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회복 : 정체성 9.
제2부 당신의 정체성을 진단한다.
4. 당신의 행동을 진단한다.
● 베드로의 자기 인식과 정체성
우리가 알고 있듯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주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다.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던 베드로는 배반에 대한 작은 가능성마저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이렇듯 긴급 상황에서 급박하게 결정해야 할 때 지기 인식과 행동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존재하는데 전혀 예상 밖의 긴급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그 자리에서 결정해야 하는 상태에서 사람은 자기의 진짜 정체성을 알게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막 14:30-31)
베드로는 예수님이 큰 무리에게 체포되시는 장면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칼을 휘두를정도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없었지만 대제사장 뜰에서 심문받으시는 예수님을 보고있을 때에 한 여종이 자신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된다. 부인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은 몰랐으나 닭이 울 때 비로소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게 된다. 이것이 스스로 생각하던 인식과 실제 행동에 격차가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진단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여 행동한 것에 대한 진단이다. 이렇게 직접적인 현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진단해보아야 자기의 실제 정체성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체성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기인식과는 별개로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의 결정과 행동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동인인 것이다. 스스로는 천국백성이라고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런 자기인식과는 전혀 다른 행동과 삶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행동을 진단할 수 있을까? 이런 진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상당히 긍정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누구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했던 위대한 신앙고백을 드린 사람이다. 그래서 겉으로 볼 때 베드로는 이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느낄 수도 있었기에 예수님의 지적을 더 강하게 부정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의 신앙도 정체성은 하늘에 속하였다고 머리로 생각하는데 실제로 나타내보이는 정체성은 그와는 정반대가 되는 이런 오류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지신이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 자기의 신앙수준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관념적인 신앙이다. 이것은 훈련이 덜 되어 실수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이것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성숙한 신앙이 아니라 굳어져서 조금도 변화될 수 없는 정체성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높이는 욕심 그 자체였다. 그들의 실제 정체성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2-7)
현대 기독교인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지나치게 아는 것은 많은데 실제 삶은 하나님의 뜻을 거의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공부, 제자훈련, 성경통독, 성경묵상 등 모두 꼭 해야하는 중요한 신앙행위들이다. 다만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이론 중심적이 아니라 실제로 행해보는 실천 중심적으로 바뀌어야 하며 그 목적은 행동화할 수 있는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잘못하면 말로는 그리스도인인데 사실은 사탄의 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뿐아니라 우리가 했던 말과 마음과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성경에서 구원은 행위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행함은 결국 그 속마음의 외적인 증거이다. 그래서 믿음의 증거는 행함으로 드러나야 한다. 우리의 행함은 곧 믿음이며 이것이 진짜 정체성이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다 알고 계신다는 말씀이며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정체성을 빨리 회복하라는 말씀이다.
● 처음 사랑인가, 식었는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행동을 분석해보기 위한 가장 좋은 말씀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주님은 천사를 통해 각각 편지를 보내라고 하시면서 미래에 일어날 일 앞에 먼저 각 교회에 예언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시키신다. 이 말씀은 각 교회에 주셨지만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전에 먼저 자신을 진단하라는 것이며, 이 진단을 근거로 각 교회의 정체성을 진단하라는 말씀이다.
에베소 교회의 행위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거짓 사도를 분별했으며, 인내와 부지런함을 가지고 일했으며,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했다. 이것은 훌륭한 행위였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성 속에는 '처음 사랑'이 빠져있었다. 하나님 사랑이 빠진 채 종교 활동을 열심히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빠진 교회는 어쩌면 겉껍데기 종교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에베소 교회는 게으르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주를 위해 헌신했다. 영분별을 통하여 악한 자들을 내쫓는 등 잘 한 행위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처음 사랑'을 버린 일로 인하여 촛대를 옮겨버리실 수도 있다고 강하게 책망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동일시하신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는지를 진단하고 점검하여 회개하며 처음 행위를 다시 가지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에베소 교회는 아예 문을 닫아버리게 될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교회가 아닌 그런 곳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우리는 이 지점에서 우리의 행동을 진단해보아야 한다.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가? 예배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기도와 제자훈련에 철저한가? 교회의 권면을 따라 인내하고 부지런하게 봉사의 일과 전도의 일을 감당하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 그런데 만약에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버렸다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열심과 충성과 순종은 어쩌면 거짓일 수 있다. 주님은 처음 사랑의 행위를 버린 것을 심각하게 책망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비롯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해 진단해보아야 할 첫 번째 과목이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 궁핍한가, 부요한가?
