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강 마르코복음 제14장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 (마태 26,1-5 ; 루카 22,1-2 ; 요한 11,45-53)
(마르코 14, 1-72 파스카와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백성이 소동을 일으킬지 모르니 축제 기간에는 안 된다.” 하고 말하였다.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마태 26,6-13 ; 요한 12,1-8)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식탁에 앉아 계시는데,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몇 사람이 불쾌해하며 저희끼리
말하였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가만 두어라.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으니,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잘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다 (마태 26,14-16 ; 루카 22,3-6)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팔아넘기려고
그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 (마태 26,17-19 ; 루카 22,7-13)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 (마태 26,20-25 ; 루카 22,21-23 ; 요한 13,21-3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셨다. 그들이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근심하며 차례로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성찬례를 제정하시다 (마태 26,26-30 ; 루카 22,14-20 ; 1코린 11,23-25)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 (마태 26,31-35 ; 루카 22,31-34 ; 요한 13,36-3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더욱 힘주어 장담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 (마태 26,36-46 ; 루카 22,39-46)
그들은 겟세마니라는 곳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 다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시고, 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내리감겨 자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분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잡히시다 (마태 26,47-56 ; 루카 22,47-53 ; 요한 18,1-11)
그러자 곧,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다가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아 잘 끌고 가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그가 와서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 하고 나서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그때 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예수님께서
나서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
어떤 젊은이가 알몸에 아마포만 두른 채 그분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그는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최고 의회에서 신문을 받으시다 (마태 26,57-66 ; 루카 22,54 ; 루카 22,66-71
; 요한 18,12-14 ; 요한 18,19-24)
그들은 예수님을 대사제에게 끌고 갔다. 그러자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두 모여 왔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의 저택 안뜰까지
들어가, 시종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그분에 대한 증언을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사실
많은 사람이 그분께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그 증언들이 서로 들어맞지
않았던 것이다. 더러는 나서서 이렇게 거짓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저자가,
‘나는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도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자 대사제가 한가운데로 나서서 예수님께,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이자들이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어찌 된 일이오?”
하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무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대사제는 다시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자 대사제가 자기 옷을 찢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 여러분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단죄하였다.
예수님을 조롱하다 (마태 26,67-68 ; 루카 22,63-65)
어떤 자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그분의 얼굴을 가린 다음, 주먹으로 치면서
“알아맞혀 보아라.” 하며 놀려 대기 시작하였다. 시종들도 예수님의 뺨을 때렸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다 (마태 26,69-75 ; 루카 22,55-62 ; 요한 18,15-18 ; 요한 18,25-27)
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는데 대사제의 하녀 하나가 와서,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를
보고 그를 찬찬히 살피면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소.” 하고 부인하였다. 그가 바깥뜰로 나가자 닭이 울었다. 그 하녀가 베드로를
보면서 곁에 서 있는 이들에게 다시, “이 사람은 그들과 한패예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또 부인하였다. 그런데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던 이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당신은 갈릴래아 사람이니 그들과 한패임에 틀림없소.”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다.
-------
마르코복음 제14장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의 축제일입니다. 마르코복음 14장 1절에서 2절까지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으심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정확한 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무교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탈출기 12장에서 13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이집트에 내리는 마지막 재앙인 열 번째의 재앙은
이집트에 사는 모든 맏이는 죽는 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었기에 재앙을 면하게 됩니다.
무교절 혹은 과월절을 성경에서 한번 찾아보시지요. 구약으로 가봅니다.
(탈출기 12, 3-20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에게 이렇게 일러라. ‘이달 초열흘날
너희는 가정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집집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 만일 집에 식구가 적어 짐승 한 마리가 너무 많거든, 사람 수에 따라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과 함께 짐승을 마련하여라. 저마다 먹는 양에 따라
짐승을 골라라. 이 짐승은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마련하여라. 너희는 그것을 이달 열 나흗날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잡아라. 그리고 그 피는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 그것을 날로 먹거나 물에 삶아 먹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이 있는 채로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겨서는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다. 이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면서,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
신들을 모조리 벌하겠다. 나는 주님이다.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아예 첫날에 너희
집안에서 누룩을 치워 버려라. 첫날부터 이렛날까지 누룩 든 빵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이스라엘에서 잘려 나갈 것이다. 첫날에 거룩한 모임을 열고, 이렛날에도 거룩한
모임을 열어라. 이 두 날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너희가 저마다
먹어야 할 것만은 준비해도 된다. 너희는 무교절 축제를 지켜야 한다. 바로 이날,
내가 너희 부대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날을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지켜야 한다. 첫째 달 열 나흗날 저녁부터 그달 스무하룻날
저녁까지, 너희는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이레 동안 너희 집 안에 누룩이
있어서는 안 된다. 누룩 든 것을 먹는 자는 이방인이든 본토인이든 누구든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잘려 나갈 것이다. 누룩 든 것은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이 외에도 탈출기 34장 18절. 민수기, 신명기 등에서 이 축제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무교절을 과월절이라고 하는 이유는 파스카라는 말은 ‘건너뛰다.’라는
히브리어의 ‘페사흐’라는 언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열 번째 재앙은 양의 피가 발라진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건너뛰었기
때문에 과월절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준비한 누룩 없는 빵을 준비하였기에 ‘무교절’이라고도 합니다.
