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초기 클라이머들의 암벽화
조장빈
암벽화는 로프와 함께 중요한 암벽등반장비로 암벽화의 발전은 새로운 등반 기술과 등반 유형이 창출되기도 했다. 초기 알프스 등반을 위한 네일 부츠에서 루버솔 암벽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1887년 게오르그 윙클러(Georg Winkler)가 돌로미테의 "Die Vajolettürme"를 프리 솔로로 첫 등정을 하면서 착용했던, 선원들이 사용한 대마(大麻) 밑창 부츠인 스카페티가 수십 년 동안 암벽화의 표준이 되었다. 이후 대략 1909년경 양모 등의 털로 된 섬유를 몇 겹 겹친 펠트솔(Feltsol) 암벽화가 등장하였다. 초기 암벽등반 교재인 《The Complete Mountaineer》(1872)의 죠지 에이브러햄(Abraham, George D.)은 “암벽등반의 가장 최근의 발전은 고무창 구두의 사용이다. 아마도 보통의 검은 밑창 플림솔(Plimsoll)이 가장 유용할 것이다. 가격이 저렴할수록 품질은 오래가지 못한다. 등반 시 두세 켤레는 사용하게 된다. 작은 종류는 주머니에 쉽게 넣고 다닐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 못질한 부츠와 교환할 수 있다. 젖은 바위에서 고무는 위험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루버슈즈는 순수한 암벽등반을 더 쉽게 만들지만, 모든 등반가는 먼저 네일 부츠를 신고 그 스포츠를 배워야 한다. 젖은 상태나 고산 상태에서는 루버슈즈는 거의 쓸모가 없다”고 조언했다.
일본의 첫 암벽등반서인 후지키(藤木九三, R.C.C)의 《岩登り術》(1924)에서는 네일 부츠 암벽화를 말하고 있다. 미즈노(水野祥太郎)는 《岩登り術の基礎》(1934)에서, 일본산에 어울리는 등산화는 네일 부츠이며, 고무창의 지카다비(地下足袋)도 충분하며 착용감이 좋으나 흙을 밟거나 물에 닿으면 미끄러우니 일본식 짚신인 와라지(草鞋)를 병용하면 좋다고 하였고, 구와타(桑田英次)는 《山岳講座 第3巻》(1936) 〈夏期登山について 岩登リ〉》에서 암벽화로는 펠트창, 보로포창으로 된 것이 있지만 마(麻)로 된 창을 덧댄 것을 주로 사용하며 고무창의 지카다비도 좋다고 한다. 아처는 일본에서 경험한 지카다비에 대해 자기가 경험한 최고의 암벽화지만 내구성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임무의 〈록클라이밍-경성부근(ロツク·クライミング-京城附近)〉(1931. 8)이 첫 암벽등반에 대한 안내서인데, 그는 “등산화는 루버슈즈가 좋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외국제의 것이 좋다. 모래 위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고, 프릭션에도 매우 유리하고 또 물에도 매우 강하다. 네일슈즈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뚫어지고 마모되어지기까지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고 또 걸어갈 때 사각사각 소리가 나서 옆사람에게 불쾌한 느낌을 줄 수가 있다.”고 하였고 황욱은 〈록 크라이밍과 그 지식〉(1935. 7)에서 “등암화(登岩靴) : 농구화에 초(草) 신바닥이 달렸다고 상상 하면 대개 어떠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구두보다 편리할 때가 많다. 경쾌하고 발목에 운동이 자유스럽고 극히 작은 균열이나 요철에도 발붙이기가 용이하다. 그러나 바닥이 너무 유(柔)하여 불편한 점도 있고, 설빙(雪氷)에나 물기 많은 데에는 위험성이 많다. 건조한 보통 암벽에는 고무바닥이 제일 좋을 듯하다.”하였다. 황욱이 말하는 농구화는 초기 유럽에서 암벽화로 사용한 고무창의 캔버스화로 고무창의 광목갑피인 지카다비가 이와 유사한 암벽화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초기 클라이머들과 당시 경성에 거주하던 외국인 클라이머가 사용한 암벽화를 문헌과 사진으로 확인한 것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 클라이머들의 암벽화
