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현위 서기로서 정년퇴임한 최선주와 몇몇 퇴직한 조선적간부들은 신빈만족자치현 경제문화교류협회(이하 조협)를 조직하였다. 조협은 현위와 현 정부의 중심사업을 둘러싸고 조선족의 경제발전 및 세 가지 문명건설과 당의 민족정책을 관철하고 민족단결을 증강하며 조선족의 합법적 권익을 수호하고 조선민족을 위해 복무하는 명에 유익한 사업을 하여 상급의 좋은 평가와 조선족간부 및 군중들의 찬양을 받게 되였다. 조협이 이룬 쾌거 중의 하나는 협회가 성립한 이듬해 1995년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독립군의 남만주 사령부가 있던 신빈현 왕청문 화흥중학의 옛터에 항일 명장 양세봉장군29)의 동상을 건립한일이다. 빈손으로 이런 거대한 석상을 세운다는 것은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회장인 최선주가 두 달 봉급인 1,000원을 기탁한 후 협회의 구성원들과 이사들이 적극적으로 기금을 출연하였고 각종 집회나 언론, 모금편지를 을 통하여 모금을 하였고 집행부는 동북3성과 북경 등, 4개월간 2만여 리를 누비면서 60여개 단위, 100여명의 저명인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많은 조선족 단체와 인사들은 스스럼없이 모금에 참여하였다. 유치원의 꼬마들로부터 80고령의 노인들, 농민 노동자로부터 학생, 공무원과 교원,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뜨거운 손길을 보내주었으며 심지어 한족과 여러 기업가들이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왔다. 그렇게 모금한 20 여만 원으로 면적 60㎡, 높이가 5.5m 화강암으로 만든 양세봉장군의 기념비를 남만주 사령부가 있던 왕청문 조선족 학교의 운동장에 건립하였다. 기념비의 낙성식에 신빈현위와 정부의 지도자, 동북3성의 신문기자, 대학교수, 저명한 조선족유지인사, 중국 인민해방군의 조선족장군, 한국의 유지인사와 신문기자 등 수백 명이 참가 하였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이런 작은 현에서 빈손으로 최선주 회장을 비롯한 리ㆍ퇴직노인들이 성사시켰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다. 이는 그들이 자기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 민족의 얼을 심어주려는 애족애국의 참된 정신의 결정이다. 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29) 1920-30년대 동북 남만일대에서 항일투쟁을 한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1934년 9월 신빈현 향수하자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일제에 의해 암살당한 항일명장이다.
기념비의 건립은 동북3성 조선족사회에 영향이 컸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커다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중앙일보에서는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으로 전면에 보도했고 경향신문은 “순국 61년 만에 추모행사”(1995년 9월 4일)란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기념비가 건립된 후 이미 10여년 국내외 각계 인사들이 추모 차 방문하였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당지 중소학생과 노인협회에서는 해마다 청명에 헌화를 하고 있다. 그리고 1996년 여름 중국인민해방군 목당강군분구정치위원이며 리직 간부 김강희장군과 한국인 권유홍교수의 배려와 협찬으로 해마다 5,000원의 “양세봉장군장학금”을 만들어 우수교원과 우수학생에게 장려를 진행하여 영웅의 혼과 애족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기념비가 설립된 후 조협은 많은 문예활동을 하였다. 첫째 1995년 자체로 창작한 양세봉장군을 노래한 시가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대형 문예연출을 조직하였다. 둘째 기업가와 지명인사들의 도움으로 해마다 조선족중소학생을 대상으로 “양세봉컵 작문 콩클”을 한 것이다. 특히 2002년 11월에는 전정혁 부회장이 주선아래 요녕성 대한경제기술문화교류협회의 협찬으로 신빈, 청원, 무순, 환인, 길림성의 매하구, 집안과 삼원포 등 10개 조선중학 65명 학생과 지도교원, 교장 등 100여명이 참가한 “양세봉컵 조선족 중학생 작문콩클”을 개최하여 기념비를 참관하고 장군의 업적에 대한 감명을 받게 하였다. 셋째 7만자 분량의『신빈현조선족항일투쟁략사』를 편찬 출판하였으며 전정혁이 수집 정리한 100여수의 『조선족항일투쟁가곡선집』을 출판하였다. 조선족 농촌경제의 발전과 세 가지 문명건설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신빈현의 조선족은 1만 1천여 명의 인구로 그중 70%이상이 향진과 농촌에 산거하고 있으며 10개의 독립조선족촌과 13개의 촌민소조가 있다. 