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으로 보는 역사
이북聖公會 이야기(2)
평양의 북쪽 순천교회 2
나의 시아버지는 주장훈(바우로)신부님,
친정어머니는 조노다 전도부인 입니다.
“참고우시네요....”
“곱기는 요 뭐...어린네죠....”
지난 호에 이어 이번에도 혼배성사 사진입니다.
사진 속 교회도 같은 교회입니다. 평안남도 순천성당입니다.
지난번 사진 속 주례 집전신부님이 朱 章薰(바우로)신부님이셨는데 지난 호 기사를 보신 주 장훈신부님의 며느님과 연락이 닿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인천 내동 교회에 다니시고 계신 조 앵니다(인천시 남구 학익동) 교우님은 올해 연세가 여든이신 데 무척 건강하셨습니다.
만나 뵙는 날도 수영을 다녀오시는 길이셨습니다.
“1월 7일로 기억해요 따뜻한 겨울이었어요.
굉장히 추운 곳이 이북인데 그날은 참 따뜻했어요.
이방래조異邦來朝 첨례 지나고 바로 다음날이었어요.
이방래조 첨례가 지나야 결혼을 할 수 있었거든요……
시아버님(주 신부님)은 참 철저 하셨어요.....
결혼식은 성당 안에서 하고 이 건물은 신부님 사택 앞이 예요.
사택이 굉장히 컸고요 복도가 있는 건물이고 그 반지 하로 내려가면 신부님 쓰시던 서재가 있었고요……성당은 그 위쪽으로 있었죠…….”
"이 누가신부님께서 주례를 해주셨어요.
신창교회에는 차 인환(맛디아)신부님의 장인이신 이 누가(정호) 신부님께서 계셨죠.
구레나룻을 기르시면 뭐 예수님 같이 생기신 신부님이세요.
경기도 오산이 고향이신데 수원에서 전도사 생활도 하셨고 저희 시아버님 하고는 아주 친한 친구 분이셨어요.
그래서 이 누가 신부님한테 주례를 부탁드렸죠.……."
주 바우로 신부님은 두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조 앵니다 할머니의 남편이시자 주 신부님 장남(주 누가)은 돌아가시고, 차남은 현재 장화리 교회에 나가시고 계십니다.
주 신부님은 59세에 돌아가시고 시어머니 유 모니카 사모님은 주 바우로 신부님 돌아가시고 3년 후에 54 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주 신부님은 자산교회에 계시다가 순천교회로 임지를 옮기셨는데 순천 교회는 평양교회의 관할 하에 있었습니다.
평양교회에는 나중에 보좌주교가 되신 차 애덕(A.E.Chadwell)신부님께서 관할사제로 시무하고 계셨습니다.
평양교회의 관할교회로는 순천, 순창, 성천, 신창교회들이고 순천교회의 지교회로는 동림리와 간동리 교회가 있었습니다.
“저희 시아버님은 가족은 모르시고 오로지 하느님 일만 생각하시고 바치며 사셨던 분예요…….
미사 가방을 함 지듯이 멜빵을 해서 지시고 꼭 캐석을 입으셨어요.
겨울에는 캐석 위에 오버를 입으시고 신부님 모자를 쓰시고 얼어있는 대동강을 건너 동림리, 간동리로 다 다니셨죠…….
그 때 전도사로는 강 준희(애단)신부님이 계셨고 강 신부님 후임으로는 유 부제님(유 버나드 아버지)이 계셨죠.
그 유 부제님 사모님은 김 희준(마가)신부님의 조카따님이셨어요…….
갈아입으실 바지도 없으셨어요. 단벌이셨죠.
미군부대에서 나온 검정 물들인 바지 한 벌 이셨는데 심방 다녀오시면 금방 빨아서 불에 말려 가지고 주일 아침에 입으시도록 해드렸죠…….”
주 신부님은 매일 조도와 만도 미사를 드리셨고 교인들이 없을 때는 며느리(조 앵니다 할머니) 와 둘이서라도 꼭 미사를 드리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는 저 나름대로 얼마나 고생이었겠습니까.
추운 날씨에 난로도 없는 성당에서 얼마나 추웠겠어요.…….
놋그릇에 물을 끓여 제대 옆에 놔드리면 미사 드리시다가 손이 시려 우실 때 그 놋그릇을 만지시며 손을 녹이시면서 미사를 드리셨는데 저는 그것마저도 할 수 없으니 얼마나 고생스러웠겠습니까? 하하하……."
구 세실 주교님께서 견진성사가 있으면 평양교회에 계신 관할사제 차 애덕신부님과 함께 오셨다고 합니다.
“.....세실주교님은 참 인물이 좋으셨어요.
세실 주교님이 오시면 교인들이 외국사람이라고 무섭다고 방을 내어드리지도 않았어요.
세실 주교님은 큰 셰퍼드 개를 데리고 다니셨는데 광이라도 하나 내어주면 그 셰퍼드를 안고라고 주무시겠다고 하시고 그러셨어요.
이북은 논이 없어 쌀이 없고 강냉이나 조, 콩, 고구마, 감자 등이 주식이었는데 외국 분인 세실주교님한테 맞는 음식이라는 게 없었잖아요.
