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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晋州鄭氏 연원
1) 진주정씨의 계파 파조
진주정씨는 진양정씨晉陽鄭氏라고도 한다. 진양이 1995년 행정개편 때 진주시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진주정씨는 신라 건국 6부족의 하나인 진지부의 지백호智伯虎를 원시조로 한다. 하지만, 지백호 이후의 계대가 밝혀진 바가 없어 이를 증명할 길은 없다.
진주정씨에는 뿌리가 다른 여덟 계통의 파派가 있다. 이를 진주8정晋州八鄭이라 한다. 이들은 동성동본이면서도 세계를 달리하는 여러 계파로 갈라져 내려 왔다.
‘조선씨족통보’를 비롯한 문헌에 따르면, 진주정씨는 12파가 있다고 전하나, 정확한 소목은 밝힐 수 없고 현존하는 계파는 8파라 볼 수 있다. 그중 4개 파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을 시조로 하는 4계통이다.
(1) 충장공파忠莊公派-시조 鄭藝
충장공파는 고려통합벽상삼한공신高麗統合壁上三韓功臣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정예를 시조로 한다. 그 후 계대로 전해 내려오지 않다가 제학공提學公 정시양鄭時陽에서부터 계대가 확실해 정시양을 기세조로 삼고 있다. 정시양은 고려 문종 때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
(2) 은열공파殷烈公派-시조 鄭子友
은열공파殷烈公派의 시조는 진주호장晉州戶長을 지낸 정자우이다. 그의 6세손으로 고려 현종 때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에 봉해진 정신열鄭臣烈을 중조中祖로 하는 파와 7세손 정중공鄭仲恭을 중조로 하는 파, 8세손인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보경鄭普卿) 중조로 하는 파로 나누어진다.
(3) 공대공파恭戴公派-시조 鄭莊
공대공파恭戴公派의 시조는 정장이다. 정장은 고려 말엽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그의 4세손인 정척鄭陟은 조선 태종 때 판윤判尹을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파도 있다.
(4) 정헌계鄭櫶系-시조 鄭櫶
정헌계(鄭櫶系)의 시조 정헌은 고려 말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둘째 아들 정택(鄭澤)은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어사공파(御史公派)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계통으로 이뤄진 진주정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1명,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59명을 배출했으며, 정척鄭陟·정성근鄭誠謹 등 2명의 청백리를 배출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총 7만4777가구에 23만8505명이 살고 있다. 또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다수 성씨중 5위며 가구수 626,265이고 정씨 인구 2,151,876명. 진주정씨(晋州鄭氏)|
2) 진주정씨의 분파와 내력
(1) 첫째, 진주정씨 충장공파는 고려 통합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으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영절공 정예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 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정시양을 기세조로 받들고 있다.
정시양의 7세손 정수鄭需는 판도좌랑과 좌사간을 역임하고 진양부원군에 봉해졌고, 이로써 충장공파의 가세가 크게 일어났다. 그의 후손 정을보鄭乙輔는 정당문학과 도감제조를 역임했으며, 후에 청천군에 봉해지고, 찬성사에 올랐다
숭정대부로 찬성사를 역임했던 정신중鄭臣重의 아들 정이오鄭以吾는 조선 태종 때의 명신으로 찬성과 대제학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인 정분(鄭분)은 세종과 문종 조에 걸쳐 조정의 중신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고,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나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의 반대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었다.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皇甫仁, 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그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이후 대신과 대간의 빈번한 청죄請罪가 계속되었지만, 1년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 사사되었다.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기국器局이 있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 말에서 단종 초에 걸쳐 궁궐 조성·축성, 현릉顯陵, 문종묘 조성 등에 공헌했다. 그의 사후 영조 때 가서야 김종서, 황보인과 함께 복권되었다(영조 22). 정조 때에는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고, 장릉莊陵 충신단에도 배식配食되었다. 순조 때에는 충신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정문을 세웠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2) 둘째, 은열공파는 고려조에서 호장을 지낸 정자우鄭子友의 후손이다. 그의 6세손 정신열이 고려 8대 현종 때 천거되어 여러 직을 거친 후 병부상서에 올라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올라 진양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인 선주지사 정임덕鄭任德의 아들 정유鄭愈와 정손鄭孫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부사가 되었던 정천익鄭千益은 당시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왔다가 사위인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씨를 재배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3) 셋째, 통정대부로 첨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던 정장鄭莊을 파조로 하는 공대공파에서는 세종조의 명신인 정척鄭陟이 뛰어났다. 정척은 교서관 정자를 거쳐 봉상시 주부와 감찰을 지내고 판한성부사. 수문전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세조 때에는 양성지와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편찬했다.