조협은 사업의 목적을 농촌조선족촌과 조선족농민을 위한 것이라고 설정하였다. 매년 2,3년차 농촌에 내려가 조선족간부와 인민 대중들과 무릎을 맞대고 현실을 인식하고 그들의 경제발전에 대해 연구하였고 때로는 현 노과학기술협회, 현 반공실, 농업국등 유관부문과 같이 정보를 제공하고 영농과학기술과 치부경험을 전파하여 농업증산과 농민수입의 증가 등에 기여하고 있다. 조사과정에서 조선족은 타민족보다 새로운 시장경제에 대한 인식도 높지 못하고 대부분 한국행에 모든 운명을 기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땅에 뿌리박고 이 땅에서 생존기반을 닦아서 부의 길을 찾고 새로운 도약을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이것은 어떤 한 개인이나 단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조선족사회의 전반적인 현실이지만 앉아서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중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우선 향진과 촌의 간부들의 개척정신과 민족의 앞날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농촌경제발전의 선도자로 육성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그래서 매년 2차례 이상 향촌의 조선족간부 좌담회, 4차례의 전현 조선족 향촌간부의 참관학습을 조직하여 비교적 선진적인 백기촌, 강동, 장령자, 란기, 영영 등 촌의 변화면모에 대한 고찰을 통해 향촌간부들을 자극 하였다. 특히 1998년 현 정부의 경제적 도움을 얻어 전현의 조선족향촌간부들이 길림성의 매하구, 요녕성의 철령, 심양, 요양, 안산 등 선진 조선족촌과 기업을 참관하여 안목을 넓히고 생각을 바꿈으로서 농촌사업에 대한 믿음과 군중을 선도해서 경제발전에 최선을 다하게 하였다. 그리고 좋은 치부항목이 있는 조선족촌를 발견하면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유관 부문과 연결하여 도움을 주었다. 실례로 1996년 남자목조선족촌의 강비 모형공장의 자금난이 일시적인 것으로 판단하여 현 민위와 같이 성 민족사무위원회에 반영하여 29만원의 대부금을 해결해주었으며, 왕청문진 동강도 조선족촌의 황소목장 설립에 현 정부로부터 5만원의지원금을 받게 하였고, 2000년 장령자조선족촌 약제기지건설은 성 민위를 통해 10만원을 지원 받게 하였다. 이렇게 농촌조선족 경제발전을 위해 유관부문과 연결하여 투자와 지원금을 받게 한 것이 2004년까지 100만원이 웃돌고 있다. 10여 년간의 간고한 노력과 부단한 탐색으로 조협은 산구농촌조선족촌의 경제발전의 길을 찾게 되었다. 수전의 경우 우량품종을 선택하고, 과학적인 시비 등 영농방법의 개선으로 쌀의 질과 산출량이 높여 예전에 7,8백 근으로부터 현재 평균 천근, 어떤 촌은 1천 3백 근을 산출하고 있다. 한전은 각종 약재, 묘목, 땅콩, 담배 등 경제작물을 심도록 하였으며, 산림에는 경제림과 인삼 등 중약제와 개구리나 소 등 사육하여 농민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2004년에는 전현의 년 평균수입보다 조선족들의 평균 수입을 높여 잘사는 농촌 건설에 공헌을 하였다. 1997년 중공중앙 14기 6중 전회에서 “정신문명건설을 가강할 때 관한 결의”에 근거하여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을 계속 고양하기 위해 현위의 동의를 거쳐 현민위, 부련회, 공천단 현위와 연합하여 “훌륭한 시어머니, 훌륭한 며느리, 문명 가정 기준호 활동”을 벌렸고 1998년에는 당의 “15대” 정신을 구현하기위해 현 민위, 현 농위, 현 과학기술위원회와 공동으로 발기하여 “초요촌치부기준호”창건 심위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99년-2001년 3년간 “문명촌, 문명호, 훌륭한 시어머니, 훌륭한 며느리활동”을 확대하여 조선족의 문명건설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몇 차례에 걸쳐 8개의 문명촌, 7개의 초요촌, 13세대의 치부기준호, 16세대의 문명호, 훌륭한 시어머니와 며느리 20명을 표창했으며 이들의 선진 사적을 발표하여 회의에 참가한 현과, 성, 시의 지도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현위서기는 “이번 활동은 전현 조선족의 경제발전과 가정도덕건설에 일대 변화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한족과 기타민족의 문명건설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극찬하였다. 그중 몇 분의 사적은 요녕성 민족출판사에서 발간한 『슬기로운 겨레의 여성들』에 게재되었다. 이 몇 년간 신빈 조선족농촌의 문명건설과 발전이 비교적 빠르게 증진하여 조선족행정촌 22개 중 성급 문명촌 1개, 시급 문명촌 6개, 현급 문명촌이 2개가 되어 촌의 면모와 문명 도덕, 가정위생, 등 많은 방면에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총적으로 우리 협회는 신빈조선민족의 견인차와 아름다운 전통미덕의 계승발전에 일정한 생장소로 되였다. 