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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여래흥현경 제4권
14. 법인을 체득하는 것(1)
이때 보현이 거듭 말하였다.
“보살 대사가 법인(法忍)을 체득하는 데에는 열 가지가 있으니,
그로써 능히 법인을 구족하는 자는 음개(陰蓋)가 없이 곧 모든 법인의 지위에 올라 모든 불법에서 장애가 없게 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음향에 통달하는 것이고,
둘째는 유순(柔順)하게 행(行)하는 것이며,
셋째는 불기법인(不起法忍)이고,
넷째는 유환(喩幻)법인이며,
다섯째는 야마(野馬)법인이고,
여섯째는 약몽(若夢)법인이며,
일곱째는 호향(呼響)법인이고,
여덟째는 약영(若影)법인이며,
아홉째는 여화(如化)법인이고,
열째는 여공(如空)법인이다.
이것이 보살이 체득하는 열 가지 법인이다.
[음향인(音響忍)]
그러면 무엇을 음향인(音響忍)이라고 하는가?
설법하시는 모든 소리를 듣고 공포심을 품지 않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기쁘게 순종하려 생각하여 그대로 따라 행하므로 모든 행에 있어서 어기는 일이 없다.
이것이 음향인이다.
[유순법인(柔順法忍)]
무엇을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응해서 나아가야 할 법에 수순하여 태어나 법을 관찰하고, 행을 평등하게 세워 거슬려 어지럽게 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모든 법에 유순하게 응한다면 마땅히 건너야 할 것을 건너고, 지성(志性)이 청정하여 평등을 좇아 닦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순순히 들어가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유순법인이다.
[불기법인(不起法忍)]
무엇을 보살의 불기법인(不起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설령 생겨난 모든 법을 보아도 모두 처소가 없음을 보아 멸진한다고 헤아리지 않고 또한 보는 것도 없다고 관찰한다.
만일 생기지 않는다면 곧 멸하는 것도 없을 것이며, 멸하는 것이 없다면 다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만일 다함이 없다면 파괴되는 것도 없을 것이며, 파괴되는 것이 없다면 끝과 바닥도 없을 것이다.
만일 밑과 바닥이 없다면 적연지(寂然地)이며, 적연지라면 담박할 것이다. 담박하다면 행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행하는 것이 없다면 원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인 불기법인이다.
[유환법인(喩幻法忍)]
무엇을 보살의 유환법인(喩幻法忍)이라고 하는가?
모든 것이 환(幻)과 같아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명료히 깨닫고, 하나의 법을 깊이 믿어서 온갖 셀 수 없이 많은 법으로 제도하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법으로써 하나의 법에 평등히 들어가고, 나[吾我]에 들어가나, 들어가되 들어가는 곳이 없으므로 건립하는 모든 것과 이익되게 인도하는 온갖 행에 집착하는 일이 없다.
비유하면 온갖 탈 것 중의 으뜸인 큰 코끼리가 허깨비[幻]와 같기에 온갖 코끼리나 수레나 보행자들과 더불지 않되 유유히 머물고,
남자나 여자나 소년이나 소녀 등의 대소(大小)와 더불지 않되 유유히 머물고,
나무나 줄기나 잎이나 꽃이나 열매와 더불지 않되 함께 유유히 머무는 것과 같다.
보살도 모든 법이 허깨비와 같아서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 것임을 명료히 깨달으면 흙이나 물이나 불이나 바람과 더불지 않되 함께 유유히 머문다.
하루나 보름이나 한 달이나 일 년에 관계없이 함께 유유히 머물며,
백 년이나 천 년을 헤아리지 않고, 달과 해의 겁수(劫數)를 상관하지 않고 함께 유유히 머문다.
그림자나 메아리나 온갖 보는 것들과 더불지 않되 함께 유유히 머물고,
많은 것이나 많지 않은 것과 더불지 않되 함께 유유히 머문다.
많은 것으로써 하나의 일에 들어가지 않고 함께 유유히 머물며,
미묘하거나 열등하거나 부드럽거나 거친 것과 더불지 않되 함께 유유히 머문다.
매우 적거나 매우 많은 것과 더불지 않되 유유히 머물며,
유한한 것이나 무한한 것과 더불지 않되 유유히 머문다.
