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댄스의 유래와 역사
1) 댄스의 유래
댄스는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발로(発露)이다. 댄스는 춤과 비교하여 볼 때 그 개념이 사뭇 서양적으로 인식되어질 수 있으나, 심리적 내연(内延)의 신체적 외재(外在)라는 점에서 양자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댄스의 발생을 보는 시각은 학자마다 다르나, 대부분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가 미분화되었던 선사 시대부터 생산 활동과 종교 의식과 관련하여 신체적 언어 즉 댄스가 생성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댄스는 성인식이나 기타 의식 등에서 세분화되었고, 예술적인 고유한 감상(感想) 영역으로까지 발전해 나갔다.
댄스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풍요와 번영을 기원하는 일종의 주술(呪術)로 시작하여 개인과 집단의 사상과 감정을 담아 내었다. 서양의 포크 댄스(folk dance)나 우리 나라의 굿판은 모두 집단 내의 공동체 의식을 공유하고자 하는 바램에서 행하여진 춤들이었다. 중세 농노들이 노동의 고됨을 잊고 서로를 위로하는 노동요와 함께 추어왔던 포크 댄스나 귀신을 달래고 망자(亡者)의 한(恨)을 풀어 주고자 하는 가족과 친지들의 정성과 기(気)가 담긴 굿에서는 개인보다는 집단에 충실하여 춤추는 그 자체가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복귀하는 일이 된다고 간주하고 있다. 특히, 우리 나라의 민속 놀이 중 줄타기(답삭희 : 踏索戯)에서1) 어름사니(줄꾼)가 통나무 세 개 위로 공중에 연결된 밧줄 위에서 재담하고 걸어다니며 춤추며 마지막에 부르는 회심곡(回心曲)은 줄을 매개로 하여 온 우주 즉, 천․지․인(天․地․人)을 연결하는 주술적인 기도와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댄스는 그 유래가 자연 발생적인 개인 감정의 표출에서 의식적인 의례로 발전하였거나 혹은 의례적 행위에서 기원하여 오늘날의 다양한 댄스로 분화되었다 하더라도 전 인류의 삶에 관여된 모든 총체적인 역사에 그 발생의 태동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2) 우리 나라 춤의 역사
한반도에 인류가 정착하게 되면서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과 유적에 의하면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거쳐 씨족과 부족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고대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을 기점으로 삼국 시대, 고려, 조선, 구한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춤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어왔음을 알 수 있다.
(1) 상고 및 부족 국가 시대
상고 시대의 우리 민족은 자연물인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산․천․수․목(山川樹木) 등을 숭배하고 다신교를 주창, 생활의 도구로써 이용하였다. 또한, 모든 자연에 정령(精霊)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주술과 무축(巫祝) 그리고 가무 의식을 발생토록 하였기에, 우리 무용은 토속 신앙의 제천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상고 시대의 제천 행사는 오늘날 한국 무용의 원형이 되는 중요한 행사였으며, 이들 행사는 집단의 단결과 화목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음주가무가 어우러진 집단 의식으로써 오늘날 굿판의 진행 모습과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기록된 춤을 출 때 발로 땅을 밟는 동작은 한반도의 공통적 춤사위였으며,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의례의 춤이었다. 주술적인 목적에서 실시되었던 신석기인들의 춤과 노래는 샤머니즘적 특성을 가진 ‘굿’ 의 형태로 현재까지 잔존해 오고 있다. 1971년에 발견되었던 울주군 대곡리의 반구대 암벽 조각에 새겨진 그림은 탈이나 춤추는 사람으로서 신석기 시대나 청동기 시대의 우리의 실생활에 주술적 춤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암벽의 그림은 모두 8점으로 거의 수렵이나 어로와 관계된 생활 모습이나 사냥 전후의 춤추는 모습 또는 탈 모양이었다. 가운데 춤추는 모습은 두 손을 팔굽에서 꺾어 올리고 두 다리를 굴신하는 춤으로 전면에 남성의 성기와 둔부에 꼬리를 달았다. 이 춤은 의식적으로 최고 존재나 미지의 공포 또는 자연력에 대해 간절히 기원하는 어로인들의 의식을 묘사한 것으로 노르웨이의 졸렌(Solen) 동굴의 〈음경을 단 남자 무용상〉, 시베리아 레나강의 〈꼬리 달린 남자상〉과 비슷한데, 이들은 수렵․어로인들의 기구(祈求) 의식 춤을 묘사한 것이었다. 이 춤추는 인물상의 춤사위는 현대 용왕제에서 춤추는 무당의 춤사위와도 유사점이 많다. 따라서 이것을 선사 시대부터 내려온 무당들의 오랜 전승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2) 아울러 이후 우리 나라 철기 문화 국가의 형성 시기로 접어든 고구려의 벽화 고분에서 묘사된 그림들 중 무용적인 신체 활동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