민족교육은 그 민족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으로 조협은 민족교육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민족문화와 교육의 발전에 뒤받침을 하였다. 중국에서는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지만 조선족학교는 분산되어있고 경제난으로 가급학교의 수업환경은 의무교육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국면을 타계하기 위해 성 민위, 성 조협, 전국 조선족발전촉진회 및 국내외의 유관인사들과 적극적인 연계를 통해 재정 지원을 받게 하였다. 협회성립 초기 한국경기도공업집단에서 영릉조선중학, 왕청문조선중학, 장령자와 영영소학에 각각 미화 1천 딸라, 한국강원도 대학 박한설교수가 향수허자소학에 1만원을 희사했으며 도서 60여 책을 현조선족중학에 증정하였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각 학교의 지원금은 무려 50만원을 초과하였다. 1999년 교육환경의 변화에 의해 농촌에 있는 두개의 중학교를 현조선족중학으로 합병할 때현위와 현 정부, 현 교위와 같이 적극적으로 성 민위와 성교위를 설득하여 2백만 원의 지원금을 받아 3,000㎡의 종합청사와 400㎡의 식당을 지어 학교합병의 순조롭도록 하였다. 새로운 교사의 건립하고 수업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현 조선족중학교의 역대교장이 발기인 되어 진행한 컴퓨터실건립에서는 최회장이 자진하여 1천원을 기부하면서 모금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졸업생들과 학부모, 현 내외의 각개 각층의 지명인사들의 정성으로 20만원의 모금하여 50대를 갖는 컴퓨터실을 건립되었다. 현 조선족 소학교는 원래 현 조 중과 같이 있어 교사와 운동장이 비좁아 운영에 어려웠는데 현을 설득하여 원래 직업고중이반을 4층 청사에 이사하게 하였고, 2003년 농촌조선족소학의 학생고갈로 인해 계속 학교유지가 곤란할 때 농촌조선 간부와 학부모의 의견을 수렴하여 “농촌조선족소학 분포조정의 여섯 개 의견”을 현 정부에 제기하여 수차례 현장과 연구하여 1백만원을 투자하여 식당과 기숙사, 실내화장실 등을 지어 순조롭게 합병을 유도하였으며 교사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곤란하자 회장이 1,000원을 기부면서 가장위원회를 발기하여 전체 학부모, 각계 인사들을 동원하여 5만원의 모금하여 해결하였는데 현재 현 조선족중학과 현 조선족소학의 교수조건과 설비, 환경은 전현 중 소학의 일류수준에 도달해 있다. 협회성립 후 10년간 3차례의 전현 조선족체육운동대회를 성공적으로 조직하고 진행하였다. 제 1차는 1996년 현위, 현 정부의 관심 아래 현 민족사무위원회와 현 체육위원회에서 주최아래 진행하였으며 제 2차는 2001년 현 위, 현 정부의 동의를 거쳐 현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자금을 내여 진행한 중 소학이 참가한 전현조선족체육운동대회였으며 제3차는 2004년 현 정부에서 직접 경비를 조달하여 이루어진 현 조,중 및 전현조선족전통항목운동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선발된 8명의 운동선수는 2004년 가을 전성 조선족 민속절 전통항목 경기대회에 참가하여 널뛰기 1,2등, 그네뛰기 2등으로 전성 17개 시현대표 중 심양에 버금가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신빈현 노년협회의 집체무는 대회의 우수 표현장을 받았다. 10년간 두 차례의 문예연출과 두 차례의 전현 조선족 민속절 활동을 진행하였다. 2000년 12월 새 세기 맞이 문예연출, 2002년 6월에 홍승저수지에서 민속절 및 문예련환회, 2004년 현 북산공원에 전현 조선족 민속절 및 현 조,중예술절 맞이 문예공연을 진행하였다. 이렇게 조협은 민족경제발전의 견인차로와 함께 민족문예체육발전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대외교류사업을 통해 신빈을 선전하고 지명도를 높여 협회 사업의 활력을 갖게 하였는데 10년간 국내외의 실업가, 학자 등 다양한 방면의 전문가 및 각종 고찰단을 접대한 것이 50여 차례이며 최회장은 협회를 대표하여 1976년부터 매년 연길, 장춘, 할빈, 북경 등지에서 열리는 조선민족공작할술심포지염의 특별요청으로 참가하여 조협의사업과 실천경험을 발표하여 참가자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1996년 7월에 참가한 요녕성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소집한 전성조선족향촌간부회의(후에 성민족사무위원회와 성조협에서 조직한 조선족사회단체 경험교류회의)에서 조협의 사업경험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0년 9월 최회장은 한국재외동포재단 요청으로 한국을 방문 참관했으며 2003년 9월에는 베트남 호지명시에서 조직하는 국제학술심포지염의 요청을 받아 참가하였고 2004년 8월 요양에서 열리는 북경 및 동북 3성 민족공작 각계인사의 좌담회에 참가하여 협회 10년간의 사업정황과 경험발언으로 참가자들의 찬양을 받았으며 국내의 각 계층의 지성인들과 성내 각 시현의 조협조직과 연계와 내왕을 통해 정황과 경험을 교류하여 좋은 점을 취하고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 협회사업의 활기를 띠게 하였다. 