유다의 달력으로 파스카는 나산 달 15일이고, 무교절, 즉 과월절은 한 주간
즉 15일에서 21일까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산헤드린을 움직이는 지도층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는 오랫동안 꾸며왔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이 두려워서 연기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파스카 만찬, 즉 성체성사가
세워지는 만찬은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구원으로 ‘건너뛰었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나르드향유를 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조금 있으면 자신이 수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것을 알고
계셨기에 여인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죽음이 파스카의 양으로 희생되셨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나르드향유는 매우 귀하고 값비싼 물건으로서 그것은 히말라야
산맥에서 자라는 나르드 풀뿌리와 잎에서 채취한 향유라고 합니다. 모두 수입해서
사왔기 때문에 당시에는 매우 비싼 가격으로 팔리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이 부유층과
로마의 귀족들은 이 기름을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에 발라서 악취를 방지했으며
귀한 손님이 왔을 때는 이 기름으로 손님의 머리에 발라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상처의 치유에도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먼지가 많은 광야성기후에 살기 때문에 외출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삼백 데나리온 어치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말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하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일 년치 품삯을
예수님의 머리에 바른 셈입니다.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입니다. 여인이 향유를 왜 부었을까요?
곧 있을 예수님의 죽으시고 난 다음에 그분의 몸에 나르드 향유를 바르지 못함을
미리 예시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갈 때 이 여인의 올바른
행동도 널리 알려질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급히 안장하느라고
기름을 미처 바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학자들은 여인이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는 의식을 먼저 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여인을 옥합을 깨뜨린 것은
부활이 있으려면 반드시 죽으심이 있으셔야겠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상징합니다.
또한 나르드라는 좋은 기름의 향기는 널리 퍼져 나가듯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
만방에 퍼져 나감을 뜻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거룩함과 존귀하심을 깨닫고
기름을 발라드렸고,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막지 않으심으로써 사람들에게 당신이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카리웃 사람 유다의 배신으로 참혹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구약의 예언이 실현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시편으로 가보시겠습니다.
(시편 41, 9-10 “불운한 일이 그를 덮쳐 드러누운 저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어 버려라.” 합니다.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요한복음 13장 27절은 예수님과 한 식탁에서 빵을 나누고 있을 때 사탄이 유다의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고, 루카복음 22, 3절에서 6절 사이를 보면 유다가 사탄의
손에 넘어갔다고 하며, 마태오복음 26장 14절에서 16절을 보면 유다는 돈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팔아넘겼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어떻든 간에 유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시대의 이스라엘의 가옥구조를
보면 1층은 주거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2층은 기도하는 공간으로 사용하였으며,
미쉬나에 보면 약 일곱 평되는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곳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빵의 그리스말은 ‘아르토스’라고 하며 마르코복음에만
스물 한 번 나옵니다. 그것은 누룩을 넣은 빵을 말하며, 누룩을 넣지 않는 빵만
파스카에 사용되었으며, 이렇게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은 그리스 말로는 ‘아주모스’
라고 합니다. 빵은 하느님이 주신 귀한 음식이기에 유다인들은 꼭 손으로만 먹었
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성체성사를 만드신 아주 귀한 자리였으며,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당신의 몸과 피를 바치는 당신의 희생을 표현하시며
구약의 완성을 이루실 것입니다. 잠시 구약으로 가보겠습니다.
(탈출기 24, 4-8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기념 기둥 열둘을 세웠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몇몇 젊은이들을 그리로 보내어, 번제물을 올리고 소를 잡아 주님께 친교제물을
바치게 하였다. 모세는 그 피의 절반을 가져다 여러 대접에 담아 놓고, 나머지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 그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그 계약의 완성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당신이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스 말로 ‘히페르’ 는 ‘대신한다.’라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몸과 피를 바침으로써 희생함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국어인 아람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아람어는 낱말을 연결하여 동사를 표현합니다.