표 1. 고구려 벽화 고분에서 나타난 무용적인 신체 활동
구분 |
특징적 신체 활동 |
축조연대(추정) |
안악 제 3호분 태성리분 쌍영총 대성산 제 10호분 통구 무용총 팔청리분 |
춤추는 여인상, 검무 추는 사람 무용수 북을 치고 춤을 추는 인물상 세 남녀의 무용 모습 무용(군무) 5인의 잡기인 모습(춤추기와 악기 연주) |
- 4C 후반 5C 말 4C말 ~ 5C초 3C 초 5C 말 |
고구려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일찍이 중국 화북 지방 및 소수 민족들과 통교하여 선진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옛 낙랑 문화도 흡수하였다. 고분 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에서는 기악과 노래와 춤이 일찍 분화되어 전문가에 의해 연희되었으며, 안악군 동수묘 벽화의 추실 벽화에 나오는 춤은 고유의 춤이라기보다는 외국의 춤사위가 도입된 것으로 추측되어 왕실에서도 서역 등지와 문화적 교류가 있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무용은 부족 국가 시대의 ‘동맹’ 이라는 제천 의식에서 즐겨 사용했던 장엄한 음악과 샤머니즘적인 무속 형태에서 탈피, 고구려 국민성 자체의 강건한 기질에 따라 직선적이고 동적인 발랄한 모습으로 발전된 것으로 짐작되며, 대륙의 영향으로 인한 세련되고 합리적인 체계로의 발전은 중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백제는 외교로써 중국의 동진(東晋)과 왜(倭)와 통교하였으며, 중국 요서 지방과 왜의 큐슈 지방까지 진출, 백제 문화를 이식시켜 일본의 아스카 문화를 형성시키기도 하였다. 백제악은 중국의 남조악의 영향을 받았으며 발전된 기악무는 일본의「교훈초」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기악은 산대도감놀이 형태로 전승되어 맥을 이어 왔으며, 당시 백제악은 고구려나 신라처럼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수서에 농주지희(弄珠之戲)라는 기록으로 보아 주로 산악백희(散楽百戲)의 영향을 받아 악무가 성행하였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2)
신라는 진한 12국 가운데 사로국을 중심으로 6부족이 결합하여 일찍부터 외족과의 투쟁 경험 없이 씨족적 유대를 강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3국을 통일한 후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아 한국 문화의 근간이 되는 문화형을 수립하였으며, 유교는 정치 이념으로, 불교는 문화적으로 수용되었다.
‘가무백희’ 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볼 때 통일 이전 신라의 무용은 민속무로부터 점차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의 무용으로 도솔가무가 있으며, 희소가무, 소경무, 대금무 등 대부분 노래와 가야금 등이 동반되어 통일 신라로 이어지고 있다. 검무, 처용무, 무애무, 상염무, 사선무, 오기 등으로 발전된 통일 신라 시대는 민족 예술의 형성기로써 음악, 무용 등 예기에 이르기까지 멀리 서역과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불교의 발달에 따라 호국적인 불교 행사가 열렸으며, 팔관회는 토속 신앙과 불교 행사가 가미된 제전으로 가무백희를 군신이 함께 즐기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시기를 한국 전통 무용의 형성기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치․사회가 발달하면서 상고 시대의 원시 종합 예술은 점차 분화되어 오희(呉姫) 무용을 취미에 따라 재구성하고 외래의 것을 수입, 모작의 단계를 거쳐 더욱 세련되게 발전하였다.
(2) 중세 전기의 무용 :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는 유․불이 조화된 귀족 문화의 황금기로써 무용도 신라에 비해 다양해지고 예술성 또한 짙었다. 당악과 아악이 수입되고 향악이 정비됨에 따라 각 종 민속 무용도 여러 유형으로 분화되었다. 특히, 정치․사회의 풍자와 관료․승려들의 비행에 대한 서민들의 감정이 무용 동작과 음악으로 해소되면서 은유 되거나 화합을 이루기도 하였다.
불교 문화의 영향에 따라 ‘연등회’ 와 ‘팔관회’ 라는 국가적인 주요 행사가 치뤄졌으며, 팔관회에서는 사선무(四仙舞)와 선유락(船遊樂) 등을 상연하기도 하였다. 후대 공민왕에 이르러서는 신돈이 연등회 때 화산희(火山戲)를 벌여 행사의 여흥으로 음악․무용․잡희 등을 극성하게 치뤄 그 소요 비용과 폐해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3) 고려인들은 시가와 무용을 즐겼으며 가무에 능한 사람들을 모아 비단과 말총 갓으로 대오를 구성, 남장시켜 노래와 가무를 가르쳤는데 이는 불교 행사를 위해서였다.
고려조는 조선 시대와 달리 전통적인 무속 의식과 불교를 숭상하여 음악․무용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 또한 고려조의 민속 무용은 농악, 강강술래, 무당춤, 탈춤, 나례 등 율동이 선명하면서도 소박한 향토성이 강하게 풍기는 지방색을 나타내고 있다.