협회성립 이래 조선족촌과 학교, 간부와 대중들은 크건 작건 어려움이 있으면 모두 협회에 와서 도움과 해결을 요청하였고 조협은 전력을 다해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스스로 유관부문과 연계하여 천방백계를 다해 해결해 주었는데 그 사례는 워낙 방대하여 다 말할 수는 없고 대표적인 것만 간추려본다. 1997년 봄 조협에서는 심양의 모 한국 사장과 연계하여 9명의 조선족농민을 노무 연수생으로 한국에 보내기로 하고 예비금 15만원을 지출하였는데 사업이 파산하여 예비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반복적인 교섭을 하였지만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고 현인민법원에 기소하여 예금을 받게 하는 것으로 조선족의 합법적인 권익을 수호하였다. 2000년 봄 현에서 통일적으로 행정촌 분포를 조정할 때 어떤 향진에서는 규모가 작은 조선촌을 인근 한족촌과 합병하였다. 이에 두개 조선족촌간부와 대중들은 동의를 하지 않고 현 정부와 조협을 찾아왔을 때 최회장은 현위, 현 정부를 설득하여 합병을 막았다. 2003년 가을 재차 농촌행정촌분포를 조절할 때 인구 8백 명이 미만은 인근촌과 합병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이 규정대로 하면 전현 22개 조선족촌중 한개 촌을 제외하고 나머지 조선족촌은 없어지게 될 지경에 이르자 전현의 조선족간부들은 강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래서 조협은 현의 영도와 담당인 민정국과 교섭하여 조선족 촌에 대해서 다른 규정을 적용하게 하여 22개촌 중 10개의 조선족 행정 촌을 남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30여 호의 조선족이 편벽한 산구 한족 촌에 분산거주하고 생활이 곤란하고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조선 글과 말을 몰라 조선족의 특색을 잃어가는 것을 현위와 현 정부의 동의를 얻어 온갖 어려움을 감수하고 1996년 그들을 조선족이 집거하는 마을로 이주시켜 자식들을 조선학교에 보내어 자기 말과 글을 배우게 되었고 겨레의 정으로 이루어진 기와집에 들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새살림을 하게 된 그들은 한결같이 “정말 삶의 보람을 느꼈습니다. 최서기와 협회의 노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몇 십 년 품었던 소원을 이루었습니다.”라면서 감격에 떨었다. 그 외에도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크고 작은 일들을 해결하였다. 10여 년간의 협회사업에서 조사보고, 논문, 경험 등 기록하였으며 그중 두 편의 논문은 성 민위의 내부간물 『료녕민족공작』과 「료녕조선문보」에 실리였고『민족단결』잡지에 2차나 우리 협회의 경험이 게재되었으며 국가 민위 원 부주임 황광학 동지 및 전국조선족 지명인사들도 모두 우리의 사업을 충분히 긍정하면서 높은 평가를 하였다. 이렇듯 조협은 최회장과 함께 10여 년간 전현의 조선족을 위해 많은 유익한 사업을 진행하여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그것은 1999년 성민위에서 “민족공작선진단위” 2002년 무순시민정국으로부터 “선진사회단체”, 현위, 현정부에서 “후대 관심공작 선진단위”등 영예로운 칭호를 받았고 최회장은 1998년 료녕조선문보창립 40주년 기념 겨례상 시상대회에서 “민족사업을 위해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는 평가와 함께 전성에 하나밖에 없는 기여상을 수상하였으며 2004년 성위 통전부에서 “전성 현구 통전공작 3개 문명건설 복무 우수 개인”칭호와 영예증서를 을 받았다. 우리가 얻은 성적은 주로 현위, 현 정부의 영도와 각급 유관부문의 지지, 조선족간부와 군중들의 노력에 결과인 것으로 우리는 근근히 전현 조선민족을 위해 뒷심이 된데 불과하다. 2005년 1월 조협 창건 10주년대회에서 현위, 현 정부에서는 “협회는 현위, 현 정 부가 조선민족과 연계하는 유대와 교량작용을 했으며 현위, 현 정부의 세 개 문명건설의 유력한 조수작용을 하였고 현위, 현 정부의 개방을 확대하고 대외교류의 유력한 창구작용을 하였으며 조선족의 어려움을 지 해결하고 좋은 일을 한 조선족지가의 작용을 하였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대회에서 조선족간부와 군중들은 10년간 협회는 신빈조선민족을 위해 역사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신빈조선족 100년사에 무게 있는 한 폭을 수놓은 신빈조선족의 서광이라고 찬송하면서 “최 서기가 없으면 협회는 문을 닫아야 한다.”고 높이 평가하였으나 본인은 나의 70성상 노정을 회상해 볼 때 나의 제한된 지식수준과 사업능력으로 당의 사업에 충성하고 전력을 다하여 당에서 맡겨준 임무를 완성하며 전심전의로 인민군중을 위해 복무한 것이다. 그래서 당과 사회에 대해 부끄럽지 않으며 조상과 처자 자손 후대에 대해서도 부끄럽지 않음을 느끼면서 죽어도 유감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며 말을 맺었다.