색(色)에 처해 있는 각기 다른 많은 대중들과 더불지 않되 함께 유유히 머문다.
그 모인 사람들이 허깨비처럼 변한 것과 더불지 않으므로 함께 유유히 머물며,
그 변화된 것 역시 모인 사람들과 더불지 않으므로 유유히 머문다.
머물거나 머물지 않는 것이 없지만 머물지 않는 곳이 없이 보이는 모든 것을 평등히 제도한다.
온갖 것이 허깨비여서 각각 보는 것이 다르나 이 모든 견해에 대해 영원히 보는 것이 없으므로 마침내 모든 취(趣)의 근원을 본다.
불자여, 이것을 ‘보살이 허깨비와 같은 데에 들어가 세상을 제도한다’고 한다.
보살이 제도하는 세상은
번뇌가 횡행하는 세상과, 세속 국토의 법에서 노는 세상과,
나를 주장하는 세상과, 고통스러운 세상과,
유위의 세상과, 유(有)를 여의는 세상과,
합하고 모이는 세상[合會世]과, 모임이 없는 세상과,
분별하는 세상과, 행을 짓는 세상이니,
이것이 보살이 제도하는 세상의 이름이다.
보살이 허깨비 같은 교화를 위하여 두루 모든 세상에 들어가되,
중생을 받아들이지 않고 중생을 파괴하지도 않으며,
국토를 받아들이지 않고 국토를 무너뜨리지도 않으며,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법을 무너뜨리지도 않는다.
지난 일을 기억하지 않되, 과거의 일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도 없고 또한 생각을 여의지도 않는다.
또한 미래도 없고 짓는 행도 없으며, 미연(未然)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현재에 머물지 않되 존재하는 바를 허물지도 않는다.
불도(佛道)에 치달리지 않으니, 도를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부처님과 함께 하지도 않으며 부처님을 권하지도 않고 멸도를 취한다.
모든 원(願)에 머물지 않되 맹세한 것을 버리지도 않고 평등을 좇아 수행하며,
또한 거룩하고 청정하게 장엄하지도 않으면서 장애하는 것이 없이 국토를 개도(開導)한다.
권하여 파괴되는 일이 없는 곳에 들어가게 하고, 법의 근본[法本]에 머물러 흔들리지 않게 한다.
평등히 나[吾我]에 들어가되 또한 나라는 생각을 어기어 허물지 않게 한다.
음(陰)이 종자가 되는 모든 입(入)으로 뭇 행(行)을 깨우치고 집착을 버리게 하여 중생을 도탈시킴으로써 이 모든 행에 있어서 의지하는 것이 없게 한다.
모든 법이 평등하여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것임을 명료히 알게 하고, 모든 법이 단지 임시로 된 글자일 뿐임을 분별하게 한다.
성인께서 통달하신 밝은 지혜는 미칠 수 있는 자가 없다. 중생을 도탈시키시되 항상 적절한 때[時宜]를 따르시며, 또한 중생의 인연에 의지하지 않으시고 대애(大哀)에 머무신다.
숙세(宿世)의 행의 헤아려 알 수 없는 보응(報應)의 일을 말씀하시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신다. 이것이 네 번째인 유환법인이다.
[야마법인(野馬法忍)]
불자여, 무엇을 보살 대사의 야마법인(野馬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세상의 일체 존재는 모두 황홀(恍惚)하여 마치 아지랑이와 같은 줄을 깨닫는 것이다.
사람이 멀리서 아지랑이를 보면 마치 강이 흘러 파도가 일어나는 것 같으나,
통달한 사람[達士]은 그것이 물이 없는 뜨거운 기운인 줄을 명료히 아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이 모든 법에 대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일들을 분별하여, 안도 없고 밖도 없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단멸되는 것도, 항상하는 것도 아니라고 관찰한다.
가르침에 대하여 가볍게 여기는 잘못에 들어가지 않으며, 있는 것 같으나 악취(惡趣)가 없음을 본다.
마음이 밖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또한 안에 처하지도 않으며, 한 모습이거나 온갖 모습 가운데 모습이 없는 줄을 알고, 모든 법은 미묘함을 구족하나 다 근본이 없는 줄을 안다.