정척의 아들 정성근은 성종 때 대마도에 사신으로 갔을 때 대마도주가 문 밖에 나와 왕명을 받지 않자, 두번 세번 독촉하여 왕명을 받도록 했다고 한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 연산군의 단상법短喪法을 어기고 3년 상을 치렀고, 성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도 3년 상을 행하니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그러자 그의 아들인 승문원 박사 정주신鄭舟臣은 단식으로 목숨을 끊었고, 아우 정매신鄭梅臣과 아들 정원린鄭元麟, 정원기鄭元, 정매신의 손자 정효성鄭孝成이 모두 효행이 뛰어나 4대에 걸쳐 6명의 정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자, 전남 광양군으로 피란했다가 정착한 정대유鄭大有와 그의 아들 5형제의 후손들이 광양지방에 집중 세거하고 있다.
(4) 넷째, 문하시중평장사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던 정헌의 계통에서는 그의 손자 정온鄭溫이 청맹靑盲으로 유명했다. 그는 대사간을 역임하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눈 뜬 장님을 가장하고 지리산 청학동에 숨어 살았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가 수차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태종이 사람을 보내서 칼로 눈을 찌르는 흉내를 내어 보았으나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온의 아우로 고려 말에 감찰어사를 지낸 정택의 10세손인 정경세(鄭經世)는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성리학자인 사계 김장생과 함께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주축을 이뤘다. 시문과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우복집愚伏集’ ‘상례참고喪體參考’ ‘주문작해文酌解’ 등이 있다.
(5) 다섯째, 정자우의 후손이며,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파조로 하는 계통에서는 15세손 정기룡이 유명하다. 그는 초명初名이 정무수鄭茂壽였으나, 나중에 정기룡鄭起龍으로 개명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과 금산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곤양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했다. 상주판관으로 상주성을 탈환한 후 성주·합천·초계·의령·고령 등지의 여러 성을 탈환하는 데 이름을 떨쳤다.
(6) 진주정씨 8파에 대한 이해 자료
진주(진양) 정씨 8파를 말할 때
①, 忠莊公派; 고려 건국벽상공신 문하시중평장사 정예鄭藝를 시조
②, 첨정공파僉正公派;고려 첨정 정중공鄭仲恭을 시조
③, 내부사공파; 겨려 판내부사 정안교鄭安校를 시조
④, 공대공파;고려 통정첨지중추원사 정장鄭莊을 시조
⑤, 어사공파; 고려 감찰어사 정택 鄭澤을 시조
⑥, 우곡공파; 고려 대사헌 정온鄭溫을 시조
⑦, 은열공파; 고려 호장 정자우鄭子友를 시조
⑧, 지후공파;고려 통례문지우 정신鄭侁을 시조
신라 육부촌의 촌장 -시조-
[1] 알천야산촌[謁川楊山村] 이알평[李謁平] 경주 이씨[慶州李氏]
[2]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최소벌도리[崔蘇伐都利] 경주 최씨[慶州崔氏]
[3]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손구례[孫俱禮] 경주 손씨[慶州孫氏]
[4]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 정 지백호[鄭 智伯虎] 경주 정씨[慶州鄭氏]
[5]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배지타[裵知타] 경주배씨[慶州裵氏]
[6]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 설호진[薛虎珍] 경주 설씨[慶州薛氏]
3 족보의 성씨와 본관의 연원과 정착
Ⅰ) 족보
한 성씨의 시조를 기점으로 하여 조상을 높이고 그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출생한 자손을 일정한 형식과 상하 수평관계를 확인 할 수 있도록 기록한 기록물이 바로 족보族譜다
조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결코 남남이 아니며 또 남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씨족간의 구성원들끼리 특수한 관계를 맺고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을 폈으며 그 노력의 결과물 즉 기록물이 족보인 것이다.
