능할까?
※ 감로의 변
당 문종 때인 835년에 일어난 관료와 환관의 싸움으로, 관료들이 전횡을 일삼던 환관(宦官) 들을 일소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된 자들이 모두 죽음을 당한 사건임. 이후 환관들이 903년까지 70여년 동안 군사·행정권을 장악하였으며, 당이 멸망(907년)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음
八及公이 翰林學士이면 당 황제의 최측근이다. 그러고 兵部尙書이면 지금의 국방부장관이다. 장보고는 810년경부터 821년경까지 서주(지금의 江蘇省) 무령군에 있었으며, 중군소장으로 종5품 정도의 무관이다. 적산법화원은 823년 창건되어 845년에 파괴되었으며, 신라인이 운영하는 절이다. 견당사는 신라 조정의 외교사절단이다. 견당매물사 또는 대당매물사는 장보고가 唐으로 보냈던 무역사절단으로 책임자는 신라 청해진 무관인 ‘병마사’이다. 엔닌이 이 적산법화원에 처음 도착한 것은 839년 6월이다.견당대사는 일본의 외교사절단인 견당사의 책임자이며, 엔닌은 그 견당사 일행이었다. 적산법화원의 唐의 고위관리를 비롯한 수만은 자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엔닌에 의하면 林大使는 적산법화원의 잡다한 업무를 맡아하고 있다. 大使는 직위가 아니라 존칭어이다. 그리고 임대사는 장보고의 최측근 중 한사람으로 신라인이다. 장보고는 신라말 혼돈의 시대에 정쟁에 의해 희생되었다. 846년 장보고의 세력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말하자면 장보고와 신라 조정과는 적대관계에 있었던 셈이다.
신라는 골품제도에 의한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왕까지 폐위·즉위 시킨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장보고도 그의 딸을 文聖王(재위: 839-857년)의 후비로 보내려 했으나(845년) 그가 해도인(海道人) 이라는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고려와는 달리 신라는 귀화한 외국인을 관료로 등용한 사례가 없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엔닌이 기록한 林大使가 八及公일까?
참소를 피하여 적산법화원에 숨어있던(?) 八及公일 수 없다는 생각이다.
당에서 장보고의 수하에 있던 견당대사 八及公을 신라에서 받아들여 이부상서까지(신라관직에 이부상서는 없음) 벼슬을 주었을까?
견당사는 7~9세기 중엽 일본의 지배층이 당의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파견한 공식사절단을 지칭한다. 우리나라 문헌에 견당사란 용어는 없으며, 신라의 대당 사절단은 입공사, 입당사, 조공사 등으로 서술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 견당사란 학술용어로 처음사용한 것은 1981년도 부터 이다.
더욱이 감로의 변 이후 환관들의 득세가 더욱 심했으며, 당의 황제는 환관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팔급공은 한람학사, 병부상서로 계시다 참소(감로의 변)로 낙향하신 분이었다면, 그리고 화를 피하여 신라로 망명·귀화하신 분이었다면, 신라 외교사신의 책임자인 견당대사의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을 까 ?
엔닌의 기록을 고치거나 임의 해석하였단 의구심을 지울 수 없으며, 더욱이 시대적 상황에 맞지 않고 인물의 格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도시조 임팔급공의 역사적 자료 일부》는 근거가 있는 것처럼 자세하게 서술하여 조작한 위서(僞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林大使는 八及公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