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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의 일을 본 일본
상제께서는 조선에 일본을 불러들여 역사(役事)시킴으로써 조선은 힘쓰지 않고도 개혁이 되어 모든 유교의 폐습(弊習)인 남존여비(男尊女卑), 반상(班常)의 구별, 적서(嫡庶)의 차별 같은 신분제에 의한 악습이 일소(一掃)되니 “일본은 일만 하고 조선은 편한 사람이 될 것”이라 하셨다.
상제께서는 일찍이 일본을 통해서 조선을 개혁하는 공사를 행하실 때, “너희들은 편한 사람이 될 것이요. 저희들은 일만 할 뿐이니 모든 일을 밝게 하여 주라. 그들이 일을 마치고 갈 때에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덕하게 하라”고 하셨다. 일본은 상제님의 말씀대로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여 목숨 하나 챙기기도 급급하여 일본으로 도망치다시피 돌아갔다.
일제의 조선 개발은 상제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지 일본인이 한국인을 편히 살게 해주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일본은 단지 세계를 정복해보겠다는 야심을 실천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전쟁을 치러야 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에서의 물자 보급 및 이동상의 편의를 위하여 여러 가지의 시설을 갖추어야 했으며, 최대한의 착취를 위해 효과적인 국토개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동기야 어찌됐건 간에 30~40년간의 짧은 기간 내에 이루어낸 성과는 엄청난 것이어서 조선왕조가 그대로 존속했더라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일본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언제까지 지속될 것 같던 원수(怨讐) 같은 일제의 통치가 끝나고 나니 철도와 도로, 해운, 항만 등의 사회 기간시설과 군수물자를 생산하던 산업시설, 그리고 일제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학교와 교육제도 등은 일본인들이 가져가지도 못하고 파괴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한국인의 손에 남았던 것이다. 천년만년 한국을 수탈해 먹으려고 건설한 것들이 결국 한국을 이롭게 한 셈이 되었다.
철도와 도로
1905년 1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경부선 철도는 남대문에서 부산 초량까지 총연장 445㎞에 달하는 것으로 일본인 회사인 경부철도주식회사가 1901년 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3년 4개월 만에 완공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일본의 자본과 기술력으로 시작된 철도 부설은 1902년이 끝나도록 지지부진하다 러일전쟁이 임박하면서 일본 측이 군수물자의 수송을 목적으로 서둘러 공사를 완공했다. 노선은 남대문∼대전∼대구∼부산을 모두 거치는 S자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런데 경부선은 세계 철도 부설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저렴한 비용과 짧은 기간 내에 건설되었는바 이는 철도 부지의 거의를 무상 몰수하였고, 노동력을 강제 동원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경의선은 러일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중 완공되었는데 전쟁으로 군수물자의 수송이 다급해지자 하루 평균 730~900m의 철도 가설 속도로 1년도 못되어 완공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14년에는 호남선과 경원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호남선은 대전역에서 출발하여 비옥한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를 거쳐 목포항까지 연결되는 철도로 호남평야의 쌀을 목포항으로 연결하여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경원선은 그해 9월에 개통되었는데 서울∼철원∼안변∼원산을 잇는 총연장 223㎞의 간선철도이다.
이로써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X자 형의 철도가 완성되어 한반도의 중요 거점이 모두 철도로 연결되었다.
일제에 의해 건설된 것은 도로 역시 마찬가지여서 1907년부터 총연장 741㎞에 달하는 신작로(新作路) 공사가 개설되었다. 당시 한국의 도로는 우마차 사용이나 도보(徒步)를 위한 것으로 도로가 협소하여 불편이 많았다. 전시(戰時)에 침략자에게 길을 열어주지 않을 요량으로 조선의 도로는 길을 넓게 내지 않는 게 상례였다. 그래서 총독부는 대외적으로 치적을 과시할 겸 경제·군사적 목적을 위해서 예산을 투여 전국에 걸쳐 대대적인 도로확장 및 정비를 하였다.
도로와 관련하여 상제께서 보신 공사가 있으니 바로 신작로(新作路) 공사였다.