2) 족보의 역사
소순(蘇洵 중국 북송시대 대학자, 960년~1127년)이 말하기를 <우리 족보를 보면 효제孝悌의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고 하였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손자로 전해져 증손, 현손 등을 거쳐 10세, 100세에 이르는 것이 물에 말갈레[派파]가 있고 나무에 가지[枝지]가 있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시조 한분이였다가 한분의 몸이 나뉘어 드디어 노인(路人)과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되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경주정씨세보慶州鄭氏世譜 임자보壬子譜 1792년 후손 우벽宇璧이 쓴 서문>
족보는 중국에서 시작되었고 그 근원은 「제계帝系」라는 왕의 년표年表에서이고 사인私人에 의한 계보 기록은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나라가 망한 후 문벌의 전성 시기를 맞이한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가계가 존중되고 조정에서도 모든 집안의 보첩譜牒을 수집하여 관료 등용에 활용했다고 한다.(정승호, 한국인의 족보)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 때 왕실의 계통을 기록함으로써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중엽 이후 검교군기감을 역임한 김관의는 개인들이 보관하던 문서 등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편년통록編年通錄을 편술하였고 왕실의 계통을 정리하여 왕대종록王代宗錄이란 책을 만들었다. 이것을 우리나라 족보의 시초로 여긴다. 하지만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성주이씨족보의 서문에에는 백여 년 전만 해도 뛰어난 사대부가라 할지라도 족보를 가진 집은 드물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서기1700여년 이전을 말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족보는 17세기 후반경부터이고 이전에 발간 된 초기의 족보는 편찬자 자신의 직계 조상의 기록은 상세히 한 반면 그밖의 인물들은 그렇지를 못하였다. 초기 족보의 편찬자들은 거의가 다 현직 또는 전직관리로서 명문가의 후예後裔라는 공통점이 있다.
1476년에 발간된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 1564년의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 1649년의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등의 족보가 초기의 족보들이다. 초기의 족보들은 가계대수가 얕고 가승家乘을 그내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딸과 외손(년)을 본손(녀)과 마찬가지로 세대에 제한 없이 족보 편찬 당시의 인물까지 수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족보는 모든 성씨가 망라된 만성보萬姓譜의 성격을 띠었다, 안동권씨성화보에는 모두 8,000여명인데 그중 안동 권씨 남자는 380명(4.8%), 문화류씨가정보는 모두 38,000명중 본손은 1,400명(3.7%)뿐이다.
3) 족보의 기능
족보는 사적인 문서다. 하지만 신분을 확인할 목적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공적인 성격도 띤다. 더구나 족보 작성에 직간접의 통제가 있었으니 더욱 그러하다 족보의 기능은 족보를 만드는 동기에 잘 나타 나는데, 족보의 소유 유무가 곧 당사자 자신의 사회적 배경을 나타낼 뿐 아니라 거기에 실린 내용이 자신의 신분을 증빙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세습적인 측면이 강조되기 때문에 자신이 어느 가문 사람이며 누구의 몇 대 손인가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족보를 위조하려는 동기중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하었다.
4) 족보의 종류
족보는 다양하다 왕의 족보인 조선조 초기부터 제작된 선원록璿源錄, 팔고조도八高祖圖, 종친록宗親錄 등 10여종이 있고, 사대부가 족보, 八高祖圖 등이 있다.
文譜(23대 순조~고종 서울대 규장각 본만)에 급제자 1,033명을 성씨와 본관별로 분류해 성명,자, 출생연도, 급제 연도와 종류를 기제하고 父~8대조까지 조상과 외조부 및 장인의 성명과 관직을 기록했다. 27개 성씨와 인물을 대상을 했다.
武譜는 장서각에 소장본을 보면 무반 출신을 모아 그 자손의 성쇠를 병기해 놓고 있어, 인맥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목적을 둔 것같다. 수 많은 성씨 가운데 무보에 오른 성씨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계획대로 마치지 못한 것 같다. 이씨의 26본에 1,200명 김씨의 12본에 320명 정씨가 8본에 210명, 평산 신씨가 175명 능주구씨가 113명 인동장씨57명청주곽씨 1명 등 성씨 및 본관별로 구분해 각기 무관 계열을 나타 냈고, 모두 2,100의 촐신 내력, 죄종관직, 자, 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처음에 급제한 사람을 상단에 올리고 아들과 조카 그리고 문,무과 등을 구분해서 기록하였으며 하단에는 소속청의 상관명도 기록되어 인적 네트위크를 활요하려는 뜻을 내보이기도 한다.
