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갈치 |
09 : 32 |
팔봉중학교 |
13 : 36 |
솔개재 |
10 : 30 |
사과밭 창고 |
14 : 05 |
비룡산(292m) |
10 : 45 |
굴포 운하지 |
14 : 10 |
집뿌리재(느티 고목) |
10 : 56 |
인평리 마을회관 |
14 : 25 |
금강산(316m) |
11 : 25 |
서산-원북 삼거리 |
14 : 56 |
장군산(200m) |
12 : 23 |
붉은재 |
15 : 03 |
수람재(차리고개) |
12 : 37 |
오석산(169m) |
15 : 29 |
물래산(140m) |
12 : 56 |
강실고개 |
15 : 52 |
<무엇이 성공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 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 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류시화 역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서-
<윗갈치 서령정 입구에서 단체 사진>
<서산의 역사>
서산은 삼국지동이전에는 마한조 54개국 중의 치리국국이 나오는데 지금의 지곡면 지역이다. 태안에는 신소도국, 운산면에는 염로국이 있었으며 세 군데를 일컬어 서산이라 한다.
서산이라는 말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산지방에는 기군이 있고, 그 밑에 영현으로 지육현과 성대혜현(태안) 그리고 혜성군(당진 면천)의 영현인 여촌현(운산 지방)이 포함된다.
신라 경덕왕 때 기군이 부성군으로 바뀌고, 고려시대에는 부성현이 되며, 1182년 부성현이 없어졌다가 1284년 이 곳 충신 정인경의 공로로 복군되어 서주목이 되었다.
그 후 1284년(충렬왕 10년) 처음으로 서산으로 불리다가 1308년 서주목으로 바뀌었다. 그런 후 1310년(충선왕 2년) 서령부와 지서주를 거쳐 1413년(태종 13년) 서산군이 되었다.
서산은 전국 명당 8군데 중 하나로 알려졌는데 거기에는 옥녀봉에 얽힌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많은 애환을 거친 서산은 금세기 들어 간척사업과 공업단지의 유치에 힘입어 예전의 명칭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정충신과 정순왕후 그리고 안견의 고향이 서산인데 명당의 예언이 틀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솔개재에서 지도를 펴고 지형을 확인>
해미를 돌아 가야봉을 지나고 상왕산을 돌아 서산 벌판을 휘돈 종주길은 드디어 태안반도를 향하여 발길을 내딛는다.
윗갈치에서 서령정을 지나 169봉을 지나면 곧바로 솔개재에 닿는다. 추적추적 내리던 겨울비는 천안과 평택을 지날 때만 해도 내리더니 종주를 시작할 무렵에는 그쳐서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주변에는 큰말, 텃골, 큰덕삼이와 같은 순우리말로 된 지명들이 다수 있어 친근감이 간다. 역시 도심에서 멀리 떨어지니 옛말이나 단어들이 그대로 존재한다.
높이 292미터인 비룡산은 용이 승천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지방에서는 상당히 높은 산으로 정상 부근에 있는 묘가 범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솔길 같은 산길을 내려서면 집뿌리재에 있는 큰 느티나무를 만나는데 아마도 마을의 당산지주로 모셨던 보호수인 것 같다.
<솔개재>
집뿌리재는 서산의 괜차뉴님에 의하면 칡뿌리재가 아니라 집뿌리재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박성태의 남한산경도를 참고로 서산-태안 산경도를 작성하던 중 어느 지도 문서에도 이름이 없어 동리사람에게 물어 보니 처음엔 꽃뿌리재라 하여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고 칡뿌리재라고 불린다고 한다.
그런데 금학리 이장 두 분에게 확실한 지명을 물으니 철자 받침과 발음에 의해 칡뿌리-쥐뿌리-짚뿌리로 결론을 못 내리던 중 그 고개를 관할하는 팔봉면 금학리 3구 이장님 말씀이 옛 어르신들이 예전에 그곳에 있는 집의 뿌리(기둥뿌리)까지 호랑이가 모두 파헤쳐 버려 생긴 이름이라 한다.
