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18일 토요일 맑음
숙박비는 방당 20쿡(24000원)이다. 아침식사는 두당 3쿡에 예약을 했다. 예약한 시간이 아침 8시 30분에 식사할 수 있었다. 과일, 우유, 커피, 계란 후라이, 빵, 꿀로 아침을 해결했다. 깔끔하고 흐뭇한 식사였다. 일단 여선생님들과 현지 화폐 모네다를 사용하기 위해 환전소에서 쿡을 바꾸기로 했다. 숙소에서 가까운 환전소를 찾아갔다. 10여명이 줄을 서 있다. 우리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1명씩 들어가 업무를 보고 나온다. 경찰이 안에 있어 손짓을 하면 들어간다. 10쿡을 현지인 화폐인 모네다로 바꾸었다. 여선생들은 바라데로로 어제 탄 택시를 예약해서 오전에 간다. 이제 또 우리 둘만 남았다. 자연스럽게 만났다가 또 헤어지는 것이 여행 중 겪는 일이다.
이제 아내와 둘이서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지도에서 우리 숙소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여기는 아바나다. ‘세상을 꿈꾸게 하는 가난한 자유’ 라는 타이틀이 아바나를 나타내는 글이다. 좀 애매하다. 신속하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의 서비스를 기대하고 있다면 무한한 절망감을, 순진한 사회주의적인 모습을 상상하고 왔다면 깊은 실망감을 느끼게 되는 도시란다. 세계인을 들끓게 했던 혁명이 끝 난지도 40여년, 이제 이들도 변하고 있다. 나를 위해 연주해 주리라 기대했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연주자들은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가셨다. (6명으로 이루어진 그룹 가수)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이라는 영화는 쿠바 노익장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실제로 쿠바에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이라는 뮤지션이 있다. 하루 종일 살사만 흘러나올 줄 알았던 라디오에서는 미국의 팝송이, 사람들 입가에는 그 유명하다는 시가대신 담배가 물려있다. 그래도 혁명은 잘 분배된 가난만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남겨주었다. 약육강식의 성공전략 대신 느리게 함께 걸어가기를 꿈꾸는 이들, 가난해도 웃고,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한 사람들이 사는 이곳. 낡아빠진 가난의 풍경마저 잊지 못할 그림이 된다.
우리가 서 있는 구시가지에는 과거 식민지 시대의 유물들과 그 당시 세워진 건물들이 수리되고 보수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100년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느낌이다. 아바나는 쿠바 섬 북쪽으로 길게 뻗은 해안선의 서쪽 끝에 있으며 인접한 항구는 카리브해에서 빼어난 항구들 가운데 하나이다. 쿠바의 경제,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다. 기후는 열대서 이지만 온화한 편이다. 무역풍과 따듯한 앞바다의 조류, 5~10개월에 계속되는 우기 등으로 한결 완화된 열대성 기후가 나타난다.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아바나 성벽은 파괴된 채로 여전히 남아있다. 모로 성을 비롯한 오래된 군사 건축물들도 그대로 남아있다. 정부와 쿠바 공산당 중앙 위원회가 아바나 시에 있으며 아바나 대학교는 훌륭한 교육 기관으로 이름이 있다. 시내의 주요 교통수단은 넓은 시가지를 운행하는 버스다. 버스노선과 철도노선이 지방 중심지 및 다른 도시들까지 이어진다고 하지만 이동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고 관광객만 이동한다.