조상의 음덕을 입어 벼슬길에 오른 임직의 음보蔭譜 당파에 따른 북보北譜, 노론의 잠영보簪纓譜, 소론의 잠보簪譜, 소북인의 북보北譜, 남인의 남보南譜 또는 오보午譜, 명현의 호를 모은 호보號譜, 여러 씨족을 모은 종합보인 백씨통보百氏通寶, 만성보萬姓譜, 한글로 만든 족보, 바위나 돌에 세긴 石譜도 있다. 양민과 평민 사이에 낀 중인의 족보인 역관譯官, 의관醫官 산관算官, 율관율관 음양관陰陽官, 서자관書字官, 화공畵工 등이 있으며, 환관宦官의 족보인 양세계보養世系譜 등이 있다,
5) 성씨姓氏의 탄생과 본관本貫
(1) 성씨姓氏
성씨는 성과 씨를 결합한 말이다. 중국에서는 성은 천자에게서 생기고 씨는 제후에게서 생겼다.고 한다.
천자가 제후에게 출생 지명에 따라 성을 주고 봉封한 지명을 따라 씨를 명하였으므로 성은 그 조상의 근본을 통합하고 씨는 그 자손의 유래를 분별한다고 한다. 천자는 성과 씨를 줄 수 있지만 제후는 씨만을 줄 수 있고 성은 줄 수 없다. 성은 혼인관계를 분별하고 씨는 귀천의 등위를 분별한다고 한다 이렇게 성과 씨를 구분하던 것을 한나라 때부터 사람들이 이를 통틀어서 성姓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성은 나라이름·지명·읍·향·강·산 등을 성씨로 삼았다한다. 하나의 예로 고염무(顧炎武 1613~1682, 명말청초)는 주자朱子가 쓴 「논어」와 「맹자」 주석에 태공의 성은 姜, 씨는 呂, 이름은 상尙이라하고 성과 씨를 분명하게 구별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오래전부터 성과 씨를 구분하지않고 써 왔다.
송나라의 정초鄭櫵(1104~1162 중국 남송의 역사가)는 통지략通志略 중 씨족지氏族志에 나라 이름(국명), 읍邑, 향鄕, 등 32가지로 성씨로 하였디. 국명을 성으로 한 예는 우虞 하夏 상商 주周 노魯 위衛 제齊 송宋 등이고 읍 이름의 성은 최崔, 포鮑, 안晏, 장臧, 비 費 등이며 향鄕을 성으로 한 성씨는 배裵 육陸 방龐 염閻 등 작위로 성을 한 성씨는 황 공 후 직업을 성으로 한 성씨 등등이다. 일본인 학자 이나가키에 의하면 중국 성씨는 1745종에 이른다.
그러나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오래전부터 성과 씨를 구분하지않고 써왔다.
우리나의 성씨는, 토성土姓으로는 삼한(마한·진한·변한)과 삼국시대 왕공王公들의 후예가 많고 그 나머지는 하사된 성이거나 혹 중국에서 나온 성인데, 제각기 보계譜系가 있어 중국의 성씨와는 달리 상고詳考하기 어렵지 않다고 한다. 우리가 중국식 한자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여러 시조 설화(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등)의 시기보다 훨신 뒤로 중국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20대 장수왕(394~491, 광개토태왕의 태자) 때 비로소 고씨 성을 썼고, 백제는 13대 근초고왕(346~374)때부터 여씨라고 하였다가 30대 무왕(600 ~640) 때부터 부여씨라 하였으며, 신라는 6세기 중반인 24대 진흥왕(540~576)때 세운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拓境碑 555년, 창녕비(昌寧碑 561년)·568년에 세운 함경도 황초령비(黃草嶺碑)와 마운령비(摩雲嶺碑)에 세겨진 수많은 수행인원을 놓고 봐도 성을 사용한 예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다 7세기 후반 금석문인 30대 문무왕(661~681)릉비에서 처음으로 비문에 찬자撰者 김金OO와 서자書者 한눌유韓訥儒의 성이 나타난다. 그러다가 9세기에 당나라와 무역의 주역인 장보고張保皐(?~846)의 이름은 궁복弓福이였는데 장張씨는 당시 중국 최고 문벌가의 성이고 弓자가 있는 장張씨를 선택한 것이다.