‘전설 따라 삼천리’유래에 의해 아직도 동네(금학3구)엔 짚뿌리로 알고 있지만 볏짚 할 때 짚이 아닌 집뿌리가 맞다고 이장님과 결론을 내린 것이다.
구전으로 이어져오는 마을 이름이나 고개 명칭의 유래는 꽤 재미있고, 또한 잘못 표기되고 있다. 정확한 유래와 호칭을 발굴하여 지도에 틀린 지명이 나오는 해프닝을 일깨움도 재미있는 일이다.
<집뿌리재>
<집뿌리재에 있는 당산나무>
<천년 바위에 기생하는 백년 벚나무>
<금강산 정상의 아름다운 리본들>
<팔봉산으로 이어지는 팔봉지맥의 시작점>
<금강산을 지나 수랑재를 넘어 물래산으로>
금강산을 오르는 한참의 땀 흘림이 만만하다고 정맥을 깔보는 이들을 혼 내킨다. 헉헉거리며 다들 힘들어하지만 단련된 정맥꾼들에게 금방 꼭대기를 보여준다.
여기저기 자신들이 지나친 흔적을 매달았는데 갖가지 리본들이 아름답게 바람에 일렁인다. 전국에 불붙은 산행 열기는 대간을 지난 정맥으로 이어졌고, 이젠 지맥과 기맥을 찾아 산천을 일주한다.
나중에 수랑재에서 본 금강산은 암봉을 보여주지만 산정을 지나는 산꾼에게는 그저 지나치는 산마루에 불과하여 실망을 준다.
아마도 시야가 불분명하여 멋진 조망터를 놓쳤음이다. 조금은 아쉬움을 준다.
금강산에서 갈라지는 팔봉지맥은 팔봉산으로 이어지는데 서산의 진산 팔봉산을 품고 있다. 흐릿한 팔봉산을 그냥 지나침이 못내 아쉽다.
<장군산>
<장군산에서의 점심>
<200봉 근처의 동물 모양 바위>
<지나온 금강산 주변 능선>
<금강산-해발 316m>
<수랑재의 예비군 훈련장 안내판>
금강산을 지나 펑퍼짐한 암릉터에서 이른 점심을 든 일행은 무섭게 생긴 동물 모양 바위를 지나 급격한 내리막길을 내려선다.
시야가 확 트인 조망바위에서 지나온 산길을 살피니 금강산이라 불릴 수 있는 봉우리가 보인다. 아마도 흐린 날씨에 암봉을 놓쳤거나 산길을 우회하여 지나친 듯하다.
예비군 훈련장을 지나니 수랑재를 가로 지른 32번 국도가 바람을 가른다. 지도에는 동쪽으로 한참가야 지하통로가 있다고 표시되어 있는데 모두들 도로를 가로지르는 모험을 감행한다. 아찔한 도로 넘기는 좌우를 경계하는 도움으로 동료들 모두 무사히 건넌다.
무사하여 다행이지만 절대로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치단체에서도 지하차도를 표시하는 안내판을 설치하여 주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차리고개를 지나면 친근한 마을 이름인 건넛말이 나오고 푹신한 산길을 오르면 물래산이 금방이다.
해발 140미터의 물래산은 역마산과 병풍산으로 이어지는 부석지맥이 갈라진다. 각 지역의 산꾼들이 만들어논 이정표와 기맥, 지맥의 명칭들이 다양함도 산행 중 얻는 기쁨이다.
각자의 취미 생활에서 산경표나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지맥과 기맥을 만들고 자신이 지은 이름을 붙이는 즐거움도 매우 크리라 여겨진다.