시내는 버스가 대중교통 수단으로 이용되지만 특이한 것은 우리 눈을 크게 뜨게 하는 올드 카이다. 쿠바는 거대한 올드 카 박물관이다. 공항에서 아바나 시내에 와서 처음 길을 나설 때, 쿠바에 온 것을 실감하게 하는 생소한 볼거리가 올드 카다. 기업광고는 없고 온통 정치적인 문구로 가득한 간판 또한 재미있다. 그야말로 박물관에나 어울릴 법한 울퉁불퉁한 올드 카들이 매연을 날리며 버젓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 낡았지만 살아있는 거리를 배경으로 반짝거리는 올드카가 지나가는 모습이 마치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오직 쿠바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주로 1950년대를 풍미했던 이 미국산 자동차들이 쿠바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 쿠바를 지배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쿠바의 자원과 산업을 차지했고, 아바나는 미국 부호들의 휴양을 즐기는 환락의 도시가 되었다. 이 자동차들은 그때 미국인들이 남긴 유흥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 혁명 이후 미국의 경제 봉쇄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그때의 자동차를 계속 고쳐가면서 지금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겉에는 도색도 잘 되어 있어 멋져 보이지만 녹슨 차체 안의 시트는 스프링이 빠져 나오고, 엄청난 매연의 주범이기도 하다. 조금만 돌아다녀 보면 고장이 나서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쿠바의 큰 매력이었던 이 차들도 이제 수명을 다하고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단다. 몇 십 년이 지나도 이 자동차들이 계속 쿠바의 명물로 남아주면 좋을 것 같다.
그 외에도 교통수단이 많다. 세발자전거, 마차 그리고 노랗고 둥근 외관이 귀여운 꼬꼬 택시도 있다. 거리에나 골목에도 다양한 교통수단으로 복잡하다. 꼬꼬택시는 쿠바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이동수단이다. 문도 없이 좌우가 뚫려있어 어딘가 허접해 보이는 오토바이 개조 택시지만, 미터기가 없어 흥정해야하기 때문에 일반 택시에 비해 결코 저렴하지 않다. 동남아시아의 툭툭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까삐똘리오 앞에 섰다. 미국 워싱턴에서 보았던 국회의사당 건물이 쿠바 아바나 한 복판에 있어서 잠시 깜짝 놀랐다. 원본 보다 훨씬 더 크고 고풍스러운 이 건물은 쿠바의 독재자였던 Gerardo Marchado 가 5000명의 노동자들을 동원해 3년 넘게 지은 것이란다. 그의 얼굴이 새겨진 정문의 동상은 1933년 바티스타 정권 수립 때 부서졌고, 1959년 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했다. 건물 안에 자리 잡은 17m 높이의 동상과 인테리어도 멋지다. 돔 아래 중앙 바닥에는 24캐럿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데 이것이 쿠바 안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건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나와 흑백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할아버지도 이곳의 명물이란다. 지금은 쿠바 과학원과 국립 과학 기술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에는 마차부터 시작해서 코코택시, 무엇보다도 반짝반짝 빛나게 윤을 낸 올드카들이 전시용 겸, 손님을 기다리며 폼 잡고 있다. 핑크빛 오픈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옆에 있는 건물이 예술적인데 아바나 대극장이다. 까삐똘리오 북쪽에 나란히 있는 건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1838년 베르디의 오페라 공연을 시작으로 문을 열었다. 건물의 정면에 있는 4개의 조각상은 각각 자애, 교육, 음악, 연극의 예술의 4가지 측면을 묘사한 것이다. 쿠바의 유명한 발레리나인 알리시아 알론소가 세운 쿠바 국립 발레단의 근거지로 연극이나 클래식 콘서트가 자주 열린다. 1838년 지어진 따콘 극장 자리에 세운 건물로 센트로 가예고 궁전이라는 이름도 사용한다. 1915년 건축가 파울 벨라우의 설계로 완성된 에오 바로크 스타일의 건물이다. 알라시아 알론소는 쿠바를 대표하는 발레리나로 20여 년간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에서 활동하다가 쿠바로 돌아와 쿠바 국립 발레단을 만들었다. 그 옆에1856년에 문을 연 아바나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 잉글레떼라가 있다.