신라 성씨는 크게 7세기부터 출현한 성씨와 9세기 이후 집중적으로 출현한 성씨로 나누는데 전자의 경우 주로 중앙집권세력 핵심부에 있었던 인물의 성씨로 중국에서 아예 없거나 있어도 격이 상당히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들의 성씨가 고유의 성씨이며 박朴·석昔·김金을 비롯한 설씨 등이 이에 해당한다. 성씨 관련 자료에 통상적으로 거론되는 신라 6촌장의 이李·최崔· 정鄭·손孫·배裵·설薛 등 6성 가운데 사성시기나 이들 성씨에 관련된 인물의 최초 출현 시기 등을 고려할 때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한 성씨는 한국 자료나 중국 자료에서도 7세기 중후반부터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듯 신라 하대 9세기에 들어 와 ‘세련된’ 중국식 한자 성과 이름이 등장하는 새로운 문화가 중앙의 관인사회뿐만 아니라 점차 지방의 9주5소경 등 지방의 유력자에게까지 파급되어갔다.
고려 초에 성씨는 인명人名의 필수 요소가 아닌 수식적인 부가 요소에 불과했다. 성씨보다는 이름과 본관 등 그리고 지역명이 오히려 앞선 시대였다.
예컨대 태조 왕건을 도왔던 공신조차도 한자식 이름이 아닌 고유명을 썼다. 심지어 왕건마저도 선조로부터 내려오던 성씨가 없었던 인물이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자
세조(초명 용건 왕용으로 개명)는 송악산 옛집에 또 새집을 남쪽에 건설했는데 그때 도선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지리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 세조의 새집을 보고 “기장 심을 터에 어찌 삼麻을 심었는가? ---이 땅에--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大數에 부합해 다음 해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왕건王建이라 지을 것이다. 기장(직)稷과 왕王은 방언이 비슷해서 태조가 성을 왕씨로 삼은 것이라고 했다.
이상에서 살펴보면 고려 건국 당시까지도 일반 평민뿐 아니라 지방 호족까지도 무성층無性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태조 20년(936~경종955~981) 때까지 중앙 관직을 지냈던 인물을 조사해보면 대부분 성씨를 사용하고 있음이 들어났다. 중국에서 도입된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실시한다거나 적극적인 유교 정책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겠다.
고려초 성씨가 널리 확장되었지만 조선 16세기까지도 성씨를 가지지 못한 층이 40%정도를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모두 성관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 양반의 후손으로 살아가고 있다.
(2) 본관,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의 어느 행정구역
본관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는 시조가 살았던 거주지나 출신지, 두 번재는 동일한 본관을 사용하는 사람은 모두 피를 나눈 혈족 집단의 일원, 셋째는 문벌 의식을 드러내는 부호나 기호로서 역할이다. 얼마전끼만 해도 이력서를 쓸 때 본관을 썼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다. 그래서 본관을 모르는 젊이들이 늘고 있다
본관은 성씨와 함께 보급됬으리라 생각하며 바늘과 실처럼 따라 다니는 관습속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은 7세기 이후 사용되고 보급됐다면 본관은 적어도 10세기 중엽 이후에 나타난 제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성씨“의 어휘는 성과 씨를 헙성한 것으로 성은 부계를 중심으로 한 혈통 계보를 나타내는 것이고 씨는 촌락 또는 지역단위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혈연적 요소와 지연적 요소가 합쳐진 말이 바로 성씨다. 전통사회에서 이 두가지 용어가 합쳐 부르는 용어가 바로 토성土姓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각 군현조를 보면 당시 행정구역별로 토착土着하고 있던 전국의 토성을 잘 정리해 그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는데 큰 도음이 된다.