<수랑재>
<수랑재의 차리고개 32번 국도>
<물래산>
<역마산과 병풍산으로 이어지는 부석지맥 시작점>
<소나무 숲길>
<황톳빛 색깔이 아름다운 야산길>
<지하차도>
<지하차도 건너에 팔봉중학교가 보인다>
<팔봉중학교>
<식수를 보충할 우리의 안전한 베이스 캠프>
<서산 육종 마늘이 온 마을에 가득하다>
<팔봉중학교를 지나 운하의 역사가 있는 굴포천을 향하다>
32번 국도 지하차도를 지나니 팔봉중학교가 바로 보인다. 중간 거점인 이곳에 우리의 베이스 캠프가 서있어 물을 보충하고 잠시 숨을 돌린다.
넓은 기와집을 지나 산길로 접어드니 공동묘지가 나타나고 이내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역사에 전하는 굴포에 당도한 것이다.
과수원과 인삼밭을 지나 정맥을 찾던 중 갑자기 물길을 만나 길을 헤매는데 많이 헷갈렸다. 맛있는 서산 사과를 재배하는 과수원을 지나 과일창고에서 일행들이 사과를 산다. 인심이 매우 후한 주인의 재담과 덤으로 주는 수량이 너무 좋았는지 갈길 먼 중에도 배낭에 가득 한 짐씩 담고 온다.
<서산 사과 농장>
<삼원농장>
<굴포 운하 마을 안내도>
<굴포 운하지 안내도>
삼거리에서 지도를 확인하고 이곳이 역사에 묻혀온 굴표 운하지임을 확인하다. 냇가와 천(川), 강(江)을 지나지 않아야 한다는 산경표의 가르침이 맞지 않았던 이유가 운하에 있었다.
굴포 명칭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안면곶을 인위적으로 절단해 놓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수원의 고등학교 교사가 쓴 논문에 의하면 굴포 운하에 대한 유래와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있다.
다음은 굴포 운하지에 대한 지리적, 역사적 고찰에 대한 글을 옮겨 실은 것이다.
굴포 운하지(堀捕運河址)의 지리적, 역사적 고찰
1. 서 론
굴포 운하는 가로림만과 인접한 팔봉면 오송리와 천수만(淺水灣)과 연접한 태안읍 인평리와의 약 3km에 달하는 지협(地峽)을 관통하는 운하를 말한다. 굴포 운하의 개착공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 즉 12세기 초 고려 인종 때(1134년)부터 시작하여 조선중기까지 약 400여 년간을 통해 우리나라 운하사상 가장 오래된 것이다.
2. 굴포 운하의 필요성 : 지리적 특성과 세곡미(稅穀米)의 안전운송으로 대별됨
1) 지리적 특성
태안반도는 수많은 만입과 반도, 대소의 섬으로 형성되어 있고 해안선은 817km에 이르는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다. 817km의 항로도 길지만 여기서 소용되는 시간과 비용도 문제가 되고 화물 운송에도 지장이 많다. 이러한 항로를 피하려면 가로림만과 천수만 사이의 지협인 굴포 운하를 개착하는 외에 여하한 방법도 없었다. 운하의 거리는 3km로 운하 완성은 817km의 우회(迂廻)를 필요 없게 하고 시간 거리의 단축도 가져오기 할 수 있었다.
2) 세곡미의 안전운송 :
삼남지방의 세곡미를 서울로 조운(漕運)함에 있어 선단(船團)이 태안반도의 안흥량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데 이곳은 곳곳에 암각과 억센 풍랑, 빠른 조류 그리고 심한 간만의 차이로 말미암아 서해에서 가장 험난한 항해지역으로 손꼽혀 조난사고가 빈번하였다. 이 같은 해난사고는 인명과 세미의 손실은 물론이고 조역(漕役)의 기피현상, 새로운 조운선 제작에 따른 국민부담의 증가, 손실세미의 환징 등 갖가지 폐혜를 가져왔다. 이 같은 안흥량 수로에서의 조운선 패몰사고가 빈번해 지자 이 험로를 피하려고 가로림만과 천수만이 북쪽과 남쪽에서 허리를 조이듯 접근해 있는 굴포 운하 개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3. 굴포 운하의 개착과 그 영향
1) 조세의 운송과 일반 공, 사물의 유출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미곡을 현물로서 징수한 세를 경창(京倉-서울)에 운송하는 것을 조운(漕運) 또는 조전(漕轉)이라고도 한다.