서머나 교회는 궁핍하고 환난이 많은 가난한 교회였으며 유대인의 탈을 쓴 사탄의 무리들로부터 공격과 핍박을 많이 당하는 고난이 많아 보이는 교회였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교회로 보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부요한 교회라고 칭찬하신다. 정체성의 수준이 높을 뿐만 아니라 급작스러운 공격에도 지혜롭게 판단하며 어려움이 자주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것은 겉과 속이 동일한 상당히 훌륭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계 2:9)
이런 서머나 교회를 향해 하나님은 시험을 끝까지 이겨내고 죽도록 충성하라고 명하신다. 왜냐하면 서머나 교회는 죽도록 충성할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서머나 교회의 믿음과 행위를 다 알고 계셨으며 환난을 극복하고 죽기까지 충성할 교회로 인정하셔서 생명의 관을 주실것을 약속하셨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이제 지금현재의 우리 자신과 서머나 교회를 비교해보자. 당신은 얼마나 부요한가? 혹은 얼마나 궁핍한가? 현실적인 환경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부요해진 모습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최고의 정체성을 소유한 상태이다. 아무리 성공적이고 번영을 누리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빈약하면 그는 심하게 궁핍한 사람이다. 우리는 버려야 한다. 버려야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 이것이 진정으로 부요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고 있다고 책망하신다. 겉으로는 성공적이고 화려하고 풍요롭고 번영을 누리지만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 뿐이기에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엉망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굉장히 심각하고 중대한 일이다. 아는 것은 있으니 세상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부족함과 간절함이 없으니 교회에서 뜨겁게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다. 결국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모습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토해버리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두시게 되는 것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우리의 행동을 진단해 보자.
현재 하나님과 어떤 관계이며 하나님과 친밀한가? 말씀이 들리는가? 믿음으로 기도 하는가? 날마다 기도와 말씀묵상과 헌금도 최선을 다해 드린다고 해서 뜨거움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관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성공이나 번영을 위한 뜨거움, 혹은 성취를 위한 뜨거움 이전에, 과연 하나님을 향한 뜨거움인가를 진단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한가, 아니면 궁핍한가?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이나 자기 일에 초점을 두고 살고 있는가? 이런 진단은 구분하기도 쉽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제대로 진단이 되지도 않는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어떤 말씀에도 순종하겠다는 결단의 상태이며 이런 상태에서 비로소 우리의 행동을 진단할 수 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 발람인가, 이세벨인가?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서의 문제점은 발람의 교훈과 이세벨의 유혹에 있다. 두 교회를 살펴보자.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서 순교자가 나올 때에도 믿음을 지켰지만,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게 만든 발람의 교훈을 지켰고 더 나아가 니골라당의 교훈까지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4-15)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훌륭하게 싸우며 이기고 있던 이 버가모 교회에 어떻게 발람의 교훈이 들어오게 되었을까? 그것은 돈의 유혹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도 물질적인 복이나 성공을 무조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가르치고 행해지는 발람의 교훈이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가 담대하게 믿음을 지킨다고 해도 돈이나 성공이라는 사탄의 교묘한 전략이 틈을 타고 들어와 교회와 가정을 무너뜨린다. 우리는 성령님을 반드시 의지하여 돈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의 할 일이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민 22:18-19)
두아디라 교회는 좋은 행위를 점점 더 풍성하게 채워가고 있는 교회였다. 하나님은 두아디라 성도들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풍성함을 알고 계셨으며 점점 아름다운 행위가 처음보다 더 많아지는 모습을 칭찬하고 계셨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9)
이렇게 하나님께 칭찬받으며 점점 흥왕해가던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함으로써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으며 회개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거부했다. 이 한 여자 때문에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된다. 이 여자 이세벨은 상업을 위해서 우상숭배를 권장했으며 돈에 대한 욕심이기도 하지만 생존과 활동을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교회를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계 2:20-21)
버가모 교회에는 돈의 유혹과 교묘한 이단시설로, 두아디라 교회에는 생존이라는 명목으로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지금의 현대교회라고 다를 것이 없다. 혹시 돈이 우상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사업이나 직장 때문에 믿음을 양보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고 빨리 돌이켜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늘의 철장권세를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다. 그 길만이 우리 자신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이웃과 나라를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 2:26-27)
● 살았는가, 죽었는가?