길 건너편에는 중앙공원이 있다. 공원 내에 있는 흰색 동상은 쿠바의 독립 영웅 호세 마르띠이다. 주변에는 28 그루의 팜 트리(야자수)가 심어져 있는데 이는 호세 마르띠의 생일이 1월 28일이기 때문에 28그루의 나무를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공원에서 시티 투어 버스가 출발한다. 1905년에 세워진 마르띠의 동상은 쿠바 전역에 세워진 호세 마르띠의 동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란다. 중앙공원에서 오비스뽀로 들어가는 중간에 있는 국립 미술관에 도착했다. 이 미술관은 세계 각국의 작품이 있는 미술관이다. 루벤스, 무릴로, 고야 등을 만날 수 있다.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올라가니 바까르디 빌딩이 나온다. 사탕수수와 럼주의 제국을 이루었던 에밀리오 바까르디가 1929년 세운 건물로 아바나에서 가장 멋진 건물 중 하나다. 그가 자랑하던 부를 집대성이라도 한 듯 건물 장식 하나하나에 예술적인 취향이 도드라지는데, 적갈색 테라코타와 요정, 바까르디 회사의 상징인 검은 박쥐가 어우러진 장식들이 볼만하다. 종탑이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보는 아바나의 모습은 최고다. 다만 건물 입구의 경비원에 따라 비공식적인 입장료가 적용된다고 한다. 골목을 따라 가다가 국립미술관을, 또 다른 미술관을 만났다. 이 건물은 현대식 건물이다. 여기는 국제미술전시관이 아니라 쿠바 미술전시관이다. 특히 쿠바가 낳은 세계적인 초현실주의 작가 위프레도 람의 작품들이 압권이란다. 그는 피카소와 친구로 지냈고 파리 초현실주의 예술 모임의 일원이었으며 피카소와 서로의 표현기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미술관은 쿠바의 미술가들을 만날 수 있는데 새로운 화풍과 색체, 그들만이 가지는 독특한 생각과 느낌이 좋다.
쿠바는 혁명과 음악과 댄스의 나라요, 흑인과 백인의 혼혈이 낳은 독특한 문화의 보고인 것이다. 다음 방문한 곳이 혁명박물관이다. 쿠바에 끌려온 아프리카 노예들의 역사부터 1868년 스페인에 대한 독립 투쟁, 그리고 1950년대 바티스타에 대한 혁명 투쟁까지, 쿠바의 혁명 역사를 집대성 해 놓은 곳으로 1900년대까지 대통령궁으로 사용되다가 1959년 쿠바혁명 이후 박물관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카스트로에 관한 자료가 가장 많고 체 게바라도 별도의 전시실을 갖고 있다. 야외 광장의 전시장에는 그란마호의 복제품을 비롯하여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혁명 활동 당시의 차량과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전시물 옆에는 혁명의 불꽃이 계속 타오르고 있다. 그란마호는 쿠바혁명군들이 바티스타 정부에 대항, 쿠바에 잠입하기 위해 준비한 배다. 12명 정원의 작은 배인데 83명의 혁명군이 탑승했고 정부군에 의해 폭격으로 12명이 살아남았다. 그때 살아남은 12명이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하여 2년뒤, 아바나에 입성, 3년도 채 안되어 혁명을 이뤄낸 것이다. 그래서 그란마호는 혁명의 시발점, 혁명의 상징으로 불리 운다. 쿠바 국기가 그려진 낡은 비행기가 정원을 차지하고 있고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붉은 베레모를 쓴 군인이다.
혁명박물관 앞에는 낡은 망루, 성벽의 폐허가 그대로 있다. 하바나 성벽의 유적지다. 17~18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학생 피델 카스트로가 정부군에 대항해 이 성벽에 올라 데모하는 모습이 흑백 사진으로 게시되어 있다. 당시 쿠바를 이끌고 있던 라몬 그라우 산 마르틴 정권의 부패에 대항한 시위였단다. 거리 건물에는 3명의 혁명 동지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카밀로 시엔프에고스의 모습이 만들어져 있다. 멋진 동상을 만났다. 도미니카 출신의 쿠바 혁명가 맥시모 고메즈(1836~1905). 1868년 쿠바 10년 전쟁에 종군하고 1873년에 사령관이 되었다. 제 2차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참전하여 스페인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쿠바가 미국에 점령된 뒤로는 미국 측과 타협하고 반란군의 해산에 응했다. 2004년 쿠바지폐 10페소의 인물이다. 흰색 대리석 기둥위에 세워진 말탄 장군의 형상은 힘이 느껴진다.