최선주, 2005. 5. 신빈
양세봉 장군의 동상. 2005. 2. 신빈
② 한글문화를 지속시킨 박성군 (60세) 한 민족문화가 불모지인 중국 땅에서 불구자의 몸으로 40년간 우리의 민족문화를 후손들이 배울 수 있도록 사제를 들여 손수 등사판을 긁어가며 프린트해서 순수한 우리글로 된 잡지를 만들고 압록강문학상을 발기하는 등 헌신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가 있다. 중국 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겸 서탑 잡지 책임편집인 박성군은 심양조선족 제1고급 중학교 재학시절인 1963년 동급 반 학생들로 구성된 문학 서클을 만들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반인 1964년 불의에 교통사고를 당해 왼쪽다리를 크게 다쳐 다리를 절단 목발에 의지하다가 지금은 의족을 하고 있는 불구자가 되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들이 만든 문학 서클은 「해당화」란 프린트 문학지를 발기하여 출간 2기를 마친 1966년은 좌경사조(左傾思潮)가 판치던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있었고, 평소 한글을 좋아한데다 KBS 방송을 들었다는 이유로 남조선 특무30)로 지목되어 자본주의 사상을 뿌리 뽑는 사상개조로고 7년 동안이나 심양근교 농촌에서 인분 줍기를 해야 했다. 강압에 의해 소위 하방(下方)신세로 전락하여 농로에다 인분을 쏟아 부어 퇴비를 만드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료동문학」에 실린 그의 자전적 소설 “부평초”는 그런 경험에 바탕을 작업이다. 문혁이 끝난 후 개인기업에서 8년간 근무했고 농사일 하는 집체기업에서 11년간 농기계 스프링 만드는 공장의 공장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87년도에는 당시 거금인 1,000원을 들여 “압록강문학회” 이름으로 문학상을 제정(2년 전부터 중단)했지만 국가에서 돈이 나올 리 만무하였다. 그래서 본인 표현을 빌자면 ‘마누라한테 싹싹 빌어’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1987년에 설립된 심양시 조선족문학회 는 중국 요녕성 문인협회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심양, 대련, 무순, 영구, 안산, 반금, 단동, 철령 등의 문학인 72명이 참여하고 있는 사단법인 성격의 민간단체로서 울산수필동인회는 물론 춘천문인협회와도 자매관계를 맺고 있으며 회원의 70%가 교직에 종사하고 있다. 1987년 그는 심양시 조선족 문학회를 설립하는 일에 매달렸다. 중국정부의 재정지원이 따르는 문련 소속이 아닌 사단법인 형태의 민간단체의 법인을 설립하려고하니 비준을 내기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으나, 중국정부당국과 끈질긴 접촉과 설득 끝에 그해 9월 유관부서에서 법인설립 비준을 받아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민간단체이다 보니 재정적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연 중국 내 조선족 기업체나 한국의 독지가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고 이 일을 줄곧 박회장이 도맡다시피 해왔다. 1999년 12월 그는 족보를 근거로 실로 82년 만에 할아버지 대신 고향땅을 밟게 된다. 그의 할아버지는 1917년 고향(울산)을 떠나 서간도로 이주했다가 심양에 정착하였고 첫 방문때 친척인 박진구 당시 울주군수와 10촌 형인 당시의 박종태 남창면장도 만났다. 그는 이 사실을 「료동문학 제 1집의 중편 실화소설 ‘울산아리랑’에 남겼다. 그의 할아버지는 고향이 울산군 온양면 고산리(내고산)(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남창리)이며 울주군수를 지낸 박진구씨 하고는 7촌간이다. 그래서 심양시 조선족문학회는 3년 전 울주문화원과 인연을 맺었고, 울산의 중견기업인 삼창기업 이두철 회장의 금전적 도움으로 지금까지 8집의「료동문학」이란 작품집을 지속적으로 발간할 수 있었다. 그들은 기관지 「료동문학」을 통해서 소설, 수필, 시, 평론 등의 문학작품을 통해 조선족의 삶과 애환을 담은 서정적인 내용으로서 한글의 보급과 발전에 기여하고 조선족의 정체성을 구현하는데 기여하고 있는데 81년 협회가 발족하기 전에는「서탑」이라는 내부간행물31)로 발표한 적이 있고 연간 2-4회의 문필회를 개최하며 작품 발표의 수와 질에 따라 회장단이 선정하는 이달의 문인과 여러 가지 활동을 홈페이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32) 술 접대 문화가 중요한 사교 수단으로 정평이 나있는 중국에 살면서도 박회장은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 속에서 술을 전햐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정확한 속사정은 본인이 이야기 하지 않는 한 아무도 모른다. 대신 담배는 하루에 한 갑반에서 두 갑 정도 태우는 애연가다.