이제 우리의 행위를 진단 할 수 있는 행동진단 마지막 순서이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는 이유는 성도와 교회의 모든 행위와 경고와 칭찬들을 일괄적으로 정리해주기 때문이다. 우리 행동을 진단해볼 수 있는 최후의 기준은 우리가 살아있는가 죽었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 보려는 사데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 점을 점검해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고는 하는데 사실은 죽은 교회였다. 교회의 규모나 숫자나 유명도나 지도자의 능력이나 교계에서의 역할 등 성경은 일관되게 이런 외적인 모습을 지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로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그 마음이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의도나 과정에서 결코 인본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데 교회를 향해 주를 향한 마음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성도의 마음을 보신다. 성도들의 온전한 행위가 없고 온전한 마음을 하나도 확인할 수 없기에 죽은 교회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계 3:1-2)
반면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였다. 작은 능력으로도 말씀을 지키고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다. 이 교회는 작은 교회였음에도 세상을 향해 힘차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 결과가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살아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당연히 수많은 시험을 당했고 그것을 이긴 교회 즉, 살아있는 교회이기에 하나님은 마지막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모두에게 그 행위를 물으셨다. 행위란 믿음의 증거들이다. 율법적으로 겉모습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정체성과 믿음이 표출된 현상이 믿음의 행위이다. 야고보 사도는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 죽은 믿음으로는 거듭남도 구원도 천국도 영생도 주어질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안 믿는 것만도 못한 모습이다.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라도 있지만 죽은 믿음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런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우리는 무엇으로 믿음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있겠는가? 이것은 종교 활동 신앙행위로만 진단하기에는 문제가 많다. 그래서 야고보는 오히려 이웃 사람을 실질적으로 돕는 것을 살아있는 행위의 증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살아있는가 죽었는가? 이제 우리의 행동을 진단해 보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선민의식으로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죽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살아있는 믿음이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그리스도인이 살아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항해서 복음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삶에서 외적으로 표출되어 나올 수 있는 살아있는 증거들이며,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가 쇠퇴하게 된 원인은 사데 교회와 같은 죽은 믿음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죽은 것 같은 교회에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거슬러 힘 있게 헤엄치는 성도들에 대한 기대로 교회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 물질주의, 번영주의, 성공주의, 은사주의, 표적신앙, 관념적신앙, 율법주의 등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이 넘쳐나고 교회를 그런 사상들이 지배하는 시대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 중심의 바른신앙을 가진 신앙인들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우리는 살아있는 신앙인들이다.
어려운 형편이나 답답한 상황을 만났을 때 낙심하고 실망하고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내어 주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그 상황 위에 계신 주님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한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고,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살아내는 사람들이다. 아직 육신의 눈으로나 세상적인 시각을 갖고 산다면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그럴 때 살아있는 강한 정체성을 가슴 속에 품고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고 성장해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