2) 조운제도는 이미 고려 초부터 제도화 되었는데 경기, 충청, 황해, 전라, 경상 등의 연해읍에서는 조운에 의하여 이를 경창에 수송하였으며 조운이 없는 여러 읍에서는 지방의 관선인 지토선 혹은 사선을 임차하여 강이나 바다를 이용, 상납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에서의 중요한 재원은 세곡미이며, 그 수송은 주로 수운(水運)이었다. 삼남지방의 세곡미를 경도로 조운함에 있어 선단이 태안반도의 안흥량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굴포 운하의 개착역사는 수천 명에 달하는 부근 고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굴포를 개착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 후 200년이 지난 고려말기에는 서해안에 왜구가 준동하여 조운이 마비되어 1390년에 공사가 재개되었으나 개착지의 지질이 화강암층으로 이루어져 당시의 기계로서는 수저에 있는 암석을 뚫지 못한 사회적 사정과 높은 간만의 차를 극복하지 못한 자연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고려조에서의 1,2차 운하 공사가 성공하지 못하였다.
4. 조선시대의 운하개착과 그 영향
조선 초부터 태조 및 세조때 공사를 재개하려 하였으나 지질구조상 불가하여 어찌하지 못하다 선조 때부터는 그 차선책으로 설창육운안(設倉陸運案)이 신중하게 논의되었다. 그 내용은 남, 북단에 창고를 건립하여 삼남지방의 세곡미를 일단 남창에 수납시키었다가 육로로 우, 마차를 이용하여 북창에 납입한 다음 다시 조운으로 경창에 수송하는 방안이었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중지되었다가 임란 후 국가의 재원이 세곡미라는 사회적 사정으로 말미암아 선조 때 논의된 설창육운안이 받아들여 현종(1668년)때에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조운방법은 조세수송의 이중고와 조운 업무를 감독하는 관리들의 사복(私腹), 조운의 경창으로의 시일 연기, 남북창간의 우마의 무한한 이용 등 조운행정에서 야기된 문제점이 많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폐창하고 말았다.
5. 관방시설(關防施設)의 발달과 기능
서해안에서 툭 튀어나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태안반도는 해안선이 길고 또한 굴곡이 심하여 예부터 국방상의 요새지였으므로 해안선의 각 요소에 진영(鎭營)을 설치하여 그 방위에 심혈을 기울여 온 지역이다. 특히 고려 초부터 제도화된 조세제도(漕稅制度)와 관련하여 태안반도는 삼남지방(三南地方)의 세곡미를 조운함에 있어 세곡미의 안전수송을 위해 관방시설이 발달하였다.
조운로(漕運路)를 보호하는 목적으로 건설된 각종 관방시설로는 진영(鎭營), 봉수(烽燧), 城, 寺刹 등이 있다.
6. 안면곶의 착통과 취락(聚落)의 형성
안면도는 원래 태안 백화산의 지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려 산지를 이룬 작은 반도였다. 반도였던 안면곶의 중간 지점을 착통한 동기는 굴포 운하 개착의 실패와 조창(漕倉)의 설치에 따른 폐단에 따라 그 대안으로 다시 적합한 곳을 물색하던 중 조선 인조(1623-1649년)때 충청감사 김규류가 지금의 위치를 인위적으로 끊어 천수만의 조운이 서해를 통하게 해서 안면곶을 회항하는 200여리의 조운로를 단축하여 세곡미 조운을 편하게 하였다. 굴포 명칭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안면곶을 인위적으로 절단해 놓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조선 시대를 통한 굴포 운하 개착과 안면곶의 착통공사를 위하여 그 당시 수많은 부역자들이 동원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지역 취락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또한 부역을 피하기 위하여 이주하는 현상도 있었다고 본다.