― 전경 행록 1장 30절
상제께서 보신 공사는 한 고을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그 파급효과는 엄청난 것으로 후일 조선팔도가 모두 넓고 시원스레 뚫린 고속도로 및 일반국도로 그물처럼 연결되어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묶이게 되었다. 조선에 대한 일제시대의 신작로 공사는 말 그대로 ‘새로이 지은 길’이라는 뜻으로 그 시작에 불과한 것이니 조선을 시작으로 하여 국토 개발 및 도로 건설 붐이 전 세계 개발도상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 밖에도 1911년에 압록강 철교가 준공되었으며, 1917년에는 한강 인도교가 건설되어 배를 타지 않고도 한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평안북도 신의주와 중국 단동(丹東)을 잇는 압록강 철교는 한반도와 만주를 연결하는 다리로서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해 착공 2년 만에 완공된 944m의 최신식 다리였다. 중앙에 철도노선을 깔고 양측에 보도가 설치된 이 다리는 선박 출입을 위해서 한가운데는 개폐식(開閉式)으로 만든 당시 동양 제일의 국경 명물이었다. 이로써 만주의 안동(安東)과 봉천(奉天)을 연결하는 안동~봉천선과 경의선의 연결이 가능해져 일제의 만주 지배는 더욱 용이해졌다.
산업기반
조선 최초의 주식회사인 ‘대조선저마제사회사(大朝鮮苧麻製絲會社)’는 개화기 때 생겼다. 이는 조선인에 의해 창립된 회사로 조선산 삼(杉)과 모시로 만든 실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회사였다. 그러나 한국에 본격적으로 회사가 설립되고 공장이 세워진 것은 일제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지배를 시작한 초기에는 주로 경공업부문의 회사가 주류를 이루다가 192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자 경공업에 대한 설비 투자가 점차 중공업 부문으로 이행되기 시작하였다.
1926년 함경도의 부전강수력발전소가 완공되었고, 이듬해에는 그 전력을 이용하는 조선질소비료공장이 설립되어 중공업 투자가 활기를 띠었다.
또한 일본은 1930년대에 들어서서 광산을 개발하고 금속기계 및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였는데, 이는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침략함에 따라 한국이 군수물자를 생산, 공급하는 병참(兵站)기지(基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수리(水利) 사업
병참기지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일제는 ‘산미증식계획’ 등을 추진하며 식량생산의 획기적인 증대를 위한 저수지와 수로 공사 등을 시행했다. 특히 그 대상 지역이 된 곳은 우리나라의 곡창지대인 호남지역에 집중적으로 시행되었다.
종래의 조선의 전답은 거의 천수답(天水畓)이며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보(洑,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수리 시설의 하나. 둑을 쌓아 흐르는 냇물을 막고 그 물을 담아 두는 곳)와 같은 소규모의 저수지를 중심으로 관개를 했었다.
그런데 이런 전근대적인 수리시설 및 관개시설을 가지고는 대규모의 식량증산을 이루어낼 수가 없었으므로 기존의 생산량은 일제가 요구하는 양에 턱없이 모자랐다.
때문에 일본은 저수지 및 수로시설 등을 확충하고 수로변경과 같은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벌여 식량증산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는 공사를 벌였다.
이는 식량증산을 위한 환경조성 공사이며 동시에 식량수탈을 위한 전초작업이기도 했다.
이 역시 일제의 패망과 동시에 시설은 그대로 남아 한국인이 주인이 되어 이용하게 되었으니 일본이 조선을 위해 일을 해준 셈이었다. 모진 시절에는 거의 모든 수확량을 공출로 다 뺏기고 일본을 위해서 농사를 지었으나 그것은 잠시일 뿐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서 농사를 지으면 되는 일이었다. 바로 이것과 관련하여 상제께서 보신 공사가 또 있으니 아래와 같다.
하루는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오주(五呪)를 수련케 하시고 그들에게 “일곱 고을 곡식이면 양식이 넉넉하겠느냐”고 물으시니 종도들이 말하기를 “쓰기에 달렸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다시 가라사대 “그렇다 할지라도 곡간이 찼다 비었다 하면 안 될 것이니 용지불갈(用之不渴)하여야 하리라.“종도들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아시고 상제께서 백지에 저수지와 물도랑의 도면을 그려 불사르시면서 가르치셨도다. “이 곳이 운산(雲山)이라. 운암강(雲岩江) 물은 김제만경(金堤萬頃) 들판으로 돌려도 하류에서는 원망이 없을 것이니 이 물줄기는 대한불갈(大旱不渴)이라. 능히 하늘을 겨루리라. 강태공(姜太公)은 제(齊)나라 한 고을에 흉년을 없앴다고 하나 나는 전북(全北) 칠읍(七邑)에 흉년을 없애리라” 하셨도다.