30) 우리말로 간첩에 해당되는 용어 31)출판사에 등록되어 서점에서 판매되는 공개간행물과 달리 내부에서 발행하여 관계자들만 돌려보는 간행물 32)홈페이지 료동문학
박성군. 2005. 심양
③ 한글학교의 산증인 김양(1934년생) 전남 담양 금석면 외출리 출신으로 1937년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1959년 요년대학 역사학계를 졸업하고 연변대학에서 한국역사를 연수하고(58-60) 요녕대학에서 1975년까지 조선역사를 강의하였다. 1975년 요년인민출판사에 조선문실, 요녕민족출판사 편집으로 근무하다가 1990년에 정년퇴직을 하였다. 퇴직 후 요녕성 민족사무위원회 우철히 처장과 손을 잡고 민족의 혼을 지키자는 생각으로 1991년 세종한국어학교에서 자원봉사로 한국어 교육에 헌신하였다. 세종한국어학교는 중앙민족학원의 황유복교수의 협찬금 2,000원(당시 보통 사람들의 월급이 200원 미만이었음)로 시작하였는데 우철희처장의 부인이 섭외하여 심양시 조선족 제 6중의 교실을 야간에 무료로 빌렸고 요녕민족출판사, 요녕성 사회과학원 등에서 은퇴한 분들이 무보수로 강의를 맡아 진행을 하였는데 초창기에는 300여명이 매일 저녁 수업을 하였다. 무보수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은 고장 나고 버려진 책걸상들을 주어다가 틈틈이 수리를 하였고 이러한 사정은 2004년 KBS사회교육부 해외동포 체험기에 응모하였으나 입상이 되지 못했다. 그 후 세종 한국어 학교는 경영난에 부딛쳐 어쩔 수 없이 학비를 받기 시작했고 한족 학생들의 지원자도 있었다. 현재 세종한국어 학교는 그녀의 막내딸인 정 권(35세)선생이 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은퇴 후 발간한 저서로서는 『당대 조선족 여걸』, 『항일투쟁 반세기』(이 책은 성 정부에서 정식으로 통보), 『압록강 유역 조선민족과 항일투쟁』, 『남만조선족과 항일투쟁』, 『슬기로운 조선족 여성』(지식인 가정주부 소개)등이 있으며 각성에 산재한 인민대표 중 조선족 51명의 인재를 취재하여 1998년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2005년 8월에 완성할 예정인『조선족 영재록』이다. 그 외 김양선생의 주요업적은 유인석의 후손으로 강원도 광복회 회장인 유영익의 의뢰로 1995년부터 윤희순 사적 조사하여 중국 해성의 유해를 발굴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모르면 우리 민족의 미래 역사도 없다.”는 생각에서 환인, 무순, 신빈, 봉성 등 윤희순 열사의 활동지역과 사망한 해성 등에서 동시대 인물들의 증언과 현지조사를 통해 윤희순에 대한 동시대 중국인의 증언 등을 남겼다. 그것은 요녕성 조선족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의 시작이었다.
김양, 2005. 2. 심양.
④ 조선말과 문화를 지키는 우철희 1932년생으로 황해도 평산 출신인 그는 의병대장 우병렬의 4형제 중 장남으로서 요령성 민족사무위원회 판공실에 근무하였다. 길림대학에서 법학 전공, 1957년 졸업하여 길림성 법원정책 연구실(1959-1961)에서 근무하였다. 문화대혁명(1966- 1976) 시기 민족별, 남녀별, 지식인별로 구성된 參政黨, 8개 민주당파를 구성하여 관리하였고, 1978년에 민족사무위원회가 부활하자 행정을 담당하였다. 이후 1979년 심양에서 통일전선공작부대에 부임하였다. 당시 공산당 위원회에는 조직부(사람관리), 선전부, 통일전선부, 규율검사위원회(감사부), 정책위원부 등이 있었다. 전국인민대표회 당대표(조선족) 15, 16기를 역임하였으며 요녕성 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비서장으로 성장의 비준을 거쳐 무순, 안산, 영구, 본계, 환인, 신빈, 청원, 단동에 설치된 경제문화교류협회를 관장하여 요녕성의 조선인 문제에 대해서 조사하여 정책수립에 반영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한민족의 위대성을 항일투쟁에서 찾고 있다. 일제시대의 모든 독립운동가, 종교계, 학계, 문화예술계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항거한 것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며 이러한 정신문화사 지속적으로 지켜질 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민족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중국 조선족이 나아갈 바를 밝히고 있다. 첫째 중국 조선족이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민족문화와 언어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문화를 지키기 위해 가난할 수도 없고 가난을 이기기 위해 문화를 버리고 동화될 수도 없지 않느냐. 우리 민족은 어느 곳으로 이민을 가도 제일먼저 한글 교육을 시킬 수 있는 한글 교를 건설했다. 현재 조선족은 농촌이 무너지고 대도시의 잡거지역으로 인구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는데33) 무엇보다도 그곳에 민족문화의 건설이 필요하며 문화보존에 가장 큰 것은 언어이다. 라고 주장하며 황유복교수의 지원으로 지기인 김양선생과 함께 심양에 세종한국어학교를 설립하였다. 둘째 조선족에게 좋은 일이면서 중국에 해가 되지 않고 한국에도 좋은 일을 찾아서 실천하고 있다. 그 중에서 서울 올림픽, 북경아세안게임을 통해 한국에 대한 연구를 건의해서 동북아 연구소를 설립한 것, 2001년 요녕일보 조선문판 폐간에 대한 반대의견 건의 한 것, 한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자 한중경제교류를 위한 한중사전의 편찬한 것, 요녕성 도서관에서 1906년부터 1945년까지 동북지구 조선인의 항일투쟁을 감시하기 위해 발간된 성경시보(盛京時報)를 발굴 필사해서 한림대학 아세아연구소 박창욱 교수에게 전달하여 천 여개의 자료를 발굴한 것 등이다. 