당시 사정으로 보아 인력위주의 작업으로 몹시 고된 부역이었으므로 강제로 동원된 부역자들은 대부분이 상민층의 빈곤한 농민들과 농노들이었으므로 도망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기피자들은 타 지역으로 멀리 도피하거나 눈에 띄지 않게 산간지로 들어가 은거(隱居)하였다고 본다.
또한 은거생활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이므로 타인과의 접촉이 없는 장소를 택하여 고립된 생활권이 형성되었기에 이 지역의 산촌(散村)은 대체로 조선 초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한국의 전형적인 산촌지대를 이루고 있는 태안반도는 산촌이 발달하기에 유리한 자연적인 기초위에 굴포 운하 공사 등에 동원된 부역을 회피하기 위한 역사적 배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된 것이다.
7. 요약 및 결론
우리나라 운하 사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명되는 굴포 운하는 천수만으로 유입하는 흥인천과 가로림만과의 약 3km에 달하는 지역을 착통하는 운하를 말한다.
굴포 운하를 개착하게 된 요인은 삼남지방의 세곡미를 서울로 조운함에 있어 조운선단이 태안반도의 안흥량 관장항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안흥량은 서해안에 돌출한 장봉으로 해중에 암초가 있고, 또한 급격한 조류로 인해 빈번히 조운선이 전복(顚覆)되고 파선으로 인하여 국가적인 재정손실이 컸다. 그리하여 세곡미의 안전수송과 조운에 따른 지리적, 시간적 거리를 단축시키려고 지금의 굴포 운하 개착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려 인종 때(1123-1146)부터 굴포를 개착하여 조선중기 임진왜란 직전까지 비록 단속적이기는 하였지만 실로 400여 년간 수 천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운하공사를 계속하였으나 개착지의 지질이 화강암층이라 당시의 기술로는 암석을 뚫지 못한 사회적 사정과 높은 간조의 차를 극복하지 못한 자연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성공치 목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재원이 세곡미라는 당시의 사회적 사정으로 말미암아 조선 현종 때에는 굴포개착지 주변에 많은 조창(漕倉)들을 설치하여 조운의 편의를 도모하였으나 조운행정에서 야기된 문제들로 인해 폐창하고 말았다. 비록 설창육운안(設倉陸運案)의 실행은 실패로 끝났지만 조세창고지와의 관련으로 인해 천수만과 가로림만의 해로를 따라 많은 촌락이 발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고려 초부터 제도화된 조운제도와 관련하여 안흥량과 굴포 운하지에는 조운로를 보호하는 목적으로 건설된 각종 관방 시설도 발달하였다. 이처럼 굴포 운하와 설창제의 잇따른 실패에 따라 그 최종 대안으로 조선 인조 때 안면곶을 착통하여 조금이나마 조운로를 단축하여 세곡미 조운을 편하게 하였으나 고려, 조선을 통한 굴포 운하와 안면곶 착통공사로 인해 한국의 전형적인 산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상과 같은 역사 지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간만의 차가 크고 해심이 얕은 태안반도는 서해안 개발 시대를 맞아 간척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조운로 였던 천수만에도 현대건설의 민간개발로 간척사업이 이루어져 지금은 이 운하의 존재조차 의심할 정도이다.
위 내용은 수원 수성고등학교 지리 교사가 작성한 자료인데 내용의 진위여부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서산문화원장 및 국사편찬위원인 신상찬 이사의 의견도 동일하므로 자료로써 가치가 있어 옮겨 적었다.
글에서 굴포 운하의 중요성과 촌락의 형성 그리고 지리적인 굴포의 입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이곳 지형의 역사적 사실로 주민의 이동과 형성 그리고 생활에 터전에 대한 기원을 알 수 있게 한다.
<굴포 운하>
<인평리 다목적 마을 회관>
<도루째와 소한말>
<서산 육종 마늘의 인평과 원북을 지나 오석산을 넘다>
서산은 요즘 사과재배가 한창이다. 지구 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한 때문인지 대구와 경산, 영천은 사과 재배단지가 사라졌다. 그런데 충주와 무주 그리고 장수, 서산 등이 새로운 사과 재배지로 각광받는다.