― 전경 공사 1장 28절
섬진강의 중류(中流)를 운암강(雲岩江)이라고 하는데 섬진강은 길이가 212.3km에 달하며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인 팔공산(八公山)에서 발원하여 진안군 백운면(白雲面)과 마령면(馬靈面) 등에 충적지를 만들고, 임실군 운암면(雲岩面)에서 갈담저수지(정읍시 산내면)로 흘러든다. 이후 남원을 지나 보성강과 합류하고 지리산 남부의 협곡을 지나 경남·전남의 도계(道界)를 이루면서 광양만(光陽灣)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지역의 수리사업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을 살펴보면 상제님의 공사가 증명된다.
상제께서 운암강 물을 김제 만경들판으로 옮기는 공사를 본 결과가 오늘날의 섬진강 댐이다 섬진강 댐이 건설되기 전 우리나라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젖줄은 동진강이었지만 이 동진강은 평소 하천 유량이 절대 부족하여 약간의 한발만 닥쳐도 국가의 식량생산에 큰 차질을 빚어왔다. 그러므로 상제님 말씀처럼 곡간이 찼다 비었다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웃해 있는 섬진강 유역의 풍부한 수원을 동진강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공사가 일제 강점기인 1925년부터 192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진행되었다.
공사의 내용은 임실군(任實郡) 강진면(江津面) 옥정리(玉井里)에 콘크리트로 곡선형 중력식 댐을 건설하였는데 저수량이 6천만㎥에 이르렀다. 이 때의 저수량은 당시 우리나라 최대였으며 이 때의 이름은 운암제였다.
― 전경 권지 1장 17절
어차피 평생 고된 일에 시달리던 노비들에게는 조선시대나 일제시대나 일에 지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안방에 앉아서 노비들을 부리던 양반집 마나님들은 고역이었다. 부역을 나온 사람들은 여종이나 마님이나 다같이 ‘몸빼바지’를 입고 먹는 것도 똑 같았다. 누구는 상전이니 많이 주고 누구는 하인이니 적게 주고 누구는 좋은 음식을 주고 누구는 거친 음식을 주고 할 수도 없었다. 보리 주먹밥이면 같이 보리 주먹밥, 개떡이면 다 같이 개떡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생존 그 자체가 문제였으므로 삶의 질(質)을 문제 삼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일제 말기의 상황이 절박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여자들 속에서도 반상의 구별이 무너지게 되었다.
일제는 특히 사람을 쓰는데 남녀노소(男女老少)을 가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일제가 인도주의적이거나 평등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고 인적·물적 자원을 긁어 가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분명 조선의 유교적 폐습을 무너뜨리려고 조선에 들어 온 것은 아니었다. 아울러 남녀가 평등하다느니,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느니 하는 등의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을 불어넣어 조선의 낡은 의식을 개화시키기 위해서 들어 온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이 조선을 점령한 것은 한반도를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아 세계로 도약하기 위해 들어온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조선 침략은 수백 년간 조선의 발목을 잡고 있던 유교의 폐습을 제거하여 오히려 조선을 돕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일제가 자행한 수탈과 착취의 부산물(副産物)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상제께서 의도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일제에 의해 청산된 과거의 폐습은, 해방 이후 실시된 선거(5·10 선거)에서 제헌국회가 소집되고 제헌국회에 의해 근대적 헌법이 제정되어 대한민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결실이 맺어졌고, 이로써 평등사회가 구현되었다. 역사가 오래되고 유구한 전통을 자랑할수록 과거와의 단절은 어렵다. 인도나 중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렇다. 과거의 낡고 두터운 인습(因習)의 벽을 뛰어넘어 근대화하여 새롭게 문물을 정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조선 역시 수천 년간 이어오던 신분제의 벽을 깨뜨리고 개혁한다는 것은 천지개벽 같은 엄청난 대사건이 아니고는 힘든 일이다.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인 사회구조가 먼저 변해야 따라 변하는 것이지 선구적인 의식만으로 사회구조가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의 경우 그 무겁고 낡은 인습의 탈, 즉 유교의 전헌(典憲)을 뛰어넘는 개혁은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비로소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강압적인 힘에 의해 과거와의 문화적·사회적·경제적·역사적 단절에 의한 것이었으나, 바로 이러한 것들이 상제께서 ‘저희들은 일만 할 뿐이요, 너희들은 편한 사람이 될 것이라’ 하신 뜻이니, 이후로는 상제의 그 뜻을 따라 조선은 상제님의 대의를 이루는 일만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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