이것이 다섯 번째인 야마법인이다.
[유몽법인(喩夢法忍)]
불자여, 무엇을 보살 대사의 유몽법인(喩夢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세상을 마치 몽상(夢想)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의 꿈은 세상에 처하지 않고 세상을 따라 일어나지도 않으며 세상을 좇아 생기지도 않는다.
또 꿈이란 꿈일 뿐이어서 욕계(欲界)도 없고 색계(色界)도 없고 무색계(無色界)도 없다.
꿈이라고 하는 이유는, 생기는 바가 없어 존재가 없기 때문이며, 꿈에는 번뇌가 없기에 원한을 맺는 일도 없다.
또 꿈을 헤아려 보면 이미 생긴 적이 없으므로 또한 청정함도 없으며, 꿈에는 꿈을 볼 수 없다.
보살 대사가 모든 세상을 관찰하여 꿈과 같은 줄을 명료히 깨닫되 또한 밝게 통달함도 없고 어둡고 어리석음도 없다.
꿈이란 자연이어서 꿈에는 집착할 것이 없다.
꿈이란 황홀한 것이며 꿈이란 본래 청정한 것이니, 건립하는 바가 있기에 이 꿈이 있다.
꿈은 파괴되는 일이 없으니, 생각함을 인하여 이 꿈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법이 꿈과 같은 줄을 명료히 깨닫는다면 세상을 개도할 수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인 유몽법인이다.
[여향법인(如響法忍)]
불자여, 무엇을 보살 대사의 여향법인(如響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법을 배워 들어가는 모든 소리이다.
만일 배운 것이 있으면 아직 제도받지 못한 사람들을 제도하여 법을 배우도록 개화하지만, 모든 것은 마치 메아리와 같아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되 본래 모두 고요하니, 또한 제도할 대상도 없음을 깨닫는다.
보살 대사가 이와 같은 색상(色像)으로 여래의 안과 밖의 모든 음향을 관찰하되, 안과 밖의 모든 일을 분별하여 보지 않으므로, 밖의 일도 모르고 또한 안의 일로써 밖의 일을 알지도 않는다.
의탁하는 것을 보지 않으므로 언사의 나아가고 물러서는 이치를 환히 아니,
이것이 온갖 장구(章句)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메아리와 같은 인연으로 계도(啓導)하는 것이 있으니, 모든 법시(法施)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며 또한 장애가 없다.
배운 것이 있으면 모든 소리가 존재가 없는 줄을 분별하여 환히 깨닫는다.
마치 천제석(天帝釋)에 속해 있는 천상의 묘하고 아름다운 옥녀(玉女)가 하나의 입과 몸으로 동시에 백천 가지의 기악 소리를 내지만,
그 기악은 생각하는 일도 없고
입도 역시 ‘내가 지금 백천 가지의 묘한 음향을 낸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보살 대사도 온갖 경계를 건너지만 또한 생각도 없고 언사도 없다.
마땅한 방편[權宜]을 환히 깨달아 무량음(無量音)을 이루고, 한량없는 방편으로 세법(世法)를 건넌다.
또한 퇴환(退還)하는 일이 없이 항상 법계를 다니면서 뭇 백성 속에 들어가 모여 있는 사람들을 위해 분별하여 말해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개도하여 건립하게 한다.
입으로 장애 없는 소리를 연설하므로 모든 불토에 두루하여 그들로 하여금 믿고 기뻐하게 한다.
경전을 널리 펴서 백성을 훈도하고, 광명을 떨쳐 아직 깨닫지 못한 자에게 비추어 모든 소리를 깨달아 알게 한다.
비록 설한 것이 있다 하나 아무 생긴 것이 없으며, 온갖 소리를 내지만 도무지 상념이 없다.
더욱 개도하여 생기는 바가 없는 줄을 깨닫게 하고 모든 깨달음의 장[覺場]을 펴서 성도(聖塗)에 이르게 한다.
보살 대사가 이미 이러한 얻을 것이 없는 평등한 경지에 머물렀으므로 두루 듣는 자로 하여금 모든 부처님께서 일어나신 곳으로 들어가게 하여, 모든 부처님께서 한없이 제도하는 법륜을 굴리시는 모습을 직접 보고 따르게 하되 상념이 없다.