성명 | 암벽등반 기간(추정) | 종류 | 중요 등반 |
임무 | 1927?~1933 | 네일부츠, 루버솔 암벽화 | 서울근교 및 금강산 |
클레멘트 아처 | 1924, 1929~1930 | 네일 부츠 | 서울근교, 개성 천마산 |
이이야마 다츠오 | 1927?~1945 | 크레타슈즈(스카페티) | 서울근교 및 금강산 |
오쿠노 마사이 | 1933?~1945 | 네일부츠, 지카다비 | 노적봉, 집선봉 C2, 1351봉 |
크리스티안 후퍼 | 1935~1941 | 스카페티 | 집선봉 S2 |
박순만 | 1936?~1945 | 네일부츠, 스카페티 | 1936년 인수봉 동남면 침니 |
김정태 | 1936~ | 지카다비 | 서울근교 및 금강산 |
양두철 | 1934?~ | 지카다비, 네일부츠 | 노적봉 서면 슬랩, 주봉 후면크랙, 집선봉 S2북면 |
주형렬 | 1936?~ | 지카다비 | 주봉 후면크랙, 집선봉 S2 북면 |
임무는 1930년 가을 만경대 사진에서 밑창은 보이지 않고 갑피는 가죽으로 된 부츠를 신고 있었다. 연도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이야마가 자운봉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두터운 창의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고 한 것은 그가 이이야마 보다 앞 서 산행을 하지 않았을까 한다. 암벽등반은 네일부츠 보다 유럽에서 수입한 루버솔 암벽화를 주로 신은 듯하다. 그의 암벽화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첨단의 암벽화로였으나 주목할 만한 슬랩 등반 등 외벽 등반의 성과는 없었다. 이이야마와의 인수봉 정면벽 등반의 가능성도 제기되기도 했으나 이는 지금의 고독의 길 등반으로 여겨진다. - 이 점에 대해서 필자도 인수봉 대슬랩 등반 가능성을 거론했으나 정면벽 초등은 1936년 박순만의 초등이 맞다.
스카페티는 이이야마의 첫 암벽화였고 등반사의 중요한 이정표인 박순만의 인수봉 동남면 정면벽 초등과 후퍼의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2봉(S2) 초등에도 이 스카페티를 신고 길을 열었다. 조선산악회 박순만은 “스키화 처럼 생긴 일제 등산화 바닥에 쇠징을 박은 것”을 등산화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네일부츠로, ‘쇠징’은 가도야(角屋)에서 따로 구입해서 등반할 때 많이 쓰는 부분에 박았다고 한다. 그는 “책에서만 보던 삼(麻)창 암벽화였다. 스위스 제품을 일본인들이 본따서 만든 것이었는데 물기가 있는 곳에서는 약했지만 쇠징 박은 등산화보다는 성능이 월등했다.”며 스카페티를 신고 1936년 북한산 인수봉 정면벽인 동남면에 첫 번째 길을 내었다. 후퍼는 1930년대 초반 일본 로코산(六甲山) 록가든 등의 등반 시 스카페티를 사용하였고 1935년 집선봉 동북릉 제2봉(S2) 중단의 팬듀럼코스 슬랩등반에서도 스카페티를 신고 밸런스 등반을 선보이며 초등을 했다. 양두철은 해방 후에 고집스레 네일부츠를 신고 등반을 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등반 시에는 백령회 김정태, 주형렬 등과 같이 주로 지카다비를 착용하였다. 오쿠노는 금강산 1351봉 릿지등반에서 지카다비는 습기에 약하다고 네일부츠로 등반을 하였다.
