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세상의 종말
18. 그분의 제자들이 물어 여쭈었다 " 세상 마지막이 어떻게 올지 말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마지막 날을 알고자 함은 너희가 시작 (beginning)을 앎이뇨? 너희도 알다시피, 끝은 시작이 있는 곳에 있느니라.
시작에 서있는 자에게 축하하나니 그가 마지막을 알 것이요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이 구절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라고 시작하지 않습니다.’그 분의 제자들이 물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따라서 기록자와 예수님,그리고 제자들,만약 기록자가 들은 사람이 아니라면 청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아마 이 도마복음은 기원후 1세기에서 2세게 사이에 쓰여졌으니 이 사건을 본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제자들이 직접 듣고 말했다면 ‘마태가 말했다.’라는 형식을 따랐을 것입니다.이 질문은 불특정 다수의 공동 질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을 오해하였고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게 나라를 빼앗긴 사실에 분노하고 슬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정치적 지도자가 되어 간디처럼 김구처럼 독립운동에 앞장서길 바랬습니다.그 염원은 70년에 유대인 로마 항쟁이 벌어지는 원인이 됩니다.하지만 유대인의 반란은 로마군에 진압되고 무수한 유대인들이 학살됩니다.그들의 성전은 파괴되고 유대인의 자존심은 바닥에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반성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엉뚱한 돌파구를 찾습니다.
다미선교회 사건은 1992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종교 사기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주도자인 이장림 목사는 1992년 10월 28일에 세계가 종말하고 신자들은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고, 다미선교회에는 수천 명의 신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1992년 10월 28일이 되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신자들은 분노했고, 이장림 목사는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이장림 목사는 징역 2년형을선고받았습니다.다미선교회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한국 사회의 종교 열기와 종교에 대한 무지가 초래한 결과라고 지적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독립 대신에 하늘나라의 도래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멸망하고 메시아가 도래하여 모든 인류는 산자와 죽은 자들이 모두 깨어나 최후의 심판을 받고 예수를 믿은 자는 천국으로 믿지 않은자는 지옥으로 떨어질 순간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도 이제껏 오지 않았고 사기극만 벌어졌습니다.
마지막 날을 알고자 함은 너희가 시작 (beginning)을 앎이뇨? 너희도 알다시피, 끝은 시작이 있는 곳에 있느니라.
어제 아는 여사님과 함께 만나서 시장에서 칼국수를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은 나의 권유로 기수련도 같이 한 도반이십니다. 특히 그분은 현실적인 분이 신데,남편의 무능과 치매로 인한 간병으로 몸도 마음도 고달픈 분이십니다.그분의 주장은 지금의 여당 정책과도 닮아 있습니다.여당은 노인들이 마치 나라 경제를 갊아 먹는 원흉인양 비하하고 지하철 무료정책을 폐기하겠다고 공표했습니다.
그 여사님도 요양병원에 누워서 숨만 쉬고 있는 노인들이 죽어야 한다고 성토하셨습니다. 게다가 무능한 남편과 말년에 치매가 와 ‘아무런 도움도 못되고 가족들 피 빨아먹는 인간은 죽어야 한다’며 흥분하셨습니다.저는 오랜 기간 그래도 복지국가란 소외된 이웃이 가장 기본적인 인간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국가 보존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설득했지만 그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고, ‘하나님은 견딜 수 있는 고난만 준다’라는 말도 하기 좋은 소리라며 놀부나 스크루지 같은 사고의 소유자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로, 누가복음 10장 38-4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을 다룹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두 자매의 집을 방문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방문에 여념이 없이 분주하게 집안 일을 하며 손님 접대에 신경을 씁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마르다는 자신이 모든 집안일을 혼자 하고 있는데 마리아가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만 듣고 있다는 사실에 불평을 하며 예수님께 마리아를 꾸짖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것을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지만 필요한 것은 몇 가지뿐이다. 사실 하나면 족하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으며, 그것은 그녀에게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르다의 염려와 분주함이 아닌, 마리아처럼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영적인 것들을 우선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는 종종 영적인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중요한 교훈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해석은 여사님에게는 웃기는 소리일 뿐입니다. 저 같이 못사는 사람은 ‘고난과 역경 하나님의 시험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보다 나은 인간으로서 의 창조를 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그러나 간과한 것은 부자 즉 ‘가진 자들은 무슨 시험에 드느냐?’입니다.
대다수의 보편적인 인식은 ‘가진 자들도 다 걱정이 있다’는 것입니다.자식이 문제가 있던지,더 못 가져서 문제가 있던지 하여튼 문제가 있으니 너무 부러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부자들은 없는 사람이 하는 소리하며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신 분입니다.
