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제6회 중봉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백두현
아버지의 참외지게
회사 앞에 일궈 놓은 작은 텃밭에서 참외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구내식당을 경영하는 아주머니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할 요량으로 참외를 심었는데, 출근길마다 얼마나 컸는지 들춰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름 전쯤 계란만하게 달린 참외를 보았는데 그새 누런 것이 제법 모양새를 갖추어간다. 어느 날부터인가 바쁜 출근 시간에 이렇게 남의 밭작물을 훔쳐보는 일에 재미가 붙어가고 있었다. 이 작은 일상이 행복하게 와 닿는 것은 아마도 내 어린 날의 향수 탓이리라.
아버지는 600평 밭에서 얻어지는 참외를 주 소득원으로 다섯 남매를 키우셨다. 그 시절 참외밭에 가면 어린 마음에 노랗게 익어가는 참외가 무던히도 먹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잘 익은 참외를 골라 읍내 과일시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이다. 배꼽이 튀어나온 배꼽참외나, 꼭지부분이 파래서 기형적으로 배만 커진 상품성 떨어지는 참외만이 우리들 차지였다. 그래서 탐스러운 참외를 먹고 싶을 때마다 아버지를 도와드린다는 명목으로 참외 광주리를 나르다가 슬쩍 한두 개 땅바닥에 떨어트려 깨버리곤 했다. 금이 간 참외는 단연 내 차지였다.
그렇게 키워낸 참외를 팔려면 밭에서 시장까지 20리 길을 날라야 했다. 하루에 여섯 지게 분량의 참외가 수확되었는데 모두 아버지 몫이었다. 읍내까지 가는 길이라는 게 아주 좁은 소로여서 나를 수 있는 수단은 지게가 전부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참외 지게를 지고 온종일 밭에서 읍내 과일시장까지 왔다 갔다 하셨다. 그런데 아무리 부지런히 나른다 해도 하루 네 번 이상은 힘들었다. 생산되는 참외는 여섯 지게인데 운반되는 참외는 네 지게뿐이라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식들이 어려 도와드릴 수도 없었고 품을 사자니 품삯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각하신 방법은 두 개의 지게를 한꺼번에 나르는 일이었다. 첫 번째 지게를 지고 1km쯤 앞에 내려놓고 돌아와 두 번째 지게를 지고 2km쯤 가서 돌아오며 두 개의 지게를 번갈아 운반하는 것이다. 두개의 지게를 겹치기로 지고 가면 지게를 바꾸기 위해 돌아오는 시간은 맨몸으로 걸어오기 때문에 그 시간을 휴식시간으로 활용하셨지 싶다.
처음부터 하나의 지게로 20리 길을 가더라도 어차피 1km마다 쉬어야 했기 때문에 휴식시간이 아까워 생각해 내신 방법이다. 그 덕에 하루 여섯 지게를 전부 운반하실 수 있었던 것인데, 내 기준으로 생각하면 아버지는 온종일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의 땀을 자양분으로 이 세상에 뿌리 내려졌다. 20리 길을 쉬지 않고 옮겨졌던 아버지의 눈물겨운 참외지게 덕에 한 인간으로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셈이다.
빈 그릇에 물을 받아놓고 고구마를 키워보면 성장력이 좋은 고구마 싹이 왕성하게 자란다. 그러나 고구마 싹이 몸체에 붙어있는 한, 줄기는 제 어미의 살만 갉아 먹을 뿐 완전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물속에서 빈약한 실뿌리로 허둥대지 않고 흙 속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아야만 모진 바람과 홍수를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줄기가 왕성하고 잎이 무성하다 한들 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다음해를 기약한단 말인가.
고구마란 존재는 제 몸을 썩혀 줄기에게 영양분을 나눠줄 수야 있겠지만 그것으로 부모의 의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힘들더라도 제 몸을 잘라내는 고통을 더해야만 잘려나간 줄기가 땅에 묻혀 새 삶을 찾는다. 내게 있어 아버지의 참외 지게는 잘려지는 고구마 줄기의 고통과 같았다. 내가 거실에서 기른 고구마 싹처럼 아버지는 일생동안 자식들이 무성한 잎으로 장식되기를 소망하며 스스로를 희생하다 가신 것이다.