(3) 중세 후기의 무용 : 조선 시대
조선의 치국 이념은 예(禮)와 악(楽)에 그 기저를 두었으며, 조선 전기에 아악․당악․향악을 비롯해서 악기․작곡․악보에 이르기까지 모두 집대성되면서 우리 전통 무용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이것에 점차 유현미를 더해 화려한 궁중정재무(宮中呈才舞)로 발전되었으며, 우리 민족 감정의 정서에 맞게 창작된 민족 무용의 특성을 보였다. 춤은 대체로 규모가 큰 편이었고 각각 개성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며, 유교적인 색채가 나타나면서 15C의 화려했던 민족 문화의 일면을 풍기었다. 조선 전기인 15C에는 향악정재가 고려 시대의 것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었지만 좀 더 자연스러운 춤으로 발전하였으며, 철저한 유교 윤리에 의해 학문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였다. 육체의 미를 부정함에 따라 몸의 자연스러운 율동이 금지되었으며, 반드시 격식과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면복(俛伏) 후 춤이 시작되고 춤이 끝나면 다시 면복하고 일어나 족도하면서 물러나며, 국한문 혼용의 가사를 사용한 특징도 있었다. 대부분 민속 무용은 궁중정재 무용과 달리 삼한 시대 또는 삼국 시대부터 맥맥히 이어져 호흡을 같이 한 오랜 종교적인 무용으로 사당패, 무당춤 등이 서민들의 환영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양차 대란 뒤 청의 고증학과 서양의 문물 유입에서 얻은 자극을 바탕으로 서민 문학과 서민 예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각 종 정재 무용들은 전기의 것을 그대로 이어 받아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형식을 취하였으나, 내용상 변화하기보다는 형식상으로 많은 종류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민속 무용이 다양한 내용과 다채로운 형식으로 변모되어가면서 궁중정재 무용을 압도하였기에 정재 무용은 그 자체의 특징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민속 무용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 많아 형태 면에서 윤무가 대부분이었고 그 지방 고유 풍속과 언어, 때에 따라서는 풍자와 해학도 내포되어 있어 무용극적인 요소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었다.
(4) 근대 이후의 무용 : 일제 치하 이후
한일합방 이후 무단 통치를 위해 모든 국가 제도를 개편 또는 폐쇄시킨 후 해산된 악인, 여령, 무동들이 민간 조직 단체에 흡수됨에 따라 5백여 년간 계승되었던 궁중 무용이 민간과 접촉, 점차 민간 무용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갔다.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무용이 유입되어져 ‘신무용’ 이라 불리웠으며 창작 무용도 시도되었다.
1902년 협률사(協律社)가 원각사 무대에서 공연할 때 민속 무용의 일부를 포함시켰는데, 이것이 민속 무용을 무대 공연으로 올린 효시가 되었으며, 여기에는 승무․농악․살풀이․가면극 등도 함께 공연되었다. 당시 한성준(1874~1941)을 주역으로 본격적인 무용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신무용이 처음 선 보인 것은 1920년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유학생들이 고국 방문을 기념으로 러시아 민속 무용을 춘 것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체육 댄스와 사교 댄스가 전파․유행되었는데, 당시에는 바르게 평가되지 못하였다. 활동가로는 배구자, 최승희, 김민자, 박외선, 박연인, 조택원 등을 들 수 있다.
우리의 전통 의식은 일제 치하동안 사회 표면에 부각되지 못하였다. 약간의 서구 무용을 제외하곤 민족 무용의 전반이 허탈과 실의적인 작품으로써 그 명맥만을 유지하였었다. 밀어닥친 구미 문화의 물결로 광복 후에도 여전히 민족 무용의 체계화가 어려웠으나, 1960년대에 들어 한국학과 주체성 찾기 운동이 대두되면서 우리 민족 의식이 서서히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한국 무용은 유교적이고 봉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긴 했어도 전통과의 자연스러운 친화 속에서 자생적인 발전을 도모하여 왔다. 일제 침략은 정치․예술뿐 아니라 우리의 전통 의식마저 단절시켰으며, 생존 자체에 급급하여 전통 문화를 복원할 여유도 없는 우리 역사의 허점을 뚫고 근거 없는 소재로써 밀려드는 서구 문화는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60년대 이후 현대 한국 무용의 창작 정신은 창작가가 확고한 전통 의식과 개념을 가지고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게 하였으며, 춤의 형식뿐 아니라 내면의 심오한 정신까지도 바르게 전승 받아 전통의 역사적인 의미와 방법론을 모색하게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자신의 예술관을 개척하려는 의욕에 비해 남겨진 전통 단절 의식과 무용인들의 한국 전통 춤사위에 대한 방법론적인 접근의 무지, 일반인들의 무관심 등은 제한적 요소로 남아있기에 아직도 미온적인 우리 춤의 나아갈 방향을 미래 지향적으로 안착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1) 조완묵, 우리 민족의 놀이문화, (서울 : 정신세계사, 1996), pp.161~180.
4) 이학래 外, 한국 체육사, (서울 : 지식산업사, 1994), pp. 13~72.
5) 임영무, 高句麗 扃堂 활동과 체육,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논총 13집 2호, 1997), pp.202~203.
2) 김매자, 한국 무용사, (서울 : 삼신각, 1995), p.40.
3) 김매자, 한국 무용사, (서울 : 삼신각, 1995), pp.70~72를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