즉 어떤 한 부분의 사물을 이야기함은 그 사물의 전체를 나타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신 것은 아람어식 표현으로 보면 당신의 전부를 주신 것이
됩니다. 성체성사를 세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서 기도하시기 전에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예고에 대하여 베드로는 강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배반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카리웃 사람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배반을 생각합니다. 둘 다 예수님의 제자였고
둘 다 배반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곧 회개하고 이스카리웃 사람 유다는 자살을 선택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만약 유다도 회개했으면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합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라 하더라도 회개했다면 그는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또 제자들에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깨어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육신의 잠뿐만 아니라 늘 영혼이 깨어있어야 함도
포함된다는 생각입니다. 사탄은 늘 아주 작은 것부터 유혹합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저녁기도와
묵주기도는 내일하면 되지 뭐, 오늘은 피곤하니 그냥 자고 내일 저녁부터 기도하면 되지 뭐…….’
혹은 ‘오늘 아침기도는 바쁘니까 내일아침부터 하지 뭐…….’ 또는 ‘오늘 주일미사는 쉬고
다음주일부터 가지 뭐…….’ 모든 게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 넘어가서 기도나 미사를
한 번 빠지고 두 번 빼먹고 하다보면 나중에 정말 하지 않게 되고 냉담하게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게을리 하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아빠'
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마르코복음의 아람어의
표현은 예수님께서 성부이신 아버지께 친근과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부르는 표현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부를 때 ‘아빠’ 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부이신 하느님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아버지를
부를 때 부르는 아람어 '아빠'는 우리 한국의 어린이 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부를 때 부르는 것과
발음이 똑 같습니다. 아무도 어른이 아버지를 부를 때 '아빠'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그 멀리 떨어져있는 갈릴래아의 아람어와 한국어가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하고
생각했습니다. 루카복음으로 가보시겠습니다.
(루카 11,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제자들도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갈라 4, 5-7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로마 8, 14-15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절박했지만 그분은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시나요? 자꾸만 달라는 기도만 하시나요? 진정한
기도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고, 찬미하고, 의지하고, 흠숭하는 기도가 우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그리스도를 닮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순명에 찬
기도는 그분의 지극한 겸손에 담겨있습니다. 이 세상에 처음 오실 때 성모님을 택하여 말구유로
오신 겸손이, 이제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순간에도 가장 낮은 겸손의 자세로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비입니다. 우주만물의 주인이 가장 낮게 오심은 물론 아버지께 돌아가실
때도 가장 처참하고 낮은 모습으로 가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토록
고통스런 수난의 잔이 있고 난 다음에야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잠시 마태오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마태오 6, 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마음의 눈을 밝히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사를 성경을 통해 읽으면서 눈으로만 읽으면 안 됩니다.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새기고 소화하여 말씀이 내 안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
으니까요. 내 죄로 인하여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수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계시니까요. 구원의 신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예수님은 절박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내 뜻이 아니라 오로지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그들의 약한 마음과 의지를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유혹에 시달립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하지요.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고, 유혹과 싸워 이길 힘도 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은 나약합니다. 특히 그 중에서
인간의 몸은 더 나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에 살지만 시간이 되면 흙으로 돌아갈 한계가 있는
것이 몸입니다. 또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에 나약한 것입니다.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인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오른쪽 눈이 죄를 지으면 빼어서 버리라고까지 합니다.(마태오 5, 29) 우리는 영원한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어야겠습니다.(마태오 6, 27)
드디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인 이스가리웃 사람 유다가 왔습니다. 그는 칼과 몽둥이를 든
병사들과 함께 왔습니다. 그것도 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밤중에 예수님을 잡으러 병사들을
보냈을까요? 혹시나 낮에 예수님을 잡는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의 폭동이 두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성질이 급한 예수님의 제자 하나가 수석사제 종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칼을 들고 귀를 자른 사람은 베드로이고 귀가 잘린 수석사제의 종은 말코스였다고 합니다.