드디어 우리는 그 유명한 말레콘에 도착했다. 북쪽 끝까지 걸어가서 큰 대로를 위험하게 건너갔다. 넓게 펼쳐진 바다를 만났다. 파도가 넘실대는 말레꼰 이다. 대서양과 바로 마주하는 도시를 지키기위해 만들어진 이 도로의 정식이름은 Av Antonio Maceo 이지만 방파제라는 뜻의 애칭, 말레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쿠바에 대한 영화나 사진 그리고 여행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아바나의 대표적인 명소이자 아바나의 얼굴과도 같은 곳이다. 태양이 작렬하는 한 낮이든 노을로 붉게 물든 오후든, 달이 떠 있는 한 밤이든 언제라도 말레꼰의 독특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방파제에 기댄 채 밀어를 속삭이는 젊은 연인들과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는 영감님, 위험해 보이지만 수영을 즐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말레꼰을 말레꼰답게 만드는 풍경이다. 특히 바람이 부는 날이면 방파제 위로 넘쳐나는 파도가 도로위의 차를 덮치는 아슬아슬하고도 멋진 장면을 볼 수 있다. 쿠바 아바나에 있는 동안은 여기에 늘 올 것 같이 정다운 곳이다. 특히 해질녘이 좋다.
요새가 방파제와 연결되어 있다. 쿠바 아바나는 1519년부터 주요 해상 물류기지로 발전하게 된다. 도시가 무역의 중심지로서 독립적인 중요성을 획득하게 됨에 따라 스페인에서는 만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지키기 위해 방어시스템으로 세 곳에 성채 건축을 허가한다. 1558년~1600까지 3개가 만들어지고17, 18세기에도 계속해서 주요 성채를 건설한다. 이것이 대부분 현재까지 남아있다. 계속되는 성벽으로 오늘날 구시가지로 불리는 성벽지구와 길과 공원으로 되어있다. 오래된 대포들이 세월을 견디고 있다. 스페인 복장을 한 칼 찬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방파제와 요새가 있는 곳에서 시계방향으로 걸어간다. 멋진 모로 요새와 포르탈레싸 산 카를로스 요새가 보인다. 쿠바에서 가장 큰 요새이자 아메리카 대륙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요새이다. 캐리비안 시대의 중요 거점이었던 아바나에서 침입자들은 막기 위해 세워진 요새는 아바나를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 후에는 군사감옥으로 사용되었다가 체게바라가 피델 카스트로와 아바나를 점령한 그 후에 그의 집무지로 이곳을 이용하기도 했다. 캐리비언의 가장 큰 요새였던 만큼 대포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요새 대부분의 포는 아바나로 접근하는 바다와 아바나 시내를 향하고 있지만 일부는 전시용으로 성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이 대포는 방어용이면서도 예전에는 통금시간을 알리는 신호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저녁 8시가 되면 지금도 스페인 복장을 한 군인들이 대포를 한 방씩 쏘는 행사를 한다. 삼지창을 든 포세이돈 동상도 보이고 멀리 예수상도 보인다.