오늘도 나는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노랗게 익어가는 참외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힘들고 무거웠던 아버지의 참외 지게를 떠올린다. 그럴수록 힘겨웠을 내 아버지의 다리가 자꾸 눈에 밟혀 가슴이 아리다. 몇 날을 뚫어져라 참외를 바라본다고 무엇이 달라질까만, 자식이란 이렇게 뒤늦게야 철이 들어 부모 그리워하게 되는 어리석은 인간임을 어쩌랴. 아무 걱정 없는 줄기와 잎이 어떻게 썩어가는 고구마의 마음을 온전하게 헤아린단 말인가. 제 몸에서 싹을 틔우고 심장을 나눠줘 봐야 깨우치게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나도 이제 세 아이의 아버지다.
<심사평 >
제6회 중봉조헌문학상에도 많은 분들이 작품을 보내왔다. 중봉 선생을 기리는 이 거국적인 사업에 자신의 분신같은 작품으로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중봉조헌문학상이 6회째를 맞이하면서 이제 제자리를 완전히 잡았다는 생각이다. 다양한 경력을 가진 다양한 연령대의 문인들이 응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일간지나 지방신문의 신문춘예 또는 여러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기성문인이 그야말로 농익은 쟁쟁한 솜씨를 보여주었고, 중고생들을 비롯해 이제 막 습작을 시작한 문인 지망생들의 패기어린 상상력도 상당히 수준급이었다. 특히 이번 공모에 중고생들의 참여가 늘었다는 점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중봉 선생을 역사책으로만 만나다가 시와 수필이란 ‘다른’ 길을 통해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학상 공모의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사료에 의존한 시각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중봉 선생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자리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고 이 문학상 공모가 중봉 선생만을 소재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상이 경향각지에 숨어있는 문학의 고수를 호출하여, 그들이 문학의 향기를 널리 전파하기를 바라는 의도도 있으므로 중봉 선생을 다루지 않았다고 논외로 치부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대상 수상작은 격론 끝에 이병철의 시 <의병의 춤>으로 결정하였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이름 없는 의병이 있다. 이 시는 죽음보다 치열한 전장에서 외롭게 쓸쓸하게 죽어간 의병들을 위헌 헌시(獻詩)다. 이름 한 자, 명분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한 그러나 죽어서 역사의 주인공이 된 백성들의 위한 진혼곡인 것이다. 서사적인 형식의 이 시는 절제된 시어와 긴장감 있는 비유로 보여줌으로써, 우리 문학상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이다.
우수상에는 백두현의 수필 <아버지의 참외지게>와 이용호의 시 <중봉일기5-배롱나무에 물들다>을 각각 선정하였다. 작년에 이어 이번 공모에서도 수필의 수준은 시에 비해 전반적으로 떨어졌다. 중봉 선생을 소재로 한 작품들의 경우 그 정성은 대단하지만, 실제 역사와 문학적 형상화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었다.
사료의 나열에 그쳐, 수필이 갖는 새로운 의미화에 대부분 실패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뛰어난 문장력이나 문학적 형상화를 보여준 작품도 적지 않았지만, 삶(생활)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포착하는데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그런 측면에서 백두현의 수필 <아버지의 참외지게>는 새로운 의미화와 문학적 형상화의 면에서 다른 작품들을 압도했다. 이 작품을 결정하는데 이의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우수상으로 또 한편 결정한 것은 이용호의 시 <중봉일기5-배롱나무에 물들다>이다. 이 시는 배롱나무의 생장을 통해 지난 역사에 대한 아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진실과 희망을 기약한다는 점을 절제된 시어와 창의적인 비유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이 <중봉조헌문학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문학적 역량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시 한번 성원해주신 문인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다.
첫댓글 심사평과 함께 좋은 수필 잘 읽어 보았습니다.