(요한 18, 19)
그러나 예수님은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시면서 수석사제 종의 귀를 고쳐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치유기적을 보면서도 마치 강도를 잡아 가듯이 예수님을 끌고 갔습니다. 또한 그 이후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버립니다. 마르코복음 14장 51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알몸에 아마포를
두르고 잡혀가시는 예수님 뒤를 따라가다가 사람들이 붙잡자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쳤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왜 갑자기 예수님의 수난사를 전하다가 알몸으로 도망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할까요? 우리는 수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기도도 하지
않고 성사생활도 하지 않고 따르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만 신앙을 팽개쳐버리지는 않는지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사법기관인 산헤드린에 섰습니다. 이스라엘의 재판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최고의회의 의장인 수석사제가 심문을 하여 죄가 확정이 되면 사형이나 아니면 무죄에 대한 고시를
공개적으로 하고 그 기간 공안 반대가 없으면 사형을 확정짓거나 풀어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석사제들과 온 의회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지만 증언들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두 사람이상의 증언이 일치해야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수석사제가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예수님의 죄목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의 산헤드린은 지방의 산헤드린과 중앙의
최고의회로 나누어졌습니다. 보통 120명에서 230명의 인구가 되면 지방의회를 구성할 수 있으며,
보통의 일반범죄는 지방의회에서 재판을 하지만 이스라엘의 12지파와 관련된 범죄나 대사제와
관련된 범죄, 그리고 거짓 예언자나 거짓 선지가에 관한 재판은 반드시 최고의회에서 재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보기에 스스로 메시아로 자칭했으니 사형감이 분명하였습니다.
(마르코 14, 61-62 6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무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대사제는 다시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증인들의 말이 서로 달랐습니다. ‘미쉬나’의 산헤드린편을
살펴보면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이를 공개적으로 비교하여 죄를 확정짓습니다.
구약으로 가보겠습니다.
(신명기 19, 15 “어떤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잘못과 관련하여, 그의 어떤 죄나 잘못이든지, 증인
한 사람만으로는 그 증언이 성립되지 못하고, 증인 둘이나 셋의 증언이 있어야 유죄가 성립된다.)
증인들의 말이 일치하지 않으니 그들은 잘못하면 예수님을 풀어주게 될지도 모르자 수석사제는
직접 심문을 하고는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메시아라고 말했으니 더 이상 들어볼 이유도 없다고
하면서 단죄하고 맙니다. 그렇게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유죄판결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부당한 재판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온갖 모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과 가시관까지 쓰시고
사형장으로 끌려가시게 되는 거지요. 예수님이 모역을 받으시는 동안 베드로의 배반이 이어집니다.
심지어 ‘자기의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맹세는
하느님께서 증인이 되시니까 아예 맹세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오 5, 33-37)
베드로의 배반은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으로 가보시지요.
(시편 88, 9 당신께서 벗들을 제게서 멀어지게 하시고 저를 그들의 혐오꺼리로 만드셨으니 저는
갇힌 몸, 나갈 수도 없습니다.)
아마 초대교회에서는 베드로의 배신이 전승으로 이어졌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도들의 으뜸이
되고 초대교황이 되었습니다. 아마 사도 베드로께서는 살아있는 동안 내내 주님을 배반한 일들로
끊임없는 회개를 하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회개는 주님을 영접하는 지름길
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여종들의 말에도 벌벌 떨던 베드로는 나중에 어디 가서나 당당하고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순교할 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구하여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전합니다. 그것은 온전히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께서 베드로
안에서 무한한 은총과 힘을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도 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귀한 글 잘 읽어보고 몇번 음미해 보려 합니다. 공관복음과 비교해보면서 묵상의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향기로운 기도와 성사생활로 하느님의 사랑과 현존에 잠심하십시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삶....자주 어기지요......
늘 향기로운 기도로 하느님의 사랑과 현존에 잠심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베드로, 베드로, 아 베드로.... 배신자였으나 진정한 회개로 커다란 은총을 받으신 베드로. 유다가 아닌 베드로 처럼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기를 희망하며....
감사합니다.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베드로의 회개하는 신앙, 저도 늘 배웁니다.
늘 향기로운 기도로 하느님의 사랑과 현존에 잠심하십시오.
감사합니다...저도 예수님을 수시로 팔아넘깁니다.마음은 성스럽고 싶지만 안되는 안타까움 새롭게 하소서.아멘
꾸준히 기도하면서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시고
마음을 늘 하느님께 향하게 하시면 많은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물론 의지가 중요한데... 반드시 성사생활과 기도생활이 따라야 겠지요. 늘 향기로운 기도로 하느님의 사랑과 현존에 머무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또 사고를 당해서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이제 조금씩 외출도 하게되었습니다'
저런... 괜찮으신 건가요?
에구... 날마다 기도 때 간절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시지요. 고맙습니다.
몸 잘 챙기세요. ^^&
주님께 감사
이시간 주님을 찬미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
늘 하느님의 현존에 머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