그래도 불평 한마디 안하시고 세실주교님은 그런 것도 잘 드시고 그러시더라고요…….”
".....일주일에 한번은 평양교회로 차 신부님(A.E.Chadwell)을 찾아뵙고 매주 보고를 드리셨는데 대동아전쟁 末 어느 날은 며칠이 지나도 안 돌아오시는 거예요.
보름정도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시지 않아 걱정이 되어 찾아 다녔는데 일본 헌병이 업고 들어온 거예요.
평양에 나가셨다가 일본경찰한테 간첩혐의로 오해를 받아 잡히셔서 손톱에 전기고문 고초를 당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나중에 얘기하시더라고요……."
주 신부님은 1.4후퇴 전까지 계속 순천성당에 계셨는데 주 신부님께서는 순천에 계시다가 먼저 남하한 큰아들을 보러 미군 짚(Jeep)을 타고 잠시 남하하셨다가 못가시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배를 타고 남하하셨지만 그 때까지 시어머니와 시동생은 북에 계셨습니다.
한국전쟁 와중에도 신부님은 교인들과 함께 감자와 고구마를 삶아 교인들과 함께 나누며 주일미사를 꼭 드리셨고 심방을 다니셨습니다.
주 신부님의 큰아드님은 순천읍에서 라디오 상점을 하셨습니다.
인민군들의 감시 속에서도 주 신부님은 단파라디오로 이남 뉴스를 들으시며 정세를 판단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동림리는 대동강 강변이었었는데 거기에 교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대피소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주 신부님은 그렇게 남하 하신 후 온수리 성당으로 부임하셔서 일하셨고 온수리 사택에 가족들이 모여 살게 되었죠.
온수리 성당으로 오시고도 참 대단히 일을 많이 하셨어요.
그 때 온수리에는 김 요한 신부님이 계셨는데 늙으셔서 목회를 하시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온수리에 아버님이 부임 받으신 거죠.
제 시아버님 고향이 장화리 이신데 그래서 장화리에 교회를 지으시고 선수리 교회, 덕포리 교회를 지으셨죠.
그런데 덕포리 교회에는 교인들이 많지 않아서 아버님 돌아가신 후에는 그 덕포리 교회를 헐어다가 흥왕리 교회를 지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혈압이 높으셨는데 미사 드리시다가 쓰러지셨어요.
병원에 가려고 했지만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시고 쓰러지셨죠.
움직이시는데 몸이 불편하시게 되었고 그래서 내리교회로 발령받아 가신 후 내리교회(안골교회)에서 일하시다가 차 부주교(A.E.Chadwell)님한테 부탁드려 병원에도 여러 차례 가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돌아가시게 되었죠.
그래서 대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했어요.
지금은 인천내동교회 교회묘지에 모셨죠…….”
조 앵니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성공회 전도 부인 이셨다고 합니다.
성함은 조 노다 이셨는데 충북음성이 고향이셨습니다.
아버님과는 일찍 사별하시고 30세에 이 부비 신모님께 공부하신 후에 33세에 첫 발령을 받아 천안 부대리 교회에 전도 부인으로 일하셨습니다.
그러시다가 이북에 있는 자산교회로 발령받아 가셨고 거기에서 다시 순천교회로 임지를 옮기신 것입니다.
어머님과 헤어질 때 조 앵니다 할머니는 4살이었고 수원보육원에 가서 있으면서 애태 수녀님 등이 돌봐주시며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5세에 순천으로 가서 전도부인으로 일하고 계신 어머니와 만나게 된것입니다.
그곳에서 조 앵니다 어머니 조 노다 전도부인은 주 신부님과 함께 일하셨다고 합니다.
순천교회는 신부님 사택과 전도부인 사택이 별도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계시면서 주 신부님은 당신의 아드님과 전도부인의 따님인 조 앵니다 교우를 부부로 맺어주셨다고 합니다.
전도부인이신 어머님은 교회 성물을 관리하시고 신부님과는 별도로 심방 다니시면서 교회 살림을 맡아 하셨습니다.
그 후 남하 하시고는 강 준희(애단)신부님과 일하셨는데 강 신부님이 사제서품을 받으시면서 객사리 교회(現 팽성 교회)를 맡으셨는데 그 지교회인 둔포 교회에 가서 전도부인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건강하세요...운동도 잘 하시고요…….”
“저는 건강해요......죽을 때까지 아버지 하느님께서 믿음,건강 주시고..... 부르시면 가야죠.........우리 아버님 같이 고생하신 분은 없을 것 같아요.....우리 성공회에…….”
시종 웃음을 잃지 않으시며 또박 또박 말씀해 주시는 앵니다 교우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시아버님 주 신부님과 전도부인 일을 열심히 하신 친정어머니 조 노다 전도부인의 열정을 본 받아 교회를 위하며 하느님의 일을 해나가야 하겠습니다.
글옮김: 유재근 (성공회와 역사)
첫댓글 순천, 자산, 평양교회 등 북의 성공회 역사 이야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