삼성그룹 이재용 회장은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부산의 시장에서 떡뽁이를 먹으며 웃는 장면이 tv를 통해 방영되었습니다. 대기업 총수가 대통령과 웃으면서 시장에서 분식을 먹는 모습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불법상속으로 재판중이었으며,징역 2년6개월을 선고 받았습니다.
대기업 회장들은 감옥을 무서워한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들은 감옥에 간다면 생계를 걱정하겠지만 그들은 감옥이라는 데서 자유를 잃고 폐쇄된 공간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저는 정신병원에 근무하면서 폐쇄병동에 있습니다.출입구는 잠겨 있으며 직원들도 잠깐 식 볼일을 보거나 담배 필 때를 제외하곤 나가지 못합니다.가진 사람은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길 때 가장 힘든 가 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진 사람의 고민을 알 수 있습니다. 황철순 이라는 보디빌더는 100평이 넘는 아파트에 살면서 피트니스 업계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하지만 최근 사업 실패로 고시원에 산다고 합니다.그는 지금의 소외를 밝혔는데’ 내가 성공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비난했다.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가진 사람의 하나님의 시험은 바로 가진 것의 사회 환원입니다. 이재용 회장도 상속세를 아끼고자 불법 증여를 했고, 황철순도 가진 것을 사회에 다 빼앗기니 그의 비난도 수그러들었습니다. 저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일화에서 전혀 다른 시험을 겪는 마르다를 봅니다.그녀는 능력 있는 여성이었고 동생인 마리아를 돌보야 했습니다.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을 좋아하고 그의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좋아하고 잘 듣는다면 마즈다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보호자에게 장애인 가족은 항상 시험과 고난을 가져옵니다. 능력 있는 마르다는 마리아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돌리는 시험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만약 그 여사님이 남편을 직접 돌보며 일을 한다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모든 종교에서 장애인들을 더욱더 하나님의 계획안에 두시고 그들을 돌보는 사명을 선택된 이들에게 내리십니다.다른 길이 없습니다.저 또한 알코올중독자 아버지를 피하려고 했으나 돌아가실 때까지 온전히 다 겪었습니다.
맛사지사가 된 후에도 하루 하루 매일 밀려드는 손님들을 1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밤도 굶어가며 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정신과 환자분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지만 7년째 하고 있습니다.집사람의 빚에 몇 번이나 망했지만 결혼생활은 계속성입니다,삶속에서 하나님의 시험 속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보다 나은 인간이 되거나, 못한 인간이 되거나 이대로 갈팡질팡 허우적대거나 선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삶속에서 우리의 환경을 바꾸기란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태도를 바꾸는 건 오직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할 때, 깜깜한 밤에 오로지 한줄기 빚에 의지해 나갈 때 우리의 삶은 빛나게 됩니다.
마지막 날을 알고자 함은 너희가 시작 (beginning)을 앎이뇨? 너희도 알다시피, 끝은 시작이 있는 곳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계획의 시작은 사랑과 공감에 있습니다. 그것은 외적 혁명이나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속에서 하늘나라를 만드시려는 예수님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시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그리고 끝은 나 자신의 내적변화에 있습니다.베드로는 어부 출신으로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이 체포되자 칼을 뽑아 제사장의 하인의 귀를 베어버린 인물입니다.그러나 예수 사후 베드로는 로마에서 사역하다 체포되어 역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베드로는 죽음의 순간에서 ‘반석’이 된 것입니다.우리는 삶속에서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그리고 행복한 순간도 겪습니다.하지만 인간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바로 그가 삶을 마감할 때 입니다.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삶이 어땠는지 알게 됩니다.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지금 이순간 가지고 있습니다.
시작에 서있는 자에게 축하하나니 그가 마지막을 알 것이요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그 시작은 ‘사랑’이며 사랑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알 때 우리는 삶은 변화하고 더 나은 사회와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그 사람에게는 죽음이 파괴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것입니다.
요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님은 마지막 날을 이해하려면 시작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도마복음에 나오는 대화로,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에게 기대했던 정치적 해방과는 달리 내적 변화와 하늘나라의 참여를 강조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미선교회 사건은 종말에 대한 잘못된 예측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또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영적인 것들을 우선시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삶의 시작은 하나님의 사랑에 있으며, 끝은 내적 변화에 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다양한 시험과 고난을 겪지만,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빛을 찾을 때 우리의 삶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가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