Mountain Craft의 당시 등반장비와 네일 부츠, 스카페티를 신고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2봉(S2)를 오르는 크리스티안 후퍼, 록가든을 등반중인 R.C.C 회원, 지카다비를 신은 주봉 삼단벽 크랙코스의 주형렬
1930년대 중반 한인 클라이머들의 암벽등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첨단의 등반을 한 백령회나 조선산악회의 한인 클라이머 파티, 세의전·양정 등의 기록은 일부 있으나 그 외 한인 클라이머들이 사용한 암벽화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찾지 못했다. 그 단편을 1940년 11월 3일의 인수봉 집단 등반(이하 ‘인수봉대등반’)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인수봉대등반은 한인 클라이머만의 친선모임이자 백령회의 회원 확충을 위한 첫 등반강좌이며, 일제강점기 한인 클라이머들의 민족의식 표출이라는 기념비적인 등반이다.
인수봉대등반의 기념사진의 클라이머들의 등산화를 보면 네일부츠, 지카다비, 농구화 등 다양한 등산화를 신고 있다. 사진 좌측 끝의 왼발이 김정태로 지카다비를 신었으며 그 오른쪽에서 중간까지는 네일 부츠, 중간 우측은 지카다비(고무창, 광목 갑피), 우측 끝에서 두 번째는 스카페티로 보인다. 좌측의 가죽 갑피 밑창은 네일 부츠로 추정하였지만 대마창을 댄 스카페티일 수도 있겠다. 노적봉 방향 사진에서 엄흥섭 주석은 크레타슈즈(고무창, 가죽갑피)를 신었고 방현도 크레타슈즈로 추정되며, 밑창이 보이는 앞줄의 참여자 셋은 네일부츠를 신었다.
기념 사진 중 인수봉 정상을 배경으로 한 사진의 앞 줄 클라이머들의 등산화 부분 Ⓟ김정태 자료집 “기명 작업도 끝나고 파티의 리더만 모두들 앞에 한 줄로 서서 각자 기명한 것을 서로 나누었는데, 매우 화기애애하게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끝이 나고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해산하기로 하고 파티 별로 줄을 지어 한 장을, 산을 배경으로 한 장 씩 카비네판으로 찍었다.” - 김정태 1940년 11월 3일 일기 중에서
김정태는 《라테루네》(제2호, 1953)의 〈백령회 회고록〉에서 인수봉대등반의 참여자를 “모두가 정열적인 암등의 수련자”, “새롭고 뚜렷한 산악관과 사조에 많은 계몽이 된 것만은 확실”이라하여, 참여자들이 암벽등반이라는 새로운 산악관과 사조에 대한 인식은 있으나 기술과 경험이 부족한 수준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인수봉을 오를 때도 후면코스(지금의 인수C)에서 두 줄을 늘어뜨려 당겨 올린 것에서도 상당수의 참여자들이 등반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체로 당시 암벽등반을 선도한 백령회 회원들은 등반에 적합한 지카다비나 고무창 크레타슈즈를 신었고 등반파티 구성원들의 등산화를 전부 알 수 없지만 앞줄의 파티 리더들은 네일 부츠나 지카다비나를 신었다. 네일 부츠는 오히려 고가의 등산화이지만, 고무창의 암벽화에 비해 서울근교 화강암 암봉의 등반에는 적합하지 않다.
우리나라 근대등반 시원인 임무는 루버솔 암벽화, 아처는 네일부츠를 사용했고 1930년대 중반 이후 한인 클라이머들은 주로 고무창 지카다비와 네일부츠를 신었다. 암벽화와 등반의 상관성을 논하기에는 사료 부족 탓을 하며 추정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당시 중요등반인 주봉 후면크랙, 금강산 S2, 서울 근교의 선인봉 크랙·인수봉 대슬랩·노적봉 슬랩과 크랙 등반도, 전후 등반 사진을 참조하면 고무창 지카다비를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박순만 파티가 1936년 인수봉 동남면 개척등반 시 스카페티를 신고 대슬랩을 최초로 올랐으며, 돌로미테 등반경력으로 알려진 후처 또한 스카페티를 신고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2봉(S2) 슬랩 트레버스 지점에서 밸런스 클라이밍을 선보이며 초등을 이끌었다.
*참고: 《김정태 선생 유고집》, 월간 《山》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