다시 구시가지 방향으로 길을 건너가니 앉아있는 신사의 동상이 있다. 밀짚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기타를 치고 있고 옆에는 동물 턱뼈를 가지고 리듬을 맞추고 있다. 노새의 턱뼈인데 쿠바 전통 악기란다. 구수한 쿠바음악이 점점 맘에 들어간다. 대성당있는 곳으로 향했다. 골목길에는 자전거에 두 마리의 강아지를 태우고 온 영감님이 있다. 강아지들은 모자에 선그라스에 옷과 나비넥타이로 잔뜩 멋을 내고 있다. 꼬마들이 무척 좋아하여 사람들이 모여있다. 함께 사진을 찍고 돈을 낸다. 대성당에 도착했다. 대성당 광장을 앞에 두고 있다. 아바나에서 가장 역사적인 장소이자 관광지화 된 작은 광장이다. 매혹적인 건축물로 둘러싸인 광장 한 구석에는 점을 쳐주는 화려한 차림의 할머니도 앉아있다. 화려한 전통 복장을 한 여인들 3명이 꽃바구니를 들고 서성댄다. 머리장식도 화려하다. 시가를 들고 양복으로 멋을 낸 할아버지 모델들이 거닐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손짓하는 이곳은 아바나에서 가장 포토제닉한 장소 같다. 단 대부분의 사진에는 모델료를 지급해야한다.
광장 북쪽에 있는 대성당은 1748년 예수회가 짓기 시작하였지만 스페인 왕에 의해 에수회가 쿠바에서 쫓겨나면서 중단되었다가 1777년에야 완공되었다. 바로크 스타일의 성당 전면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흔히 일컬어진다. 언뜻 보면 좌우대칭 같지만 자세히 보면 오른쪽 탑이 조금 더 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당 앞 카페의 밴드 소리가 광장에 가득하다. 기타와 플릇 연주에 춤까지 곁들여져 엄청 자유롭고 부드러운 분위기다. 할아버지 악단의 연주도 반대편에 있다. 광장을 둘러보고 골목길로 들어서니 오비스뽀 거리에 들어와 있다. 대성당 광장에서 산 이그나시오 거리를 따라 남쪽으로 2 블럭 가면 만나게 되는 번화한 거리다. 쁘라도와 아바나 비에하 지역을 잇는 명실상부한 메인 거리다. 오래된 옛 건물과 현대적인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행안내소와 국영 환전소, 전화국과 인터넷카페 등 여행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모여 있으며 모네다로 싸게 사 먹을수 있는 길거리 음식점도 많이 보여 있다. 이 거리에 면해있는 카페에서는 밤낮을 가리자 않고 라이브 연주가 울려퍼져 길 가는 사람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입이 심심해서 츄러스를 사서 먹었다. 아주 고소하고 맛있다. 존슨 약국을 기웃거려본다. 미국인 존슨에 의해 만들어진 오래된 전통 약국이다.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던 약병들이 벽 가득 질서 있게 전시되어 있다. 오래된 흑백영화에서 보았던 엘리베이터도 보존되어 있다. 하얀색 도자기 통은 이전에 약초와 허브를 넣어두었던 약병들인데 지금은 전시용이란다.
카삐똘리오 방향으로 나왔다. 중국인 거리 입구에 세워져 있는 패방이 보인다. 화인가(華人街)라는 현판이 보인다. 1840년대 쿠바 노예해방운동이 최고조에 이르자 노동인구가 격감 하면서 쿠바경제는 타격을 입었다. 따라서 식민정부와 스페인은 유럽농민들의 이민을 장려했다. 하지만 이시기에 이주한 유럽인들은 경제가 비교적 발달한 아르헨티나, 칠레, 우르과이 등으로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제3의 인종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카탄 반도의 인디언을 수입하다가 중국인 노동자에게 눈을 돌렸다. 중국인은 인내심이 강하고 성실했기 때문이다. 마카오, 홍콩, 광저우 등에 ‘바리칸’이라는 모집기관을 두고 계약 노동자 ‘쿨리’를 모집했다. 청나라 말기에 많은 중국인들이 가혹한 노동조건에도 모르고 쿠바 등지로 오게 되었다. 청황실이 1874년 쿠바, 칠레 등으로 관리를 파견해 참상을 알게 되고 화교 보호에 힘썼다. 쿨리 무역을 금지시켰다. 1877년 중국 정부는 중국 쿨리에 대한 처우개선을 보장하는 새로운 협약을 체결했다. 1880년 마침내 중국 쿨리들은 인권과 자유를 얻었다. 쿠바의 차이나타운은 미국에서 화교 배척운동이 일어났을 때 쿠바로 이민 온 중국인과 쿠바에서 원래 살던 중국인이 합하여 만든 마을이다. 흑인 노예들의 슬픈 운명을 물려받은 중국 쿨리들이 어렵게 만든 보금자리인 것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중국 음식을 현지화해 파는 쿠바인들이 대부분이다. 거리가 위험해 보이고 볼 것이 없어 그냥 돌아 나왔다. 쿠바에서는 순수 중국인으로 살기 힘들어 대부분 현지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다. 쿠바의 유명한 화가 월프레드 람 역시 아버지가 중국인이고 어머니는 아프리카 계 흑인이란다. 그들도 중국인으로 살기보다는 쿠바인으로 살기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애니깽으로 이곳에 이주한 우리 민족의 아픔도 유사하리라 생각된다.
