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생이 86년생에게
황선유
교보문고가 말 그대로 집에서 몇 발짝 거리에 있는 것은 내가 가진 몇몇 엄청스런 복 중의 하나이다. 밖으로 나가고는 싶으나 마땅히 갈 데를 정하지 못한 그런 날, 달리 할 일 없이 나작거리다가 소파에 앉은 채 깜빡 낮잠이나 들 그런 날, 찰기 없는 붓방아질에 지레 지쳐 얼른 컴퓨터 전원을 꺼버리는 그런 날에, 무슨 목적이 없으니 부산할 것도 달리 차릴 것도 없이 그냥 그곳에 간다. 한나절을 족히 보낸다. 간서치도 아닌 내가 그 시간 동안 어찌 책만 보고 있겠는가. 문고가 文庫만이 아닌 것을 그곳에서 알았던 것이다. 시계를 샀고 문구를 샀고 에코백도 샀고 커피도 마셨다. 아무렴 온갖 분야의 책들을 훑어보고 뒤적거려 보는 재미 같을까마는. 이 책들을 내 젊은 시절에 읽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시방 내 글쓰기의 방향이 상당히 달라졌을 텐데. 아쉽다.
책은, 아무래도 제목이 눈에 확 띄어야 하나보다. <저도 남의 집 귀한 딸인데요> 한 눈에도 장정이 허접하고 저자도 익명인 책의 가격이 만 삼천 팔백 원이다. 어쩔 수 없이 비슷한 가격의 수필집들과 비교하고는 속이 좀 상했다. 글 쓰는 외로움과 고통을 혼자 감내하며 몇 년씩이나 쓴 글들을 엮어 책을 내는 수필가들을 떠올렸다. 버젓하게 서점에 내놓지도 못하고 인터넷으로만 판매되는 수필집들이 짠했다. 단지 내 며느리가 86년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책값을 지불하면서 내게 공짜로 책을 보내준 작가들에게 죄송했다.
책의 저자는 86년생 범띠 며느리이다. ‘아가’라 부르는 시어머니의 호칭이 언제부터인지 ‘악아惡兒’로 들리기 시작하여 아예 필명을 ‘악아’로 쓴다. 시집의 제삿날에는 ‘도대체 나는 조상에게 뭘 그렇게 밉보였기에 남의 집 제사에 소환 당해 삼색 나물을 벗 삼아 밤을 새워야 하나. 굿이라도 한판 벌여 따지고’ 싶다. 명절에는, 이틀 내내 설거지 독박을 쓰자 일당을 받지 못하면 노동청에 신고를 할 것만 같아 고무장갑을 벗어던지며 말한다. ‘엄마가 기다리셔서 친정에 가야 해요.’ 그런 그녀가 책의 말미에 적은 글이 또 야무지다. ‘며느리의 감내가 잠시나마의 평화를 만들 수는 있으나 오래가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곪아 터진다. 인내가 미덕인 시대는 호모 사피엔스 시대에 끝났다.’
그보다 전에는 베스트셀러인 <82년생 김지영> 소설을 읽고 영화도 관람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김지영에 투사되었고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것은 56년생인 나의 이야기였다. 나는 82년생을 위해 아무것도 바꿔주지 않은 채 무지로만 산 것 같아 미안했다. 하기사 여느 56년생인들, 잔 다르크도 체 게바라도 김영란도 아닌 담에야.
여학교 때의 그 지리 선생님은 S대학 출신이라며 하도 잘난 척을 하여 별명이 ‘척순’이었다. ‘척 선생님’하고 부르면 ‘어’하고 대답했다. 아직도 나는, 맬서스 <인구론>에 대한 척 선생님의 명 강의를 기억하고 있다. 피요르드 해안을 얼마나 생생하게 설명했던지 북유럽에 갔을 때는 마치 어제 지리 수업을 듣고 온 듯도 했다. 척 선생님은 우리의 미래에 대해 척하며 점을 쳤다. ‘너희들은 베이비 붐 세대이다. 너희들의 신랑감은 전쟁 중에 다 죽었다. 너희 또래 남자들은 너희보다 서너 살 아래와 결혼한다. 그러니 못 생긴 너희들은 시집가는 거 일찌감치 포기하고 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대, 사범대, 의대, 약대, 간호대만이 살 길이다.’ 얼굴까지 예쁜 부잣집 친구들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오르내리다 음악대학도 가고 미술대학도 갔지만 나처럼 못 생긴 친구들은 죄다 척 선생님의 주술에 걸렸었는지 모르겠다. 만나는 여학교 친구들이 교사, 약사, 간호사이니. 다행인지 다 시집은 갔다.
용케 서른을 안 넘기고 전쟁 중에도 안 죽고 살아남은 남자와 결혼했다. 두어 살 되었을까마는 어린 나이에도 전쟁을 치른 남자는 달랐다. 사는 게 전투였다. 전쟁은 본 적도 없이 햇살 따뜻한 남쪽에서 나고 자란 나는 애초에 전의 같은 걸 알지 못했다. 시집살이는 백전이면 백패였다. 제사는 안 지냈지만 명절날에는 내 심장의 어름에다 칼금 긋는 말을 듣곤 했다. ‘장모 없는 처갓집에 가면 앉을 데 설 데도 없니라.’
그즈음 56년생인 내가 잠을 아껴가며 일을 했던 으뜸의 이유는 아들들을 잘 키우는 것이었고, 대단한 철학도 세계관도 없는 내가 잘 키운다는 것은 곧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었다. 아들은 수능 전에 문과로 전향했는데 문제는 사회탐구였다. 나는 마땅히 고액 과외를 준비했고 아들은 기어이 과외비를 따지며 마다했다. ‘니 돈이가, 엄마 돈이다.’ 언어, 수리, 외국어가 1등급이어도 사탐 4등급을 SKY라는 곳에서 안 받았다. 그 모든 게 운명인 게지. 깍쟁이 아들은 같은 대학에서 짝을 만난다.
86년생 며느리는 나의 명품이다. 내가 가진 몇몇 엄청스런 복 중의 또 하나이다. 밥벌이도 정해지지 않았던 내 아들에게 시집온 지 삼 년, 여전히 고맙다.
며칠 째 세탁기 세제가 떨어져 빨래를 못하고 있다. 마트에 가면 거짓말처럼 세제만 딱 빼고 산다. 오후 1시에 만나 한가한 점심을 먹자는 약속을 오전 11시로 알고 나갔다. 내 손에서 잘 놀던 다리미에 어쭙잖게 데고, 아끼던 캐시미어 스웨터를 어디다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당연한 낱말이 당최 떠오르지 않아서 그 다음 대화를 잇지 못했다. 다 챙겨서 나설 참에 깜빡 다른 일에 빠져 강의를 잊어버리고는 전화를 받고서야 놀라 콜택시를 불렀던 적도 있다. 이제는 56년생이 그럴 나이다.
방금 전까지의 무탈함을 톺아보며 감사하고, 몇 발짝 거리의 교보문고에 들락거리며, 절창의 꿈이야 벌써 접었지만 그런저런 수필 한 편을 쓰면서, 그리 아프지도 고프지도 않을 일상을 누리고, 먹은 나잇살만큼 수굿하게 제값을 해내기 바라는 끝물 나이, 나는 56년생이다.
86년생 며느리에게, 행여 앙금 생길라 내 앞에서 참지 말거라. 이 좋은 세상에 남의 집 귀한 딸로 자라 뭘 참는 단 말이냐. 소소한 모든 것은 내가 참으마. 이미 나는 참는 게 능구能久 같으니.
-<부산수필문예>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