토성이 본관을 나타내주는 것이기에, 그 성립 시기가 바로 본관제도가 시작된 시점인데 태조 왕건이 후삼극을 통일한 후 각 지역의 호족 세력을 비롯한 지역민에게 토성土姓을 분정分定해 주었다는 설과 그후 성종(제6대 왕건의 손자, 960~997) 대에 가서 토성 분정이 이루어졌다는 설도 있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 당시 고려의 영토가 후삼국 통일 당시에 확정됐던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그 결과에 따라 이 지역에만 토성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본관 활용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 국가에서 지역단위별로 호구를 파악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따위의 국가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본관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진주정씨 경주김씨 하듯이, 성과 연관된 본관이 아니라 거주지 또는 본적지라는 의미에 불과했다. 따라서 성을 갖지 못한 천민에게도 본관만은 지정해 쥐야 했으니 고려 초에 정착된 본관제도가 조선시대까지는 백정이었던 양수척揚水尺(후삼국ㆍ고려 시대에, 떠돌아다니면서 천업에 종사하던 무리)과 같은 특수한 천민을 제회하고는 양민과 천민 구별 없이 모두에게 본관을 주었다. 이렇듯 본관이 거주지라는 의미를 가지면서 단독으로 사용되다가 고려 후기에 이르러 성과 연결해서 사용하는 사례가 나타나게 된다.
특히 고려 중기에 들면서 문벌귀족 사회가 한층 더 강화되면서 본관과 성을 병칭竝稱해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본관이란 단순히 거주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벌 의식을 드러내는 의미로 쓰이게 됐다.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 재위:1298년, 복위: 1308년~ 1313년)이 즉위할 당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가문으로 언양김씨, 정안임씨, 경원이씨, 파평윤씨, 안산김씨, 철원최씨, 해주최씨, 공암허씨, 평강채씨 청주이씨, 당성홍씨, 황려민씨, 황천조씨, 평안조씨, 그리고 신라 왕손 김흔 일가 등 15개로 한정하니 본관과 성씨가 병칭되는 새로운 문벌 의식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본관제도다. 중국의 본관제도와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중국은 거주지를 옮길 경우 시조와 본관도 바꿔지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각 군현 성씨조에는 약 250개의 성과 4,500개에 이르는 본관이 정리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성씨조에 의하면 15세기 이후로 김씨의 본관이 500개, 이씨는 470개로 격증한다. 전주이씨 같은 경우는 100여 파로 나누어젔다. 그 결과 본관의 관계에서 동성이본 이성동본 동성동본의 3종 이족과 함께 3종 동족도 있게 되었다. 전통사회에서의 행정구역은 360개 내외로 행정구역 단위가 주부군현으로 읍격이 클수록 소속된 현소부곡촌단위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날 귀화인이 많아지면서 필리핀 정씨 태국 태씨 등 다양한 성씨와 본관이 생겨 난다.
2000년 통게청 조사에 따르면 286개 성씨 가운데 경주를 본관으로 둔 성씨가 87게로 가장 많고 진주 80개 전주 75개 밀양 67개 청주 66개 순이다.
2015년 통계청조사에 우리나라 인구는 49,705,663명 10대성의 다수성씨순으로 金氏 10,689,959명, 李氏 7,307,068명, 朴氏4,192,074명, 崔氏 2,333,927명, 鄭氏 2,151847명, 姜氏 1,175,847명, 趙氏 1,055,567명, 尹氏 1,020,547명, 張氏 992,721명, 林氏 823,968명,
6) 우리 鄭氏의 32개 본관별 다수순
1 동럐 | 2 경주 | 3진주진양 | 4 연일 | 5 하동 | 6 초계 | 7 영일 | 8 청주 | 9 해주 |
474,506 | 350,587 | 324,521 | 284,290 | 187,152 | 104,155 | 65,991 | 46,419 | 45,101 |
10 오천 | 11 나주 | 12 온양 | 13 봉화 | 14 소산 | 15 팔계 | 16 광주 | 17 금성 | 18 함평 |
43,341 | 37,888 | 29,761 | 27,088 | 18,614 | 17,366 | 15,607 | 9,886 | 6,338 |
19 광산 | 20 장기 | 21 청산 | 22 조천 | 23 월성 | 24 정주 | 25 연백 | 26 공산 | 27 야성 |
5,914 | 4,705 | 4,527 | 3,929 | 3,751 | 2,301 | 2,000 | 1,965 | 1,934 |
28 영덕 | 29 고성 | 30 전주 | 31 정일 | 32 기타 | 합계 | 가구 수 | ||
1,674 | 1,530 | 1,268 | 1,125 | 27,145 | 2,151879 | 626,265 |
이 밖에도 청산정씨 등 여러 본관이 존재한다.
참고문헌 : ① 우리 성씨와 족보이야기, ② 한국의 족보, ③ 한국의 성씨와 족보 이야기, ④ 국립도서관 전시중(2017,6~8,말) 나의 뿌리를 찾아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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