그리고 “가정을 지키자”라는 캠페인성 글짓기 대회에서 농촌에서 벙어리 장애인 아들을 가진 할머니가 민며느리로 들인 여인 사이에 태어난 관전현 하로하 소학교의 김재화 학생의 글 “그리운 어머니”를 읽고 한국인 사진가 류은규와 연결시켜 장학금을 지급하게 하였는데 김재화는 현재 요녕조선족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며 류은규는 연변대학을 거쳐 대련의과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 조선족 기업가, 한국씨름연맹 등의 지원으로 태권도 협회를 설립하고 한국의 사범을 초빙하여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선수를 배양하는 문제를 성의 비준을 받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사업들이 조선족의 정체성을 살리면서 중국의 정책수립과도 맞도록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모든 민족은 문화와 언어, 경제를 발전시키는 자유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고 공산당의 정책 역시 56개 민족문화 향상을 부르짖고 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다며 조선족 이민의 역사가 100년이 지났는데 향 후 100년 후의 계획이 수립되어있는가? 그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라는 자문을 항상 하고 있다고 하며 그의 생각으로는 서로를 지켜보며 도울 수 있도록 문화적 관계의 형성과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으로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말을 맺었다.34) 봉쇄에서 개방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격변기 중국에서 조선족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특히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가는 시점에서 성공사례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정체성 유지와 정신문화의 보존이 중요하다고 보고 민족의 에너지를 어떤 방향에서 표출할 것인가, 그리고 조선족은 어떻게 변화에 대응했는가를 고민하며 “돈을 버는 일보다 쓰는 것이 문제”라고 설파하고 있으며 서탑지구는 조선족의 집거지인데도 불구하고 조선족 젊은이들이 한곳에 모여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다면서 세종한국어학교와 연결되는 지점에 조선족 도서관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도서관 건립에 필요한 자금은 최소한 한국 돈으로 1억3천만원정도로 설립이 가능하다고 한다. 또 하나 한국에서 돈을 벌어온 사람들이 중국에 와서 안정적으로 안착하도록 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며 이것은 중국 조선족의 정신운동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33)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중국 농촌의 조선족들이 상해에 오천명, 광주에 일만명, 위해 청도 등 산동성 지역에 10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이주해있다고 한다. 34)2005년 2월, 5월 인터뷰
우철히. 2005. 2 심양
⑤ 걸립무를 창시한 金明煥(58세) 1948년 환도성 두자촌에서 출생(현재는 수몰지구가 됨)하였고, 현재 요녕성 조선족음악학회 회원, 환인현 문화부 조연부 주임으로 근무 중이다. 1940년 경 부친 대에 중국이주. 부친은 평북 벽동 출신으로 생활난으로 농토를 얻기 위해 일가족 모두를 이끌고 이주해 왔다. 환인현 조선족 소학교 6년과 중학교 3년 과정을 마치고 요령성 사범학교 졸업. 문화혁명으로 인해 1년 후인 1968년에 졸업하였다. 사범학교에서 풍금을 배우면서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문화대혁명 당시 연출대를 조직하여 요령성 일대 조선족촌에 하루 40km 정도를 걸으며 순회공연을 하였다. 사범학교 졸업 후 환인현 6도하자 조선족향 조선족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현 민족사무소 문화원으로 자리를 이동하였다. 선생에게서 음악 수업을 받은 제자들이 트럼펫, 섹스폰, 전자 피아노 등을 전공한 제자들이 문화계에서 활동 중이다. 민간무용인 걸립무(乞粒舞)의 고안자로 현재는 기립무(祈粒舞)라고 불리운다. 이 춤은 상모춤, 집체춤, 접시춤, 농악, 이층춤 등을 혼합하여 종합적인 무속무로 고안된 것으로 자유롭게 춤을 추고 쌀, 돈을 얻어 공공용에 충당하는 이른바 공동체를 위한 춤이다. 환갑이나 진갑 등 가족 행사에 공연하며 1989년 요령성 전국 축제 때 출품되었다. 1991년 제1회 심양시 구게마당놀이전에 본계시 대표로 참가하였고 우수상을 시상한 바 있다. 1994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45주년 경축기념 식에 요령시 대표로 북경에서 20여 차례 공연을 가졌다.(북경 부계 공원에서 공연하였고 1994년 10월 30일 전날에 천안문광장 동쪽에서 부수석, 주용기 총리, 북경시 시장이 배석한 가운데 공연한 바 있다.) 근래에는 2005년 유네스코 오녀산성 등록 기념 때 공연하였다. 본래 이 춤안의 이층 춤은 김명환씨 부친이 고향(평북 벽동)에서 목마를 태우는 춤에서 유래된 것이다. 줄다리기 시합을 하면서 아이를 어깨에 세우고 응원하는 모습이 자연적으로 춤이 되었다.