이것이 일곱 번째인 여향법인이다.
[약영법인(若影法忍)]
불자여, 무엇을 보살 대사의 약영법인(若影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세상에서 없어지지도 않고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고 세상에서 노닐지도 않고 세표(世表)를 벗어나지도 않고 세상에서 다니지도 않는다.
법계를 믿지 않고 세속의 습관을 허물지도 않으며 또한 세계를 파괴하는 일도 없다.
세상에 이르지도 않고 세상을 탐락(貪樂)하지도 않고 세상을 다스리지도 않으며 세상을 기르지도 않는다.
또 저 보살은 세상에 처하지 않고 세상을 해탈하지도 않으며 또 보살행을 받들어 행하지도 않고 독실히 믿는 것도 없다.
대서원(大誓願)이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지만, 허망한 행이 없어 모든 부처님의 법으로 나아간다.
세간에 두루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나 또한 세속법에 머무는 일이 없고 세속의 가르침을 따르지도 않으니, 비유하면 마치 그림자와 같다.
가령 해의 궁전과 달이 남자와 여자와 나무와 산과 언덕과 집들과 모든 신의 궁전과 모든 강하(江河)의 흐름과 같은 온갖 형상을 비추면,
다함이 없고 한량없는 인연으로 모든 방면에서 해의 광명으로 인하여 뭇 형상들을 모두 보고, 그들이 나아가는 곳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맑은 물에서 뱃사공이 야광주(夜光珠)를 가지면 보이는 것으로 인해 자유로울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훌륭한 것을 베풀면 청정치 못하여 광채가 없다 하여도 모두 그 밝음을 받아 빛을 쪼이게 되나, 야광주는 조작한다는 생각이 없다.
또 그 광명 역시 존재가 없고 음향이 없으며, 또한 생긴 적이 없다.
그 광명으로 인하여 분별하는 일이 있지만 광명은 다니거나 머무는 일이 없다.
비록 청정하게 드러나나 또한 밝게 드러남과 함께하지 않아도 광명지(光明地)에서는 광명이라 한다.
온갖 흐름을 비추되 비추이는 것이 없으니 두루하는 것도 없으며, 그림자 역시 강이나 샘이나 큰 바다나 연못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 그림자를 생각하면 처하는 곳도 없고 집착하는 일도 없다.
나타난 그림자는 깨끗하지 않고 하자(瑕疵)도 없으니, 이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 사이에 근본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널리 나타나되 먼 것도 없고 가까운 것도 없다.
보살도 이와 같아 개화(開化)되는 대상이 이미 그의 성품에 이르러 지행(志行)이 나아가는 바에 자재하고, 관하는 중생의 도혜(道慧)의 장(場)에 권화(勸化)하는 바가 있으니 그들의 뜻하는 것이 균등해서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다니는 도량을 분별하여, 자기 세계와 남의 세계가 두 가지 품(品)이 없는 줄을 두루 관찰한다.
마치 나무를 심으면 처음 싹이 터서부터 점차 자라 무성해지고, 점점 성장하여 줄기와 마디와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생기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이 자기의 세계와 다른 사람의 세계에서 모든 모습을 분별하여 법에는 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장애가 없는 본체로 들어간다.
저 보살신(菩薩身)이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지나가 모든 불토를 보되 역시 집착하는 일이 없다.
세계에서 옮겨다니지 않고도 모든 불세계에 이르나, 또한 이르는 일이 없다.
법신(法身)이 이르는 곳은 태양 궁전의 그림자와 같으니, 모든 곳에 함께하여 그 몸이 일체의 세계에 두루 들어가 나타난다.
현생(現生)하는 것이 있어도 행함에 장애가 없으니, 또한 몸을 나누지도 않고 행하는 것도 없다.
이 세간의 세속적인 생각이 없고 세상의 허무한 말을 없애며,
또 몸을 흩트리지 않고도 종시(終始)가 없는 데 이르러 덮지 않는 곳이 없으니,
여래의 종자로서 본제를 행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청정히 하지 않고 문득 한량없는 찬탄에 들어가 일체신(一切身)을 청정히 하니 두루 통달하지 않는 일이 없다.
이것이 여덟 번째인 여향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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