특히 바닷바람을 맞는 서산 사과는 무게도 많이 나가고 사각거리는 속살로 인기 만점이다. 훈훈한 인심이 절로 나는 서산 댁이 건네는 사과 보따리는 이번 종주길의 큰 양념이었다.
굴포를 지난 마을 길을 접어드니 잘 지은 인평마을 다목적회관을 지난다. 밭에는 인삼과 배추 그리고 나무 묘목들이 많지만 다수는 육종마늘밭이다.
마늘의 어원은 몽골어 만끼르(manggir)에서 gg가 탈락된 마닐(manir) → 마ゅ → 마늘의 과정을 겪은 것으로 추론된다.
《명물기략》에서는 “맛이 매우 날하다 하여 맹랄(猛辣) → 마랄 → 마늘이 되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본초강목》에서는 “산에서 나는 마늘을 산산(山蒜), 들에서 나는 것을 야산, 재배한 것을 산(蒜)”이라 하였다.
후에 서역에서 톨이 굵은 대산(大蒜)이 들어오게 되어 전부터 있었던 산을 소산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대산을 마늘, 소산을 족지, 야산을 달랑괴”로 구분하였다.
마늘은 고대 이집트ㆍ그리스 시대부터 재배되어 인도ㆍ중국ㆍ한국ㆍ아프리카의 각지에 전파되었는데 중국에는 BC 2세기경에 인도로부터 도입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의 도입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단군신화에도 나올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재배역사가 매우 오래된 듯하다.
현재 마늘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유럽, 미국 캘리포니아, 아시아의 한국ㆍ중국ㆍ일본ㆍ인도를 비롯하여 서부아시아 지역 그리고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서산지역에서 재배되는 우리 고유의 재래종인 서산 마늘은 삼국시대부터 재배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상품 가치가 높아 농가의 고소득 작물로 인기가 높다.
<도루째를 넘는 정맥꾼들>
<마늘밭>
<도내리>
<소한말 소나무 숲을 지나는 산꾼>
<송림>
<파래인지 김인지 매생이인지 바람에 말리고 있는 모습>
<매생이처럼 생겼네>
<보리밭을 지나고>
<오석산이 보이는데 갈길은 머네>
붉은재를 오르니 까마득히 오석산이 앞을 가로 막는다. 오늘 정맥의 마지막 힘든 산길인데 공사장 굉음이 들려오는 길목의 산길은 소나무 발매로 어지럽게 놓인 나뭇가지가 지천이다.
그래도 곧게 자라도록 애쓰는 산림사업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익 없는 수종의 삼림사업은 미래가 보이지 않아 우울하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니 신나는 내리막길이다. 송림을 지나 130봉을 마지막으로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원산후와 속말을 잇는 고개인데 강실고개라고도 부른다.
<붉은재에서 오석산에 접어드는 산꾼>
<해발 169미터의 오석산>
<원산후와 속말을 이어주는 시멘트 도로>
저만치 같이한 일행들이 뒤풀이를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훈훈한 캠프의 정을 느끼는 마지막 노정이 깊은 시골의 정취 마냥 아름답다.
산행 코스를 놓쳐 먼 길을 돌아온 일행들이 숨 가쁘게 나타나 무용담을 뽐낸다. 하얀 김이 찜통에서 맛깔스런 칼국수와 바지락이 엉켜 진국으로 변한다. 봄동 배추 겉절이를 감싸 젓가락으로 들어 올린 한 움큼은 정말 맛있다. 함께 나누는 뒤풀이의 정착은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라면 너무 잘한 것 같다.
큰 양푼의 칼국수가 모두 비워 지고 정성들인 모두의 수고로 배를 두드리며 대전으로 향한다. 숲속을 부드럽게 걷고, 고장의 역사와 서민의 애환을 느끼며 걷는 금북정맥의 파노라마는 더없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귀연과 함께 한다.
함께한 모두에게 인간적인 배려와 정을 느낌으로 감사하다.
<아늑한 곳 강실고개에 베이스 캠프가 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