김영환, 2005. 5.환인
⑥ 발해대학을 설립한 천문갑(千文甲 65세) 교수 발해대학을 설립한 천문갑교수는 흑룡강성에서 태어나 1964년 6년제인 북경대학 기술물리학부 에서 원자핵물리학 전공하고 졸업한 후 중국 핵 공업기지인 란주대학 교수에 부임하였으나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1973년 요녕대학 교수로 옮겨 오면서 심양과 인연을 맺었다. 1982일본 히로시마 대학에서 박사를 취득하고 1984년 나고야 대학교수를 거쳐 1986년에는 위싱톤 표준연구원 방문학자 객원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돌아와서 요녕대학으로 돌아와서 1992년 발해대학의 설립인가를 받고 교장 겸임하다가 2003년 요녕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한 후 현제는 발해대학에 전념하고 있다.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중국조선족 사회에서도 사립대학 설립에 대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행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1990년 사립학교 설립이 허용됨에 따라 천문갑교수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1992년 인가를 받고 93년 신입생을 모집하였는데 중국 조선족의 유일한 사립대학이다. 교명은 심양과 발해만이 가장 가깝고 제 14차 당 대표대회에서 환 발해경제권을 구축하자는 정책이 나오고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요녕성, 하북성, 북경, 천진, 한국, 북한을 연결하자는 생각에서 선택한 것인데 금주, 산동성 등지에서 교명을 도용하기도 하였다. 일본어학과와 회계학과, 국제무역학과, 응용전자기술계로 출발하였다. 재원 조달은 천교수와 친분이 많았던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의 교수들이 지원한 1억원(이하 한화 기준)과 일본의 민단과 조총련 등에서 10억원 그리고 미국 한인장로교회에서 5천만 원 등의 지원으로 부지 5만㎡에 설립하였다. 설립초기 95%가 조선족이었으나 2002년 한국학과를 설립하면서 한족들이 늘어나 현제는 40%정도로 비율이 낮아졌다. 그들은 졸업 후 한국기업에 취업하거나 공무원 혹은 대외무역에 종사할 생각을 가지고 들어 온 사람들로서 전부가 한족, 몽고족, 회족들이다. 2001년부터 중국은 국영대학의 정원이 엄청나게 팽창하면서 대학 설립요건을 강화하여 사립대학의 경영이 악화일로에 있으며 90년도 개정된 사립학교법에 의해 설립된 학교들은 90%가 도산하였고 발해대학도 부지 마련에 대한 어려움이 봉착하여 연변대학과 합작하여 연변대학 심양교학부를 겸하여 졸업장은 연변대학의 졸업장을 발급하고 있다. 현제 학생수는 300 여명이며 금년부터 중전부35)를 운영하고 교수요원은 30여명인데 그 중 60%는 조선족이고 40%는 한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 중부대학교, 호서대학교 일본의 오오사까 경법대학 등과 학생교류에 대한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있다. 1935년 삼학사 서거 300년을 기념하면서 제작하여 심양시 화평구 서탑소학교36)에 설치했던 삼학사비는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파괴하여 강변에 버린 것을 농민이 집을 지을 때 주춧돌로 사용하려고 집에 가져왔다가 명문이 새겨져 있어 부적당하다고 판단하여 건축물폐기장에 버렸다. 1985년 우연히 농촌 조선족 소학교 교원이 이것을 발견하여 보고서를 제출하여요녕성 민족사무위원회로 올라갔으나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천교수가 구입하여 요녕대학 물리학부 뒤뜰에 두었다가 이번에 발해대학 교정으로 옮겼다.
천문갑, 2005. 7. 심양
35)중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3년간 고등학교 과정의 수업을 하는 제도를 말한다. 36)1935년 재만 조선인 보통학교는 춘일공원(春日公園)이 되었고 이곳이 중공군 사령부가 자리 잡자 8.1공원으로 이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