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벨리우스 교향시 '핀란디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1964년 녹음)
(1984년 녹음)
(1984년 녹음분)
Heribert von Karajan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1908년 출생했다. 아버지는 의사이자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20세기 음악사를 대표하는, 역사상 가장 명성있는 지휘자들 가운데 한 명이며, 세계 최고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서 35년간 종신 지휘자로 군림한, 클래식 음악의 전설이다. 그의 압도적인 위상과 유명세를 잘 요약하는 별명이 바로 '20세기 클래식 황제'이다.
그의 음반 판매량은 생전에만 1억 1,000만장 정도로 추정되며, 사후에 판매된 양을 포함하면 2억장이라고 하고 클래식 음악 지휘자 중 가장 많을 것이다. 카라얀은 1926년 빈 공대 에 진학하였으나 중간에 그만 두고 빈 음대에 들어가게 된다. 건초염 등으로 인해 피아니스트로 성공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지휘자의 길을 택한다.
독일 나치 시절에 나치당에 가입하여 프랑스 정복, 오스트리아 합병 등 여러 행진곡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나치 이력 때문에 여러 어려움을 격게된다. 종전 후 독일 내에 머물렀던 다른 거물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약 2년간 연주활동이 제한되었다. 활동 금지 기간 동안 푸르트벵글러 등 다른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카라얀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 카라얀에게 구세주로 나타난 이가 바로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카라얀의 재능에 주목해 왔던 레그는 미래에 녹음할 연주들에 대해 미리 선지불하는 형식으로 카라얀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다. 1946년 1월부터 카라얀과 레그는 이미 빈 필과 음반 녹음을 시작했다. 비록 카라얀이 연주활동을 금지당한 상황이었지만 레그는 녹음은 공식적인 음악회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제재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연합국의 제재를 피해갈 수 있었다. 카라얀은 1946년 3월 나치와의 협력 관련하여 무혐의로 풀려나고 곧바로 지휘를 재개했다.
1954년 푸르트뱅글러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베를린 필은 미국 투어를 이끌 지휘자로 카라얀을 선택했다. 카라얀은 이를 계기로 실권을 얻고 종신 음악감독직을 요구해 얻어낸다. 1955년 드디어 베를린 필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통해 ‘꿈의 오케스트라’를 실현하려 했다. 베를린 필 재직 중에 단원들과 새로운 단원을 채용하는 인물에 대해 찬반으로 단원들과 많은 갈등을 겪었다. 단원들은 연주 거부와 지휘자는 지휘 거부로 맞서기도 했다.
1955년의 미국 순회공연에서 카라얀은 그의 과거 나치 당원 자격으로 인해 디트로이드에서의 공연이 금지되었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인 유진 오르만디 는 그와의 악수를 거부하였으며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을 위해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뉴욕에 도착했을 때에는 시위대와 마주치기도 했다.
카라얀 특유의 ‘눈 감은 지휘’는 지휘자와 악단원들 사이에 교감이 완전해야만 가능하다. 그것은 음악에 대한 관이 뚜렷하고 치밀하고 완벽한 연습이 동반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베를린 필 단원들에 의하면 카라얀은 리허설의 재단이 완벽한 지휘자였다. 정해진 시간을 넘기는 일 없이 신사적인 분위기에서 리허설은 진행되지만 완벽주의적 기질 때문에 리허설의 긴장감이 대단했다고 한다.
베를린 필과의 관계에 난기류가 흐르면서 카라얀은 만년의 진정한 음악적 반려자로 빈 필을 택했다. 그의 마지막 연주여행 역시 1989년 2월 빈 필의 미국 투어였고, 생애 마지막 콘서트 또한 같은 해 4월24일 빈 필의 정기 연주회였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말년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몸이 점점 병약해지는 와중에 오케스트라 단원들과도 소원해졌고, 음악이나 경영에 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오케스트라 측과의 충돌도 잦았다. 그는 과거에 이미 종신 지휘자 자리를 보장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직을 사임했고, 1989년7월16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자택에서 81세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한편 그는 살아생전 3번 결혼했다. 첫 번째는 1938년 그는 오페라 가수와 결혼했는데 4년후 이혼했다. 1942년 카라얀은 두 번째 결혼 상대는 ‘아니타’로 불리던 재봉틀용 실을 생산하는 사장의 딸이었다. 1958년 아니타와 이혼하고 세 번째 부인인 프랑스 모델 엘리엣 모레와 결혼했다. 카라얀은 엘리엣과의 사이에서 두 딸 이사벨과 아라벨을 두었다.
카랴얀에 대해 나치 가입, 극단적 상업주의 등 극과 극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있지만 부인할 수 없은 사실은 20세기 이후 클래식 음악 대중화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첫댓글 고2때 시민회관(세종문화회관)에서 흰 한복을 입고 합창했던 기억이~~
아름답고 웅장하고 슬픈 교향시 잘 듣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길...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