볶음밥을 사가지고 숙소에 와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내일 비냘레스에 다녀올 계획으로 투어사무실을 찾았다. 큰 호텔 로비에 여행사 사무실이 있었다. 예약을 해 놓고 쿠바의 뒷골목, 서민들의 삶을 보기위해 걸어서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에기도 거리를 따라 쭉 걸어 남쪽으로 걸어가니 역이 나온다. 역 건물은 오래된 건물로 규모가 크고 품위 있어 보인다. 꼭 정부청사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별로 이동하는 인구가 없어 썰렁하기만 하다. 역사를 보며 더 걸어 내려가니 아바나 성벽 유적이 나타난다. 벽만 있다. 여기서 카메라가 고장 나서 작동을 하지 않는다. 큰 길을 건너 골목길을 따라 다시 북쪽으로 걸어간다. 골목에서는 꼬마들이 축구를 하고, 야구도 하며 놀고 있다. 허술하고 폐허 같은 느낌의 가옥들이 이어져 있다. 낡은 구루마 리어커에는 색이 바랜 과일 야채를 팔고 있는데 초라해 보인다. 그래도 자세히 보니 토마토, 양파, 바나나, 파인애플 등 종류는 다양하다. 골목길의 지저분함과 허름한 집들에 깡마른 사람들의 눈빛에서 미소보다는 체념이 가득해 보인다. 두려움마저 느껴진다. 서둘러서 골목을 빠져나오고 싶었다.
다시 오비스뽀 거리에 도착하니 맘이 놓인다. 마침 긴 나무 막대를 타고 거인 복장을 꾸민 7~8명의 사람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걸어간다. 원색의 옷이 화려하다. 북 종류의 리듬악기가 따라간다. 그 뒤로 사람들이 따라간다. 길가에는 시가를 문 할머니 3명이 앉아있다. 아내가 살짝 옆에 앉아서 함께 사진을 찍으니 돈을 내란다. 큰 길을 건너 아바나 대극장을 끼고 걸어서 숙소로 향했다. 모네다로 살 수 있는 피자 가게가 보인다. 아주 작은 철망이 있는 구멍으로 돈과 피자를 교환한다. 믹시드 피자를 주문했다. 사람들이 몇 명 줄을 선다. 피자를 손에 받으니 맘이 흐뭇하다.
힘들게 찾아간 쿠바의 첫 날, 그들의 삶의 깊숙한 곳을 알 수는 없지만 그동안 생각했던 쿠바의 이미지가 많이 사라졌다. 왜 사람들이 쿠바 여행을 추천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참 편하고 재미있는 곳이다. 가난해도 얼굴에 미소가 있고, 음악이 있는, 리듬감이 느껴지는 예술적인 쿠바의 아바나이다. 과거 속에 멈춰버린 도시 속에 가끔 미래의 모습도 보석처럼 보인다. 행복해 보인다.
1월 18일 경비 — 숙박비 40쿡, 아침식사 6쿡, 피자 50모네다, 파파야 25모네다,
츄러스, 물 30모네다, 바나나 10모네다.
10쿡=240모네다. 100유로=130쿡.
계 50.8쿡*1100원=55880원. 누계 313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